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온주의자(Zionist)
유대 민족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시온주의 운동의 지지자를 의미
시온주의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주의 운동으로,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시작
현재는 유대 국가로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지칭
시온주의의 핵심
유대인 민족주의:
시온주의는 유대인의 민족적 정체성과 결속을 강조하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
팔레스타인 지역: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들의 고유한 영토로 간주하며, 이곳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
국가 건설:
시온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이 정치적 자결권을 행사하고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
이스라엘 건국: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시온주의 운동의 중요한 성과
시온주의의 다양성:
시온주의는 단순한 단일 사상이 아니라 다양한 견해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운동입니다. 일부 시온주의자들은 이스라엘 영토 확장을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평화적인 공존을 추구합니다.
반유대주의와 반시온주의:
시온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합니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을 의미하며, 반시온주의는 시온주의의 목표나 이스라엘 건국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시오니즘, Zionism
히브리어: צִיּוֹנוּת, 아랍어: صهيونية
| 뒷날, 야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우뚝 솟아 언덕들을 굽어보게 되는 날, 높이 치솟아 멧부리들을 눈 아래 두는 날이 오면, 만민이 물밀듯 밀려오리라. 모든 민족이 몰려와 말하리라. "어서, 야훼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을 뽑으신 하느님의 성전으로! 거기서 어떤 길을 가리켜주시든 우리 모두 그 길을 따르자!" 그렇다. 야훼의 가르침은 시온에서 나온다.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들려온다. 하느님께서 민족 사이의 분쟁을 판가름해 주시고 강대국 사이의 시비를 가려주시리라. 그리 되면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칼을 빼어드는 일이 없어 다시는 군사를 훈련하지 아니하리라. 사람마다 제가 가꾼 포도나무 그늘, 무화과나무 아래 편히 앉아 쉬리라. -만군의 야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어느 민족이나 저희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지 않느냐? 우리도 자손 만대에 우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부르며 살아가자. 그 날이 오면, 나는 절름발이들을 모아오리라. -야훼의 말씀이다. 흩어졌던 것들을 모아들이리라. 적잖이 고생을 시켰지만, 그 절름발이들, 비틀거리는 것들을 씨앗으로 남겨 강대국을 만들리라. 이제부터 영원토록 이 야훼가 시온 산에서 다스리리라. 양떼를 지키던 망대, 언덕에 자리잡은 수도 시온아, 네가 잃었던 주권을 도로 찾으리라. 수도 예루살렘의 국권을 되찾으리라. 미가 4장 1-8절(공동번역 성서) |
시오니즘(히브리어: צִיּוֹנוּת, 아랍어: صهيونية, 영어: Zionism)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조상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의 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t) 운동이다. 시온(Zion)이란 원래 예루살렘 시가지 내의 언덕 이름으로 예루살렘, 또는 이스라엘인의 땅을 의미한다. 시온주의라고도 한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됨으로써 실현되었으며 현대 이스라엘 정치세력 대부분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시오니즘을 기본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정당에 따라 시오니즘의 구체적 노선에는 현저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시온주의, 시오니즘이라는 단어 자체는 1893년 빈의 유대인 대학생 지도자 나탄 비른바움(Nathan Birnbaum, 1864년-1937년)에 의해 만들어졌다.
역사
19세기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시오니즘도 유대인 사회에서 새로운 근대적 의미를 갖게 되고 드레퓌스 사건에 깃들어 있는 반유대주의의 뿌리깊은 앙금을 목격한 유대계 오스트리아 기자 테오도르 헤르츨의 제창에 의해 국제 시오니즘 협회가 창설되고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이주를 원하는 이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폴란드 일대의 중부 유럽에 뿌리를 깊게 내린 유대인 좌파 노조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착취와 제국주의적 폭압에 병든 유럽을 버리고 유대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신천지를 개척하자'라는 메시지가 강력하게 퍼지기 시작했고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반유대주의 폭동)이 심각해지면서 동유럽 유대인들의 경우,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대규모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런 동유럽 유대인들의 대다수는 미국 이민을 선택했으나,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고향을 되찾자는 시오니즘에 동조하여 팔레스타인 이민(알리야, Aliyah)을 결정했다.
수십 년에 걸친 이민의 결과, 1920년경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이민자 사회가 팔레스타인에 형성되어 현지 아랍인들, 영국 식민 당국과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당시 유대인 정치 집단 중 조직화와 이데올로기적 무장이 가장 철저했던 집단은 중부 유럽의 유대인 분트(Bund), 각지 사회당-공산당의 유대인 조직 등 사회주의에 깊게 심취한 좌파였고,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시오니즘 또한 원래는 좌파의 이데올로기로 시작했다. 모세스 헤스, 나흐만 쉬르킨, 베르 보로호프 등 시온주의의 초기 이론가들은 또한 동시대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이기도 했으며, 베를 카츠넬슨, 다비드 벤구리온, 골다 메이어 등의 많은 이스라엘 초기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들 또한 평생 뿌리 깊은 사회주의적 신념을 품고 살았다.
시오니스트들 중에서 좌파 시오니스트들의 경우, 이스라엘 건국 이후 막장 민족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쓴 글들만 하더라도 순진한 건지, 이상이 지나친 건지 수천 년 만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가 떡!하고 생기면 현지 아랍인들과 대립과 반목은커녕, 똑같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받는 피착취계급 처지로서 서로서로 손잡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평등한 이웃으로 존중하며 오순도순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넘친다. 니네민족끼리. 이러한 믿음 또한 이들이 결코 전통적인 종교적 관점에서 단순히 '우리민족끼리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땅을 차지해야겠다!' 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나름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벨 에포크의 낙관적 계몽주의에 기반하여 시오니즘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현실의 벽과 맞닥뜨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게 나름 호소력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환빠에게 굳이 정치적 정체성을 부여하자면 전형적인 팽창주의적 민족주의 극우에 속하는 반면 시오니즘은 역사적 관점에서 동급으로 취급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우파 시오니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 무슬림을 야만인, 이교도 취급했다. 20세기 초 수정시오니스트들은 사민정책을 열심히 펼쳐서 아랍인을 팔레스타인에서 축출하자는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은 정치적으로 아무런 각성도 없는 미개민족에 불과하니까 옆에 두어서 잘 부려먹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시오니스트들은 자신은 선택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아랍인, 무슬림을 학살, 추방해도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19세기 말부터 아랍 민족주의가 각성하고 조직적인 민족주의 단체들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대놓고 공존을 부정하고 자신들을 미개 민족으로 보는 우파시오니즘 지지자들이 속속 정착하는 것에 대해 아랍인들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반면 아하드 하암와 같은 일부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절대 공존을 천명하며 아랍인을 극도로 존중해서 아랍인들의 인정을 받아야 유대 국가가 팔레스타인에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소수였던 그들의 목소리는 작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초기 시오니스트들이 아랍인에 대한 시각은 제각각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좌파민족주의적이고 친노동적인 성향이 강했으나, 나치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 그로 인한 전쟁 등을 통해 점차 우경화되었고 신보수주의가 세계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에는 아예 대놓고 이스라엘 내에서도 우파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어 21세기 와서는 사실상 진보적 색채조차 찾아보기 힘든 우파-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다른 주류 이데올로기와 비교해봐도 시오니즘은 보수화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된 셈이다.
