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과학 Social Sciences/경제, 경영 Economy

대한민국 중공업

Jobs 9 2025. 7. 2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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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업

근대(~1945)


조선 역사에서 공업은 가내수공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조선이 개항하고 나서 조선의 상업이 청나라와 일본 제국에 밀리는 원인이 되었고 조선 민족자본 형성과 자본주의 도입이 늦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은 자국이 외세에 휘둘리는 이유를 군사력 부족 때문으로 인식했고, 군사력을 진흥시키기 위한 세수확보를 위해서 상공업에 대한 제약을 풀었다.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성립하자 고종은 서구식 공업체계를 도입하기를 원했고, 공업진흥책을 추진하여 공장설립을 유도했다. 하지만 국가주도의 경제개발(공장 설립과 운영)을 하지 않았으며, 국가의 경제진흥책도 상업자본가계급 형성 실패, 일본제국의 방해 등으로 인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경공업에서는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를 경계한 일본제국은 조선의 상공업을 짓밟기 위해서 1904년에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해서 걸음마를 걷고 있던 조선의 자본주의에 철퇴를 가했다. 일본제국의 조선 상업자본 탄압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중공업 진흥책은 시작도 못하고 돈좌되었다. 대한제국을 병탄하고 나서야 일본 제국은 일본 본토의 기업을 끌여들여서 공업화를 실시했다.

때문에 한반도에 유의미한 중공업시설이 처음 생성된 것은 미쓰비시가 1918년에 황해도 황주군 겸이포면에 건설한 겸이포 제철소였고, 이후부터 중일전쟁 직전까지 중공업책은 일본 본토에서나 있었기에 유의미한 중공업 시설건설은 없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중공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을 전후로 해서 일제가 만주와 중국 침략을 위해서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터다. 1936년 10월, 조선산업 경제조사회에 따라 한반도의 중공업이 일본 제국의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1938년 9월, 총독부의 시국대책 조사회의회에 따라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소재들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었다. 이때부터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규모 중화학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함경남도 흥남 지역에 일본질소비료(노구치)가 흥남비료공장을 세우는걸 시작으로 일본 본토를 제외한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화학 콤비나트가 들어선다. 그 결과 1940년에 이르면 화학, 기계, 금속 공업 따위의 중공업 규모가 경공업의 그것과 동등해지며 우세를 띠게 되었으며 1944년 한반도의 자급률은 50%에 육박하게 된다. 하지만 일제의 중공업 건설은 철저하게 일본의 자본으로, 일본의 기술에 의해서, 일본의 필요를 위해서만 추진되었기 때문에 주요 중화학공업 기업의 경영과 기술진에서 조선인은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그 과실 또한 조선 민중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광복부터 6.25 전쟁까지(1945~1953)


한반도가 일본 제국에서 해방될 쯤, 잠시나마 한반도의 공업력과 일본 본토의 공업력 규모가 비슷해 졌다. 일본제국은 연합국에 다른 식민지는 전부 내놓아도 한반도만큼은 남겨주길 원할 정도로 한반도는 제국주의 전성기의 상징이자, 패망시점 일본제국의 공업역량의 상당수를 보존한 지역이기도 했다. 이러한 공업역량은 대부분 북한 지역에 편중되어 있었고, 이후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전개한 소련이 북한 지역을 석권했기 때문에,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나 건준이 통제할 수 있는 한반도 내의 중공업 역량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이후 38도선 이북의 공업 역사는 북한사에 해당하게 됨으로 한반도 이북의 공업은 설명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전신이 되는 38도선 이남이 미군에게 접수된 시점 당시에 미래 대한민국의 통치범위가 될 지역의 중공업 역량은 전무했다. 일본제국은 한반도 북부에 중공업을, 남부에 경공업을 육성하는 지역 불균형적 공업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는 한반도의 지하자원 자체가 북부에 편중되어 있고 한반도 북부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의욕적으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만주의 시장과도 연계하기 위함이었는데 1942년을 기준으로, 산업의 근간인 철광석과 근대시대 공업의 주 동력원인 유연탄은 98%이상이 북한에 존재하였고, 이외에 한반도 주요 광물인 구리(89.3%), 아연(78.4%), 텅스텐(72.7%), 무연탄(71.6%), 금(69.6%), 동(66.2%)이 모두 북에 쏠려있었다. 자원 뿐만이 아니라 발전시설 등의 기반시설도 북에 편중되어 있었기 때문에[16] 그나마 있는 공장들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1948년, 신생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당시 대한민국의 공업역량은 가히 최악의 상태였다. 중공업시설은 대부분 북한에 있음은 물론 새로 육성할 때 필요한 자원과 자본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유지할 인력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공업역량을 창출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다름 아닌 교육이었다. 신생 대한민국은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일본식 학제에서 미국식 학제로 바꾸고 이공계 교육과 실업공업교육을 증강시켰다. 교육정책 뿐만이 아니라 산업부흥5개년계획(1949)으로 중공업 진흥개발계획을 수립했었으나, 1950년 6.25 전쟁이 터지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공업역량도 전부 잿더미로 변했다.

