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金文洙|Kim Moon-soo
국민의힘 제21대 대통령 후보
출생
1951년 9월 27일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황강동
(現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
거주지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은천2차아파트
본관
경주 김씨
현직
국민의힘 제21대 대통령 선거 후보
재임기간
제32·33대 경기도지사
2006년 7월 1일 ~ 2014년 6월 30일
제13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장관급)
2022년 9월 30일 ~ 2024년 8월 4일
제10대 고용노동부장관 (윤석열 정부)
2024년 8월 30일 ~ 2025년 4월 8일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
3선 국회의원, 제32·33대 경기도지사, 제10대 고용노동부장관을 지냈다. 2025년 5월 3일, 국민의힘 제5차 전당대회에서 제21대 대통령 선거의 국민의힘 소속 후보로 최종 선출되었다.
학생운동을 하다 서울대학교에서 두 번 제적을 당했으며, 노동운동을 하다 공장에서 역시 두 번 해고되었다. 이로 인해 감옥도 두 번이나 갔다 왔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는데 자그마치 24년 6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부천시 소사구 국회의원 시절에는 소사본동 한신아파트에 거주했다. 정계 입문 전부터 거주해 왔으며 경기도지사 당선 후 김문수 부부는 수원시에 위치한 도지사 관사에 입주했고 딸 김동주씨가 계속 거주해 왔다. 도지사에서 퇴임한 2014년 다시 부천 자택으로 돌아갔다가 20대 총선을 앞두고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 출마를 선언하며 부천 자택을 팔고 수성구 시지동의 한 아파트를 매입해 이사했다. 그러다가 2018년 수성구를 떠나 다시 서울특별시로 이사했고, 현재는 관악구 봉천동에 거주 중이다.
제17대 국회의원 시절이던 2005년 1월, 탈북자 관련 기자회견을 중국 베이징에서 가지려고 하다가 중공 공안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에 연루된적이 있었다. 당시 배일도, 최병국, 박승환 국회의원도 연루되었으며 참여정부 시절 발생한 중공의 만행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2018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4월 11일, 1976년에 취득한 환경관리사 2급 자격증을 강조하며 미세먼지 관련 대책에 대한 공약을 발표했는데, 실제로는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한 편이었으나 언론에서 도로에 그냥 물 뿌리면 된다는 식으로 왜곡 압축한 내용을 헤드라인으로 내세우는 바람에 빈축을 샀다. 12일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서 중국과의 협상, 국내적으로는 디젤 자동차 배기가스 해결, 먼지 측정기의 높은 고도를 사람 눈높이로 낮추기, 지하철에 집진시설을 설치 등의 모든 공약이 제시되었다.
악수를 굉장히 힘주어 하는 편이기 때문에 혹시나 만나서 악수를 할 일이 생긴다면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다.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무척 세게 잡는다.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핀란드의 제6대 대통령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을 언급했다.
2018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하며 정치적 기반을 대구광역시에서 서울특별시로 사실상 옮기게 되자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으로부터 뼈는 대구에 묻고 살만 올라왔냐며 디스당했다. 때문에 한동안 순살치킨 드립이 돌기도 했다.
2019년 9월 17일, 문재인 대통령 하야와 조국 법무부장관 사퇴를 촉구하며 삭발식을 거행했다. 그 전날 삭발을 단행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비교되었는데, 황교안 대표의 경우 서울 시내 이용업 종사자가 자원봉사로 삭발을 해주었으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의 경우 같은 당의 박대출 의원이 오른손 만을 사용해 밀어서 아파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1년 8월 대한송유관공사 을지연습 대테러 훈련 때 취한 견착자세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김문수가 잡은대로 총 쏘면 얼굴이 다칠 수 있다. 다만 김문수 측 말로는 해당 사진은 사격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조준경에 대해 물어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2022년 10월 24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의 고용노동부·경제사회노동위원회 종합국정감사에 경제사회노동위원장으로서 출석해 개회를 기다리는 자리에서 환노위 위원인 국회의원들을 검색해 나무위키 문서를 읽는 장면이 기사 사진으로 포착되었다.
한국유엔봉사단(총재 정형근)의 일원으로서, 2023년 3월 22일 서울 리베라호텔에서 CEO 서밋 1주차에 본인이 강연을 맡았다.
가톨릭 시절 세례명은 모세인데, 흥미로운 건 그의 정치적 제자 차명진의 세례명은 여호수아라는 거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김문수(1968) 전남 순천시·광양시·곡성군·구례군 갑 국회의원과 동명이인일 뿐만 아니라 성과 이름 모두 같은 한자를 쓴다. 다만 두 사람의 정치 성향은 정반대며, 소속 정당도 다르다.
좋아하는 영화는 큐브 시리즈라고 한다.
고용노동부장관으로도 활동했는데, 최초로 70대 장관이자 최고령 고용노동부장관이다.
뭔가가 나쁘다는 표현을 할 때 담배에 종종 비유하는 편이다. 가세연에 출연했을 때는 "공산주의 끊기가 담배 끊기보다도 어렵다"고 말하기도 하고,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시장 후보였던 시절에는 "동성애는 담배 피우는 것보다 훨씬 더 인체에 유해하다. 한번 맛을 들이면 끊을 수가 없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김문수 본인은 원래 흡연자였지만 오래 전 담배를 끊은 걸로 보인다.
