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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인물 169

김보당(金甫當), 무신정권

고려후기 우간의, 공부시랑, 간의대부 겸 동북면병마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영광(靈光). 의종 때의 정치와 무신정권에 비판적인 인물이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무신정권이 성립된 직후 1171년(명종 1) 우간의(右諫議)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좌간의 김신윤(金莘尹),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소응(李紹膺), 좌사간(左司諫) 이응초(李應招), 우정언(右正言) 최당(崔讜) 등과 더불어 의종 때 정치를 문란하게 하였던 재상 최윤의(崔允儀), 간의 이원응(李元膺), 중승(中丞) 오중정(吳中正) 등과 대성(臺省)의 관직을 겸임하고 있던 이준의(李俊儀)·문극겸(文克謙)을 탄핵하였다. 이는 전대에 붕괴된 정치질서를 회복하고 그것에 바탕을 둔 관료기구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준의는 술..

김두봉(金枓奉)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한국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한글학자, 정치인. 호는 백연(白淵). 경상남도 동래군(현재의 부산광역시) 출생. 1905년까지는 집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서울로 올라와 기호학교(畿湖學校)와 배재학교에 다녔다. 1913년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가입하였으며 이듬해에 배재학교를 중퇴하였다. 당시 최남선(崔南善)이 주재하고 있던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참여하여 소년잡지 『청춘』을 편집하는 일에 종사하기도 하였고, 조완구(趙琬九)와 함께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관계하였다. 또한, 한글 연구의 선구자인 주시경(周時經) 밑에서 한글 연구에 몰두하여 27세의 나이로 광문사(光文社)에서 발행한 『조선어문전(朝鮮語文典)』 편찬에 참여하는 등 한글 연구의 기..

김대성(金大城), 불국사 창건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이찬으로 불국사를 창건한 관리. ‘대정(大正)’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재상을 지낸 문량(文亮)주 01)이다. 745년(경덕왕 4) 이찬(伊飡)으로 중시(中侍)가 되었으며 750년에 물러났다. 그 뒤 삶을 마칠 때까지 불국사(佛國寺)의 창건 공사를 주관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김대성(金大城)의 불국사 창건과 관련된 연기설화가『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모량리(牟梁里)주 02)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아주 넓어 성(城)과 같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하였다. 집이 가난해 기르기가 힘들었으므로 어머니가 부잣집에 가서 품팔이를 했는데, 그 집에서 밭 몇 마지기를 주어 생활을 꾸려나갔다. 하루는 점개(漸開)라는 중이..

김대건(金大建), 병오박해

조선후기 병오박해 당시의 신부. 본관은 김해(金海). 세례명은 안드레아. 초명은 재복(再福), 보명(譜名)은 지식(芝植). 충청남도 당진 출신. 아버지는 김제준(金濟俊)이다. 증조부 김진후(金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할아버지 김택현(金澤鉉)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신자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1831년 조선교구 설정 후 신부 모방(Maubant, P.)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 최방제(崔方濟)·최양업(崔良業)과 함께 15세 때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巴里外邦傳敎會東洋經理部)로 가게 되었다. 그 곳 책임자인 신부 리부아(Libois, N.)의 배려로 마카오에서 중등 과정..

김남주(金南柱),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해방 이후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등을 저술한 시인. 전라남도 해남 출생. 광주일고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수학하였다.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고, 1977년 황석영(黃晳暎)·정광훈·홍영표·윤기현 등과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 형 선고를 받고 9년째 복역 중 1988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옥하였다. 1991년 신동엽(申東曄) 창작기금을 수상하였다. 작자는 고은(高銀)·신경림(申庚林)·김지하(金芝河)·박노해, 백무산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민족문학의 기수로 평가된다. 그의 시는 80년대 정치적인 탄압 때문에 잡지나 시집으로 나오기 전에 지하 출판물을 통해 독자들에게 더 많..

김규식(金奎植), 파리강화회의

일제강점기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의 탄원서를 제출한 독립운동가.정치인, 학자. 종교인. 본관은 청풍(淸風).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부산 동래 출신. 중방파(仲房派) 23세손으로 1881년 김지성(金智性)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생애 및 활동사항 당시 우리나라에 파견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정간섭을 단행하자, 동래부사의 막료로 있던 그의 아버지 지성은 일본과의 관계설정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귀양갔다. 더욱이 1887년에는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6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마침 미국 북장로파의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H.G.)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으며, 그 때 요한이라는 교명을 받았다. 1906년에 조순환(趙淳煥..

