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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 리처드 도킨스, 종교는 진화적 부산물(by-product)

Jobs 9 2025. 8. 2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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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

 

이 책이 내가 의도한 효과를 발휘한다면, 책을 펼칠 때 종교를 가졌던 독자들은 책을 덮을 때면 무신론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얼마나 주제 넘은 낙관론인가! 물론 독실한 신앙인은 논증에 면역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수백 년간 발전되어 온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어린 시절을 장기간 교화되어 온 결과다.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은 약간만 도와주면 종교라는 악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이 책을 읽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그럴 수 있다는 걸 몰랐다고 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리처드 도킨스, 서문

 

The God Delusion. 리처드 도킨스가 지은 책. 원제인 'The God Delusion'은 한국어로 직역하면 '신이라는 망상'.

 

대한민국의 정발판 제목인 '만들어진 신'은 'The Invention of Tradition'(에릭 홉스봄)의 한국 번역제인 '만들어진 전통'을 흉내 낸 것일 가능성이 크다. 책의 서문에 이 책의 번역본 중 일부가 원제와 다른 이름의 제목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투덜대는 부분이 있는데 대한민국 역시 마찬가지. 제목이 바뀐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마케팅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번역 퀄러티 면에서도 아쉬운 점이 많으나 같은 작가의 이기적 유전자 번역이 너무나 막장이라서 묻힌 감이 있다. 

 

도킨스가 쓴 글답게 신을 믿어야 할 이유 따위 없다는 것을 구구절절 설명함과 동시에 '종교는 해악이다.'라는 주장을 담은 서적이다. 석학이 쓴 글답게 수많은 사료와 함께 논리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다. 접근성을 위주로 저술되어 있으며, 책을 저술한 목적 자체가 잠재적 무신론자들을 무신론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조지 W. 부시가 삽질하지 않았다면 출판사에서 안 찍어주었을 책이라는 소리도 있다.

 

전 세계에 걸쳐 약 100만 부가량 판매되어, 상당한 판매고를 올렸다고 하는데 이는 종교에 대한 정면 반박과 그간 쉬쉬해 온 종교계의 폐단을 직접적으로 지적하였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해가 잘 안 가거나 어려운 부분은 굳이 이해하려 하지 말고 넘기면서 슬슬 읽어봐도 대략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으니 관심이 있다면 재미 삼아서 읽어볼 만하다. 러셀의 찻주전자나 화물 신앙 등을 소개하는 내용은 책의 주제를 떠나 그 에피소드만으로도 흥미 있게 볼 수 있다.

 

사회 분석학적인 측면에서도 조명될 만하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 성전으로 추앙하는 예리코의 전투에 대해 이스라엘 어린이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직접 반응을 알아본 자료도 3페이지에 걸쳐 소개되었다. 이스라엘의 심리학자인 조지 타마린(George R. Tamarin)의 연구를 보면 조금은 섬뜩하다. 8~14세의 이스라엘 아이 1000여 명에게 여호수아의 '예리코 전투 장면'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니?"라고 질문을 하였더니, '전적으로 찬성한다'가 66%였고, 26%만이 '반대한다'고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반대를 택한 아이들도 대부분 진멸에 대한 반대였지-말하자면, "짐승이나 노예를 살려뒀다면 큰 도움이 됐을 텐데!"라는 식의-, 선조들의 가나안 침공과 학살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가 아니었다! 이에 타마린은 흥미로운 대조 실험을 했다. 168명의 이스라엘 어린이들로 된 별도의 집단에게 여호수아기의 '예리코 전투 장면'에서 여호수아라는 이름 대신에 '린 장군', '이스라엘' 대신에 '3000년 전의 중국 왕조'를 넣어 읽어주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린 장군의 행동에 찬성한 사람은 7%에 불과하고, 75%는 반대했다.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어린이들에게조차도 이러한 결과를 나타내게 한 것.

 

 

 

내용

 

이 책은 종교는 인류에게 해악이라고 주장하며 무신론을 권장한다. 주로 유일신론에 입각한 종교를 부정한다. 그렇다고 범신론, 자연신론, 뉴에이지, 비판적 과학 우월론 따위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진 않다. 애초에 도킨스가 원하는 바는 과학이 모든 것 위에 서서 새로운 신으로 군림하는 사회가 아니라 종교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성적이고 건설적인 사회이다. 

 

개신교만 건드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은 가톨릭이나 이슬람교 등, 대부분의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가 다 언급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다신론까지 언급되어 있다. 특히 개신교에 적대적인 이유는 위에서 말했듯이 대상층으로 삼은 독자가 신권 국가의 국민이 되어가는 미국인들이기 때문이며(정작 도킨스는 영국인이다. 하지만 영국은 미국에 비해 사회의 종교색이 약한 편.) 작중에 도킨스는 자신이 가톨릭을 특히 싫어한다고도 밝힌 바 있다. 이슬람도 굉장히 싫어한다. 

 

리처드 도킨스가 작중에서 신학에 대해 무지하다는 인상을 버리기 위해서 다신교와 일신교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 이걸 읽은 한 독자가 일본의 800만 신(八百万の神)을 도킨스가 알았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고 한 적 있는데, 로마의 신은 30만, 인도의 신도 수가 3억 3천만이 넘어간다. 애초에 책에 언급이 되어있는 사항이기에 그걸 알았다고 해서 도킨스의 태도가 달라졌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이 800만(야오오로즈) 신도 진짜로 800만이라는 숫자보다는 그냥 단순히 '엄청 많은 수' 정도의 의미라 숫자 자체 비교는 의미가 없다.

 

도킨스는 인도의 힌두교를 언급하며 힌두교의 신들은 모두 하나의 신의 화신이자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언급했고, 가톨릭의 경우 삼위일체나 성모 마리아, 거기에 수많은 성인들과 천사들이 기도의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결국 일신교의 신이든 다신교의 신이든 모든 신을 그냥 신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의 논의점에서 차이점은 공통점보다 덜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또한 불교나 유교와 같이 신이 없는 종교들은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뭐 책 제목부터 '신이라는 망상'이니까. 유교나 불교는 종교 이전에 윤리 체계나 도덕 철학으로 다루어도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원래 유교나 불교를 서구적 종교의 틀로 분류 가능한지는 지금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불교의 윤회 사상에 대해 짤막하게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은 있다. 불교의 카르마 교리. 작중에서 선천성 장애인을 극진히 돌보는 불교 신자를 만난 이야기를 하는데, 도킨스가 그 신자의 선행에는 감동했지만 그 사람이 "저 사람은 전생에 그럴 만한 짓을 했으니까 지금의 장애는 그 업보로 받은 거다."라고 말하는 통에 어이가 없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 당시 희대의 망언을 한 목사 김홍도 또한 살짝 언급했다. 김홍도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2004년 발생한 지진 해일이 판 구조의 변경이 아니라 (중략) 인간의 죄악에서 비롯되었다고 비난한 아시아의 성직자들'이라고 나온다. 