 

 

 

 

전후복구기(1953~1962)


휴전 이전부터, 한국정부에게 중공업 육성은 주요관심사가 되었다. 국방력을 확충하려면 중공업역량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업개발의 해택을 보게 된 것은 영남 지방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의 소비재를 생산하기 위한 경공업육성의 해택을 받던 지역이라 열악하더라도 산업기반이 존재는 하는 지역이었고, 무엇보다 6.25 전쟁 시기에 유일하게 북한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이기에 자본가들의 역량도 온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전 이후, 한반도의 경제는 미국의 원조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은 중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미국의 원조와 국채를 공업진흥에 집중시켜서 대한민국을 근대적 공업국가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1955년에는 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의 도움을 신진공업사가 설립되어서 자동차공업이 시작되었고, 1962년에는 경성정공이 설립되어서 3륜자동차를 생산하였다. 경성정공은 후에 기아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박정희 정부 전기(1962~1971)


미국정부의 무상원조가 끊기자 삼백산업이 무너져서 한국에는 심각한 불황이 닥쳤고, 이로 인하여,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다. 장면 내각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진흥책을 수정하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으나, 정권이 1년도 못채우고 5.16 군사정변으로 무너져 국민들의 경제적, 정치적 요구를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앞선 정권들이 중공업 진흥책에 실패하고 경공업에 의존하다가 경제발전에 실패하여 퇴진하게 된 것을 직접 보기도 했고, 군인 출신들인 자신들이 그토록 원하는 자주국방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중공업발전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전 정권들과는 확연히 다른 추진력으로 중공업발전을 도모했다. 박정희 정부는 대한제국 시절부터 장면 내각에 이르기까지 어떤 이유로든 육성하지 않던 제철산업 육성을 도모했다, 1968년에 한일국교정상화로 얻어낸 자본으로 포스코를 설립하여 중공업 발전의 포문을 열었다. 1968년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처음으로 개통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현대조선과 삼성전자가 창설되어 각각 조선업과 전자산업의 모태가 되었다. 

이 시기는 대한민국 중공업이 양적으로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한국의 주요한 중공업 기업은 이 시기에 태동하거나 발족했다. 이 때, 야당에서는 중공업발전에 대한 투자가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대했다. 하지만, 정부가 중공업산업 위주로 발전을 결정한 것은 한반도의 안보환경 때문에 자주국방을 위한 선택이기는 하여도 결과적으론 상당히 옳은 결정이 되었다.

 

박정희 정부 후기(1972~1979)


박정희 정부는 양적 발전뿐만 아니라 질적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략은 매우 크게 성공해서 박정희 정부의 애당초 계획은 1980년에 100억불 수출을 달성하고 1981년에 국민소득 천불 달성이라는 목표를 가졌으나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리던 1979년엔 1,700달러대까지 상승하게 된다. 만약 중공업 중심의 발전체계를 설계하지 않았으면 달성하지 못했을 수치였다. 

이러한 성공은 박정희 정부 초기에 기계공업진흥법(1967), 전자공업진흥법(1969), 석유화학공업육성법(1969), 자동차공업육성계획(1969), 철강공업육성법(1970), 조선공업진흥기본계획(1970) 등의 법적인 근거까지 마련하면서 미리 준비를 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기반으로 1973년 1월 12일에는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중화학공업 집중 정책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공업 제품시장이 작고 따라서 경공업의 비중이 더 높았던 데다가 따라서 자본이 부족했었기 때문에, 내수시장을 외면했었고, 자본을 외채에 의존했었기 때문에, 때마침 불어닥친 오일쇼크에 큰 피해를 맞이해서 경제적인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극단적인 조치들로 중화학공업을 살려내는데 성공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중공업을 반석위에 올려 놓았다.

 

 

전두환 정부(1980~1988)


10.26 사건 이후 잠시 정권을 잡았던, 최규하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을 유지한다는 정책적 결정외에는 아무것도 못하고 고작 2달만에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에게 정권을 내주고 하야해야했다.