충돌의 시작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고 하는데 문제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랍인11들이 오랫동안 살아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대 이민의 초기에는 유혈충돌이 없었고 상술한 것처럼 오히려 아랍 엘리트들은 시오니즘을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에서의 유대인 학살을 비롯해서 유럽에 팽배한 반유대주의로 인하여 하루빨리 유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강박증과 더불어 아랍인을 존중할 필요없는 미개인 취급하는 수정시오니스트들의 관점은 아랍인들과의 충돌을 빚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민은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유대인의 수가 급증하고 여기저기서 건설되는 유대인 공동체가 아랍인에게 2등 시민의 지위를 강요하자 강성해지고 있던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시오니즘에 큰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 때문에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유대인을 상대로 한 폭동, 테러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아민 알 후세이니가 주도한 폭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영국 당국은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애초에 원인을 제공한게 얘들인 건 둘째치고 이미 식민당국의 개입 정도로 소요가 진정되기에는 민족감정의 골이 깊어진 후였다.
여기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더더욱 시오니즘에 집착하게 되었으며, 서유럽 여러 나라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방관했다는 빚과 민족자결주의, 격화되는 식민지의 독립 민족국가 수립요구 등으로, 또 소련의 경우에는 서유럽의 영향력이 막강한 아랍지역에 공산국가13를 하나 더 늘리고 싶다는 생각 등등 각각의 계산에 따라 유대인 국가가 성립하는 것을 찬성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1948년 UN의 분리독립안에 따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됨과 동시에 주변 아랍국가들은 일제히 이스라엘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에서는 아랍계 팔레스타인인들이 추방되고 주변 아랍국가에서는 유대인들이 추방되면서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팔레스타인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결론적으로는 그 사상은 팔레스타인 고통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전쟁 이전부터 약 1년간 무기 금수 조치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영국령 팔레스타인 식민지 내에는 소화기 이상의 무기는 없는 상태로 주변 아랍국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아랍계가 유리했지만 유대계는 2차대전 중 영국이 에르빈 롬멜을 상대하기 위해 예비로 모병해둔 부대 출신자와 유럽 각국에서 군경력을 쌓은 전역자들이 있어서 조직력 면에서는 우수했다.
1차 중동전이 시작되면서 신생 이스라엘은 미리 수입해둔 공작기계로 간단한 무기를 생산하는 한편, 유럽과 미국 등지에 특사를 파견해 기부금을 모았고 그 돈으로 2차대전 이후 처리에 고심하고 있던 구형 무기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해 전쟁 초기에는 기갑 차량이나 공군력이 거의 전무하던 상황에서 후기에는 체코에서 전투기 등을 수입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력 격차를 메꾸는 데 성공했다.
결국 아랍계는 우세한 무기와 전력체계17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의 이권다툼 때문에 참패하고 말았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떡실신되고 결국 이집트와 요르단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더이상 반 이스라엘 정책을 펴지 않는다. 시리아는 아직도 적대관계이나 전략적 요충지인 골란 고원을 빼앗기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수밖에 없다. 아니 시리아 같은 경우는 서로 국경에서 포격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시리아로선 이대로 평화적으로 대충 놔두는 분위기(물론 골란 고원은 포기 안 하지만)였는데 아사드 대통령의 독재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서 발생한 시리아 내전으로 더 엉망이 되면서 이스라엘에선 독재자 아사드 일가가 무너질 경우 호스니 무바라크 실각 직후의 이집트 꼴이 나지 않을까 우려 중이다. 나중에는 어쨌거나 팔레스타인의 고통과 그들에 대한 탄압이 지속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담 후세인 시절에는 요르단을 사이에 두고 이라크와 이스라엘은 으르렁거렸지만,21 걸프 전쟁 이후 미국한테 실컷 얻어맞은 이라크가 너무나 약체화되어 이스라엘은 한시름 놓는가 했지만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에 들어선 현 이라크 정부도 이스라엘을 승인하지 않고 있다.
아랍 민족이 아니라서22 같은 친미국가인 이스라엘과 사이가 좋았던 이란은 혁명 이후 이슬람 세력이 집권한 후 외교 방침을 180도 돌려 반미-반이스라엘 정책을 펼친다. 호메이니는 이슬람 영토를 점유하고 있으며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이스라엘을 "악마 제국"으로 규정하고,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없애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되찾아주는 것을 국가적 사명으로 삼았다. 그 뒤를 이은 이란 지도자들도 마찬가지 정책을 펴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있다. 그러다보니 현재 이스라엘과 이란은 서로를 제1의 가상 적국으로 삼고 있다. 물론 이란과 이스라엘이 직접적으로 전쟁을 하기에는 요르단과 이라크가 양국 사이에 있는데다 가뜩이나 이 두 나라 입장에서 자칫 자국 영토가 전쟁터가 될 수 있어 반발할 공산이 크기 때문에 더더욱 힘들다. 특히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는 게 가뜩이나 반미국가 이란을 싫어하는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는 짓이라서 이란으로서는 더욱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할수가 없는 상황.
