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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인물 169

문무왕(文武王), 통일신라 제30대(재위:661~681) 왕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0대(재위:661~681) 왕. 재위 661∼681.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법민(法敏). 태종무열왕의 원자이다. 어머니는 소판(蘇判) 김서현(金舒玄)의 작은딸이자,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비(妃)는 자의왕후(慈儀王后)로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이다. 법민은 영특하고 총명해 지략(智略)이 많았다. 진덕여왕 때 고구려와 백제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당(唐)나라까지 가서 외교 활동을 하였다. 부왕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서 병부령(兵部令)을 역임했으며 얼마 뒤 태자로 책봉되었다. 660년(태종무열왕 7) 태종무열왕과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연합해 백제를 정벌할 때 법민도 종군해 큰 공을 세웠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미처 통일하지 못..

진덕여왕(眞德女王), 신라 제28대(재위:647~654) 왕,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 월명부인(月明夫人), 비담(毗曇)

삼국시대 신라의 제28대(재위:647~654) 왕.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승만(勝曼)이다. 신라시대 3인의 여왕 중 한 사람으로서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유언에 의해 즉위하였다. 진평왕(眞平王)의 친아우[同母弟]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며, 어머니는 월명부인(月明夫人)박씨(朴氏)이다.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자질이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무척 총명했다고 한다. 즉위하던 해(647)에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毗曇)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알천(閼川)을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그리고 사신을 파견해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지속시켰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진덕여왕이 즉위하면서부터 ..

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 제27대(재위:632~647) 왕, 덕만(德曼), 진평왕(眞平王), 화백회의(和白會議)

삼국시대 신라의 제27대(재위:632~647) 왕.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의 장녀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즉,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聖骨)’이라는 특수한 왕족 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즉위하던 해인 632년(선덕여왕 1)에 대신 을제(乙祭)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해 백성들을 진휼(賑恤)했으며, 633년에는 주(州)·군(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 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한편, 대외..

무왕(武王), 백제 제30대(재위:600~641) 왕, 서동(薯童), 선화공주(善花公主), 아막산성전투

삼국시대 백제의 제30대(재위:600~641) 왕. 재위 600~641. 이름은 장(璋) 또는 무강(武康)·헌병(獻丙)·일기사덕(一耆篩德)이다. 제29대 법왕(法王)의 아들이며, 제31대 의자왕(義慈王)의 아버지이다. 무왕(武王) 즉위 직전의 혜왕(惠王)과 법왕은 모두 재위 1년 만에 죽었다. 위덕왕(威德王)은 45년 동안 집권하다가 598년 12월에 죽었고, 70여세가 넘은 위덕왕의 동생 혜왕이 598년 12월에 즉위했다. 혜왕은 이듬해 599년에 죽고 이어 혜왕의 아들인 법왕이 즉위했는데 법왕도 이듬해인 600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백제는 내외 정세가 악화되고 귀족 간에 내분이 일어났으며 왕실 권위가 약화되었는데, 거듭되는 왕의 단명은 그러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신라 제21대(재위: 479~500) 왕

삼국시대 신라의 제21대(재위: 479~500) 왕. 재위 479∼500. 비처마립간(毗處麻立干)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金氏). 자비마립간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김씨로 서불한(舒弗邯) 미사흔(未斯欣)의 딸이다. 왕비는 이벌찬(伊伐飡) 내숙(乃宿)의 딸 선혜부인(善兮夫人)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을 지녔으며 겸손하고 공손해 사람들이 모두 감복했다고 한다. 487년(소지마립간 9)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국내의 기간 도로인 관도(官道)를 수리하였다. 490년에는 왕경(王京)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사(市肆)를 열어 사방의 물화(物貨)를 유통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자비왕 대의 경주의 방리명(坊里名) 확정과 아울러 족제적(族制的)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육부(六部) 체제를 개편해 중앙 집권적인 통..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 신라 제19대(재위:417~458) 왕

삼국시대 신라의 제19대(재위:417~458) 왕. 재위 417∼458. 성은 김씨이며, 내지왕(內知王)이라고도 부른다. 포항중성리신라비에는 내지왕(乃智王)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내물마립간이고, 어머니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이며, 또는 내례길포부인(內禮吉怖夫人), 내례희부인(內禮希夫人)이라고도 전한다. 비는 실성이사금의 딸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최초로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 마립간이 실제로는 내물왕 때 이미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 것은 종래의 왕호인 이사금(尼師今)이 마립간과 더불어 내물과 실성 양대에 걸쳐 혼용되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392년(내물마립간 37)에 내물마립간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

