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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인물 169

양세봉, 조선 혁명군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난 양세봉1896~1934은 어려서 가정이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동네 서당에서 소사사정. 학교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로 일하며 어깨너머로 한학을 배울 수 밖에 없었다. 국내 곳곳에 수탈의 손을 뻗은 일제의 전횡에 이웃 주민들이 고통을 받던 상황. 13세의 나이였던 양세봉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에 감동을 받았다. 그로부터 3년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양세봉이 가장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는 임재순이라는 여인과 혼인한 뒤 가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더이상 국내에서 가족을 먹여살리기 힘들어졌다. 이에 1917년 한겨울, 양세봉과 그 가족들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 영릉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한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일하던 양세봉은 191..

이완용(李完用), 대한제국기 외부대신서리, 의정부 참정대신, 내각총리대신, 을사5적·경술9적·친일반민족행위자

이완용(李完用) 대한제국기 외부대신서리, 의정부 참정대신,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을사5적·경술9적·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우봉(牛峰)이고, 자는 경덕(敬德)이며, 호는 일당(一堂)이다. 조선 말기 고위 관료를 지내고 국권을 일제에 넘긴 ‘을사5적’ 중 거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가난한 선비 이호석(李鎬奭)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대대로 노론 계열에 속하였으며, 호석의 5대조 이재(李縡)는 숙부 만성(晩成)이 신임사화때 노론 계열로 죽임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용인에 은거하며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11세때 먼 일가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호준(李鎬俊)에게 입양되었다. 이호준은 명문양반으로 노론파의 후손이고 대원군과 교우하였다. 서형(..

유자광[柳子光], 이시애 난, 연산군, 김일손, 김종직, 조의제문, 남이의 옥, 무오사화, 조선 3대 간신 - 유자광, 임사홍(임숭재), 김자점

유자광[柳子光] 조선 3대 간신 - 유자광, 임사홍(임숭재), 김자점 1 서자라는 멍에 유자광(柳子光)은 1439년(세종 21) 태어나서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 연산군(燕山君), 중종(中宗) 내리 다섯 임금을 모시며 두 번이나 공신으로 책봉되고 군(君)의 칭호까지 받는 등 대단한 영화를 누리다가 1512년(중종 7)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그의 사후 이루어진 그에 대한 평가는 사류들을 탄압하고 비열한 방법으로 정치적 술수를 부린 소인, 간신이었다는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더불어 여러 야사들에서는 유자광의 어린 시절 기행과 난행들도 전하고 있는데, 서자로 태어났던 그의 출생상의 하자와 맞물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자광은 경주부윤을 지낸 영광 유씨 유규(柳規)의 서자로..

이준(李儁), 이준 열사, 헤이그 특사, 대한제국 최초의 검사, 항일운동가.

1887년(고종 24) 북청에서 초시에 합격해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純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 같은 해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11월의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 등과 비밀결사인 개혁당(改革黨) 운동을 추진하였다. 1904년 일제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하면서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 데 주동적 구실을 하였다. 같은 해 일본이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침류왕(枕流王), 백제의 제15대(재위:384~385) 왕, 마라난타(摩羅難陀)

삼국시대 백제의 제15대(재위:384~385) 왕. 재위기간은 384년부터 385년까지이다. 근구수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씨(眞氏)로 추정되는 아이부인(阿尔夫人)이다. 아신왕은 맏아들이다.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한 왕으로, 384년(침류왕 1) 9월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에서 오자, 그를 맞아 궁중에 두고 예로써 받드니 백제에서 불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또, 다음해 2월한산(漢山)에 불교사원을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두었다. 이러한 불교공인과 신봉은 그 무렵 뿌리깊은 토속신앙에 젖어 있던 백제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를테면 법흥왕대의 신라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토속신앙의 처지에서 불교를 이단으로 비난하는 여론이 일어나거나, 그에 따른 지배층 내부의..

이동녕(李東寧), 신흥무관학교 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서전의숙, 한국군관학교

일제강점기 신흥무관학교 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한국국민당 이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정치인, 행정가.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봉소(鳳所), 호는 석오(石吾, 石五, 石梧)·암산(巖山). 충청남도 천원(天原) 출신. 아버지는 영해군수를 지낸 이병옥(李炳鋈)이고, 어머니는 광주안씨이다. 고향 서당에서 전통 교육을 받고 10세 때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의 할아버지 이석구(李錫九)의 집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1885년 일가가 상경, 서울 종로 봉익동에 정착하였다. 다음 해 아버지를 따라 경상북도 영해읍으로 갔으며, 1888년 평양으로 갔다. 1892년 응제진사시(應製進士試)에 합격하였다. 다음 해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가서 육영사업에 조력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개화 민권의 ..