그러나 어쨌든 이란-이스라엘의 갈등은 심각한 편. 이란의 핵 개발도 사실상 핵 보유국인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한 이유가 크다. 만약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이란을 폭격할 경우에는 정말로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헬게이트가 열릴지도 모른다. 물론 핵 협정 타결로 이란이 핵포기를 함에 따라 핵전쟁은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란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적으로 생각하고 이스라엘도 이란을 경계하고 있기에 핵전쟁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전쟁의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이집트에서 2011년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가 몰락하면서 이스라엘에겐 잠시 비상이 걸렸다. 8,000만에 달하는 인구를 가지고 아랍권에서 정보 및 여러 모로 중요한 나라이자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고 친미 국가가 되면서 미국제 무기를 도입하던 이집트가 단기간에 친미 독재자를 잃은 셈. 2012년 시점에서는 군부는 아직도 무시 못하나 여론은 반군부에 무슬림 형제단을 지지하고 1차 총선에서도 이들이 압승을 거두는 통에 이스라엘로선 30년 넘도록 평화를 유지한 이집트와 충돌도 염려해야 할 판국...일 줄 알았으나, 1년도 못 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고 집권하던 무슬림 형제단이 개박살나면서 유야무야된 듯. 새로 집권한 엘시시 정부는 내부문제와 이슬람 무장단체들에만 신경쓰며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고 있다.
아랍, 중동에서의 시오니즘
아랍권에서는 극도의 경계 대상이자 증오하는 대상이다. 특히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와 2024년 사망한 에브라힘 라이시 전 이란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시온주의 제국, 시오니즘 공화국이라고 부르며 공개적으로 비판과 동시에 격앙된 증오를 드러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공식 국호 대신 시온 공화국, 시온주의자들의 땅이라고 부른다.
신이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신다면 그 시온 공화국과 더러운 종족들은 언젠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2024년 5월 이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온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우월한 종족이라 여기고 그 외 다른 인류를 열등하다고 생각한다.
-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시온주의 정권은 스스로를 위해 맹목적 암살을 택했으나 이런 비인간적 방법으로는 사악한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시오니즘 자체가 유대인과 유대교를 찬양하는 주의이자 (아랍을 침공하여) 잃어버린 유대국의 영토를 수복한다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제외한 아랍 대부분은 이 시오니즘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전통적인 이슬람 율법을 통해서 시오니즘 찬양을 금지하고 있고 그 외 다른 아랍국가들도 이슬람 율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시오니즘에 대해서 적시하거나 불온적으로 여기고 있는 상황.
시아파가 대부분인 이란 역시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을 경계하고 혐오하고 있다. 특히 이란 최고지도자와 대통령은 이스라엘이라는 국호 대신 시온공화국, 시온주의자들의 괴뢰국이라고 부른다.
특히 이스라엘 주변국인 레바논, 시리아 등 이슬람교 국가 입장에서는 자기네 영토가 포함되어 있는 것 때문에 더욱 시오니즘에 대한 혐오성향이 짙다. 그것도 이슬람교가 아닌 유대국의 영토라는 점 때문에.
분파
시오니즘
오해 및 편견
시오니즘은 우파적이다?
시오니즘은 19세기 초에 당시에 좌파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내셔널리즘의 영향으로 유대인이 주류 사회에 대한 억압,차별,혐오에 저항하기 위해 시작된 정체성 정치였다.
그런데 시오니즘 자체가 친서방 우파사상으로 잘못 알려진 가장 큰 이유는 나치즘의 반유대주의가 아니고 러시아의 볼셰비키가 시오니스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레닌을 위시로한 볼세비키는 자결권을 내세워 약소 네이션(민족, 국민)의 내셔널리즘을 지지했고 강대국의 내셔널리즘을 비판했다. 그러나 당시 우파 시오니스트들은 서양 열강에게 로비해서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는데 이때 볼세비키가 이를 친제국주의라고 비난했다.
레프 트로츠키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숙청당한 이후로 소련은 반시오니즘에서 반유대주의로 바뀌었고 서방으로 도망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클리프주의를 포함한 수정주의 계열까지 포함해서 반시오니즘 기조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자체가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선전해왔으며 이에 영향을 미친 사회자유주의, NLPDR, PD계열 정당이 반시오니즘을 진보좌파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1967년 이후로 이스라엘 영내 우파시오니즘만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6일 전쟁을 지켜본 미국이 이스라엘을 중동을 견제할 수 있는 도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27 이 시기부터 기독교 시오니즘이 서양 우파 사이에서 번성하기 시작했고 이는 진보좌파 입장에서는 시오니즘 자체가 극우적이라고 오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테오도르 헤르츨이 사망한 이후 수정시오니즘의 시조인 제프 자보틴스키가 헤르츨의 후계자를 자칭하면서 시오니즘에 유럽식 인종주의, 유대교적 관념을 끼우면서 시오니즘을 변질시킨 것이 시오니즘에 대한 오해를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노동시오니스트들은 수정시오니즘을 견제하지 못해 수정시오니스트들이 나치스트들과 비리를 자행한 것을 막지 못하고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수정시오니스트들은 노동시오니즘과 달리 반공주의를 탑재했고 그렇게 때문에 영국, 미국같은 열강으로부터 쉽게 지원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자금력이 노동시오니스트들보다 더 높았고 수정시오니스트들이 시오니즘의 주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수정시오니스트들은 1967년 이후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다른 시오니즘을 제치고 유력한 주류가 되었다.
국내에서 시오니즘 비판자로 잘못 인식되기도 한 이스라엘 출신 팔레스타인 평화운동가인 아모스 오즈도 사실 좌파시오니스트이다.
시오니스트는 유대교도이다?
본래의 시오니즘은 철저한 세속주의적 현실론적 민족주의였다. 실제로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꼽히는 테오도르 헤르츨, 다비드 벤구리온 등은 확고한 무신론자들이였다. 하임 바이츠만, 골다 메이어, 모세 다얀, 이츠하크 라빈, 제프 자보틴스키 등 다른 대표적인 시오니스트들도 무신론자거나 불가지론자들이였다.
이미 2차 대전 이전부터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유교문화권에서 제사 지내듯이 유대교를 관습적인 차원에서 따를 뿐, 실생활에선 세속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고, 내세나 인격신 같은 초자연적인 주제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시피 했다. 현재도 이스라엘의 중교 분포를 보면, 국민의 약 75% 정도가 유대교인이라고 하지만 이들 중 반은 철저한 세속주의적 유대교인이며, 나머지의 절반 정도만이 전통적 의미의 유대교도이다.31 그 외에도 이스라엘 국민의 18%에 가까운 사람들이 무슬림이며 나머지는 기독교 또는 무교 등이다.