 

 

책의 주제

 

크게 6가지의 주제로 구성된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기존의 논증은 모조리 반박될 수 있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확실하다고 하지 않은 이유는 비록 과학적인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검증할 수 있지만 아직 수단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지, 절대로 종교계를 무서워해서가 아니다. 도킨스가 말하기를, 신이 존재할 확률은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FSM)이 존재할 확률과 같다고 한다. 도킨스는 신이 있을 거라는 기존의 논증을 비판했을 뿐, 신이 절대로 없다고 주장하진 않았다. 그저 있을 확률이 FSM이나 보이지 않는 분홍 유니콘과 동일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건 도킨스 개인이 혼자 주장하는 사항이 아니며 많은 무신론자들 역시 같은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진화론은 '신 가설'(God hypothesis - 신이 존재한다는 가설. 그는 지적 설계도 한데 묶어 비판한다)보다 우주와 생명에 대해 더 논리적으로, 간단하고 우아하게 설명할 수 있다.

 

종교는 진화적 부산물(by-product)이다.

 

신(종교)이 없어도 인간은 행복하고 도덕적일 수 있다.

 

종교는 지식에 적대적이고 세상에 불행을 가져온다.

 

무신론자는 위축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무신론자라는 것은 지적으로 건강하다는 증거이며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반응

 

발매와 함께 유일신교 사상이 뿌리 깊게 잡혀있는 서구 문화권에선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수많은 잠재적 무신론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실제로 기독교를 대충 믿던 사람 중에 이 책을 읽고 기독교에 대한 회의론자가 된다거나 무신론자로 변한 사람도 꽤 있다는 일화들도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구미권 국가나 사회에 비해 굉장히 비종교적이며 무신론자가 많은 세속주의적 사회라 '신이 없다고?'식의 사회적 충격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히트를 쳐서 600페이지가 넘는 인문 서적으로는 드물게도 약 15만 부나 판매되었다. 한국 사회는 종교 가운데서는 기독교(그것도 미국식 근본주의 개신교)의 세력이 강하며 이와 관련하여 반기독교 정서도 강한 데다가 한국어로 번역 출간 될 무렵 때마침 발생한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으로 반기독교 정서가 확산된 영향도 있었다고 평가된다.

 

직접적으로 비판받은 개신교 계열은 만들어진 신에 대한 반박론을 긁어모아 몇 권의 책을 종교 지침서나 교양 서적으로 등록해 출판하였고 그중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도킨스의 망상: 만들어진 신이 외면한 진리라는 책이 유명하다.

 

이슬람권은 당연히 만들어진 신을 금서로 지정하며 리처드 도킨스와 그같은 무신론자들을 정말 싫어한다. 아예 대놓고 도킨스에게 "네가 기독교 국가나 유럽 등지에서처럼 여기서 무신론 퍼트리면 너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다."라는 명예살인 협박까지 할 정도다.

 

 

 

비판

 

반기독교 성향이 뚜렷한 한국에서는 만들어진 신과 저자 리처드 도킨스가 유신론을 박살 내는 반종교적 무기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만들어진 신을 비롯하여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을 다방면으로 논박하는 유신론적 책들을 시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단지 한국은 종교 특히 기독교는 근세에 유입된 종교로서, 전통문화의 일부분인 불교와 달리 여전히 외래종교라는 인식이 강한데다 현대 한국사회도 기본적으로 비종교적인 사회이므로 사회 전반의 관심까지는 끌지 못했다.

 

반면 서구권에서는 리처드 도킨스와의 공식적인 토론 및 대담도 상당히 많이 진행되었다. 기독교의 유산이 공고한 서구는 현재에도 문화 사회 역사 모든 부분에서 기독교를 빼고는 정체성을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기독교를 믿거나 긍정하는 입장인 많은 (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이 문서에 나오는 비판자들도 일부를 제외하면 기독교 신앙을 바탕에 깐 비판이다. 

 

그 중에도 특히나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도킨스의 망상: 만들어진 신이 외면한 진리》가 손꼽힌다. 일각에서는 빙빙 도는 소리만 한다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는 오해다. 도킨스가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는 나머지 지나치게 오버했던 부분에 크리티컬을 잘 먹였는데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일반인들은 여간해선 이해하기 힘든 기독교 신학 부분에 중점을 맞추고 있으니, 대중을 향한 호소력에서는 만들어진 신만 못할 수밖엔. 게다가 애당초 맥그래스는 유신 진화론자다. 즉 진화론에 대해선 도킨스와는 이견이 없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오히려 옹호하고 있다. 창조 기사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학설 중, 애당초 진화론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학설도 엄연히 있다. 크게 소지구설, 노지구설, 문학적 구성설로 나뉜다. 진화와 대립되는 학설은 소지구설이다. 따라서 맥그래스가 진화론자라는 게 신기한 일은 아니다. 이러니 정작 창조론이 우세한 복음주의 계열에서는 좋은 소리 듣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스티븐 로가 자신의 저서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에서 맥그래스의 반박을 재반박했지만, 그 또한 《신 없는 사람들》이란 최근 저서에서 또다시 재반박을 내놓았다. 