전두환 정부는 오일쇼크로 중화학공업 중심이었던 대한민국 경제가 박살나는 것을 이미 봐왔기 때문에, 중화학공업 말고도 새로운 먹거리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이때 한국에 전자산업과 통신산업이 급진적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전자, 통신에 대한 투자는 훗날 중화학공업과 맞물려서 큰 시너지를 발휘하게 된다. 이 때는 아직 그 시너지를 받기 전이지만 중화학공업 자체도 일본이 미국에게 플라자 합의라는 정책으로 두들겨 맞고 제정신을 못차리던 시기였기에, 급속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민주화시대(1988~)


3당합당으로 겨우 집권한 노태우 정부는 실적이 필요했다. 그 기존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정책에서 성공적이었던 부분을 최대한 살려서 인기를 끌어야 훗날 군사정권에 부역한 책임을 덜 수 있었다. 덕분에 군사정권이 끝났음에도 중화학공업은 높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이는 한국의 공업력 증진이 순항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외환위기 터지기 전까지 칭찬을 받았으나,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쌍용그룹, 대우그룹 등 수많은 기업이 날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업체가 견디면서 현재 중공업 성장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제조업을 제조되는 생산물의 중량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 경우, 금속 · 기계, 화학, 석유 등 중량이 큰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 

 

제조업을 나누는 다양한 기준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제품의 용적에 대한 중량의 크기에 따라 중화학공업(중공업)과 경공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중화학공업은 1970년대 경제개발계획으로 인해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철강 · 조선 · 비철금속 · 기계 · 전자 및 화학공업은 6대 전략산업으로 분류되어 집중적으로 육성되었다.

우리나라는 산업 내 제조업의 비중이 높은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제조업 가운데서도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으로 중화학공업은 우리나라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조업을 중화학공업과 경공업으로 분류할 때, 제품의 용적에 비하여 중량이 상대적으로 무거운 것을 만드는 제조업을 중화학공업이라 한다. 

또한 생산과정에 있어서 강대하고 견고한 생산수단이나 강건한 체력을 내용으로 하는 노동력을 사용하는 제조업을 중화학공업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으며, 연구자에 따라서는 중화학공업에 광업을 포함시키고 광업과 광산물을 원료로 하는 것을 중화학공업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일반적 정의인 경제용도별 기준(economic use approach)에 의하면 중화학공업은 생산재공업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W. 호프만(Hoffmann)은 제조업을 소비재공업과 생산재(자본재)공업으로 나누고 생산재공업에 금속 및 비철금속, 기계류, 차량 등 수송설비, 화학을 포함시켰다. 

한편, 1960∼1970년대 유엔(UN)은 제조업을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으로, 중화학공업을 생산재와 기계류로 나누었다. 유엔 기준에 의하면 중화학공업에는 고무제품, 석탄제품 그리고 비금속광물이 포함된다. 

우리나라 역시 중화학공업에 대한 최초 연구서이자 이후 중화학공업화의 기초가 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보고서(한국과학기술연구소, 1970)에서 이 유엔 기준에 따라 화학, 석유 및 석탄제품, 토석 및 유리, 제1차금속, 금속제품, 기계, 전기기기, 수송용 기기 등을 중화학공업에 포함시켰다. 

이후 광공업통계의 기준이 되는 『광공업통계조사보고서』를 작성하던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이 분류를 기준으로 1970년 3월 개정된 한국표준산업분류표에 따라 중화학공업 일반기준을 제시하였다.

현재 통계청에서는 한국표준산업분류에 따라 제조업을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 가운데 중화학공업에는 산업 중분류 중 펄프 및 종이(C17), 석유정제(C19), 화학제품(C20), 의약품(C21), 비금속광물(C23), 1차금속(C24), 금속가공(C25), 전자부품 · 컴퓨터 · 영상음향(C26), 의료정밀(C27), 전기장비(C28), 기계장비(C29), 자동차(C30), 기타운송장비(C31)가 포함된다. 



우리나라의 중화학공업은 1970년대에 들어 급격히 발전하게 되었다. 1960년대의 수출주도형 공업화의 전략으로 2차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은 경제규모의 양적 팽창과 수출의 증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농업의 정체, 원료 및 중간재의 해외의존도증가, 외채부담 증가로 인한 국제수지 악화 등의 부작용이 뒤 따랐다.

또한 1970년대 초부터 선진국들의 경공업제품에 대한 수출규제가 시작되었으며 제1차 세계석유파동은 정부로 하여금 그 동안의 경공업중심 수출지향적 정책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유인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증가의 한계를 극복함과 동시에 수입에 의존했던 중간재를 국내공급으로 대체하기 위하여 1972년부터 실시된 제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부터 본격적인 중화학공업육성 정책을 실시하였다.

