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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곰브리치, 2장 영원을 위한 미술 -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크레타, The Story of Art, EH Gombrich, Art for Eternity

Jobs 9 2024. 1. 21.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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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2장 영원을 위한 미술 -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크레타

 

지구상 어디에나 어떤 형태로든 미술은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의 계속적인 노력으로서의 미술 역사는 남프랑스의 동굴 속이나 북아메리카의 인디언 부족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상스러운 기원들과 지금의 우리 시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전통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약 5천 년 전의 나일 강변의 미술을 가옥이나 포스터와 같은 우리 시대의 미술과 연결시켜주는, 즉 거장으로부터 제자에게로, 그 제자로부터 추종자 또는 모방자에게로 전해내려오는 직접적인 전통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의 거장들은 이집트 인들에게서 배웠고 우리는 모두 그리스 인의 제자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집트의 미술이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32. <석회석 두상>, 기원전 2551-2528경. 기자의 한 고분에서 출토, 높이 27.8 cm, 빈 미술사 박물관

 

‘고왕국’의 제4왕조인 피라밋 시대의 초기 초상들 중에는 이집트 미술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들(도판 32)이 속해 있다. 이 작품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그런 엄숙함을 지니고 있다. 이집트의 조각가들은 초상화를 부탁한 사람에게 아첨을 하거나 덧없는 표정을 보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본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 이외의 사소한 세부는 모두 생략해버렸다.(…) 이 기하학적인 규칙성과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의 결합은 모든 이집트 미술의 특징을 형성한다. 우리는 무덤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와 회화에서 이런 점을 제일 잘 연구할 수 있다. 사실 ‘장식’이라는 단어는 죽은 사람의 영혼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게 만들어진 미술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것들은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옛날, 아주 무시무시하고 까마득한 옛날에는 세력자가 죽으면 그의 하인과 노예들을 그의 무덤에 함께 매장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 후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너무나 잔인하고 사치스럽다고 생각되었을 때 미술이 그 구원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지상의 세력자들에게 진짜 하인들 대신에 그 대용물로서 하인들의 형상을 주었다. 

 

이러한 부조와 벽화들은 수천 년 전에 이집트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에 관해서 대단히 생생한 그림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그것을 처음 보는 사람은 오히려 어리둥절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이집트의 미술가들은 실생활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우리와는 아주 다른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완전함이었다.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아주 분명하게, 그리고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 미술가의 과업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어떤 우연한 각도에서 보이는 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그리려 하지 않았다.

 

34. <헤지레의 초상>, 기원전 2778-2723년경. 헤지레 묘실의 나무로 된 문의 일부, 높이 115 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이집트 미술가들은 모든 사물이 가장 특징적인 각도에서 그려져 있다. 도판 34는 이러한 관념이 인체의 표현에 적용된 결과를 보여준다. 우리가 인간의 눈을 생각할 때는 대개 정면에서 본 것을 기억한다고 한다. 그래서 정면에서 본 눈이 얼굴의 측면 그림에 그려져 있다. 신체의 상반신, 즉 어깨와 가슴은 정면에서 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다. 그래야만 두 팔이 몸에 어떻게 붙어 있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과 다리가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측면에서 그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이 그림에서 사람이 그처럼 이상하게 평면적이고 왜곡되어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집트의 미술가들은 양쪽 발을 시각화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엄지 발가락으로부터 위쪽으로 연결되는 발의 분명한 윤곽선을 그리기를 더 선호했다. 그래서 두 다리는 안쪽에서 본 모습으로 그려져 이 부조에 나오는 사람은 마치 두 개의 왼쪽 다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인간의 형태 속에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다 그려넣게 만든 규칙을 따랐을 뿐이다. 

 

이집트 미술가가 그의 그림 속에 구현한 것은 단지 형태나 모양에 대한 그의 지식뿐만 아니라 그 형태들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지식이기도 했다.(…) 이집트 미술가는 우두머리를 그의 하인이나 그의 아내보다 더 크게 그렸다.