동성왕(東城王), 백제 제24대(재위:479∼501) 왕, 곤지(昆支), 문주왕(文周王)

삼국시대 백제의 제24대(재위:479∼501) 왕. 이름은 모대(牟大) 또는 마제(麻帝)·여대(餘大)라고도 한다.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로서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쏘는 솜씨가 빼어났다. 동성왕(東城王)은 삼근왕(三斤王) 때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의 반란을 평정하고 실권을 장악한 진로(眞老) 등의 세력에 의해 옹립되었다. 진씨(眞氏) 세력은 동성왕이 유년의 나이로 왜에 체류하고 있어 국내의 정치적 기반이 없는 것을 고려해 왕으로 옹립한 것으로 보인다. 삼근왕을 이어 즉위한 동성왕은 웅진천도(熊津遷都) 초기의 정치적 불안을 종식시키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하였다. 금강 유역권을 지배기반으로 한 신진세력들을 중앙귀족으로 등용해 자신의 세력 기..

비유왕(毗有王), 백제 제20대(재위:427∼454) 왕, 나제동맹

삼국시대 백제의 제20대(재위:427∼454) 왕. 재위 427∼455. 제19대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다(일설에는 제18대 전지왕의 서자라 한다.). 제21대 개로왕은 그의 맏아들이다. 풍채가 수려하고 말을 잘하여 사람들의 높임을 받았다. 429년에 중국 남조(南朝)의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다음해에는 송나라으로부터 선왕(先王)이 받았던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이라는 작호(爵號)를 다시 받았다. 이는 송과의 동맹정책이 비유왕대에도 계속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왜와의 동맹관계도 그대로 유지되어 사신이 오가고 있었다. 한편 새로운 변화도 있었는데, 433년에 이르러 종전에는 고구려의 보호국 상태에 놓여 있어 백제와 적대하게 되던 신라에 화친의 사절을 파견하..

미천왕(美川王), 고구려 제15대(재위:300~330) 왕, 봉상왕, 창조리, 서안평, 현도군, 낙랑군

삼국시대 고구려 제15대(재위:300~330) 왕. 재위 300∼331.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을불(乙弗)·을불리(乙弗利) 또는 우불(憂弗). 서천왕의 손자이며, 고추가 돌고(咄固)의 아들이다. 293년(봉상왕 2) 아버지가 봉상왕에 의해 반역 혐의로 죽임을 당하자 피신해 머슴살이·소금장수 등으로 전전하다가, 300년봉상왕이 폐위당하자 국상 창조리(倉助利)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재위 기간 중 진(晉)나라가 와해되는 국제적 격동기를 맞아 국제 정세를 이용해 적극적인 대외팽창정책을 추진하였다. 302년현도군을 공격해 적 8,000여 명을 사로잡고, 311년요동 서안평을 점령하기도 했으며, 313년과 314년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오랜 투쟁 끝에 각각 병합했고, 317년 다시 현도성을..

태조왕(太祖王), 고구려 제6대(재위:53~146) 왕,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 모본왕(慕本王), 동옥저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6대(재위:53~146) 왕. 국조왕(國祖王) 또는 태조대왕(太祖大王) 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궁(宮)이며, 아명은 어수(於漱)이다. 유리왕(瑠璃王)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夫餘) 출신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능히 볼 줄 알았고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다고 한다. 53년에 모본왕(慕本王)이 살해되자 여러 관리들이 재사를 왕으로 추대했으나, 재사가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양하므로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주변의 소국을 병합하였으며, 후한(後漢)의 군현(郡縣)을 공격하여 한나라 세력을 축출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즉위 당시 나이가 7세에 불과해 태후(太后)가 섭정하였다. 56년(태조왕 4) 동옥저(東沃沮)를 정복해 성읍(城邑)으로 삼음으로써 동으로는 동해..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신라 제29대(재위: 654~661) 왕

삼국시대 신라의 제29대(재위: 654~661) 왕. 재위 654∼661. 성은 김씨. 이름은 춘추(春秋).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 또는 龍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찬(角飡, 角干) 김서현(金舒玄)의 딸, 즉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문희(文姬)이다. 김춘추는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덕여왕을 섬겨서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閼川)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英傑)로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신라..

