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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周, 주나라, 서주, 동주, 봉건(封建)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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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周, 주나라

Zhou Dynasty

 

서주시대 영토

 

 

존속기간

기원전 1046년~기원전 256년

위치

중국 화북

수도

기산(岐山) → 풍경(豊京) → 호경(鎬京)→ 낙읍(洛邑)

정치 체제

봉건제

국성

희(姬, jī)

국가원수

왕(王)

주요 군주

문왕 희창(기원전 11세기)

무왕 희발(기원전 11세기)

성왕 희송(기원전 11세기)

강왕 희조(기원전 11세기)

유왕 희궁녈(기원전 781~기원전 771)

주요 섭정

문공 희단

언어

상고한어

문자

금문(서주시대) → 전서(대전체, 동주시대)

종교

토속 종교

종족

주족, 상족 등

통화

조개 화폐(서주시대) → 포폐(동주시대)

성립 전

상나라

멸망 후

서주 멸망 후: 춘추시대

동주 멸망 후: 진나라

 

 

중국에 존재한 고대 국가. 대략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약 800년 동안 존속했다고 여겨진다. 희주(姬周)라고도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주나라'라고 하면 이 나라를 가리킨다.

 

 

 

역사

 

갑골문과 사서의 기록: 상의 제후국

 

약 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에는 수도를 호경(현재의 시안)에 두어서 서주, 약 기원전 771년~기원전 256년에는 낙읍(현재의 뤄양)으로 천도해서 동주라 칭한다.

 

주나라 이전 시대의 주족(周族)이 처음에는 주방(周方)이라고 불리다가, 후기에는 주후(周侯), 서백(西伯)으로 개편되어 상나라의 정치 질서에 편입되었는데, 상나라 말기에 서백(西伯)이라 하니 이는 주나라가 상나라 도읍 은허의 서쪽 관중 분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신화, 전설상의 기록으로 간주되던 때도 있었으나, 상나라의 유적들의 발굴과 고고학적 연구 성과로 갑골문의 발견과 더불어 여러 역사적 사실들이 증명되거나 해독되면서 달라졌다. 갑골문의 기록에 의하면 상나라의 제21대 왕인 무정(武丁) 때부터 주방(周方)을 토벌하는 일에 대해 점을 치고 있어, 상나라 제후국으로 편입된 고공단보 이전부터 주족은 상나라에 상당히 거슬리는 존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라를 뜻하는 방(方)과 무리나 종족을 뜻하는 족(族)이 혼용되거나 의도적으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사기에 의하면 후직의 후손인 주족들이 오랑캐들과 어울려 지내다 (주문왕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 대에 적인(狄人)에게 쫓겨서, 오랜 기간 머물던 관중 북쪽 방향의 산악지대에서 희성 일족과 주민 1천 가구를 이끌고 기산(岐山)으로 본거지를 옮겼는데, 이때 상나라에 의해 이곳의 제후로 봉해졌고, 이후 이곳은 희성(姬姓)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상나라 서쪽에 정착했다고 추정한다.

 

주나라 사람들이 원래부터 유목민이었는지, 아니면 정주민이 뒤늦게 유목민으로 전환한 경우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단 기록상으론 요순 시절 벼슬살이한 후직 시절만 해도, 관중 평야 지대에 머물던 희성 주족들이 이후 후직의 아들 부줄 시절에 오랑캐 땅인 북쪽 산악지대로 갔다는 식으로 되어 있다. 한편, 말을 이용한 목축기술 노하우를 인근의 토하라인에게서 받아들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사기》에서 사마천은 기원전 841년 이전의 주나라의 역사는 제대로 알 수 없다고 서술했다. 그가 기원전 841년에 주목했던 이유는 폭정을 일으켰던 주나라 여왕(厲王)이 쫓겨나고, 기원전 841년부터 기원전 828년까지는 공화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 여왕이 쫓겨날 때 귀중한 사료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 이전 역사나 연도를 알 수 있는 자료들도 많이 사라져버렸다. 사마천은 공화 원년을 기년(紀年)으로 삼았고 《사기》에 <12 제후 연표>를 세웠는데, 이 시점부터 연대에 따른 기록은 상세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기원전 841년은 중국 역사에서 문헌을 통하여 주나라 역사를 상고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연대이다. 