기가채드와 엮어서 기가문수라 부르는 밈이 있다. 원래 김문수 지지자들이 쓰는 밈은 아니었고 안티들이 놀리느라 쓰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최근에는 지지자들도 이 단어를 쓰면서 점점 긍정적 밈이 되어가는 중이다. 최근엔 접두사가 기가라는 점에서 착안해 테라문수라고도 불리는데, 대체로 김문수를 정치적으로 지지하진 않지만 단일화 사태에서의 일로 인해 김문수를 일시적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이 실제 지지자들과 엮이지 않기 위해 주로 사용한다.
기가문수
나이에 비해 꽤나 동안이다. 물론 70이 넘은 고령인 만큼 과거 국회의원이나 경기도지사 시절에 비하면 얼굴에 주름이 조금 늘긴 했지만 7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에 비하면 여전히 젊어보인다는 의견이 많다. 심지어 정치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김문수가 홍준표, 이재명보다도 젊은 줄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키가 175cm로 70대의 나이를 감안하면 큰편이다.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후 기자화견에서 일본 기자가 질문했을때, 면전에서 독도는 양보할수 없는 한국의 영토이고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서 제대로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만큼 동성애를 혐오한다.
자가용으로 2020년식 더 뉴 그랜저를 소유하고 있다.
재산이 얼마 되지 않는다.
챗GPT를 자주 쓴다고 밝혔다. 안철수 예비후보와 경선 토론 과정에서 안 후보가 AI 정책 얘기를 꺼내며 AI나 반도체를 알기나 하냐고 나이 공격을 시전하자 자주 쓴다고 응수했다.
학생, 노동운동을 하며 얻은 화려한 전과 중 퇴거불응 혐의가 있다는 점이 김문수-한덕수 단일화 과정에서 세삼스레 주목받고 있다. 군사 정권 시절 고문도 이겨내며 심상정의 집도 불지 않은 그가 권영세, 권성동 등 지도부의 압박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점거농성 중이라는 반 농담성 비유에 자주 인용된다.
소속 정당
민중당 1990년
1990 - 1992
창당
정계 입문
무소속
1992 - 1994
정당 해산
정계 은퇴
민주자유당
1994 - 1995
입당
정계 복귀
신한국당
1995 - 1997
당명 변경
한나라당
1997 - 2012
합당18
새누리당
2012 - 2017
당명 변경
자유한국당
2017 - 2020
당명 변경
무소속
2020
탈당19
자유통일당
2020
창당
자유공화당
2020
합당20
무소속
2020
탈당
기독자유통일당
2020 - 2021
입당22
국민혁명당
2021
당명 변경
무소속
2021 - 2025
탈당23
국민의힘
2025 - 현재
복당
선거 이력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중당 1990년 글자
483,041 (3.75%)
낙선 (5번)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 소사
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
33,446 (39.19%)
당선 (1위)
초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
47,101 (61.62%)
재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
50,418 (52.94%)
3선25
2006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2,181,677 (59.68%)
초선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271,492 (52.20%)
재선26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수성 갑
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
51,375 (37.69%)
낙선 (2위)
2018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자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
1,158,487 (23.34%)
김문수 일생
초년기
1951년 9월 27일,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황강동(현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에서 아버지 김승헌(金升憲, 1916. 7. 26. ~ 1977. 6. 23.)과 어머니 창녕 조씨 조순조(曺順祚, 1919. 3. 22. ~ 1973. 12. 11.)2 사이의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영천국민학교, 경북중학교(現 경운중학교), 경북고등학교(51회), 서울대학교 경영학과(70학번)를 졸업했다.
1969년 고등학교 3학년 때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주도해 무기정학을 당했다. 대학 입학 직후 학생운동에 투신해 1971년 10월 제적됐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1973년 10월 복학했지만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또 제적됐다. 1993년 9월 서울대에서 시국사건 관련자 복학 조치로 3학년 2학기로 복학했고 남은 39학점을 이수해 1994년 8월 29일, 43세 중년의 나이로 24년 만에 졸업했다. 이 당시 김문수가 꼬박꼬박 수업에 출석하자 교수가 "오지 않아도 됩니다. 시험 때만 오면 됩니다."라고 했지만 꾸준히 출석하여 A학점을 받았다고 한다.
동지로 지내던 시절의 김문수는 전설이었다. 운동권의 황태자이자 하늘 같은 선배였다.
심상정
본래 매우 유명한 운동권 지도자 출신이었다. 유명한 정도가 아니라 무려 20년 이상을 노동운동에 투신하며 활동한, 그야말로 1980년대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전설이다. 이 시절 운동권을 논할 때 김문수는 꼭 언급되고 넘어간다. 그 시절 노동운동가들 대다수가 김문수를 따르거나 혹은 김문수가 이끌던 조직과 깊게 연계되어 활동하던 사람들이었으며, 당시 김문수는 노동운동계의 김근태라고 볼 만큼 절대적인 인물이었고 수많은 노동운동 후배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던 인물이다.
1학년 때 훗날 국회의원이 되는 5년 선배 심재권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학생운동 서클 중 하나였던 후진국 사회연구회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2학년 때 김근태에 의해 공활을 경험하고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김문수는 1970년대 초중반까지는 학생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병행했는데, 스스로 회고하기를 당시 진로 방향을 제대로 못 잡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노동운동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공장에 위장취업 후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1980년대에 전설적인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그의 얼굴 한 번 못 본 신인급 노동운동가 청년들도 입소문으로 퍼진 '노동투쟁 신화 김문수'의 파란만장한 전설들을 들으며 존경했다고 하니 그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대학 제적 후 스스로 공장에 위장취업하여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을 지내면서 밑바닥부터 노동운동을 한 인물이다. 대학생들의 위장취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가 1980년대다. 1980년대의 대학생들, 특히 노동운동계에 뛰어든 20대 젊은이들에게 김문수는 절대적인 전설이었다. 당시 김문수의 연설 내용을 그대로 적은 필본이 돌아다니곤 했다고 하는데, 그 연설을 못 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필본을 돌려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들도 흔히 있었다고 할 정도.
