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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기 조례, 속도 제한, 규제, 赤旗條例, Red Flag Act, 붉은 깃발법

Jobs 9 2023. 10. 25.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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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기 조례, 속도 제한, 규제, 赤旗條例, Red Flag Act, 붉은 깃발법

 

赤旗條例
Red Flag Act

영국에서 만들어진 법으로 '붉은 깃발법'이라고도 한다. 정식 명칭은 'The Locomotives on Highways Act'. 줄여서 'Locomotive Act'라고도 한다. 3번에 걸쳐 개정되었다. 이른바 '적기조례'라고 알려진 것은 1865년의 2차 개정법률. 

세계 최초의 교통법이지만, 현대에는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널리 알려졌다. 

성격 자체는 러다이트 운동과 비슷하다. 하지만 러다이트 운동은 기득권에 맞선 폭력으로 실행하여 실패한 반면, 적기조례는 정치인에게 로비하여 법이 제정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영향력이 있었다. 

 

1826년 영국에서는 사상 최초로 실용화된 자동차가 등장했다. 증기기관을 탑재한 28인승 자동차였는데, 런던 시내와 인근 도시 간에 정기 노선 버스로 10대가 투입돼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이 증기 자동차가 실용화 단계를 밟을 즈음 현대의 눈으로 보면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법안이 통과돼 막 불이 붙기 시작한 영국의 자동차 산업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시에 증기기관은 놀랄 만한 발명이었다. 이후로 끊임없는 증기자동차를 상용화하고자 노력하여 1820∼40년대에 걸쳐서는 '증기자동차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증기자동차가 보급이 늘어나자 문제가 생겼다. 마부들이 반기를 들고 나선 데다, 종종 증기자동차가 폭발하는 사고도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정된 법이 1865년 선포된 '붉은 깃발 법', '적기법' 등으로도 번역되는 적기조례(Red Flag Act)이다. 자동차가 등장하여 피해를 본 마차업자들이 하도 징징대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이 성은을 내린 것이다.


자동차의 속도와 운송 능력을 마차 시대의 의식 수준에 얽매인 어이없는 규제로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크게 위축되었다. 법안이 선포된 1865년, 자동차는 이미 시속 30 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의 규제로 시속 6.4 km, 그것도 마차 뒤에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영국 땅에서 자동차를 만들고 좋은 자동차를 개발할 의욕을 꺾었다.

말은 생물이기에 기분이 나쁘다거나 기상, 생물, 지형에 의해 놀라면 어디로 꺾여서 돌진할지 모르는 문제가 있다. 그에 비하면 자동차는 운전수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제동거리가 매우 짧았기 때문에 안전성 또한 초기부터 마차에 비하면 매우 높았다.

현대인들은 흔히 당시 마차를 퇴역 경주마가 이끄는 관광마차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운송수단으로 쓰인 마차는 그런 장난감 같은 크기가 아니었다. 당시 차량이 현대 승용차보다 크긴 했지만 마차의 사이즈는 그보다 훨씬 더 컸다. 역용마의 품종은 말 한 마리가 전고 1.8미터에 전장 2미터가 넘어서 말 한 마리가 승용차보다 컸다. 더군다나 마차의 구동방식상 엔진이라 할 수 있는 구동부가 마차 훨씬 앞쪽에 배치되어서 마차에 브레이크를 달아봐야 말이 내달리면 마차가 그대로 뒤집히는 전복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이런 말 4마리가 끄는 역용마차는 현대의 트레일러만 한 크기였다. 마차를 끄는 말들이 어떠한 이유로 놀라서 기수의 제어를 듣지 않고 내달리기 시작하면 말 그대로 브레이크 없는 대형트럭의 폭주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마리 퀴리의 남편이자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피에르 퀴리가 술 취한 마부가 모는 마차에 깔려 현장에서 즉사하여 유명을 달리했는데 이게 불과 117년전인 1906년도에 발생한 사건이다.