김구(金九), 안명근사건, 안중근 하얼빈 의거, 모스크바3상회의

일제강점기 안명근사건, 안중근 하얼빈 의거, 모스크바3상회의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정치인.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인조 때 삼정승을 지낸 방조(傍祖) 김자점(金自點)이 권세 다툼에서 청병(淸兵)을 끌어들였다는 역모죄로 효종의 친국을 받고 1651년 사형당하자, 화를 피하여 선조되는 사람이 그 곳으로 옮겨왔다. 생애 및 활동사항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

기황후(奇皇后), 원나라 순제, 기자오, 기철

고려후기 원나라 순제의 황후. 본관은 행주(幸州). 아버지는 기자오(奇子敖)이고, 고려 말의 권신 기철(奇轍)의 누이동생이며 북원(北元)소종(昭宗)의 어머니이다. 1333년(충숙왕 복위 2)에 원나라의 휘정원(徽政院)에 있던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어 순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정후인 다나시리[答納失里]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1335년에 다나시리의 일족이 축출되자 황후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바엔[伯顔] 등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1339년 황자 아이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를 낳았으며, 이듬해 2월에 바엔세력이 물러나게 되자 4월에 드디어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가 된 뒤 곧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이름을 바꾸어 이를 배경으로 막대한 권력..

기철(奇轍), 기황후, 부원세력, 덕성부원군

고려후기 정동행성 참지정사, 요양성평장, 대사도 등을 역임한 권신. 본관은 행주(幸州). 몽고식 이름은 빠엔부카(伯顔不花). 고조부는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기윤숙(奇允肅)이며, 아버지는 총부산랑(摠部散郎)을 지낸 기자오(奇子敖)이다. 누이동생이 원나라 순제(順帝)의 제2황후가 되어 태자 아이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를 낳고 원나라에서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이를 배경으로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 참지정사에 임명되고, 고려로부터는 정승에 임명된 뒤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기철의 일족과 친당들도 교만하고 포학해져 남의 토지를 빼앗는 등의 불법행위를 자행하였다. 뒤에 다시 원나라로부터 요양성평장(遼陽省平章)에 임명된 뒤 대사도(大司徒)에 이르렀다. 1356년 원나라가 점차 쇠약해지자 자기의 위치..

기대승(奇大升), 기준, 이황, 사칠논변, 사칠이기설, 김인후

조선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사간,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 전라남도 나주 출신.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기진(奇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 조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 등을 가리킨다.)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이 그의 계부(季父)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이황과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조선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칠논변(四七論辨)을 전개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이량(李..

금성대군(錦城大君), 세종 여섯째 아들

조선전기 제4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왕자.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유(李瑜). 아버지는 세종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했으며, 그 해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이방석(李芳碩)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다.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이유(李瑈)와 함께 사정전(思政殿)에서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 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왕의 보필 대신인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하였다. 1455년 왕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에 의해 몇몇 종친과 함께 무사들과 결탁해 당여를..

근초고왕(近肖古王), 백제 제13대(재위:346~375) 왕

삼국시대 백제의 제13대(재위:346~375) 왕. 재위 346∼375. 비류왕의 아들이다. 일본의 『고사기 古事記』에는 ‘조고왕(照古王)’으로, 『일본서기 日本書紀』에는 ‘초고왕(肖古王)’으로, 『진서 晉書』 간문제기에는 ‘여구(餘句)’로 표기되어 있다. 즉위 후 왕권 강화 및 확립에 주력해 왕위 계승에서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는 왕과 아들 근구수왕(近仇須王)의 왕명이 각각 초고왕·구수왕 앞에 ‘근(近)’자를 붙여 만들어진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진씨(眞氏)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 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왕은 중앙 집권화를 보다 ..