 

한편, 문헌에 대한 연구 못지 않게 고고학적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동안 진행되어 온 발굴의 성과에 따르면, 대략 기원전 1040년대에 해당되는 지층에서 상나라 및 주나라의 유적 및 유물이 발견되었다. 더 나아가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키는 역사가 기록된 청동기들이 출토되었는데, 문자로 구성된 기록과 더불어 그 당시 관측되었던 천문 현상도 함께 병기되었다. 천문학의 발달로 인하여 기록된 천문 현상의 날짜를 추정할 수 있게 되어, 중국 내외의 많은 학자들은 주나라가 상나라를 무찌른 연도(무왕극상년)를 추정하고자 연구를 수행했다. 이렇게 내놓아진 여러 신빙성 있는 학설들은 기원전 1100년대를 집중적으로 지목하지만, 다른 연대를 추정하는 학설들도 여럿 있어 확정하기가 곤란하며 추정 연도마다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국가적 프로젝트인 하상주 단대 공정을 통하여 주나라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1046년으로 산정했으나, '무왕극상년' 외에도 주나라 왕들의 재위기간 추정은 쇼우네시 등 구미권 학자들이 주장하는 연대와 맞지 않으므로, 공정에 참여한 학자들과 이에 반대하는 중국인 학자들 그리고 서양 학자들 간의 논쟁이 계속된다.

 

한반도 국가에서는 적어도 조선 시대 이후부턴 주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진 추정년도를 기원전 1100년 앞뒤 정도로 여겼다.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기인된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교과서에서도 주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진 추정년도를 기원전 11세기 초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던 듯하다. 재미 한국인 사학자 방선주는 기원전 1030년을 주장했다.

 

 

 

서주

 

문왕 시대에 국(國)으로서 주나라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이후 문왕의 아들 무왕 시대에 목야대전 승리로 상나라 왕 제신(주왕)을 몰아내고 주나라가 천자국이 되었으며, 무왕의 동생 주공 단(周公旦)과 아들, 손자 성왕•강왕의 시대에 삼감의 난 등을 정리하고 사실상 상나라 전역의 통치권을 획득, 이전 신권정치 성향이 강한 상나라보단 좀 더 인본주의적인 통치체계가 만들어졌는데 이 것은 제후국 입장에서 반란으로 왕을 끌어내린 신하의 입장과 더불어 당시 주나라가 변방 제후국으로 속해 있던 상나라의 국교였던 신앙체계를 무력으로 권력을 손에 넣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제후이자 국가체제의 핵심이자 종교적인 권한이 없었고 오직 상나라의 왕족만이 혈통적으로 이어지며 당시의 최고신에게 천제를 올리는 영광이 가능했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진행된 미화 과정에서 당시 상나라 왕족이 가진 초월적 최고 권력이자 권한대신에 인간적인 덕을 강조하며 당시의 최고신이자 인격신을 하늘과 자연법칙으로 강등시키고 덕이라는 개념을 백성들과 제후들에게 프로파간다화 해서 주나라가 반란으로 쟁취한 패권을 정당화 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급조한 덕과 복종의 인간 윤리적 개념을 가지고 권력을 계속 이어 나가고 변방 제후국 평범한 출신성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도였다.

 