이 법은 이후 30여년이나 효력을 발휘했다. 산업 혁명의 발원지로서 다른 나라를 앞서갔던 영국은 최초로 자동차를 상용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적기조례 때문에 아주 간단히 제2차 산업 혁명(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까지)의 주역인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을 프랑스, 독일, 그리고 미국 등에게 빼앗겼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이미 내연기관을 사용하는 자동차를 발명한 데다 대량생산체제까지 갖추어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모델 T로 2백만 대를 찍어내 자동차로 세상을 뒤엎었다는 미국의 포드사가 1905년에 창립되었다.

사양산업인 마차를 보호하고자 입법한 규제가 결국은 마차와 자동차를 모두 잃게 한 셈. 영국은 자기 빼고 발전해가는 주변국들을 돌아보며 아마 땅을 쳤을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 제정된 법은 바꾸기 어려운데 산업이 망하기는 순식간이었다.

1988년에 방송한 KBS 퀴즈박사 자동차 편에도 보면 적기조례 관련 내용이 나온다.(28분 22초~29분 40초 사이)#

이 법이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된 것은 일단 정식 법률절차를 거쳐 '제정'되었다는 이유가 크다. 영국은 의회민주주의가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정착되었고 도시 빈민층이나 서민들도 이러한 정치체제를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마부의 권익을 보호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했다. 그리고 일단 제정된 법을 폐지하기는 제정되지 않도록 막기보다 훨씬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보에 대해서도 비슷한 규제법안을 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전보가 발명되자 당시 연락을 전담하던 전령, 주로 급사라 번역되는 메신저들도 어려움을 겪겠다 싶어서 비슷한 법을 제정해 달라고 호소했다. 어느 토리당 정치인은 '영국은 우수한 급사들이 있기 때문에 전보 따위는 필요없다.'는 말을 남겨 후대에 두고두고 회자되기도 한다. 당시 영국은 산업 혁명의 본산으로서 수많은 발명이 나오고 산업이 급변하던 때였다. 그러나 인클로저 운동이 농노를 도시빈민으로 내몬 것처럼 산업변화에 저소득층은 적응이 곤란해 저항했는데 러다이트 운동처럼 폭력적 수단을 통하기도 했고 합법적 청원과 로비운동을 통해 저항하기도 한 것이다.

 

수정주의적 시각
해당 법안이 실제로 시행된 영국에서는 증기 자동차의 기술적인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관계로 적기조례가 영국의 자동차 산업 발전 정체 및 퇴보에 미친 영향이 적었다는 수정주의적 시각도 있다.

적기조례가 제정된 1865년 당시의 자동차란 증기자동차였다. 칼 벤츠가 세계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 특허를 출원한 건 그보다 20년 후 일이다. 증기자동차는 종종 폭발사고를 일으켰고, 증기의 소음도 시끄러웠으며, 연료가 자주 바닥나는가 하면, 느린 속도로 도로 주행을 방해했고, 보행자와 마차의 안전을 위협했다. 현대로 치자면 트랙터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도로는 지금보다 좁았고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미비하던 시절이라 차가 다니든 말든 사람과 아이들로 도로가 항상 꽉 차 있었다. 이러한 도로 상황에서 육중한 증기자동차가 규제 없이 자유롭게 다니는 것은 도로의 확포장, 신호체계 완비, 대중들의 인식 개선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증기자동차가 자주 사고가 터진 이유가 당시 자동차들은 프로토타입 및 시험주행이라는 개념이 매우 약했다. 아무리 산업 혁명 시절이었다곤 하나 증기자동차가 워낙 비싸서 현재의 자동차처럼 시제품을 운행해보고 문제점 리스트를 개선한 뒤 생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지 않고, 일단 생산부터 하고 결함은 발생할 때마다 땜질식으로 A/S만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증기자동차도 마차처럼 운 없으면 결함이 발생할거라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속도제한 6.4km/h 역시 잘 살펴보면 그렇게 과도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당시 30km/h의 고속을 낼 수 있는 차량은 승용차가 아니라 버스였다. 그것도 최고속력이 그 정도였다. 기술력이 떨어지던 당시 30km/h로 달리다간 차가 고장나기 일쑤였으며 승용차는 당연히 더 느렸다. 19세기 후반 벤츠의 가솔린 자동차조차 최고 16km/h에 불과했다. 따라서 6.4km/h라는 속도제한은 당시 자동차의 최고 속력에 비해 그렇게 과도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최고 50km/h까지 낼 수 있는 말 역시 속도제한을 받았다.