 

이집트 미술의 가장 위대한 점 가운데 하나는 모든 조각, 회화, 그리고 건축의 형식들이 마치 한 가지 법칙에 따라 배치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집트 양식은 대단히 엄격한 법칙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미술가는 그것을 어려서부터 배워야 한다. 좌상의 경우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야 하며, 남자의 피부는 여자의 피부보다 더 검게 칠해야 한다. 모든 이집트 신들의 모습도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유일하게 이집트 양식의 철칙들을 뒤흔들어 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집트가 파국적인 침략을 받은 후에 건설된 ‘신왕국’으로 알려진 제18왕조 시대의 왕이었다. 아멘호테프 4세로 불리어지는 이 왕은 이단자였다. 그는 오랜 전통에 의해서 숭상되어온 많은 관습들을 타파했다.(…)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신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아톤으로 그는 이 신을 숭배했고 그를 태양의 모양으로 그리게 했다.(…) 그가 화가들에게 그리게 했던 그림들은 그 신기함으로 인해 그 시대의 이집트인들을 놀라게 했음이 틀림없다. 그 그림들에서는 초기 파라오들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엄숙하고 딱딱한 위엄은 하나도 볼 수 없고 대신에 그가 태양의 신 아톤의 축복을 받으며 아내 네페르티티와 함께 그들의 자녀들을 사랑스럽게 껴안고 있는 모습(도판 40)으로 그려져 있다.

 

 

42. <파라오 투탕카멘과 그의 아내>, 기원전 1330년경,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출토된 왕좌의 일부, 나무에 금박과 채색,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아크나톤의 후계자는 투탕카멘인데 많은 보물들이 들어 있는 그의 무덤이 1922년에 발견되었다. 이들 중 어떤 작품들은 여전히 아톤 종교의 현대적 양식을 띠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특히 가정적인 목가풍의 배경 속에 왕과 왕비를 그려놓은 왕좌의 뒷면(도판 42)이 그러하다. 그가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자세는 엄격한 이집트의 보수주의자들을 아연실색케 했을지도 모른다. 이집트 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힘없이 축 늘어진 채 의자에 기대고 있는 자세이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그보다 작게 그리지 않았으며 그녀의 손을 공손히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있다. 

 

제18왕조 시대에 왕이 이러한 개혁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이집트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훨씬 덜 엄격하고 굳어 있지 않은 외국의 작품들에 주의를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의 섬나라인 크레타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곳의 미술가들은 빠른 운동감을 표현하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 미술의 이러한 해방은 오랫동안 계속되지는 못했다. 이미 투탕카멘의 통치 시대에 옛 종교가 다시 부활되었고 외부 세계로 열린 창문은 다시 닫혀 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테마가 소개되고 새로운 작업이 행해졌지만 미술의 업적에는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새롭게 보태진 것이 없었다. 

 

 


 

2장 영원을 위한 미술 -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크레타

 

1. 지구상 어디에나 미술은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의 계속적인 노력으로서의 미술의 역사는 앞서 밝힌 원시적인 미술들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상스러운 기원들과 현대미술의 사이에는 직접적으로 연결 되는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방’과 ‘전승’의 측면에서 약 5천년 전의 이집트 미술과 현대미술의 사이에는 그러한 전통이 존재한다.

 

2. 우리는 이집트가 피라밋의 나라임을 잘 알고 있다.

[도판 31] <기자(Giza)의 피라밋>, 기원전 2613~2563년경.

< 기자(Giza)의 피라밋 >

그 피라밋들은 우리에게 그 것이 만들어지는 철저히 조직된 과정과 그 과정들이 가능하게 했던 강력한 왕권에 대하여 말해준다. 어떤 왕이나 민족도 단순한 기념물을 위해 그처럼 많은 비용과 공을 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 피라밋의 유구하고 신비스러워 보이는 이면에는 왕의 죽음과 승천, 저 세상에서 지속되는 삶을 위해 보존되어야 할 시신의 보존 처리 등과 같은 실제적인 중요성이 자리하고 있다.

 

3. 그러나 이것만이 미술의 역사에서 유구한 신념들이 수행했던 그런 역할을 대변해 주는 가장 오래된 유적은 아니다. 육체의 보존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믿은 이집트인들은 조각가들로 하여금 단단하고 영원 불멸한 화강암에 왕의 두상을 조각하여 무덤 속에 넣었다. 그리고 왕의 영혼이 그 형상 안에, 그리고 그 형상을 통해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이중으로 갖게 되었다.

