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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5장 세계의 정복자들 - 기원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로마, 불교, 유태교 및 기독교 미술

Jobs 9 2024. 1. 22.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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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세계의 정복자들

—기원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로마, 불교, 유태교 및 기독교 미술

 

우리는 앞서 로마의 한 도시였던 폼페이가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을 다양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는 로마 인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헬레니즘 왕국들의 폐허 위에 그들의 제국을 건설하는 동안에도 미술은 그다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에서 작업했던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그리스 인들이었으며 대부분의 로마 수집가들은 그리스 거장들의 작품이나 그 복제품들을 사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세계의 지배자가 되자 미술도 어느 정도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미술가들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으며, 거기에 따라 방법을 채택해야 했다. 로마 인들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아마도 토목 공학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만든 도로나 수로공중 목욕탕 등에 관해 잘 알고 있다. 117

 

 

73.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 80년경. 로마

 

로마 건축물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콜로세움(도판 73)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경기장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것은 일종의 실용적인 구조물로서 내부에 광대한 원형 경기장의 관람석을 받쳐주는 층층이 쌓아올린 세 단의 아치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로마의 건축가는 이 아치들의 정면에 일종의 그리스 식 칸막이 벽을 세웠다. 사실 그는 그리스 신전에 사용되었던 세 가지 건축 양식을 전부 응용했다. 1층은 도리아 식의 변형으로서 메토프와 트리글리프까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층은 이오니아 식이고, 3층과 4층은 코린트 양식의 반원주이다. 117

 

 

74. <티베리우스 황제의 개선문>, 14-37년경. 남부 프랑스, 오랑주

 

로마 인이 그들의 제국 전역에즉 이탈리아프랑스(도판 74), 북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세운 개선물들보다 더 영원한 인상을 남긴 건축물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 건축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유니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콜로세움의 경우도 그렇다. 그러나 개선문에서는 기둥 양식을 사용해서 중앙의 큰 입구를 프레임하여 강조하고, 양 옆의 약간 작은 두 개의 문이 중앙의 큰 문을 장식한다. 117

 

 

75. <로마의 판테온 내부>, 130년경. 18세기 화가 G. P. 판니니의 그림, 코펜하겐 국립 미술관

 

로마 건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아치의 사용이다.(…) 그리스 건축에서는 아치가 거의, 아니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쐐기 모양의 돌로 하나하나 아치를 쌓아올리는 일은 토목공학이 이루어낸 대단히 어려운 업적 중의 하나이다. 일단 이 기술을 습득하게 되자 건축가는 이것을 점점 더 대담한 설계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리나 수로의 기둥들 사이를 아치로 연결시킬 수 있었으며 심지어 이런 방식을 사용해서 궁륭으로 된 천장을 만들 수도 있었다.(…) 가장 경이적인 것은 <판테온>이라 불리우는 만신전이다. 119

 

초상은 로마 인들의 초기 종교에서 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의 장례 행렬에는 선조의 밀랍 초상을 들고 가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이러한 관습은 우리가 고대 이집트에서 본 바와 같이 실제 인물을 닮은 것이 영혼을 보존시켜 준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뒤에 가서 로마가 제국이 되었을 때 황제의 흉상은 종교적인 경외감을 가지고 우러러보아야 했다.(…) 미술가들은 사소한 것에 신경쓰지 않으면서도 실물 같은 초상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121

 

신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종교적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 또 하나의 오리엔트 종교는 유태교였다. 실제로 유태교의 율법은 우상숭배를 경계하여 형상의 제작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부의 도시에 있는 유태 식민지에서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지고 회당의 벽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이런 그림들 중의 하나가 최근에 두라에우로포스라고 불리우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한 작은 로마 수비대의 주둔지에서 발견되었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아니지만 기원후 3세기에서 유래하는 흥미 있는 자료이다.(…) 그는 인물들을 실물같이 보이도록 그리는 데는 실제로 별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주된 의도는 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인 그때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유태교의 회당에서 나온 이 초라한 벽화가 우리들에게 흥미를 주는 까닭은 기독교가 동방에서부터 전파되고 미술을 그 종교적인 목적에 봉사하게 만들었을 때 이와 유사한 사고 방식들이 미술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미술가들이 그들의 구세주와 사도들을 그림으로 그리라는 요청을 처음 받았을 때 그들을 도와준 것은 역시 그리스 미술의 전통이었다. 도판 83는 기원후 4세기경에 나온 아주 초기의 그리스도 상이다. 여기에 보이는 그리스도는 후세의 그림들을 통해서 우리가 친숙하게 알고 있는 수염이 달린 인물이 아니라 젊은 미남으로 표현되어 그리스의 위엄 있는 철학자처럼 보이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이의 왕좌에 앉아 있다. 127~128

 

지하 묘굴의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극적인 장면 그 자체를 위해서 그것을 그리려 하지 않았다. 불굴의 신앙심과 신의 구원을 감동적이고 고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페르시아 옷을 입은 세 남자와 불길,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그리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시 한번 명확성과 단순성의 개념이 충실한 모방이라는 개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129

 

흔히 이 무렵에 고대 미술이 쇠퇴했다고들 말한다. 찬란했던 시대에 개발된 기법상의 많은 법칙들과 예술적인 신비가 전쟁과 반란, 침략이라는 사회 전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상실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단지 이 뒤떨어졌다는 것만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요는 이 시대의 미술가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단순한 묘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효과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고대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기독교의 대두를 눈으로 보았고 마침내 그것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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