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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석, 미투, 극작가, 연출가, 연세대 철학과, 극단 목화,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교수

Jobs 9 2022. 11. 29.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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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황이선과 연극배우 박영희가 성추행 사실을 털어놓았다.

황이선 박영희 성추행 폭로
2002년 나는 서울예대 극작과에 입학했다. 술자리에서 교수님 옆에 앉아야 했다. 처음엔 손을 만졌다. 이내 허벅지를 만졌다. 팔뚝 안 연한 살을 만지다 꼬집기도 했다. 2003년 2학기 차 안에서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점점 중요부위로 손이 다가왔다.  흐물흐물 손이 빠져나갔다 들어왔다
갈비집 상 아래에서 나와 그의 허벅지·사타구니를 움켜잡고 꼬집고 주무르던 축축한 선생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 일을 겪은 후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나 역시 서지현 검사처럼 그 순간이 환각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태석의 공식입장 표명은 없었고, 현재 잠적한 상태

 

 

배우 이세랑이 연극계의 거장 오태석의 성추행을 폭로했다.
이세랑은 지난 21일 자신의 SNS에 미투(Me Too) 및 위드 유(With You) 운동 동참을 알리면서 극단 목화의 오태석 대표의 성추문 목격 내용을 공개했다.

이세랑은 "저는 1998년에 극단 목화에서 단원으로 있었습니다"면서 "들어가자마자 조그만 역이라도 주셔서 그저 감사했고 오태석 선생님을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울 만큼 거대해 보였습니다"고 했다.

그녀는 "그러나 회식 때 본 오선생님은 제 눈을 의심하게 했습니다. 수십 명의 단원들과 함께 한 밝은 식당에서 여자 선배들을 옆에 앉혀놓고 아주 당연한 듯 등에 손을 넣어 맨살과 속옷을 만지고 팔 안쪽에 여린 살을 꼬집는 것입니다. 여자선배는 가만히 있다가 손이 배까지 들어오니까 웃으면서 빼내더군요"라고 밝혔다.

이어 "이때 남자선배들은 모두들 다른 곳을 보고 있던가 보고도 아무일도 아닌듯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오선생님의 그런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그냥 장난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 후에도 회식이면 자주 목격되었습니다"고 덧붙였다.

이세랑은 "어떤 땐 하지 말라는 여자선배의 말이 묵살되기도 했습니다"며 "극단 막내였던 저는 지적할수도 반기를 들수도 없으니 그저 옆자리를 피하는게 최대한 할수 있는 전부였습니다"고 토로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성적인 부분을 강요하는 선배는 없었다면서, 뒤로 빼주고 본인이 옆에서 그 액받이를 하는 선배는 있었다고 폭로했다.

이세랑은 "그러나 모두들 그 행동을 묵인하고 받아준건 사실입니다. 저는 8개월가량 비교적 짧은 극단 생활로 더 이상 직접 목도한 사건은 없었으나 이번에 밝혀진 피해사례들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고 했다.

이세랑은 "저는 직접적으로 당하진 않았지만 목격했던 사람으로 어렵게 피해를 세상에 알린 분들께 작게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면서 "오태석 연출은 하루 속히 속죄하길 바랍니다. 피해자 분들의 용기에 깊은 응원을 보냅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여배우는 남자들의 노리개가 아닙니다"면서 미투 운동을 독려했다.

한편 오태석은 작가 겸 연극 연출가로 극단 목화(현 목화레퍼터리컴퍼니)의 대표다. 여러 연극을 연출해 명성을 쌓았다. 그는 최근 한 여배우가 SNS를 통해 'ㅇㅌㅅ'이라는 이니셜과 함께 나온 성추행 피해 고백 글을 게재한 후 가해자라는 추측 속에 성추문 파문에 휩싸였다.



# ME TOO # WITH YOU

저는 1998년에 극단 목화에서 단원으로 있었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조그만 역이라도 주셔서 그저 감사했고 오태석 선생님을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울 만큼 거대해 보였습니다.

그때 함께 했던 공연들은 독립운동,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이었으니 자부심 또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회식 때 본 오선생님은 제 눈을 의심하게 했습니다.

수십명의 단원들과 함께 한 밝은 식당에서 여자 선배들을 옆에 앉혀놓고 아주 당연한듯 등에 손을 넣어 맨살과 속옷을 만지고 팔 안쪽에 여린 살을 꼬집는 것입니다. 여자선배는 가만히 있다가 손이 배까지 들어오니까 웃으면서 빼내더군요.

이때 남자선배들은 모두들 다른 곳을 보고 있던가 보고도 아무일도 아닌듯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오선생님의 그런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그냥 장난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 후에도 회식이면 자주 목격되었습니다.

어떤땐 하지말라는 여자선배의 말이 묵살되기도 했습니다.

극단 막내였던 저는 지적할수도 반기를 들수도 없으니 그저 옆자리를 피하는게 최대한 할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아롱구지 소극장 로비엔 선생님이 잠깐 쉬실수 있는 간이침대와 책상이 있는 작은 방이 있었는데 그 곳 청소 당번일때 선생님이 잠깐 옆에 앉으라고 하면 싫다고 도망가며 혹시나 만질까봐 겁이 났었습니다.