균여(均如), 보현십원가, 부흥사, 영통사, 화엄사종, 화엄종

고려전기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수현방궤기(搜玄方軌記)』, 『공목장기(孔目章記)』 등을 저술한 승려. 본관은 황주(黃州). 성은 변씨(邊氏). 균여는 이름이다. 아버지는 환성(煥性)이며, 어머니는 점명(占命)이다. 황해도 황주 북쪽 형악(荊岳) 남쪽 기슭에 있는 둔대엽촌(遁臺葉村)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가 하늘에서 누런 봉 한 쌍이 내려와 품속에 드는 꿈을 꾸고 6년 뒤, 나이 60에 임신해 7개월 만에 균여를 낳았다. 균여는 강보에 싸여 있을 적부터 아버지가 말로 전수하는 『화엄경(華嚴經)』의 원만게(圓滿偈)를 하나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5세에 사촌 형 선균(善均)을 따라 부흥사(復興寺)의 식현(識賢)을 뵙고 출가하였으나 식현의 자질이 뛰어나지 못함을 알고, ..

권율(權慄), 임진왜란, 도원수

조선시대 의주목사, 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장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도첨의(都僉議) 권보(權溥)의 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權勣),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權轍),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에 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났다. 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

권근(權近), 공민왕, 우왕,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배원친명

조선전기 중추원사, 정당문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진(權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소오자(小烏子). 권보(權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권고(權皐), 아버지는 검교정승 권희(權僖)이다.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주 01)을 주장했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창왕 즉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

권건(權健), 역대명감, 권충민공집

조선전기 예조참판,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강(叔强)·태보(殆甫). 증조부는 권근(權近)으로, 할아버지는 우찬성 권제(權踶)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권남(權擥)이며, 어머니는 이원(李原)의 딸이다. 중종의 열한번째 아들인 전성군(全城君) 이변(李邊)의 장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72년(성종 3) 진사가 되고, 147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직강이 되어 사가독서하였다. 이듬해 감찰을 거쳐, 교리·응교·전한·예조좌랑 등을 지냈다. 1479년 응교로 있을 때 시폐책(時弊策)을 제목으로 홍문관원들에게 시험을 치렀는데, 일등을 하여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1481년 부제학이 되고, 주문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1484년 도승지..

궁예(弓裔), 남북국시대 태봉국의 제1대(재위:901∼918) 왕, 후고구려, 마진, 태봉, 미륵신앙, 신정적 전제주의

남북국시대 태봉국의 제1대(재위:901∼918) 왕. 901년 후삼국 중의 한 나라였던 후고구려(후에 마진(摩震), 태봉(泰封)으로 개명)를 건국하였다. 광평성(廣評省)을 비롯한 여러 관부를 두어 국가체제를 정비하였고, 한때 전국의 2/3 가량을 차지하는 등 세력을 떨쳤다. 말년에는 미륵신앙에 기반을 둔 신정적(神政的) 전제주의 정치를 추구하였는데, 918년 6월 이에 반발한 정변이 일어나 왕위에서 쫓겨나 죽음을 당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신라 제47대 헌안왕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후궁 사이의 소생이라는 설과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 제45대 신무왕의 숨겨진 아들이자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설 등이 있다.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왕이 그를 죽이도록 명하였는데, 유비(乳婢)주 01)가 그를 구해(이..

광해군(光海君), 조선후기 제15대(재위:1608~1623) 왕

조선후기 제15대(재위:1608~1623) 왕. 재위 1608∼1623.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혼(李琿). 선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씨(恭嬪金氏)이다.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에게서 소생이 없자, 공빈 김씨 소생의 제1왕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사람됨이 인륜을 저버리고 난포하다고 하여 보류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 위한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 뒤 7개월 동안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 모집 등 분조 활동을 하다가 돌아..

광종(光宗), 고려전기 제4대(재위:949~975) 왕, 왕권강화,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공복제정, 쌍기

고려전기 제4대(재위:949~975) 왕. 재위 949년∼975년. 이름은 왕소(王昭), 자는 일화(日華). 아버지는 태조(太祖) 왕건(王建)이며 어머니는 신명순성왕태후 유씨(神明順成王太后劉氏)이다. 정종(定宗)의 친동생으로 그의 선위(禪位)를 받아 왕이 되었다. 비(妃)로는 대목왕후 황보씨(大穆王后皇甫氏)와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林氏)가 있다. 그런데 대목왕후는 광종에게 있어 이복누이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따라서 이들의 혼인관계는 고려왕실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근친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생으로는 경종(景宗)·효화태자(孝和太子)·천추전부인(千秋殿夫人)·보화궁부인(寶華宮夫人)·문덕왕후(文德王后)가 있다. 경화궁부인 역시 광종과는 숙질(叔姪)간이 된다. 부인의 아버지는 고려 제2대 혜종(惠宗)으로 광종..

