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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파(畿湖學派), 영남학파(嶺南學派), 퇴계학파, 남명학파, 여헌학파

Jobs 9 2025. 10. 12.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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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파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기호(경기, 충청)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들로, 영남학파는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영남 지방에서 활동한 학자들

두 학파는 조선 중기에 형성되어 각기 다른 지역적 기반과 사상적 특징을 바탕으로 성리학 발전에 기여하며 대립 및 협력 관계를 맺기도 했다. 

 

기호학파(畿湖學派)

 

중심 인물: 율곡 이이(李珥) 

 

활동 지역: 기호지방(경기도, 충청도)을 중심으로 활동 

 

학문적 특징: 이이의 학설을 계승했으며, 이황의 주리설(主理說)에 대비되는 주기론(主氣論)적 경향

 

역사적 연관성: 율곡 이이를 조종으로 하며, 성혼, 송익필 등과 함께 학자 집단을 형성

 

 

영남학파 (嶺南學派)

 

중심 인물: 퇴계 이황(李滉) 

 

활동 지역: 영남 지방(경상도 일대)을 중심으로 활동 

 

학문적 특징: 이황의 주리설(主理說)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이론 중심보다는 실천 중심적인 학풍

 

역사적 연관성: 이언적, 조식 등 많은 학자를 배출했으며, 퇴계학파, 남명학파, 여헌학파 등으로 분화

 

 

 

 

지리적 구분: 기호학파는 경기·충청 중심, 영남학파는 경상도 중심

 

학문적 경향: 기호학파는 주기론, 영남학파는 주리론의 경향을 보이며, 이황과 이이의 학설이 이들 학파를 대표

 

역사적 관계: 두 학파는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기도 했으며, 특히 붕당 정치와 맞물려 서인(기호학파)과 동인·남인(영남학파)의 정치적 갈등의 한 축이 되기도 했다. 

 

 

 

 

 

 

 

기호학파(畿湖學派)

 

조선시대 이이의 학설을 따르는 주기적 경향의 성리학자들을 말하며 호서학파와 주기파라고도 한다. 주기론자들은 대부분 기호 지방(경기·충청 일원)에 거주했으므로 '기호학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반면 주리설의 종주인 이황(李滉)은 예안의 도산서원을 근거지로 후진을 양성했던 관계로 그를 따르는 학자들은 주로 영남지방에 분포했기 때문에 영남학파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작 조선시대에는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라는 분류와 명칭이 없었다. 편의상 후대에 만들어진 분류와 명칭이다.

 

정치적으로 영남학파는 영남 남인, 기호학파는 서인, 17세기 이후에는 노론이 주가 되었다. 기호학파로서 이이와 동시대 인물로는 조헌(趙憲)·정엽·한교·송익필이 있으며, 이후로는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과 송시열의 학맥이 주류를 이룬다.

 

 

 

 

 

영남학파(嶺南學派)

 

조선시대 성리학에 대한 사유체계가 깊어지게 되면서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유파를 말한다. 이언적을 창시자로 꼽는다. 이후 조식을 중심으로 형성된 남명학파, 이황을 중심으로 형성된 퇴계학파, 장현광을 중심으로 형성된 여헌학파로 나뉜다.

 

영남학파 학풍의 특징은 이론 중심이 아니라 실천 중심에 있다. 조선 중기 유학자인 조식은 ‘경의(敬義)’를 몸으로 실천하여 학문과 덕행을 쌓았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절제된 가치관으로, 당시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 방법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실천궁행(實踐躬行: 실제로 몸소 이행)은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학풍을 만들었다.

 

이러한 학풍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참가하여 학문의 실천을 몸소 보여준 학인들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시기 영남좌도에서 이황의 덕행을 우러러 그의 학문사상을 따르려는 유파가 생겨나며 이 학파를 퇴계학파라고 한다. 퇴계학파의 학자로 기대승, 김성일, 류성룡, 이덕홍, 조호맹, 정경세, 허목, 김흥락, 곽종석 등을 들 수 있다. 이 학파는 이황의 철학 사상을 이어받아 주리설(主理說)을 완성한다. 이황 철학의 기본적 성격은 이(理)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기에는 상대적 가치를 두는 존리설(尊理說)이었으며, 본래 자리에서 실천 행동을 하지 못하는 이가 실천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영남학파의 철학 특징이다. 그러나 정작 조선시대에는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라는 분류와 명칭이 없었다. 편의상 후대에 만들어진 분류와 명칭이다.