적기조례 제정 당시 영국의 도로 주행조건도 생각보단 좋지 않았다. 최초의 타이어부터 영국의 로버트 W. 톰슨이 비포장도로에서 추락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역마차용으로 1848년에 생고무를 붙여 발명되었다. 자동차의 하중을 견딜 수 있으면서 비포장도로를 주행할 수 있는 타이어는 1895년에 나왔다. 서스펜션도 판스프링이 유일했고, 코일 스프링이나 에어 서스는 1900년대는 되어야 등장했다. 그리고 적기조례가 제정되기 한참 전인 1825년에 스톡턴-달링턴 철도가 개업한 이래로 장거리 고속 주행은 빠르고 편안한 철도가 담당하는 것이 당시 기준에선 당연한 상식이었다. 즉, 위에서 말한 "증기자동차의 황금 시대"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좋은 예시로 아시아권에서는 위에서 혁신적인 기술이라고 하는 증기자동차가 도입된 사례가 거의 없다. 트럭도 처음부터 증기 자동차는 건너뛰고 매우 비싼 연료인 가솔린 엔진으로 도입되었으니... 남아있는 자료들을 보면 아시아권에서는 상업적인 증기자동차는 인도보다 더 동쪽으로 진출하진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도로포장은 아스팔트가 아닌 자갈포장 혹은 로마 가도와 비슷한 마름돌 포장이었다. 무거운 증기자동차, 특히 증기버스가 이 도로를 빠르게 지나가면 도로 포장이 파손되는 경우가 매우 빈번했다. 그것때문에 도로 관리가 매우 안되었고, 특히 민자도로 운영자들의 불만이 높았다. 통행료를 아무리 받아봐야 수리비로 다 까먹으니... 적기조례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의 하나가 민자도로 운영자들이었다. 증기버스 업자들과 엔지니어들이 적기 조례 제정 당시에 증기버스는 바퀴도 넓고 브레이크도 잘되어 있어서 마차가 더 도로파손이 심하다고 뻥을 치다가 중간에 듣고 있던 민자도로 운영자들이 동작 그만 밑장빼기냐고 역습을 해버렸기 때문. 예외적으로 증기트램의 경우는 바퀴가 도로면을 직접 만나지 않고 강철 선로 위를 지나가는 관계로 적기조례에서 제외되었다. 

세계 최초의 자동차 사망자도 증기자동차에서 발생했다. 메리 워드라고 하는 아마추어 과학자였는데, 당시 사망사고가 났을 때의 증기자동차의 속도는 겨우 6km/h였다. 이러니 적기조례가 오래 지속될수 밖에 없었다.

연기나 증기로 말을 놀라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도 이상하지 않다. 당시 말의 위상은 현대의 자동차였다. 반면 증기자동차는 마치 트랙터와 같은 크고 시끄러운 쇳덩어리였고, 증기는 철도의 경적과 같은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오히려 현대의 경적 관련 규제가 당시보다 더 복잡하다.