1985년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설립에 기여했는데, 1986년 서노련 지도위원으로서 인천 5.3 민주항쟁 주도 혐의 등으로 구속되었다. 당시 10.28 건국대학교 항쟁으로 애학투련(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학생 2천 명 이상이 잡혀들어와 함께 수감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 중 많은 주체사상파들이 김문수에게 찾아와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을 이야기하며 함께할 것을 설득했지만 당시 김문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주의에 빠져있었을지언정 주체사상에는 동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1986년 투옥 당시를 서술한 유시춘의 회고적 성격의 기고문이 있다. 잠실 1단지 주공아파트 125동 5층에 숨어 있었는데 김문수와 그와 뜻을 함께하던 유시주가 함께 보안사 요원들에게 체포되었으며, 유시민과 유시춘은 둘의 옥바라지를 했다.
한편 1986년부터 1988년까지 복역 중이던 동안 그의 뒤를 이은 인물이 심상정이었다. 심상정의 결혼을 주선해 준 사람도 김문수였고, 김문수는 고문당하면서도 심상정의 위치를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유시민과 TV 토론을 하러 나와서 과거 서로를 동지로서 보호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덕담을 나누기도 했었다. 이 시절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고초를 겪은 이야기는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최민희 의원의 연설 중에 짤막하게 언급되기도 했다.
그리고 6월 항쟁 이후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 본격적인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면서 현실 정치에 투신, 이재오, 장기표, 이우재 등과 손을 잡고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 노동운동 세력 일부를 모아서 1990년에 민중당을 창당하고 본인은 과거 실제로 노동운동을 했던 구로공단이 있던 구로구 갑 지구당위원장을 맡는다. 하지만 민중당은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고 득표율 미달로 해산되면서 말 그대로 물을 먹었다. 그리고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야를 비롯한 비김대중-김영삼 계열의 민주화운동 추진 진영에서 민중 후보로 추대했던 무소속 백기완도 1%라는 저조한 득표율을 보이며 낙선했다.
백기완의 낙선과 함석헌의 죽음은 김문수의 민주화운동 포기 및 전향 선언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이고, 이 시점부터 김문수는 진보 진영의 인사들과 척을 지며 본격적으로 본인에게 가장 흔히 쓰이는 별명 중 하나인 변절자로 불리기 시작한다. 또한 이때 백기완과의 악연이 김문수가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는 계기로 지목되기도 한다.
민중당의 실패 이후 1년간 택시기사로 일하다가 1994년 김영삼에게 영입되어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우익으로 전향한다. 이때 김영삼은 민주자유당이 과거 군사정권 잔당이라는 색채를 지우기 위해 재야민주화운동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는데, 그 중에 가장 네임드가 김문수와 이재오였다. 그리고 이 둘을 따라서 엄청난 숫자의 노동운동가, 재야 인사들이 민주자유당에 합류한다. 이후 김문수는 국회의원과 경기도지사도 지내면서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보수 정당의 대표적인 대권 잠룡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사실 김문수 입장에서는 1970년대까지 자신이 해왔던 학생운동 경력이 끝나고, 1980년대에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방향이 학생운동의 주류가 되었으니 전향하는 것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20년 이상 김문수는 현장 중심의 사상을 가진 노동운동가였다. 하지만 당연히 전향에 따른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고, 이 때문에 아직까지도 김문수는 진보 쪽 인사들에게 노동운동을 배신한 변절자라고 불리는 경우도 많다.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김문수를 보호하기 위해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국민의힘의 전신인 당시 신한국당은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을 완전히 장악한 김영삼에 의해 독재 정권 인물들이 죄다 쫓겨나고 상도동계, PK 출신들과 개혁 공천으로 영입된 인사로 한 번 물갈이된 당이나 다름없었다는 점은 김문수의 행보를 정당화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신한국당 자체는 민주자유당과의 합당으로 인해 독재 정당의 역사를 공유하지만, 노태우와 민정계가 3당 합당으로 끌어들인 김영삼에게 잡아먹혀 물갈이가 된 상태라는 점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이후 뉴라이트 세력이 기득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속칭 상도동계, 소장파들은 대부분 전 군부 세력과 손을 잡기 시작했으며, 김부겸을 비롯한 일부 소장파들은 탈당해서 열린우리당으로 입당했다.
김문수가 비록 지금은 보수 성향의 새누리당 소속이라고 하지만, 과거를 살펴보았을 때는 민주화운동 중심 인사이자 야당 인사였던 김영삼이 운동권 출신 김문수를 자신의 당인 민주자유당으로 영입하여 이후 신한국당으로 합병된 것으로 그 후 한나라당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졌고, 2020년 이후로는 이곳저곳으로 탈당 및 입당을 자주 해왔던 것으로 보았을 때 정치 입문 당시부터 우익적인 색채를 띠었다기보다는 시간이 흐르며 소속된 당의 방향에 따라 본인의 입장을 움직여 오다가 동화된 것에 가깝다. 특히 김영삼이 당시 당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대다수가 야당 인사(상도동계)이거나 민주화에 협력하던 사람(손학규, 이재오, 노무현, 김문수 등)이었기에 그렇다. 하지만 이에 대해 보수 정당으로 간 뒤에도 개혁파로 남아 보수 정당의 각성을 추구하던 사람들도 있기에 김문수의 이념 변화는 유독 두드러진다.