 

 

 

 

 

 

 

 

기호학파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李珥)를 조종으로 하는 학문상의 유파이다. 기호지방은 경기도를 중심으로 위로는 황해도 일부와 아래로 충청도 일원을 말한다. 기호지방의 중심인물은 이이, 성혼, 송익필이다. 후학들이 이이, 성혼, 송익필에게서 두루 배워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였기에 기호학파라 하였다. 이이의 문인 김장생으로부터 송시열, 권상하, 한원진, 이간, 김창협, 김창흡, 김원행 등이 학파 흐름의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동서분당의 당쟁에 관련되어 기호의 서인으로서 해석되기도 한다.

 

이황(李滉)의 학설을 따르는 영남지방의 성리학자들을 지칭하는 영남학파와 구별하여 일컫는 말이다. 기호지방은  경기도를 중심으로  황해도와  충청도 일원으로서, 동쪽은 관동지방, 남쪽은 호남지방, 북쪽은 관서지방과 접경을 이룬다. 이곳에서 이이의 성리설을 추종하는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후기에 이르면서 그 학통을 전수하여 하나의 학파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고려 말에 정주학이 전래되고, 조선조 건국과 더불어 유교적 학풍이 적극 장려되면서 유교의 학술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기묘사화를 전후하여 많은 역경을 거치면서 정치사회의 현실에 참여하는 입장에서만 아니라, 산림에 은거하여 학문과 지조를 돈독히 함과 동시에 후학을 지도하는 일에도 큰 가치를 두게 되었다.

 

그러한 사람으로서 김안국(金安國) · 김정국(金正國) · 서경덕(徐敬德) 등을 들 수 있다. 이들과 함께 좀 더 성숙된 성리학자로서 영남에는 이황 · 조식(曺植), 호남에는 이항(李恒) · 김인후(金麟厚) · 기대승(奇大升), 기호에는 이이와 성혼(成渾) · 송익필(宋翼弼)이 있었다.

 

 

 

기호지방의 중심인물은 이이 · 성혼 · 송익필의 세 사람이다. 그런데 기호학파의 성리학자들은 비록 이이의 학설을 추종했지만, 그와 논변을 벌인 성혼이나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성혼이 이이와 논변을 벌였다 해도 대립적 입장만은 아니었고, 또 송익필의 사단칠정 이기설이 이이의 견해와 같았던 점으로 보아, 서로 학문적 갈등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후학들이 세 학자에게서 두루 배워 기호의 학문을 형성하였으니, 이를 율곡학파라 하지 않고 기호학파라 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 대표적 학자는 김장생(金長生) · 정엽(鄭曄) · 한교(韓嶠) · 이귀(李貴) · 조헌(趙憲) · 안방준(安邦俊) · 송시열(宋時烈) · 권상하(權尙夏) 등이다. 이들은 기호의 서인으로서 동서분당의 당쟁에 관련되어 해석되기도 한다. 그것은 송시열 이후에 더욱 심했다. 특히, 이이의 문인 김장생으로부터 송시열 · 권상하 · 한원진(韓元震) · 이간(李柬) · 김창협(金昌協) · 김창흡(金昌翕) · 김원행(金元行) 등이 학파 흐름의 중심이 되었다.

 

이이의 이기설이 이황의 입장과 비교되어 주기적(主氣的)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가장 크지만, 불교나 도교적 요소에서도 본질적인 이해를 모색했다는 점에서부터 일반 유학자와 그 성격을 달리한다. 그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이나 『순언(醇言)』의 저술 등은 그 좋은 예이다.