제후국인 주나라가 왕인 상나라를 쳤을 때는 주나라와 연합한 수많은 주변 세력이 함께 했으므로 주나라는 자신들만의 지나친 특권이나 통치권을 주장하긴 어려웠는데, 이는 다른 제후국들의 위에서 누구나 인정하고 숭배하는 신성한 왕으로 군림했었던 상나라와는 달리 갑작스럽게 동등한 제후국의 신분에서 관할 지역이 넓어진 주나라로서는 주위의 독자적인 동등한 세력들과 정치적으로 타협할 필요성이 생겨났다는 소리였다. 당장 주나라가 상나라를 몰아낸 뒤 주나라는 결코 만만치 않았던 상나라의 잔존세력을 달래야 했다. 주나라는 주왕을 축출하고 상나라의 유민들과 종묘사직을 보전하게 해달라는 상나라의 왕자 미자계의 읍소를 받아들여 상나라 잔존 세력들을 한데 모아 상나라의 도읍에 국가를 세우고 다스리는 것을 허락했으며 다른 제후국들 보다 높은 公의 작위를 주어 송나라를 이루게 했고, 형식상 주나라의 복속하에 넣었다. 송나라에 부여한 공 작위는 상나라 왕족인 미자계를 상당히 예우한 것이며 같은 친족중에서도 최측근인 주공 정도만이 공의 작위를 받았고 나머지는 친족이라고 해도 공 작위는 못받았다. 이 과정에서 미자계의 숙부인 기자도 자작에서 후작으로 작위를 올려받고 제후로 분봉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기자도 상나라 왕족인것을 예우해서 특별히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자계도 공 작위를 받은 것 자체가 신하가 아닌 동등한 군주로 대하겠다는 의미이며 실제로 상나라의 왕족만 가능한 종교의식인 천제가 주나라때는 많이 축소되어 거행되었지만 역시 그 이후에도 지존인 천자만 가능했는데 특별히 상나라 왕족이자 송나라의 군주들도 공 작위와 더불어 상나라 최고신 상제에게 천제를 올리는 종교의식의 특권을 주나라 왕과 함께 송나라 군주들만 누렸다. 나아가 이 시기에 주나라에서 상나라에서 주요한 기능들을 지닌 지역인 은허를 폐허로 만드는 대신 여러 상나라 유민들을 관중, 낙읍 등으로 다시 분산 이주시켰는데, 이들의 세력이 가장 많이 이주했던 낙읍은 서주 시대에도 호경 다음 가는 제2의 수도로 남았다가 동주 시대엔 아예 수도가 되었다.

 

주나라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고대국가의 기술적, 시스템적 한계 때문에라도 좋든 싫든 봉건제를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지리적으로 제법 떨어진 지역의 직할통치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는 수백 년 동안 여러 정치체가 생존을 위해 서로 경쟁적으로 행정 시스템과 통치 사상을 연구하고 도로와 치수 등의 인프라도 많이 설치한 이후에야 가능해진 일이다. 게다가 상나라에서 주나라 이어지는 과도기에는 아직 주나라의 다른 영토들도 제대로 개발되지 않아서 숲과 정글이 매우 많았다. 도로가 미비하여 서로간 통행조차 불편했기에 더더욱 직할 통치가 힘들었을 터이다. 따라서 주나라는 차선책으로 주나라 본국을 지지하는 공신이나 친족들에게 작위를 주어 지방을 통치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를 유지 및 대리 운영했다. 이렇듯 주나라는 넓은 영토를 나누어 유력자들에게 영지로 내려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영지를 독립적으로 통치하도록 하는, 이른바 봉건제도를 시행했다.

 

봉건제도의 기틀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중앙에는 최고 통치자인 왕이 존재했고, 순서에 따라 공, 후, 백, 자, 남으로 이루어진 오등작을 유력 세력들과 왕 사이의 친밀도, 전략적인 중요성, 군공 등을 고려하여 왕이 직접 수순에 맞게 그들을 책봉했다, 이 중 후작이 가장 많았는데, 이 때문에 귀족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러 후들, 즉 제후(諸侯)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이들은 국(國)을 수여받았다. 이후 제후들도 내부의 공신들을 책봉했는데, 이들은 경(卿) 혹은 대부(大夫)라고 불렀고 가(家)를 수여받았다. 다시 가 내부에서 공신 책봉이 이루어져서 사(士) 계층이 생겨났고, 이들은 단순하게 식읍 정도를 수여받았는데, 기본적으로 주나라 시대에는 읍(邑)이 행정의 최소 단위였으므로 더 이상의 분봉은 없었다.

 

주나라 왕도 자신의 직속 경대부를 두었는데, 주공(周公), 소공(召公), 원백(原伯) 등이다. 주왕을 곁에서 보좌하는 이들 경사들의 작위는 세습되고, 제후국들과 비견할 수는 없지만 각자의 봉읍도 있었다.

 

 

주나라의 봉건제

 

주나라의 분봉국은 주 왕실의 희성 일족이 약 56개 국, 그렇지 않은 귀족이 약 70여 개 국으로 추측된다. 각 제후국은 각자 자신의 중심지인 도성을 거점으로 가까운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는 정도의 성읍국가였으며, 후대와 같은 영역국가는 아니었다. 전체 제후국은 약 130~180개 국이었다고 추산한다.