정치 활동
제15-17대 국회의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자유민주연합 박규식 후보, 김대중의 측근인 새정치국민회의 박지원 후보 등을 꺾고 당선되었다. 해당 지역구 현역 의원이던 박규식은 숙부에 이어 2대째 부천의 국회의원을 지낸 데다가 당시 100억대 자산을 보유한 지역 유지였고, 박지원 역시 전국구 의원이자 당 최장수 대변인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기였는데 이들을 뚫고 험지 부천에서 2%p 차이로 신승했다.
이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7대 총선 앞두고는 최병렬 당시 당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가결을 책임지고 사퇴해 치러진 전당대회에 당대표 경선에 출사표를 냈지만, 당선자인 박근혜, 2위를 기록한 홍사덕에게 밀린 3위를 기록하였다. 이후 17대 총선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당시 차떼기 사건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큰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의 혁신공천을 이끌며 궤멸의 위기감 속에 121석을 얻는 나름 선방한 결과를 냈다.
제17대 국회 개원 앞두고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상도동계 서울 서초구 을 5선 중진인 김덕룡 의원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 출마를 위하여 17대 국회의원직은 사퇴하였다.
현재는 우파 성향을 선명히 띠고 있지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이재오와 함께 한나라당 내 대표적인 개혁보수 정치인이었다. 2004년 박근혜가 대표가 되면서 당권이 강경보수 쪽으로 넘어가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박근혜를 앞장서서 비판했던 인물이 바로 김문수였다. 박근혜의 정수장학회 이사장 겸임 당시 겸직금지 규정을 어기지 말라며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으며, 2005년에는 박근혜가 국가지도자로서의 비전을 상실했다며 당대표직을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2012년 18대 대선 경선 시기까지도 박근혜를 비롯한 강경우파 세력에 대한 견제를 쉬지 않고 해왔다.
경기도지사
민선 최초로 경기도지사를 연임할 만큼 상당히 좋은 능력과 정치 감각을 발휘하였다. 그가 창시한 개념인 GTX를 2018년 들어 오히려 더불어민주당이 밀어주는 것만 봐도 증명된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전성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문수의 도지사 도정 중 가장 큰 성과로 거론되는 것은 경기도 최초의 대중교통 환승할인이 적용된 수도권 통합 요금제 도입이다. 2004년 서울특별시 대중교통 체계 개편 이후 2년 넘게 지지부진하던 것을 2006년 7월 취임 후 곧바로 재협상에 나서서 수도권 통합 요금제가 마침내 1년 만인 2007년 7월 1일부터 시행되게 하였다. 김문수는 애초에 대중교통 분야에 관심을 많이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일각에선 예전부터 그가 철덕이라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또한 택시 면허를 보유하여 젊은 시절 택시 기사로 일했던 경력을 살려 정치인이 된 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택시 기사 체험을 하고 다니며 택시를 대중교통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속칭 택시법을 찬성하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과거 PD파, 즉 노동운동권에 있으며 이런 대중교통에 관심을 가졌고 연장선상으로 택시 기사 체험이란 파격을 선보인 것이란 추측이 많다. 후술되어 있듯 대중교통만큼은 주민과 매우 가까운 행보를 보인 것. 정치인이 택시 기사로 민심을 청취한 것도 김문수가 최초다.
경기 남부와 북부 지역을 연결하는 경기순환버스도 김문수의 업적이다. 경기순환버스 운영의 활성화를 위해 2013년 4월 1일 수원시와 의정부시를 최단 거리로 빠르게 통행하는 경기순환버스 8401, 8409번 노선을 시행하게 했다.
2018년 범수도권 부동산 시장을 뜨겁게 달궈온 GTX 역시 최초 기획자가 김문수였다. 아이러니한 건 최초 제안자는 김문수인데 2018년 들어서 GTX를 적극 추진하는 쪽은 이재명 경기도지사, 심상정 정의당 의원 등의 진보 성향 정치인들이라는 것이다.
2008년에는 "중국의 급속한 성장과 대한민국의 장래를 내다봤을 때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며 "섬나라처럼 갇혀 살 게 아니라 바다로 뻗어나가야 우리의 미래가 있다"고 주장한 다음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에게 한중 해저터널을 공식 건의했다.
김문수는 "(해저터널은) 북한의 해주 장산곶에서 중국 산둥성까지 190㎞, 평택에서는 370㎞ 거리로, 육로로 갈 때 북경까지 1천 600㎞인데 비해 매우 가깝고 건설비도 도로에 비해 저렴하다"며 "대중 교류를 위해 꼭 필요하고 만들면 이득이 많다고 건설의 타당성을 설명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계획안까지 구상하였는데, 당시 도 관계자는 이에 대해 "김 지사는 한-중 해저터널이나 GTX 건설에 대해 정치적 의도가 아닌 지역발전 및 국가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필요성이 높아 추진하는 것이라고 수 차례 강조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2011년 교통연구원의 조사 결과 한중해저터널은 경제성이 없음이 밝혀지면서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
2009년 1월 28일에는 KBS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상하이차 고위 관계자들을 만나 (이들로부터) 검찰의 중국인 기술자의 출국금지에 대해 문제제기가 있었다”며 “이에 우리가 최근 이같은 내용을 법원, 검찰에 전달하고 중국도 보증을 하면서 출금이 해제돼 설 전에 출국했다”고 말하며 중국 쌍용차 노동자를 풀어준 일이 있었는데, 김문수가 출국 해제를 시켜준 노동자가 기술 유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크게 논란이 된 바 있었다.