 

한편, 이이는 종래의 학자 나흠순(羅欽順) · 서경덕 · 이황 등의 학설에 대해, “나정암이 가장 높고 다음이 퇴계 · 화담의 순이 된다.”고 평가하면서, “정암과 화담의 학설은 독창적 자득(自得)의 맛이 많고, 퇴계는 주자의 학설에 한결같이 따르는 의양(依樣)의 맛이 많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조광조(趙光祖)와 이황을 비교해서, “재주와 기국(器局)은 퇴계가 정암에 미치지 못하고, 학문의 정미함은 정암이 퇴계를 따를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이이의 학문적 입장은 자주적이고 비판적이며 논리성을 강조하는 것이어서, 어느 한편의 좋은 점이 있다고 해서 그 전체를 따르지 않는다. 이런 점은 도가적 주기론을 강조했던 서경덕에 대한 평가에서도 알 수 있다. 이이는 서경덕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그의 철학적 특이성을 칭송하였던 것이다. 그에게 여러 학설을 평가하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논리적 견해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의 철학적 전제는 본질에 있어 두 근원[二元]을 상정하지 않는 데 있다. 비록 양면성이 있다 해도, 그것은 별개로 존재할 수 없는 일원적 본원성(本源性)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이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말한다 해도, 그 원초적 작위인 발(發)이 이원(二源)일 수 없으며, 이기가 서로 발할 수 없다고 하여 이황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이황은 이도 발할 수 있다고 보면서 동시에, 이에 능동성을 부여해 이를 높이는 견해(尊理說)였으나, 이이는 기 이전에 이가 별도로 존재할 수 없음을 들어, 이가 발한다는 이발설(理發說)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이황의 “이가 발하는 데 기가 따르고, 기가 발하는 데 이가 탄다(理發而氣隨之, 氣發而理乘之).”는 학설 가운데, 후자는 인정되지만 전자는 모순되는 것이라 한다. 소위 “발하는 것이 기이고, 발하게 하는 소이가 이이다(發之者氣, 所以發者理).”라는 원칙에 근거해서 발의 속성을 오직 기에만 인정하였던 것이다.

 

또한, 사단칠정설에 있어서도 이황이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고 말한 데 대해, 이이는 “사단이나 칠정이 다 같이 기가 발한 것”이라 하고, “칠정 가운데 사단을 말할 수 있으니 그 순선한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이에 근본작위로서의 발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이는 형체나 작위가 없는 것이고(無形無爲), 기는 형체와 작위가 있는 것(有形有爲)이기 때문이다.

 

이황이 이기가 모두 발한다는 이기호발(理氣互發)을 강조할 때, 주자의 “사단은 이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라는 말을 인용한 바 있다. 그런데 이이는 이에 관해 “주자가 참으로 그와 같이 생각했다면 주자도 잘못된 것이니 어찌 주자답겠느냐.”고 하였다.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모순이 있을 때, 주자라고 해도 비판적 견해를 회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기에 이이의 학설을 추종했던 송시열은 그러한 이이의 말에 자극되어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를 지어 그것이 다른 사람의 말이 될 수 있음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이의 존재론 · 인성론의 기본 입장은 기가 발함은 타당하지만, 이가 발할 수 없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주자의 “이와 기가 서로 떨어지거나 혼잡될 수 없다.”는 이기불상리불상잡(理氣不相離不相雜)의 학설 가운데 ‘불상리’의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이황이 ‘불상잡’을 높이는 입장과 대조된다. 이이가 나흠순이나 서경덕의 철학적 견해를 칭송한 이유도 바로 그들이 불상리의 묘체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은 그러한 자리를 ‘이기의 묘처(理氣之妙處)’라 하여 보기도 말하기도 어려운 곳이라 하면서, 그곳을 체인(體認)하고 체득(體得)함이 학자의 본령임을 밝히고 있다.

 

한편, 우주생성론의 입장에서도 태극음양에 그 선후나 상호작위함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 역시 기가 발하는 데 이가 타는 것뿐이라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일치된 해석으로 보인다. 모든 현상적 차별상은 기의 발위(發爲)에 달려 있으나, 그와 동시에 존재하는 이와 선후본말의 관계를 이루지 않기 때문에 기의 영원성이 함께 인정된다. 심성정(心性情)의 인성론적 입장에서도 두 개의 마음이나 두 개의 정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그 근원적 작위[動]에서 선악의 성향이 갈라진다고 하는 일원적 견해가 이이의 주된 이론이다.

