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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철학 논고, 비트겐슈타인

Jobs 9 2023. 8. 2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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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철학 논고, 論理哲學論考,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

 

오스트리아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생전에 출판했던 유일한 철학서이며, 그의 초기 사상이 아포리즘(警句)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버트런드 러셀이 쓴 친서가 서문으로 존재한다.   

"논고"는 다양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파악하고 자연과학에 제한을 두려는 것이 그 중 일부에 해당한다. 이 책은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20세기 중 크게 중요한 철학적 작업으로 여겨진다. G.E. 무어는 당시 비트겐슈타인에게 "논고"의 라틴어 이름으로 바뤼흐 스피노자에 대한 경의를 담아 그의 저서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을 본딴 이름을 붙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 중 "논고"에 대한 노트를 저술했고 1918년 여름 전역할 당시에 그것을 완성했다. "논고"는 1921년 독일에서 처음으로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고, 루돌프 카르납이나 프리드리히 바이스만과 같은 빈 학파의 논리실증주의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또 러셀의 저술 "논리적 원자론에 관한 철학(The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에는 러셀 본인이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배웠던 관념들이 내용으로 제시되어 있다.

"논고"는 근엄하고 간결한 작법으로 쓰여져 있다. 이 책에는 논증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선언적 진술이나 문구들로 가득 차 있다. 진술들은 7개의 주요 기본 명제들로 순서가 매겨져 있으며, 각각 명제에는 하위단계로서 해당 명제에 대한 의견이나 보충설명이 들어가 있다. 논고는 모두 합해서 총 526개의 순번진술들로 구성되어 있다.

비트겐슈타인 사후에 출판된 후기 저작 "철학적 탐구"에서 그는 "논고"에서 보였던 자신의 초기 사유들을 비판하고 있다.

명제(판단의 내용을 이루는 것으로, 문장·언어에 의해 표현되는 것)의 논리적 구조와 논리적 추리의 성질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되며, 이어 지식론, 물리학의 제 원리, 윤리학의 차례로 다루고 끝으로 종교 문제를 논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개개의 원자적(요소적) 사실은 판단(명제)에 의해 '모사(模寫)'된다. 꽃이 아름답다는 사실이 '꽃은 아름답다'는 판단으로 모사되고 여기서 '꽃' '은' '아름답다' 등의 여러 개념이 형성된다. 개념이 먼저 있고 이것이 결합되어 판단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원자적 사실의 모사인 판단의 내용(명제)은 상호 독립된 원자적 명제이며, 이것이 '논리적 원자'가 된다. 원자적 사실이 모두 바르게 모사되고 원자적 명제로서 파악되면, 이러한 논리적 원자를 구성함으로써 세계는 완전히 인식된다. 그런데 명제(命題)는 언어에 의해서 객관화되는 것이므로 세계의 인식은 바로 언어의 조작, 곧 언어의 논리적 분석인 것이다. 따라서 세계를 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내용
책 속의 7개의 주요 명제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사고는 뜻이 있는 명제이다.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함수이다. (요소 명제는 자기 자신의 진리 함수이다.)
진리 함수의 일반적 형식은 [p, ξ, N(ξ)] 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철학에 미친 영향
출판됐을 당시, 비트겐슈타인은 <논고>가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결해왔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후에 이 관점을 철회하고, 그가 후에 "철학적 탐구"를 착수하도록 하였다. 

이 책은 10대 켐브리지 수학자와 철학자 프랭크 플림턴 램지의 도움을 받아 칼스 케이 오그던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 램지는 후에 오스트리아에서 비트겐슈타인과 만났다. 해석의 문제는 그 개념이 정확하게 기술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었고,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용어 사용과 그의 사상을 단어로 해석하는 것을 고려했을 때, 해석에서의 문제는 그 개념들의 정확한 기술이 어렵게 만들었다. 