 

영국의 종교학자 캐런 암스트롱은 《신을 위한 변론》으로 이 책을 반박했는데 암스트롱의 요지는 신이 있네 없네 따지지 말고 실천이 중요하다 정도로 말할 수 있다. 책 중에서 암스트롱은 도킨스를 "포이어바흐나 마르크스 같은 진짜 거물들과 비교하면 지적인 깊이가 없는 얄팍한 수준."이라고 까고 있다. 도킨스가 과학자로서의 유물론적인 세계관으로만 종교를 바라보고 비판하는 것, 그리고 과학 이외의 분야에서 활발히, 깊게 논의되어 온 종교와 철학에 관한 논쟁에 상당히 무지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킨스의 책은 한 무신론자의 과학적 측면의 견해 정도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당연하지만 도킨스의 생각은 과학계 전체의 의견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화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의 《신을 옹호하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도킨스과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무신론을 비판했는데 이글턴은 도킨스나 히친스의 주장을 엘리트의 사고로 규정하면서 도킨스류의 주장이 민중들의 신앙을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사실 이에 대해선 이미 책의 후기에서 언급되어 있다. 책에 대한 예상되는 반론 중의 하나가 '대중들은 대부분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종교를 필요로 한다.'라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도킨스는 '대중들이 종교 따위를 가지는 게 필요하다는 인식이야말로 일반 대중을 무시하는 생각'이라며 주장하고 있다. 즉 이 부분은 철학이나 사회학 등 또 다른 학문 분야의 연구가 필요한 영역이다. 

 

영국 태생으로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 중인 마이클 루즈 역시 "같은 무신론자로서 이 책을 읽고는 정말이지 창피스러웠다."고 혹평했다. 참고로 이 사람은 윌리엄 뎀스키의 지적 설계에 대해 알칸소 재판에서 "저게 과학이라고? 빼도 박도 못할 종교지 어딜 봐서 과학이냐?"면서 비판했던 사람이다. 여하간 이 양반도 도킨스를 틈틈이 까는 지식인 중 하나. 

 

흥미롭게도 다들 도킨스와 같은 나라에 사는 영국인이다. 실제로 영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런 유의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미국에서 근본주의 기독교가 복음주의의 탈을 쓰고 판칠 때 영국에서는 무신론-유신론의 논쟁, 과학 vs 종교 논쟁, 영국 복음주의 내부에서의 논쟁 등을 통해서 수많은 저작물이나 논쟁들이 쏟아져 나왔다.

 

종교의 해악만을 강조한다는 주장이 적혀 있었는데, 정확히는 책의 후반부를 보면 종교가 사회나 개인의 심리의 안정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이를 종교 없이도 해결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기독교 변증가로 유명한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도 만들어진 신의 전반을 반박하는 책들을 저술하기도 했다. 한글로 번역된 책은 출판되지 않은 듯하다. 그의 토론 영상이 유튜브에 꽤 많다.

 

그 외에도 한국에서도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라는 글도 있다. 그런데 이 글은 그닥 잘 쓰인 글은 못 된다는 평. 무엇보다도 논지 전개의 틀 자체를 잘못 선택했다. 전쟁이 잦던 예전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종교를 지녔기에 종교가 전쟁의 원인처럼 보일 수 있다는 주장은 옳을 수도 있다. 아울러 (양차 세계 대전 등) 인류 사회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이 종교와 무관한 원인으로 일어났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종교가 원인이 된 전쟁이 존재한다'라는 도킨스의 주장과는 기본적으로 상관없는 이야기다. 저 사람이 도킨스를 논파하고자 했다면 '사실은 종교가 원인이 된 전쟁은 없다.'라는 것을 입증하거나, 종교가 원인이 된 전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전쟁에 관한 측면에서는) 종교가 옹호될 수 있다는 점을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종교인들 가운데에도 전쟁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준다든지.

 

사실 도킨스가 '무신론의 이름으로 전쟁이 난 일은 없다'라고 한 부분은 호도하는 논리인데 그것을 지적하는 편이 나았다. 이 말 자체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마치 무신론이 종교보다 인간을 더 비폭력적이고 선하게 만들어준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비약적인 주장이다.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옛날 공산권 국가에서의 국가 무신론 체제에서 종교에 대한 각종 탄압이 존재했던 사례 등을 보면, 무신론 자체가 평화나 비폭력을 담보하는 사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책 중에 도킨스가 본인이 옥스포드에서 목격한 실화라면서 "15년 동안 골지체의 존재를 부정하다 마침내 확고한 근거 앞에서 생각을 바꾸고 감사의 인사를 전한 과학자"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이야기는 영국의 또 다른 전투적 무신론자 앤서니 그레일링(A. C. Grayling)의 연극 《On Religion》 에서도 종교의 독단성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똑같은 흐름으로 등장하는데, 후자가 전자에 영향을 받아 별도의 매체화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 《더 가디언》지의 저널리스트 앤드루 브라운(A. Brown)은 《낙관적 생각들》에 그가 기고한 글에서(pp.170-173), 과학자들도 유독 종교에 대해서라면 자신들에게 불리한 근거들을 회피한다면서 이 연극을 들어 대차게 깠다. 이게 사실이라면 세상에 개종이나 배교가 어떻게 존재하겠느냐면서. 사실 도킨스도 인정했듯이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론을 버리지 못하고 타계한 이론가들도 많으며, 반대되는 근거 앞에서도 고집을 쉽게 꺾지 않는 것이 때로는 언론에 의해 '학자로서의 소신'이라고 치장되기도 한다. 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요즘엔 실제로 이런 일이 생기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상에서 온갖 인신공격이 오가는 바람에 학계 동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만들어진 신은 2006년 10월 2일에 발매되었는데, 불과 2달 전 8월 8일에 원제인 The God Delusion과 비슷한 뉘앙스를 가진 Christ Illusion이라는, 슬레이어의 앨범이 발매되었었다.

 

피터 보고시안의 책 신앙 없는 세상은 가능하다의 서문에서 만들어진 신을 해당 도서와 같이 읽기를 권하는 책으로 소개한다.

 

 

 

 

 

 

 

종교 - 진화론적 접근

 

종교의 경우 진화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여기서는 두 가설의 몇 가지 논리를 소개하고 내 의견을 밝힐 것이다. 나는 적응 가설이 가망성이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종교는 부산물일 수밖에 없다.

 

종교의 밈(meme, 모방자) 이론은 한편으로는 적응 가설이다. 하지만 유전자의 적응이 아니라 밈의 적응이다. 유전자의 수준에서 볼 때 종교의 밈 이론은 부산물 가설에 가깝다.

 

도덕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경우에도 집단 선택론이 득세하고 있다. 나는 집단 선택론이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글을 업데이트하면서 어떤 학자가 어떤 가설을 제시하는지 좀 더 상세하게 쓸 생각이다.

 

 

 

 

 

종교의 정의

 

사람마다 종교라는 단어를 서로 상당히 다른 의미로 쓴다. 따라서 종교 개념을 미리 대충이라도 정의하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면 온갖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여기서는 종교를 상당히 좁은 의미로 정의할 것이다.