홍명희(洪命憙), 임꺽정

광복 이후 장편소설 『임꺽정』을 저술한 소설가.언론인, 사회운동가, 정치인. 호는 가인(可人)·벽초(碧初). 충청북도 괴산 출생. 어린 시절에 한학을 수학하다가 일본에 유학하여 다이세이중학[大成中學]을 졸업하였다. 경술국치 직후 귀국하여 오산학교(五山學校)·휘문학교(徽文學校)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0년대 초반에는 한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사장으로 재직 중인 1927년에 민족 단일 조직인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에 관여하여 그 부회장으로 선임되면서 사회운동에 적극 투신하였다. 1930년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사건의 주모자로 잡혀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좌익운동에 가담하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기도 하였으나, 곧 바로 월북하여 북한 공..

손진태(孫晋泰), 조선신가유편, 조선민담집, 국사대요

일제강점기 『조선신가유편, 『조선민담집』, 『국사대요』 등을 저술한 학자.국사학자. 호는 남창(南倉).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현재 부산광역시) 남창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는 태어난 마을 이름에서 딴 것이다.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32년송석하(宋錫夏)·정인섭(鄭寅燮)과 더불어 조선민속학회(朝鮮民俗學會)를 창설하고 1933년에 우리 나라 최초의 민속학회지인 『조선민속 朝鮮民俗』을 창간하여 제2호(1934)와 제3호(1940)를 발간하였다. 1933년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강사, 1934년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강사, 1945년 서울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1949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거쳐 문리과대학장에 재직중 6·25전쟁..

김좌진(金佐鎭), 청산리대첩,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일제강점기 만주의 청산리대첩(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김형규(金衡奎)이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해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의 자기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홍성에 대한협회와 기호..

주시경(周時經), 국어문법, 말의 소리

일제강점기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을 저술한 학자.국어학자. 본관은 상주(尙州). 초명은 상호(相鎬), 일명 한힌샘·백천(白泉). 황해도 봉산 출생. 아버지는 주학원(周鶴苑)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이다. 둘째아들로 둘째아버지 주학만(周鶴萬)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양아버지를 따라 1887년 6월에 상경하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계속 배우면서 신학문에 눈뜨자 1894년 9월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도중에 인천부 관립이운학교(官立利運學校) 속성과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졸업하였으나, 정계의 격변으로 해운계에의 진출이 무산되고, 1896년 4월 다시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마침 1896년 4월『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徐載弼)에게 발탁되어 독립신문사 회계사무 겸 ..

박상진(朴尙鎭), 대한광복회 총사령, 조선국권회복단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고헌(固軒). 울산 출신. 승지 박시규(朴時奎)의 아들로, 큰아버지인 교리 박시룡(朴時龍)에게 입양되었다. 향리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세 되던 1902년부터는 의병장 출신으로 서울 평리원판사로 있던 허위(許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4년 양정의숙(養正義塾)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해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2년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연락 본부로 삼았다. 1915년 1월 안일암(安逸庵: 지금의 대구의 安逸寺)에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의 인사와 합작해 대한광복..

유길준(兪吉濬), 대한문전, 서유견문, 구당시초

개항기 『대한문전』, 『서유견문』, 『구당시초』 등을 저술한 개화사상가.정치인.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 서울 출신. 아버지는 진사 유진수(兪鎭壽)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이경직(李敬稙) 등에게 한학을 배웠다. 1870년(고종 7)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김윤식(金允植) 등 개화 청년들과 실학 사상을 배우면서,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와 같은 서적을 통해 해외 문물을 습득하였다. 1881년 박규수의 권유로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이칭별칭: 신사유람단)에 참가,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이 때 일본의 문명개화론자인 후쿠자와[福澤諭吉]가 경영하는 게이오의..

전봉준(全琫準), 동학농민군대장, 전주화약, 김경천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명좌(明佐). 초명은 전철로(全鐵爐). 별명은 전영준(全永準).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창군 죽림리 당촌이 유력하다. 아버지는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전창혁(全彰爀)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이다.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전봉준이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方術)을 배웠다. 항상..

