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趙容弼)
'가왕(歌王)'의 위상과 한국 대중음악에 끼친 영향
가수 조용필은 단순한 대중가수를 넘어 '대한민국 가요 그 자체'로 불릴 만큼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평론가들 및 대중 모두에게 '가왕'으로 통하며, 그의 업적은 후대 모든 뮤지션의 표상(表象)이 되었다.
음악적 위상과 다양성: '전방위 팝 아티스트'
조용필은 한국 대중음악에서 음악성과 대중성의 양립에 성공한 대표적이고 독보적인 아티스트로 평가된다.
장르의 선구자 및 융합: 그는 트로트, 록(Rock), 발라드, 팝, EDM 등 다양한 장르를 시대를 앞서 도입하고 실험했다. 특히, 록과 트로트라는 상반된 두 장르를 성공적으로 융합하여 한국 대중음악의 스펙트럼을 확장시켰다. 이로 인해 한국의 록이 언더그라운드에서 제도권으로 올라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싱어송라이터의 표상: 조용필은 초기부터 작사, 작곡, 편곡, 연주, 프로듀싱까지 직접 도맡아 하는 본격적인 '셀프 메이드 아티스트' 시대를 열었다. 그의 음악적 재능과 실험 정신은 1980년대 한국에서 가능한 음악적 실험을 거의 다 해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시대를 초월한 보컬: 그의 보컬은 기교를 앞세우기보다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기초로 하면서도, 곡을 딱딱 끊는 특유의 절제된 창법을 구사하여 다른 가수들과 차별화된다.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단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현역 가수'로 활동하는 것은 놀라운 평가를 받는다.
대중문화 산업에 끼친 지대한 영향
조용필은 단순한 가창력 외에도 한국 대중음악 산업의 기반을 닦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앨범 개념의 정착: 이전까지 히트곡 몇 곡만 담아 급하게 찍어내던 관행을 깨고, 양질의 히트곡이 다수 수록된 '앨범' 개념을 한국 대중가요에 정착시켰다.
공연 문화의 선구자: 그는 단순한 리사이틀이 아닌, 쇼 퍼포먼스가 결합된 '콘서트' 문화를 정착시켰다. 체육관 콘서트, 스타디움 공연 등 대형 공연의 시작과 활성화를 주도했으며, 90년대에는 해운대 10만 명 이상 동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전문 매니지먼트와 팬덤의 기원: 그의 폭발적인 인기는 한국 대중음악 전문 매니저와 전문 기획사 탄생의 계기가 되었으며, 1980년대 그의 공연장에 몰려든 **'오빠 부대'**는 오늘날 K-POP 팬덤이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기원이 되었다.
상징성과 기록
조용필은 한국 가요 역사상 독보적인 기록과 상징성을 가진다.
최고의 가수: 섷문조사 및 평론가 39인이 뽑은 '최고 가수'에서 항상 1위를 차지한다.
기록: 역대 가요대상 최다 수상자이며, 국내 최초 단일 앨범 100만 장 돌파(1991년), 음반 총 판매량 1천만 장 돌파(1994년) 등 엄청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세대를 초월: 그의 음악은 10대부터 70대까지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특히 최신 곡마저 지상파 가요순위 프로그램에서 정상에 오르는 등 현역으로서 시대를 초월하는 영향력을 증명한다.
조용필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레전드'이자,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는 '겸손한 아티스트'**로서 후배들에게도 가장 존경받는 뮤지션이다.

조용필 창법의 특징
조용필의 창법은 시대를 초월하여 '가왕'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한 가장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요소로 평가된다. 그의 창법은 한국적인 정서와 서구적인 발성법을 결합하고, 장르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근본적인 발성 및 음역 특징
- 흉성(Chest Voice) 기반의 강한 발성: 조용필의 보컬은 흉성(가슴 울림)이 매우 두껍고 단단하며, 이를 기반으로 파워풀한 소리를 낸다. 이는 록(Rock) 음악을 소화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힘이다.
- 폭발적인 고음과 높은 음역대: 70년대와 80년대 초반에는 한국 가수 중 최고로 꼽힐 만큼 넓고 높은 음역대를 구사했다. 그의 고음은 단순히 높이 올라가는 것을 넘어 힘과 울림을 동반하는 것이 특징이다.
- 절제된 비브라토와 깔끔한 끝처리: 기교적인 장식보다는 음 자체의 힘을 믿는 창법이다. 비브라토(떨림)를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고, 음을 끊거나 마무리할 때 군더더기가 없어 매우 깔끔하고 정확하다.
창법의 주요 기술적 특징 (독창성)
| 특징 | 설명 | 적용된 음악적 효과 |
| 타악기적 발음 | 노래의 가사를 내뱉을 때 모음을 길게 늘이기보다 자음과 모음을 딱딱 끊어서 발음하고 호흡을 조절한다. | 가사에 리듬감과 추진력을 부여하여, 발라드를 부를 때도 노래가 늘어지지 않고 긴장감을 유지하게 한다. |
| 두꺼운 소리의 진성(眞聲) | 가성을 거의 쓰지 않고 진성 위주로 노래를 끌고 나가며, 고음에서도 목을 조이지 않고 두꺼운 울림을 유지한다. | 노래의 호소력과 설득력을 높이고, 감정을 강렬하게 전달한다. |
| 다양한 장르 소화력 | 록을 부를 때는 샤우팅 창법을 사용하고, 발라드를 부를 때는 서정적이면서도 가창력을 숨기지 않는 파워 발라드 창법을 구사한다. |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트로트, 팝, 록 모두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전천후 가수'**의 입지를 다졌다. |
| '꺾기'의 현대적 변용 | 트로트에서 흔히 쓰이는 전통적인 '꺾기'(요성) 창법을 현대적인 팝 발성에 자연스럽게 융합하여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낸다. | 감정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세련미를 잃지 않는, 조용필 표 발라드를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 |
조용필의 창법 특징과 음악적 영향
□ 넓은 음역대와 폭발적인 성량
조용필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가 가진 비범한 음역대와 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능력이다.
- 광범위한 음역: 그는 바리톤에서 시작해 테너를 넘나드는 넓은 음역을 구사하며, 저음부에서는 굵고 깊은 울림을, 고음부에서는 찢어질 듯한 샤우팅이나 가성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 폭발적인 성량: 특히 라이브 공연에서 압도적인 성량과 힘을 보여주며, 이는 클래식 발성법을 응용한 흉성(가슴 소리)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 '꺾기'와 '바이브레이션'의 독특한 활용
조용필 창법의 한국적 정서와 트로트적 요소가 가미된 부분은 독특한 기교에서 나타난다.
- 정교한 '꺾기' (요성/Tremolo): 트로트와 민요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음을 꺾는 기교를 발라드나 록 음악에 접목시켰다. 이는 곡의 클라이맥스나 감정을 고조시키는 부분에서 사용되어 한국인 특유의 '한(恨)'의 정서를 극대화한다.
- 밀도 높은 바이브레이션: 그의 바이브레이션은 진폭이 좁고 밀도가 높아 소리가 단단하게 들리며, 이는 곡의 몰입도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이다.
□ 장르를 초월한 소화력
조용필은 특정 장르에 갇히지 않고 팝, 록, 발라드, 트로트, 국악 등 다양한 장르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 록 창법 (샤우팅): '못 찾겠다 꾀꼬리',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록 성향이 강한 곡에서는 날카롭고 힘 있는 록 샤우팅을 구사하며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 발라드 창법 (감성): '그 겨울의 찻집', '허공' 등 발라드에서는 호흡을 길게 가져가며 서정적인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 국악적 요소: '한오백년', '창밖의 여자' 등에서는 판소리와 민요 창법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국악적인 발성과 시김새를 사용하여 한국적 정서를 담아냈다.
□ 정확한 딕션과 감정 표현
그의 창법은 기교가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가사 전달력이 매우 뛰어나다.
- 명확한 딕션: 가사를 정확하게 발음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내용을 쉽게 이해하게 한다.
-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 곡의 가사를 단순한 음표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야기하듯 감정을 실어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는 청자가 곡의 서사에 몰입하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다.
조용필의 창법은 기술적인 완벽함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를 건드리는 감정 전달력과 시대적인 소통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평가된다.
시대별 창법 변화
조용필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아티스트로 평가받으며, 시대에 따라 창법도 미세하게 변화했다.
- 초기 (70~80년대 초): 록 음악의 영향이 강하여 폭발적인 샤우팅과 강한 힘이 두드러졌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촛불', '고추잠자리')
- 중기 (80년대 중반~90년대): 장르의 융합이 심화되며 섬세한 감정 표현과 안정적인 발성을 중심으로 발라드의 왕좌를 공고히 했다. ('그 겨울의 찻집', '허공')
- 후기 (2000년대 이후): 70대에 접어든 후에도 여전히 단단한 발성을 유지하며, 세련된 사운드와 정제된 테크닉을 결합하여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는 **'현역 가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집 'Hello', '바운스')

조용필
趙容弼|Cho Yong-pil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쌍정리 99
(現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공룡로241번길 47)
본관
임천 조씨 (林川 趙氏)
신체
165cm|56kg|O형
가족
아버지 조경구(1901~1986)
어머니 김남숙(1910~1991)
3남 4녀 중 막내 아들
배우자
박지숙(1984년 결혼, 1988년 이혼)
안진현(1994년 결혼, 2003년 사별)
학력
송산국민학교 (졸업)
송산중학교 (전학)
경동중학교 (졸업)
경동고등학교 (졸업)
병역
대한민국 육군 일등병 소집해제
소속사
YPC
종교
불교
데뷔
1968년 미8군 무대 '화이브 핑거스'
별명
가왕(歌王), 국민가수, 작은거인, 풀빵, 조방범
취미
없음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
경기도 화성군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부유한 집안의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학창시절 음악에 푹 빠져 지냈고 결국 고3때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와 심하게 갈등을 겪으며 가출을 하게 된다. 이후 1968년에 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출발했다. 미8군이라 하면 현재의 나이트클럽 밤무대같은 걸로 연상할 수 있지만, 기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모든 시작이 이루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1960~1980년대의 모든 대중음악 활동의 큰 장이었다.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에서 활동하다가 곧 "파이브핑거스"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주로 미8군 무대에 올랐다. 그러다 1971년 5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9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트리오는 드러머이자 타악기 연주자였던 김대환(드럼)1, 조용필,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1972년에는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라는 연주 음반도 발매하였다. 이때 발표한 곡 "Lead Me On"이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학생을 위한 뮤지컬 '사랑의 일기'라는 음반에 "님이여", "사랑의 자장가", "케사라", "하얀 모래의 꿈"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게 사실상 조용필의 노래가 들어간 첫 음반이다. 이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도 녹음했다. 직후 1972년 스테레오 힛트 앨범 제 1집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음반을 내는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72년 "그룹 25시"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1973년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복무기간 중에도 퇴근 후 음악 활동을 계속하면서 1974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면서 이 곡과 함께 전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재일 한국-조선인 고국 방문과 맞물려 발표된 이 노래는 부산에서부터 인기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고, 조용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다. 그리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금도 롯데 자이언츠의 1순위 응원가로 부르고 있다.
1979년 지금의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년 뒤인 1980년에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앨범은 100만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하면서 1980년대 최고의 히트 가수가 되었다.
음반
정규 앨범만 무려 20개, 비정규앨범까지 포함하면 50개가 넘어간다.
대표곡
창밖의 여자 (1980) (1980년 10월 19일, 1980년 TBC 세계가요제 국내예선)
미워 미워 미워 (1981) (1981년 12월 30일, 1981년 KBS 방송음악대상)
비련 (1982) (1982년 12월 30일, 1982년 KBS 가요대상)
못찾겠다 꾀꼬리 (1982) (1982년 12월 31일, 1982년 MBC 10대가수가요제)
나는 너 좋아 (1983) (1983년 12월 30일, 1983년 KBS 가요대상)
친구여 (1983) (1984년 12월 30일, 1984년 KBS 가요대상)
그대여 (1985) (1985년 12월 30일, 1985년 KBS 가요대상)
허공 (1985) (1986년 12월 30일, 1986년 KBS 가요대상)
특정 대표곡을 꼽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히트곡들이 너무 많으며, 그냥 그가 발표한 모든 노래들이 대부분 다 메가 히트곡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히트곡 중 지상파 방송사 가요대상을 수상한 노래들만 꼽은 것이다. 그럼에도 대중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진 히트곡들을 굳이 고르자면 다음과 같다.