국내에서는 이스라엘 독립 전쟁을 비롯한 주변 중동 국가들과의 갈등을 유대교 vs 이슬람교의 시각에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스라엘 지도부에서는 그런 입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이런 갈등을 철저히 유대인 민족의 삶의 터전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으로 보았다. 또한 이는 반대 진영에 있던 아랍권도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저항조직인 PFLP의 창시자이자 '테러리즘의 대부'로 불렸던 주르지 하바쉬는 이슬람이 아닌 그리스 정교회 신자였고 미국의 개신교 선교단체에 의해 세워진 베이루트 아메리카 대학에서 역시 그리스정교회 출신인 콘스탄틴 주레이크의 강의를 통해 그의 범 아랍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PFLP에서 갈라져나온 조직 DFLP의 창시자 나예프 하와트메는 그리스 가톨릭 교회 출신이었다. 또한 시리아와 이라크 등에서 혁명에 성공한 아랍 사회주의 사상인 바트주의는 그리스 정교회 출신 미셸 아플라크와 무신론자 자키 알 아르수지 등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수에즈 전쟁과 6일 전쟁 당시의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는 아랍사회주의 성향의 세속적 무슬림이었다. 이런 점은 이스라엘과 수차례 전쟁한 이집트나 요르단 등에 비해 이스라엘과 별 충돌이 없었던 이란이나 이스라엘과도 큰 마찰이 없었는데다 아랍을 대표하는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훨씬 지독한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임을 고려하면 더욱 확실해진다.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유대교 랍비들도 있는데, 유대인 조상들이 죄를 지어서 신의 징벌로 흩어져서 떠돌아 다니게 되었고, 나중에 메시아가 왔을 때 다시 나라를 찾게 된다는 것이 유대교의 신앙이기 때문이다. 또한, 흔히 선민사상에 대해서 오해하는데, 유대교에서는 유대인만이 구원받고, 다른 민족들은 지옥간다고 말 하는게 아니라, 유대인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고,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심지어, 유대교 경전인 구약 성경 사무엘하 21장의 내용에서, 사울 왕의 시대에, 이스라엘 중에 함께 살던 이민족인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하자, 신이 이스라엘에 기근을 징벌로 내리고, 다윗 왕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죄하기 위하여 사울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내어주고 나서야 기근이 끝난다.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기브온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되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그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두고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그들을 기브온 사람의 손에 넘기니 기브온 사람이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이 동시에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사무엘하 21장
성경에서 이민족을 멸절하는 내용에서는 그 이민족들의 우상숭배와 음란행위등의 죄악을 근거로 들지, 이민족이라는 인종적인 사실 자체가 죽임당해야 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예시가 요나서에서 니느웨(니네베)가 죄악으로 인해 멸망당할 뻔 했다가, 회개하여서 재앙을 피하게 되는 내용이다.
이외에도 기독교 시오니즘 같은 분파가 있는데, 이들의 교리는 유대교도 입장에서는 기독교의 막되먹은 헛소리로 들릴 가능성이 높다.
반시오니즘은 반유대주의이다?
극단적 시오니스트들이 내세우는 매도이고 사실이 아니다.
반유대주의는 우파가 먼저 시작했고 반시오니즘은 좌파가 먼저 시작했다는 점부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유대인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면 후자는 이스라엘 자체에 대한 부정이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대안우파는 친시오니즘이지만 반유대주의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자국내에서 유대인에 대한 타자화를 하고 이스라엘을 내세워 예루살렘을 대안우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대(大)중동 전체를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언뜻보면 모순적이지만 이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할 뿐 유대인을 배려하려는 마음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주류 반시오니스트들은 진보좌파 성향이라서 대개 반유대주의를 반대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존재가 반유대주의를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을 탄압함으로서 아랍인들에게 반유대주의를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서양제국주의가 중동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고 유럽 유대인이 원주민인 아랍인을 내쫓아 만든 식민지라고 간주하고 있다. 또한 서양, 이스라엘의 우파들이 시오니즘을 내세워 유대인과 아랍인을 이간질한다고 생각하고 유대인과 아랍인이 연대하여 이스라엘을 비롯한 서양제국주의를 중동에서 추방시켜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오히려 강경 초정통파 유대인일수록 오히려 시오니즘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시오니즘 자체는 유대적이고 민족주의적일지언정 유대교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건국 자체는 유대교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시오니즘의 과정 자체가 유대교회가 중심이 된 것이 아닌 노동시오니즘과 같은 사회주의 사상 중심으로 건국된 세속 국가에 불과한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시오니즘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후술할 영상을 보듯, 팔레스타인을 대놓고 지지하는, 심지어 하레디 계열 초정통파 유대인들도 있다. 아예 자기들의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크게 목소리를 못내고 있다고 인정까지 할 정도. 후술될 좌파시오니즘에선 팔레스타인인을 유대인의 한 지파라고 볼 정도로, 생각 외로 이스라엘 내의 유대인들의 시각도 다양하다.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항상 타자화한다?
초기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보고 외세에 저항해 땅을 지키다가 결국 정체성까지 상실해버린 유대인의 후손으로 간주했다. 또한 위 '태동'의 문단에 나오듯 일부 시오니스트들은 아랍인을 포용한 히브리 민족국가를 세우자는 주장도 나왔다. 즉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이 히브리인이라는 정체성만 받아들이면 국민이 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영유권을 둘러싼 아랍인들과의 분쟁 격화, 결정적으로 1차 중동전쟁은 이런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었다. 1차 중동전쟁 전에도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어느 민족이 국가를 세울 것인지를 두고 치열한 경합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상호 간의 학살과 추방이 자행되었다. 이스라엘 독립 후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원조를 위해 아랍 국가들이 대대적인 침공을 개시하자 이런 학살과 추방은 더욱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1차 중동전쟁 종전 이후 이스라엘 중부에 거주하던 아랍인들은 거의 대부분 가자 지구와 서안지구, 요르단 등지로 피난하거나 추방되었다. 그러나 북부의 아랍인들은 현지에 잔류하여 오늘날 이스라엘 인구의 1/4에 달하는 이스라엘 아랍인의 주류를 구성한다. 편견과 달리 아랍인의 이스라엘 사회 진출은 활발한 편이며, 이스라엘 노동당과 같은 좌파 정당과 주로 연계하여 정계에도 진출한다. 허나 유대인에 비해 심각하게 낮은 경제력은 문제로 꼽힌다. 2017년 현재 아랍인의 3%는 부유층, 27%는 중산층에 해당한다. 이조차도 20년전 17%에 비하면 상당히 증가한 것이다.