 

한편 봉건(封建)이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했으나 근대 일본의 영향으로 'feudal'을 번역하는 말이 되었는데,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동양의 봉건제도와 유럽의 'feudalism'이 명확한 유사성 없이 오히려 실제를 오도시키는 경향이 크다고 여긴다. 양자 간의 어의적, 역사학적 유사성보단 차이가 크므로 feudal을 '봉건'으로 번역하기는 현재 역사학계에서 지양하자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리즈(Loewe and shaughnessy [eds.], 1999)에서는 주나라의 봉건제를 번역할 때 'feudal'이라는 용어를 아예 피하였다.

 

상나라의 시대가 끝나고 주나라의 시대가 되자 국가가 모시는 신관(神觀)도 바뀌었다. 상나라가 숭배하던 신은 상나라 왕실의 조상신 제(帝) 혹은 최고신 상제(上帝)였으나, 주나라는 천(天), 즉 자연과 하늘을 섬겼다. 그런데 봉건제로 통치의 성격이 달라지고 범위가 확장되어, 신의 성격 또한 '상나라 통치 계급만의 인격신'에서 '자연 질서의 자연신'으로 국교를 개편했다. 이에 따라 '천'은 통치자에게 운명 혹은 사명을 수여하게 되었는데, 이를 천명(天命)이라고 했으며, 왕은 천으로부터 천하(天下)를 수여받아 천자(天子)로서 통치를 수행하게 되었다. 만약 왕이 왕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 천명은 다른 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었다(역성혁명). 이는 본래 제후국이었던 주나라의 반란을 정당화하기 위해 등장한 사상이었으나, 후에 주나라의 먼 방계 후예인 맹자가 주장한 유교적 사상의 일환으로도 활용되었다.

 

물론 왕뿐만 아니라, 각 지위에 오른 모든 통치자는 제 각기 나름대로 하늘의 대리인인 천자로부터 사명을 수여받았으므로 제 역할을 다해야 했다. 왕은 천하를 고르게 다스리고, 제후는 국을 다스리며, 경과 대부는 가를 다스리고, 사는 식읍을 받아 스스로를 수양하여 국가에 이로운 지식인이 된다는 것이 그들에게 내려졌던 사명이었다. 이를 한자화하면 아래와 같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뒷날 남송시대 주희가 제창한 성리학에서는 단계적인 개인 수양의 뜻으로 사용된 이 말은 본래 주나라의 통치체계를 표현하고 상징하는 뜻이었다.

 

한편 제후국 신분인 주나라는 권력과 통치체제의 지속을 위해서도, 상나라 시대의 상나라 왕족 중심의 고귀한 혈통적 독점 계승을 극복하려는 의도로 종법 질서를 강조했다. 즉 맏아들은 대종(大宗)이 되어 해당 직위를 계승하지만, 그 이외의 아들은 소종(小宗)이 되어 대종의 신하로만 활동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가부장적인 계승체계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통해 계속해서 재확인되었는데, 이러한 제사의 묘제를 확립하여 실현한 공간이 종묘였다. 형식상 성씨가 다른, 즉 전혀 다른 계통의 제후들도 주나라의 소종으로서 친(親)의 질서 내에 포괄되었다.

 

천명론과 종법질서 등 요인으로 자연스럽게 주나라는 신정일치적인 상나라보다 상대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물질주의적인 세속 국가로 발전했다. 허나 얄궂게도 단점도 있었으니, 신령한 권한과 능력으로 최고신과 소통하며 절대 권위를 세우던 신정국가인 상나라와는 달리 주나라는 사실상 동등한 신분인 제후국들과 차이가 벌어져 유명무실한 현실적인 통치권이 점점 무력화되어갔고 세속적 권위와 권력을 잃으면 바로 권위와 권력이 땅에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주나라의 천자는 회맹(會盟)이라는 절차로 충성 맹세를 강요해가며 억지로 군사력을 확보하고, 주나라의 권력 질서에 어긋나거나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이는 제후들을 미리 짐작하여 토벌하기도 했다. 이로써 극초기의 주나라는 그래도 아직까지는 권력 구조가 한동안은 유지되었다.