(1976)
너무 짧아요
돌아와요 부산항에
1집(1980)
창밖의 여자
돌아와요 부산항에
잊혀진 사랑
단발머리
대전 블루스
정
2집(1980)
축복(촛불)
3집(1981)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레야
고추잠자리
4집(1982)
못찾겠다 꾀꼬리
비련
자존심
5집(1983)
한강
나는 너 좋아
친구여
6집(1984)
눈물의 파티
정의 마음
7집(1985)
어제, 오늘, 그리고
그대여
사랑하기 때문에
미지의 세계
여행을 떠나요
아시아의 불꽃
8집(1985)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상처14
바람이 전하는 말
9집(1987)
마도요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청춘시대
10집(1988)
서울 서울 서울
모나리자
11집(1989)
Q
12집(1990)
추억속의 재회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15
13집(1991)
꿈
장미꽃 불을 켜요
14집(1992)
슬픈 베아트리체
16집(1997)
바람의 노래
17집(1998)
기다리는 아픔
18집(2003)
태양의 눈16
그 또한 내 삶인데17
19집(2013)
Bounce
Hello
걷고 싶다
20집(2024)
그래도 돼
찰나
한번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이 히트곡으로만 구성되었는데도 양일 겹치는 노래 없이 이틀이나 진행되었다. 실제로 본인도 콘서트 멘션 중 발표한 곡이 너무 많아서 다 하려면 며칠을 해야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멘트 없이 본인 노래들로만 앙코르까지 꽉꽉 채워 불러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여타 가수들의 콘서트처럼 다른 가수를 게스트로 초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조용필의 콘서트가 끝난 뒤 콘서트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oo가 듣고 싶었는데" 하는 반응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데, 멘션도 거의 없이 노래로 모든 공연을 꾸며서 타 가수들에 비해 콘서트에서 부르는 곡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이 정도니 히트곡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평가
위상
국내 탑클래스 가수만이 도전할 수 있는 잠실 주경기장 콘서트에서 8회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콘서트 최다 관객 동원 타이틀도 당연히 조용필이 가지고 있다. 그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을 보유하고 있다. LP, 테이프, CD, 음원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히트곡과 한국 내 최대 콘서트 인원 동원 기록, 예술의 전당 7년 연속 공연 기록을 가진 가수다. 지상파 연말 가요대상을 전관왕 4회 및 4연패 두번을 포함해 총 11회를 수상한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1987년 더 나은 음악을 하고자 TV프로 대상 수상 거부를 선언한 결과다.
조용필의 음악적 재능, 음악성, 그리고 엄청난 업적도 있지만 그의 겸손함과 끊임없이 배우려는 마인드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다. 조용필은 저런 멘션을 그저 웃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1980년대초부터 정규 19집을 낼 동안 끝없이 자신을 넘고 넘어왔다. 판소리와 락/팝의 접목, 오페라와 락의 접목 등, 장르를 초월한 가수가 그저 되는 게 아니다. 2013년 바운스가 히트할 때도 끝없이 배우고 도전을 했기에 가능했다. 아이돌이 장악한 현재에도 이 노래만큼은 젊은 세대들이 따라부를 정도다.
그러나, 가왕이란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는데, 다름아닌 조용필 자신이다. 2011년 4월의 인터뷰에 따르면 '가왕', '국민가수'와 같은 별칭이 본인에겐 민망하다며 크게 마음에 담아두진 않는다고 한다. 그냥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 그대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한다.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가수다. 당시 9시 뉴스에서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 부대 열성팬에 대한 보도를 이례적으로 내보낼 정도였다. 이 단어의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는지 '오빠부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수많은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싱어송라이터 가수이자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써 지금은 고인이 된 "마왕" 신해철이 롤모델로 추앙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과거 '김혜수의 플러스 유'라는 방송에 출연했을 당시 "마왕으로 불리던 후배 신해철을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질문에 "귀여운 후배"로 평가해서 진행자 김혜수를 비롯해서 관객들이 뜨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고스트스테이션에선 신해철이 조용필의 히트곡들을 직접 리마스터해서 특집으로 튼 적이 있었는데 혹시라도 혼날까봐 조용필이 곯아 떨어질 것이 확실한 공연날 밤을 골라서 방송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흑역사가 된 서세원쇼에서 N.EX.T가 나왔을 때 조용필과 전화가 연결되었는데 이때 신해철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일어서며 예의를 갖췄다. 그 외 이승철이나 이은미조차도 조용필 앞에서는 고개를 못 든다고 한다. 물론 조용필이 군기반장이란 소리는 아니고 존경심에서 하는 소리다.
조용필은 대중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현역 시절의 수많은 음악적 시도의 성공 덕에 대중성과 다양성을 오랜 기간 동안 잡아낸 보기 드문 가수이기 때문. 조선일보의 대한민국의 최고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으며, 2위는 이미자, 3위는 나훈아, 4위는 서태지가 되었다. 그리고 방송국이 굽혀주는 몇 안 되는 가수 중 하나로 가요계 배분과 위상이 높은 점에 기인한다. 보통 PD들이 가수를 지칭할 때 '~씨'라는 호칭으로 큐시트를 주는데 조용필은 방송국에 떴다 하면 최고위급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사실 조용필만 선생님이라 불리는 건 아니고 이 정도 연배의 배우나 가수들은 모두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당장에 패티김이나 이미자가 방송국에 떴는데 "패티김 씨, 이미자 씨" 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실제로, 2013년 기준으로 각 방송국 예능국장급은 다 조용필과 같은 시대 인물이거나 그 아랫세대다. 이승철이 회상하기로는, 자신의 신인 시절은 PD들의 힘이 워낙 세던 시절이라 어린 가수들이 지각을 하거나 하면 '저기 가서 손 들고 서 있어!' 라고 윽박지르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시절임에도 조용필이 방송국으로 찾아오면 반드시 국장급 이상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이승철의 신인 시절이면 조용필이 중견가수이긴 해도 30대 후반일텐데 이미 그 시절에도 위상이 엄청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국내 역사상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가수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가수다. 1980년대는 음악 평론이란 것 자체가 거의 전무한 시기였기 때문에 조용필의 크로스오버적인 실험들이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조금씩 이야기가 되기 시작했다.
단독 공연으로는 2003년 잠실 주경기장에서 데뷔 35주년 콘서트를 하였으며, 자신의 데뷔 00주년 공연 중 마지막으로 게스트를 초청한 35주년 콘서트에는 신승훈, 신해철, god, 이은미, 장나라, 유열이 출연하였다. 이후 수차례 잠실에서 더 공연을 하게 되는데 만석은 기본이었다. 그 중 2003, 2005년, 2018년 공연은 우천 속에서도 매진된 것은 주목할 점이다. 이후 잠실 공연에 도전한 이승환도 우천을 만나며 객석이 비게 되었고, 이후 이문세, 싸이 등도 도전했지만 잠실 주경기장은 쉽사리 만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용필은 괜히 가왕이 아니다.33 또한 1999년 말 대중가수 중 처음으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였으며 향후 몇 년간 연말 투어로 그곳에서 마무리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국내 공연문화(콘서트)에 있어서도 선구자이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계속 이끌어오고 있고 현재진행형이다. 해외 아티스트들도 아무나 시도하지 못하는 무빙스테이지를 2010년 국내에 도입했다. 너비 120m, 높이 33m의 초대형 무대는 잠실 주경기장을 80m나 움직였다. 이 2010년 Love in Love 콘서트때 이틀간 10만 관객을 동원했다.
2018 50주년 콘서트도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규모, 조명, 폭죽 모든 게 넘사벽이다. 모든 활동은 전속 밴드 '위대한 탄생'과 같이 하고 있는데 그의 위상과 걸맞은, 대한민국에서는 전설급이라 할 수 있는 세션들만 거쳐갔다. 대표적인 예가 김광민, 송홍섭, 정원영, 유재하, 김종진, 전태관 등이 있다.
2018년 4월 1일과 3일 평양에서 공연된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 평양공연에도 합류했고, 1차 공연에선 출연자 중 가장 많은 4곡을 불렀다.
헌사
한국 대중음악의 상징, 조용필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의 소개 문구
아이돌적인 인기와 아티스트적인 위상을 거의 처음으로 한꺼번에 거머쥐었던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 사실 한국에서 가능한 음악적인 실험을 거의 다 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조용필 씨의 영향이 대중음악계 곳곳에 남아있고요.
평론가 이무원
(장도연: 그럼 본인이 생각하시기에 노래 잘하는 가수 누가 있어요?)
아니 근데 누나가 있어서 더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게 저는 조용필 선배님. 늘 보면서 '아, 나도 진짜 언젠가 저렇게 계속(노래를) 해야되는데... 내가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 드는 분이 저는 조용필 선배님이에요.
가수 박효신
음악적 평가
한창 활동할 당시엔 노래부터 작곡, 편집, 무대연출까지 못하는 게 없는 초인이었다. 사운드, 공연 퀄리티도 당시 기준으론 압도적이었다. 데뷔곡 '창밖의 여자'는 드라마 주제곡 하나 써 달라는 라디오 PD 주문에 즉석에서 5분만에 작곡한 노래라는 말도 있는데 실제로는 15~2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 나는 가수다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부분이었다. 창법의 경우 현시대의 (믹스보이스적인) 발성과 창법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애초에 창법에 우위 논쟁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발성이나 창법 자체에 대한 지식이 지금보다 못하던 당시 사정을 생각해보면 이해가는 부분도 있다.
조용필의 가창력은 최정상의 실력이다. 50주년 콘서트 당시 2시간 내내 20여 곡을 라이브로 소화했을만큼 그의 목 내구도는 수준급이다. 원래 데뷔 초기에는 선천적인 미성으로 노래를 했으나, 이후 대마초 파동 당시 자숙하던 도중에 판소리에 매료되어 공부하기 시작하고, 로드 스튜어트와 조 카커 등 허스키한 보컬들의 음악도 참고하면서 지금의 창법이 되었다. 한 기자가 '어느 정도의 음역까지 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기타를 만지며 '이게 낼 수 있는 소리 정도는 뭐든지'라고 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보컬 트레이닝과 발성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많은 성대모사에서 볼 수 있듯 고도로 앞쪽에 집중된 비음이 듣기 불편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조용필만의 개성이라고 느끼는 청중 또한 많다. 한편으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 상당히 두터운 탁성을 구사한 바도 있는데 이때의 가창스타일이 조용필 커리어의 정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판소리를 연마한 이후로 벨팅스러운 창법을 활용하는데, 특유의 개성있는 톤과 어울려 댐핑감을 선사한다. 다만 입을 벌리는 크기가 작고 상, 하악의 움직임이 큰 편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인 골라도 포함한다.
특이점으로는 저음, 중음, 고음에서의 파장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인데, 보통 파사지오를 넘겨 고음으로 치솟을수록 소리가 커지는 것과 달리 조용필의 경우 세기가 상당히 일정하게 나타난다. 이는 초창기의 발성과 중후반기의 발성이 바뀌면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는데, 9집까지의 발성이 흔히 그 시대 어른들이 말하는 지르는 방식으로 감정 조절보다는 후련하게 내뱉는 판소리식 발성에 가까웠다면, 10집 이후로 앨범에 직접 참여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자신이 만드는 곡에 보컬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비음이 강조된 보컬은 바로 이 10집 때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원래 밴드 기타리스트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리듬을 굉장히 잘 탄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살펴보면, 특히 중후반기의 앨범의 경우 베이스를 중심으로 꽤 펑키하거나 재즈풍 리듬의 곡(10집-I Love you/모나리자, 12집-내 모습, 13집-어젯밤 꿈속에서, 14집-Jungle City) 이나 뉴웨이브 스타일의 록 음악(13집-꿈꾸던 사랑), 심지어 트립합 (14집-흔들리는 나무)까지 종종 등장하는데, 미묘하게 싱코페이션을 음마다 컨트롤 하는 게 장난이 아니다.
사실 발성으로 따졌을 때 자음을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된소리로 강조하는 방식이 이런 리듬웍과 묘하게 상성이 맞으면서 생기는 효과 중 하나. 이런 점 때문에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보컬에 맞게 곡을 쓰고 편곡하는 레벨이 상당히 높다고 인정받는다. 라이브를 할 때와 스튜디오에서의 음색이 조금 차이가 있는데, 음반에서는 주로 더블링으로 녹음하기 때문에 보컬이 보다 두껍게 들리는 편이다. 라이브에서의 목소리는 그에 비해 가늘지만 커다란 성량으로 이를 어느 정도 커버한다.