"논고"는 빈 학파의 사람들과 그중에서도 특히 루돌프 카르나프와 모리츠 슐리츠의 관심을 끌었다. 그 학파는 "논고"를 함께 한 줄 한 줄 소리 내어 읽으며 몇 개월을 보냈다. 슐리츠는 마침내 비트겐슈타인이 그가 빈으로 왔을때 빈 학파의 회원들을 만나 "논고"에 대해 토론할 것을 설득하였다.(그는 그때 건축가로 일하고 있었다.) 빈 학파의 논리실증주의자가 "논고"의 진가를 알아보았지만, 그들은 7번 명제를 비롯한 마지막 구절이 혼란을 유발한다고 주장하였다. 카르나프는 이 책이 중요한 통찰력을 포함하고 있다고 극찬하였지만, 결론 부분의 얘기들은 무시할 것을 사람들에게 권장하였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슐리츠가 책의 마지막 문장들을 완전히 오해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였다. 

최근에는 2000년부터 착수된,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해석을 모아놓은 The New Wittgenstein에서 많은 해석들이 나왔다. 소위 결정적 읽기(resolute reading)라고 불리는 방법은 많은 논쟁과 토론은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읽기 방법의 주된 주장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윤리학과 철학을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신령스러운 분야라고 격하시킨 언어에 대한 이론적인 기술을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은 치료에 목표를 두고 있다. 책에 있는 명제를 함께 연구하며 독자들은 언어는 모든 인간의 요구에 완벽하게 부합하며 철학은 우리의 언어의 논리에 대한 혼동적인 관계에 달려있음을 깨달았다. "논고"가 무엇인가를 없애는 것을 추구한다는 혼란은 혼동을 유발하는 이론이 아니며 오히려 이러한 이론의 필요성이 혼란을 유발하는 것이다.

"논고"의 방법은 다른 모든 철학의 영역에 퍼져있는 언어의 논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해달라는 요구를 떨쳐냄으로써 독자들이 이미 그가 익숙해져 있는 언어의 논리와 효과를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윤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제시할 때 수반되는 혼란을 없앨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빈 학파의 회원들을 전부 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중 슐리츠, 카르나프 등 몇 사람들만 만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그는 철학에 대해 논하는 걸 거부하였고, 의자를 벽을 향해 돌리고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시를 읊으면서 미팅을 끝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카르나프가 그의 허락 없이 그의 아이디어 중 일부를 사용한 것을 알고 난 후에 이 학파의 회원들과의 형식적인 관계를 깼다.

예술에 미친 영향
"논고"는 1992년에 나온 헝가리의 영화감독 페테르 포가치의 주제였다. "Wittgenstein Tractus"라는 32분 간의 작품은 "논고"와 비트겐슈타인의 다른 작품에서의 인용구를 특징으로 삼았다. 

 

 


 