 

첫째,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의 경우에는 어떤 사람에게는 종교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종교가 아니다. 만약 수련을 쌓아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부처라고 본다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반면 부처에게 기도를 해서 소원을 성취하려는 사람에게는 불교가 종교다. 이 때에는 사실상 부처가 신이기 때문이다.

 

둘째, 신에게 인간과 비슷한 욕망이 있어야 하며 인간사에 개입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일관된 범신론(pantheism)과 이신론(deism)은 종교가 아니다. 범신론 또는 이신론을 믿었던 아인슈타인의 경우에는 종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를 믿었지만 그 신이 인간사에 개입한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응 가설 – 비종교인의 존재

 

어떤 표현형이 적응이라면 모든 문화권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위에서 정의한 좁은 의미의) 종교가 아예 없는 문화권도 있다고 한다. “모든 문화권에 종교가 있다”라는 명제는 종교를 매우 폭넓게 정의해서 온갖 도덕적, 철학적 사유와 미신적 사고 방식을 포괄했을 때에만 성립한다.

 

그리고 어떤 표현형이 적응이라면 거의 모든 개체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종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한국인의 경우 절반 정도가 비종교인이다. 적응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특수하게 비정상적인 유전자나 환경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인구의 절반이 앞을 볼 수 없다면 무언가 심각한 유전적 또는 환경적 이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인에게 특별한 유전적 이상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특별한 환경적 이상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요컨대, 종교가 적응이라고 보기에는 비종교인이 너무 많다.

 

 

 

 

적응 가설 – 종교가 주는 위안

 

종교의 적응 가설을 지지하는 학자들 중 일부는 종교가 주는 위안이 종교의 기능 중 하나라고 본다.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스트레스가 심할수록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스트레스는 질병뿐 아니라 온갖 문제로 이어진다. 어떤 적응 가설에 따르면 종교는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그리하여 질병 등 온갖 문제가 줄어든다. 물론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명백히 적응적이다.

 

첫째, 이 가설의 문제점은 종교가 스트레스를 줄인다고 가정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실증적으로 검증해야 할 문제다. 종교에는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 종교는 강력한 신이 자신의 편에 있다고 믿게 함으로써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또한 육체가 죽어도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세가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덜어주기도 한다. 어떤 종교는 환상적인 천국이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종교는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기도 하다. 많은 종교에서 악마가 등장한다. 또한 선한 신의 경우에도 불안감의 근원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선한 신은 보통 정의의 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고 죄를 처벌하려고 한다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영원히 고통 당하게 되는 지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종교가 주는 불안과 공포는 종파, 지역, 시대에 따라 상당히 달랐다. 종교가 엄청나게 득세했던 유럽의 중세 시대에는 오히려 종교가 위안보다는 불안을 더 많이 주지 않았을까? 여러 원시 부족의 종교를 보면 그들의 신은 인간에게 별로 베풀지는 않고 온갖 금기로 인간을 불편하게 하기만 하는 것 같다.

 

둘째, 고통과 스트레스가 왜 존재하는지를 우선 따져야 한다. 통증, 쓴 맛, 역겨운 냄새, 불안, 죄책감 등 고통을 주는 온갖 메커니즘이 진화한 이유는 그것이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적응 가설 지지자의 생각대로 종교가 정말로 고통을 줄여준다면 여러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죽은 다음에도 천국에서 호강할 수 있다고 진짜로 믿는다면 위기에 빠졌을 때 살아남으려고 덜 발버둥칠 것이다. 그러면 죽을 가능성이 커진다. 물론 죽으면 더 이상 번식할 수 없다. 자식이 실종되었을 때 신을 철석같이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자식이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진짜로 믿는다면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엄청난 불안에 빠진 부모처럼 자식을 열심히 찾아 헤매지는 않을 것이다. 자식이 망하면 자신의 번식도 망하는 것이다.

 

온갖 고통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이유는 상황에 걸맞는 조치를 취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예컨대 불에 손을 넣었을 때 통증을 느끼는 이유는 빨리 손을 빼내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자식이 사라졌을 때 불안감을 느끼는 이유는 자식을 찾아 헤매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이것이 진화론적 기능(function)이다. 적응 가설 지지자들의 생각이 옳다면 종교는 이런 메커니즘들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도록 마비시킨다.

 

물론 스트레스가 없으면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줄어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스트레스 유발 메커니즘들이 진화한 이유는 면역력 약화 등의 비용을 치르고도 남을 적응적 이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맹수가 근처에 있을 때에는 엄청난 불안감을 느끼며 엄청나게 긴장하게 된다. 온갖 감각을 최대한 가동하고 즉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면역이나 소화에 투자할 자원을 줄이게 된다. 결국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커지고 소화 불량이 될 가능성도 커진다. 하지만 이런 비용은 맹수에 잡혀 먹혔을 때의 비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만약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면 굳이 종교가 따로 진화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예 스트레스 유발 메커니즘들이 퇴화하면 그만이다. 만약 스트레스 유발 메커니즘의 비용이 이득보다 더 컸다면 아예 그런 메커니즘이 진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응 가설 – 착하게 살도록 만든다?

 

대체로 종교의 주인공인 신은 선한 신이다. 선한 신과 악마가 모두 등장하는 종교에서도 첫째 주인공은 선한 신이다. 물론 선한 신은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며 죄를 지으면 벌을 주겠다고 경고한다. 그리하여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더 착하게 산다는 것이 일부 적응 가설 지지자들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모두 착하게 산다면 세상이 살기 더 좋아지며 그래서 더 잘 번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그냥 사람들이 착하게 살도록 진화하면 될 것이지 왜 종교라는 우회로가 필요한지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위의 스트레스의 문제와 비슷하다. 스트레스가 문제라면 스트레스 메커니즘이 퇴화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왜 스트레스 메커니즘과 종교가 둘 다 있어야 하는가? 더 착하게 사는 것이 적응적이라면 그냥 더 착하게 살도록 진화하면 될 것이다. 왜 쓰잘데 없이 매우 복잡하게 진화했단 말인가?

 

둘째, 종교가 사람들은 더 착하게 만든다고 단정할 수 없다. 종교 공동체가 그렇지 않은 공동체에 비해 더 협동을 잘 한다는 보고는 많이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사례들도 만만치 않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에는 더 종교적인 지역의 범죄율이 더 높다.