의외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인데, 본인 노래의 대부분에 코러스까지 다 해먹는 몇 안되는 보컬리스트 중 하나다. 소리 자체가 가늘지만 워낙 다각도로 활용도 잘하고 음정까지 정확하게 딱딱 들어맞는 보컬이라 주멜로디의 화음을 자기 보컬로 다 채워넣으면서 곡을 더 맛깔나게 하는 데에 있어서 초고수다. 보통 이런 방식은 주로 블랙 뮤직을 장기로 하는 보컬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이를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킨 부분에 대해서 뮤지션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활동 초기에는 가창력에 대해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것은 미8군 시절 패티김, 조영남 등의 스탠더드 팝류의 보컬이 트렌드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가늘고 흐느끼는 듯한 느낌의 조용필은 마치 트로트를 연상시켜서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메이저로의 진출 전까지는 감정 표현이 부족한 가수라는 평가도 받았었다. 단지 시대가 만든 편견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그 시대의 전설적인 세시봉 출신이자 가창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송창식이 거의 그 시대 유일하게 그를 꿰뚫어 보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를 단 한명만 꼽아보라는 말에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조용필을 지목했던 일화도 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조용필은 1980년대 음반 뽑아내기에만 급급한 소속 레코드 사와의 갈등 속에서 음악적 퀄리티에 대한 성찰과 고뇌를 이어간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표현하는 자신의 창법이 듣기에 과하다고 생각하여 절제하는 창법을 이어가게 된다. 실제로 조용필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식으로 길게 끄는 느낌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의 딱딱 끊는 느낌으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유의 창법은 조용필을 다른 가수들과 구분짓는 특징이 되어 많은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용필의 노래를 듣지못한 채 성대모사만 들은 젊은 층들은 조용필을 '특이하게 노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앨범이나 라이브 영상을 보면 노래의 특징마다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재능과 감각이 타고났으나 그뿐만 아니라 그만의 목소리를 만드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있었다. 득음을 하기 위해 노래 연습하다가 각혈이 나오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래 연습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지만 2013년 SBS에서 방영된 조용필 스페셜에서 인터뷰어였던 이승기가 "득음하다가 목에서 피가 나셨다는 일화가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에 "아니에요. 목에서 피가 나면 죽지요."라며 웃으며 대답했다. 재능과 노력이 지금의 명성으로 이어진 것. 이런 창법이 불을 뿜는 대표곡들을 꼽자면 한오백년, 자존심, 한강 등 민요풍 노래 외에도 창밖의 여자, 촛불 등 다른 장르도 가리지 않는다.
음악적 기반이 록 음악 장르이긴 했지만, 커리어 내내 음악적으로 시도한 장르 또한 매우 다양하고 다채로웠다. 간략히 예를 들어 봐도, 하드록(미지의 세계), 로큰롤(여행을 떠나요), 프로그레시브 록(고추잠자리), 사이키델릭 록(촛불), 얼터너티브 록(정말 모르겠네), 펑크(못찾겠다 꾀꼬리), 신스팝(어제, 오늘, 그리고), 퓨전 재즈(서울 서울 서울), 어덜트 컨템포러리(Q), 발라드(슬픈 베아트리체), 뉴 웨이브(단발머리), 라틴 팝(장미꽃 불을 켜요), 애시드 재즈(Jungle City), 일렉트로니카(아하! 그렇지), 컨템퍼러리 R&B(추억에도 없는 이별), 블루스(대전 블루스), 민요(한오백년), 트로트(허공), 동요(난 아니야), 크로스오버(태양의 눈), 오페라(도시의 Opera) 등이다. 더 무서운건 저렇게 시도를 하고, 대부분 다 상업적으로 성공을 했다는데 있다. 18집에서 안토닌 드보르작의 9번 교향곡(신세계 교향곡) 2악장에 가사를 붙인 '내일을 위해'라는 곡에서 오페라가 아닌 클래식, 19집의 타이틀곡인 Hello의 경우엔 버벌진트의 피처링으로 Rap까지 섭렵했다.
이러한 수많은 노력과 그의 천재성으로 공존하기 어려워 보이는 장르들이 대중가요라는 하나의 용광로처럼 녹아든 것은 상당수가 그의 공헌이다. 또한 고령의 나이가 무색하게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 젊은 트렌드에 맞춰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인데, 평소 케이티 페리, 브루노 마스, 마룬 5, Imagine Dragons와 같은 음악도 즐겨 듣고 19집 작업의 모토를 아예 '음악의 깊이' 보다는 '편안함'과 '세대 간의 융합'으로 잡았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있다. 그 결과 Hello와 Bounce라는 젊은 가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곡들이 나왔다.
그의 콘서트가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면, 지하철 배차 간격이 바뀌며, 막차시간이 2시간 연장되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김정일도 조용필의 '허공'을 애청했다고 한다. 물론 남북정상회담 당시였으니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지만, 탈북자들이 쓰는 대북 관련 책자들에서도 북한 고위층 자제들이 조용필 노래를 몰래 듣고 다닌다고 하는 얘기 정도는 훨씬 이전부터 나왔었다. 또한 진짜 립서비스였다 하더라도 그 많은 가수 중 조용필을 언급했다는 데서 그의 위용을 알 수 있는 게 된다. 2011년 문화일보가 실시한 창간 20주년 '대중음악사 20년 최고의 가수와 노래' 조사에서 당당하게 가수와 노래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이승철, 3위가 서태지, 4위가 김건모, 5위가 소녀시대다.
여담으로 90년대에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에도 나와 후배인 이문세나 신해철과도 재미있는 입담을 나누고 경쾌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까불거리던 이경규에게도 웃어주고 이경규가 조용필 노래를 엉터리 중국어로 불러주며 홍콩에 중국어 앨범으로 도전해본다고 뻥치자 이문세가 "이경규 씨, 그만해, 나 머리에서 김날 거 같아."라고 하자 웃으면서 "누가 아니래. 나도 공감이야. 아주 스팀다리미로 써도 되겠어."라고 맞장구쳐줬다.
기부 영웅
그가 운영 중인 YPC프로덕션은 주주배당금 대신 기부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덕에 기부금액만 연평균 3억 원을 기록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있지는 않지만 기부를 엄청 많이 했다. 위에서 나와 있듯이 소속사의 주식배당금액의 일정부분을 기부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아내였던 안진현의 유산인 24억 원을 심장병 어린이 치료를 위해 기부를 했고 2009년에도 조용필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3억 원씩 기부하고 있다. 또한 콘서트 수익금 역시 매년 기부를 해 62억 원 상당의 금액을 기부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포브스지에서 선정한 아시아의 기부 영웅 중에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공식적인 금액은 84억 원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매스컴에 드러나기를 싫어하는 본인의 성격 탓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MBC의 작명가(?)
2010년~2011년 사이에 나왔던 MBC의 음악 프로그램 두 개가 모두 조용필과 관련이 있다. 첫 번째는 그 유명한 위대한 탄생으로, 당연히 어원은 조용필의 밴드 위대한 탄생에서 따온 것. 위탄은 시즌 3까지 방영하며 나름 인기를 얻었고, 방송 내에서 참가자들이 조용필의 노래를 선곡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프로그램 내에서 조용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딱히 하지 않았지만, 무대연습 때 깜짝 출연하기도 하였다.
또 하나는 바로 나는 가수다이다. 2004년 MBC 특집으로 방영된 '나는 조용필이다' 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나는 00이다' 의 원조가 바로 조용필인 셈이다. 나가수의 경우 위에서 서술된 대로 직접 출연까지 했으며, 이 자리에서 두 프로그램의 작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도 했다. 본인 왈, 이래도 되는 건가 생각했다고(...) 사족으로, 나가수 출연 여부에 대해 윤종신이 직접 물었는데 본인은 처음부터 이러한 음악경연에 대해 반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연자로 출연하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른 뮤지션들과의 관계
가수 조용필과 다른 뮤지션들과의 관계를 서술한 문서다. 국내 가요계에서 '가왕' 이라는 별명으로 대표되는 엄청난 위상을 가진 가수인만큼, 당연히 많은 가수들의 로망이자 존경의 대상이다.
이승철
결론부터 말하면 둘이 선후배로 친하다. 조용필이 한 인터뷰에서 포스트 조용필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때 "그래도 승철이가 느낌을 좀 살리지 아마?" 라고 답했다. 이승철 역시 조용필을 깍듯이 대하고 있으며, 용필이형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곤 한다. 본인한테 가왕 소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십중팔구 '가왕은 용필이형이구요' 라고 답할 정도. 대신 본인은 콘서트에서 '보컬의 신가신'이라고 칭하고 다니는 건 함정.
2013년에는 비슷한 시기에 컴백해서 맞붙기도(?) 했는데, 이승철은 먼저 발매된 조용필의 19집 앨범 전곡을 듣고 앨범 전체를 재녹음했을 정도로 막바지 작업에 열성이었다고 한다.
신해철
지금은 사망한 이른바 마왕 신해철이 깍듯이 대했던 선배 중 1명이다. 사실 신해철과는 데뷔 때부터 오랜 인연이 있는데, 바로 신해철이 <그대에게> 로 대상을 받으며 데뷔했던 1988 대학가요제의 심사위원이 조용필이었다. 이와 연관된 일화로, 조용필은 오래 진행된 대회 시간 때문에 막판에는 살짝 졸고(...) 있었는데 그대에게의 인트로 부분을 듣고 번뜩 잠이 달아났다는 얘기도 있다. 조용필은 한 토크쇼에서 락커, 마왕 소리 듣던 신해철을 귀여운 후배라고 언급해서 팬들에게 웃긴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신해철이 진행하던 고스트스테이션에서 조용필의 노래를 종종 리믹스해서 틀곤 했는데, 신해철은 항상 조용필이 공연이 끝나고 곯아떨어져 있을 시간 때만 골라서 조용필의 노래를 틀었다. 이유는 조용필이 방송분을 듣고 혼낼까봐(...) 였다고. 그만큼 신해철이 조용필에게 가진 존경심과, 조용필이 가요계에서 가진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증거다. 두 사람은 생전 음악적인 교류를 꾸준히 이어왔는데, 함께 합동콘서트를 연 적도 있고 신해철이 조용필의 공연에 게스트로 나간 적도 있다.
2014년 10월 27일, 신해철이 의료사고로 사망하자 조용필은 화환을 보내고 제일 먼저 빈소에 조문했다. 그가 남긴 조의는 "훌륭한 뮤지션을 잃어서 안타깝다." 였다.
유재하
저와 유재하 군이 처음 만난 것은 키보드 연주자로 위대한 탄생에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가 작곡한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남긴 음악들은 두고 두고 우리 가슴 속에 남을 것입니다. 조용필이었습니다.
유재하는 한양대 재학 시절 학교 몰래 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다만 일정 문제로 2개월만에 밴드를 탈퇴했기 때문에 조용필과 특별한 개인적 인연이 있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조용필에게 불후의 명곡 중 하나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작곡해줬다. 이때 유재하가 곡을 준 스토리에 대해선 각각의 설들이 있는데, 유재하 항목 참조. 어찌됐든 조용필은 <사랑하기 때문에>를 자신의 7집 앨범에 수록했다. 다만 타이틀곡은 아니기도 해서 이땐 크게 히트하진 못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곡은 1987년 지금도 회자되는 레전드 앨범 유재하 1집에 수록되고 난 뒤에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이렇게 유재하와도 연이 있던 조용필이었지만, 후배 유재하는 1987년 11월 1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사랑하기 때문에가 유명해지고, 조용필은 90년대까지도 자신의 콘서트에서 종종 <사랑하기 때문에>를 라이브로 부르곤 했다. 실제 90년대 조용필 Best Vol.2와 조용필 30주년 기념 음반 Part. 1에서 다시 부른 곡은 이전과 또 정서와 창법이 좀 달라졌다.
김경호
의외라면 의외로 조용필이 아낀 후배 가수 중 하나로, 1990년대부터 인연을 맺어왔다. 나가수에서 밝히길, 어느 날 조용필이 연이 없던 자신을 초대해 대선배님이라 긴장하면서 식사 자리에 갔는데, 선배님이 파자마를 입고(...) 나오는 것을 직접 봤다고 한다. 조용필의 파자마 입은 모습을 본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신나게 자랑한 건 덤. 조용필도 가수 입장에서 저정도 고음이 되는 락커 후배가 한국 가요계에 나타난 것에 나름 신기함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
2003년 1월 조용필이 부인상을 당했을 때, 김경호는 장례기간 내내 빈소를 지키며 궂은 일을 전부 도맡아 이를 계기로 더 가까워졌다고 밝힌 적도 있었다. 또 김경호가 2004년 무렵 성대결절로 세간의 혹평을 받고 알콜의존증까지 앓으며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조용필이 조언과 위로를 해주며 힘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나가수 특집 당시에도 김경호가 부른 못 찾겠다 꾀꼬리를 크게 호평했으며, 조용필의 혜안대로 김경호는 해당 경연에서 1위를 차지했다.
여담으로 김경호가 존경하는 또 다른 가수는 김종서인데, 김종서 역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조용필 추종자이다.
