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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3장 전통과 혁신 Ⅰ- 15세기 후반: 이탈리아

Jobs 9 2024. 1. 22.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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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전통과 혁신 Ⅰ

- 15세기 후반: 이탈리아

 

15세기 초에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미술가들이 이룩한 새로운 발견들은 유럽 전역에 파문을 일으켰다. 화가들과 그 후원자들은 다 같이 미술을 성경의 이야기를 감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데에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의 한 단면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데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혹되었다. 아마도 미술에 있어서 이 거대한 혁명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모든 곳의 미술가들이 새롭고 놀라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실험과 탐구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15세기의 미술을 사로잡았던 이 모험 정신은 중세와의 진정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47

 

1400년까지는 유럽 각지의 미술이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해갔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과 부르고뉴 등지의 지도적인 거장들의 목적이 모두 다 비슷했기 때문에 이 시기의 고딕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양식을 국제 양식이라고 한다.(…) 이것은 예술의 영역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정치 세계에도 적용된다. 중세의 학자들은 모두 라틴 어를 말하고 쓸 줄 알았으며 그들이 파리 대학에서 가르치건 파도바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가르치건 별로 개의치 않았다. 247

 

중세 말기에 이르러, 시민과 상인들로 구성된 도시가 점차 봉건 영주의 성보다 중요한 것으로 발전하게 되자 이러한 모든 점들도 점차 변해갔다. 상인들은 모두 그들이 태어난 고향의 말을 했고 타국의 경쟁자나 침입자들에게는 일치 단결해서 대항했다. 각 도시는 교역과 산업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지위와 특권에 자부심을 갖고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세에는 훌륭한 거장이라면 이 건축 현장에서 다른 현장으로 옮겨다니며 작업할 수 있었고, 한 수도원에서 추천받아 다른 수도원으로 갈 수도 있었으며, 그의 국적이 어디인지 물어보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도시들이 큰 세력을 얻게 되자 미술가들은 다른 직공이나 장인들처럼 길드를 조직했다.(…) 길드의 임무는 조합원의 권리와 특권을 보호하고 그들의 제작품을 판매하기 위한 안전한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길드와 시 의회는 보통 시의 행정에 대해서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가장 부유한 집단으로, 그들의 도시를 번창하게 만드는 데 일조할 뿐만 아니라 도시를 미화하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247~248

 

도시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고딕 국제 양식은, 적어도 20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아마도 유럽이 가지고 있던 최후의 국제적 양식이었을 것이다. 15세기에는 미술이 각기 다른 여러 유파들로 분열되어 이탈리아프랑드르독일 등지의 모든 도시나 마을에는 그 나름의 회화 유파가 생겨났다. 248

 

163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피렌체의 루첼라이 대저택>, 1460경

 

문제는 벽과 창문을 가진 재래의 집과 브루넬레스키가 건축가들에게 사용하라고 권장한 고전적인 형식을 절충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해결책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알베르티인데, 그는 오늘날까지도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알베르티가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루첼라이 집단을 위해서 대저택(도판 163)을 지었을 때 그는 통상적인 3층 건물을 설계했다. 이 건물의 정면과 고전 시대의 유적과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었다. 그런데도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의 계획에 따라서 정면을 장식하는 데 고전적인 형식을 사용했다. 그는 원주나 반원주를 세우는 대신에 건물의 구조를 변경시키지 않으면서 고전적인 기둥의 양식을 암시하는 판판한 벽기둥과 엔타블레이처를 그물처럼 엮어서 건물 전체를 덮었다. 알베르티가 어디에서 이러한 원리를 배웠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각 층마다 상이한 그리스의 기둥 양식을 사용했던 로마의 콜로세움을 기억한다.(…) 로마의 형식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옛 도시의 대저택에 현대적인 모습을 부여했다고 해서 알베르티가 고딕 전통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이 대저택의 창문들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면에 있는 창문들을 비교해보기만 해도 예기치 않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티는 소위 ‘야만적인’ 첨형 아치를 부드럽게 만들고 또 고전적인 기둥 양식의 요소들을 재래의 인습적인 형식 안에 채택함으로써 단지 고딕 식 설계 방식을 고전적 형식으로 번안했을’ 뿐이었다.(새로운 것과 낡은 것고딕 전통과 근대적인 양식 사이의 절충은 15세기 중엽의 많은 거장들의 특징이었다. 249~250

 

166 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의 대승>, 1450년경. 피렌체 메디치 궁의 실내 장식화로 추정, 목판에 유채, 181.6x320cm, 런던 국립 미술관

 

