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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趙素昻)-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Jobs 9 2021. 5. 1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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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사상가.

본관은 함안(咸安). 본명은 용은(鏞殷), 자는 경중(敬仲), 소앙(素昻)은 호이다. 1887년 4월 10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정규(趙禎奎)이고, 어머니는 박필양(朴必陽)이다. 일제식민지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광복 후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점으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1919년 3·1민족항쟁에 즈음하여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 부주석으로 선출되고, 한성정부(漢城政府)교통부장에 추대되었다. 4월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민주공화제헌법의 기초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국체와 정체의 이론정립 및 임시정부의 대외홍보 전반에 걸쳐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임시정부헌법·의정원법(議政院法)의 기초위원과 심사위원을 거쳐 초대 국무원 비서장을 역임한 뒤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6월에는 파리에 도착하여 김규식(金奎植)과 외교면에서 괄목할 성과를 올렸다. 만국평화회의 대표단 지원을 비롯하여 만국사회당대회와 국제사회당집행위원회의 활동을 위하여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또 네덜란드로 다니면서 한국의 자주독립과 그 당위성을 역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동당 지도층 인사들과의 폭넓은 교유로 영국 하원에도 한국문제를 정식 제기하도록 활약하였다. 또, 파리에서 철학자 베르그송(Bergson, H.)과 만나고, 런던에서 인도의 타고르(Tagore, R.)와도 만났다. 유럽 순방에 이어 1921년 국제사회당대표단으로 러시아 각지를 시찰한 뒤 모스크바를 경유, 5월 북경(北京)에 와서 공산주의 비판인 ‘만주리선언(滿洲里宣言)’을 발표하고 상해로 돌아와 1922년 임시정부 외무총장·의정원의장이 되고, 세계한인동맹회 회장에 취임하는 한편, 김상옥(金相玉)을 국내에 밀파하여 의거하도록 하였다.

1930년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김구(金九)·안창호(安昌浩)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독자적 이념체계인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입각한 정강·정책의 ‘태극기 민족혁명론’을 제창하였는데, 삼균주의는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다. 한국독립당의 대외선전 및 임시정부의 이론전개와 외교문제를 거의 전담하였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삼균주의를 국시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건국강령’을 채택하게 하였다. 1937년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 1940년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으로서 창당선언에서 삼균주의를 다시 확립하고, 1942년한중문화협회를 창설하여 중국 외교부장 쑨코[孫科]와 손잡고 김규식과 공동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43년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 1945년에는 충칭[重慶]임시정부외무부장이 되었다.

광복을 맞아 12월 1일 임시정부요인 2진으로 환국, 1946년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여 그 의장이 되어 김구 주석과 함께 임시정부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다.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고 한국민족대표자대회와 통합을 이룰 때 다시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또한 반탁투쟁위원회 부위원장과 삼균주의청년동맹 위원장에도 추대되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왔고, 12월 방응모(方應謨)·백홍균(白泓均)·조시원(趙時元) 등과 사회당을 결성하고 당수가 되었다. 1950년 5·30총선에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여 3만4000여 표로 전국최고득표자가 되어 제2대 국회에 진출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서울에서 납북되었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 투옥된 것으로 알려졌다. 1958년 9월 10일 사망했으며 70년대 말 평양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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