2012년 18대 대선 경선에서 8.7%를 득표하여 승자인 박근혜와 큰 차이나는 2위를 기록했다. 나머지 하위권 3~5위 후보의 득표를 합한 것보다 많은 득표였으나, 박근혜의 득표는 거의 10배에 해당하는 84% 반영비율 20%인 여론조사에서 75:16으로 조금 더 따라붙은 것이 위안거리였다.
임기 말인 2013년에는 일본 기후현과 관광, 도자기 분야, 저출산 고령화 대책 등에 대해 교류 협력했다. 김문수는 “일본은 대한민국보다 먼저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고착화했다. 대한민국도 과거 일본처럼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부동산 침체와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며 “일본의 앞선 경험이 대한민국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이에 대한 해결방안에 대해 교류 협력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후루타 하지메 지사는 공감을 표하며 “기후현에서는 5년 전부터 인구감소 저출산·고령화 대책이라는 10개년 장기구상을 세웠다”며 공감을 표했다. 조금 더 일찍 시작했다면 새로운 화두가 되었을 것이나 다소 만시지탄.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불출마 선언을 하며 경기도지사 임기는 재선에서 마감하게 됐고, 8년간의 도정 활동을 마쳤다. 대신 같은 당의 남경필 후보를 지지하며 당 차원에서 활동을 벌여갔다.32 남경필은 그해 도지사에 당선되었지만 4년뒤 민주당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는데 그가 바로 이재명이었다. 이재명과의 악연은 이후 21대 대선으로 넘어가게 된다.
도지삽니다 사건이 있긴 했지만, 경기도지사로서의 김문수는 서울특별시장으로서의 이명박과 함께 정상적인 정치인 이미지를 넘어 매우 분명한 업적이 있고 능력이 뛰어난 광역자치단체장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잘나갔었다.
20대 총선 낙선
도지사 임기 종료 후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을 맡게 되었으며, 국무총리 후보로 거론된 적도 있었다. 2014년 10월에 중국 정부에 직접 초청을 받고 한중 반부패 연대 결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우리는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통해 부패 가능성과 부패구조의 정착을 차단해야 한다”며 “중국의 반부패운동이 시진핑 주석과 중국 공산당의 지도 아래 크게 성공해 세계적 모범사례가 될 것이라고 믿고, 큰 성공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한편 7월 30일로 예정된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경기도 지역 의석 수가 2자리나 있다 보니33 김문수가 도지사 3선 대신 해당 지역구 재보궐선거에 출마해서 국회 복귀를 노릴 수도 있다는 예측도 있었지만, 선거법 상 경기도 지역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출마를 위해서는 선거 120일 전에 지사직을 사퇴해야 했는데34 최종적으로 사퇴하지 않아 무산됐다. 이후 정몽준의 서울특별시장 출마로 인해 치러지게 될 동작구 을 재보궐선거 후보로도 거론됐지만, 본인이 직접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그러다가 2015년 6월, 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구 갑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하며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는 더민주의 다크호스 김부겸 전 의원과 빅매치를 벌이게 되었다. 이후 2015년 8월 새누리당의 수성구 갑 당협위원장으로 내정됐고, 동시에 기존 경기도 자택을 처분하고 수성구 시지동에 아파트를 마련해 입주했다고 한다. 다만 대권잠룡으로까지 거론되는 양반이 험지가 아닌 텃밭에 출마한다는 것에 비판을 가하는 당 내 기류도 있었으나, 김문수 본인은 수성갑이 험지라며 절대 쉬운 지역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김문수는 이에 더하여 친박선언을 하면서 MBC 라디오 <시선집중>에 출연, “일본은 아베를 중심으로, 중국은 시진핑을 중심으로, 심지어는 북한 같은 경우도 김정은을 중심으로 뭉쳐야 그 나라가 살아나간다”며“새누리당도, 대한민국도 박근혜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쳐야 된다”고 말했다.
참고로 김문수는 영천시 태생 - 경북중학교 - 경북고등학교, 김부겸은 상주시 태생 - 대구중학교 - 경북고등학교 출신으로, 둘 다 경북 출생 - 대구에서 성장 - 타지에서 정치 생활을 거쳐 대구에서 재도약 코스를 노리고 있으며, 김문수가 김부겸의 고등학교 5년 선배이다.
그리고 예정대로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한구 현직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한 대구 수성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해당 지역구에서 오랫동안 지역주의에 맞서 도전해 온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고 만다. 심지어 이는 무소속이나 기타 정당 후보도 없는 1:1 대결에서 37.69% : 62.30% 로 무려 득표율 24.61%p, 득표 수 33,536표 차 대패로 낙선하며 김부겸에게는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최초의 민주당계 대경권 소속 국회의원이라는 영예를 안겨주면서 김문수의 입장에서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김문수 본인이 험지 출마론을 거부하고 선택한 보수 초강세 지역인 대구에서 참작이 불가능한 대패를 당해 대권 잠룡으로서의 위상은 회복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아예 정계 복귀 가능성 자체에 대해서 걱정해야 할 상황이자 사실상 정계 은퇴 수순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여론도 있다. 상대방인 김부겸 후보는 이후 당 내 대경권 맹주이자 전국구 정치인, 원내대표 후보군, 당 대표 후보군, 대권주자로 위상이 압도적으로 상승했다.