게다가 증기 자동차는 증기기관 특성상 엔진 자체의 하중 + 당시 재료공학의 한계로 차체 중량이 매우 무거웠다. 마차처럼 목재로 만들 수가 없으므로 말 그대로 쇳덩어리였다. 당연히 법 제정 당시 영국인들은 자동차의 제동거리가 짧거나 제어가 쉽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당시 증기자동차의 제동장치는 매우 원시적이라서 사람이 직접 레버를 작동시켜서 바퀴 접지면 자체를 멈추게 하는 방식이라 제동 성능이 매우 나빴다. 당시의 증기버스가 현대 카운티급의 25인승이었는데, 45인승급의 현대 유니버스와 공차중량이 비슷했다. 

수정주의적 시각은 적기조례 때문에 영국이 자동차 기술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해석도 반박한다. 법안의 정식 명칭부터가 증기차를 제한하는 법령이지 내연기관을 규제하는 법령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후 20세기 자동차 산업의 메카가 될 미국은 정작 더 심한 규제들이 넘쳐났다. 예를 들어 1889년 일리노이주는 자동차나 기차가 시내를 통과할 때 속력을 16km/h 이하, 화물차나 화물기차는 10km/h 이하로 제한했다. 1901년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는 중에도 코네티컷 등 여러 주에서는 시내에선 19km/h, 교외에선 24km/h 등으로 규제했다. 

반대로 적기조례같은 규제가 없었던 프랑스등의 유럽 대륙에서도 증기자동차가 그다지 많이 팔리진 못했다. 이건 증기자동차의 한계 때문인데, 증기차는 가다가 멈추면 물 길어와서 넣고, 물이 수증기가 될 때까지 10분을 기다리고, 다시 가는 것을 반복했기 때문에 빨리 달려봐야 연료소모가 심해서 가성비가 안나왔다. 그래서 증기자동차는 고출력이 필요했던 단거리용 트럭이나 로드 트레인, 또는 농업용 트랙터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적기 조례로 제한 받아 고사했다던 영국의 자동차 산업의 출발선은 적기조례같은 악법 없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던 유럽 본토의 회사들의 설립 시기와 비교해도 몇 년 차이도 나지 않았다. 1910년대에는 유럽 대륙의 증기자동차 선도 국가였던 프랑스와 비슷하거나 앞서기도 했다. 또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극초기까지는 포드 사가 대량생산체제를 만들기 전까지 전세계의 자동차 회사들 중 대량생산체계를 갖춘 곳은 없었고, 모두 소수의 주문생산에 의존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다른 지역은 전쟁으로 박살이 났기 때문에 1950년의 통계에서 영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약 80만대로 세계 2등이었다. 영국의 자동차 산업 멸망을 찾으려면 차라리 브리티시 레일랜드에서 찾는게 더 빠르다.

수정주의적 시각은 마부들의 로비로 적기조례가 제정되었다는 의견도 반박한다. 위에서 서술한 대로 증기자동차의 단점이 워낙 컸기 때문에, 내연기관의 성능이 향상되어 대형 트럭, 버스에도 내연기관을 달고 1920-30년대에 자동차의 연료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뀔 무렵에는 석탄업계 및 증기자동차 조수들이 로비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급속하게 퇴출되었다. 마지막으로 실용적으로 증기자동차를 쓰던 곳은 트럭업계이다. 당시에는 북해 유전을 발견하기 전이라서 영국이 본토 밖에서 석유를 운송하는 운송비+관세가 많이 붙었는데도 결국 증기자동차는 퇴출되었다

 

 

 

적기 조례, 속도 제한, 규제

 