민간에서는 가부장제적인 가족질서와 읍락공동체가 확립된 모양이었다. 이들은 사(社)라는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풍년을 기원했다. 읍락 단위로 토지를 배분하고 그중 9분의 1을 거두는 정전제가 성립되었다고 하나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전반적인 사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문헌으로 《시》(《시경》), 《서》(《서경》) 등이 존재한다고 하여 상•주시대를 가리켜 '시•서시대'라고도 부르나, 편집자인 공자 등 후대인에 의해 일부 사료만이 취합되거나 변모가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동주(춘추전국시대)

 

춘추시대

 

전국의 제후들이 저마다 제후들 중 최강자가 되고자 했던 시기였다.

 

긴 시간이 흐르자 공신과 친족들이 세운 제후국과의 사이가 멀어졌고 게다가 주변 이민족들도 날로 강성해져서 상대적으로 영역에서 혼자 서쪽으로 툭 튀어나온 주나라는 서서히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이를 방비하기 위해 유사시엔 봉화를 올리는 제도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포사 일화에서 전해지듯 거듭된 사기 봉화 행각으로 막상 견융의 침략이 일어나자 봉화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제후국의 군대는 소집되지 않았다. 때문에 수도인 호경이 공격을 받아서 거의 멸망하다시피 쑥대밭이 되었고, 기원전 771년 평왕 때 호경에서 낙읍으로 천도했다. 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 이후를 동주라고 구분하며, 춘추전국시대가 개막되었다.

 

자기 직할 통치 지역도 제대로 못지키는 실정을 거듭보여 권위가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으니 동주 시대부터는 천자의 권위가 극도로 미약해졌다. 본토였던 옛 주나라 지역은 후에 제후국인 진나라가 탈환하여 자기 땅으로 삼기 전까지는 사실상 버려졌다. 빈털터리가 된 채 동쪽으로 이동한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엄청난 자원과 병력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자기 코가 석자인 상황에서 감당이 안되는건 당연지사였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제후의 힘이 강해졌으나, 춘추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각 제후국은 대체적으로 입에 발린 소리일지라도 동주의 왕이 천자임을 부정하진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이민족들의 침입은 주 천자뿐만 아니라 제후에게도 큰 위협이었으므로 이를 무시하고 당시의 세계 질서를 깨뜨리기는 힘들었다. 서쪽뿐만 아니라 남쪽에서도 초(楚)나라가 서주시대부터 주나라의 책봉을 무시하고, 왕을 칭하며 주변 제후국들을 병탄하며 성장하는 참이었다. 이 때문에 힘을 결집할 필요가 생긴, 하지만 동주 천자의 말을 듣기는 싫은 제후들 중에 힘의 우위에 선 자가 천자를 대신해 회맹을 주도했는데, 이런 제후를 패자(覇者)라고 한다.

 

