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과학 Social Sciences/지리 Geography

가야의 강역, 강주(康州)

Jobs 9 2025. 8. 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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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국경은 대개 강과 바다 그리고 산을 경계로 하였다. 또 자국의 강역을 정할 때는 측정의 기준점이 있었는데, 육가야 전체의 강역을 기록한 '가락국기'에는 그 기준점을 진주로 하였다. '가락국기'에는 가야의 강역에 관해 '東以黃山江 西南以滄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耶山 南而爲國尾'라 기록했는데, 이를 대개 "동쪽으로는 황산강(낙동강), 서남쪽으로는 창해,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동북쪽으로는 가야산,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또는 國尾이다)"로 풀이했다. 하지만 필자는 '東以黃山江西 南以滄海 西北以地理山東 北以伽耶山南 而爲國尾' "황산강 서(안)으로써 동쪽, 창해로써 남쪽, 지리산 동으로써 서북쪽, 가야산 남으로써 북쪽으로 하여 나라의 끝으로 삼는다"라고 새롭게 해석했다.

 

이 해석을 보면 바다인 남쪽만 제외하고, 나머지 방향은 모두 낙동강의 서쪽, 지리산의 동쪽, 가야산의 남쪽 식으로 각 방향의 대상 지점에 구체적인 방향이 하나씩 더 붙어 있다. 낙동강의 서쪽이란 강을 따라 서쪽에 위치한 고녕가야, 성산가야, 금관가야이고, 지리산의 동쪽이란 동남쪽에 있는 아라가야를 말한 것이다. 가야산의 남쪽이란 대가야이며, 방향이 따로 붙지 않은 남쪽은 소가야를 지칭했다. 가야의 경계를 정할 때 낙동강에서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선을 쭉 그어 나가면 일연 스님이 인식했던 육가야의 강역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결국, 가야의 강역은 낙동강 상류에서 출발해 남해와 지리산, 가야산을 거쳐 동·남·서북·북으로 한 바퀴 도는데, 결국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고대인이 인식한 방향 순서였다.

 

오늘날 학계에서 밝혀진 가야의 강역을 보면, 일연 스님이 기술한 '가락국기'의 강역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 이유는 '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 강역은 세월에 따라 변천한 가야의 강역이 아니라, 일연 스님께서 인식한 가야의 강역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에도 해상제국을 표방했던 가야 초기는 적어도 대마도까지는 진출했을 것으로 본다. 그렇기에 가야의 분국 임나의 흔적이 대마도나 북규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야 후기에는 대가야가 남원과 장수까지 진출해 지리산을 넘어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락국기'의 이 기록은 당대 일연스님이 수집한 일부의 자료를 바탕으로 인식한 가야의 강역이었고, 부분적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한편 구한말 일본의 식민사학자 나가 미치오는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을 가상의 인물로 규정하고, 이 책을 원 간섭기 동안 한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윤색한 소설로 폄하했다. 그러나 필자는 허왕후 도래 길의 새로운 발견이나 가야의 강역 연구를 통해 삼국유사의 사실성을 다시 한번 실감했는데, 문제는 일연스님의 기록이 아니라, 이를 해석하는 이들의 사관에 있었다는 것이다.

 

 

 

 

 

 

강주(康州), 가야의 강역

진흥왕 때 이사부 장군에 의해 대가야 병합된 후 신라 영토로 편입
 
강주(康州)는 변한, 가야의 강역이었다. 그렇다고 가야의 영역 모두는 아니다. 금관가야의 근거지인 경남 김해는 양주(良州)에 속해 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보면 경남 서부지역과 경북 고령, 성주군이 포함되어 있다. 

685년(신문왕 5) 거타주(居陀州)를 나누어 청주(菁州)를 두었다가 747년(경덕왕 6) 강주로 고쳐 11군과 27현을 관할하게 했다. 치소는 진주(晉州)다.


강주는 진흥왕때 신라 이사부 장군에 의해 대가야가 정복되면서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는 500여년을 유지한 대가야의 본거지다. 그곳에는 400여기의 무덤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왕족과 귀족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무덤 안에는 토기, 철기, 금관, 금동관, 장신구등 최고급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정말로 대단한 유산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무덤 하나에 한사람만이 매장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묻혀 있었다. 순장(殉葬)이다. 대가야박물관에 전시된 44호 고분에는 30여명이 죽음의 길을 같이 했다. 죽은 후에도 삶이 계속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어린딸이 함께 묻혀 있는 형상은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이승에서 모시던 분과 저승에서도 함께 삶을 할수 있다는 고대인의 정신세계가 엿보였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가야연맹은 4세기 후반 이후 세력이 약화되면서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가면서 5세기 이후에는 고령, 합천 등 경상도 내륙 산간지방의 대가야가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중심지로 떠올랐다. 그 가운데서도 반파국(伴跛國: 고령지역의 소국)은 5세기 후반에 새로이 시조설화를 만들며 대가야를 표방했다. 대가야는 합천·거창·함양·산청·아영·하동·사천 등지를 포괄하는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서 등장했다. 