오스트리아의 법학자 유진 에를리히(Eugene Ehrlich: 1862~1922)가 그의 저서 법사회학의 기초 1장에서의 비유해 언급한 내용을 보면, 의사가 되기 위해 각종 질병의 증세와 약제를 암기하는 단계에서 벗어난 이후에는 신체를 자연과학적으로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연구하듯이, 법률가가 되기 위해서도 실용적인 법 공부를 넘어선 법의 과학, 곧 법사회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법사회학의 목적은 실용이 아니라 순수한 인식이며, 법사회학의 연구대상은 법 개념(언어)이 아니라 법 사실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법사회학 이라는 학문은 법과 본질에 대하여 밝혀주며, 따라서 법사회학을 통해 기존의 실정법학 등 실용적인 법학은 많은 도움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을 보다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사례로 흔히 ‘적기 조례’ 라고 알려진 법령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법은 기관 차량 조례(Locomotive Act)라고 불렸으며, 붉은 깃발 법, 적기 조례 또는 적기법(赤旗條例, 赤旗法, 영어: Red Flag Act)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대체로 알려진 바는 이 법안으로 인해 영국의 자동차산업의 발달이 늦어진 것 아니냐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법안은 19세기 중반, 즉 자동차가 발명되기 이전이었던 영국 빅토리아 여왕 재위 기간 중이었던 1861년부터 시행된, 문자 그대로 ‘붉은 깃발(赤旗)’의 사용을 강제한 법령이다.



영국이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인한 산업혁명으로 급속한 산업화 시기에 성능이 높아지고 속도가 빨라진 증기기관 동력 자동차와 같은 새로운 문명 도구의 위험성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령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영국의 도로에서는 대형의 증기자동차가 운행되고 있었고, 소형의 가솔린 자동차는 아직 발명되기 전이었으므로, 크기가 큰 증기자동차가 도로교통과 안전을 위협한다고 판단해 무게, 속도, 너비, 주행 방식 등을 규제한 법률이다. 영국 정부 법률 홈페이지(www.legislation.gov.uk)에 자료로서 게시돼 있는 19세기의 적기 조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와 같다.




-Locomotives Act 1861
증기기관차량은 시속 10마일(시속 16km), 시가지에서는 시속 5마일(시속 8km)의 속도 제한을 부과한다.


-Locomotive Act 1865 (1차 개정된 기관 차량 조례)
1차 개정에서 차량의 중량은 14톤으로 제한한다. 차량의 폭은 2.7미터로 제한한다. 교외에서는 시속 4마일(시속 6km), 시가지에서는 시속 2마일(시속 3km)의 속도 제한을 정한다. 자동차는 전방 60야드(55미터)에서 걷는 사람 3명이 붉은 깃발 또는 랜턴을 가진 사람이 걷는 속도로 운행하며 기수나 말에게 자동차의 접근을 예고하는 것을 규정한다.

-Highways and Locomotives Act 1878 (2차 개정법)
2차 개정에서 붉은 깃발의 필요성은 제거되었으며, 전방 보행 요원의 거리는 20야드(18미터)로 단축한다. 말들을 우연히 만나면 차량은 정지해야 한다. 차량이 말을 놀라게 하는 연기나 증기를 내는 것을 금한다.



이들 내용은 그 시기에 주류의 통행 방식이었던 말과 마차에 중점을 둔 것이고, 그러한 주류의 이동 방식의 도로에서 큰 덩치의 기계에 의한 위험성을 줄이고자 한 법령이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변화하는 기술로 인한 혜택을 인지하지 못했던 현실과 법의 괴리를 대변해주는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19세기의 기관 차량 조례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을까? 이것을 법사회학적 관점으로 본다면, 일상적인 삶, 또는 실제의 삶 속에서의 법의 출현이나 목적, 작동방식 등 사회생활의 총체성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고 할 때, 거리에 등장한 위험한 기계가 선량한 보행자나 마차의 말들을 놀라게 한다면 공익을 해치는 것이므로, 당연히 법으로써 규제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에 만들어진 증기기관은 기술발전의 초기 단계였기에 17세기의 것보다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커서 크기를 줄이기도 어려웠으며, 작동 중에는 배출구에서 증기와 석탄 보일러의 연소 연기를 배출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의 증기 동력 차량은 17세기의 것에 비하면 작아 지긴 했지만, 최초의 증기 기관 동력 차량은 대포를 견인하는 군사적 용도로 제작된 것이어서, 시가지 도로를 주행하는 일은 적었을 것으로 보이나, 1803년에 리처드 트레비딕(Richard Trevithic) 이 제작한 「런던 증기 객차」는 승객을 태우고 시가지를 달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이 증기기관 동력 차량의 크기는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 차량의 자료 그림을 차량 설계용 인체 크기 SAE 95%ile 마네킹 기준으로 맞춘 그리드에 놓고 본다면 「런던 증기 객차」의 전체 길이는 약 5,200mm에 이르고 높이는 약 3,650mm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바퀴 높이도 오늘날의 버스보다도 높아 보인다. 이처럼 큰 차량이 보행자와 함께 도로를 이용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음이 당연하다. 이런 이유에서 적기 조례가 요구된 건지도 모른다.