비판
역사 왜곡
전 세계의 모든 유대인들을 유대-로마 전쟁 이후로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추방당한 혈연적 후손이라고 선전했고 특히 수정시오니즘, 종교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아랍인들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에서 온 이민자로 왜곡하고 그들에 대한 탄압, 추방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하고 있다.
유대인이라는 개념을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민족집단으로 만들어 유대인이 인종적 개념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었고 시오니스트들이 친유대주의적 목적으로 유대인 DNA 드립을 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수천년동안 다른 나라에서 계속 동화되어 살아온 만큼 무슨 특정한 유대인 혈통이 있다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비과학적인 망언에 불과하다.
유대인이 다른 민족과 공생한 역사를 부정하고 다른 민족에게 고난당한 사건들만 나열하여 피해의식과 타집단에 대한 공포가 전수되고 있다.33 특히 홀로코스트만을 집중적으로 강조하여 유대인이 절대적인 사회적 약자라고 착각하며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유대인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배타성
이는 모든 민족주의의 부정적인 면이지만 수정시오니즘이 아닌 노동시오니즘조차도 팔레스타인인이 아닌 다른 민족에게 배타적인 면이 있다.
혈연적으로 연관이 없는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유대인을 수용하면서 정작 그들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슈케나짐을 가장 우선시하는 인종주의를 보이고 있다. 이는 수정시오니즘만의 현상이 아니다. 이스라엘 노동당소속인 이츠하크 라빈조차 이스라엘 영내 아랍인은 20%를 초과하면 안된다고 생각했고 골다 메이어도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다른 유대인에 비해 우수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다. 특히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이지만 언어와 문화적으로 아랍인에 가까운 아랍 유대인들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가 고유의 정체성을 잃고 주변의 아랍권에 동화되어버릴까 염려하여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자의적인 정의
생전에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사람을 멋대로 유대인이라고 정의하는 현상이 있다. 프란츠 카프카36도 이 사례에 속하는데 정작 그는 시오니즘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족보에 유대인이 포함된 좌익 인사는 모조리 유대인으로 낙인 찍어 공격하던 서구권 반유대주의 우파들의 반공 마타도어를 그대로 수용하여 블라디미르 레닌 등을 유대인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일부 문화적 시오니스트들은 프란츠 카프카를 이스라엘 국적 작가라고 주장한다.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에 대하여 언급도 하지 않고 유대인 찬양도 하지 않았으며 종교조차도 유대교를 믿지 않던 카프카인데도 말이다. 그 당시에 존재도 하지 않던 당시 이스라엘이? 항목에서 보듯이 카프카를 문화적 시오니즘의 성자로 왜곡한다는 해외의 비난도 나오고 있다. 그저 유명한 작가라고 이스라엘의 자랑이라며 왜곡하는 것이다.
유대인 인권단체와 시오니즘 단체는 동의어가 아니다. 이걸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후자의 경우 미-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나 미국유대인위원회(AJC) 같은 경우를 가리키고 전자의 경우는 반명예훼손연맹(ADL)같은 혐오 반대 단체이다. 후자는 시오니즘을 표방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슬람 혐오를 포함해 모든 형태의 인종주의와 차별에 반대하는 반인종주의 단체이다.38 유대인 인권단체를 시오니즘 단체로 치부하는 것은 이슬람 혐오 반대 단체를 이슬람주의 단체라고 치부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논리적 비약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시오니스트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다.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국제주의 관점에서 시오니즘을 지지했다는 게 대체적인 정설이다. 아인슈타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논란이지만 1918년부터 이스라엘 건국 운동에 참여한 건 사실이다.
시온주의를 통해 알게 된 미국과 이스라엘의 침략적 본질
시온주의(Zionism, 시오니즘, 유태복고주의)는 세계 곳곳(주로 유럽지역)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민족(이후 유태인으로 지칭함)이 자기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된 운동이다.
시온주의는 세계에 널려져 있는 유태인들이 서아시아레반트지역(팔레스타인지역)에 이주하여 그곳의 아랍인(팔레스타인)들을 내쫓거나 박멸시키고 한때 이 지역에 존재하였던 유태인들의 대국가를 다시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과 운동이다.
시온주의는 자본주의나라 유태인들속에 퍼진 부르조아민족주의중에서 가장 침략적인 사상이다.
시온주의는 서아시아레반트지역(팔레스타인 지역, 가나안땅)에 만들어진 ‘반이슬람을 이념으로 하는 배타적인 유태인의 국가’를 유지, 확장하려는 이스라엘의 팽창주의, 침략정책으로 되어 있다.
서아시아레반트지역은 갈릴레아호수(티베이라스호수, 갈릴리호수)를 기점으로 하여 홍해에 이르는 요르단강(요단강)을 동쪽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지중해를 경계로 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을 연결하는 아시아의 서쪽 끝 지역이다.
서아시아레반트지역에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이곳에 살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쫓겨난 곳이다.
이후 이 지역은 이슬람(회교도)가 장악하였으며 그때로부터 1천500년 넘게 이슬람민족이 살아왔다. 이 지역에 사는 이슬람들을 팔레스타인이라 하였으며 이 지역도 팔레스타인지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반면 기독교도들은 이곳을 예수(Jesus Christ)가 태어난 곳이라 하며 자기들의 성지라고 주장해 왔다. 기독교의 성서에서는 이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뜻인 가나안의 땅이라고 묘사하였으며 기독교도들은 이곳을 이상향으로 묘사해왔다.
물론 이곳은 고기도 살지 못할 정도로 염분이 높은 사해와 갈릴레아호수를 끼고 있는 불모지, 사막지역이 대부분이다.
유태인들은 서아시아레반트지역을 자기들의 조상들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1천500년 넘게 팔레스타인 민족이 살아온 지역이다. 회교(이슬람)에서도 예루살렘을 자신의 성지라고 한다.