서재필(徐載弼), 갑신정변

개항기 갑신정변 과 관련된 관리. 독립운동가. 본관은 대구(大丘). 호는 송재(松齋). 미국 귀화명은 제이슨(Jaishon, P.). 전라남도 보성 출신. 서광효(徐光孝)의 둘째 아들이다. 어렸을 때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의 7촌 아저씨 서광하(徐光夏)에게 입양되었다. 일곱살 때에 상경하여 외삼촌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2년 3월에 실시된 별시문과 병과에 세번째로 합격하여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하며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국방 근대화의 시급함을 절감하고 김옥균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3년 일본의 도야마육군학교[戶山陸..

박규수(朴珪壽), 개화론자

조선후기 애로호 사건,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과 관련된 실학자.개화론자.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박규학(朴珪鶴), 초자(初字)는 환경(桓卿), 자는 환경(瓛卿) 또는 정경(鼎卿), 초호(初號)는 환재(桓齋), 호는 환재(瓛齋) 또는 환재거사(瓛齋居士). 서울 출신. 북학파 거두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 현령 박종채(朴宗采)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유영(柳詠)의 딸이다. 가세가 빈한해 어려서는 주로 아버지에게 수학했고, 소년시절에는 진외당숙(陳外堂叔) 이정리(李正履)·이정관(李正觀)과, 외종조부 유화(柳訸) 등에게서 훈도받았다. 15세경에는 이미 조종영(趙鍾永) 등과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을 만큼 학문적으로 성장하였다. 20세 무렵 효명세자(孝明世子)와 교유할 때는 문명(文名)이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한글은 완벽한 문자, 미국인 독립운동가, 헐버트 박사, 육영공원

"한글은 완벽한 문자가 갖춰야 하는 조건 이상을 갖추고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불리는 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1863.1.26∼1949.8.5) 박사가 131년 전 미국 언론에 기고한 '조선어'(THE KOREAN LANGUAGE) 기고문의 원본과 번역본이 대중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31일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헐버트 박사 서거 71주년 추모식을 거행하며 헐버트 박사가 미국 언론 뉴욕트리뷴에 1889년 기고한 기고문을 공개했다. 헐버트 박사는 기고문에서 "알파벳과 비슷한 한글은 완벽한 문자"라며 "조선어(한글) 철자는 철저히 발음 중심이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오랫동안 갈망하고, 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한 과제가 조선..

조소앙(趙素昻)-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사상가. 본관은 함안(咸安). 본명은 용은(鏞殷), 자는 경중(敬仲), 소앙(素昻)은 호이다. 1887년 4월 10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정규(趙禎奎)이고, 어머니는 박필양(朴必陽)이다. 일제식민지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광복 후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점으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1919년 3·1민족항쟁에 즈음하여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 부주석으로 선출되고, 한성정부(漢城政府)교통부장에 추대되었다. 4월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민주공화제헌법의 기초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

김원봉(金元鳳), 진링대학, 의열단, 칠가살, 황푸군관학교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정치인.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약산(若山). 독립운동 때에는 최림(崔林)·이충(李冲)·진국빈(陳國斌)·천세덕(千世德) 등의 가명을 썼다. 경상남도 밀양 출생. 아버지는 김주익(金周益), 어머니는 이경념(李京念)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의열단ㆍ조선의용대를 이끌며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잔류하여 활동했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08년 보통학교 2년에 편입하였으며, 1910년에 인근 동화중학(同和中學) 2년에 편입하였다. 1913년에는 서울의 중앙학교에 다녔으며, 1916년 중국에서 독일어를 ..

이회영(李會榮), 신민회, 항일구국연맹

일제강점기 신민회 중앙위원, 항일구국연맹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키워드 교육진흥운동가 상동청년학원 무정부주의자 항일구국연맹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우당(友堂). 서울 출신.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7년 2월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4월경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한편,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하여금 교포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

윤봉길(尹奉吉), 훙커우공원 투탄의거, 한인애국단원

일제강점기 훙커우공원 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의사(義士). 본관은 파평(坡平). 본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 충청남도 예산 출신. 아버지는 윤황(尹璜)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김원상(金元祥)이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했으며,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치고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 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 해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

안중근(安重根), 이토저격, 히로부미암살, 하얼빈역

일제강점기 이토저격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의병장, 의사(義士). 키워드 이토저격 히로부미암살 하얼빈역 개설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안인수이다. 아버지 진사 안태훈(安泰勳, 安泰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남 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안응칠(安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안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해 자(字)가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史記) 등을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해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주 ..