특히 대구가 옛부터 보수정당의 텃밭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처참하게 박살난 후보는 김문수 후보가 유일한데, 다른 새누리당 낙선자들은 무소속 후보자들에게 패한 것이지만, 그래도 이들 무소속 후보들은 거의 전부가 새누리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후보들임을 감안해야 한다. 결국 김문수만 유일하게 텃밭인 TK에서 야당에게 처참하게 개박살난 새누리당 후보인 셈이다.
김문수가 낙선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김문수 본인은 대구광역시의 바로 옆 동네인 경상북도 영천 출생에 경북고등학교 출신으로써 대구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지만 그간의 정치 활동은 대구가 아닌 경기도에서 해왔다. 3선 국회의원도 경기도 부천시에서 해왔으며, 경기도지사도 2번이나 연임하는 등 사실상 경기도민, 경기도 정치인이었고, 인맥과 개인 조직, 정치적 기반까지 모두 경기도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다시 경기도 내 지역구에 나오겠거니 예상했는데, 느닷없이 대구에 나온 통에 경기도 사람이 뭔데 대구에 오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경기도민들이나 대구시민들이나 하나같이 너무도 뜬금없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또한 김문수가 단순히 경기도 정치인 이미지만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결정적으로 김문수는 도지사 시절 대표적인 수도권 규제 완화론자였다. 경기도의 산업 발전 명목으로 비수도권에 있던 대기업 공장이나 연구소 등을 죄다 경기도로 이전하게끔 하는 등 경기도를 위해 경상도를 등한시한 사람이란 뜻이다. 당연히 이로 인해 손해를 본 경북 구미나 대구 등 영남권에서 곱게 볼 수가 없는 상황이다. 정치적으로 대경권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을 뿐더러 뭘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수도권으로 뺏어가려한 양반이 그저 학연, 지연, 당이란 뒷배경만 믿고 텃밭 대구에 출마했으니 이러한 모습은 대구시민들에게 모욕감을 줄 수밖에 없었고, 구미로 출퇴근하는 인원이 많은 대구에서는 곱게 볼 수가 없었다.
거기에 외적인 상황도 좋지 못했는데, 당시 수성구 갑 현역 의원이던 이한구가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지역구를 방치한 데 이어 이미 원내대표 임기가 끝나자마자 2년 전에 짐싸고 경기도로 거처를 옮겨버린지라 지역에선 비판 여론이 팽배해 있었고,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연속으로 출마하면서 꾸준히 오랫동안 지역 표심을 다지고 도전을 해 온 김부겸이라는 강력한 후보도 있었다.
그러니 범새누리당 계열 이외의 인물로 찍을 만한 후보를 낸 두 지역구들인 북구 을과 수성 갑, 그 중에서도 김부겸이라는 인물이 19대 총선부터 일찌감치 기반을 다져온 수성 갑에 출마하겠다는 것은 수성 갑 주민들에게 "날 좀 떨어뜨려주십쇼."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선거 기간 내내 김부겸 후보의 압도적인 여론조사 우위가 나타났고, 물론 여론조사와 달리 막상 선거 당일에는 우파결집으로 새누리당을 찍을 것이란 추측도 있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결국 20대 총선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만약 경기도에 출마했다면 지역 기반과 재선 도지사라는 경력을 활용해 주민들에게 친화적이고 선도적인 공약을 내세우면서 수도권의 전문가로써 본인의 이미지를 부각할 수 있었을 것이며, 비록 낙선하더라도 대구에서 낙선한 것보다는 훨씬 덜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새누리당의 아성이나 다름없는 대구에서 이렇게 크게 참패하면서, 사실상 이 시점에서 거물 정치인으로서의 김문수의 정치 생명은 여기서 끝났다고 보는 관점이 많다.
이후 2016년 8월부터는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서 개인방송을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우병우 민정수석의 거취를 명확히 해달라든가, 사드 배치에 찬성을 하는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본인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9월 7일, SBS 뉴스브리핑에 출연하여, 경기도에서 오랫동안 정치를 해왔던 그가 대구로 내려와 총선을 도전했던 이유, 당 대표 출마 시사 후 불출마 선언 등에 대하여 본인의 심경을 밝혔다.
2016년 10월, 외교안보 전문가 초청 안보특강에서 송민순 전 외교부장관 회고록 논란으로 불거진 문재인 전 대표의 북한 인권 결의안 기권 논란을 언급하였는데, 여기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비서실장, 김만복 국정원장을 반역자라고 거친 언어로 비판하기도 했다.
11월 15일 비박계의 임시 지도부인 비상시국위 12인 공동대표 중에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즉, 당시에는 박근혜 탄핵 찬성파였다. 당시 비상시국위 출범에 분노한 친박계 이정현 대표로부터 지지율 합쳐서 10%도 안 되는 대선주자들이 당을 먹칠한다면서 남경필, 원희룡, 오세훈과 같이 대선주자에서 사퇴하라는 맹비난을 듣기도 했을 정도다.
19대 대선 불출마
하지만 얼마 안 가, 탄핵 반대파로 변신했다 어거지에 가깝게 친박에 들붙는 행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19대 대선에는 불출마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유한국당 경선에 참여할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친박 행보로 지지를 얻었다면 지지자들의 후원금으로 금전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는 사실상 근황도 잘 안 잡힌다. 정부 출범하자마자 친박 집회 참석해서 "문재인 정부 타도"를 외쳤다는 것만 근근히 보도되곤 한다. 2018년 1월 8일, 조갑제 TV와의 인터뷰에선 문재인에게 정신이상자라는 막말까지 곁들여 여전한 디스를 했다.