민족주의운동으로 출발한 시온주의
서아시아레반트지역에는 기원전 11세기부터 기원전 10세기까지 이스라엘-유태왕국이 있었는데 이후 이스라엘과 유태의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그후 이스라엘왕국은 기원전 8세기에 아씨리아에 정복되고 유태왕국도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로니아에 예속되었다가 기원후 70년에 로마제국에 의하여 종국적으로 붕괴되었다.
로마와의 전쟁 등에서 패배하여 쫓겨난 유태인들은 유럽으로 이주하였으며 주로 동유럽의 이곳 저곳에 모여 살았다.
유태인들은 유태교(구약성서를 근간으로 하는 율법에 의해 통제되는 있는 원시 기독교의 하나)를 유일신앙으로 삼고 있었으며 자기 언어인 히브리어를 유지하였다. 이로하여 유태인들은 오랜 기간동안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이는 유태인들이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사상문화를 가지게 되는 원인으로도 되었다.
이 때문에 유태인들은 유럽의 다른 민족들, 사회의 구성원들과 갈등관계에 놓이기 쉬웠다. 특히 폐쇄적인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유태인이라는 존재는 중세의 봉건지배계급뿐만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생발전과 더불어 중앙집권국가를 강화하려는 자본가계급에게 걸림돌로 되는 존재였다. 이렇게 되어 유럽의 유태인들은 차별과 박해를 받는 일이 잦았다.
차별과 박해를 받던 유태인들속에서 16세기와 17세기경에 유태인 자신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였다. 이 운동은 당시 유럽의 나라들에서 자본주의가 발생발전하면서 확산되고 있던 민족국가 건설열풍, 민족주의의 확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유태인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은 1890년대에 이르러 팔레스타인지역에 유태인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주장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런 침략적인 시온주의운동은 프랑스의 유태인 드레퓌스를 차별박해한 사건에 영향받은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테오도르 헤르츠가 앞장서서 조직하였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유태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를 바랬다. 유럽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바랬던 대다수의 유태인들은 유태인국가건설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유럽의 자본주의가 더 달콤했던 것이다.
따라서 물적 기반이 없는 유태인국가건설주장은 당시 유태인을 차별하는 사건들에 저항하는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어 초기 시온주의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운동은 일부 유태인들을 서아시아레반트지역으로 이주하게 하였다. 1914년에 이르면 서아시아레반트지역(팔레스타인지역)에 거주하는 유태인의 수는 9만명에 이르게 된다.
제국주의의 정책의 부산물로 현실화된 시온주의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자 유태인들은 더욱더 배척받고 탄압받는 대상으로 되었다. 유럽의 유태인들은 주로 동유럽에 많이 살고 있었다. 러시아는 유태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중 하나였다. 그런데 제정러시아(짜르체제의 러시아) 말기에 들어서 러시아 봉건지배자들은 유태인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절대왕권을 유지강화하는데서 독자적인 공동체를 허물지 않으려는 유태인들은 방해로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지만 빈번하게 일어났던 러시아황제 암살사건, 암살기도사건에 유태인들이 관련자로 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봉건러시아의 박해를 피해 많은 유태인들이 서쪽으로 이주하였고 폴란드와 독일은 유태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되었다.
이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10월혁명이 일어나자 유태인들이 사회주의 소련을 떠나 폴란드와 독일로 더 많이 이주하였다.
유태인들이 사회주의혁명을 거부한 까닭으로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유태인들이 자산가, 소자산가였다는 사실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1933년에 이르러 히틀러의 나치당이 집권하자 유태인의 사정은 매우 험악하게 변했다.
집권한 히틀러는 독일의 사회주의자, 혁명세력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독일 사람들속에서 배타적 민족주의, 독일인 인종우월주의(배타적이며 반동적인 아리안민족주의)를 조장 고취하는 가장 유력한 수단으로 유태인박해운동을 벌였다.
이어 2차대전 직전 폴란드를 점령한 히틀러는 아예 ‘저열한 불순 인종인 유태인은 박멸해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워 폴란드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을 모두 구금하고 집단적으로 살해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나치, 히틀러
지금 독일은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속에서 이성적인 사회의 대표적인 나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독일 사람들은 불과 80년전에 나치즘이라는 광신도의 무리였다.
나치즘은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와 그 측근 몇몇이 만들어낸 것이 결코 아니다. 당시 독일의 절대다수 국민들은 나치당과 히틀러에 열광하였다.
독일은 1차대전 패배로 인해 주권을 제약받았으며 막대한 배상을 해야했다. 히틀러, 나치당은 전승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대한 울분과 복수심에 가득 차있던 독일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하였다.
또한 독일은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동안 러시아와 대립대결하는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10월혁명이 성공하자 독일 사람들은 러시아 혁명이 독일로 번져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독일은 칼 마르크스의 고향이기는 했으나 독일의 혁명운동은 오랫동안 기회주의가 지배하였고 그후에는 모험주의, 좌경주의가 득세하였다.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은 대중들로부터 큰 신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 틈을 타서 히틀러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에 대한 적개심을 조장하였다.
히틀러는 극단적인 반소, 반공 선동으로 지배계급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나치의 정식명칭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다. 히틀러는 자산계급의 돌격대장이면서도 대중의 이익의 진정한 수호자로 행세하였다.
집권한 히틀러는 공산주의자 학살을 무차별하게 자행하였다. 히틀러가 집단학살한 유태인의 수가 무척 많다고 하지만 히틀러가 죽인 공산주의자 수도 결코 그보다 적지 않다. 이것은 지배계급이 히틀러에게 부여한 ‘역사적 임무’였다.
독일에서 히틀러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나라 전체가 나치즘에 광란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독일이라는 나라의 본질적 성격은 그때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1차세계대전을 거치며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는 유태인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1914년에 9만명 정도였던 유태인 정착인의 수는 1933년에 이르면 이 지역인구의 23%에 해단하는 23만명에 달하게 된다.
시온주의운동이 활력을 가지게 된 것은 유럽에서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가중된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큰 영향은 세계대전중에 영국이 유태인들에게 ‘독일편에 서지않고 자기들 편에 서면 전쟁이 끝난 후 팔레스타인지역에 유태인의 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에 있었다.