 

4. 이러한 의식이 처음에는 왕만의 전유물이었으나 얼마 안 가서 귀족들이나 지위가 있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무덤을 축조하였다.

[도판 32] <석회석 두상>, 기원전 2561-2528년경. 기자의 한 고분에서 출토, 높이 27.8cm, 빈 미술사 박물관

< 석회석 두상 >

고왕국의 제4왕조인 피라밋 시대의 초기 초상들 중에는 이집트 미술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들이 속해있다. 이집트의 조각가들은 본질적인 것들 이외의 사소한 부분들은 과감히 생략 해버렸다. 이러한 작품들의 기하학적 경직성에도 불구하고 원시적이지 않고, 살아있는 실물 같지도 않다.  자연에 대한 관찰과 도판 전체의 규칙성이 고르게 균형을 이루어 마치 살아있는 것과 같은 동시에 아득하고 영원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5. 기하학적인 규칙성과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의 결합은 이집트 미술의 특징을 형성한다. 이집트 미술에서 무덤의 벽면을 장식한 부조와 회화에서는 이점을 잘 연구할 수 있는데, 이 것들은 감상을 위한 것이 아닌, 죽은 자들을 ‘살아있도록’하기 위해 기능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세력가들은 부장품과 순장의 대용물로서 그림과 인형들을 제작하였다.

 

6. 이러한 부조와 벽화들은 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표현해내지만, 그 표현 방법 때문에 생경하게 느껴진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 아닌 완전함이었으며 이는 그림이 가지는 목적과 관련이 있다. 그림의 대상이 완전하고 분명한 모습으로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였던 그들은 그림을 그릴 때 보이는 대로의 자연의 모습이 아닌, 엄격한 규칙에 따라 기억을 더듬어 그렸다.

[도판 33] <네바문의 정원>, 기원전 1400년경. 테베(Thebes)의 고분 벽화, 64*74.2cm, 런던 대영 박물관

< 네바문의 정원 >

 

7. 이집트 미술가들의 그림 그리는 방식은 어린이들의 방법과 유사하지만 더욱 일관성 있고 규칙적이다. 그들은 인체를 표현할 때, 가장 그 특징적인 모습과 형태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시점에서 대상을 묘사하였다.

[도판 34] <헤지레의 초상>, 기원전 2778-2723년경. 헤지레 묘실의 나무로 된 문의 일부, 높이 115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그리하여 그들의 인체상은 정면과 측면이 혼재되어 있고 왜곡되어 보이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가진 인간의 모습에  대한 관념이 아닌, 규칙에 따른 것이며 이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대상을 완전한 모습으로 그려야만 그들이 사후세계에서 온전히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8. 이집트 미술은 미술가가 주어진 한 순간에 무엇을 볼 수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는 지식에 에 기반했다 . 이집트 미술가가 그림 속에 구현한 것은 형태에 대한 지식을 넘어서서 각각의 형태들이 가진  중요성을  구분했다.

 

9. 이러한 규칙과 관례를 이해하면 이집트인들의 생활사가 기록된 도판들을 이해할 수 있다.

[도판 35] <크눔호텝 묘실의 벽면>, 기원전 1900년경. 베니하산 부근. 1842년 카를 렙시우스가 출판한 <유물(Denkmaler)>에 실린 삽화에서 발췌.

[도판 36] 도판 35(크눔호텔 묘실 벽화) 부분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어떤 고관의 무덤 벽화. 상형문자를 통해 그의 살아생전 신상정보와 그의 영웅적 에피소드를 읽어낼 수 있다.

 

10. 우리가 이러한 이집트 그림을 보는 데 익숙해진다면, 그림의 형상이 얼마나 리얼한가는 그림을 이해하는 것에 상관없다. 그림 안의 요소들은 내용전달을 위해 불필요한 것 없이 구조적이고 계획적이다. 이집트 미술가들은 그림에 그물망 레이어를 그려넣어 작업을 한다. 인물과 동식물의 배치, 형태를 특유의 질서를 기반으로 오늘날까지도 명확히 개별적 특징을 알아볼 수 있게 그려냈다.

[도판 37] <나무 위의 새들>, 도판35(크눔호텔 묘실 벽화)의 부분, 니나 먹퍼슨 데이비스가 원화를 본떠 그린 그림

이는 엄청난 지식정보를 포함하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패턴(patten)양식에 대한 이집트 예술가의 날카로운 안목이다.