서울시장 후보
2018년 3월에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후보군이 무주공산에 가까운 자유한국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물망이 잡혔다는 기사가 올라왔다.44 나름 이름값 있는 인물이라지만 옆동네 광역단체장인 경기도지사를 2번이나 역임했고, 현재 대구로 내려가 있는 인물인지라 뜬금없다는 반응이 상당하다.
현실적으로 당선 가능성은 높지 않은데, 20대 총선때도 대구 수성구 갑에 출마했다가 김부겸에게 완패했고, 현재 옆동네인 대구 북구 을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내려와 있는 상황이라 자신은 대구에서 설 자리를 잃었기에 서울시장 출마를 바탕으로 이 기회에 정치 기반을 서울로 옮기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새누리당에서 같이 있었던 정태근 전 의원이 제기하기도 했다. 원래 지역구인 부천 소사는 자신의 보좌관 출신인 차명진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어 돌아가기 좀 그렇고.
게다가 더욱 현실적인 문제로는 선거를 치를 돈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19대 대선 불출마 이유에서 보듯 선거를 치를 돈 자체가 없는 그에게 서울특별시 전체를 유세하며 다닐 돈이 있는지는 과연 미지수다. 자유한국당 중앙당에서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상대는 3선을 노리는 박원순에다가,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중도+중도보수 진영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안철수인지라 상당한 고전이 예상되었다. 거기에 당시 문재인 정부의 높은 지지율로 인해 당선 가능성은 더 낮았다.
4월 11일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공식 출마 선언을 하였다. 동시에 수성구 갑 당협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사실상 더 이상 대구에서 정치를 할 마음이 없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5월 30일, 6월 7일 두 차례의 토론회에서는 기대보다는 선전했다는 평이 많다. 판넬을 많이 사용해서 "판넬왕"이라는 별명이 새로 생겼다. 수치화된 자료를 앞세운 논리를 무기로 삼은 안철수에 비해 김문수는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시각자료에 집중을 한 모양이다. 7일 토론에서는 안철수에게는 큰 공격을 안하고 김종민과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이날 안철수와 함께 박원순이 또 다시 털리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박원순의 "빚이 많은 건 청백리" 드립을 탄생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 논의가 상당히 오갔다고 알려졌지만 안철수 측의 일방적 사퇴 요구가 이어지자 6월 6일, 선거를 완주할 의사를 분명하게 내비쳤다.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 종료후 발표된 출구 조사에서 박원순 후보의 55.9% 득표 예측에 더블스코어 이상으로 뒤지는 21.2%의 지지율의 2위 낙선이 예측되었으며 52.79% : 23.34%로 29.45%p차로 2위로 낙선했다. 하지만 애당초 목표가 안철수를 이기고 2등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꽤나 선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서울에서도 민주당세가 특히 강한 관악구, 안철수의 전 지역구인 노원구 2곳에서 근소하게 밀린 것을 제외하면 서울 전 지역에서 안철수를 누르는 데에 성공했다.
수성구 갑에서의 패배로 정치인생을 마무리했다면 텃밭에서조차 참패한 몰락한 거물정치인의 이미지로 기억되었겠지만, 당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의 요청에 따라 서울시장 선거에 뛰어들어 명확한 보수색을 어필하며 실버크로스로 탈환해내면서 오명을 제법 씻는데 성공했다.
2018년 11월, 기존에 거주하던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지동 아파트를 팔고 서울특별시로 이사를 간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기사에 따르면 수성구 자택은 지난 4월 서울특별시장 출마 및 수성구 갑 당협위원장을 사퇴할 때부터 이미 매물로 내놓았다고 하는데, 김문수 본인은 이에 대해 "대구에 뼈를 묻겠다고 약속했는데 뼈를 못 묻어서 미안하다" 라는 답을 남겼다.
2020년 1월 27일, 신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당 명칭으로는 국민혁명당을 선택하고 비례한국당의 이름을 개칭하여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태극기 세력 중심으로 정치권을 통합해야 한다고 밝혔고, 창당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머 현역 국회의원이나 시민단체 쪽에서도 참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광훈 목사가 신당에 합류하냐는 질문에는 "신분이 목사"라며 "응원하고 후원, 지원해줄 것"이라고 답했는데, 이를 보아 신당에 입당하지는 않지만 지지 세력으로 약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신당 창당이 가시화될 경우 기존 존재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새로운보수당, 우리공화당에 이어 이언주 신당, 이정현 신당에 이은 6번째 보수정당이 되어 버린다.
결국 2020년 1월 30일 자유한국당을 탈당했고, 얼마 안 되어 자유통일당을 창당하였다. 이정현의 신당이 아직 창당되지 않음에 따라 5번째 보수정당이 되었다.
이후 자유통일당과 우리공화당의 합당 문제로 전광훈과 결별한 줄 알았으나 2020년 3월 21일 자유공화당을 탈당했다. 결국 다시 전광훈과 사랑제일교회 성도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기독자유통일당49에서 활동할 것을 밝힌 후 현재는 기독자유통일당 자문위원장이 되었다.
참고로 이 때를 기점으로 개신교로 완전 개종하였다. 함께 사랑제일교회에 출석했던 김무성은 총선 불출마 이후 다시 불교로 돌아갔지만, 김문수와 차명진은 계속 교회에 나오면서 종교를 바꿨음을 보여주었다.
2020년 8월 사랑제일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이 터지면서 전광훈과 친밀하게 지내 온 김문수의 정치 생명은 완전히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50
2020년 8월에는 광화문 집회에서만 발견되었다. 이로인해 전광훈 지지자들에게 욕을 먹고 있다.