이렇게 되자 20만명이 넘은 유태인 이주정착민들과 80만에 이르는 팔레스타인들과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어떤 역사가들은 영국이 유럽의 유태인에게는 ‘독일에 반대하여 자기들 편에 서면’ 팔레스타인지역에 유태인의 국가를 건설해주겠다고 하고, 자기들의 식민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에게는 ‘독일에 반대하여 자기들 편에 서면’ 종전후 팔레스타인을 독립시켜주겠다는 상반된 약속을 하였고 이것이 팔레스타인-이스라엘분쟁, 중동분쟁의 씨앗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무엇보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게 자유와 독립을 선사해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저물어가는 제국주의 영국에게는 팔레스타인지역에 유태인의 국가를 만들어줄 힘도 없었다.
제2차대전이 끝나자 서아시아레반트지역에서는 유태인의 이주 점령을 반대하는 팔레스타인의 투쟁과 점령지역을 유지 확대하려는 유태인 간의 충돌이 더욱 격화되었다.
미국의 침략과 지배정책으로 수립된 시온주의 국가
1917년에 팔레스타인지역에 유태인국가 건설을 지지 지원하겠다던 성명을 발표했던 영국은 2차대전 후 팔레스타인의 저항과 아랍국가들의 반발에 부닥치자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지역으로의 이주를 제한하고 금지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진 시온주의자들에게 구원자로 나타난 것은 2차대전이후 제국주의의 우두머리자리를 차지한 미국이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지역에 기독교국가를 만들어 이를 중동에 대한 침략과 지배의 거점으로, 반아랍, 반이슬람책동의 지렛대로 삼으려고 획책하였다.
이런 목적으로 미국은 난관에 봉착했던 유럽의 시온주의운동(팔레스타인지역으로 유태인들이 이주하는 운동)을 지원하였다. 이에 힘입은 시온주의자들이 대거 팔레스타인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미국은 또한 유태인-팔레스타인의 분쟁을 해결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1947년 유엔총회에서 팔레스타인지역에 시온주의자들이 제멋대로 만들어 놓은 유태인 국가(이스라엘)를 인정하고 국경을 설정하는 결정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시온주의자, 유태인들은 유엔결정을 어기고 더 많은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이 지역들도 자기 나라라고 우겼다.
유엔결정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팔레스타인은 유태인들의 침략과 지배에 저항했다.
하지만 유태인들은 몇차레에 걸친 전쟁(1,2,3차 중동전쟁)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점령지를 넓혀나갔다. 여기에서 미국의 막대한 지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황당한 침략적인 주장이었던 시온주의는 미국이 자행하는 제국주의 침략과 지배와 결탁하여 마침내 현실로 되고만 것이다.
오늘날의 시온주의는 서아시아레반트지역 전체를 차지하고 그곳의 팔레스타인들을 박멸하겠다는 이스라엘의 국가 사상과 정책으로 되어 있다.
일부의 이스라엘사람들이 그와 다른 견해는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미미하다.
시온주의는 독일사람들을 광란시킨 나치즘 이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죽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수가 히틀러가 학살했다고 하는 유태인의 수를 이미 능가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미국은 ‘분쟁을 조정 완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방하고 마치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침략과 전쟁책동을 반대하는 것같이 말하지만 매번 이스라엘에 엄청난 군사적 지원과 정치적 지지를 보낸다.
미국이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이 자행하는 모든 침략과 파괴, 살인의 방조자이자 기획자, 조종자, 배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시온주의는 가장 침략적인 부르조아민족주의의 변종으로서 날이 갈수록 그 성격을 더욱 극단화하고 있다.
서아시아레반트 지역 나아가 중동(시나이반도를 비롯한 이집트의 영토 일부, 골란고원을 비롯한 시리아의 영토 상당부분, 레바논 지역 등)의 지배자로서 위치를 공고히 하려는 시온주의자들의 욕망은 끝이 없다.
시온주의자들이 꾸미는 흉계, 자행하는 짓들은 지금 세계전쟁을 촉발시키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스라엘 최고 양심'이 벗기는 시오니즘의 가면
일란 파페 저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 팔레스타인 땅 뺏기 위해 성경 왜곡, 전쟁 정당화
- 유럽의 반유대정서와 시오니즘의 야합...이스라엘 탄생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이 이스라엘과 아랍세력의 전면전 위기로 치닫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 신화의 바탕이자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의 바탕이 되고 있는 시온주의의 추악한 실체를 파헤친 책이 출간됐다. 이스라엘의 군사행위가 반격의 수준을 넘어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절멸시키려 드는 지경에 이르자, 초기 이스라엘에 동정적이던 서방 여론마저 등을 돌리고 있다.
노엄 촘스키가 이스라엘의 최고 양심이라고 평가하는 저자는 이스라엘의 공격을 “연민과 배려로 이스라엘을 지지한 서방 정부의 선의를 배반하고 이를 자신들의 대량 학살에 대한 사면장이자 가자지구 파괴를 허용하는 백지 위임장으로 악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한때 이스라엘 건국을 ‘예언의 성취’로 여겼다. 하지만 중동에서 십수 년 동안 이스라엘과 주변국 간의 팽팽한 긴장감을 실감하며 살아가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우연한 기회에 중동과 관련한 글을 쓰게 되면서 이스라엘의 실체를 들여다보게 되었고, 오늘 그 실체를 깊이 파헤친 이 책에 이르게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의 바탕이 된 시온주의는 정치적인 개념도 민족적인 개념도 아니었다. 저자는 “19세기 이전까지는 시온주의가 단지 유럽 중부와 동부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문화 형태이자 유대인을 거부하는 사회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시온주의 이전의 유대인들은 성경을 정치적이나 민족적인 메시지로 해석하지도 않고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다. 이런 모습은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도 다르지 않았는데, 유대인 랍비들은 성경에 담긴 정치적이거나 주권에 관한 서사를 아주 사소한 것으로 여겼고, 정작 그들이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은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였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1882년 젊은 유대인 수백 명으로 이루어진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유대교 개혁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격렬하게 반대했는데, 그것은 시온주의자들이 종교 공동체인 ‘정통 유대민족’을 세속화하여 ‘새로운 유대인’으로 개조해 유대국가를 세우고 팔레스타인을 식민지화하려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저자는 시온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시련과 환란을 겪으며 이집트에 이르는 과정’을 억압받는 민족이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서사로 왜곡했고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팔레스타인 땅을 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경을 왜곡한 것”으로, 시온주의의 본질과도 거리가 있고, 게다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저주는 미래에 대한 경고를 드러내는 문학적 장치인데 그들이 이를 전쟁을 정당화하는 도구이자 매뉴얼로 삼은 것”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시온주의라는 종교적 비전 바탕에는 반유대주의 정서가 깔려 있다고 말한다. 유대인 공동체를 팔레스타인으로 밀어 넣다시피 한 것은 ‘유대인 없는 유럽’을 만들기 위한 핑계였다는 것이다. ‘유대인 없는 유럽’을 생각하게 만든 ‘반유대주의 정서’의 원인은 대체로 유대인의 타협하지 않는 선민의식,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의 굴레, 경제력 독점을 꼽는다.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 유대인으로서는 억울한 누명일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이와 같은 유럽의 정서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새로운 정착지를 구하려던 유대인의 필요가 맞아떨어져 이스라엘이 탄생했다는 것이 저자 주장의 근간인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말 나폴레옹은 중동을 점령할 목적으로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한다. 1916년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어 팔레스타인을 분할 지배하기로 합의하고 러시아는 이를 묵인한다. 영국은 시온주의 운동을 ‘팔레스타인을 식민지로 만들고 그 자리에 유대국가를 건설해 유럽의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통해 성지 예루살렘에 깊숙이 관여할 수 있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듬해인 1917년 영국은 ‘벨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겠고 약속한다.”