 

11. 이집트 미술의 가장 위대한 점 가운데 하나는 모든 조각, 회화, 그리고 건축의 형식들이 하나의 양식을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하나의 양식을 구성하는 것을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모든 이집트 미술을 지배하는 규칙들은 개개의 작품에 균형과 엄숙한 조화라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12. 이집트의 양식은 대단히 엄격한 법칙들로 구성되어 모든 미술가는 그것을 어려서부터 배워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일단 이런 규칙들을 완전히 터득하게 되면 그의 수습 생활은 끝난다. 아무도 그가 배운 것과 다르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또 그에게 독창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과거에 추앙을 받았던 기념비들과 가장 비슷한 조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미술가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3천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는 기간동안 이집트 미술은 거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도판 38] 죽은 자의 심장의 무게를 재는 일을 감독하고 있는 자칼 머리 모양의 신(神)인 아누비스와 오른쪽에서 그 결과를 기록하고 있는 따오기 두상의 전령신인 토트(Thoth), 기원전 1285년경. 죽은 자의 고분에 안치된 두루마리 그림인 <사자의 서>에 나오는 한 장면, 기원전 1285년경. 높이 39.8cm, 런던 대영 박물관

 

13. 그런데 유일하게 이집트 양식의 철칙들을 뒤흔들어 놓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집트가 파국적인 침략을 받은 후에 건설된 ‘신왕국’으로 알려진 제 18왕조 시대의 왕 아멘호테프이다. 그는 그의 백성들이 믿는 이상하게 생긴 많은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신 그에게 있어 유일한 신인 아톤(Aton)을 최고의 권위를 가진 신으로서 태양의 모양으로 그리게 하였다. 그는 이 신의 이름을 본 따서 아크나톤(Akhnaton) 이라고 불렀다.

 

14. 그가 화가들에게 그리게 했던 그림들은 그 신기함으로 인해 그 시대의 이집트 인들을 놀라게 했음이 틀림없다. 그 그림들에서는 초기 파라오들의 그림들에서 발견되는 엄숙하고 딱딱한 위엄은 하나도 볼 수 없고 그의 초상들 중에는 그를 못생긴 사람으로 표현 한 것도 있다.

[도판 39]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 기원전 1360년경. 석회석 부조, 높이 14cm, 베를린 국립 미술관, 이집트관

[도판 40] <딸들을 안고 있는 아크나톤과 네르페티티>, 기원전 1345년경. 석회석, 제단 부조, 32.5*39cm, 베를린 국립 미술관, 이집트관

그것은 아마도 그가 미술가들에게 인간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으로 그리라고 허락했거나 아니면 그는 예언자로서의 그의 독특한 중요성을 대단히 확신했기 때문에 그의 실제 모습을 주장했을 지도 모른다.

아크나톤의 후계자인 투탕카멘왕의 무덤에서도 어떤 작품들은 여전히 아톤종교의 현대적 양식을 띄고 있는 것들이 있는 것이 있는데 특히 가정적인 목가풍의 배경에 흐트러진 왕의 비스듬한 앉은 자세와 왕보다 작지 않게 그려진 왕비의 모습이다.

[도판 41] <파라오 투탕카멘과 그의 아내>, 기원전 1330년경.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출토된 왕좌의 일부, 나무에 금박과 채색,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15. 제 18 왕조 시대에 왕이 이러한 개혁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이집트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훨씬 덜 엄격하고 굳어있지 않으며 빠른 운동감을 표현하는 데 기쁨을 느끼는 외국의 섬나라인 크레타(Creta ) 인 들의 작품들에 주의를 돌렸기 때문이다. 이들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운동감과 유연함이  당시 신성한 규범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던 이집트의 장인들을 감동시켰음이 틀림없다.

[도판 42] <단검>, 기원전 1600년경. 미케네 출토, 청동에 금과 은과 흑금으로 상감, 길이 23.8cm,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16. 그러나 이집트 미술의 이러한 해방은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못했다.  이미 투탕카멘의 통치 시대에 옛 종교가 다시 부활되었고 외부 세계로 열린 창문이 다시 닫혀 그의 시대 이전에 천 년이나 지속된 양식이 이후로 다시 천 년이상 지속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양식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새로운 테마가 시작되고 새로운 작업이 행해졌지만 미술의 업적에는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새롭게 보태진 것이 없었다.