대가야는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 작호를 받았고, 481년에는 백제·신라와 동맹해 고구려를 침입했다. 하지만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활동의 폭이 매우 제한됐고, 562년 이사부와 그의 부하 사다함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가야는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했다고 한다. 

“고령군(高靈郡)은 원래 대가야국(大加耶國)으로써 그 나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유지되었는데, 진흥대왕이 이를 침공하여 없애고 그 지역을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만들었으며, 경덕왕이 고령군으로 개칭했다.” 

 

한강유역과 동해안 북쪽에 대해 영토를 확장한 이후 신라의 다음 타깃은 마지막까지 버티는 대가야였다. 대가야는 관산성 전투에 참여해 주력군을 잃은후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10여년간 역사의 기록에 등장하지 않았던 이사부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대가야 정벌이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진흥왕 23년(562년)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했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했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임금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임금이 강하게 권하자 포로를 받았으나,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찬미했다.“

 

대가야를 함락한 시기에 이사부의 나이는 70대 후반이었고, 기력이 쇠한 나이였다. 가야 가맹국들에겐 이사부는 죽은 제갈공명 격이었다. 마지막 남은 대가야로선 이사부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을 게 분명하다. 김부식은 사다함의 용맹 덕에 대가야를 함락하는데 성공했다고 평했지만, 백전백승의 장군 이사부라는 절대적 존재가 있었기에 대가야가 성문(전단문)을 열고 항복했을 것이다.

공은 사다함이 가져갔다. 노장 이사부가 양보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흥왕은 사다함의 공이 으뜸이라고 칭찬하며 땅과 가야에서 획득한 노비 300명을 주었다. 사다함은 끝내 이를 거절하고, 친구 무관랑이 병들어 죽자 함께 죽었다는 애절함이 더해져 이사부의 공이 가려져 있다.

 

대가야가 소멸되자, 일본의 고대사서 ‘일본서기’는 매우 슬픈 톤으로 기록했다 

“흠명(欽明) 23년 봄 6월, (천황이) 가로되, “(중략) 어찌 온천하(率土之賓)의 임금과 신하(王臣)로서 사람의 곡식을 먹고 사람의 물을 마시면서 누가 이를 참아 들으며, 마음에 애도하지 않을 것인가. 하물며 태자와 대신들은 서로 도와서 피를 토하득 울고 원한을 품는 연고가 있다.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 몸을 괴롭히는 노고가 따르는 것이다. 선제의 덕을 받아서 후세를 이었다. 그리하여 마음을 다하고 장을 빼어 같이 간역을 베고 천지의 통혹을 설욕하여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는 것을 죽어서도 신자(臣子)의 도를 다하지 못한 한을 남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가야의 멸망으로 가야 연맹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아울러 대가야 병탄을 끝으로 이사부의 이름도 역사에서 사라진다.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다.

이사부가 대가야를 함락하자, 왜왕 킨케이(欽明)는 화병을 얻어 죽는다.

일본서기는 이렇게 적었다. 

“흠명(欽明) 32년 (571년) 4월 15일, 천황이 중병으로 누웠다. 황태자는 출타하고 없었다. 역마를 달려 불러들여 누은 자리에서 손을 잡고 “짐은 병이 중하다. 후일의 일은 그대에게 맡긴다. 그래서 신라를 쳐서 任那(가야)를 세워라. 옛날처럼 두 나라가 서로 친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달에 천황은 드디에 내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가야가 멸망한 후에도 마지막 왕인 월광태자(月光太子)에 대한 전설은 남아 있다.

월광태자는 가야산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의 10대손이자, 시조 아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9대손이다. (정견모주를 모시는 사당은 경남 합천 해인사 경내에 있는 국사단이다.)  

아버지는 대가야의 9대왕인 이뇌왕(異腦王)이고, 어머니는 신라의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딸이다. 두나라가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었지만 후에 신라가 동맹을 깨뜨리고 대가야를 멸망시켰다. 냉엄한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동맹이 없는 법. 그후 월광태자는 승려가 돼 가야산 아래 월광사(月光寺)를 짓고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일설에는 월광태자를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대가야 제10대왕인 도설지왕(道設智王)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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