다행히 저에게 성적인 부분을 강요하는 선배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뒤로 빼주고 본인이 옆에서 그 액받이를 하는 선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그 행동을 묵인하고 받아준건 사실입니다.

저는 8개월가량 비교적 짧은 극단 생활로 더 이상 직접 목도한 사건은 없었으나 이번에 밝혀진 피해사례들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이윤택 연출의 문제가 워낙 커서 오태석 연출의 일들이 묻힐까 걱정이 됩니다.

저는 직접적으로 당하진 않았지만 목격했던 사람으로 어렵게 피해를 세상에 알린 분들께 작게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오태석 연출은 하루 속히 속죄하길 바랍니다.

피해자 분들의 용기에 깊은 응원을 보냅니다.

이번 미투운동으로 여배우에 대한 천박한 생각에서 제발 벗어나길 바랍니다.

여배우는 남자들의 노리개가 아닙니다.

 

 

 

 

오태석(吳泰錫, 1941년 ~ )은 대한민국의 극작가·연출가이다.

출생 및 생애
1941년 충남 서천군 서천면 선암리에서 태어나 1964년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단막극 《웨딩드레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장하였다. 전쟁의 트라우마 ‘전통의 현대화’의 대가 오 연출은 잃어버린 우리 것을 공연무대를 통해 되살리는 일에 매진해 왔다. 일제강점, 바로 이어진 6ㆍ25전쟁, 산업화와 급속한 경제발전 등으로 지난 100년간 우리 문화는 단절돼 왔다. 이를 복원하는 일은 전쟁 이전 세대가 지닌 일종의 부채의식 같은 거였다. 

어린 시절 서울 한복판에서 겪은 참상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부친은 국내 2기 변호사로, 경무대(청와대 옛 명칭) 법무관이었다. 6ㆍ25가 터졌지만 어머니가 해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3남1녀인 형제자매와 할머니까지 일가족은 피란을 가지 못했다. 한 달 지난 7월 중순에는 남대문 5가에 있던 집으로 인민군이 들이닥쳐 총구를 들이대고 아버지를 끌고 갔다. 그게 부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장남인 오 연출은 당시 나이 10살이었다. 갓난아이까지 4남매만 남기고 하루 아침에 남편과 생이별한 모친의 나이가 겨우 30을 갓 넘을 때였다. 전쟁으로 인해 한 가족극이 희극에서 비극으로 예고 없이 전환된 것이다. 친모는 통일과 가족상봉의 염원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5년 전에 세상을 하직했다. 종손인 그만 할머니를 따라 본향인 아룽구지(충남 서천의 한산면)로 피란을 떠났다. 50일을 걸어서 무전취식하며 당도한 집성촌에서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3년을 보냈다. 시골에서 보낸 3년은 치유의 시간이었다. 그는 “전쟁이란 걸로 인해 세상이 바뀌는 걸 봤지만, 거머리 떼고 메뚜기 잡으면서 자연이란 더 큰 것을 경험했다”고 떠올렸다. 

그의 작품 전반에 등장하는 세시풍속을 체화한 시기이기도 하다. 굿, 산대놀이, 판소리, 무가, 설화 등에 대한 원초적인 관심이 할머니와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DNA에 뿌리내린 시기다.

당시 읍내 등기소에서 유지 120여명을 한꺼번에 불태워 죽인 실제 사건, 읍내 저잣거리에서 장정들이 죽창을 들고 돌아다니던 풍경 등 10대 초반의 기억은 훗날 ‘자전거’(1983년)의 모티브가 됐다.

학력
연세대학교 철학과

수상내역
1967 조선일보 신춘문예 웨딩드레스당선
1967 한국일보 장막희곡부문 가작
1967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서울 연극제 대상
1968 국립극장, 경향신문 공모 환절기 당선
1987 서울연극제 대상
1992 제28회 동아연극상 대상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희곡부문
1994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최우수예술가
2004 제36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2005 제15회 호암상 예술상
2012 제48회 동아연극상 대상, 연출상

 

경력사항
1963~1965 희로무대 창단
1972 동랑레파토리 극단 연출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교수
1984 극단 목화레파토리컴퍼니 창단
1990 목화레파토리극장 충동 1,2 개관
1998 성좌극장 대표
1999.04 대통령 자문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
극단 목화레퍼터리컴퍼니 대표

 

주요작품
《낙엽》(1955)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1956)
《불행한 시간》(1962)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1962)
《백년 동안의 고독》(1967)
《순박한 에렌디라와 포악한 할머니의 믿을 수 없이 슬픈 이야기》(1972)
《족장의 가을》(1975)
《예고된 죽음의 이야기》(1981)
《콜레라 시대의 사랑》(1985)
《미로 속의 장군》(1989)
《사랑과 다른 악마들》(1994)
《어느 납치 소식》(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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