 

이러한 이이의 사상적 표현은 그의 교우인 성혼과 주고받은 논변서(論辯書)를 중심으로 하여 잘 드러난다. 이에 앞서 이기설적 논변은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오랫동안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자연히 이이는 기대승의 입장을, 성혼은 이황의 입장을 전제하게 된다. 그러나 이이가 기대승의 견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학설은 지지했으나, 이가 발한다는 ‘이발’의 논리는 부정했던 것이다. 이이의 성리설이 이황과 함께 한국 성리학의 정상을 이룬 것은 후기 학자들의 이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정주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정립한 학설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강학했던 영남과 기호를 중심으로 각각 후기학파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황의 호발설을 이이가 비판한 이후, 영남학파의 이현일(李玄逸) 등이 그 호발설을 옹호하기 위해 이이의 학설을 따르는 기호학파를 주기파 또는 기학파(氣學派)라 부르기도 하였다. 후기 당쟁유학에 편승해 주리적 입장과 주기적 입장으로 학문적 성향의 차이를 보인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영남학파가 기호학파를 주기파라고 비난하고, 기호학파도 본래의 이기일원적 입장에서 탈피하여 말 그대로 주기적 성향으로 대립한 것은 당쟁이라는 편협성에 기인된 것이다.

 

그러나 이발을 부정한다 하여 초기 기호의 학자나 이이를 주기적이라고 단정하면 그 논설의 본질에 어긋난 것이라 할 것이다. 이의 발을 부정했지만, 기를 이보다 높이 여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리적이니 주기적이니 하는 이기설의 논란은 편협한 후기 유자(儒者)들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라 하겠다.

 

이제 이이 이후 기호학파의 대표적 인물과 학문적 특성에 관하여 개괄해보기로 한다. 이이의 문하에서 그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은 김장생이다. 김장생은 선조 때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 송익필에게서 『근사록』과 예학을 배우고, 이이에게서 경학과 성리학을 배워 통달했는데, 특히 예학에 밝아 예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의 예학은 송익필에게서 뿐만 아니라 아버지인 김계휘에게서도 영향 받은 바가 크다고 한다. 당시 국가 전례(典禮)에 관한 일은 모두 김장생에게 물을 정도로 박학해, 여러 의례규범을 정립하고 『의례문해(疑禮問解)』 · 『가례집람(家禮集覽)』 · 『상례비요(喪禮備要)』 등을 저술하여 후기 예학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전례를 말할 때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중론에 좌우되지 않고, 타당한 원칙을 밝혀 관직을 그만두고서라도 조금도 동요되지 않을 정도로 엄정하였다.

 

한편, 그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자득하고 조심스레 삼가고 덕행군자로 유명해져 많은 후학들이 찾아와 배웠다. 그는 아들 김집(金集)과 더불어 문묘에 배향될 정도의 학덕인(學德人)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예학은 송시열에게 전해져 당시 서인을 중심한 기호학파에서 널리 성행하였다.

 

문인 송시열에 이르러 예론을 중심으로 한 당파유교(黨派儒敎)가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송시열의 생애도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에게서 배운 뒤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심경(心經)』 · 『근사록』 · 『가례(家禮)』 등을 배우고, 그 뒤로는 연산(連山)에 있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에게 배워 대성하였다.

 

송시열은 주자학에 심취하면서 이이의 이기설을 따라, 이황의 이발기수설(理發氣隨說)은 큰 착오라 하였다. 이는 정의(情意) · 운용(運用) · 조작(造作)이 없는 것으로 기 가운데 있다고 보며, 기는 운용 · 작위할 수 있어, 이가 여기에 부여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마음이 곧 기이다(心是氣).”는 이이의 학설도 옹호해 설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주자언론동이고』에서 『주자어류(朱子語類)』 가운데 있는 “사단은 이의 발(四端是理之發)”이라는 문구는 『주자어류』의 기록자인 보한경(輔漢卿)의 착오라고 고증해 이발설을 극구 부정함으로써 이이의 학설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한편, 대외적 견해에서는 명나라를 높이기 때문에 모화사상을 고취하였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효종과 더불어 북벌을 밀의해 호란에 보복하려 했던 점은 춘추대의 정신의 구현으로 평가된다. 그의 인생관은 그가 정읍에서 사약을 받아 죽음에 임해서 문인 권상하에게 말한 ‘직(直)’자의 강조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강직하였다.