결혼
1984년 3선 국회의원이었던 박찬의 딸 박지숙 씨와 결혼했지만 4년만에 합의 이혼했다.1 이혼 사유는 성격차이로, 결혼 이후에도 음악활동에 몰두했던 조용필과 달리 박지숙 씨는 조용필이 결혼 후에는 가정에 더 충실해주길 바랬다고 한다. 이혼 당시 박 씨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양도하고, 이혼은 자신의 잘못이 크다고 말하며 원만하게 이혼했다. 조용필의 노래 <Q>를 들어보면, 이혼 당시 조용필의 복잡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6년 뒤인 1994년 안진현 씨와 재혼했다. 안 씨는 미국에서 로비스트로 활동했던 인물로, 무려 앨 고어 미국 부통령과도 친분이 있을 만큼 미국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두 번째 결혼식은 청와대에서 치렀는데, 조용필은 이 당시 매우 긴장했었다고 회고했다.2 두 사람은 1993년, 조용필이 애틀랜타에 공연을 갔을 때 친누나의 소개로 만나 사랑을 키웠다. 안 씨는 결혼 이후 가수로서 조용필의 삶을 조용히 내조하였으며 조용필은 이런 아내에 대한 사랑이 매우 극진했다. 여러차례 콘서트나 인터뷰에서 아내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었고, 이로 인해 연예계에서 대표적인 잉꼬부부로 알려졌었다. 안진현은 매년 조용필의 연말 콘서트에 참석해 남편을 지켜봤고, 조용필은 공연이 끝나면 연초까지 아내가 있는 미국에서 시간을 보냈다.3
그러던 2003년 1월 5일, 안진현 씨는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었다. 사인은 5년여동안 앓아오던 심장병으로, 말년에는 건강이 나빠져 그의 콘서트에 참석하는 걸 사양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하지만 사망 당일에는 아침까지도 조용필이 끓여준 미역국을 다 먹고 정상적으로 활동할 정도로 괜찮았다고 하는데, 그 날 오후 3시경 갑자기 몸이 안 좋다고 해 병원으로 데려간 뒤 얼마 안가 숨을 거뒀다고 한다.
조용필은 예상하지 못했던 아내와의 갑작스러운 사별에 크게 충격을 받고 오열했다. 미국에서 장례식을 치렀는데, 장례식이 끝난 뒤 근처 한인 노래방에 들러 몇 시간동안 노래를 부르며 애통함을 달랬다고 한다. 화장한 유골함을 한국으로 이송해 다시 한번 장례를 치렀는데 이때 god, 김경호, 박진영, 강타, 장나라 등 후배 가수들이 조문을 오기도 했다.4 안진현 여사의 유골은 배우자의 선친, 즉 조용필의 장인이 모셔진 납골묘에 함께 안치되어 있다.
아내와 사별한 뒤 조용필은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했으며, 몇 년동안 자택에 은둔하고 우울증을 앓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다. 후배 가수 김경호가 말하길, 이 시기 조용필의 집에 가보면 항상 검은색 커튼이 쳐져있었고 낮에도 커튼을 걷지 않으며 암흑 속에 살고 있었다고.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내와 사별 후 3년 동안 제대로 음악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2003년 18집 이후 10년동안 음반이 나오지 않은 것도 아내와의 사별 이후 정신적인 충격이 큰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8집에 수록된 노래 '진(珍)'이 바로 아내를 그리며 제작한 노래다.5
두 번의 결혼생활 동안 자녀는 없었다. 첫 번째 결혼의 경우 부부 사이의 불화도 있었고 결혼 기간이 4년 밖에 안 되어 아이를 못 가졌으며, 두 번째 결혼의 경우 두 사람 모두 만혼이어서 자녀를 가질 수 없었다. 조용필은 매 기일마다 아내의 묘를 찾고 있으며, 종종 페이스북에 소식이 올라오곤 한다.
여담이지만 안 씨가 사망하고 1년 9개월 뒤인 2004년 10월, 뜬금 허경영에게 소송을 당한 적이 있다. 소송 내용이 뭐냐하면 안진현에게 생전 동양화 매매대금을 받지 못했다며 조용필을 상대로 50만 달러의 매매대금 청구 소송을 건 것. 당연히 증인이나 물증이 없었고, 결국 기각되었다.
5. 영웅적 면모
조용필은 지역 최고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필은 음악이 하고 싶어서 가출을 했다. 집을 나왔다가 형한테 잡혀 들어갔다가 또 나오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고 한다. 유복한 가정 환경으로부터 오는 안락함, 안정감, 심지어는 가족과의 관계까지, 모든 걸 버리고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건 보통 열정이 아니다. 그리고 당시로는 대중음악 그 자체인, 프로들의 무대인 미8군에 가기까지 독기 또한 보통이 아닌 것이다. 소위 잘 사는 집 자식이면 열정이 있더라도, 어떤 순간에는 열악한 환경, 치열한 경쟁에 지쳐 결국 포기했을 법한데 그런 시련을 그대로 이겨냈다는 게 대단하다. 이 대목에서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끈기(독기), 그리고 결단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후 1집부터(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대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2집, 3집을 꾸준히 냈다. 이 시기 언제쯤, 조용필 아버지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내 아들이 누가 봐도 대한민국에서 지금 돈을 제일 많이 버는데, 아직까지도 지 집 하나 없이 전세 살고 있다. 아무래도 매니저가 됐든 누가 됐든 중간에서 해 먹는 거 같다. 기자가 함 알아봐주라."라고 했다고 한다.6
이에 대해 해당 기자가 말하기를, "아버님. 누가 중간에서 해 먹는 게 아니라, 아드님(조용필)은 100을 벌었다 치면 90 이상을 음향장비, 악기 등에 전부 투자하고 해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1등급 장비로 모두 맞추려 하니까 돈이 없는 겁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그 엄청난 음향 장비를 운송하려고 덤프 트럭을 2대씩 사서 끌고 다녔다고 한다. 최정상의 자리에서 오히려 더 나아가기 위해 음악에 그 모든 걸 재투자했다는 점이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 1집부터 그런 대히트를 치는 것도 어려운데, 갑작스런 인기에도 묵묵히 재투자, 더 나은 음악을 위한 도전 등 진정 영웅적 면모를 갖춘, 타고난 슈퍼 스타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본인의 콘서트 밴드 위대한 탄생도 엄청난 투자를 한다. 이후로도 나왔다하면 1등, 연말 대상이었다. 가요계는 조용필이 과장이 아니라 8할 이상이었다. 그리고 1987년, 공식적으로 연말 시상식 수상을 거부하는 결단을 보였다. 더 이상 순위에 집착하지 않고 더 고차원의 음악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이미 1987년 이전의 활동과 히트곡만으로도 한국역사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뮤지션이 되었을 텐데, 또 한번 더 도약하기 위해 더 고차원의 음악을 하기 위해 콘서트로 본인의 주무대를 옮긴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TV는 상당히 열악한 사운드 시스템이었는데 조용필은 이에 대한 갈증과 불만이 상당했다. 뮤지션으로서 더 나은 무대, 더 나은 사운드와 퍼포먼스를 갈망한 것이다. 방송과 결별하며 그때동안 이뤄놓은 대중적 인기, 명예, 돈 모든 걸 버리고, 오로지 음악적 진화만을 추구한 결단이었다. 조용필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 뮤지션으로서의 자세가 어떠한지 또 한번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때부터는 선진화된 해외의 공연무대를 보고 분석하고 공부했다. 이때부터는 가수 조용필을 초월해 무대 총감독 역할까지도 겸하게 된다. 그전까지 국내 무대는 그저 조명 몇개 반짝반짝하고 진부한 폭죽 터뜨리기가 전부였다면 조용필 콘서트는 완전히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사운드부터가 달랐다. 모든 좌석에서 골고루 느낄 수 있는 사운드, 어떤 각도에서 보든 화려한 조명, 그리고 무빙스테이지, 어마어마한 규모. 해외의 일류 공연을 그대로 모방해왔기에 모든 게 달랐다. 음악관계자들은 물론 뮤지컬이나 연극쪽에서도 조용필의 무대를 참고하고 분석했다고 한다. 초기 몇 년은 티비에서 안보이니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고, 그때만해도 가수를 직접 보러 콘서트에 간다는 문화가 대중화되지 않았을 때다. 그래서 관객이 좀 적었는데 그럴수록 더 돈을 쏟아부으며 무대에 집중, 아니 집착했다. 비로소 점점 입소문을 타고 주목을 받으면서 그 이후로 현재까지 만석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 당시에 밤무대에 나가서 노래 몇 곡을 부르면 수십 억을 준다고 했지만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현재로 치면 곡당 4~5천만 원 선이다. 진정한 음악인으로 어떻게 음악을 대하는지도 알 수 있다. 최근 50주년 공연에도 무대에 3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데뷔 40주년까지 완벽한 정체성을 확립하며 활동해왔고 마침내 2013년에는 완전히 새로운, 다시 한번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수가 되겠다고 19집을 내놓는다. 'Bounce'는 당시 초등학생들도 따라 불렀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런 곡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아직까지도 국내 아이돌 음악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항상 듣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 작업을 수십년 해왔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트렌드나 감을 잃지 않고 EDM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단순히 한국 아이돌을 참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앨런 워커, 시아 등을 즐겨듣는다니 완전히 젊은 뮤지션과 아이돌과 경쟁하는 가수. 이 모든 것은 정상의 자리에서도 늘 새롭게 배우고 익히는 자세, 자만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다. 돌이켜보면 조용필은 늘 새롭게 배우고, 새로운 시도를 했다. 민요, 판소리를 접목한 곡도 있고, 뮤지컬, 오페라와 접목한 노래도 있다. 한때는 뮤지컬을 하려고 하기도 했었다. 비록 그런 음반이 대히트까지는 치지 못했어도 그런 끊임없는 시도, 도전이 그를 발전시켰다.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변화, 혁신을 추구하는, 더 나은 차원으로 가려는 뮤지션으로서의 순수한 갈망이 엿보인다. 그냥 한마디로 조용필은 한 평생 음악에 미쳐있는 음악 중독자고, 음악을 진정성 있게 대하는 뮤지션이다. 그의 삶이 곧 음악이고, 음악이 곧 조용필의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위대한 탄생의 리더 최희선은 조용필은 언제나 세상의 환호든 뭐든 덤덤하게 반응하며 다음 곡이나 앨범을 준비하는데 몰두한다고 언급했다. “국민들의 마음에 닿은 노래로 내 역할은 다했다.”라고 하며 조용필쯤 되면 소위 말하는 “라떼는 말이야~”가 나올 법도 하지만 ‘내가 왕년에’, ‘내가 과거에’ 같은 말을 하는걸 본적이 없고 “우리가 앞으로 뭘 해야 한다.”만 말했다고.
승부사적 기질, 그리고 19집
Hello 티저를 보는 순간 그 감각에 놀랐다.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시도로 대중을 열광시킬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조용필의 음악으로 ‘아티스트’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고, 후배들에게도 이정표가 돼주셨다. 그런 면에서 존경하고, 부럽고, 배우고 싶다.
이승철
2013년 45주년을 맞아 조용필이 19집을 발표했는데 대한민국 전체에 바운스 열풍을 일으켰다. TV 가요프로에 출연 하지 않고도 1위를 했다. 결국 연말 결산에서 조용필의 'Bounce'가 '올해의 노래'로 선정되었는데, 그 뒤로 싸이의 젠틀맨, 크레용팝의 빠빠빠, EXO의 으르렁, 아이유의 분홍신이었으므로 정말 가요계가 쟁쟁했던 한 해 였다. 심지어 싸이의 젠틀맨으로 말하자면 강남스타일의 후광으로 발매 이전부터 기대를 모았던 노래였다.7 이런 엄청난 음반을 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음악평론가 강헌은 "19집의 음악성 자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기보다, 최고의 슈퍼 스타지만 또 한번 이런 시도를 했다는 거 자체가 '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앞으로 쓰러지겠다'라는 조용필의 승부사적 기질을 엿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라고 했다. 이미 수많은 세월을 최정상의 자리에 서 있었지만, 또 한 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전하고 모험하는 자세를 가진 것이었다. 비록 19집이 실패하더라도 그래서 비록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어쨌든 본인은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고 쓰러지겠다는 그런 승부사적 기질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본인이 음악적으로 지향하는 가야 할 길을 갔기에 뮤지션으로서 상당한 의의를 가지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한 시대에 잘 나가다가, 한 두 번 정도 앨범이 히트를 못치면 그 이후에는 엄청난 음악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그 이후엔 두려워서 앨범 발표를 못하게 되는데 조용필은 언제나 그렇듯 거침없이 밀어붙였고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비록 중간중간에 대히트까지는 못 친 앨범들도 있지만 본인의 음악적 진보를 위해서 거침없이 도전했기에 결과론적으론 발전하게 되었고 차후에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시도가 수십 년 이어져 오면서 19집은 또 한번 어떤 기존의 틀을 다시 한번 완전히 깼고, 10대, 20대에게까지 신선함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조차도 열광하게 만들었다.조용필은 19집 앨범을 발표하면서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그런 자세로 준비했다."라고 했는데 으레 가수들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난 이렇게 전략적이고 치밀한 사람이다."라는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10대, 20대는 조용필이라는 사람을 들어는 봤지만 그 가수가 어떤 노래를 하는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자세히는 모르기 때문이다. 19집을 발표하게 되면 조용필은 베테랑 가수지만 그들에게는 신인으로서 다가가게 된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준비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런 점을 긍정적인 기회로 여겼다고 한다. 요즘 트렌드에 맞는 곡을 하나 낼 뿐인데 자신이 내면 틀을 깨는 게 되고 반전의 효과가 극대화되니까 말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하면 좋은 결과를 끌어낼 수 있나 판단하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한편으로, 'Bounce'는 초창기 1980년대보다 더 의의가 있는 우리 가요사의 정말 한 획을 그은 의미있는 곡이다. 예를 들어 1집 당시, LP를 한장 사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아빠, 엄마는 '창밖의 여자'를, 아들, 딸은 '단발머리'를 듣는다 하여 세대를 아우르는 가수라 하였는데, 'Bounce'는 단 한 곡으로 세대를 통합했으니 말이다. 2013년에 빌보드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가왕의 눈물
1993년 세종문화회관 공연 중 노래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데 여러 설이 있다. 당시에 공연 얼마 전 모친상을 당해서라는 말도 있고, 앵콜을 10번 가까이 받아서 그렇다는 설도 있다. 저 곡 이전에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를 부를 때도 약간 울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자 쪽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의 진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2003년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35주년 콘서트에서도 눈물을 보였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생각하며 쓴 곡 <진>을 부르는 중이었는데, 하필 노래를 부르던 중 소나기가 내렸다.