홍범도(洪範圖),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일제강점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일명 홍범도(洪範道). 평안북도 양덕 출신이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나자 이 해 9월 일제가 민중의 무장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해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공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크게 분노하여 11월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과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킨 뒤,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甲山)·삼수(三水)·혜산(惠山)·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910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차도선·조맹선(趙孟善) 등과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교포들에게 광복사상을 고취하며 국내와 연락, 애국지사 ..

안창호(安昌浩), 토히로부미 암살사건, 상해 훙커우공원 폭탄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교육자.

일제강점기 이토히로부미 암살사건, 상해 훙커우공원 폭탄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교육자. 호는 도산(島山). 평안남도 강서 출신. 안흥국(安興國)의 셋째아들이다. 부인은 이혜련이며, 자녀로는 안필립, 안필선, 안수산, 안수라, 안필영이 있다. 선대는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김현진(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이 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畢大殷)과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국력배양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상경하여 언더우드(Underwood, H. G.)가 경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 ..

여운형(呂運亨),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 여운형 암살사건, 상해임시정부, 조선건국동맹,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당, 좌우합작운동

일제강점기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 여운형 암살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정치인. 키워드 상해임시정부 조선건국동맹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당 좌우합작운동 개설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경..

박은식(朴殷植), 안중근전, 한국통사, 대동민족사

일제강점기 『안중근전』, 『한국통사』, 『대동민족사』 등을 저술한 학자.언론인,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백암(白巖). 황해도 황주 출생. 농촌 서당 훈장 박용호(朴用浩)의 아들이다. 국권을 잃은 후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에 종사할 때에는 박기정(朴箕貞)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했고, 태백광노(太白狂奴) 또는 무치생(無恥生)의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과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다. 과거공부에 회의를 느껴 고향을 떠나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나 있던 안태훈(安泰勳)주 01)과 교우하면서 문장을 겨루어 황해도의 양 신동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이후 전국을 답사하던 중 1880년(고종 17)에 경기도 광주 두릉(斗..

신채호(申采浩),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일제강점기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저술한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의 후예로 아버지는 신광식(申光植)이다. 문과에 급제해 정언(正言)을 지낸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 세에 『통감(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해 그의 총애를 ..

양기탁(梁起鐸), 대한매일신보, 베델

일제강점기 만민공동회의 간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법무담당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언론인. 초명은 양의종(梁宜鍾), 호는 우강(雩岡). 평안남도 평양 출신. 아버지는 양시영(梁時英)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이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동학당 및 유림(儒林)의 명망가이며 우국지사인 나현태(羅鉉泰)를 만나 시야를 넓혔다. 1895년 미국인 선교사 게일(Gale,J.S., 奇一) 및 아버지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한영자전(韓英字典)』을 편수하고, 이듬해 독립협회에 가입했으며, 1898년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00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게일의 알선으로 3년간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서전서숙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충청북도 진천 출신.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7세 때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었다. 이범세(李範世)·여규형(呂圭亨)·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또 헐버트(Hulbert,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프랑스어 등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물리·화학·경제학·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

임병찬(林炳瓚), 국권반환요구서, 순창전투, 독립의군부

대한제국기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등을 역임한 의병.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전라북도 옥구 출신. 아버지는 임용래(林榕來)이다.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11월에 1,000냥을 내어 구휼하고, 이어 3,000냥과 조(租) 70석을 내어 백성을 진휼하였으며, 다음 해 징세(徵稅)할 때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 그 결과 1899년 호남의 선비들이 임병찬의 공을 추천하여, 2월에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兼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1894년 12월 1일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김개남(金開男)을 고..

최익현(崔益鉉), 위정척사, 항일의병운동

조선후기 장령, 돈녕부도정,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항일운동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경기도 포천 출신. 최대(崔岱)의 아들이다. 6세 때 입학해 9세 때 김기현(金琦鉉) 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였다. 14세 때 경기도 양근(楊根) 벽계(蘗溪)에 은퇴한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격몽요결(擊蒙要訣)』·『대학장구(大學章句)』·『논어집주(論語集註)』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항로의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1855년(철종 6) 명경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던 이후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신창현감(新昌縣監)·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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