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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Humanities/서양사 Western History 225

수메르 문명, 수메르인(Sumerians), 우바이드 기, 우르크 기, 우르 제1왕조

수메르 문명 "수메르인"이란 말은 그들의 뒤를 이은 아카드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에 사는 사람을 부르던 말이었다.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웅 상 기가(ùĝ saĝ gíg-ga, 음성학적으로 uŋ saŋ giga) "검은 머리 사람들" 이라고 불렀고, 그들의 땅은 키엔기르(Ki-en-ĝir) "수메르말을 쓰는 사람들의 땅" 이라고 불렀다 수메르(Sumer)는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남쪽 지방으로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 지역이다. 수메르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수메르인은 대략 기원전 5,500년에서 기원전 4,000년 사이부터 수메르 지방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수메르 문명이 가장 융성했던 때는 기원전 제3천년기로, 역사학자들은 통상적으로 이 1000년의 기..

헬레니즘(Hellenism)-그리스-인성(人性), 헤브라이즘 (Hebraism)-히브리-신성(神性) 비교

헬레니즘(Hellenism)-그리스-인성(人性), 헤브라이즘 (Hebraism)-히브리-신성(神性) ⓛ 헬레니즘(Hellenism) ㈀ 발생지 : 그리스 ㈁ 특징 : 인성(人性)을 중시하고, 감성, 지성, 현세, 자아적이다. ㈂ 영향 : 고전주의, 자연주의 등으로 전개된다. ② 헤브라이즘(Hebraism) ㈀ 발생지 : 히브리 ㈁ 특징 : 신성(神性)을 중시하고, 덕성, 내세, 신성적이다. ㈂ 영향 : 낭만주의, 상징주의 등으로 전개된다. * 문예 사조의 계보(系譜) 1. 헬레니즘→고전주의(17C)→신고전주의(주지주의)→사실주의, 자연주의(19C)→(심리주의) 2. 헤브라이즘→낭만주의(18C)→상징주의→유미주의, 실존주의,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비교 헬레니즘(Helle..

영국 요리 악명, 맛없는 영국요리, 청교도 금욕주의

영국 요리 악명 우선, 영국은 지리적 한계로 식재료 풀이 부실했고 향신료 사용이 미비했으며, 요리 문화 자체가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는 식문화로 만들어졌다. 이는 종교 문화와 결부되면서 더욱더 강해졌고 금욕적인 식문화를 미덕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요리에 정성을 들이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게 되었다. 산업 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영국의 국민들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계층이 탄생한 것은, 영국 요리가 변화할 수 있었던 찬스인 근대화 시기에도 이를 저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도시 이주와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하여 그나마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미약했던 전통 농촌사회에서의 식문화마저 상실하고 이를 회복, 유지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또한,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시작해서 빅토리아 시대까지 ..

센추리온(Centurion), 로만 브리튼, 로마의 브리타니아 지배, 로마 9군단

세베루스(Severus)와 함께, 돈으로 황제직을 산 디디우스에게 불복했던 장군은, 알비누스(Albinus)와 니게르(Niger)다. 이들은 모두 코모두스가 로마에서 환락적 생활에 몰두할 때, 그를 대신해서 게르만족들과 싸움에서 큰 공적을 쌓아와서 이 당시에 각기 일리리아(Illyria)와 브리튼(Britain)과 시리아(Syria)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사후 제국을 나누어 가졌다. 세베루스가 가장 먼저 로마로 진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있었던 판노니아 달마티아가 바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접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왕조를 연 세베루스가 자신의 지배를 굳히기 위해서는 나머지 두 세력을 제거해야만 했고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네로 사후에도 비슷한 상태가 있었지만 내전..

로물루스, 레무스, 로마 건국

로마(Roma)라는 이름부터가 로물루스(Romulus)에 접미사 '~a'를 붙인 명칭이다. 즉 '로마=로물루스의 땅'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어드에 나오는 트로이의 함락 당시 트로이의 영웅 아에네아스 Aeneas는 아버지와 아들을 데리고 탈출해서 神의 명령에 따라 이탈리아 라티움 Latium 에 상륙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정착한다. 아예아네스의 16대손 누미토르 왕의 동생 아물리우스 Amulius 가 왕위를 찬탈하고 후손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누미토르의 딸 레아 실비아 Rhea silvia를 베스타 Vesta의 무녀로 만든다. 베스타의 무녀는 평생을 동정녀로 살아야 했는데, 무녀인 실비아는 물을 긷기 위해 숲에 갔다가 군신 마르스 Mars의 눈에 띄어 겁탈을 당하고,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 Romulu..