패자는 기본적으로 명분상 왕을 보전하고, 오랑캐를 몰아낸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주 천자가 책봉했으나 이민족에게 멸망당한 제후국들의 지위를 이어가게 한다는 계절존망(繼絶存亡)의 질서를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선전했다. 즉, 기본적으로 중화사상의 수호와 동주 천자의 책봉 질서를 보전하는 것을 형식상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상황은 이민족인 오나라, 월나라, 초나라 등이 점차 중국 내부의 상황에 깊이 관여하여 융화되고 스스로 패자를 자처하기까지 하는 등 이민족과 중국의 구분이 힘들어지면서 무력화되었고, 패자의 의미도 퇴색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공자는 패자였던 제환공을 찬탄했지만, 맹자는 그런 거 없이 "패자 몹쓸 놈들" 하고 실컷 비난했다. 시대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시대에 등장한 유력한 사상가로는 단연 공자를 먼저 들 수 있다. 특히 공자는 춘추시대의 혼란한 현실을 한탄하고 주나라의 기풍을 되살리기를 평생토록 갈망했다. 그가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에서 주나라의 질서에 어긋나는 예를 뽑아내 지적한 것이 현재 전하는 《춘추》인데, 주나라의 질서를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이 책의 이름이 이 시대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외 이 시대 사람이라고 전해지는 유명한 사상가로는 노자가 있으나, 사실 여부가 불명확하고, 공자는 당시의 시대상을 바라보며 주나라를 공자의 옛 조상들의 조국인 상나라에 투영했을 것이다. 공자는 스스로를 가리켜 상나라 후손이니 상나라의 예법대로 장례제사를 지내도록 유언으로 남길정도로 상나라의 것들을 동경하였으며 상나라 출신임을 여러차례 자랑스럽게 언급했는데 물론 제후국 신분의 반란과 건국과정에서 다양한 미하와 정당화로 많은 부분이 왜곡되고 축소되었지만 지금세상에 그나마 주나라가 그래도 상나라의 법제와 천자를 칭하며 하늘의 도통을 이은 유일한 국가로 보고 형펀없이 추락한 주나라를 권위와 도통을 바로세워 동경하던 상나라의 흔적이 소멸하는 것을 막으려 했을 것이다. 실제로 공자 이후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여러나라가 사분오열하며 여러 왕조가 여러번 찢어지고 다시 붙어 세워지면서도 공자의 유교사상은 공자의 바람대로 꿋꿋하게 살아남아 주나라가 일부 보존하고 있었던 상나라의 것들이 아직도 유교와 여러 문화의 형태로 생존하여왔는데 이것은 상나라의 뛰어난 문명을 상당부분 그대로 계승하여 보존하려 했었던 주나라와 현인 공자의 공로가 크다고 하겠다.

 

이 시대는 이민족을 경계하고 전쟁하는 과정 속에서 중화사상이 강고하게 재확립된 시기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오, 월, 초 등 이민족 국가들이 중국에 서서히 진입하면서 마침내는 중국의 구성원으로 인식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판도는 기존 주나라 시대의 영역을 뛰어넘어 거대해졌고, 역설적으로 이는 주나라의 통치 질서 무력화를 가져온다.

 

 

 

전국시대

 

주나라가 주도하던 중원 질서가 유명무실해지자, 그럼 나도 한번 하면서 제후국들이 제후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왕이 되고자 다투었던 시기이다.

 

전국시대는 진(晉)나라가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의 세 나라로 쪼개진 데어서 시작한다. 기원전 453년에 일어난 이 '삼진분립'에 대하여 주 천자는 50년 동안 손을 쓰지 못하다가 기원전 403년에 들어 결국 희진이 붕괴했고 세 나라가 들어섰음을 인정했다. 이는 국의 폐지와 건립을 명령하는 역할이 주나라 천자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는 사실을 시사했으므로, 주나라의 힘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후 각국은 힘이 닿는 대로 서로를 병탄하며 부국강병을 추진했으며, 전투의 양상도 귀족들만의 전차전을 넘어 더욱 더 많은 인원들이 동원되기 시작했으므로 많은 인구가 필요해졌다. 이를 위해 집단지배체제를 넘어 인민을 개별적으로 지배하여 백병전의 역량을 키울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봉건제로부터 군현제로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군현제는 초나라와 같이 이민족들이 세운 국가들이 제후국을 병탄한 뒤, 낯설은 주나라의 질서를 파괴하고 나서 대신 도입한 통치체제에서 유래한 새로운 통치제도로 여겨지는데, 기원전 4세기 법가가 주도한 변법(變法)을 통하여 중국 전역에 보급되었다. 한편 정전제가 실존했다면, 봉건제는 집단지배체제에서 개별적인 인민지배체제로 이행되었던 이 시기에 완전히 파괴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는 주나라의 질서를 아예 뿌리 뽑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했으므로, 주나라는 완전히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당연히 스스로의 질서에 가장 강고하게 매달려야 했던 주나라는 변법을 주도하고 여러 국들을 병탄할 수 없었다. 상나라의 왕이 신적인 존재인 제(帝)로 불리기도 했으나, 이것은 고귀한 혈통적 권한을 부여받은 상나라 왕족만의 고유 권한이었는데 이것을 가져다가 후대에 제(齊)나라가 제(帝)를 자칭했다가 주변국들로부터 강력한 지탄을 받자, 명목상으로 제나라가 '동제'(東帝)로 불리고, 주나라는 '서제'(西帝)로 불리도록 각국의 정상들에게 제시했던 타협안의 결과였을 뿐, 주나라가 이룬 바는 아무 것도 없었다.