 

17. 물론 이집트는 수천 년 동안 근동에 존재했던 거대하고 강력한 제국들 중의 하나에불과하다. 그리스 말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의 계곡을 의미하는 메소포타미아의 미술은 이집트의 미술보다 덜 알려져있다. 이 계곡에 채석장이 없어 구운 벽돌로 만들어진 당시의 미술품이 풍화작용으로 먼지가 된 이유도 있지만 주요한 이유는 아마도 이 민족들은 이집트 인처럼 인간의 영혼이 계속해서 살아가려면 육체와 그 형상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수메르 족이라고 불리우는 한 민족이 고대도시 우르(Ur)를 통치했던 상고시대에는 왕이 죽으면 저승에서도 사람들을 거느릴 수 있도록 모든 가족들과 노예들을 함께 매장했었다. 이 시대의 무덤들이 발견되어 현재는 대영박물관에서 이 고대의 야만적 왕들이 그들의 왕궁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고도로 세련된 미술적 솜씨가 원시적인 미신이나 잔인성과 공존할 수 있었는지 볼 수 있다. 예를들어 이 무덤들 중의 하나에서 발견된 상상의 동물들로 장식된 하프가 발견되었다.

[도판 43] <하프>의 부분, 기원전 2600년경. 나무에 금박과 상감, 우르에서 출토, 런던 대영 박물관

이것은 전체적인 모습이나 배치방식에 있어서도 우리의 문장과 흡사한데 수메르족은 좌우의 대칭과 정확성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또 그림에 보이는 장면들이 매우 엄숙하고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18. 메소포타미아의 미술가들은 이집트 인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통치자가 내세에서도 계속 살 수 있도록 해야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전쟁에 패한 종족과 빼앗은 전리품에 대해 기록한 전승비를 세우도록 했다.

[도판 44] <국왕 나람신의 기념비>, 기원전 2270년경. 수사 출토, 돌, 높이 200cm, 파리 루브르

이러한 기념비(국왕 나람신의 기념비)는 승전의 기억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왕이 패배한 적의 목을 누르고 서 있는 한, 그들이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형상에 대한 고대인들의 신앙이 반영된 결과물일 것이다.

 

19. 훗날 이 기념비는 왕의 전쟁에 대한 완전한 그림 연대기로 발전하였다.

[도판 45] <요새를 공격하는 아시리아 군대>, 기원전 883-859년경.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궁전의 설화 석고 부조, 런던 대영 박물관

 

이 연대기(요새를 공격하는 아시리아 군대)를 보면 마치 2천 년 전의 뉴스를 보는 듯 하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처참한 전쟁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 중에 아시리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득한 옛날임에도 선전술이나 과시하는 기술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지만 이는  그들의 오래된 미신, 즉 그림 속에는 그림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미신의 지배를 그때까지도 받고 있었을 것이다.

 

 

 

 

 

The Story of Art, EH Gombrich, Art for Eternity

 

Death is not a friendly topic. Nevertheless, mortality and its afterlife get credit for the origin of many fascinating stories of art.

Very few civilizations in have taken on the art of mortality as magnificently as the Ancient Egyptians.

The Pyramid of Giza, c. 2613–2563 (National Geography)

Egypt. The land of the pyramids “tell us of a land which was so thoroughly organized that it was possible to pile up the gigantic mounds in the lifetime of a single king, and they tell us of kings who were so rich and powerful that they could force thousands and thousands of workers or slaves to toil for them year in, year out, to quarry the stones, to drag them to the building site, and to shift them with the most primitive means till the tomb was ready to receive the king,” Gombrich shares.

Portrait head, c. 2551–2528 BC; Found in a tomb at Giza; limestone, height 27.8cm, 11in;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There’s more: “the Egyptians held the belief that the preservation of the body was not enough. The likeness of the king was also preserved, it was doubly sure that he would continue to exist forever. So they ordered sculptors to chisel the King’s head out of hard, imperishable granite and put it in the tombs where no one saw it, there to work its spell and to help his soul to keep alive in and through the image” Gombrich continues.

I bet they never would have imagined that thousands of years later the story of the most powerful King’s afterlife would be displayed in a modern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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