피상적으로 보면 이 그림은 매우 중세풍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말들이 왜 회전 목마처럼 보이며 전체 장면도 인형극과 같은 것을 연상시켜 주는지 그 이유를 자문해본다면 매우 기묘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화가 자신이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에 너무나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인물들이 그려진 것이 아니라 마치 조각된 것처럼 공간에 돌출되어 보이도록 최선을 다했다. 우첼로는 원근법의 발견에 너무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밤낮으로 사물을 단축법으로 그려보고 자신에게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해보곤 하였다.(…) 그가 가장 크게 자부심을 느꼈던 것은 아마도 땅에 쓰러져 있는 전사자의 모습일 것이다. 그 인물을 단축법으로 묘사하는 일은 가장 힘든 작업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인물상은 그 이전에는 한번도 그려진 적이 없었다.(…) 북유럽의 반 에이크는 관찰을 통해 얻은 세부들을 점차 더해가고, 또한 가장 사소한 음영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세세한 면을 그대로 모사함으로써 국제 양식의 형식들을 변화시켰다. 반면 우첼로는 이와 정반대의 접근 방법을 택했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원근법에 의해서 그림 속의 인물들이 입체감 있고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실감나는 무대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우첼로는 엄격한 원근법적 묘사로 인한 거친 윤곽선을 부드럽게 해주는 명암과 공기의 효과를 구사하는 방법은 아직 배우지 못했다. 252~255

 

169 안드레아 만테냐,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성 야고보>, 1455년경. 프레스코, 파도바의 에레미타니 성당 벽화였으나 현재 소실

 

고촐리의 유쾌한 허식 속에서 우리는 국제 고딕 양식으로 되돌아가려는 기미를 찾아볼 수 있다. 반면에 만테냐는 마사초가 하다가 중단한 것을 계속 밀고나갔다. 그의 인물들은 마사초의 인물들처럼 조각적이고 인상적이다. 마사초처럼 그는 원근법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열심히 이용했다.(…) 만테냐는 그의 인물상이 단단하고 형체가 있는 존재들처럼 서 있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무대를 창출하기 위해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마치 능숙한 연극 연출가가 하듯이 인물들을 배치함으로써 그 사건이 일어난 순간의 의미와 과정을 전달하려 했다. 259

 

 

170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 1460년경. 프레스코의 부분, 아레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 벽화

 

만테냐가 북부 이탈리아에서 미술의 새로운 기법을 이렇게 응용하고 있을 때 이 시기의 또 다른 위대한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1416?~92)는 피렌체의 남쪽 지방 도시인 아레초와 우르비노에서 이와 동일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고촐리와 만테냐의 프레스코와 같이 프렌체스카의 프레스코도 15세기 중엽 직후, 즉 마사초보다 약 한 세대 뒤에 그려진 것이다. 도판 170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계기가 된 꿈에 관한 유명한 일화를 그린 것이다.(…) 피에로는 만테냐와 마찬가지로 로마 군대의 군복을 묘사하는 데 애썼으며 즐겁고 화려한 색채의 세부들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고촐리의 방식도 피했다.(…) 그는 무대의 공간을 암시하는 이런 기하학적인 방법 이외에도 그와 동일하게 중요한 새로운 방법즉 빛의 처리를 더해주고 있다. 중세 미술가들은 거의 빛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린 평면적인 인물상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259~260

 

 

171 안토니오 폴라이우울로,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1475년. 제단화, 목판에 유채, 291.5x202.6cm, 런던 미술관

 

현실 세계를 거울과 같이 반영하는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관념이 채택되자마자 인물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 이전처럼 용이하지 않았다.(…) 미술가들의 이 새로운 능력은 전체를 보기 좋고 만족스러운 장면으로 그려낸다는 미술가가 지닌 가장 귀중한 천부의 재능을 망칠 수도 있었다.(…) 도판 171은 15세기 후반 피렌체의 미술가 안토니오 폴라이우울로가 이 새로운 문제, 즉 소묘에 있어서도 정확하며 구성에 있어서도 조화로운 그림을 그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재치나 본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확한 규칙을 써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최초의 시도이다.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그러한 시도가 전적으로 성공적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또 그림 자체도 그다지 매력적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렌체의 미술가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얼마나 신중하게 덤벼들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260~

 

172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년경. 캔버스에 템페라, 172.5x278.5cm, 피렌체 우피치

 

산드로 보티첼리(1446-1510)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한 15세기 후반의 피렌체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는 기독교의 전설이 아닌 고전 시대의 신화, 즉 <비너스의 탄생>(도판 172)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다. 고전기의 시인들은 중세 전반을 통해서도 알려지기는 했지만 고전기의 신화는 과거의 위대했던 로마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그처럼 열성적이었던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교육을 받은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보티첼리의 인물들은 보다 덜 단단해보인다. 그의 인물들은 폴라이우올로나 마사초의 인물들처럼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너무나 아름답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목이 부자연스럽게 길다거나 어깨가 가파르게 처져 있다거나 또는 왼쪽 팔이 다소 어색하게 몸에 붙어있다든가 하는 점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게 된다.(…) 우아한 윤곽선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연에 구애받지 않은 보티첼리의 이러한 자유로운 표현은 하늘로부터 내려진 선물로서 우리 해변에 떠밀려온 무한히 부드럽고 섬세한 존재에 대한 인상을 한층 드높여주고 있기 때문에화면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보탬이 되고 있다. 26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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