2018년 대구 콘서트 중 오로지 음악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가왕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에서 가왕과 팬들의 눈물바다가 된 50주년 투어의 명장면 중 하나다. 팬클럽 단관석쪽으로 나와서 관객들과 소통하며 얘기를 주고 받다가 비련을 부르기 시작했다. 1절에서부터 약간 그런 낌새를 보였는데 2절을 통으로 날렸다. 수십 년 한결같이 본인에게 열광해주는 팬들에 대한 고마움과 한편으로는 그 젊었던 소년소녀들이 이제 늙은 중장년층이 되었다는데서 오는 서글픔 등 만감이 교차하여 흘렀던 눈물이 아닐까 싶다.
사실상 미8군 출신의 마지막 히트가수다. 미8군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시발점이자 중심지였고 프로들의 무대였다. 장르 분화가 강해지고 언더그라운드-인디 개념이 나타나기 전에 바닥부터 올라온 마지막 가수. 전국구 방송이 아닌 지역 기반으로 전국구 스타가 된 마지막 가수다.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1981년에 그 사랑, 한이 되어라는 로맨스 영화에 주연으로 나온 바 있다. 다른 포스터 이 영화는 이후로 묻혀져서 그야말로 보기 어려운 영화가 되었다가 2009년에 팬들이 소규모 재상영을 가졌다. 그래도 한국영상자료원이 필름을 보관하고 있어 이따금 틀어주기도 한다. 근래 상영은 2017년 10월 18일과 20일로 되어있다.
트로트 가수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원래 락 밴드로 미8군 무대에서 음악을 시작한 사람이다. 이는 초기 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용필의 음악은 락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엄연히 말해서 지금도 본인의 락 밴드인 위대한 탄생의 보컬리스트 겸 세컨 기타리스트(리듬 기타리스트)이다. 반 세기를 해 온 만큼 기타 실력 또한 뛰어나며, 2000년대 이후에는 기타리스트임을 강조하지 않고 있지만, 기타 연주(특히 전기 기타) 잘 하는 가수로 알려져 있던 80-90년대 앨범이나 위대한 탄생 공연 포스터에는 대부분 기타를 들고 있다. 물론 현재도 공연 중에 자주 기타를 든다.
조용필의 노래 허공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뮤직비디오를 찍은 노래며 이 뮤직비디오에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혜수가 출연했다.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을 때 신해철이 속해있던 무한궤도의 곡 '그대에게'의 강렬한 전주에 꽂혀 바로 대상감으로 점찍었는데 실제로 무한궤도가 대상을 거머쥐었다. 그대에게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그대에게'의 전주는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끌기 위한 신해철의 전략이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왕에게 먹혔으니 제대로 성공한 셈이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조용필도 이를 염두에 두고 '서울 서울 서울'을 만들었으며 본인이 직접 88올림픽 D-100기념 축제에서 밝혔다. 다만 1988년 서울 올림픽 주제곡을 노리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곡 자체는 주제곡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조로 구성되어있다. 실제로 이 노래는 오히려 올림픽이 끝난 후 아쉬움에 물들어 있을 사회를 그리며 만들어진 노래라고 한다.
한때 일본에서도 가수로 왕성하게 활약했다. 1990년대 초, 한류라는 단어조차 형성이 안 됐을 때, 이미 조용필은 일본인에게도 잘 알려진 한국의 가수였다. 엔카, 록 음악, 발라드 등의 뮤지션으로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일본에서는 주로 엔카 가수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조용필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想いで迷子(오모이데마이고, 추억의 미아)'12는 전국적으로 대히트, 일본 내에서 100만장 이상을 판 플래티넘이 되었다. 1994년 기준으로 일본 내 조용필의 음반 누적 판매량은 공식적으로 600만장, 비공식적으로는 800만장이라고 하나, 이는 과장된 면이 많다.
우선 조용필의 일본 내 최대 히트곡인 '想いで迷子'는 1986년에 발표된 후 1987~1988년에 걸쳐 꾸준히 사랑받은 히트곡은 맞다. 오리콘 주간 최고 순위는 13위이지만 1988년까지 꾸준히 팔려 1988년 오리콘 싱글 연간 차트 35위를 차지하였다.13 그러나 100만 장이 팔렸다는 것은 과장이 심하게 들어간 것이다. 일단 1988년 연간 차트에서 '想いで迷子'가 기록한 판매량은 21.8만 장이다. 그런데 '想いで迷子'는 1986~1987년 연간 차트에는 못 들어갔고, 1986년, 1987년 연간 차트의 50위 작품 판매량은 19.3만 장과 15.3만 장이다. 즉 '想いで迷子'가 1986~1987년에 연간 50위권에 아슬아슬하게 못 들어갔다고 가정해도 총 판매량이 19.3+15.3+21.8=56.4만 장을 넘을 수가 없다. 최대 히트곡인 '想いで迷子'가 이 정도고, 또다른 대표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26만 장 정도가 팔렸다고 하니, 조용필의 총 음반 판매량이 600만 장을 넘었다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상 조용필의 소속사 측이 일본 내 인기를 과장/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일본에서의 음반 판매 기록으로는 김연자가 더 많이 팔았다. 1980년대까지 국내와 일본에서 잘 알려진 남성 트로트 장르 가요는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는데, 조용필 이후 일본에서의 인지도 1위 남성 트로트 가요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뀌었다. 국내에서도 김정구 사후 '눈물 젖은 두만강'이 점점 잊혀 가고 있는 데 비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아직도 줄기차게 불리고 있다. 그 외에 조용필은 '想いで迷子' 외에도 '夢夜舟(꿈의 밤배)', '愛の共犯者(사랑의 공범자)', '紅い落葉(붉은 낙엽)', '悲しみのゆくえ(슬픔의 행방)' 등의 여러 곡을 발표했다.
다만 일본 활동 당시 판매량 문제와는 별개로 한국을 대표하는 인기 가수로서 사실상 국가대표급 대우를 많이 받았다. 특히, 한국 쪽의 푸시도 엄청났는데, 당시 일본 인기 엔카 가수들을 한국에 초청해 합동 공연을 열기도 했고 한국 지상파에도 나왔다. 그리고 인기 엔카 가수들이라고 보기도 무리도 많은 게 가장 친했던 타니무라 신지의 경우는 나카지마 미유키와 같은 장르를 하는 뮤지션이다. 본의 아니게 엔카 느낌의 노래를 만들었지만, 본질은 사다 마사시와 나카지마 미유키처럼 포크 가수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라 당시 일본 가수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라 임팩트가 컸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임팩트가 컸는지 반대로 일본 문화가 다시 한국을 파고든다며 이를 비난하는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조용필이 초청한 일본 가수들과 친분이 있는 일본 가수들은 일본 내에서도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고 또한 추억의 가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절친인 타니무라 신지의 경우는 'いい日旅立ち(좋은 날의 여행)', '昴(묘성)'과 같은 세기의 명곡들을 남겼으며, 특히 'いい日旅立ち'는 불세출의 가희인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장 대표적인 곡으로 꼽히며14, 그 작사 작곡을 맡은 게 다름아닌 타니무라 신지였었고 또한 조용필도 'いい日旅立ち'를 불렀다. 또한 호리우치 타카오, 모리 신이치, 후세 아키라15 등과도 친했으며 탁월한 음악적 재능과 가창력을 보인 가수들이었다. 그로 인해 조용필을 좋아하는 노인들 중에서 조용필로 인하여 일본 노래를 접한 사람들도 많아지기도 했다. 현재도 한류가수들의 인기의 척도로 종종 거론되는 NHK 홍백가합전에 4년 연속(1987~1990년)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최후의 출연이던 1990년 같은 경우 서울 롯데월드 현지 중계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 부른 곡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참고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 기네스북에서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외국 가수의 노래' 로 등재되었으며, (약 30회 이상) 일본 내에서도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일본에 진출한 한국배우/한국가수를 통틀어 가장 높은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다. 2002년 20대를 겨냥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위였다.16
천재라고 불리는 비운의 가수 유재하의 최고의 히트곡이자 명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사실 조용필 음반에 먼저 수록되어있다. 위대한 탄생의 멤버였던 당시 새파란 20대의 청년이던 유재하의 재능을 꿰뚫어보고 '너 곡 좀 써봐라' 라고 부탁을 했고 유재하가 감격해서 1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한 곡만 쓰여서 유재하가 실망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 에피소드는 이후 유재하가 참여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도 똑같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김현식이 멤버들에게 곡 좀 써오라고 하니까 혼자서 있는 곡 다 가져다줬는데 형평성 맞춘다고 멤버당 한 곡씩만 넣어서 유재하가 삐져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나갔다고 라디오 스타 김현식 특집에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밝혔다. 이때 김현식에게 가져다준 곡은 명곡인 '가리워진 길'이다. 그 10곡은 이후 유재하 1집의 수록곡이자 그의 유작 음반이 된다.
조용필은 대중문화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아이들이 보는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서도 조용필의 '친구여' 가 배경음악으로 나온다.17 그 노래를 들은 둘리는 크게 기뻐하고 감격하면서 노래를 따라부르며 눈물을 쏟는다.
1980년대 엄청난 인기 가수였지만 당시 연예인을 무시하던 사회풍조 탓에 황당한 시비도 많이 당했다.181985년에는 카페에서 함께 술 마시자는 제안을 거절했다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전치 5주의 부상을 입기도 했다.
1991년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KBO 리그 개막전인 태평양 돌핀스 vs LG 트윈스 전에 초청되어 애국가를 열창하다가, 마지막의 '길이 보전하세'를 '우리나라 만세'로 잘못 부른 적이 있다. 본인은 '카메라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서'라고 해명했지만,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어쨌는지 이후 애국가를 부르는 초청 자리에는 가지 않고 있다.
1993년 해운대 콘서트에서 1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적으로 치러냈으나, "슬픈 베아트리체", "고독한 러너" 등이 실린 14집과 "남겨진 자의 고독"의 15집이 흥행 실패하며 일시적인 침체기에 돌입했었다. 조용필 본인도 신해철의 음악도시에 출연해 이 시기를 가장 아쉬운 시기로 언급하기도 했다. 94년 안진현과 재혼 및 전담 밴드인 위대한 탄생과 재결합하며 비로소 방송 활동을 재개하며 16집 "바람의 노래"로 모처럼 대중의 반응을 얻었다. 이후 1998년 올림픽공원에서 30주년 공연 콘서트 및 대학로 라이브 소극장 공연이 흥행하며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고, 1999년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첫 공연(대중가수로는 처음)을 치르며 "가왕" 이미지를 굳혀가기 시작한다. 한동안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을 연말 마무리 콘서트장으로 삼았다.
