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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인물 169

이하응(李昰應), 흥선대원군, 경복궁중건, 천교도도박해, 대원군존봉의절

대한제국기 제1대 고종의 아버지로 흥선대원군에 봉해진 왕족. 정치인.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서울 출신. 영조의 증손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넷째 아들이며,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이다.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렸다. 1) 집권 과정 12세에 어머니를, 17세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낙박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21세가 된 1841년(헌종 7)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綬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철종 때에는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

박제가(朴齊家), 북학의, 정유집

조선후기 『북학의』·『정유집』·『정유시고』 등을 저술한 실학자.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貞蕤)·위항도인(葦杭道人). 박율(朴栗)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승지 박평(朴坪)이다. 소년 시절부터 시·서·화에 뛰어나다고 이름을 떨쳐 19세를 전후해 박지원(朴趾源)을 비롯한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 등 서울에 사는 북학파들과 교유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이덕무·유득공·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문명을 청나라에까지 떨쳤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돌아온 뒤 청나라에서 보고들..

홍대용(洪大容), 담헌서, 의산문답

조선후기 『담헌서』, 『의산문답』, 「연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실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보(德保), 호는 홍지(弘之). 담헌(湛軒)이라는 당호(堂號)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사간 홍용조(洪龍祚)의 손자이며, 목사(牧使) 홍역(洪櫟)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청풍(淸風) 김씨 군수 김방(金枋)의 딸이고, 부인은 이홍중(李弘重)의 딸이다. 특히, 지전설(地轉說)과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자연관을 근거로 화이(華夷)의 구분을 부정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당대의 유학자 김원행(金元行)에게 배웠고, 북학파의 실학자로 유명한 박지원(朴趾源)과는 깊은 친분이 있었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뒤 1774년..

유수원(柳壽垣),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조선후기 정언, 낭천현감, 부호군 등을 역임한 문신.실학자. 본관은 문화(文化). 충청북도 충주 출생. 자는 남로(南老), 호는 농암(聾菴). 형조정랑 유성오(柳誠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간 유상재(柳尙載)이다. 아버지는 유봉정(柳鳳延)이며, 어머니는 김징(金澂)의 딸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서울에서 벼슬하던 일가 친족의 집에서 자랐다. 스승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1714년(숙종 40) 21세 때 진사가 되고, 25세 때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약관의 나이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벼슬길은 매우 불우하였다. 벼슬길에 들어선 지 5년째 되던 1723년(경종 3) 2월에 정언(正言)으로서 조정의 혁신을 요청하는 글을 경종에게 올렸다가, 원로대신을 함부로 비난했다는 조정 중신들의 ..

정약용(丁若鏞), 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조선후기 『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실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

이익(李瀷), 성호사설 ,곽우록, 이자수어

조선후기 『성호사설』, 『곽우록』, 『이자수어』 등을 저술한 유학자. 실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 팔대조 이계손(李繼孫)이 성종 때 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지내는 등 명문 가문의 후손이다. 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의정부좌찬성, 할아버지 이지안(李志安)은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은 사헌부대사헌에서 사간원대사간으로 환임(還任)되었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 때 진주목사로 좌천, 다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 1681년 10월 18일에 아버지 이하진과 후부인 권씨(權氏) 사이에 운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682년 6월에 전부인 이씨(李氏) 사이의 3남 2녀와 후부인 권씨 사이의 2남 1녀를 남긴 채 55세를 일기로 유배지 운산에서 사망..

정제두(鄭齊斗), 학변, 존언

조선후기 『학변』, 『존언』 등을 저술한 학자. 서울 출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추곡(楸谷).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고, 아버지는 진사 정상징(鄭尙徵)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다.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한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이다. 몇 차례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 1672년(현종 13)부터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680년(숙종 6)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종부시주부·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688년 평..

송시열(宋時烈), 예송, 사단칠정

조선후기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송성뢰(宋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봉사(奉事) 송구수(宋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송시열의 생애 및 활동사항 충청도 옥천군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

김정희(金正喜), 금석학파, 추사체

조선후기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실학자·서화가.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주 01)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주 02)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

이이(李珥), 구도장원공, 구암서원, 시무칠조책, 십만양병설, 동호문답, 인심도심설, 성학집요

조선전기 「동호문답」, 「인심도심설」, 『성학집요』 등을 저술한 학자.문신. 강원도 강릉 출생.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버지는 증좌찬성 이원수(李元秀)이며,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사표로 추앙받는 사임당신씨(師任堂申氏)이다.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했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産室)은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년(명종 3)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1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자, 파주 ..