 

권상하는 일찍이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총애를 받은 대표적 학자이다. 그는 송시열의 뜻을 받들어 괴산(槐山)의 화양동에다 부근의 유생들과 함께,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하기 위해서 1717년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1704년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신종 · 의종에게 제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양동의 만동묘는 부근 유자들의 근거지로서, 지나치게 세도를 부리거나 당론을 일삼는 등 폐단이 없지 않았다. 권상하의 문인에는 한원진과 이간이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문제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한편, 전기 기호학파의 중심인물로 조헌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성혼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성혼 · 이이의 문인으로서 성리학을 돈독히 하면서, 현실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당시 당론에 휩싸여 공론(公論)이 없음을 걱정하는 한편, 왕의 불공(佛供)을 극간하는 등 자신의 중립적 입장과 강직성을 드러냈다. 외세의 침입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요구하면서,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금산전투에서 모든 의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충의를 드러냈다.

 

그의 절의를 드높이고 유고를 모아 『항의신편(抗義新編)』을 편찬한 이가 안방준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하는 데 힘쓰고, 인조반정 때는 공신인 김류(金瑬)에게 당쟁과 인사등용 및 공사분별의 문제 등에 관해 진언한 바 컸다. 그밖에 이이 · 성혼 또는 송익필의 문하에 출입하여 배우고, 당시의 명류(名流)들과 사귀었다.

 

기호학파의 연원은 이이에서 비롯되었으나, 주로 서인 중심이었다. 이이는 이미 시작된 동서분당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고자 노력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오히려 후기로 내려올수록 기호학파의 흐름과 병행해 기호인에서 서인으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기호학파의 흐름은 예학과 의리학으로 발전해왔으나, 당파적 갈등과 당쟁의 사상적 입장에 편승해 성리설의 진면목을 잃은 감이 있다.

 

 

 

 

 

 

 

 

 

 

영남학파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상의 유파로서, 영학파, 퇴계학파, 남명학파, 여헌학파를 총칭한다. 영남학파의 학맥은 정몽주에서 비롯해 길재, 김숙자를 거쳐 김종직으로 계승되었다. 조선 초기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영학파는 훈구파와의 반목으로 정치적 희생물이 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황은 영남좌도에서 퇴계학파의 영수로서, 조식은 영남우도에서 남명학파의 영수로서 많은 학자들을 배출했다. 여헌학파인 장현광은 퇴계학파인 정구, 정경세와 교유했을 뿐 아니라 퇴계학을 묵수하였다. 따라서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여헌학파도 퇴계학파에 속한다.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상의 유파로서 영학파(嶺學派) · 퇴계학파(退溪學派) · 남명학파(南冥學派) · 여헌학파(旅軒

 

 

어떤 사상의 발달이 원숙하고 학자들의 사유의 심도가 깊어지면, 사리(事理)에 대한 시비곡직(是非曲直)을 판단하는 능력이 자생하고 나아가 견해를 같이하는 학문의 유파가 형성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에 정주학(程朱學)의 학풍이 일면서부터 학맥(學脈)이 서서히 생기게 되었다.

 

영남 지방은 지리가 아름답고, 인심이 순후하고 전통적으로 학문을 좋아해 예로부터 장상(將相) · 공경(公卿) · 문장 · 덕행 · 절의로 유명한 이들과 선도(仙道) · 불도(佛道) · 도교(道敎)에 정통한 이들이 많이 나와서 세인들이 영남을 인재의 고장이라 불러 왔다.

 

그러한 탓인지 영남 지방에는 조선조 이후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여러 학맥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 초기의 김종직(金宗直)을 영수로 하는 영학파, 중기의 조식(曺植)을 중심으로 하는 남명학파, 이황(李滉)을 종주로 하는 퇴계학파, 그리고 장현광(張顯光)을 주축으로 하는 여헌학파라 하겠다.

 

 

영남학파의 학맥은 정몽주(鄭夢周)에서 비롯해 길재(吉再) · 김숙자(金叔滋)를 거쳐 김종직에로 계승된다. 김종직은 도학과 문학으로 유명해 당대 유학의 조종이 되었다. 그는 문하에 많은 제자를 두었다.

 

저명한 학자로는 현풍의 김굉필(金宏弼) · 곽승화(郭承華), 함양의 정여창(鄭汝昌) · 유호인(兪好仁) · 표연말(表沿沫), 경주의 손중돈(孫仲暾), 선산의 강백진(康伯珍), 성주의 김맹성(金孟性), 안동의 이종준(李宗準), 청도의 김일손(金馹孫), 밀양의 박한주(朴漢柱) 등이다.