2003년 데뷔 35주년 공연부터 잠실 주경기장 공연을 즐겨 개최하기 시작한다. 2005년에 북한 공연 이후 다시 잠실 공연을 하게 되는데 공교롭게 2003년과 2005년 모두 제대로 비를 만나는 바람에 관객들은 우비를 입고 스탠딩으로 물 반 땀 반 야광봉을 흔들었다. 조용필 본인도 05년 공연은 특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중간에는 스스로 신난 나머지 "비 상관없지 않아요??" 드립을 시전하시다 "비가...음... 조금 덜 오네요" 라고 민망해하며 수습하기도 하였다. 뒤로는 다행히도 비는 피했으나 2018년 5월 12일 50주년 콘서트때 하루종일 비가 왔다.
2010년 5월 28~29일 열린 콘서트(Love In Love) 에서 잠실 주경기장에 10만명의 관객을 모으며20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60세의 나이에도 라이브로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역시나 황제라는 것을 보여줬다. 관객들은 대부분이 4~50대였지만, 노래를 부를 때 열광하는 건 20대로 돌아간 듯 했다고 한다. 특히나 본 공연의 수익금은 소아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기부했는데, 그 액수만도 수십억 원대에 달한다.
어쩌다보니 군가 진짜 사나이를 널리 알린 가수이기도 하다. 1980년대 당시에는 음반 발표시 꼭 건전가요를 넣도록 되어있었는데, 7, 8, 9집에다가 건전가요로 진짜 사나이를 자신이 직접 불러넣어둔 것이다. 다만 재발매본에서는 빠져있다.21
2014년 god의 15주년 콘서트 때 화환을 보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3년 35주년 콘서트 당시 god가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 인연으로 보내준 듯. 여담으로 김태우가 19집 발매 기념 좋은 아침 인터뷰에서 밝히길, 게스트 출연을 하고 그 날 회식에서 조용필이 김태우에게 훌륭한 가수가 될 수 있을 거라며 진심 어린 격려를 해줬고 이것이 가수 생활을 하면서 큰 위로와 자신감이 되었다고 한다.
조용필 콘서트에 갔었던 아티 콘펠드의 말로는, 조용필의 우드스탁(미국 오리지널 말고 한국에서 개최된 우드스탁을 말한다)의 참가는 그의 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가수 가운데 이 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한국 락의 대부인 신중현이나 조용필 스스로도 존경하는 가수라고 밝힌 패티 김 정도다.22 재미있는 사실은 패티 김은 자신에게 국민가수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진정한 국민가수는 조용필과 이미자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연말 시상식에 더 이상 참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이유는 알다시피 조용필의 독주 체제에 제동을 걸만한 가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 조용필은 1980년부터 1986년까지 KBS, MBC의 가수왕자리를 계속 차지했는데, 예외적으로 MBC에서 1982년 이용24, KBS에서 1984년에 김수철, 1986년에 전영록이 가수왕을 차지했다. 또한 이것은 스스로의 의지기도 했다. 1988년은 MBC 가요대제전에서 10대 가수상을 수상하였으나 NHK 홍백가합전 출연으로 무대에 직접 출연하지 않았으며25 대신 일본 출국 전 인터뷰 영상으로 대체되었다.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대표주자였던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우승자에게 골든컵을 준 다음 명예 졸업을 시키는 시스템은 조용필의 히트곡이 1위를 너무 독주해서 그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사실상 그 이유가 맞다고 봐야 한다. 골든컵이 처음 도입될 때는 5주가 아니라 10주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2011년 4월 15일엔 작년에 한 약속27을 지키기 위해서 소록도를 방문해 공연을 했다. 2009년 전남 고흥과 소록도를 잇는 다리가 완공된 이후 많은 가수들이 위문차 방문하였고, 그 때마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진짜 다시 방문한 사람은 조용필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는 소규모 강당에서 즉석에서 요청곡을 받고 중간에는 무대에서 내려와 같이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노래를 부르는 등 주민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011년 5월 7일 서울 올림픽공원 콘서트를 시작으로 2개월간 전국 투어를 열었다. 이번에는 관객 앞으로 움직이는 무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2011년 올해의 콘서트 티켓 최다 판매 가수의 기록을 세웠다. 2위는 이승철인데 이승철이 29회 공연한 반면 조용필은 이에 절반인 14회 공연만으로 티켓 파워에서 앞섰다.
2013년 4월 23일 정규 19집 Hello의 발매가 확정되었다. 4월 16일 선공개곡 'Bounce'가 발표되었는데 발표되자마자 음원차트 1위를 찍었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은 가수가 차트 1위를 탈환한 케이스 자체가 국내에 전무하다. 진짜로 살아있는 전설이다. LP로 데뷔하여 카세트테이프와 CD를 거쳐 디지털 음원까지 석권한 가수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음원 소비 연령대를 분석한 멜론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의 여타 히트곡과 비교해도 소비자층의 분포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즉 조용필의 히트곡을 듣고 자란 4~50대에 한정된 호응이 아닌, 음원 차트의 주요 소비자이면서 조용필을 잘 모르는 10~20대가 듣기에도 충분히 먹히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국민가수다.
2013년 4월 23일 19집 전곡을 발표하면서 쇼케이스가 진행되었으며, 이때 오프닝으로 국카스텐이 '모나리자'를 불렀고, 박정현은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자우림은 '꿈'을 열창하면서 가왕의 귀환을 축하했다.
2013년 5월 3일. 23년 전 가요톱10에서 1위를 차지한 이후로 23년 만에 지상파 가요 프로그램으로서 뮤직뱅크 1위를 차지했다. 그의 나이가 2013년 기준으로 63세라는 진갑을 넘은 나이인데다가 아이돌들이 강세를 보였던 가요프로에서 60대 최고령 가수로서는 최초로 1위를 차지하게 된 이례적인 사례다.
조용필의 가요프로 1위 횟수는 (지상파 3사 기준28 음악방송 1위 기록을 모두 포함해 다음과 같이 무려 78회로 모든 가수들중 가장 많은 수상을 하였으며, Hello도 케이블 채널 MBC뮤직 '쇼 챔피언'에서 1위를 차지 했다. 1981년 mbc 밤의 힛트쇼 라는 순위 프로가 있었는데 고추 잠자리가 1위를 했으나 몇 주간 인지는 정확히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불후의 명곡에선 2018년 4월 21일부터 3주 간 그를 직접 전설로 모셔서 특집 방송을 했다.
차량의 역사가 다양한데 초기에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를 탔다. 이후 해외 공연을 준비하던 시절엔 피아트 132를 탔고 80년대에는 포드 그라나다를 탔다. 이후 현대 에쿠스를 타고 다녔고 현재는 캐딜락 CT6와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를 소유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노래방에서조차 본인 노래만 부른다고 한다. 실제 조용필과 노래방에 가 본 연예인들의 말에 의하면 하나같이 조용필은 본인 노래만 부른다고 한다. 아예 2시간 동안 노래방에서 본인 노래만 콘서트 수준으로 부른 적도 있다고 한다.
히트 곡이 하도 많다보니 콘서트때 세트리스트에 포함되지 않는 곡이 많다. 본인도 히트곡들 전부 세트리스트에 넣으면 며칠동안 해야 할거라고 했다.
2013년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그룹의 신경영 20주년 기념만찬 축하무대에 초대되어 당해 나온 신곡을 비롯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노래를 불렀다. 그 후 이건희 회장과 포옹을 하기도 했다.
2013년 Hello 투어는 전반기와 후반기 투어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는데, 전반기는 주로 실내 체육관이었고 후반기는 야외 경기장 중심이었다. Hello 투어를 통해 그동안 방문이 뜸했던 지역에서도 엄청난 관객을 모았다. 아마 국내에서의 전국투어 단위로는 역대 최다 규모, 역대 최고령 전국투어 기록을 또다시 조용필이 거머쥐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반기 투어가 끝나고 쉬었다가 연말에 앵콜 투어로 또 공연을 가졌다.
2014년에는 활동을 쉬었다가 건강회복 이후 2015년 11월부터 전국투어 공연을 다시 가진다.
배우 안성기와 중학교 동창으로 서로 집에도 놀러갈 정도로 절친이다. 조용필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중학교 때 같이 앉는 짝꿍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안성기 曰, '그 친구 키가 중학교 때 키 그대로'라고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중학교 동창인 안성기와 나란히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인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 외 구봉서와 패티 김도 받았다고 한다. 2003년 보관문화훈장 수훈 이후 개인 통산 두 번째 훈장이다.
꽤나 동안이다. 1950년생으로 곁에 있는 배우 안성기는 조용필보다 프로필 상 2살 연하다.29 사실 젊은 시절에는 노안에 가까웠지만30 이후 나이를 먹었음에도 얼굴이 거의 안 바뀌며 동안이 된 케이스.
1953년생으로 알려진 가수 태진아보다도 3살 연상이다. 동안이다보니 태진아보다 아우가 아니냐, 태진아보고 형님이라고 불릴 만하겠다는 일설도 있으나 실제 연년상으로는 조용필이 태진아보다 3살 연상이고 태진아가 조용필 선배라고 부른다. 1952년생인 배우 이덕화, 이계인보다도 2살 연상이다. 무엇보다 상술했듯이 조용필과 함께 방송 출연이 뜸하기로 유명한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와 동갑이다.
유카와 마나부로 유명한 가수 겸 배우인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한국에서 제일인 가수가 조용필이라고 말한 바 있다.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비산초등학교의 교가를 작곡한 이가 바로 조용필이다. 1978년 설립 이래 교가가 없다가 조용필의 조카인 조수지31가 이 학교에 재학할 당시 학교 측에서 조용필에게 교가의 작곡을 부탁했다고. 작사자는 초대 교장이었던 전정술 교장이다.
엑소, 방탄소년단, BIGBANG의 음악은 물론 공연도 유튜브를 통해 접하고 있고, 외국 뮤지션으로 시아, 앨런 워커도 즐겨 듣는다고 했다.32 운전을 할 때에는 차 안에서 AFKN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고 하는데, 외국의 최신 팝음악을 들으면서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기존 곡을 O.S.T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잘 허락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사용을 허락한 영화들은 전부 천만영화에 등극했다.(택시운전사 '단발머리', 신과 함께 인과 연 '돌고 도는 인생') 게다가 18집 수록곡 '태양의 눈'을 이미지 송으로 사용했던 실미도는 한국 최초의 천만영화라는 기록을 남겼다. 뒷 사정은 31곡에 대한 저작권이 본인에게 없었던 문제도 있는데, 나중에 음반사에 넘어간 권리를 본인이 다시 찾을 수 있어서였다.
다만 최초로 허락을 받고 O.S.T로 사용된 곡은 단발머리가 아닌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라디오 스타)이다. 사실 천만 대박을 못 쳤을 뿐이지 나름 중박 흥행은 하고 관객 인지도도 높은 영화다. 당장 그 예능 '라디오 스타'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33 게다가 주연배우인 박중훈과 안성기는 이 영화로 그 해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했다. 이 곡은 허락 당시 본인에게 저작권이 없었던 31곡이 아니었으며, 동창인 안성기와의 우정 역시 영화 삽입에 한몫했다.
2005년 엠씨더맥스가 조용필 리메이크 음반을 조용필의 사전동의 없이 발매했다가 직접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멤버들 본인의 의사라기보단 조용필의 노래를 리메이크하며 상업적으로 돈이 될 거라 판단한 당시 기획사 사장이 시켜서 제작한 앨범이었다. 조용필도 이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유감표명만 한 뒤 따로 법적인 대응은 하지 않았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개회식 때, 조용필의 노래 '단발머리'가 EDM 풍으로 편곡되어서 선수단 입장곡으로 나오기도 했다.
계몽사의 '학습만화세계사'에 패러디되어 등장했다. 카스트 제도의 유래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수드라 계급의 할아버지와 손자가 수레를 몰고 가는데, 할아버지가 리그베다의 노래 한 구절을 부른다. 손자는 그 노래를 듣고 '가수 용피르가 부른 건가요?'라고 묻는 장면이 있었다.
한창 활동하던 1980년대 당시 본인이 이끄는 밴드 인원들의 실수에 대해 대단히 엄격했다고 한다. 라디오 스타 2009년 11월 11일 방송에서 조용필과 직접적인 접점이 없는 윤종신이 조용필이 본인의 밴드 일원들에게 무서웠다는 얘기를 들은 것을 말하자, 봄여름가을겨울과 이승철이 바로 긍정을 했다. 또한, 한밤의 TV연예 2010년 03월 21일 방송에서 조용필 특집으로 출연한 유영석이 한 일화로 조용필에게 "라이브에서 틀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라고 묻자 그 질문에 대해 조용필은 "그게 무슨 프로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68년에 비틀즈 등의 팝 그룹에 빠져 살다시피 했는데34, 대학 진학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을 뿌리치고 음악을 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는 말이 존재한다.