게다가 1878년의 개정법에서는 증기기관을 가진 차량이 말을 놀라게 하는 연기나 증기를 내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과연 그 시대의 증기기관 기술로 저 법령의 금지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까? 게다가 거리에서 말들을 만나면 차량은 정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내용으로 인해 적기 조례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면 부정적인 내용이 많지만, 반대로 그 당시의 교통환경을 고려하면 오히려 사회적 요구와 크게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견해도 볼 수 있다. 속도 제한이었던 시속 6.4km 역시 그렇게 과도한 것이 아니었는데, 증기자동차의 최고 속도였던 시속 30km는 기술적으로 최고 속력이었으며, 그 속도로 달리면 차가 고장 나기 일쑤였다고 한다. 마차는 최고 속도가 시속 50km까지 가능했지만, 역시 위험성으로 인해 속도 제한을 받았다고 한다.

적기 조례에 대한 비판적 그림을 살펴보면 차량의 바로 앞에서 붉은 깃발을 든 기수가 걷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그가 깃발로써 알리는 차량은 당대의 증기 기관 동력의 차량보다는 훨씬 작은 크기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그려진 차량은 세부 묘사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으나, 1887년에 설립된 프랑스의 자동차 제조사 「파나르 와 르바소(Panhard et. Levassor)」에서 1890년에 내놓았던 차량 「시스템 파나르(System Panhard)」와 유사하다.

이러한 맥락으로 본다면, 적기 조례의 제정은 전반적으로 신기술로 제작된 교통수단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이동수단의 위험성에 대비하기 위한 사회적 요구가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도심지 차량 속도 시속 50km 제한과 스쿨존에서는 시속 30km로 제한하는 법령의 시행에서 참고할 부분이기도 하다.
통계적으로 교통사고 사망자가 줄어들었다는 뉴스를 통해 속도 제한으로 인한 안전성 향상의 효과가 분명히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도심지 차량 속도 시속 50km 제한과 스쿨존(school zone)에서는 시속 30km로 제한하는 법령의 시행으로 우리나라의 교통사고 사망자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속도 제한으로 인해 일반 시민의 일상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기 조례로 속도를 제한 받으면서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독일이나 프랑스에 뒤지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실제로 적기 조례는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증기기관 차량으로 인해 만들어진 법령이었고, 이후 효율적인 휘발유 엔진 자동차의 발명과 함께 석탄을 사용하는 무겁고 위험한 크기의 증기기관 자동차가 사라지면서 적기 조례 역시 20세기 초에 사라지게 된다.

결국 적기 조례의 시행으로 인해 비효율적인 증기기관 동력 자동차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 개발에 대한 요구를 높여 기술발전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적기 조례 라고 불린 법의 시행과 관계된 이야기를 통해 본다면, 사회 문제로부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가 시행되고, 그것은 다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이끌어 낸다. 미래의 모빌리티 역시 사회에서 사람들에 의해 사용된다는 점에서 일상의 안전을 위한 발전의 맥락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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