관창(官昌), 화랑, 품일(品日)의 아들

‘관장(官狀)’이라고도 한다.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어려서 화랑이 되어 사람들과 폭넓게 사귀었으며, 660년에 왕에게 천거되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더불어 백제를 치고자 출병할 때, 좌장군인 아버지 밑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였다. 신라군은 황산(黃山)벌에서 백제군과 대치하였다. 그런데 계백(階伯)이 이끄는 백제군의 결사대는 용맹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며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해 신라군에 대항했으므로, 처음 네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병사들의 사기만 떨어질 뿐이었다. 마침내 신라와 백제 양국의 운명을 건 황산벌싸움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버지가 관창을 불러 이 싸움에서 공과 명예를 세울 것을 독려하였다. 이에 앞서 신라 장군 흠춘(欽春)의 아들 반굴(盤屈)도 자기 아버지의 명을 ..

곽재우(郭再祐), 임진왜란,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 의병장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경상남도 의령 출신. 곽위(郭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곽지번(郭之藩),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이다.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며, 김우옹(金宇顒)과는 동서 사이이다.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다. 그러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수일만에 전방(全榜)을 파해 무효가 되었다. 그 뒤,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 머문 지 3..

공양왕(恭讓王), 고려후기 제34대(재위:1389~1392) 왕, 고려 마지막 왕

고려후기 제34대(재위:1389~1392) 왕. 재위 1389∼1392. 이름은 왕요(王瑤). 신종(神宗)의 7대손으로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왕균(王鈞)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국대비 왕씨(國大妃王氏)이다. 비는 창성군(昌成君) 노진(盧稹)의 딸 순비 노씨(順妃盧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89년 이성계(李成桂)·심덕부(沈德符) 등에 의해 창왕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이성계 일파의 압력과 간섭을 받아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다. 재위 3년 동안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친 몇 차례의 제도개편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계 등 신진사대부들의 자기 세력부식을 위한 사회개혁일 뿐이었다. 관제에 있어서 전리사(典理司)·판도사(版圖司)·예의사(禮儀司)·군..

공민왕(恭愍王), 고려후기 제31대(재위: 1351~1374) 왕, 노국대장공주, 강릉대군, 강릉부원대군, 배원정책, 권문세족

고려후기 제31대(재위: 1351~1374) 왕. 재위 1351년∼1374년. 이름은 왕전(王顓). 초명은 왕기(王祺). 몽고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 아버지인 충숙왕(忠肅王)과 어머니인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비(妃)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며, 그 밖에 혜비 이씨(惠妃李氏)·익비 한씨(益妃韓氏)·정비 안씨(定妃安氏)·신비 염씨(愼妃廉氏)가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고 1341년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했으며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는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으로 봉해졌다. 1349년 원나라에서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이하였다. 1351년 원나라가 외척..

고종(高宗), 조선후기 제26대(재위: 1863~1907) 왕,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

조선후기 제26대(재위: 1863~1907) 왕. 재위 1863∼1907. 아명은 이명복(李命福), 초명은 이재황(李載晃), 후에 이희(李㷩)로 개명, 자는 성림(聖臨), 후에 명부(明夫)로 고침, 호는 성헌(誠軒). 영조의 현손(玄孫)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 즉위과정1852년 7월 25일 정선방(貞善坊)에서 출생하였다.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쳐 세도 정치를 한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철종의 후사가 없자 뒤를 이을 국왕 후보를 두고 왕손들을 지극히 경계하였다. 이때 안동김씨 세도의 화(禍)를 피해 시정(市井) 무뢰한과 어울리고 방탕한 생활을 자행하며 위험을 피했던 이하응은 조성하(趙成夏)를 통해 궁중 최고..

고이왕(古爾王), 백제 제8대(재위:234∼286) 왕

삼국시대 백제의 제8대(재위:234∼286) 왕. 재위 234∼286. 제5대 초고왕의 동생이다. 제6대 구수왕이 죽은 뒤 장자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자 사반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고이왕의 출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주서 周書』 및 『수서 隋書』의 백제전에 나오는 “백제시조구태(百濟始祖仇台)”의 ‘구태’를 ‘구이’로 읽고, 이것은 ‘고이’와 음운상 통한다고 보아 ‘구이=고이’로 해석해 고이왕을 백제 고대국가의 실제적 건국자로서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고이왕을 “초고왕모제(肖古王母弟)”라고 한 것을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해석해,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優台)·비류계(沸流系) ..