 

이 학파의 특징은 조선 초기의 학문적 경향이 그러하였듯이 여말의 영향을 받아 유학의 요소 중에서 한편으로는 주로 실제적인 정치 · 경제 · 법률 · 문장을 학문의 대상으로 하는 한당류(漢唐類)의 학풍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성리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송학류(宋學類)의 학풍을 혼합한 것이었다.

 

이 학파에서 정여창과 김굉필은 특히 도학에 정진하여 후세 한국 성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학문적 토양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정여창은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3년 동안 나오지 않고 오경(五經)을 연구해 그 심오한 뜻을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가장 치중하였고, 궁리(窮理)함을 위주로 하였다.

 

그리하여 『중용』의 주자장구(朱子章句) 중에서 ‘기이성형, 이역부언(氣以成形, 理亦賦焉)’의 설을 따르지 않고 ‘안유후기지이호(安有後氣之理乎)’라 하여 기(氣)에 뒤지는 이(理)가 있지 않음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뒤에 퇴계학파에서 주리설(主理說)을 주장하는 단서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김굉필은 존양(存養)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그것에 도달하는 수단으로는 성경(誠敬)을 주로 하였다. 이것은 당시 유학에서 새로운 학문 경향이었다. 그의 학통은 조광조(趙光祖) · 김안국(金安國)에게로 계승되었고, 조광조의 학통은 다시 성수침(成守琛) · 성혼(成渾) 부자에게 이어졌으며, 김안국의 학통은 김인후(金麟厚)에게 전수되었다.

 

또 이언적(李彦迪)의 스승이 김종직의 제자 손중돈이었으니 동방의 사현(四賢: 김굉필 · 정여창 · 조광조 · 이언적)은 이 영학파의 이학자(理學者)와 그의 후예들이었다. 그런데 이 영학파는 연산조에 이르러 훈구파와의 반목 갈등으로 위세가 침몰되었는데, 학술 · 문장 · 절의로 정계와 재야에서 대활약을 했던 당대의 유일한 학파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영남우도(嶺南右道)를 중심으로 조식의 학식과 덕행을 존숭하고 추종하는 학파가 새로이 형성되었다. 이를 남명학파라 하였다. 이 학파의 저명한 인물로는 오건(吳健) · 김우옹(金宇顒) · 정구(鄭逑) · 최영경(崔永慶) · 김효원(金孝元) · 곽재우(郭再祐) · 정인홍(鄭仁弘) · 정탁(鄭琢) · 하항(河沆) · 하진(河溍) 등을 들 수 있다.

 

이 학파의 특징은 반궁체험(反窮體驗) · 지경거의(持敬居義) · 충신진덕(忠信進德) · 독행수도(篤行修道)라 하겠다. 천길 절벽 같은 기상을 가진 조식은 ‘경의(敬義)’ 두 글자에 힘을 쏟아 공리공담을 배척하고 실천궁행함으로써 학문과 덕행을 쌓아 갔다. 그래서 제자들도 그의 학덕에 영향을 받아 기절(氣節)과 의리를 숭상하고 추종하였다.

 

오건은 자질이 순후하고 기상이 홍대하며 의연하고 효행이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 학식에 있어서는 『대학』과 『중용』에 밝아 이황도 경탄하였다. 최영경의 청백하고 의로운 절개는 세인을 감복시켰다. 그는 의리가 아니면 한 개의 터럭도 취하지 않았다.

 

김우옹은 당대 제일의 강관(講官)으로 알려졌으며 ‘사무사(思無邪)’ · ‘무불경(毋不敬)’ · ‘무자기(毋自欺)’ · ‘신기독(愼其獨)’의 네 구를 진학의 지표로 삼았다. 정구는 경학에 밝았으며 특히 예학에 정통하였다. 곽재우는 임진왜란 · 정유재란 때에 공이 크며, 정탁은 경사(經史) · 천문 · 지리 · 병가에 정통하였다. 이들 중에서 김우옹 · 정구 · 정탁은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했던 학자들이다.

 

같은 시기에 영남좌도(嶺南左道)에서는 이황의 덕행을 숭모하고 그의 학문 사상을 추종하는 유파가 형성되었다. 이른바 퇴계학파라 하였다. 특히, 이 학파는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영남학파로서 이황에게 수학해 도학 · 문장 · 덕행 · 사업으로 일세의 공명이 된 자가 매우 많다.