비트겐슈타인 생전에 출간된 유일한 저작으로 그의 전기 사상이 담겨 있는 책이다. 언어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통해 세계와 사고, 언어의 가능성과 그 한계를 해명하고 우리의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드러내고자 한다. 명제의 논리적 구조와 논리적 추론의 본성에 관한 고찰로부터 심리학, 수학, 철학, 미학 등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거쳐 마침내 ‘신비스러운 것’,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논의에까지 이른다. 이 책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적 동지나 다름없는 러셀의 서문이 부록으로 실려 있어서 독자의 이해를 도와준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대전의 포화 속에서 이 글을 썼으며, 100여 쪽에 이르는 이 짧은 책을 통해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여 철학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엄청난 철학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철학과 삶, 실천을 고민한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관심을 불러 모으는 철학자로 부각시킨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의 삶이 지닌 실존적 태도와 신비로움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독창적이고 고독한 천재가 보여줄 수 있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19세기 말 세기 전환기의 문화가 활발하게 꽃피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귀족적이고 예술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형 파울Paul이 1차 대전에서 오른팔을 잃게 되자 라벨Maurice Ravel이 그를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훗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 중 상당액을 릴케Rainer Maria Rilke, 트라클Georg Trakl 등 여러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데 썼다. 철강 부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실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공학도의 삶을 계획하다가 당시 저명한 철학자였던 프레게Gottlob Frege와 러셀Bertrand Russell의 인정을 받아 철학자로 방향을 전환했다. 자신의 삶을 극한적 상황에 던지기 위해 1차 대전에 참전해 참호와 포로수용소에서《논리-철학 논고》를 썼으며, 이 책으로 제도적, 체계적인 철학 교육을 받지 않은 그는 일약 유망한 철학자로 주목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철학을 그만두고 시골 초등학교 교사, 수도원 정원사, 건축가 등등을 전전하다가 철학계에 복귀하여 자신의 후기 철학을 전개해나갔다. 
그는 매우 간결하고 명료한 어휘와 문장으로, ‘소견들’이라 부른 짤막한 고찰을 통해 여러 철학적 문제들을 자신의 독창적 관점에서 중첩적으로 담아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그것을 읽는 독자 역시 구성적으로 사유하기를, 즉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하기'를 요구한다. 그는 언어와 논리의 가능성과 한계를 다루면서도 그 작업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신의 철학적 과제를 궁극적으로는 ‘윤리적’이라고 규정한다. 철학적 문제는 철학 자체의 논증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나아가 실천의 문제를 고민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과 현대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언어적’ 전환을 시도함으로써 20세기의 강력한 철학사조인 분석철학의 전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언어의 지시적, 재현적 기능만을 중시하는 기존의 도구적 언어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철학 영역으로서의 언어를 추구한 현대 언어철학(의 여러 갈래들)의 선구자다. 그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논리-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 철학에서 그는 언어와 세계의 구조적 동일성에 근거하여 언어를 구성하는 명제가 세계의 구성 요소인 대상과 사태에 대응되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은 슐리크Moritz Schlick, 카르나프Rudolf Carnap 등이 주도한 빈 학파Wiener Kreis가 전개한 논리실증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의 후기 철학은 언어가 세계를 반영한다는 언어의 본질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언어의 사용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는 언어놀이 개념을 도입한다. 이 관점은 오스틴John Austin, 그라이스Paul Grice 등 일상언어 분석에 집중한 옥스퍼드 학파를 비롯한 화용론적 언어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의 제자들인 맬컴Norman Malcolm, 앤스콤G. E. M. Anscombe, 폰 리히트Georg von Wright 등은 그의 사후에 미국과 영국, 북유럽 등 각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파급시켰다. 그는 비단 언어철학적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 언어와 세계/실천의 관계 등에 주목함으로써 언어철학의 경계를 넘어선 철학자다. 그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언어의 존재와 그 의미에 회의의 시선을 보내고 언어의 자율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현대 문학과의 관련성 속에서 연구되기도 한다. 또한 그의 철학은 해석학, 현상학, 정신 분석, 과학 이론, 인류학, 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학문영역과 사조와의 관련성 속에서 연구되기도 한다. 더욱이 각기 고립적으로 전개되어온 이들 각 영역과 사조를 포괄하는 보다 넓은 맥락에서 그의 철학이 연구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여러 학문적 흐름의 진지한 상호 이해와 비판적 교류의 물꼬를 튼 선구자로 볼 수 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철학이 언어분석철학이라는 사조를 낳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이 분야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는 1889년 4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1911년부터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과 교우하며 논리학과 수학의 기초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1939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철학교수가 되었으며 1951년 4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생전에는 전기 사상을 대표하는 『논리-철학 논고』(1921)만이 철학서로서 유일하게 출판되었으며, 사후에 가서야 그의 후기 대표작인 『철학적 탐구』(1953)를 비롯하여 『청색 책·갈색 책』(1958), 『수학의 기초에 관한 소견들』(초판 1956, 3판 1978), 『철학적 소견들』(1964), 『쪽지』(1967), 『철학적 문법』(1969), 『확실성에 관하여』(1969), 『심리학의 철학에 관한 소견들 I, II』(1980), 『문화와 가치』(초판 1980, 수정판 1994) 등이 출판되었으며, 『유고집』(2000)이 시디롬으로 발행되었다. 이외에도 『미학과 심리학 및 종교적 믿음에 관한 강의와 대화』(1966), 『수학의 기초에 관한 강의』(1976), 『철학적 심리학에 관한 강의』(1988) 등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강의록이 여러 권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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