고연무(高延武), 고구려부흥운동

삼국시대 고구려 계루부 출신의 귀족.장수. 정확한 가계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 왕실의 성씨임을 볼 때 계루부(桂婁部) 출신의 귀족임을 알 수 있다. 그의 가계나 고구려 내에서의 활동을 전하는 자료는 전혀 없다. 다만, 고구려 멸망 후 신라와 더불어 대당항전(對唐抗戰)에 참전한 사실이 전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 3월 신라의 사찬(沙飡) 설오유(薛烏儒)와 더불어 태대형(太大兄)인 그가 각각 정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가 당나라군사를 돕고 있던 말갈군사를 격파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만으로는 그가 신라에 투항한 장군으로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출전한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 부흥운동에 참여하다가 신라군과 연합작전을 편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그 뒤 고연무는 안승(安勝..

고선지(高仙芝), 당나라 절도사

남북국시대 당나라에서 사진절도사, 안서절도사 등을 역임한 장수. 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 고사계(高舍鷄)의 아들이다. 당나라의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를 지냈다. 그래서 그를 하서 혹은 안서 출신의 고구려 후예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근거는 고구려 유민이 사막곡(沙漠曲)으로 많이 유입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는 자료로는 『구당서』·『신당서』와 『자치통감』 등이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 고선지전에는 그를 명확히 고구려인이라 하였고, 『구당서』와 『자치통감』에는 선임 안서절도사 부몽영찰(夫蒙靈詧)이 고선지가 세운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개똥 같은 고구려 놈’이라고 욕을 했다는 내용이 있다. 호삼성(胡三省)이 『원화성찬 元和姓纂』에 의한 주(注)를 단 것을 ..

고국천왕(故國川王), 고구려 제9대(재위:179~197) 왕, 제나부(提那部), 진대법(賑貸法), 을파소(乙巴素)

삼국시대 고구려 제9대(재위:179~197) 왕. 이름은 남무(男武)이며 국양왕(國襄王) 또는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한다. 신대왕(新大王)의 둘째아들이다. 176년(신대왕 12)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신대왕이 승하한 뒤 국인(國人)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184년후한(後漢) 요동태수(遼東太守)의 침입을 격퇴시키는 등, 고구려 사회의 성장을 저지하는 외부세력의 압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한편으로는, 180년 제나부(提那部) 우소(于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왕비족과의 결탁을 통한 왕권지지 기반을 확대함으로써, 초부족적 지배 질서의 수립과 왕권 강화에 힘썼다. 190∼191년에 걸친 좌가려(左可慮)와 어비류(於卑留)의 난을 진압했고, 194년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해 궁핍한 농민들에 대한 구휼..

고국원왕(故國原王), 고구려 제16대(재위:331~371) 왕

삼국시대 고구려 제16대(재위:331~371) 왕. 국원왕(國原王) 또는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하며, 한때 ‘소열제(昭烈帝)’라 칭하기도 하였다. 이름은 사유(斯由) 혹은 유(劉)·쇠(釗)이다. 아버지는 미천왕(美川王), 어머니는 주씨부인(周氏夫人)이다. 314년(미천왕 15) 정월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31년 2월미천왕이 승하하자 즉위하였다. 고구려는 미천왕대에 이어 요동지역 확보를 위해 선비족(鮮卑族)의 일파인 모용부(慕容部)의 국가 전연(前燕)과 심각한 대립 관계에 놓여 있었다. 336년동진(東晉)에 외교사절을 파견한다든지, 338년 전연 공격에 실패한 후조(後趙)와의 연결을 꾀하는 등 외교전에서의 우위 확보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336년모용황(慕容皝)의 즉위에 반대해 일어난 ‘모용인(慕容仁..

고경명(高敬命), 임진왜란 금산전투 의병장

조선전기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 참전한 의병장.문신.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광주 압보촌(鴨保村) 출생. 고자검(高自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좌랑 고운(高雲), 아버지는 대사간 고맹영(高孟英), 어머니는 진사 서걸(徐傑)의 딸이다.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제1위로 합격, 진사가 되고,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 나와 실시한 시험에서 수석해,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같은 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고, 이어서 공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형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를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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