정부가 집중적으로 육성하고자 한 산업에는 조선 · 자동차 · 철강 · 석유화학 등이 포함되었다. 정부는 1973년 6월에 중화학공업육성 정책을 수립하고 철강 · 조선 · 비철금속 · 기계 · 전자 및 화학공업의 6대 전략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하여 금융 및 세제상의 혜택을 주었다. 동시에 필요한 자본을 확보하기 위한 적극적인 외자유치를 추진하였다.

이로 인해 그 동안 진행된 여러 가지의 수출지원 정책들은 크게 축소된 반면, 중화학공업에 대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2년∼1976년) 동안 종합제철, 석유화학 계열공장, 기계공업 육성 등 중화학공업의 건설이 촉진되었다.

그리고 철강 · 전자 · 조선 · 석유화학콤비나트 등 중화학공업의 중점적인 건설에 힘입어 제조업부문은 부가가치생산에 있어 1971년에서 1976년 동안 GNP주1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1.7%에서 35.0%로 크게 성장하였다.

또한, 정부는 교육과 훈련제도를 대폭 개선하여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엔지니어와 기술을 갖춘 고급 노동력을 키워내기 위하여 기술훈련센터, 기술공업 고등학교 및 전문대학교 등을 신설하였고, 한국과학기술원을 설립하여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학자들을 유치하는 노력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중화학공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70년 11.9%에서 1980년 26.3%로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수입대체 효과를 유발하였으며 중화학공업 제품의 수출을 크게 증대시켰다.

중화학공업의 급격한 성장은 우리나라의 산업구조 변화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산업 내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점차적으로 커지기 시작하여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기할 수 있게 되었고, 수출상품 중에서 차지하는 중화학공업제품도 그 비율이 증가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즉, 선박과 철강제품의 수출이 가발과 합판 등 경공업 수출 품목들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자제품과 수송기계의 수출이 전통적인 수출 품목인 섬유의 수출 비중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부주도형 중화학공업의 육성정책은 1980년대 이후부터 정부에 의하여 조정을 받게 되었다. 정부는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 추진과정에서 발생한 과잉투자 및 과당경쟁을 해소하기 위하여 정부주도의 규제 및 지원을 통해 중화학공업의 축소 및 조정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어 기업 간의 합병 또는 생산전문화를 유도하여 그룹별 사업포기와 교환을 통해 중화학공업 부문에 대한 투자조정을 시도하였다.


현황


우리나라에서 제조업이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고도성장기(高度成長期)에 상승 추세를 지속하다가 1980년대 말 이후 최근까지는 대체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제조업 내에서는 2008년 중화학공업 83.5%, 경공업 16.5%로 중화학공업 부문의 비중이 압도적이다(부가가치 기준). 1980년대 이후 정부의 중화학공업 조정을 위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의 성장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화학공업 비중의 상승 추세는 2000년대에 들어서도 비교적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추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크게 ‘내수/수출 간 양극화’와 ‘중국 효과’의 두 가지 요인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최근 내수 침체로 인하여 중화학공업 부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수 업종의 비중이 큰 경공업이 더 침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저임금과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의 제조업이 고도 성장을 하면서, 국내 경공업 부문의 경쟁력 상실로 동 부문의 생산이 급속히 대중국 수입이나 현지생산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는 데 따른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내수/수출 간 양극화는 순환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향후 완화될 것으로 보이나, 중국 효과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러한 중화학공업 비중의 상승 추세는 향후 그 속도는 훨씬 둔화되겠지만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의의와 평가


일반적으로 공업화는 섬유공업 또는 잡화공업 등 경공업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철강업과 같은 중화학공업으로 발전한다. 우리나라의 중화학공업은 1960년대에 철강업을 위시하여 석유화학 · 전자공업 · 조선 · 자동차 · 전력 등의 본격적인 발전이 통합적으로 진행되었다. 

중화학공업의 발전은 우리나라가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룩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이러한 중화학공업화는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함으로써 은행과 기업 간의 마찰, 대기업과 중소기업과의 격차의 확대 등과 같은 현상을 빚어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근로자들의 생활수준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기업경영의 조직이나 관리방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제조업의 비중이 매우 높고, 제조업 내에서도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특히 높으며, 무역의존도가 높다는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선진국은 제조업 내에서 중화학공업 부문이 지배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구조를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다. 

다만, 전통적으로 중화학공업이 강한 독일이나 일본 등의 선진국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제조업 중 중화학공업 부문의 비중이 아직은 높은 편이다. 

향후 우리나라의 중화학공업은 기존의 조선 · 자동차 · 철강 · 석유화학 분야에서의 수출특화 구조를 유지함과 동시에, 부품 · 소재 및 첨단기술 분야의 발전을 촉진시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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