드레퓌스 사건, 프랑스 유대인 장교, 간첩혐의 무죄, E.졸라, 나는 고발한다

19세기 말 프랑스 제3공화국이 독일과의 전후 관계에서 유대인 혈통의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에게 스파이 혐의를 부당하게 씌우면서 이를 둘러싸고 프랑스에서 극심한 정치/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당사자인 드레퓌스가 석방된 후에도 이 사건은 오랫동안 프랑스 내부의 치열한 논쟁 거리로 남았다. 근대 이래 인권과 연대를 표방하던 프랑스에서의 반유대주의가 극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 사건이며 후대의 인권운동과 시오니즘의 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말 (1894년 부터 시작) 프랑스 유대인 장교 참모본부 근무 드레퓌스 간첩혐의로 종신유형을 선고받았다가 10년 만에 무죄로 풀려남 개인의 석방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확대되면서 드레퓌스파, 즉 사회당, 급진당이 승리 군 수뇌부 등 국수주의자들의 진상 은폐 1..

프랑스 혁명, 프랑스 요리, 프렌치 퀴진, 레스토랑, 미식가, 보빌리에, 프랑스 요리 특징

유명한 미식가들의 대부분이 19세기 파리라는 거의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서 살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시대 파리의 식문화가 무르익은 데에는 역사적인 사연이 있었다. 바로 프랑스혁명이다. 1789년에 파리 민중이 일으킨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혁명을 상징하는 투쟁의 시작이었는데, 이에 앞서 1782년 프로방스 백작의 요리사였던 보빌리에 Beauvilliers라는 사람이 세계 최초로 '레스토랑'을 개업했다. 원래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레스토랑이라는 명칭을 쓴 것은, 보빌리에 가 개업하기 1세기 전, 어느 술집 주인이 '원기를 회복시켜준다'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레스토랑이란 단어를 수프 이름에 붙여 가게 간판에 내건 것이 시작이다. 하지만 혁명 전날 저녁까지는 손님의 취향..

아리스토텔레스,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 기독교 고리대금 죄, 유대인, 금융업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죄악시했습니다. 당대 지식인이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화폐불임 이론(doctrine of the sterility of money)’으로 자기 논리를 무장했습니다. 그는 동식물은 자연스럽게 번식할 수 있지만, 화폐가 증식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봤습니다.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대출과 대부는 그에게 부도덕한 행위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상업을 통한 이윤 획득도 비난했습니다. 이윤을 위한 생산이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용을 위한 생산이야말로 중요하다고 본 것이죠. 상인과 장사꾼을 사악한 존재로 본 철학자였습니다. 경제에 관한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소 무지했다는 게 정설입니다. 중세 기독교에선 '이자 받으면 죄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서양 사상에 ..

마야 문명, 아즈텍 문명, 잉카 문명 비교, 마야 달력, 테노치티틀란, 아즈텍 인신공양, 아즈텍 케찰코아틀 신전, 잉카 마추픽추, 잉카 비라코차 신

마야 문명, 아즈텍 문명, 잉카 문명 비교 ● 마야 문명 지금의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 멕시코 중부 ~ 중앙아메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번성했던 문명이다. 마야문명이 번영했던 지역은 현재 멕시코 동남부의 5개 주(치아파스 주, 타바스코 주, 캄페체 주, 유카탄 주, 킨타나 로오 주)에서부터 과테말라, 벨리즈, 엘살바도르 북부, 온두라스 서부 일부 지역에 걸쳐 있었다. ● 아즈텍 문명 멕시코 고원에서는 아즈텍 문명이 발생했는데 아즈텍인들은 호수 위의 섬에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건설했습니다 아즈텍 제국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인근 부족들을 강압적으로 지배했으며 부족들의 연방제 , 토지 공동소유 , 중미와 북미 사이 장거리 교역으로 발전합니다 [아즈텍 제국의 인신공양] 아즈텍 제국의 종교는 다신교..

기독교 금요일 어식, 청어, 네덜란드의 부흥

기독교 금요일 어식, 청어 성경에는 유독 물고기가 많이 등장한다. 다섯 개의 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 대표적이다. 이와 유사한 기적은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마태복음’ 15장에서도 소개되는데 떡 7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4000명을 먹였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 로마의 수도였던 라벤나(Ravenna)의 6세기경 그려진 최후의 만찬 모자이크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식탁 중심에 새겨져 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제자들 앞에서 육신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보이고 먹은 음식 또한 생선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 육식에 반해 물고기는 기독교의 중요 식문화로 자리 잡아 빈번히 언급됐다. 그렇다면 어째서 물고기가 기독교 식문화..

