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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7장 동방의 미술 - 2세기에서 13세기까지: 이슬람과 중국

Jobs 9 2024. 1. 22.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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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동방의 미술

—2세기에서 13세기까지: 이슬람과 중국

 

 

90. <이슬람 궁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에 있는 사자궁>, 1377년 건축, 스페인

 

유럽 사람들의 정신을 그렇게 사로잡았던 형상의 문제에 대해서 다른 두 위대한 종교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7세기와 8세기에 그 이전 시대의 모든 것을 다 휩쓸어버리고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을 정복한 중동의 종교인 이슬람 교는 이 문제에 있어서 기독교보다 훨씬 더 엄격했다.(…) 그러나 금기라고 해서 예술을 그렇게 쉽게 억압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동양의 장인들은 그 대신 문양이나 형태 자체의 아름다움에 그들의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아라베스크라고 알려진 매우 정교한 레이스와 같은 장식을 창조해냈다. 알함브라 궁(도판 90)의 중정과 통로를 거닐며 무진장한 각양 각색의 이러한 장식적인 문양에 감탄하는 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 된다. 회교권 밖에서도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중동의 양탄자(도판 91)를 통해서 이러한 신비한 문양들에 친숙하게 되었다.(…) 후기의 몇몇 회교 종파들은 형상의 금지라는 문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덜 엄격했다. 종교에 관계가 없는 한에 있어서 그들은 인체와 삽화를 그리는 일이 허용되었다. 14세기 이후의 페르시아와 그 뒤에 무굴 왕조 때의 인도에서 제작된 연애나 역사, 우화 등을 묘사한 삽화들은 당시의 화가들이 문양의 디자인에만 국한되었던 훈련에서 배운 바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준다. 144

 

 

93. <연회도>, 150년경. 중국 산둥성 무량사 무덤의 부조에서 탁본

 

1세기를 전후해서 중국에서는 어딘가 이집트 인들을 연상시키는 매장 풍습이 생겨났는데 그 묘실에는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생활과 풍습을 반영하는 생생한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도판 93). 이미 그 당시에 우리가 전형적인 중국 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발전되어 있었다. 중국 미술가들은 딱딱하고 모가 진 이집트 식 표현보다는 부드러운 곡선을 더 선호했다.(…)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그레고리우르 대교황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유사한 미술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미술을 과거의 황금 시대에 있었던 도덕의 위대한 모범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147~148

 

 

96. <나한상>, 1000년경. 거의 실물 크기의 유약 바른 테라코타, 중국 하북성 이현 출토, 전에는 프랑크푸르트 풀트 컬렉션

 

 

중국 미술을 가장 힘있게 자극하고 활기를 불어넣어준 것은 불교의 영향이었다. 불교의 승려나 고행자들은 가끔 놀랄 만큼 사실적인 조상으로 표현되었다(도판 96). 여기에서도 우리는 귀와 입술, 볼의 윤곽을 이루는 곡선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곡선들이 실제 형태를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로 융합시키고 있다.(…) 불교는 그림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법을 도입시켜 미술가의 업적을 매우 존중하게 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는 일을 천한 일로 생각하지 않고 화가를 영감을 받은 시인과 동등한 위치에 놓은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중국의 종교 미술은 중세의 기독교 미술이 그랬던 것처럼 부처의 전설이나 중국 사상가들의 특정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명상의 실천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신앙심이 깊은 미술가들은 어떤 특수한 교리를 가르치거나 단순한 장식으로서가 아니라 깊은 명상의 자료를 제공해주기 위해서 존경의 염으로 산과 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148~150

 

 

97. 마윈, <대월도>, 1200년경. 족자, 비단에 먹물과 물감. 149.7x78.2cm, 타이베이 국립 구궁 박물관

 

중국 미술가들은 소재를 직접 대하고 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 사생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명상과 정신 집중이라는 색다른 방법을 통해서 그들의 예술을 익혔다. 그 과정에서 먼저 그들은 직접적으로 자연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대가들의 작품을 보고 탐구함으로써 ‘소나무’나 ‘바위’, ‘구름’ 등을 그리는 법을 터득했다. 그들은 이런 기법을 완전히 터득한 뒤에야 비로소 여행길에 올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사색하고 그것을 깊이 마음에 새겨 집으로 돌아와서마치 시인이 산책을 하다가 머리에 떠오른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짜맞추어 시를 짓듯이소나무와 바위와 구름에 대한 그들의 이미지들을 한데 결합하여 그 분위를 다시 재현하려고 했다. 그들의 영감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에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을 붓과 먹으로 단숨에 그려낼 수 있는 능락한 필치를 얻는 것이 중국 대가들의 야심이었다. 그들은 종종 같은 비단 두루마리 위에 시를 몇 줄 쓰고 그림도 그렸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그림에서 세세한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현실 세계와 비교하는 것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150~153

 

 

99. 유채로 추정, <세 마리의 물고기>, 1068-85년경. 화첩, 비단에 먹물과 물감, 22.2x22.8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연못 속에서 노니는 세 마리 물고기를 그린 그림(도판 99)은 화가가 이 단순한 소재의 그림을 그리는 데 쏟아부었을 끈기 있는 관찰과 그가 그림을 그릴 때 보인 유유자적한 운필의 숙련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중국의 미술가들이 얼마나 곡선을 좋아했으며 또 운동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곡선의 효과를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형태들은 명확한 대칭적 구도를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153

 

자연에서 몇 개의 단순한 주제를 선정해서 그것을 절도 있게 전개시키는 중국 미술의 방법은 경탄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회화에 대한 사고 방식에도 위험이 수반된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대나무를 그린다든가 또는 험준한 바위를 그리는 필치의 모든 유형이 공식으로 정해지고 전통에 의해서 고정되어 과거의 작품만을 지나치게 찬양한 나머지 미술가들은 점점 더 그들 자신의 영감에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수백 년 동안 중국과 일본에서는 회화의 수준이 계속 상당히 높아졌으나 마치 세련되고 까다로운 놀음도 그 술수가 알려져서 흥미를 잃듯이 예술도 점점 더 그런 식으로 되어갔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와서 서양 미술의 업적을 새로 접하게 되자 비로소 일본 미술가들은 새로운 주제에 이러한 전통적인 동양화 방식들을 응용하기 시작했다. 15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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