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고창전투, 후삼국시대, 경순왕, 고려, 후백제

Jobs 9 2021. 3. 31.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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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고창군(古昌郡)에서 경순왕(敬順王) 4년(930년)에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

고려는 고창전투(古昌戰鬪)에서 후백제의 시랑 김악(金渥)을 사로잡았고, 죽인 사람의 수가 8,000명이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가 대승을 거둠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다. 이후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싸움에서 입장이 불분명했던 안동·청송 일대의 30여 고을이 잇따라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곧이어 명주(溟州)주 02)부터 흥례부(興禮府)주 03)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110여 성(城)이 역시 고려에 귀부하였다. 이에 고려는 이 전투에서 공이 많았던 김선평(金宣平), 권행(權行 또는 幸), 장길(張吉)에게 대광(大匡)과 대상(大相)의 관계(官階)를 주어 포상하였고, 고창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다.

역사적 배경

후삼국시대의 패권을 다투는 격전지로는 안동과 합천 지역을 들 수 있는데, 왕건(王建)과 견훤(甄萱)은 이 두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920년 보마군(步馬軍) 1만인으로 대야성(大耶城)주 04)을 쳐 함락시킨 견훤은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주 05)으로 옮겼다. 다급한 신라경명왕(景明王)은 아찬 김률(金律)을 고려에 파견해 구원을 청하였다.

그 뒤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안동·상주 지역에서의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는 열기를 더해갔는데, 고려가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다가 925년 잠시 화친을 맺어 전투를 그쳤다. 이것은 견훤이 아들 수미강(須彌强)에게 대야성·문소성(聞韶城)주 06)의 군사를 이끌고 조물성(曹物城: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상주 지역)을 공격하게 했으나, 성중의 병정이 왕건을 위해 지키므로 이기지 못하고 아무런 승산 없이 대치해오다 서로 인질을 교환하고 강화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26년 왕건에게 보낸 견훤의 질자 진호(眞虎)가 죽자, 견훤은 왕건의 질자 왕신(王信)을 죽이고 다시 고려를 공격하였다. 927년 견훤은 근품성(近品城)주 07)을 공취하고, 고울부(高鬱府)주 08)를 습격하였다. 이어 경주로 진격해 신라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왕의 족제(族弟) 김부(金傅)를 세워 왕(敬順王)으로 삼았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공산(公山)에서 견훤과 결전했으나, 크게 패해 신숭겸(申崇謙)·김락(金樂) 등이 전사하였다. 왕건은 겨우 몸을 빼어 달아나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듬해 견훤은 강주(康州)를 공격해 3백여 인을 죽이고, 부곡성(缶谷城)주 09)을 공격해 1천여 인을 참살하였다.

경과 / 결과

이렇듯 강한 견훤의 세력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것이 929~930년의 고창전투이다. 그 해 7월견훤은 갑병(甲兵) 5천여 인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했고, 왕건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성주 홍술(洪述)을 전사시켰다. 견훤은 계속해서 고창군으로 밀려들었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승산이 없어 보였던 왕건에게 크게 패해 8천여 인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다음날 견훤은 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해 빼앗고, 그 백성을 전주로 옮겼으나 크게 타격을 받은 처지였다.

의의와 평가

왕건이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고창 지방의 재지호족(在地豪族)들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창전투는 한반도 재통일(再統一)의 최종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투였으므로, 패배한 후백제는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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