이황(李滉), 무진육조소, 연평답문, 심경후론, 퇴계학

조선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이황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15..

조광조(趙光祖), 부제학, 대사헌, 신진사류, 훈구파, 사림파

조선전기 교리,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 한성 출생. 개국공신 조온(趙溫)의 5대 손이며, 조육(趙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충손(趙衷孫)이고, 아버지는 감찰 조원강(趙元綱)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민의(閔誼)의 딸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근사록(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했으며, 이 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 때는 사화 직후라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이라거나 혹은 ‘..

정도전(鄭道傳), 경제문감

조선전기 지경연예문춘추관사, 겸의흥친군위절제사 등을 역임한 정치인.학자.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봉화호장 정공미(鄭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아버지와 이곡(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윤소종(尹紹宗)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해 동료 사우의 추양(推讓)을 받았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忠州司錄)·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

최우(崔瑀), 최충헌 아들, 송청, 최씨무인정권, 교정별감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관리.무신집권자. 본관은 우봉(牛峰). 뒤에 최이(崔怡)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최충헌(崔忠獻)이며, 어머니는 상장군 송청(宋淸)의 딸이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가 1219년(고종 6)에 최충헌이 죽자 그 뒤를 이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이 때 자신이 축적해둔 금은(金銀), 진완(珍玩) 등을 왕에게 바치고 아버지가 빼앗은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각각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또한, 한사(寒士)를 많이 선발, 등용하였으며 아버지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괴롭히던 관리를 유배 또는 파면하고, 아우 최향(崔珦)을 귀양보내는 등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하였다. 1221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이병부상서(吏兵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

최충헌(崔忠獻), 무신정권, 교정별감

고려시대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에 이어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교정별감을 역임한 관리.무신집권자. 본관은 우봉(牛峰). 초명은 최난(崔鸞). 아버지는 상장군 최원호(崔元浩)이다. 음보(蔭補)로 양온령(良醞令)이 되었다가 1174년(명종 4)조위총(趙位寵)의 난 때 원수 기탁성(奇卓誠)의 휘하에서 용감히 싸워 별초도령(別抄都令)에 발탁되었으며, 뒤이어 섭장군(攝將軍)에 올랐다. 1196년에 아우 최충수(崔忠粹), 생질 박진재(朴晉材) 등과 함께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이의민(李義旼)을 제거하는 한편, 그 일당과 잔당으로 지목된 문무관(文武官)을 대량 학살 또는 귀양 보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적신(賊臣) 이의민이 일찍 시역(弑逆)의 ..

묘청(妙淸), 정지상, 백수한, 서경천도, 승려, 묘청의난, 풍수지리, 도참사상, 임원궁

고려전기 정지상, 백수한 등의 지지로 서경천도론을 제기한 승려. 서경(西京) 사람이나, 속성(俗姓)과 본관은 알 수 없다. 뒤에 이름을 정심(淨心)이라 고쳤다. 승려이면서도 도교(道敎)적인 요소를 함께 갖추었다. 풍수지리와 도참사상(圖讖思想)을 익힌 후 이를 바탕으로 서경천도(西京遷都)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1128년(인종 6)에 같은 서경 사람인 정지상(鄭知常), 분사검교소감(分司檢校少監) 백수한(白壽翰), 근신(近臣) 김안(金安)·홍이서(洪彝敍)·이중부(李仲孚), 대신(大臣) 문공인(文公仁)·임경청(林景淸) 등의 지지를 받아 서경천도론을 처음 제기하였다. 상경(上京)은 이미 기운이 쇠했고 서경에는 왕기(王氣)가 있으니 그곳으로 천도하자고 했다.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이..