 

사상적으로 주나라의 약화를 잘 증빙하는 예 중 하나는 바로 유가의 태도 변화이다. 주나라 질서의 회복을 부르짖고 제후들을 지적하던 공자와 달리, 맹자는 주 천자를 포기하고 각국의 왕과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천자를 간절히 요구했다. 즉, 주 천자를 중심으로 한 중국 질서의 회복은 일장춘몽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그 내용은 (새로운 통일왕조를 주체로 하는) 옛 주나라 질서의 복원이기는 했지만, 유가가 주나라를 대하는 태도가 변화한 것은 주나라의 위상이 어디까지 떨어졌는지를 잘 시사한다.

 

설상가상으로 주나라 안에서는 왕위를 놓고 형제간에 분쟁이 자주 벌어졌다. 형을 죽이고 즉위한 주나라 고왕은 더 이상의 계승 분쟁을 피하고 싶어서였는지 기원전 440년, 동생을 '서주공'으로 임명했고, 작은 아들을 '동주공'으로 임명하여 그러잖아도 작고 미약해진 주나라는 '서주공'과 '동주공'이 나눠서 다스리는 영역으로 분할되었으며, 주나라의 왕위를 계승하는 주 왕실은 서주공의 영지에 얹혀 사는 기괴한 체제가 되었다. 아예 난왕 때는 서주공국과 동주공국이 서로 싸우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전국칠웅 역시 주나라를 존경하기는커녕 무시하고 이용하려고만 했다. 예를 들어 난왕 치세에 한나라가 초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 주나라로부터 전쟁에 필요한 갑옷과 곡식을 징발하려고 했다. 이를 막을 힘도 없었던 주나라는 두려움에 떨었는데, 이때 주나라를 섬기던 소대라는 신하가 한나라의 상국 공중을 찾아가 이들을 설득하여 징발을 중단하고 역으로 고도 땅까지 얻어오겠다고 자원했다. 물론 공중은 소대를 만나 그의 제안을 듣자 "아니 징발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내가 왜 거기에 땅까지 줘야 하는가?" 하였다. 소대는 고도를 주나라에 주면 주나라는 한나라에 의지할 테고, 따라서 진나라는 주나라에 내왕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피폐한 고도 땅 하나로 빈틈 없는 주나라를 얻게 되는 셈이라 설득했다. 공중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고도 땅을 주나라에게 줬다. 결국 주나라는 한나라로부터 땅을 얻어올 수 있었지만, 이는 명색이 제후들의 위인 주나라가 제후들에게 섬김을 받기는커녕 전국칠웅 중 최약체였던 한나라한테까지 무시당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점점 인구와 영토가 줄어들며 세가 약해진 주는 진나라, 한나라, 위나라에 사정하며 명맥을 이어가려 했으나, 결국 기원전 256년 서주공국이 진나라의 소양왕에게 망했고, 이때 왕실의 상징인 구정을 빼앗기는 엄청난 수모를 당함과 동시에 주 왕실과 서주 공실은 소멸하였다. 그나마 동주 공실은 존속하였으나 이미 이때 '주왕'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이후 기원전 249년 동주공국까지 진나라 장양왕에게 공격받아 망하면서, 주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나마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한나라가 일어서고 90여 년 뒤에 천자가 이왕삼각을 해주기 위해 주나라의 후손을 찾아 그 땅을 주어 다시 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주나라의 유산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 주나라가 남긴 유산은 상나라 시절의 신정일치 국가체제와는 달리 다른 제후들의 지역과 타국에 대해 권력을 이양하여 이를 위임 통치하게 하려는 봉건체제를 점차 형성하였다.

 

이는 내부의 봉건제로 머무르는 것을 넘어 외부에도 중국식 통치질서를 이식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책봉 - 조공 체계의 근간이다. 이렇게 형성된 중화 질서에 대한 인식은 청의 국력이 붕괴하는 19세기 말까지 대략 3천 년간 지속되었다.

 

봉건질서 외에도, 주나라는 인본주의적인 사상 기틀과 현실적인 정치 체계, 가정 및 종법 질서의 확립을 통해 중국 고대 행정 질서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주나라가 재정립 하기는 했지만 주나라의 질서와 제도의 근간은 모두 상나라의 사상에서 나왔다.