유럽 각국은 단지 ‘유대인 없는 유럽’ 뿐만 아니라 자기 필요 때문에 팔레스타인을 차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사실 영국은 ‘벨푸어 선언’에 앞서 1915년에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아랍 민족이 오스만에 대항하여 연합국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통일아랍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한편,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이러한 유럽의 정서에 편승해 유대국가 건설을 착착 추진해 나간다. 그 결과 유대인은 ‘유대국가 건설’은 물론 ‘팔레스타인 알짜배기 땅을 차지하는 실속’도 챙기고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 명분’도 얻는다.
“194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자 팔레스타인은 미래 국가를 자신들이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유대인 공동체는 같은 해 홀로코스트를 명분으로 국제사회를 설득해 UN 분할안을 끌어낸다. UN 분할안은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가 작성한 것인데, 이 위원회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의사도 확인하지 않았다. 이 분할안은 팔레스타인을 아랍국가ㆍ유대국가ㆍ예루살렘으로 분할하고 이중 예루살렘은 UN이 관할하기로 한 것이다. 이 분할안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인구의 1/3, 면적의 7%를 차지했던 유대인 공동체가 팔레스타인 땅의 56%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 땅은 곡창지대와 올리브농장의 80%를 차지하는 알짜배기 땅이었다. 그리고 이 분할안은 이 지역의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 명분이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렇게 실속을 차린 유대국가, 즉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로마에 의해 쫓겨난 유대인의 후예이며, 그로 인해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악의 인종차별을 받았으며, 그래서 팔레스타인을 차지할 권리가 있고, 자신들이 유대국가를 세우기 이전에 팔레스타인은 황폐한 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유대인은 로마제국에 쫓겨난 예수 당시 유대인의 후손이 아니라 “캅카스 지역의 튀르크 국가 출신으로 8세기 이후 유대교로 개종한 하자르(Khazars) 후손이며 나중에 서쪽으로 강제 이주 되었다”고 설명한다. (학계에서는 하자르 후손이 있기는 했지만 주류는 아니었고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가 대다수인 것으로 보인다.) 설령 유대인 후손이라고 해도 지금 이스라엘이 모든 유대인을 대표한다고 볼 수도 없다고 지적한다. 수많은 정통파 유대인은 지금까지도 시온주의를 격렬하게 반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 외교부 공식 사이트에는 팔레스타인이 시온주의 이전에 비어 있던 황량한 땅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1878년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는 46만 명이었고 그중 기독교인이 43,000명 유대인이 15,000명으로, 비록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는 해도 무슬림 중심의 활기찬 아랍사회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에게 피난처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피난처가 기존 주민과 공존을 이루는 것이어야지 왜 기존 주민을 배척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묻는다. 저자는 책 전편을 통하여 매우 강하게 이스라엘의 행동을 비판하고 있지만, 나는 이 지적이 그가 펼친 어떤 논리보다도 이스라엘의 문제를 가장 적확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이상 다른 논쟁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 수십만 명을 가자지구로 밀어 넣었다. 현재 가자 인구는 250만 명으로 전체 이스라엘 인구 1천만 명의 25%에 이르는데, 이 지역의 면적은 365㎢로 이스라엘 전체 면적 22,145㎢의 1.6%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유대국가를 이단으로 여겼던 정통 시온주의자들도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에는 자신들의 태도를 바꿨다. 2014년 이스라엘 교육부는 모든 학교에 “성경은 이스라엘 국가의 문화적 기초일 뿐 아니라 땅에 대한 유대인의 권리도 담고 있다”는 서한을 발송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잘못 알려진 과거의 신화뿐 아니라 현재, 그리고 이들이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래의 신화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을 이어간다. 하지만 현재와 미래의 잘못된 신화는 애초에 잘못된 신화에서 출발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잘못된 신화에서 출발한 폭력에 맞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사용해야 했고, 그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아 이제는 폭력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 현재와 미래의 신화가 잘못된 것이라고 소리 높여 봐야 오히려 문제의 본질만 놓칠 뿐이다.
유대국가인 이스라엘이 촉발한 중동 갈등의 원인을 역사적, 정치적 관점에서 풀어낸 책을 여럿 읽었지만, 그것으로는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가져왔던 ‘예루살렘 회복’이라는 딜레마를 풀 수 없었다. 이 책을 통해 그 의문이 유대인, 시온주의, 시온주의자 사이의 미묘해 보이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 줄 깨닫게 되었다. 미묘해 보이지만 파괴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차이인 것을.
하나 조심스러운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는 저자의 주장이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1984년부터 하이파 대학교 교수로 재직해왔지만 이스라엘 국회가 그를 비난하고 교육부 장관이 대학에 그의 해고를 촉구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살해 위협을 받을 만큼 그의 주장은 이스라엘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이스라엘을 떠난 저자는 2009년부터 영국 액서터 대학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밖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이와 상당한 거리를 보인다. 미국의 지성으로 일컬어지는 노암 촘스키는 그를 ‘현존하는 이스라엘 최고의 양심’이라고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