한자동맹 [Hansa 同盟], Hanseatic League

한자(Hansa)는 13세기 초에서 17세기까지 독일 북부 도시들을 중심으로 여러 도시들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무역 공동체이다. 본래 한제(Hanse)는 중세 독일의 도시에서 활동하던 상회(商會, 상인 조합)를 이르며, 이들은 서쪽으로는 영국, 동쪽으로는 발트 해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자체적인 해군을 보유하여 교역로을 독점하면서 대항해시대 이전 중세 유럽의 유력자로 자리잡았다. 한자동맹 [Hansa, ― 同盟] (영) Hanseatic League. Hansa는 Hanse라고도 씀. 독일 북부의 도시들과 외국에 있는 독일의 상업집단이 상호교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창설한 조직. 13~15세기에 북유럽의 중요한 경제적·정치적 세력이었다(독일어 Hanse는 '무리'나 '친구'라는 뜻의 고트어에서 유래한 중세 ..

사제왕 요한, 동방 기독교 왕국, 프레스터 존, Prester John

사제왕 요한(Presbyter Johannes) 전설은 중세 시대에 동방(東方) 어딘가에 거대하고 풍요로운 기독교 왕국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제왕 요한의 이야기는 12세기 초반에서 17세기 초반까지 유럽에서 유행했다. 동방의 무슬림과 온갖 이교도들의 나라 너머에 있다는 이 기독교 왕국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중세 시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여러 판타지가 섞여있다. 전설에 따르면 사제왕 요한은 세 명의 동방 박사 중 한 명의 후손이며, 관대한 군주이며 덕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부유한 왕국은 청춘의 샘 같은 온갖 신기한 것들로 가득하며 에덴 동산에 맞닿아 있었다고 한다. 몽골이 사실상 공중분해되면서 아시아 지역에서 사제..

프랑스 발루아-앙굴렘 왕조, 이탈리아 전쟁, 프랑스-오스만 동맹, 프랑스 르네상스,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프랑수아 1세 시대 즉위와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창건 AD 1494년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방계인 앙굴렘 백작 샤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앙굴렘 가문은 발루아-오를레앙 왕조의 시조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차남인 장을 시조로 하고 있었다. 프랑수아 1세는 장의 손자로서 프랑스 왕 루이 12세에게는 5촌 조카에 해당되었는데 프랑수아 1세가 아버지 샤를을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AD 1496년 2살의 어린 나이에 앙굴렘 백작이 되었다. 당시 루이 12세는 세 명의 아내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한 채 말년까지 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만약을 대비하여 가장 가까운 친족인 프랑수아 1세를 잠재적인 왕위계승 후보자로 여기며 AD 1499년 프랑수아 1세를 발루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에 ..

합스부르크 왕가, 카를 5세 시대, 신성로마황제, 종교 개혁, 합스부르크 왕가 분할, 스페인, 오스트리아

카를 5세의 상속에 의한 합스부르크 대제국 건설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부르고뉴 공작령 상속 AD 1500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프 1세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의 상속녀 후아나 사이에서 카를로스가 태어났다. 펠리페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 공작령의 상속녀 마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고 후아나는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가 결혼하여 낳은 딸이었다. 이렇게 복잡한 혈통을 이어받은 카를로스는 오스트리아 기반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고뉴 공작령의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아라곤 왕국 및 카스티야 왕국의 트라스타마라 왕가에 대한 상속권을 모두 보유하게 되었다. AD 1482년 펠리페 1세는 그의 모후인 마리가 사망하자 부르고뉴 공작령을 ..

오스만 제국 전성기, 바예지드 2세, 셀림 1세, 제10대 술탄 쉴레이만 대제

제8대 술탄 바예지드 2세 시대 바예지드 2세는 메메드 2세의 장자로서 말년의 아버지가 사이가 안 좋았으나 AD 1481년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는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궁정관리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오스만 제국의 제8대 술탄이 될 수 있었다. 바예지드 2세 즉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유럽 쪽 영토는 육로로는 헝가리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맞대고 있었고 바다로는 베네치아 공화국 및 로도스 기사단(옛 성 요한 기사단)과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바예지드 2세는 아버지의 팽창정책을 이어받아 AD 1483년 보스니아의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하였고 AD 1484년에는 크림한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도나우 강과 드네스트르 강 요새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또한 AD 1499년부터 AD 1503년까지..