 

셋째, 이런 적응 가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보통 집단 선택론에 의존한다. 나는 집단 선택론이 거의 가망성이 없다고 본다. 좀 더 자세한 것은 「집단 선택론(version 0.2)」을 참조하라.

 

 

 

 

 

부산물 가설 – “어린이는 무엇이든 믿는다”

 

종교는 보통 아주 어렸을 때 받아들이게 된다. 이슬람교 문화권에서는 거의 모든 어린이가 이슬람교 신자가 되며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거의 모든 어린이가 기독교 신자가 된다. 이것은 아랍어 문화권에서는 아랍어를 배우고 영어 문화권에서는 영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어린이는 어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는다. 그에 따르면 그 이유는 그것이 적응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종교나 미신 같은 한심한 생각들도 믿게 된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정말 어린이는 어른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을까? 그리고 무조건 믿는 것이 의심해 보는 것보다 항상 더 적응적일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어린이와 조금만 지내보면 어린이가 항상 모든 것을 믿지는 않는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 무조건 믿는 것이 항상 적응적이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첫째, 무조건 믿으면 이용당할 수 있다. 인간 세상은 온갖 이해 관계의 충돌로 가득 차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속임수를 전략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어린이를 둘러싼 사건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가장 조화로운 관계인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상호 작용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태아와 어머니 사이에서도 치열한 투쟁이 벌어진다. 왜냐하면 일란성 쌍둥이라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유전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경우에도 믿음이 잘 조율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언어 습득의 경우에는 의심이 별로 적응적인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어린이가 언어를 배울 때에는 거의 의심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엄마가 “이것은 책상이야”라고 말할 때 어린이가 “과연 이것은 책상인가? 엄마가 뻥 치는 것이 아닐까?”라는 식으로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다. 반면 먹을 것이나 장난감을 둘러싼 문제에서는 어린이도 어른의 말을 상당히 의심한다.

 

언어 습득의 경우에는 특별히 이해 관계의 충돌과 관련이 없다. 엄마나 책상을 의자라고 가르쳐서 별로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먹을 것의 경우에는 중대한 이해 관계의 충돌이 있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다른 조건이 같다면 형제자매끼리 똑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 자신의 번식에 유리하다. 반면 자식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언니, 오빠, 동생보다 조금 더 먹는 것이 번식에 유리하다(자세한 것은 트리버스의 「Parent-offspring conflict(1974)」를 참조하라).

 

부모의 위험 경고 같은 경우에는 거의 무조건 믿는 것이 적응적일 것이다. 심지어 가끔 부모가 자신의 이해 관계를 위해 위험 경고를 남용하는 경우에도 확실하지 않으면 일단 믿는 것이 유리하다. 왜냐하면 위험 경고를 무시했다가는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느니 차라리 조금 손해를 보는 것이 낫다.

 

종교의 일반적인 교리는 이해 관계의 충돌과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인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믿음을 가르친다고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무언가를 뜯어낼 수 있어 보이지 않는다. 어린이가 종교 교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듯하다.

 

둘째, 무조건 믿으면 바보 같아 보인다. 지능이 낮다는 것이 드러나면 여러 가지 손해를 본다. 부모는 지능이 낮아서 번식 가망성이 작은 자식에게 덜 투자할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떨어질 것이며 서열도 낮아질 것이다.

 

종교는 상당히 바보 같은 생각이기 때문에 종교를 무조건 믿으면 바보 같아 보이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은 어른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아주 어린 어린이도 “너 바보냐? 그것도 모르고”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리고 바보라고 놀리면 어린이들도 매우 싫어한다.

 

거의 절대 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 문화권에서는 종교를 믿는 것이 바보 같아 보일 리가 없다. 어린이가 만약 이런 문제를 잘 다루도록 설계되었다면 그런 문화권에서는 종교를 쉽게 믿을 것이다. 반면 한 동네에 종교인과 비종교인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지역에서는 종교를 믿는 것이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다. 특히 만약 비종교인의 지위가 대체로 높고 지능이 높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실제로 한 종교가 (거의) 완전히 지배하는 사회에서 어린이는 쉽게 그 종교를 받아들인다. 나는 어린이가 종교와 무신론이 경합하는 곳에서 자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연구한 것을 접하지 못했다. 상당히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 같다.

 

 

 

 

 

부산물 가설 – 왕따의 위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적응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과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이런 현상도 설명이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겠다).

 

왕따를 당하면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고 결혼을 하기도 힘들다. 그러면 번식에 차질이 생긴다. 따라서 인간은 왕따를 당하지 않는 방향으로 믿음을 형성하도록 진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올바른 믿음을 위해 왕따를 당하는 것이 진리의 기준으로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번식의 기준으로 보면 망한 것이다. 차라리 사고를 어느 정도 왜곡해서 남들이 믿는 바를 그대로 따라 믿는 것이 번식의 관점에서는 유리하다.

 

인간이 이런 문제를 잘 다루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었다면 믿음을 형성할 때 “어느 것이 진리에 가까운가?”라는 문제뿐 아니라 “어느 것이 다수파의 믿음인가?”도 고려하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종교가 한 문화권을 지배하게 되면 단지 지배적인 지위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될 것이다. 종교 자체에 관성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여러 믿음이 충돌하는 문화권에서 산다면 “어느 것이 지위가 높은 자의 믿음인가?”라는 요인도 고려하도록 설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지위가 높은 자가 믿는 것은 따라 믿는 것이 지위가 낮은 자가 믿는 것을 따라 믿는 것보다 더 적응적일 것이 때문이다.

 

 

 

 

 

부산물 가설 – 마음 이론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읽도록 진화했다. 텔레파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표정, 행동 등을 보고 상대의 마음 즉 욕망, 믿음 등을 추론하는 것에 전문화된 메커니즘 즉 마음 이론 모듈(Theory of Mind Module, ToMM)이 진화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자세한 것은 배런코언의 『마음맹』을 참조하라.

 

신은 어떤 측면에서는 인간과 매우 다르다. 많은 신이 육체가 없다. 또한 인간이 할 수 없는 온갖 능력이 있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신은 인간과 매우 비슷하다. 특히 욕망 체계가 그렇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처럼 질투를 하며 화를 낸다. 부도덕한 행위를 보았을 때 도덕적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인간처럼 도덕적 분노를 느끼면 처벌을 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또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사랑한다. 자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보답을 하기도 한다.