 

그 중에서도 저명한 인물을 약술하면 조목(趙穆) · 기대승(奇大升) · 김성일(金誠一) · 유성룡(柳成龍) · 남치리(南致利) · 이덕홍(李德弘) · 황준량(黃俊良) · 권호문(權好文) · 김륵(金玏) · 홍가신(洪可臣) · 정사성(鄭士誠) · 김사원(金士元) · 유중엄(柳仲淹) · 조호맹(曺好孟) · 박광전(朴光前) 등의 퇴계문도들과 정경세(鄭經世) · 허목(許穆) · 이현일(李玄逸) · 이재(李栽) · 이상정(李象靖) · 유치명(柳致明) · 김흥락(金興洛) · 이진상(李震相) · 곽종석(郭鍾錫) · 김황(金榥) 등의 사숙들을 들 수 있다.

 

이 학파는 이황을 ‘동방의 주부자(朱夫子)’라 칭하고 그의 철학 사상 중에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사칠이기분대설(四七理氣分對說), 그리고 물격설(物格說)을 지지 · 옹호하다가 마침내는 주리설로 발전하였다.

 

이황의 철학은 원래 주희(朱熹)의 이기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 주희에 따르면,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는 것이고(不相離), 또한 서로 섞일 수도 없는 것(不相雜)이다. 그런데 이황은 이와 기를 서로 섞일 수 없는 것, 다시 말하면 이물(二物)이라는 견지에서 이는 이일 뿐 결코 기가 아니며, 기는 기일 뿐 결코 이가 아니라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理自理, 氣自氣).

 

주희는 이와 기의 작용에 있어서 기에는 응결 조작 능력이 있지만 이에는 정의조작(情意造作)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황은 이와 기에 똑같이 실질적 작용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여, 이를 순전히 추상적 개념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를 사물(死物)로 보지 않고, 태극에 동정(動靜)이 있다는 것은 태극이 스스로 동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이황의 이발이동(理發理動)의 관념을 보게 된다.

 

이황은 또 가치론상으로 이에는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기에는 상대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서로 간에 가치의 차등을 두었다. 때문에 이황은 기대승과의 사칠논변(四七論辨)에서 “사단(四端: 惻隱 · 羞惡 · 辭讓 · 是非)은 이가 발하면서 기가 따르는 것이고(理發而氣隨之), 칠정(七情: 喜怒哀懼愛惡欲)은 기가 발하면서 이가 타는 것(氣發而理乘之)”이라 단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이(李珥)는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사칠이기분대설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의 설에 의하면, 이와 기는 이물(二物)도 아니요 일물(一物)도 아니요, 다만 하나이면서 둘이요(一而二) 둘이면서 하나인 것(二而一)으로서 일체양면적(一體兩面的) 관계에 불과하다는 견해이다. 또, 발하는 것은 기요 발하는 까닭은 이이므로, 기발이승(氣發理乘)은 가하나 이발기수(理發氣隨)는 불가하다고 이를 부인하였다.

 

그리고 사단칠정에 있어서 사단은 칠정을 포함할 수 없지만 칠정은 사단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단은 칠정 중에서 선한 부분만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양분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보았다. 이이는 이와 기의 불상잡(不相雜)보다는 그 불상리(不相離)의 관계성을 중요시하였고, 이는 기에 내재한 존재자로서 활동성이 없는 정물(靜物), 현실적이 아닌 추상적 · 사유적 표상일 뿐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처럼 이기심성론에 대해 이황과 이이 사이에 견해의 차이를 보이자 이이를 ‘동방의 대현’이라고 칭송하는 기호학자들은 율곡설을 옹호하면서 영남학자들과 논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퇴계학파의 이현일은 이황의 사단칠정설은 백세를 기다려도 불혹(不惑)할 것이라고 역설하고, 이이의 그것은 의리상으로 불명한 것이라고 논박하였다. 그의 설은 사단이 정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선불선(善不善)의 견지에서 볼 때 사단은 선일변이요 칠정은 선악을 겸비하고 있으므로 분대하여 불가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의 아들인 이재는 이발설(理發說)의 합리성을 역설한 나머지 기의 작용을 기다리지 않고 이만으로도 일용행사의 체용(體用)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의 제자 이상정에 이르러서는 이가 단순히 무위무력(無爲無力)한 정지체(靜止體)가 아니라 이 자체로써 능히 발위운용(發爲運用)할 수 있는 활물(活物)이라는 것을 천명하였다. 다시 유치명에 이르러서는 이에 능동능정(能動能靜)하는 신용(神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의 자발적 동정으로부터 음양오행의 기가 생출한다고 주창하는 동시에, 이는 우주의 주체이며 마음의 본체가 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렇게 발전한 이의 개념이 이진상에 이르러서는 더욱 확충되어 이기호발설이 드디어 주리설로 변환하게 되었다. 특히, 이진상은 『이학종요(理學綜要)』와 그 밖의 논설에서 이단주기(異端主氣)의 그릇됨을 역설하고 성현주리(聖賢主理)의 참됨을 주창해 배우는 이로 하여금 주리설이 만고불변의 진리임을 깨우치는 데 전 생애를 바쳤다.

