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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1884년,개화당,완전 자주독립,근대화, 김옥균,박영효

Jobs 9 2021. 3. 30.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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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고종 21) 개화당(開化黨)이 청국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일으킨 정변.

김옥균(金玉均)을 중심으로 하여 187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개화당은 개항 후 세력을 증대시키면서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여러 가지 자주 근대화 개혁을 추진해 왔으나, 1882년 7월 임오군란으로 인해 커다란 장애에 부딪치게 되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민씨 외척 정권이 붕괴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민씨 수구파는 청국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청국은 한림원학사 장패륜(張佩綸)의 ‘동정선후육책(東征善後六策)’이라는 건의안을 채택하여 이 기회에 군대를 파견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한 다음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屬邦化)’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청국은 3,000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주둔시키고, 집권자이며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을 청국 군함에 초청하여 놓고는 청국으로 납치하여 보정부(保定府)에 유폐하였다.

청국은 대원군 정권을 붕괴시킨 다음 민씨 외척 정권을 다시 수립하였지만 청군을 철수시키지 아니하며 채, 무력을 배경으로 허구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속방화를 위한 적극간섭정책을 자행하고 조선의 자주 독립권을 크게 침해하였다.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 장수 오장경(吳長慶)과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병권을 장악하고, 재정 고문으로 파견된 진수당(陳樹棠)은 재정권을 장악했으며, 이홍장이 파견한 묄렌도르프(Mӧllendorff, P.G.)는 해관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외교권까지 장악하려 하였다.

당시 청국이 조선의 독립을 얼마나 침해했는가는 다음의 몇 가지 사례에서 잘 나타난다. 청국은 임오군란 진압 직후인 1882년 음력 8월 28일 민씨 외척 정권에게 압력을 가하여 가장 불평등하고 많은 특권을 허용하도록 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게 하고 전문(前文)에 조선을 청국의 ‘속방(屬邦)’이라고 써넣었다.

심지어 재정 고문 진수당은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라는 구절을 넣은 방문(榜文)을 공공연히 남대문에 붙이기까지 하였다.

또한, 청국은 조선 정부에 대하여 “무릇 외교에 관한 일 일체를 청국에 문의하라”고 지시했으며, 청장 오장경은 고종을 면전에서 협박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서울에 주둔한 청군의 행패도 극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국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의 개화 정책과 개화 운동이 궁극적으로 청국으로부터의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 보고 온갖 방법으로 개화당을 탄압하고 개화 운동을 저지하였다. 그 결과 김옥균 등 개화당의 정치적 지위는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민씨 수구파는 임오군란에 의해 정권이 한번 붕괴되었다가 청국의 구원으로 재집권하게 되자, 청국의 조선속방화정책에 순응하여 나라의 독립이 크게 침해되고 자주 근대화가 저지되는 것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였다.

결국 갑신정변의 원인은 청국의 조선 자주독립의 침해와 조선 개화당의 자주근대화정책에 대한 청국 및 민씨 수구파의 저지와 탄압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개화당은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정책과 개화 정책에 대한 탄압에 대하여 단호하게 무장 정변의 방법으로 대항해서 나라의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달성하려 한 것이다.

1882∼1884년경 조선의 사회정치세력은 ① 급진개화파(개화당) ② 온건개화파 ③ 민씨 수구파 ④ 대원군수구파 ⑤ 위정척사파 등 5대 세력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1884년의 갑신정변은 5대 세력 중에서 ①급진개화파가 ③청국과 결탁한 민씨 수구파에 대항하여 일으킨 정치투쟁이었다.

경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청군을 몰아내고 나라의 완전 독립을 이루기 위해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기로 하고, 1883년부터 무장 정변을 모색하며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첫째, 박영효(朴泳孝)는 1883년 3월 한성판윤에서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좌천되자, 그 곳에서 약 500명의 장정을 모집하여 신식 군대를 양성하였다.

둘째, 윤웅렬(尹雄烈)은 1883년 1월 함경남병사(咸鏡南兵使)로 있으면서 북청(北靑) 지역의 장정 약 500명을 모집하여 신식 군대로 양성하였다.

셋째, 김옥균 등이 일본에 유학시킨 서재필(徐載弼) 등 14명의 사관 생도들이 1884년 7월 귀국하여 갑신정변의 중요한 지휘 무력이 되었다.

넷째, 김옥균은 정변을 준비하기 위해 43명으로 이뤄진 비밀무장조직 충의계(忠義契)를 만들어 신복모(申福模)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다. 개화당은 이와 같이 약 1,000명의 정변 무력을 양성하였다.

1884년 봄부터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안남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의 조짐이 짙어지자 청국은 1884년 5월 23일경 서울에 주둔시켰던 3,000명의 청군 중 1,500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켰다. 그 결과 서울에는 1,500명 청군만이 남게 되었다.