성왕(聖王), 백제 제26대(재위:523~554) 왕

삼국시대 백제의 제26대(재위:523~554) 왕. 재위 523∼554. 이름은 명농(明濃). 무녕왕의 아들이다. 『양서 梁書』 백제전에는 이름을 명(明)이라 했고, 『일본서기』에는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영민하고 비범하며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라 했고 『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해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라고 찬양해 그의 인물 됨됨이가 비범했음을 알 수 있다. 동성왕·무령왕이 웅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 온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해 538년(성왕 16)에 사비(泗沘) 천도를 단행하였다. 성왕의 사비 천도는 고구려의 남침이라는 외부 세력의 강요에 의해 행해졌던 웅진 천도와는 달리 성왕의 의도적인 계획하에..

무령왕(武寧王), 백제 제25대(재위 501∼523) 왕

삼국시대 백제의 제25대(재위 501∼523) 왕. 이름은 사마(斯摩, 斯麻) 또는 융(隆)이다. 동성왕(東城王)의 둘째아들, 또는 개로왕(蓋鹵王)의 동생인 혼지(混支)·곤지(昆支)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그의 계보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으나, 1971년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 따르면 그는 462년에 출생하였다. 키는 8척이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한다. 무령왕 정권의 탄생은 동성왕의 시해라는 정변을 통해 이루어졌다. 501년 12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동성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정변에는 왕족과 한성(漢城)에서부터 내려온 귀족, 웅진(熊津)에 기반을 둔 신진세력 등 다양한 세력..

진흥왕(眞興王), 신라 제24대(재위:540~576) 왕

삼국시대 신라의 제24대(재위:540~576) 왕. 재위 540∼576.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 지증왕의 손자로, 법흥왕의 아우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며, 왕비는 박씨로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왕태후 김씨가 섭정하였다. 신라의 대외적 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왕이다. 즉위 초에는 왕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나 551년(진흥왕 12)에 개국(開國)이라고 연호를 바꾸고,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부터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전개하였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된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

법흥왕(法興王), 신라 제23대(재위: 514~540) 왕

삼국시대 신라의 제23대(재위: 514~540) 왕. 재위 514∼540.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원종(原宗). 지증왕의 원자이며,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박씨(朴氏)이고, 왕비는 보도부인(保刀夫人) 박씨이다. 키가 7척이나 되고 도량이 넓으며 남을 사랑하였다. 지증왕 때의 일련의 개혁 정치를 계승해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로서의 통치 체제를 완비하였다. 이 같은 점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517년(법흥왕 4)에 설치한 중앙 관부로서 병부(兵部)의 존재이다. 신라에서 중앙 관부로는 병부가 제일 먼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권을 왕이 직접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517년에 비로소 설치된 병부는, 눌지..

지증왕(智證王), 신라 제22대(재위:500~514) 왕

삼국시대 신라의 제22대(재위:500~514) 왕. 재위 500∼514.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지대로(智大路)로 혹은 지도로(智度路)·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한다. 내물마립간의 증손이며,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로 눌지마립간의 딸인 조생부인(鳥生夫人)이며, 왕비는 박씨로 이찬(伊飡) 등흔(登欣)의 딸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다. 왕은 몸이 건장했으며 담력이 있었다고 한다. 재종형인 소지마립간이 후계자 없이 죽자 64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502년(지증왕 3)에 순장(殉葬)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리고, 주군(州郡)에 명해 농업을 권장하도록 하였다. 우경(牛耕)을 시행하도록 하는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함으로써 농업 생산력 증대의 계기를 마..