 

정교하게 설계된 ToMM이 오작동하여 신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부산물 가설 – 민감한 행위자 탐지기(agent detector)

 

실제로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거짓 양성 오류(false positive error, 오탐 오류)라고 하며 실제로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거짓 음성 오류(false negative error, 미탐 오류)라고 한다.

 

위험과 관련된 경우에는 보통 거짓 양성 오류보다는 거짓 음성 오류의 대가가 더 크다. 있지도 않은 맹수가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에는 약간의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지만 맹수가 실제로 있는데 없다고 착각하는 경우에는 생명이 날아갈 수도 있다. 따라서 많은 경우 인간이 거짓 양성 오류를 더 많이 범하도록 설계되었다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인간의 얼굴이나 몸과 조금이라도 닮은 형상을 보면 즉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어두울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것은 진화론적으로 볼 때 그럴 듯하다. 왜냐하면 잘 보이지 않는 밤에는 기습 당할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뱀 형상이나 고양이과 동물 형상을 보았을 때 과도해 볼일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런 원리는 시각 현상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현상이 자연적 현상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음모 때문인지 헷갈리는 경우에는 우선 어떤 사람 또는 맹수의 행동 때문이라고 짐작하는 것이 더 적응적일 것이다. 존재하는 음모를 알아채지 못했을 때의 대가가 있지도 않은 음모에 대해 신경 쓰는 대가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런 민감성이 있지도 않은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밈(meme, 모방자) 이론 – 정신적 바이러스

 

도킨스는 종교를 바이러스라고 부름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했다. 도킨스는 더 나아가 종교라는 바이러스의 퇴치에 앞장 서고 있다.

 

도킨스가 바이러스에 비유한 이유는 생물 바이러스나 컴퓨터 바이러스가 숙주에 기생하여 자신을 복제하는 것이 종교와 비슷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물 바이러스와 컴퓨터 바이러스는 그러면서 보통 숙주에는 해를 끼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약을 먹거나 백신 프로그램을 설치한다. 바이러스라는 단어에는 해로운 기생체라는 함의가 뒤따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종교를 바이러스라고 부른다고 해서 종교인이 기분 나빠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도킨스의 어법에 따른다면 상대성 이론이나 진화 심리학도 정신적 바이러스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에 기생하면서 자기 복제를 하기 때문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지능이 월등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제대로 복제되는 반면 종교의 경우에는 천재들 사이에서는 잘 복제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도킨스의 아이디어는 종교의 한 가지 특성을 잘 설명해 준다. 기독교의 경우 신이 “나 야훼를 믿으라”라고 가르치지 “저기 있는 바알 신을 믿으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남의 종교를 믿으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사장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신보다는 남을 돌보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가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기독교의 신은 “나를 믿든 말든 나는 상관 하지 않겠다”라고 가르치지 않고 “나를 믿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생존과 번식에 힘쓰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가 번식에 개의치 않고 태평하게 살아가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에 비해 더 잘 복제되는 것과 비슷하다.

 






 

종교 - 진화론적 접근

 

종교의 경우 진화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종교의 밈(meme, 모방자) 이론은 한편으로는 적응 가설이다. 하지만 유전자의 적응이 아니라 밈의 적응이다. 유전자의 수준에서 볼 때 종교의 밈 이론은 부산물 가설에 가깝다.

 

도덕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경우에도 집단 선택론이 득세하고 있다. 나는 집단 선택론이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의 정의

 

사람마다 종교라는 단어를 서로 상당히 다른 의미로 쓴다. 따라서 종교 개념을 미리 대충이라도 정의하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면 온갖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여기서는 종교를 상당히 좁은 의미로 정의할 것이다.

 

첫째,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의 경우에는 어떤 사람에게는 종교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종교가 아니다. 만약 수련을 쌓아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부처라고 본다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반면 부처에게 기도를 해서 소원을 성취하려는 사람에게는 불교가 종교다. 이 때에는 사실상 부처가 신이기 때문이다.

 

둘째, 신에게 인간과 비슷한 욕망이 있어야 하며 인간사에 개입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일관된 범신론(pantheism)과 이신론(deism)은 종교가 아니다. 범신론 또는 이신론을 믿었던 아인슈타인의 경우에는 종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를 믿었지만 그 신이 인간사에 개입한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응 가설 – 비종교인의 존재

 

어떤 표현형이 적응이라면 모든 문화권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위에서 정의한 좁은 의미의) 종교가 아예 없는 문화권도 있다고 한다. “모든 문화권에 종교가 있다”라는 명제는 종교를 매우 폭넓게 정의해서 온갖 도덕적, 철학적 사유와 미신적 사고 방식을 포괄했을 때에만 성립한다.

 

그리고 어떤 표현형이 적응이라면 거의 모든 개체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종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한국인의 경우 절반 정도가 비종교인이다. 적응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특수하게 비정상적인 유전자나 환경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인구의 절반이 앞을 볼 수 없다면 무언가 심각한 유전적 또는 환경적 이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인에게 특별한 유전적 이상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특별한 환경적 이상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요컨대, 종교가 적응이라고 보기에는 비종교인이 너무 많다.

 

 

 

 

적응 가설 – 종교가 주는 위안

 

종교의 적응 가설을 지지하는 학자들 중 일부는 종교가 주는 위안이 종교의 기능 중 하나라고 본다.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스트레스가 심할수록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스트레스는 질병뿐 아니라 온갖 문제로 이어진다. 어떤 적응 가설에 따르면 종교는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그리하여 질병 등 온갖 문제가 줄어든다. 물론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명백히 적응적이다.

 

첫째, 이 가설의 문제점은 종교가 스트레스를 줄인다고 가정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실증적으로 검증해야 할 문제다. 종교에는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 종교는 강력한 신이 자신의 편에 있다고 믿게 함으로써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또한 육체가 죽어도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세가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덜어주기도 한다. 어떤 종교는 환상적인 천국이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종교는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기도 하다. 많은 종교에서 악마가 등장한다. 또한 선한 신의 경우에도 불안감의 근원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선한 신은 보통 정의의 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고 죄를 처벌하려고 한다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영원히 고통 당하게 되는 지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종교가 주는 불안과 공포는 종파, 지역, 시대에 따라 상당히 달랐다. 종교가 엄청나게 득세했던 유럽의 중세 시대에는 오히려 종교가 위안보다는 불안을 더 많이 주지 않았을까? 여러 원시 부족의 종교를 보면 그들의 신은 인간에게 별로 베풀지는 않고 온갖 금기로 인간을 불편하게 하기만 하는 것 같다.