그 후 1884년 8월 발발한 청불전쟁에서 프랑스 함대가 청국의 푸젠함대[福建艦隊]를 격파하는 등 전쟁 상황이 청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김옥균 등 개화당은 정변을 일으킬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1884년 9월(음력 8월) 정변을 단행한 것을 결정하였다. 당시 청국이 안남전선에 묶이어 조선에서 대규모 군사 행동으로 전선 두개를 만들 여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김옥균 등 개화당의 정변 결정이 전적으로 개화당의 독자적 결정에 의하여 주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개화당의 독자적인 계획 하에 정변을 단행하기 위한 결정이 내려져 본격적인 준비가 진행되는 시기에 본국에 갔다 1884년 10월 30일 서울로 돌아 온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郎)는 종전 개화당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인 호의를 보이면서 접근해 왔다.

이에 김옥균 등 개화당은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고 청군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측의 호의에 응하였다. 그래서 일본측으로부터 공사관 병력 150명과 일화 3백만 엔을 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개화당은 일본군의 소임에 대해서 왕궁 호위와 청군에 대한 방비만을 분담하고, 국내 수구파 제거와 내정 개혁에는 관여하지 않으며, 이것은 오직 개화당이 맡을 것을 요구하여 일본측의 동의를 얻었다.

개화당은 마침내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홍영식(洪英植)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우정국 중앙사무소와 부속건물들의 당시 사진

 

개화당은 뒤이어 곧 신 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여러 단계의 인사 발령이 있었으나, 최종적인 신 정부의 각료는 영의정 이재원(李載元)주 01), 좌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겸 좌포장(前後營使兼左捕將) 박영효, 좌우영사 겸 대리외무독판(左右營使兼代理外務督辦) 및 우포장(右捕將) 서광범(徐光範), 좌찬성 겸 우참찬(左贊成兼右參贊) 이재면(李載冕)주 02),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신기선(申箕善), 예조판서 김윤식(金允植), 병조판서 이재완(李載完)주 03), 형조판서 윤웅렬, 공조판서 홍순형(洪淳馨)주 04), 호조 참판 김옥균, 병조 참판 겸 정령관(兵曹參判兼正領官) 서재필, 도승지 박영교(朴泳敎) 등이었다.

신 정부 각료의 구성은 개화당 요인과 국왕 종친의 연립내각으로 되어 있었다. 개화당으로서는 신 정부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임시적이라도 종친을 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화당의 소임 분담은 개화당 대표(좌의정)에 홍영식이 추대되고, 재정은 김옥균, 군사는 박영효와 서재필, 외교는 서광범, 국왕의 비서실장 책임은 박영교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개화당의 신 정부는 12월 5일 새로운 개혁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개화당은 동시에 국왕의 이름으로 미국공사·영국총영사·독일영사 등 각국 외교관들을 초치하여 신 정부의 수립과 개혁정치의 실시를 알렸다.

개화당의 정변에 놀란 청군 측은 12월 5일 개화당의 지지자로 위장한 심상훈(沈相薰)을 경우궁으로 들여보내 왕후 민씨(이후 명성황후로 추존)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그들의 계획을 전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청군의 계획을 알게 된 왕후는 경우궁이 좁아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며 창덕궁으로 환궁을 적극 주장하자 국왕도 이를 지지하였다.

김옥균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 방어에 극히 불리한 점을 들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였지만, 고종의 명에 거역할 수 없어 경우궁 옆의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桂洞宮)으로 국왕과 왕후의 거처를 옮겼다. 이곳은 경우궁보다 넓었으나,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도 창덕궁보다는 방어가 유리한 곳이었다.

그런데 왕후는 계속해서 창덕궁 환궁을 요구하였고 국왕은 또한 왕후를 적극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은 끝까지 방어에 불리하다는 이유를 들어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일본군 병력이면 청군의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12월 5일 오후 5시 국왕과 왕후의 거처는 창덕궁으로 옮겨졌다.

개화당의 국왕에 대한 호위는 경우궁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왕을 중심에 넣고, ① 내위(內衛)는 개화당의 장사들(충의계 맹원들과 사관생도 약 50명) ② 중위(中衛)는 일본군(약 150명) ③ 외위(外衛)는 조선군 친군영 전후영병(약 1,000명)으로 하여금 3중으로 방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창덕궁이 너무 넓어 개화당은 극히 불리한 입지적 조건에서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정변을 일으켜 신 정부를 수립한 개화당은 그들의 새로운 개혁 정치의 지침인 혁신 정강을 제정, 공포하였다. 갑신정변의 혁신 정강은 고종이 계동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긴 12월 5일 저녁에 승정원을 진선문(進善門) 안방에 설치하고, 김옥균의 주도하에 좌의정 이재원, 우의정 홍영식, 서리독판교섭통상사무 서광범, 병조판서 이재완, 좌우영사 박영효, 호조참판 김옥균, 도승지 박영교 등 신 정부의 주요 대신급들이 협의하여 결정하였다. 여기서 결의된 것을 우승지 신기선으로 하여금 청서하게 하여 홍영식이 국왕에게 상주하였다.