오스만 제국, 발칸반도, 동로마 제국 멸망

제5대 술탄 메메드 1세 시대 AD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가 티무르에게 패배하고 바예지드 1세 자신은 포로가 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분열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티무르가 오스만 제국을 바예지드 1세의 세 아들이 분할하여 통치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는데, 장남인 슐레이만이 루멜리아(발칸반도 점령지)를, 차남인 메메드는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의 아마시아를, 그리고 삼남인 이사는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의 부르사를 각각 다스리도록 하였다. AD 1405년 메메드가 이사를 물리치고 부르사를 차지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 영토를 통합하였지만 바예지드 1세와 함께 포로로 붙잡혔다가 풀려난 막내 무사가 AD 1410년 슐레이만을 물리치고 발칸반도 영토를 장악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

발트 3국,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발트 3국은 유럽 중부와 동부와 북부 사이, 독일과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 반도 사이 동부 발트 지역에 위치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세 국가를 가리키는 단어다. 다른 나라에서도 '발트 3국'에 해당하는 표현은 있지만 대체로 '발트(해) 국가'에 해당하는 표현(영어의 Three Baltic States 등)을 쓴다. 과거 이 지역 전체를 가리키던 명칭인 리보니아(Livonia)라고 부르기도 한다. 20세기 초반에는 핀란드도 발트 3국과 함께 묶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핀란드는 중립국이 된 반면 발트 3국은 소련에 복속되어 공산권 블록에 속하게 됨으로써 발트 3국과 핀란드는 더이상 같이 묶이지 않게 되었다. 발트 3국은 단순한 지리적 단어 그 이상의 국가간 협력체로, 국제무대에서 서로의 입..

리투아니아 대공국 ,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는 한 나라, 벨라루스-리투아니아 관계

리투아니아 대공국 당시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는 한 나라였다. 리투아니아인과 중세 루테니아인들은 언어와 종교가 달랐지만 둘 다 공통의 적인 타타르인과 튜튼 기사단에 대항해 협력하는 사이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성문법에는 "리투아니아인과 사모기티아인과 루테니아인은 상호간의 평등한 권리를 누리고 보장한다."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으며, 벨라루스 민족주의자들의 성웅 프란시스크 스카리나는 빌뉴스에서 인쇄소를 차렸다. 중세 리투아니아 역사와 벨라루스 역사는 거의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역사마냥 상당부분 겹친다.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당시에 귀족들의 권한이 커지고 벨라루스 지역에 대해 농민들을 탄압하다보니 벨라루스에서도 반발하게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쇠퇴하면서 벨라루스 지역은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

체코, 보헤미아 후스전쟁, 얀 후스 교회개혁운동, 얀 지슈카 수레진 전술

보헤미아의 교회개혁운동 유럽교회의 분열와 존 위클리프의 교회개혁운동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한창 중이던 AD 1378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후임을 두고 로마 추기경단과 프랑스 추기경단이 대립하여 각자 교황을 옹립하는 '유럽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난다. 잉글랜드가 로마계열 교황과 그 후임을 지지하면서 프랑스와 대립하였기에 유럽세계 전체가 둘로 나뉘어졌고 이로 인하여 교회의 분열은 단순히 종교상 문제가 아니라 국가 간의 문제로 발전하였다. AD 1409년 피사에서 종교회의가 열려 로마계열 교황 그레고리우스 12세와 아비뇽계열 교황 베네딕토 13세 양측 모두를 파면하고 새롭게 통일교황으로 밀라노주교인 알렉산더 5세를 선출하였으나 두 교황 모두 이를 거부하면서 교황이 동시에 3명의 존재하는 더 큰 혼..

백년전쟁, 잔다르크, 프랑스 승리

위기의 도팽 샤를 샤를은 프랑스 샤를 6세와 왕후인 바이에른의 이자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명의 형이 차례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AD 1417년 프랑스에서 왕세자를 뜻하는 도팽의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AD 1418년 5월에 부르고뉴파가 파리를 장악하자 아르마냐크파와 함께 부르주로 달아나야 했다. 당시 프랑스는 잉글랜드 헨리 5세에게 아쟁쿠르 전투(AD 1415년)에서 대패를 당한 이후 북부지방을 차례로 점령당하던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팽 샤를은 부르고뉴파와의 화해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AD 1419년 9월에 아르마냐크파가 부르고뉴파의 수장인 공작 장 1세를 회담장에서 살해해버리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도팽 샤를이 얼마만큼 관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암살은 샤를..