 

당시 학계에서 이기사칠논변 외에 논제의 대상이 된 것이 『대학』의 격물(格物) · 물격(物格)과 주자주(朱子註)의 현토 문제였다. 이는 인식론상의 문제인데,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간의 논쟁점은 물격에 대한 주희의 주석 ‘물리지극처무부도(物理之極處無不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현토에서는 대체로 율곡학파는 ‘물리지극처(物理之極處)’를 주격(主格)으로 보는 데 반해 퇴계학파는 처소격(處所格)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율곡학파는 물리(物理)가 극처(極處)에 이르지 않음이 없다고 본 데 대해, 퇴계학파는 물리의 극처가 나의 마음[吾心]에 이르지 않음이 없다고 보았다. 이 논변은 정경세와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과 곽종석 사이에서 특히 격론하였다.

 

영남의 다른 한 학파는 장현광을 중심으로 형성된 여헌학파다. 장현광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배척하고 기발이본설(氣發理本說)을 내어 이를 만대불역의 설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와 기를 이물이본(二物二本)이 아니라고 보고 다만 서로 체와 용이 될 뿐이라고 했으며, 따라서 사단과 칠정에 있어서 사단도 정인 이상 이발기발로 나누어 말하는 것은 의심이 가는 것이라 하였다.

 

이 학파에 속하는 저명한 인물로는 김응조(金應祖) · 전식(全湜) · 유진(柳袗) · 조임도(趙任道) · 노형필(盧亨弼) · 신적도(申適道) · 정극후(鄭克後) · 선우협(鮮于浹)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장현광은 평소 퇴계학파인 정구 · 정경세와 교유했을 뿐 아니라 퇴계학을 묵수하였다. 또한, 그의 문도들 중에서도 장현광의 학설을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퇴계학설을 수용하면서 스승의 설도 존중하는 경향이었다. 따라서 거시적 견지에서 보면 여헌학파는 퇴계학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초기 김종직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영남학파는 당대의 사림을 대표한 학파로서 학계 · 정계 · 문학 분야에서 혁혁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때는 훈구파와의 반목으로 정치적 희생물이 되었지만 그 도학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한 갈래는 조광조를 통해 기호 지방으로 전해졌고, 다른 한 갈래는 이언적을 거쳐 이황 · 조식으로 전승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황은 영남좌도에서, 그리고 조식은 영남우도에서 영남학파의 영수로 추앙 받아 많은 문도를 거느리면서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시켰다. 이황이 조식을 경우(敬友)로 여겼듯이 조식도 이황을 외우(畏友)로 대해 조식의 문도들이 이황의 문하에 출입했고, 이황의 문도들이 조식의 문도와 교유하면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한때 정인홍 사건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지만 부덕의 소치로 묻어 버리고 교학상장(敎學相長)으로 화합하여 친목을 더해 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식학파는 그 학맥이 쇠잔해지고 퇴계학파는 그 학맥이 날로 성해지면서 우도 · 좌도의 구별이 흐려지고 영남의 학자들은 퇴계학파로 흡수되어 급기야는 퇴계학파가 영남학파의 대명사로 바뀌었던 것이다. 영남학파를 계승하면서 성리학상으로 계승 · 발전시킨 학맥은 김성일(金誠一)의 문맥을 꼽을 수 있다.

 

 

학파가 한때 정치적 이해관계에 연루되어 당색으로 변신하면서 사회에 해악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영남학파의 순정 철학이 한국 근대의 철학 사상사에 이룩해 놓은 업적은 높고 깊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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