 

둘째, 고통과 스트레스가 왜 존재하는지를 우선 따져야 한다. 통증, 쓴 맛, 역겨운 냄새, 불안, 죄책감 등 고통을 주는 온갖 메커니즘이 진화한 이유는 그것이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적응 가설 지지자의 생각대로 종교가 정말로 고통을 줄여준다면 여러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죽은 다음에도 천국에서 호강할 수 있다고 진짜로 믿는다면 위기에 빠졌을 때 살아남으려고 덜 발버둥칠 것이다. 그러면 죽을 가능성이 커진다. 물론 죽으면 더 이상 번식할 수 없다. 자식이 실종되었을 때 신을 철석같이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자식이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진짜로 믿는다면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엄청난 불안에 빠진 부모처럼 자식을 열심히 찾아 헤매지는 않을 것이다. 자식이 망하면 자신의 번식도 망하는 것이다.

 

온갖 고통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이유는 상황에 걸맞는 조치를 취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예컨대 불에 손을 넣었을 때 통증을 느끼는 이유는 빨리 손을 빼내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자식이 사라졌을 때 불안감을 느끼는 이유는 자식을 찾아 헤매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이것이 진화론적 기능(function)이다. 적응 가설 지지자들의 생각이 옳다면 종교는 이런 메커니즘들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도록 마비시킨다.

 

물론 스트레스가 없으면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줄어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스트레스 유발 메커니즘들이 진화한 이유는 면역력 약화 등의 비용을 치르고도 남을 적응적 이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맹수가 근처에 있을 때에는 엄청난 불안감을 느끼며 엄청나게 긴장하게 된다. 온갖 감각을 최대한 가동하고 즉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면역이나 소화에 투자할 자원을 줄이게 된다. 결국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커지고 소화 불량이 될 가능성도 커진다. 하지만 이런 비용은 맹수에 잡혀 먹혔을 때의 비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만약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면 굳이 종교가 따로 진화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예 스트레스 유발 메커니즘들이 퇴화하면 그만이다. 만약 스트레스 유발 메커니즘의 비용이 이득보다 더 컸다면 아예 그런 메커니즘이 진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응 가설 – 착하게 살도록 만든다?

 

대체로 종교의 주인공인 신은 선한 신이다. 선한 신과 악마가 모두 등장하는 종교에서도 첫째 주인공은 선한 신이다. 물론 선한 신은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며 죄를 지으면 벌을 주겠다고 경고한다. 그리하여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더 착하게 산다는 것이 일부 적응 가설 지지자들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모두 착하게 산다면 세상이 살기 더 좋아지며 그래서 더 잘 번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그냥 사람들이 착하게 살도록 진화하면 될 것이지 왜 종교라는 우회로가 필요한지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위의 스트레스의 문제와 비슷하다. 스트레스가 문제라면 스트레스 메커니즘이 퇴화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왜 스트레스 메커니즘과 종교가 둘 다 있어야 하는가? 더 착하게 사는 것이 적응적이라면 그냥 더 착하게 살도록 진화하면 될 것이다. 왜 쓰잘데 없이 매우 복잡하게 진화했단 말인가?

 

둘째, 종교가 사람들은 더 착하게 만든다고 단정할 수 없다. 종교 공동체가 그렇지 않은 공동체에 비해 더 협동을 잘 한다는 보고는 많이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사례들도 만만치 않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에는 더 종교적인 지역의 범죄율이 더 높다.

 

셋째, 이런 적응 가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보통 집단 선택론에 의존한다. 나는 집단 선택론이 거의 가망성이 없다고 본다. 좀 더 자세한 것은 「집단 선택론(version 0.2)」을 참조하라.

 

 

 

 

 

부산물 가설 – “어린이는 무엇이든 믿는다”

 

종교는 보통 아주 어렸을 때 받아들이게 된다. 이슬람교 문화권에서는 거의 모든 어린이가 이슬람교 신자가 되며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거의 모든 어린이가 기독교 신자가 된다. 이것은 아랍어 문화권에서는 아랍어를 배우고 영어 문화권에서는 영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어린이는 어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는다. 그에 따르면 그 이유는 그것이 적응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종교나 미신 같은 한심한 생각들도 믿게 된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정말 어린이는 어른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을까? 그리고 무조건 믿는 것이 의심해 보는 것보다 항상 더 적응적일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어린이와 조금만 지내보면 어린이가 항상 모든 것을 믿지는 않는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 무조건 믿는 것이 항상 적응적이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첫째, 무조건 믿으면 이용당할 수 있다. 인간 세상은 온갖 이해 관계의 충돌로 가득 차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속임수를 전략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어린이를 둘러싼 사건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가장 조화로운 관계인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상호 작용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태아와 어머니 사이에서도 치열한 투쟁이 벌어진다. 왜냐하면 일란성 쌍둥이라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유전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경우에도 믿음이 잘 조율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언어 습득의 경우에는 의심이 별로 적응적인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어린이가 언어를 배울 때에는 거의 의심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엄마가 “이것은 책상이야”라고 말할 때 어린이가 “과연 이것은 책상인가? 엄마가 뻥 치는 것이 아닐까?”라는 식으로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다. 반면 먹을 것이나 장난감을 둘러싼 문제에서는 어린이도 어른의 말을 상당히 의심한다.

 

언어 습득의 경우에는 특별히 이해 관계의 충돌과 관련이 없다. 엄마나 책상을 의자라고 가르쳐서 별로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먹을 것의 경우에는 중대한 이해 관계의 충돌이 있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다른 조건이 같다면 형제자매끼리 똑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 자신의 번식에 유리하다. 반면 자식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언니, 오빠, 동생보다 조금 더 먹는 것이 번식에 유리하다(자세한 것은 트리버스의 「Parent-offspring conflict(1974)」를 참조하라).

 

부모의 위험 경고 같은 경우에는 거의 무조건 믿는 것이 적응적일 것이다. 심지어 가끔 부모가 자신의 이해 관계를 위해 위험 경고를 남용하는 경우에도 확실하지 않으면 일단 믿는 것이 유리하다. 왜냐하면 위험 경고를 무시했다가는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느니 차라리 조금 손해를 보는 것이 낫다.

 

종교의 일반적인 교리는 이해 관계의 충돌과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인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믿음을 가르친다고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무언가를 뜯어낼 수 있어 보이지 않는다. 어린이가 종교 교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듯하다.