옛날에는 담배를 하루에 3~4갑씩 피우는 헤비스모커로 유명했는데, 2005년 금연에 성공했다. 2002년 <스타다큐>에서 밝히길 원래 집 안에서 피웠으나 같이 살던 아내가 간접흡연으로 기관지가 안 좋아져 병원까지 가게 되자 집 밖에 나가서 피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었다. 다큐에서 조용필이 방송사 PD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흡연 장면 송출이 가능했었다. 여담으로 그의 9집의 앨범아트에는 조용필이 담배를 피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다.
담배 말고도 굉장한 주당이었다. 한 일화로 '아침이슬'로 유명한 김민기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는 인사 외에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술만 마셨는데 그 자리에서 소주 10여 병을 비웠다고... KBS 창사 80주년 공연 프리뷰 방송에서도 이런 부분들이 언급되었는데, 30분 간 혼자서 폭탄주 13잔을 비웠다거나, 소주를 가장 좋아해서 양주를 파는 주점에서도 소주를 주전자에 부어 몰래 마셨다거나 하는 일화들이 언급되었다. 그래서 가왕인 동시에 주왕(酒王)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
한때 "기도하는"으로 시작하는 비련에 관련된 일화가 인터넷에 돌아다녔는데 당시 매니저였던 최동규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조용필의 팬이라는 14살 지체장애아에게 노래를 들려달라는 의사의 의뢰를 받자 일정이란 일정은 전부 캔슬하고 그 지체장애아가 있는 병원에 찾아가 비련을 불러줬다는 일화인데, 이때 노래를 들은 아이는 처음으로 펑펑 울으며 감정을 폭발시켰고, 이에 감명한 부모가 사례비를 주며 감사를 표하자 '“따님 눈물이 제 평생 벌었던, 또 앞으로 벌게 될 돈 보다 더 비쌉니다'라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며 최동규란 매니저와 병원에서 노래를 불러줬다는 이야기는 허구이며, 오히려 병원에 찾아가 앨범을 주거나 팬의 손을 잡아주고 위로해주는 등의 실존 일화가 와전되었던 것이다. 조용필의 소속사 역시, 뒤늦게 이런 과장된 이야기가 퍼진 것에 대해 당황했다고 한다.
20집은 19집이 발매된 이후 콘서트를 하면서 작업하고 있다고 하는데 신곡이 6~7개 나온 상태라고 한다. 19집과 달리 자작곡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작업이 매우 더디게 진행된데다 코로나19로 인해 베이퍼웨어가 되었다. 이후 2022년 4월 경부터 올해 안에 내는 것을 목표로 20집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온 상황이다. 정규 20집은 오는 2023년 말 발매 예정이며 그에 앞서 4월 26일 선공개 싱글 '로드 투 20 - 프렐류드 2'(Road to 20- Prelude 2)를 발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용필의 인기를 설명해주는 실화 하나를 공개한다. 부산의 한 여고에 어느 교사가 수업 중, 조용필에 관해 얘기를 하면서 "그 친구,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매면 영락없는 하우스 보이지" 라고 했더니 수업 중이던 여학생들이 일제히 "그 발언 취소하라" 라고 들고 일어났고 그것도 모자라 해당 교사가 지도하는 수업도 거부하는 사태까지 있었을 정도다. 그 당시에는 교사가 애들한테 막 대하고 두들겨 패는 게 일상이었는데도 이런 일이 있었다.
대마초 파동 사건
1977년 대마초 파동 사건에 연루되면서1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되었다. 사실 이 대마초 사건은 당시 대마초에 느슨했던 대중예술계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으며 조용필만 연루된 것이 아니라 연예계 전반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조용필 본인은 대마초 파동 이전 활동 및 음반에 대해서 습작 성향이 짙고 부족한 게 많아서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때 조용필은 붙잡혀서 고문까지 당했고 채혈까지 했지만 대마초 성분이 검출되지 않아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애초에 잡혀간 이유가 이 때로부터 거의 10년전에 미군 공연 초창기 시절에 조용필이 친해진 미군의 권유로 대마초를 한 번 피웠다가2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 몸에 안 맞아서 다시는 안 피웠다는 이야기를 과거에 동료들에게 했던 것이, 당시 연예계를 조지려고 들던 검사와 형사들의 조사로 그들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태어나서 딱 한 번 피우고 몇 년 동안 안 피운 대마초 성분이 몸에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10년이면 중금속도 검출이 안 된다. 하지만 조용필은 이 일로 가수 신중현과 함께 1979년 10.26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2년간 대중가요 활동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다.
무면허 음주운전 사건
1993년 12월 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무면허로 음주운전을 하다3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중앙분리대에 설치된 서울 지하철 2호선 환풍구를 들이받아 가슴연골이 부러지는 등의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해서 입원치료를 받고 12월 9일 퇴원했다.
당시 혈중 알코올농도는 0.26%로 전해졌으며 경찰은 "혈중 알코올농도가 구속기준에 미달하고 사고시 함께 타고 있던 피해자와 합의를 본 점, 도주의 우려가 없고 조용필도 전치 4주의 상처를 입은 점들을 감안해서 불구속 입건했다."라고 밝혔다.
기록
음악차트 및 음악 시상식
역대 가요대상 최다 수상자(총 12회)5253
역대 음악방송 통산 1위 횟수 2위(총 78회)54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 보유 : 조용필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결과다. LP, 테이프, CD, 음원에서 모두 차트 1위 곡을 가진 유일한 가수다. 아쉽게도 2000년대에는 콘서트에 집중해서 정규앨범은 2003년의 'Over The Rainbow' 음반 단 한 장만 발표했으므로 이렇다 할 차트 기록이 없다.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곡당 1위 횟수 제한의 계기 제공(1983년) : KBS 가요톱10에서 '못찾겠다 꾀꼬리'가 10주 연속의 기록을 세우면서 나타나게 된 제도다.
KBS 라디오 24주 1위-고추 잠자리 : 6개월 동안 1위 기록
인기순위 동시 최다곡 진입(20위안 TV-4곡, 연예지-6곡)
라디오 트롯부문/비트롯 부문 1위 동시 차지 : '타인', '마도요'
TV가이드 1985년 12월 가요 순위에 1, 2, 3위 -최다 '최고 인기가수상' 수상
MBC '10대 가수 가요제' 가수왕 수상 6회(1980년, 1981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KBS '가요대상' 최고 인기가수상 수상 4회(1981년, 1982년, 1983년, 1985년)
TBC '방송대상' 최고 가수상(1980년)
가수최초 명예의 전당에 등재-MBC(2000년)
제 1회 골든디스크상 대상(대상과 본상, 인기상을 모두 석권)-(1986년)
콘서트
국내 최대 인파 동원한 야외 Concert-해운대 10만 명 이상(1993년)
가수 최초 월드컵 경기장 투어55-2005년(30여만 명 동원)
세계최초 7.2서라운드 콘서트-(2007년 12월)
국내 대중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홀 공연(1980년)
국내 대중가수 최초 공산국가 중국 베이징 공연(냉전시대, 국교 전 1988년)
국내 대중가수 최초 예술의 전당 'Opera hall Concert'(1999년)
한국가수최초 평양(북한) 류경체육관 단독공연(2005년 8월 23일)
국내가수 공연 최초 첨단영상 프로젝트 PIGI영상 사용
국내최초 모노, 스테레오, 서라운드 형식공연-예술의 전당(1999년)
예술의전당 개관(1993년) 이후 최고치 기록갱신-유료판매율 1위(87%)
예술의전당 개관(1993년) 이후 20년간 가장 높은 예매율(104%) 기록(2008년)
한국인 최초 범 아시아 콘서트-팩스뮤직카-(1984년~2004년간 11회)
국내가수 최초 (조용필) 콘서트 신탁 탄생(2008년)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콘서트 기록-스태프 5천 200여명, 스피커 300대, 초대형 스크린 등 잠실 주경기장 공연 횟수도 8회로 압도적(2003년 35주년 콘서트, 2005년 필앤피스 콘서트, 2008년 40주년 콘서트, 2009년 평화기원희망콘서트56, 2010년 LOVE IN LOVE 콘서트 2회57, 2018년 50주년 콘서트 Thanks to you), 2023 조용필&위대한 탄생 콘서트
대한민국 유료 콘서트 역사상 최단 기간 최다 관객을 동원한 공연-2010년 LOVE IN LOVE58
수상 및 설문조사 기록
한국 20세기 최고가수로 선정 및 수상-(설문조사 1위, 1999년)
광복60년 영향력 있었던 인물 1위(연예인 부문)-한국일보 & 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
MBC 선정 정부수립 50년 최고의 스타상 '가수부문' 수상(1998년)
건국 이후 '최고의 가수'로 선정-조선일보 & 한국갤럽 조사(1998년)
네티즌 설문, 통일 후 북한에서도 통할 가수 1위(2000년)
탄자니아 문화훈장 수훈 (2001년)59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 수훈(2003년)
대한민국 역사 움직인 100인에 선정(문화 부문)(2007년)
한국 브랜드가치 설문조사 가수부문 1위(2003년)
과소 평가된 아티스트-여론조사 1위(2003년)
대한민국 100대 명반 두 장 선정-조용필 1집(29위)/조용필 7집(76위)
M.net 레전드100 가수 종합 평가 1위(2013년)
대중음악 평론가 39인이 뽑은 우리시대 최고의 가수 1위 선정 (2023년)
앨범 및 싱글
국내 최초 단일앨범 100만장 돌파(기네스 인정, 1991년)
국내 최초 음반 총판매량 1천만장 돌파(1994년, 1999년 현재 국내외 2천만 장 판매)
최초 단일앨범 100만 장 돌파-"추억의 미아"(1986년)
음악 및 음향
한국 최초 M7(Major Seven) 코드 사용-3집 고추잠자리(1981년)
한국 최초 Digital 녹음-6집(1984년)
일본 관련
일본 NHK 홍백가합전 외국인 가수 최초 및 연속참가(1987~1990년)
일본 NHK홀 외국 가수 최초 Concert(1983년)
한국인 최초 일본에서 골든디스크상 수상(2회-1984년, 1988년)
기타
국내 대중가요 최초로 교과서에 수록-친구여(5집)
국내 대중가요 최초로 뮤직비디오 제작-허공(8집)
대중가수 최초 학문연구회 발족-조용필學(Choyongpilogy)(1999년)
1인 1기업 최초의 가수-필기획, YPC 설립
한국 대중음악사 최초의 국내가수 팬클럽 '오빠부대' 탄생(자생적인 팬클럽)
국내 방송 CF-최초 개런티 1억 원 돌파(1987년)
위대한 탄생
1979년에 처음 결성되어 지금도 조용필과 함께 활동하는 조용필의 콘서트 밴드다. 대한민국 음악사에서 조용필이라는 이름이 차지하는 영향력이 워낙 커서 묻히는 것이지, 이 위대한 탄생이라는 밴드의 실력도 어마무시하다. 멤버 하나하나가 각 분야에서 그야말로 독보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연주자이며, 각자의 연주 실력과 경륜이 대한민국 최정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즉, 위대한 탄생 멤버들 또한 그 분야에서는 '가왕급'인 셈. 밴드 리더인 기타리스트 최희선의 표현에 따르면, '위대한 탄생'은 '국가대표'라고 생각한다고.
2004년 이후 유지되고 있는 멤버 기준으로 보면, 밴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최희선은 부활의 김태원, 백두산의 김도균같은 국내 일류 기타리스트들 조차도 그를 형님으로 모시며, 특히 김태원은 공식 석상에서도 최희선을 본인의 스승 혹은 사부로 모신다고 말할 정도의 엄청난 연주자이다. 그 외 베이시스트 이태윤1, 드러머 김선중, 피아니스트 최태완, 키보디스트 이종욱, 코러스 김효수, 배영호 등이 모두 각 분야에서 프로 중 프로이며, 최고의 실력자들이다.