주나라의 질서를 신봉한 주나라의 먼 방계 후손인 맹자가 제시한, 천자 제후 대부 사는 제 역할을 똑바로 지키고 민간에서는 정전제가 시행되는 이상사회의 모습은 맹자에 의해 주나라의 질서에 의존한다. 이에 큰 영향을 받은 정약용이 제시한 여전제론과 정전제론도 당연히 주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었다. 현실에서는 신나라의 왕망이 주 대의 군주 칭호였던 '왕' 칭호의 권위 회복과 정전제의 재건을 시도했다. 쫄딱 망했지만... 또한, 주나라의 관제는 전근대 중국 역대 왕조들과 고려, 조선의 관제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천(天)'에 대한 숭배와 천하, 천자라는 용어 또한 근 3천 년간 계속해서 사용되는 관용적 문구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상나라의 왕족만이 모시는게 가능한 최고신 상제를 섬기는게 불가능한 제후국 출신의 주나라 왕실 입장에서 보편적인 '하늘'과 덕을 강조하며 자연적인 윤리법칙이라는 의미가 강한 동등한 신분이었던 제후국들을 거느리려는 논리로 확장해서 반란을 미화 또는 합리화했던 점도 있고 상나라의 '상제' 개념 또한 후대에 계속 남아 순수신앙과 절대신으로 모셔졌지만, 천명론을 비롯한 '천' 관련된 이론은 이후 동양 유교에 흡수되어 유교적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역대 군주

 

연대는 모두 기원전. 단, 일부 학계를 제외한 대다수 근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841년 이전의 연대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보고 있으며, 기원전 841년 이전 왕들의 재위기간을 명시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학자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니 확신하지 말고 참고 정도로만 보는게 좋다. 


태왕(太王) 희단(姬亶)
희력(姬歷)
문왕(文王) 희창(姬昌)

1대 무왕(武王) 희발(姬發) BC 1046년 1043년(3년) : 서주 시대의 첫번째 왕.
2대 성왕(成王) 희송(姬誦) BC 1042년 1021년 (21년)
3대 강왕(康王) 희조(姬釗) BC 1021년 982년 (39년)
4대 소왕(昭王) 희하(姬瑕) BC 982년 963년 (19년)
5대 목왕(穆王) 희만(姬滿) BC 963년 908년 (55년)
6대 공왕(共王) 희예호(姬繄扈) BC 908년 896년 (12년)
7대 의왕(懿王) 희간(姬囏) BC 896년 871년 (25년)
8대 효왕(孝王) 희벽방(姬辟方) BC 871년 862년 (9년)
9대 이왕(夷王) 희섭(姬燮) BC 862년 854년 (8년)
10대 여왕(厲王) 희호(姬胡) BC 854년 841년 (13년)
공화시기(기원전 841년 ~ 기원전 828년)
11대 선왕(宣王) 희정(姬靜) BC 828년 782년 (46년)
12대 유왕(幽王) 희궁열(姬宮涅) BC 782년 771년 (11년) : 서주 시대의 마지막 왕.
13대 평왕(平王) 희의구(姬宜臼) BC 771년 720년 (51년) : 동주 시대의 첫번째 왕.
14대 환왕(桓王) 15대 장왕(莊王) 16대 희왕(僖王) 17대 혜왕(惠王)
춘추오패 :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왕합려, 월왕구천. (진목공, 오왕부차.)
18대 양왕(襄王) 희정(姬鄭) BC 652년 619년 (33년)
19대 경왕(頃王) 20대 광왕(匡王) 21대 정왕(定王) 22대 간왕(簡王) 23대 영왕(靈王) 24대 경왕(景王)
25대 도왕(悼王) 26대 경왕(敬王) 27대 원왕(元王) 28대 정정왕(貞定王) 29대 애왕(哀王) 30대 사왕(思王)
31대 고왕(考王) 32대 위열왕(威烈王) 33대 안왕(安王) 34대 열왕(烈王) 35대 현왕(顯王) 36대 신정왕(愼靚王)
37대 난왕(赧王) BC 315-256 (56년) : 동주 시대의 마지막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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