서희(徐熙), 강동6주(江東六州)

고려전기 장흥진 등에 성을 쌓고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공헌한 문신.정치인, 외교가.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염윤(廉允). 아버지는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서필(徐弼)이다. 할아버지인 서신일(徐神逸) 때까지는 이천 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아버지에 이어 재상위에 올랐고, 다시 아들 서눌(徐訥)·서유걸(徐惟傑)이 수상인 문하시중과 재상인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특히 서눌의 딸은 현종(顯宗)의 비가 되어 외척가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과 스스로의 재능으로 평탄한 출세의 길을 걸었다. 960년(광종 11) 3월에 갑과(甲科)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郎)·내의시랑(內議侍郎) 등을 거쳤다. 983년(성종 2) 군정(軍政)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

지눌(知訥), 고려, 종휘, 정혜결사, 육조단경, 길상사, 조계산

고려시대 『권수정혜결사문』, 『수심결』, 『원돈성불론』 등을 저술한 승려. 성은 정씨(鄭氏). 자호는 목우자(牧牛子). 지눌은 법명. 황해도 서흥(瑞興) 출신.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정광우(鄭光遇), 어머니는 개흥군(開興郡) 출신의 조씨(趙氏)이다. 선종(禪宗)의 중흥조로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창하여 선과 교에 집착하지 않고 깨달음의 본질을 모색하였다. 8세 때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闍崛山派)에 속했던 종휘(宗暉)를 은사로 승려가 되었다. 1182년(명종 12) 승과(僧科)에 급제한 뒤,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모인 승려들과 함께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어 참선과 교학을 함께 수행할 것을 기약하였다. 평창군(현재 전라남도 나주) ..

의천(義天), 고려 국사, 승통, 국청사, 천태종

고려전기 국사, 승통, 국청사 제1대 주지 등을 역임한 승려. 속명은 왕후(王煦). 호는 우세(祐世). 법명은 의천. 경기도 개성 출신.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이다. 불교 전적을 정비하고 『교장(敎藏)』을 간행하였으며,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 발전을 도모하였다. 문종의 넷째 아들로, 11세에 출가를 자원하였다. 1065년(문종 19)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같은 해 10월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경·율·논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 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을 두루 섭렵하였다. 스승인 경덕국사가 죽자 그의 강의를 대신 맡았다. 1067년(문종 21) 왕..

균여(均如),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부흥사, 영통사, 화엄종

고려전기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수현방궤기(搜玄方軌記)』, 『공목장기(孔目章記)』 등을 저술한 승려. 본관은 황주(黃州). 성은 변씨(邊氏). 균여는 이름이다. 아버지는 환성(煥性)이며, 어머니는 점명(占命)이다. 황해도 황주 북쪽 형악(荊岳) 남쪽 기슭에 있는 둔대엽촌(遁臺葉村)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가 하늘에서 누런 봉 한 쌍이 내려와 품속에 드는 꿈을 꾸고 6년 뒤, 나이 60에 임신해 7개월 만에 균여를 낳았다. 균여는 강보에 싸여 있을 적부터 아버지가 말로 전수하는 『화엄경(華嚴經)』의 원만게(圓滿偈)를 하나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5세에 사촌 형 선균(善均)을 따라 부흥사(復興寺)의 식현(識賢)을 뵙고 출가하였으나 식현의 자질이 뛰어나지 못함을 알고, ..

견훤(甄萱), 후백제

남북국시대 후백제를 건국한 시조. 재위 892∼935.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加恩縣)의 농민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이비가기(李碑家記)』에서는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元善)이 아자개라 하였는데 확인하기 어렵다. 어머니의 성씨는 확실하지 않다. 두 부인을 두었는데,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전해질 뿐이다. 견훤은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용개(龍蓋)·보개(寶蓋)·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그런데 「고기 古記」에는 광주(光州)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견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는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

최치원(崔致遠), 6두품(六頭品), 계원필경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 등을 저술한 학자. 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沙梁部 또는 本彼部)출신.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이다. 특히, 최씨 가문 중에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원효(元曉), 일심, 화쟁, 무애, 대혜도경종요, 금강반야경소, 화엄경소

삼국시대 신라의 『대혜도경종요』, 『금강반야경소』, 『화엄경소』 등을 저술한 승려. 성은 설씨(薛氏), 원효는 법명(法名),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 경상북도 압량(押梁) 출신.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 불지촌은 발지촌(發智村) 또는 불등을촌(佛等乙村)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한 언덕에는 신문왕 당시 원효가 지었다는 금당(金堂)자리가 남아 있다. 그 밑 골짜기에는 그의 아들 설총(薛聰)의 출생지로 전하는 자리가 남아 있어 그 자리가 바로 원효가 태어난 곳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원효의 집은 본래 율곡(栗谷)의 서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나, 어머니가 원효를 임신하고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가 있어 집에 들어갈 사이..