장수왕(長壽王), 고구려 제20대(재위:413~490) 왕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20대(재위:413~490) 왕. 재위 413∼491.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 광개토대왕의 맏아들이다.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해 중국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북중국은 여러 이민족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北魏)에 의해 통일되었고, 남중국은 한족에 의해 동진(東晉, 317∼420)·송(宋, 420∼479)·남제(南齊, 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에 동진에 사절을 파견해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하였다. 이후 송·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북위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신라 제17대(재위:356~402) 왕

삼국시대 신라의 제17대(재위:356~402) 왕. 재위 356∼402. 성은 김씨.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손자이며,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 김씨이고, 왕비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 김씨이다. 『삼국사기』에는 미추이사금의 사위라고 했으나, 『삼국유사』 왕력(王曆)에는 미추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갈문왕의 아들, 또는 미추이사금의 동생인 각간 말구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미추이사금의 동생 또는 조카로도 알려져 있다. 이처럼 계보는 확실하지 않으나, 미추이사금과 근친관계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때문에 흘해이사금이 후계자 없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왕호는 『삼국사기』에는 ‘이사금(尼師今)’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광개토왕(廣開土王), 고구려 제19대(재위: 391~413) 왕

삼국시대 고구려 제19대(재위: 391~413) 왕. 재위 391∼412. 이 재위연대는 「광개토왕릉비」에 근거한 것이며, 『삼국사기』에는 재위기간이 22년임은 같지만 재위연대는 392∼413년으로 실려 있다. 재위기간 동안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재위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다.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 고국양왕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고상했으며,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의 사후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이 어느 정도 다르게 기술하고 있지만, 시호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영토..

소수림왕(小獸林王), 고구려 제17대(재위:371~384) 왕, 태학(太學)

삼국시대 고구려 제17대(재위:371~384) 왕. 개설 재위 371∼384.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구부(丘夫).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로 355년(고국원왕 25) 1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371년 10월 부왕이 평양성(平壤城)까지 진격해 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고국원왕 대의 대외 진출 기도의 실패 등으로 말미암은 고구려 사회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해 일련의 체제 정비를 도모하였다. 즉 372년(소수림왕 2)에는 전진(前秦)에서 외교 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에는 아도(阿道)를 각각 맞아들였고,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해 이들을 거주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

김여물(金汝岉), 임진왜란, 탄금대

조선전기 충주도사, 담양부사, 의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자(披裘子) 또는 외암(畏菴). 평산 출신. 선공감정 김약균(金若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주목사 김수렴(金粹濂)이고, 아버지는 찰방 김훈(金壎)이며, 어머니는 신천 강씨(信川康氏)로 부사 강의(康顗)의 딸이다. 영의정 김류(金瑬)의 아버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선조 즉위년인 156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에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문무를 겸비했으나 성품이 호탕하고 법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해 높은 벼슬자리에는 등용되지 못하였다. 충주도사(忠州都事), 담양부사를 거쳐, 1591년에는 의주목사로 있었으나, 서인 정철(鄭澈)의 당으로 몰려 파직, 의금부에 투..

한국사 출제 왕, 인물

● 삼국시대 고이왕 근초고왕 소수림왕 광개토대왕 내물왕 장수왕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무령왕 성왕 무열왕 태조왕 고국천왕 침류왕 미천왕 비유왕 개로왕 동성왕 눌지왕 소지왕 무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 통일신라/발해 문무왕 신문왕 성덕왕 경덕왕 원성왕 흥덕왕 진성여왕 혜공왕 발해 고왕 발해 무왕 발해 문왕 ● 고려시대 태조 광종 성종 목종 숙종 충렬왕 충선왕 공민왕 우왕 현종 문종 예종 인종 ● 조선시대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연산군 중종 명종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 삼국/통신발해 의상 원효 최치원 견훤 궁예 ● 고려시대 균여 의천 지눌 서희 묘청 김부식 최충헌 최우 ● 조선시대 정도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정희 송시열 정제두 이익 정약용 유수원 홍대용 박제가 ● 개항기 흥선대원군 최익현..

김알지(金閼智), 경주김씨 시조

삼국시대 신라 경주김씨의 시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탈해이사금 9년에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속에서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호공(瓠公)을 보내 살펴보게 하니, 황금빛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궤에서 빛이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보고 돌아와 왕에게 고하니, 왕이 친히 가서 궤를 열어 보자 용모가 수려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 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탈해왕은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 성을 ‘김’씨로 했으며, 성장하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알지’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알지 설화가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삼국사기』와 약간 차이가 있으나 전..

김시습(金時習), 계유정난, 폐비윤씨사건, 매월당집,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

조선전기 『매월당집』·『금오신화』·『만복사저포기』 등을 저술한 학자.문인. 키워드 계유정난 폐비윤씨사건 매월당집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 개설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서울 출생. 생육신의 한 사람. 그의 선대는 태종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金周元)이다. 그의 비조(鼻祖)는 고려시대 시중을 지낸 연(淵)·태현(台鉉)로 전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 전해진 것이다. 『매월당집』의 세계도(世系圖)에 의하면 김인존(金仁存)이 맞다. 증조부 김윤주(金允柱)는 안주목사(安州牧使), 할아버지 김겸간(金謙侃)은 오위부장(五衛部將), 아버지 김일성(金日省)은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으며, 그의..