조용필 콘서트를 다녀 온 젊은 세대 중 상당수가 위대한 탄생의 엄청난 사운드에 감탄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본인이 기타리스트 출신이었던 조용필은 일찌감치 밴드와 사운드의 중요성을 깨닫고, 1980년대 전성기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막대한 자원을 꾸준히 자신의 밴드와 멤버들에게 투자했다. 최고의 멤버들을 불러 모아서, 악기, 연주 장비, 무대 장치 등을 모두 최고 수준으로 구비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밴드 멤버들에 대한 수당과 처우까지 국내 최고다. 그래서 어떤 연주자가 '위대한 탄생' 멤버로 발탁이 되었다고 하면 연주자들 사이에서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일단 실력적 측면에서 국내 최고로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거니와, 멤버들에 대한 처우 또한 국내 최고였기 때문. 그래서 조용필의 전성기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이후에도 꾸준히 '위대한 탄생'이 초대형 라이브 공연에서 환상적인 퍼포먼스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오랜 시간 동안 조용필이 밴드에 막대한 금액과 시간을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위대한 탄생이 이렇게 빵빵한 지원을 받게된 배경은 조용필의 데뷔 직후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1집, 2집, 3집 앨범이 연달아 빅 히트를 하면서 조용필은 큰 돈을 벌었지만 여전히 전세 집에 살고 있었고, 이를 의아하게 여긴 조용필의 아버지가 본인을 인터뷰 하러 온 한 기자에게 "내 아들이 누가 봐도 대한민국에서 지금 돈을 제일 많이 버는데, 아직까지도 자기 집 하나 없이 전세 살고 있다. 아무래도 매니저가 됐든 누가 됐든 중간에서 해 먹는 것 같다. 기자가 좀 알아봐 달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해당 기자가 대답하기를, "아버님, 누가 중간에서 해 먹는 게 아니라, 아드님은 100을 벌었다 치면 90 이상을 음향장비, 악기 등에 전부 투자하고, 해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1등급 장비로 모두 맞추려 하니까 돈이 없는 겁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그 엄청난 음향 장비를 운송하려고 무대에 설 때마다 덤프 트럭을 2대씩 사서 끌고 다녔다고 한다. 조용필의 음악적 발전에 대한 욕심과 집념은 데뷔 초부터 꾸준했던 것.
또한 밴드에 최고의 실력자들을 모아서, 최고의 투자를 하는 만큼, 최고의 사운드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조용필 특유의 완벽주의에 기인하는데, 연주와 사운드의 구현을 최고 수준으로 달성하기 위해 편곡, 합주, 연습을 그야말로 극단까지 가혹하게 밀어 붙인다고 한다. 밴드 리더 최희선의 증언에 따르면, 다른 밴드들이 10회 합주를 해서 완성하는 사운드의 수준을, 위대한 탄생은 세번 정도만에 완성하는 실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합주를 100번 정도 한다고. 심지어 밴드 멤버들 대부분이 나이가 나이인지라3 대형 프로젝트 한번 할 때쯤 되면 조용필 왈 "링거 한 대씩 맞고 와." 라고 할 정도라고. 아침 9시에 시작한 연습이 새벽 1시에 끝날 정도로 엄청나게 연습을 한다고 한다. 송홍섭은 "처음엔 응급실을 갔는데 나중엔 중환자실을 갔다."고 유머를 섞어 말했다.
워낙 사운드가 좋다보니 '콘서트에서 CD를 틀고 립싱크를 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산 적까지 있다고 한다. 그만큼 밴드의 사운드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십 년이나 지난 조용필의 노래가 당대에서도 세련됐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대형 라이브 공연에서 촌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는 이유가 바로, 위대한 탄생 밴드가 극강의 사운드로 노래를 받쳐주기 때문이다. 2025년 공연인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에서도 적게는 10여년, 많게는 50년은 된 노래들임에도4요즘 최신 곡 못지 않은 사운드를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아주 미세하게 매년, 매 공연마다 편곡 작업이 새로 진행되고, 그게 수십 년 동안 축적되다 보니, 시간이 흘러도 당대의 신곡들과 동등한 세련됨을 유지할 수 있다. 최희선은 이를 두고 "요즘에야 프로그램이 있으니 (편곡이)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옛날엔 모든 밴드 멤버가 모여서 새로운 편곡을 위해서 끊임없이 연습을 해야 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그 편곡을 실제 사운드로 구현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강도로 합주 연습을 한다. 개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밴드이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인 것.
이 때문에 공연의 주요 레퍼토리들을 들어봐도, 매 공연마다 조금씩 사운드가 진화된 것을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곡들은 '몇 년도 전국 투어 라이브 공연 버전' 식으로 편곡이 달라지며, 곡의 길이, 빠르기, 구성, 악기별 연주, 심지어 솔로 연주의 멜로디까지 조금씩 세련되게 바뀐다. 거기다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은 콘서트 투어 중심 뮤지션이기 때문에 다른 곡과 접목시키는 능력도 상당하다. 40주년 콘서트에서 미지의 세계-여행을 떠나요 두 곡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기법을 쓴다거나, 50주년 콘서트에서처럼 '미지의 세계' 후렴구를 반복하며 절정부를 한번 더 주는 듯한 효과를 내기도 한다.
위대한 탄생 밴드의 이러한 엄청난 수준의 사운드는 2025년 KBS가 광복 80주년 기념 대기획으로 준비한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 콘서트에서도 여전히 진가를 발휘하였다.
원래 조용필의 백업밴드는 "조용필과 그림자"였으나 대마초 사건 이후 어두운 이미지를 벗기 위해 절치부심하여 "위대한 탄생"이라는 이름을 짓고는 혹독한 연습을 했다고 한다. 비공식 위대한 탄생 1기는 대구의 한 밴드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때 베이스를 맡다가 조용필의 매니저가 된 사람이 훗날 대영AV를 만드는 유재학이다.
1980년 추석 리사이틀을 위해 곽경욱(리드기타), 김택환(베이스), 김청산(키보드), 이건태(드럼)의 1기 라인업이 결성된다. 키보디스트 이호준이 객원멤버격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조용필 3집과 조용필 4집의 연주가 이들의 연주이다.5 이 1기는 1982년, 멤버들이 "천하대장군"이라는 그룹으로 빠져나가면서 해산되었다.6
1983년 일본 NHK홀 공연을 앞두고 다시 송홍섭(베이스), 이호준(키보드), 변성룡(키보드), 김석규(기타), 백천남(드럼), 유상윤(키보드, 색소폰)의 대형 편성으로 재결성한다. 1983년의 멤버에서 송홍섭과 이호준을 주축으로 1988년까지 위대한 탄생을 이끌고 가는데, 그 기간 동안 위대한 탄생에 소속되어 있던 아티스트의 면모는 화려하다. 일본인 기타리스트 아라이7, 유재하, 김광민, 정원영, 김희현, 유영선8, 김종진, 전태관, 최영준9 최이철10, 임동신11 등이 있다.
2기 위대한 탄생은 당대를 대표한 아티스트가 많았던 만큼 멤버들의 작사 작곡 참여도 많았다.
조용필 5집 - 친구여, 이별의 뒤안길, 우울한 주말(inst.)(이호준 작곡)
조용필 6집 - 나그네 바람, 차라리 학이 되리라(이호준 작곡), 정말 모르겠네(송홍섭 작곡)
조용필 7집 - 내가 어렸을 적엔(최진영 작곡)12, 사랑하기 때문에(유재하 작곡)
사랑과 인생과 나! - 이별뒤의 사랑, 청춘시대13(유영선 작곡),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이호준 작곡)
이렇듯 좋은 연주와 곡으로 조용필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던 위대한 탄생이었지만 조용필 개인사정으로(이혼, 건강악화, 각종 루머, 일본활동) 잠시 휴식기를 갖는다. 1989~1993년 사이 조용필은 일본인 멤버로 구성된 "괜찮아요"14 현 위대한 탄생 드러머 김선중이 있었던 "뮤직파티"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93년 조용필의 음악인생 25주년 기념 콘서트를 앞두고, 조용필은 다시 한번 위대한 탄생을 조직하는데, 현재 멤버의 근간이 되는 3기 멤버는 최희선(기타)15, 이태윤(베이스), 김희현(드럼), 최태완(피아노), 한정호(키보드), 김영길(키보드)으로서 이 멤버는 위의 25주년 콘서트를 포함 많은 콘서트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16에서 연주를 한다.
1995년 드럼의 김희현과 키보드의 한정호, 김영길이 탈퇴하며 1기 멤버였던 이건태와 송골매의 키보디스트였던 이종욱17이 각각 가입하며 4기가 만들어진다.18
이 멤버로 2003년까지 가다가 18집 활동 이후 이건태가 탈퇴하며 뮤직파티 출신 김선중을 영입하여 2025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19 2013년 조용필이 오랜만에 내서 대박을 거둔 19집 라이브 공연 때도 어김없이 공연을 도와서 조용필은 공연장에서 위대한 탄생 멤버들을 이야기하며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비록 조용필의 백업밴드이지만, 멤버의 면면으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백업밴드 이상의 팀이며, 음악 욕심이 많은 조용필 때문인지 각자의 멤버들 모두 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아티스트로 인정받고 있다.
참고로 조용필의 팬클럽 중에도 "위대한 탄생"이라는 팬클럽이 있다.
현재 멤버
최희선
Guitar
최희선
경력
• 1977년 데뷔
• 밴드 ‘위대한 탄생‘ 리더 (1993년~ 현재)
• 한국레코딩뮤지션협회 회장 (2011. 03~ 현재)
• 상주시 홍보대사 (2013. 09~ 현재)
•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 이사 역임 (2012. 05~ 2020. 04)
• 상주시민상 수상 (2022년)
이태윤
Bass
이태윤
경력
• 기타리스트 김태원과 밴드 ‘부활‘ 창단 (1984년)
• 밴드 ‘송골매‘ 가입 (1987년)
• 송골매 7집, 8집, 9집 녹음 및 활동 (1987년~ 1990년)
• 스튜디오 레코딩 연주인으로 활동 시작 (1989년)
• 밴드 ‘위대한탄생‘ 멤버 (1993년~ 현재)
• 한양대학교 실용음악과 겸임교수 (2022년)
• 국방 홍보원 KFN라디오 이태윤의 그룹사운드 DJ
이종욱
Keyboard
이종욱
경력
• 벗님들, 사랑과 평화, 송골매 멤버
• 밴드 '위대한탄생' 멤버 (1995년~ 현재)
• 일본 Roland社와 4ch음원모듈 공동 개발
• SK텔레콤 Mobile Warp 자막연동기술 공동개발
• 한국레코딩뮤지션협회 이사
• 한국예술원 주임교수
• 명지전문대학교 실용음악 교수
최태완
Piano
최태완
경력
• 밴드 '다섯손가락'으로 데뷔
• 밴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멤버
• 밴드 '미래로' 멤버
• 밴드 '위대한탄생' 멤버 (1993년~ 현재)
• 두원공과대학교 실용음악과 조교수
•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 감사, 이사
•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이사
김선중
Drums
김선중
경력
• Rock Korea 1년간 활동 (1986년)
• ‘이선희와 한강’ 활동, ’뮤즈에로스‘ 활동 (1987년)
• ‘박재천과 사주팔자’ 그룹으로 활동 (1990년)
• 밴드 '뮤직파티' 활동 (1991년~ 1993년)
• 이승철과 미래로, 이승환과 휴먼으로 활동 (1994년)
• 밴드 ‘위대한 탄생’ 멤버 (2004년~ 현재)
• 포지션, 강산에, 신해철, 임재범 등 국내가수 레코딩 세션 활동
• 한서대.장신대.한국방송 예술진흥원 실용음악과 교수 (2003년~ 2013년)
• K.man으로 활동중 (2014년~ 현재)
• 드럼엔터테인먼트 대표
역대 멤버
0기(1979~1980): 김현기(기타), 박찬용(베이스), 최천섭(드럼), 김청산, 박병무(이상 키보드)
1기(1980~1982): 곽경욱(기타), 김택환(베이스), 이건태(드럼), 김청산, 이호준(이상 키보드)
2기(1983~1988)
1983 NHK홀 콘서트 : 김석규(기타), 송홍섭(베이스), 백천남(드럼), 이호준(피아노), 유상윤, 변성룡(키보드)
1984년(6집) : 김석규(기타), 송홍섭(베이스), 백천남(드럼) 이호준(피아노), 김효국(키보드)
1984년(팩스 뮤지카): 박청귀(기타)20, 송홍섭(베이스), 사무엘 오카모토(드럼), 김효국, 김효성(이상 키보드)
1984년 말: 박청귀, 최진영(이상 기타), 송홍섭(베이스), 사무엘 오카모토(드럼), 김효국, 김광민(이상 키보드)
1985년(7집): 최진영(기타), 송홍섭(베이스), 김정위(드럼), 김광민(키보드)
1985년 7월~1986년 초: 최이철, 임동신(이상 기타), 박강호(베이스), 김희현(드럼), 이호준(피아노), 한정호(키보드)
1986~1987(9집): 유영선(기타), 송홍섭(베이스), 김희현(드럼), 이호준(피아노), 김창남(키보드)
기타: 이중산, 김종진(이상 기타), 유재하, 정원영(키보드), 전태관(드럼)
3기(1993~1995): 최희선(기타), 이태윤(베이스), 김희현(드럼), 최태완(피아노), 한정호, 김영길(이상 키보드)
4기(1995~2004): 최희선(기타), 이태윤(베이스), 이건태(드럼), 최태완(피아노), 이종욱(키보드)
황세준(키보드, 1997), 권연우, 김령, 최훈(이상 코러스), 최정민(기타, 2002)
5기(2004~현재): 최희선(기타), 이태윤(베이스), 김선중(드럼), 최태완(피아노), 이종욱(키보드), 김효수, 김동원, 배영호(이상 코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