의상(義湘), 화엄종, 화엄일승법계도, 낙산사

삼국시대 화엄종의 개조이자 화엄십찰의 건립자인 승려. 성은 김씨. 법명은 의상(義湘).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다.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이자 화엄십찰의 건립자이다. 19세 때 경주 황복사(皇福寺)로 출가하였다. 중국으로 가기 위하여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으나,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 오인 받고 돌아왔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중국화엄종의 제2조로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지엄으로부터 8년 동안 화엄을 공부하였는데, 그의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때,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開祖) 도선율사(道宣律師)와 교유하였으며, 중국화엄종의 제3조 현수(賢首)와의 교유는 귀국한 뒤까지 이어졌다. ..

정조(正祖), 이산(李祘), 조선 제22대(재위: 1776~1800) 왕

조선후기 제22대(재위: 1776~1800) 왕. 개설 재위 1776∼1800. 이름은 이산(李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주 01)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

영조(英祖), 조선 제21대(재위:1724~1776) 왕

조선후기 제21대(재위:1724~1776) 왕. 재위 1724∼1776. 이름은 이금(李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숙종의 세 아들(景宗·英祖·延齡君)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고,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노론 유력자인 김창집(金昌集)의 종질녀로서 숙종 후궁이던 영빈(寧嬪) 김씨의 양자노릇을 하였다. 이로 인해 숙종 말년 왕위계승문제가 표면화되었을 때, 이복형인 왕세자(후일의 경종)를 앞세우는 소론에 대립했던 노론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1721년 숙종이 승하하고 왕세자가 즉위해 경종..

숙종(肅宗), 조선 제19대(재위:1674~1720) 왕

조선후기 제19대(재위:1674~1720) 왕. 재위 1674(숙종 즉위년)∼1720(숙종 46).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순(李焞), 자는 명보(明普). 현종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비(妃)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이고,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이며, 제2계비는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8월에 즉위하여 재위 46년 되던 해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였다. 왕의 치세 기간은 조..

현종(顯宗), 조선 제18대(재위:1659~1674)

조선후기 제18대(재위:1659~1674) 왕. 재위 1659∼1674.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이원(李棩)이다. 자는 경직(景直)이다. 효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비는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효종이 봉림대군(鳳林大君) 시절에 청나라의 볼모로 심양(瀋陽)에 있을 때 심관(瀋館)에서 출생하였다. 1649년(인조 27)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로 진봉(進封)되었다. 현종은 효종의 뒤를 이어 1659년에 즉위하여 재위 15년 동안 대부분을 예론을 둘러싼 정쟁 속에서 지냈다. 1662년(현종 3) 호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였다. 1668년 동철활자(銅鐵活字) 10여 만자..

효종(孝宗), 조선 제17대(재위:1649~1659) 왕

조선후기 제17대(재위:1649~1659) 왕. 재위 1649∼1659.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호(淏)이다. 자는 정연(靜淵)이다. 호는 죽오(竹梧)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19년 5월 22일 서울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에서 태어났다. 1631년 12세에 장씨와 혼인했다. 1626년(인조 4)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비빈·종실 및 남녀 양반 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이듬 해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척화신(斥和臣)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형 곁에서..

인조(仁祖), 조선 제16대(재위:1623~1649) 왕

조선후기 제16대(재위:1623~1649) 왕. 재위 1623∼1649.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종(倧)이다. 자는 화백(和伯)이다. 호는 송창(松窓)이다. 선조의 손자로, 정원군(定遠君)주 01)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妃)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조창원(趙昌遠)의 딸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졌다. 이어 능양군에 진봉(進封)되었다. 광해군 때는 대북(大北)이 정권을 잡아 왕으로 하여금 영창대군 의(永昌大君㼁)를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게 했으며, 또 여러 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정치가 혼란해졌다. 그러자 16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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