김시민(金時敏), 충무공, 진주성

조선시대 임진왜란에 참전한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면오(勉吾). 목천(木川) 출신. 김방경(金方慶)의 12대손이며, 아버지는 지평 김충갑(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해 군기시(軍器寺)에 입사하였다. 1581년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구황(救荒)주 01)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해 공을 세웠다. 그 뒤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목사가 병으로 죽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먼저 민심을 안정시키고..

김성수(金性洙), 동아일보

일제강점기 경성방직 사장, 동아일보 사장, 제2대 부통령 등을 역임한 기업인.교육자, 언론인,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1891년 9월 9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울산(蔚山)이고, 호는 인촌(仁村)이다. 호남의 거부였던 아버지 경중(暻中)과 어머니 장흥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의 세 형은 모두 어릴 때 죽었으며, 3세에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기중(棋中)의 양자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방직 사장·동아일보 사장·보성전문학교 교장·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및 평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광복 후에는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제2대 부통령 등을 지냈다. 1955년 2월 18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1897년부터 한학을 배웠다. 1904년 전라남도 창평에 사는 장흥고씨 고정주의 딸 고광석(高光錫)과 ..

김상옥(金相玉), 의열단, 종로경찰서투탄사건

일제강점기 의열단원으로 한당사령부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김해(金海). 별명은 김영진(金永鎭), 아호는 한지(韓志). 서울 출생. 아버지는 한말에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시에 어의동보통학교를 다녔다. 14세부터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하는 한편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1910년에는 경성영어학교를 다녀 국제정세와 서양문화에 안목을 넓혔다. 1912년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永德鐵物商會)를 경영하였다. 이듬해에는 정진주(鄭眞珠)와 혼인하였다. 1917년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일화(日貨) 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말총모자를 창안, 생산해 보급하였다. 또한 농구·장갑·양말 등도 아울러 ..

김사미(金沙彌), 민란, 운문, 농민의 난, 효심, 신라부흥 표방

고려후기 경상북도 청도에서 농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 1193년 경상도 운문(雲門)을 거점으로 농민을 모아 난을 일으키고 초전(草田)에서 봉기한 효심(孝心) 등과 모의, 신라부흥을 표방하며 경상도의 여러 지역에서 기세를 올렸다. 더욱이 당시의 집정자이며 경주 출신으로 역시 신라부흥을 꿈꾸던 이의민(李義旼)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하여 토벌군으로 편성되어온 이의민의 아들인 장군 이지순(李至純)으로부터 군사기밀을 제공받아, 대장군 전존걸(全存傑)의 정부군을 번번이 격파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다시 정부로부터 파견된 상장군 최인(崔仁), 대장군 고용지(高湧之)의 토벌군에게 격파당하여 이듬해 2월 투항하였으나 참형을 당하였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

김산(金山), 아리랑

일제강점기 혁명행동 부주필, 북경시위원회 조직부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본명 장지락(張志樂), 별명은 장명(張明)·이철암(李鐵岩)·한비종·유종화. 평안북도 용천 출신. 장로교 계통의 학교에 다니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는 등 강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입학을 준비할 때 일본 노동자와 재일조선인의 열악한 처지를 목격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1920년경 만주로 건너가 6개월간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우고 상해(上海)로 간 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의 교정원 및 인쇄공으로 일하였다. 이때부터 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나고 손문(孫文)의 글도 접하게 되면서 공산주의를 믿기 시작하..

김부식(金富軾), 위계정, 묘청의난, 정지상

고려전기 직한림,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 문인.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얼굴이 검고 우람하였으며 고금의 학식에 있어 김부식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신라 무열왕(武烈王)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증조부인 김위영(金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되었다. 그 뒤 김부식(金富軾) 4형제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의 생활기반은 경주에 있었다. 김부식의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김근(金覲) 때부터였다. 김근은 과거를 통해 중견 관료인 예부시랑(禮部侍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까지 이르렀으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김부식은 13·14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의 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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