 

둘째, 무조건 믿으면 바보 같아 보인다. 지능이 낮다는 것이 드러나면 여러 가지 손해를 본다. 부모는 지능이 낮아서 번식 가망성이 작은 자식에게 덜 투자할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떨어질 것이며 서열도 낮아질 것이다.

 

종교는 상당히 바보 같은 생각이기 때문에 종교를 무조건 믿으면 바보 같아 보이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은 어른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아주 어린 어린이도 “너 바보냐? 그것도 모르고”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리고 바보라고 놀리면 어린이들도 매우 싫어한다.

 

거의 절대 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 문화권에서는 종교를 믿는 것이 바보 같아 보일 리가 없다. 어린이가 만약 이런 문제를 잘 다루도록 설계되었다면 그런 문화권에서는 종교를 쉽게 믿을 것이다. 반면 한 동네에 종교인과 비종교인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지역에서는 종교를 믿는 것이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다. 특히 만약 비종교인의 지위가 대체로 높고 지능이 높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실제로 한 종교가 (거의) 완전히 지배하는 사회에서 어린이는 쉽게 그 종교를 받아들인다. 나는 어린이가 종교와 무신론이 경합하는 곳에서 자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연구한 것을 접하지 못했다. 상당히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 같다.

 

 

 

 

 

부산물 가설 – 왕따의 위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적응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과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이런 현상도 설명이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겠다).

 

왕따를 당하면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고 결혼을 하기도 힘들다. 그러면 번식에 차질이 생긴다. 따라서 인간은 왕따를 당하지 않는 방향으로 믿음을 형성하도록 진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올바른 믿음을 위해 왕따를 당하는 것이 진리의 기준으로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번식의 기준으로 보면 망한 것이다. 차라리 사고를 어느 정도 왜곡해서 남들이 믿는 바를 그대로 따라 믿는 것이 번식의 관점에서는 유리하다.

 

인간이 이런 문제를 잘 다루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었다면 믿음을 형성할 때 “어느 것이 진리에 가까운가?”라는 문제뿐 아니라 “어느 것이 다수파의 믿음인가?”도 고려하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종교가 한 문화권을 지배하게 되면 단지 지배적인 지위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될 것이다. 종교 자체에 관성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여러 믿음이 충돌하는 문화권에서 산다면 “어느 것이 지위가 높은 자의 믿음인가?”라는 요인도 고려하도록 설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지위가 높은 자가 믿는 것은 따라 믿는 것이 지위가 낮은 자가 믿는 것을 따라 믿는 것보다 더 적응적일 것이 때문이다.

  

 

 

 

 

부산물 가설 – 마음 이론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읽도록 진화했다. 텔레파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표정, 행동 등을 보고 상대의 마음 즉 욕망, 믿음 등을 추론하는 것에 전문화된 메커니즘 즉 마음 이론 모듈(Theory of Mind Module, ToMM)이 진화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자세한 것은 배런코언의 『마음맹』을 참조하라.

 

신은 어떤 측면에서는 인간과 매우 다르다. 많은 신이 육체가 없다. 또한 인간이 할 수 없는 온갖 능력이 있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신은 인간과 매우 비슷하다. 특히 욕망 체계가 그렇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처럼 질투를 하며 화를 낸다. 부도덕한 행위를 보았을 때 도덕적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인간처럼 도덕적 분노를 느끼면 처벌을 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또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사랑한다. 자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보답을 하기도 한다.

 

정교하게 설계된 ToMM이 오작동하여 신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부산물 가설 – 민감한 행위자 탐지기(agent detector)

 

실제로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거짓 양성 오류(false positive error, 오탐 오류)라고 하며 실제로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거짓 음성 오류(false negative error, 미탐 오류)라고 한다.

 

위험과 관련된 경우에는 보통 거짓 양성 오류보다는 거짓 음성 오류의 대가가 더 크다. 있지도 않은 맹수가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에는 약간의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지만 맹수가 실제로 있는데 없다고 착각하는 경우에는 생명이 날아갈 수도 있다. 따라서 많은 경우 인간이 거짓 양성 오류를 더 많이 범하도록 설계되었다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인간의 얼굴이나 몸과 조금이라도 닮은 형상을 보면 즉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어두울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것은 진화론적으로 볼 때 그럴 듯하다. 왜냐하면 잘 보이지 않는 밤에는 기습 당할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뱀 형상이나 고양이과 동물 형상을 보았을 때 과도해 볼일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런 원리는 시각 현상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현상이 자연적 현상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음모 때문인지 헷갈리는 경우에는 우선 어떤 사람 또는 맹수의 행동 때문이라고 짐작하는 것이 더 적응적일 것이다. 존재하는 음모를 알아채지 못했을 때의 대가가 있지도 않은 음모에 대해 신경 쓰는 대가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런 민감성이 있지도 않은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밈(meme, 모방자) 이론 – 정신적 바이러스

 

도킨스는 종교를 바이러스라고 부름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했다. 도킨스는 더 나아가 종교라는 바이러스의 퇴치에 앞장 서고 있다.

 

도킨스가 바이러스에 비유한 이유는 생물 바이러스나 컴퓨터 바이러스가 숙주에 기생하여 자신을 복제하는 것이 종교와 비슷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물 바이러스와 컴퓨터 바이러스는 그러면서 보통 숙주에는 해를 끼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약을 먹거나 백신 프로그램을 설치한다. 바이러스라는 단어에는 해로운 기생체라는 함의가 뒤따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종교를 바이러스라고 부른다고 해서 종교인이 기분 나빠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도킨스의 어법에 따른다면 상대성 이론이나 진화 심리학도 정신적 바이러스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에 기생하면서 자기 복제를 하기 때문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지능이 월등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제대로 복제되는 반면 종교의 경우에는 천재들 사이에서는 잘 복제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도킨스의 아이디어는 종교의 한 가지 특성을 잘 설명해 준다. 기독교의 경우 신이 “나 야훼를 믿으라”라고 가르치지 “저기 있는 바알 신을 믿으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남의 종교를 믿으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사장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신보다는 남을 돌보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가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기독교의 신은 “나를 믿든 말든 나는 상관 하지 않겠다”라고 가르치지 않고 “나를 믿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생존과 번식에 힘쓰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가 번식에 개의치 않고 태평하게 살아가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에 비해 더 잘 복제되는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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