잉글랜드 헨리 5세와 아쟁쿠르 전투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의 내분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의 단절과 랭커스터 왕가의 시작 AD 14세기 후반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위에 오른 리처드 2세와 샤를 6세 모두 미성년이었기에 왕족과 귀족들이 후견을 맡았다. 잉글랜드 경우는 숙부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이 통치권을 장악하였으나 곧 리처드 2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통치역량을 발휘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AD 1381년에는 와트타일러의 주도하에 농민반난이 발생하여 한 때 런던까지 점령당했으나 침착하게 와트 타일러와 협상을 벌여 시간을 번 후 반란을 토벌한 일이었다. 이에 AD 1386년 잉글랜드 의회는 11인 위원회를 만들어 리처드 2세의 활동을 감시하기 시작했으나 AD 1389년 성년이 되자 즉시 랭커스터 공작으로부터 통치권을 ..

백년전쟁의 시작, 흑태자 에드워드, 브레티니-칼레 조약

백년전쟁의 발발 원인 카페왕조 직계혈통의 단절 AD 12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프랑스내 잉글랜드 영토를 둘러싼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와 프랑스 카페 왕가의 대결은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잉글랜드의 실지왕 존으로부터 프랑스 남서부의 기옌과 가스코뉴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를 탈환하면서 카페 왕가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필리프 4세(AD 1268년 ~ AD 1314년)는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고 과감한 정책을 펴면서 왕권이 크게 신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필리프 4세 사후 세 아들(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이 모두 단명했기 때문에 갑자기 카페 왕가의 직계혈통이 단절되었다. AD 1328년 카페 왕가의 마지막 왕인 샤를 4세가 3명의 딸을 남기고 죽었으나 프랑스의 오랜 법전인 프랑크족의 살리..

스위스 독립전쟁, 장창 보병, 스위스 용병

스위스의 초기역사 고대의 스위스 BC 5세기 경에 갈리아족의 한 갈래인 헬베티족이 현재 스위스의 서부에 정착하고 라에티족이 동부지역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스위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부의 헬베티족이 AD 58년에 로마제국의 카이사르에게 패배하면서 스위스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AD 4세기 경에는 그리스도교화가 되었다. 현재 스위스의 공식명칭인 헬베티아 연방은 헬베티족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AD 5세기경에 일어난 게르만족 대이동 과정에서 서부지역의 부르군트족과 동부지역의 알라만족, 남부지역의 랑고바르드족이 정착하면서 현재의 민족구성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부르군트족은 라틴화된 반면에 알라만족은 게르만 전통을 유지했기 때문에 스위스의 언어가 현재와 같이 복잡한 구성을 갖게 되었다. AD 8세기 카롤루..

카이로의 번영, 맘루크 왕조 바이바르스 1세 시대

맘루크 왕조의 탄생 맘루크의 등장 중세시대 이슬람 국가들은 군사력을 주로 맘루크라고 부르는 노예병사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맘루크는 어린 시절에 팔려와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군사훈련을 받은 남자 노예를 지칭하는 말로 아랍어로는 '소유되었다'는 의미였다. 처음에 투르크족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점차 체르케스, 동로마 제국, 쿠르드, 슬라브 등 출신들도 맘루크로 키워졌다. 맘루크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무타심(재위 833년 ~ AD 842년)에 의해 칼리프의 친위대로 선발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본래 고아로 혈연적, 지연적 연고가 없었던 만큼 오직 자신의 주인에게만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칼리프의 친위대로는 적격이었다. 또한 기본적으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만으로 선발하여 철저하게 훈련되었기 때문에 노..

계속된 십자군의 실패, 제6차 십자군, 제8차 십자군, 교황권의 몰락, 아비뇽 유수

계속된 십자군의 실패 제5차 십자군 AD 1218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요청으로 프랑스와 독일 귀족을 중심으로 제5차 십자군이 구성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후신인 아크레 왕국의 장 드 브리엔느를 중심으로 이슬람교의 본거지가 된 이집트를 공략하여 AD 1219년에는 나일 강 근처의 다미에타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수를 만나 카이로로 진격하지는 못하고 말았고 결국 8년간의 휴전에 합의한 채 아무런 성과없이 철군하고 말았다. 제5차 십자군은 교황이 조직한 마지막 십자군이 되었다. 한편 당시 유럽에는 동방의 사제왕 요한의 전설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사제왕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시 방문한 세 명의 동방 박사 중 한 명의 후손으로 부유한 그리스도교 왕국의 군주로 덕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전해졌다...

