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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봉, 조선 혁명군

Jobs 9 2022. 12. 9.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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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난 양세봉1896~1934은 어려서 가정이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동네 서당에서 소사사정. 학교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로 일하며 어깨너머로 한학을 배울 수 밖에 없었다. 국내 곳곳에 수탈의 손을 뻗은 일제의 전횡에 이웃 주민들이 고통을 받던 상황. 13세의 나이였던 양세봉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에 감동을 받았다.  

 그로부터 3년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양세봉이 가장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는 임재순이라는 여인과 혼인한 뒤 가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더이상 국내에서 가족을 먹여살리기 힘들어졌다. 이에 1917년 한겨울, 양세봉과 그 가족들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 영릉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한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일하던 양세봉은 1919년 중국 요령성 신빈현으로 다시 이주해 살았다.  

 그해는 다름아닌 3.1 만세운동이 빗발친 해였다. 양세봉도 그 소식을 들었고 흥동학교 교장 이세일과 함께 인근의 한인 교민들에게 만세 운동에 참여하도록 적극 권고했다.  

 3.1 운동 이후 양세봉은 독립군의 무장 투쟁 운동에 함께하기 시작했다. 평안북도 삭주군 천마산에 거점을 둔 천마산대에 입대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천마산대는 최시흥, 최지풍의 주도로 500여 명의 장정들이 구성한 독립군 부대였다. 양세봉은 이 천마산대에서 대유동 경찰서, 금광사무소 등 일제의 기관들을 습격해 군수 물자들을 확보하는 활약을 남겼다. 

 1923년, 평안북도의 일본군은 영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천마산대를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그에 따라 천마산대가 붕괴될 위기에 처하고 그 주변에 있는 주민들도 피해를 입고 말았다. 결국 대장 최시흥은 남은 부대원들을 대동하고 만주의 유하현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 군부대 광복군총영이 위치해 있었다. 천마산대는 광복군총영과 합쳐져 광복군철마별영으로 새로이 창설되었다. 최시흥을 따라갔던 양세봉은 광복군총영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군기를 확립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오동진 총영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광복군총영은 시간이 지나 또다시 대한통의부(대한통군부)에 흡수되었다. 이 대한통의부는 대한광복군 군영, 광복군총영 등 남만주 지역의 독립군 부대들을 망라한 연합 세력이었다. 양세봉은 대한통의부 제3중대 소속으로 활동하며 창성, 초산, 의주 등에서 일본 경찰서와 면사무소들을 습격하였다. 대한통의부가 의군부, 대한군민부, 참의부 등 여러 갈래로 갈라질 때에는 임시정부에서 인정받은 참의부의 소대장이 되었다.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압록강 지역을 둘러보려고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그를 저격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 저격에는 실패했지만 조선총독부의 '문화 통치'라는 껍데기 통치 방식을 부정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1924년 7월, 남만주 지역의 독립군부대 장군들이 한데 모였다. 뿔뿔이 흩어진 여러 부대들을 하나로 다시 합치자는 의견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양기탁, 지청천 등이 주도해 정의부가 조직될 수 있었다. 정의부는 거의 하나의 국가에 가까운 체제를 가지고 있던 일종의 자치 행정부였다. 또 얼마 후 신간회를 비롯한 좌우합작 열풍에 힘입어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등 만주에 위치한 주요 독립군들이 규합을 시도하였다. 그 때문에 열린 회의에서 양세봉은 정의부 대표로써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가 합해진 국민부의 창설을 주도했다.

 1928년 12월, 양세봉은 국민부 내 동맹인 조선혁명당의 대표에 올랐다. 이어 조선혁명당만의 독립군, 조선혁명군의 제1중대장이 되었다. 그들은 일제 기관인 선민부를 타도하는 것을 주 목표로 삼았지만 1931년 일제의 검거로 인해 조직이 분해될 큰 위기에 처했었다. 

 그렇지만 양세봉이 나서서 조선혁명군을 재건했고 총사령관의 자격에 올랐다. 이듬해 일제의 만주 사변으로 고통받는 만주 중국군과 연대해 한중 연합군을 만들기로 협의했다. 이들은 만주 일대를 휩쓸며 수백여 차례의 크고작은 전투를 치루어 승리를 거두었다. 양세봉 장군은 특히 일본군이 고지 점령과 월등한 화력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패배시킨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 노구대 전투, 쾌대무다 전투를 이끌면서 승리해 나갔다. 

 이처럼 양세봉 장군은 독립군의 중심 역사를 관통한 인물이자 말년에 일본군을 상대로 수차례의 승리를 거둔 사령관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1934년 8월 일제에게 매수당한 동료들에 의해 맞은 최후가 더욱 아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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