갑신정변의 혁신 정강은 12월 5일 저녁부터 12월 6일 새벽까지 식사도 거른 채 밤을 새워 협의되어, 6일 오전 9시경에 국왕의 전교 형식(傳敎形式)으로 공포되고 서울 시내의 요소에 게시되었다. 또한, 이날 오후 3시 고종이 개혁 정치를 천명하는 조서(詔書)를 내려서 공포한 정강의 실시를 선언하였다.

혁신 정강의 조항은 상당히 많아 일본인의 기록에는 80여 개 조항에 달했다고 하나, 현재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은 김옥균의 『갑신일록(甲申日錄)』에 수록되어 있는 다음의 14개 조항이다.

①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내에 돌려보낼 것, 조공하는 허례를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을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들을 근절하고 백성의 곤란을 구하며 겸하여 국가 재정을 유족하게 할 것 ④ 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고 그 중에서 재능 있는 자가 있으면 등용할 것 ⑤ 그 동안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 중에서 심한 자는 처벌할 것.

⑥ 각 도의 환상제도(還上制度)는 영구히 폐지할 것 ⑦ 규장각을 폐지할 것 ⑧ 순사제도(巡査制度)를 시급히 실시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그 동안 유배, 금고(禁錮)된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⑪ 4영(營)을 합하여 1영을 만들고,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近衛隊)를 시급히 설치할 것.

⑫ 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戶曹)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며 그 밖의 일체의 재무 관청은 폐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합문(閤門) 안의 의정소(議政所)에서 매일 회의를 하여 정사를 결정한 뒤에 왕에게 품한 다음 정령(政令)을 공포하여 정사를 집행할 것, ⑭ 정부는 육조 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청에 속하는 것은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하여 처리하게 할 것 등이다.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14개조는 당시 개화당 신 정부의 개혁 정치의 의지와 기본 내용을 집약적으로 공포한 것이었다.

고종이 혁신 정강을 재결하고 개혁 정치 실시 조서를 내린 12월 6일 오후 3시에 청군은 마침내 1,500명의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창덕궁의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각각 공격하여 들어왔다.

이에 대항하여 외위를 담당한 친군영 전후영의 조선 군이 용감히 응전하였으나,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고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여 흩어져 버렸다. 다음은 중위를 담당한 일본군의 차례였으나, 그들은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철병하여 버렸다. 일본군은 그 이전부터 철병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덕궁의 넓은 지역에서 개화당의 50명의 장사와 사관생도로 편성된 내위만으로는 정면에 부딪힌 1,500명의 청군을 도저히 대항할 수 없어 갑신정변은 청군의 무력공격에 패배함으로써 개화당의 집권은 ‘3일 천하(三日天下)’로 끝나게 되고 말았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변수(邊樹)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박영교와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여 청군에 넘겨준 후 피살되었다. 그 뒤 국내에 남은 개화당들은 민씨 수구파에 의하여 철저히 색출되어 수십 명이 피살되고 개화당은 몰락하였다.

상하이에서 죽은 김옥균의 시신은 본국으로 송환되어 왕명으로 능지처참 돼 효수됐다.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으로는, ① 청군의 불법적인 궁궐 침범과 군사적 공격 ② 개화당의 일본군 차병(借兵)의 실책과 일본군의 배신적 철병 ③ 개화 정책을 지지할 사회계층으로서의 시민층의 미성숙 ④ 민중의 지지 결여 ⑤ 개화당의 왕후와 청군의 연락에 대한 감시의 소홀과 정변 수행 기술의 미숙 등을 들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은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 근대 한국의 민족운동이었다. 그것은 첫째, 세계사적으로 한국 민족이 개혁을 단행하기에 비교적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정열적으로 중세국가체제를 청산하고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한 첫 번째의 가장 적극적인 자주 근대화 운동이었다.

둘째, 한국 근대사에서 개화 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주었다. 갑신정변이 추구한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와 시민사회와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 문화와 자주적 근대 국방의 건설은 그 뒤 모든 개화 운동과 민족운동이 계승하여 추구한 것이었다.

셋째, 한국 민족의 반침략 독립운동에도 하나의 기원을 만들어 주었다. 갑신정변의 독립운동은 당시 중국의 조선속방화정책에 대한 과감한 저항의 형태를 가진 것이었지만 이 운동의 내부 성격은 모든 외세의 자주권 침해와 침략에 대한 저항과 독립의 추구가 본질을 이루고 있었다.

박은식(朴殷植)이 그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제1장을 ‘갑신독립당의 혁명실패’로부터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넷째,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형성과 발전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운동이었다. 한국 근대사에서 그 뒤의 모든 민족주의 운동은 갑신정변을 계승하여 그것을 비판하고 반성한 위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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