카노사의 굴욕, 하인리히 4세 복수,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아나니 사건

카노사의 굴욕 카노사의 굴욕(Road to Canossa, Walk to Canossa, Humiliation of Canossa)은 1077년 1월 28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을 말한다.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을 둘러싸고 독일왕과 교황이 서로 대립하던 중에 발생하였다. 교황권력이 황제권력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전환기에 벌어진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하인리히 4세는 굴욕을 맛보았으나 독일에서의 권력 장악에 성공한 후 1084년 로마를 탈환하여 교황을 폐위하며 복수를 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로마를 떠나 이듬해 망명지에서 쓸쓸히 객사하였다. 카노사 굴욕을 세속 군주가 굴..

실로암, 아랍어 Siloan, 영어 Siloam, 실로암 의미

실로암은 히브리어(솰하)에서 유래되어 ‘보내다, 말씀을 보내다’는 의미 실로암( 영어: Siloam, Silwan)은 동예루살렘의 대부분 팔레스타인의 이웃 지역으로, 예루살렘 옛 시가지의 교외에 위치해 있다. 히브리어 성경과 신약성경에 언급된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의 나서부터 맹인인 자를 고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의 실로암은 농촌 마을로서 시작하였으며 지역 전통에 따르면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 이 지역이 처음 언급된 것은 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이후로 이 마을은 천천히 예루살렘으로 통합되었다가 도시 인접 지역이 되었다. 1948년 전쟁 이후 이 마을은 요르단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1967년 6일 전쟁에 이를 때까지 이 통치는 지속되었다가 이후로는 이스라엘이 점유해오고 있다.

십자군의 변질, 제4차 십자군, 비잔틴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라틴제국, 비잔티움 제국 망명정권

제4차 십자군의 불안한 결성 서유럽의 대표적인 강대국인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잉글랜드가 모두 참여한 제3차 십자군 원정이 결국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면서 십자군의 열기도 시들해졌다. 성지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슬람 세력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으나 AD 1198년 교황이 된 인노첸시오 3세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모집에 호응하는 군주가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서임권을 둘러싸고 여전히 교황과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서로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D 1201년 프랑스 상파뉴에서 열린 마상시합을 계기로 상파뉴의 백작 티보를 중심으로 한 제4차 십자군이 겨우 조직되었다. 상파튜의 티보와 블루아의 루이가 주축이 되었으며 플랑드르의 보두앵을 비롯한 70여..

살라흐 앗 딘, 리처드 1세, 제3차 십자군 전쟁

살라흐 앗 딘의 등장 아이유브 왕조 창건 살라흐 앗 딘의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로 AD 1138년 티크리트의 쿠르드 가문에서 태아났다. 살라흐 앗 딘은 아버지 나짐 앗 딘 아이유브가 이마드 앗 딘 장기의 부하가 되면서 다마스쿠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숙부인 시르쿠를 따라 이집트 공격에 나서면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AD 1169년 시르쿠가 이집트를 점령한 지 얼마 안되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살라흐 앗 딘은 31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집트의 군사령관이자 와지르로 임명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이집트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대내외적으로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이를 효과적으로 대처하면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내었다. 우선 흑인 내시장인 네자흐가 궁정반란을 ..

이슬람의 반격, 제2차 십자군 전쟁

이마드 앗딘 장기의 장기왕조 등장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십자군 자체의 힘 보다는 이슬람 세계의 분열에 힘입은 바가 컸다. 당시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실권을 빼앗긴 채 종교적인 권위만을 인정받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고, 칼리프를 대신하여 세속적인 권한을 행사하던 셀주크 왕조도 왕위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중앙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지방 총독(아타베그 혹은 아미르)들이 중앙정부의 지배를 거부한 채 서로 영토를 다투며 살아가기 시작했고 결국 분열된 이슬람 세계로서는 갑작스런 십자군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도 점차 저력을 발휘하여 십자군이 세운 십자군 국가에 대항하는 반격이 시작되었는데, 그 중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것이 바로 이마드 아딘 장기(일명 장기)가 세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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