2020년 9월 24일에 10월 3일 광화문 집회 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집회 이후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증가를 막기 위해 대면집회보다는 차량 집회로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이야기를 하였는데, 전광훈 지지자쪽에서 비난을 받고 있는 걸로 봐서 전광훈과의 관계는 끝인것 같다.
2020년 10월 3일 차량시위를 했다. 서경석 목사가 대표로 있는 새한국에서 주최하는 강동구 굽은다리역에서 차량 시위에 참여하였다.
2020년 11월 2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수감 전 자택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매주 화요일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앞에서 탈북자 인권법 촉구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탈북자 인권을 챙기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건 지금도 유효하는 걸로 보인다. 태영호 의원, 나경원 전 의원도 매주 참여중이다.
미국 부정선거 논란에 대해서는 바이든이 승리를 했는데 왜 계속 그거를 물고 넘어지냐고 하면서 강경한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 미국은 3일만에 재검표가 이루어졌는데, 대한민국은 6개월이 지나도록 재검표가 안되고 있다며 불만을 표했다.
2020년 12월 10일,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의 '문재인 정권 폭정 종식을 위한 보수 통합 회의'라는 명분으로 여러 보수인사들을 불러들였는데 여기에 참석해서 김문수 전 도지사는 "지금까지는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만날 자리가 없었다. 국민의힘은 광화문에 태극기를 들고나오는 사람을 극우라고 하지 말고 태극기를 왜 들고 싸우는지 알아야 한다" "폭정에 맞서기 위해서는 양처럼 좋은 사람도 필요하지만, 사납고 무섭고 예측 불가능한, 성난 민심이 모이는 자리도 필요하다"며 "이 모임이 확대돼 일주일에 한 번씩만 모인다면 문재인이 깜짝 놀랄 것"이라고 말했다.
2021년 3월 18일, 국민의힘 소속의 김무성, 이재오와 만나 오후 3시까지 오세훈 - 안철수 단일화 문제를 최대한 빨리 합의해야 한다고 촉구함과 동시에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김종인의 사퇴를 요구했다.
2021년 6월, 일부 강경보수 및 친박 측에서는 이준석 신임 당대표가 좌파라고 주장했지만, 김문수는 이준석의 저서 <공정한 경쟁>을 읽고 나서 이준석의 경제관, 안보관, 교육관을 보면 좌파가 아니라고 옹호했다.52 페이스북 아이콘
한때 친이계 중진으로 거론됐고,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던 만큼, 2022년 1월 24일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전직 국회의원들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20대 대선을 앞두고 윤석열을 지지하면서 안철수와의 단일화를 촉구했으며 , 8회 지선에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김은혜 경기도지사 후보의 유세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제사회노동위원장
2022년에는 윤석열 정부에서 장관급 대통령자문위원장인 경제사회노동위원장으로 내정되었다. 같은 해 9월 29일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대통령실에서는 임명 사유로 청년 시절 노동현장 경력이 많고 정치 경력도 길어 사회적 대타협 및 노동개혁 추진의 적임자라고 하였으나, 그가 우익으로 전향한 이후 보인 행보들이 재계와 노동계 사이에서 노사정 대타협을 이끌어내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와버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2022년 취임 후 첫 국정감사에서 "문재인은 김일성주의자"라는 발언을 하고 발언 정정을 거부하여 국감에서 퇴장당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논란에 대해 대통령실에서는 "7080 노동계의 대부이므로 적절한 인사." "좌우를 모두 경험해 중재 능력이 탁월할 것." "자신의 생각을 국민 앞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 남겼다.
김문수는 중립을 요구하는 공직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이후도 종교적으로 편향된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2023년 4월 11일에도 김문수는 우파 성향 종교인인 전광훈의 말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공직자로서의 종교적 중립성 요구 원칙을 위반 행위를 하여 비판을 받고 있다. 이튿날인 4월 12일에는 기독교입국론을 주장하며 한기총 두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와 다른 견해를 내세운 것에 있어, 여성가족부를 폐지하지 말고 저출산 대응 강화를 위해 격상하자고 하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고용노동부장관
2024년 7월 31일 윤석열 정부의 두 번째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되며 경사노위 위원장직을 내려놓았고, 후임 경사노위 위원장은 권기섭 전 고용노동부차관이 임명되었다.
8월 29일, 윤석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장관 임명안을 재가하면서 장관에 취임했다. 청문회 과정에서 탄핵 부정, 뉴라이트 역사관 논란, 세월호 관련 망언 사과 거부 등 많은 논란을 일으켜 적지 않은 국민적 우려를 발생시켰으나, 장관 취임식에선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로기준법 적용을 주장하고 노동약자보호법 추진을 공언하는 등 과거 노동운동가 시절의 김문수가 돌아온 듯한 모습을 연신 보이고 있다. 다만 이 주장의 내면에는 규제를 완화하자는 내용이나 근로기준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기 때문에54 정말 본인이 과거의 노동운동가로 돌아간 것인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고용노동부장관 취임 직후 첫 번째 업무지시로 임금체불 전액 청산과 체불사업주 엄벌을 지시하였다.
2025년 들어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보수진영의 유력 대권주자로 주목받고 있다.55 2025년 1월 8일 기준, 범보수 차기 대권 주자 중 선호도 1위를 차지하였다.
2025년 1월 23일 기준, 조기대선 '김문수 vs 이재명' 양자대결에서 오차 범위 내에서 앞서는 모습을 보였다.
여론조사마다 보수 후보들 중에서는 가장 압도적인 수치를 보이고 있음에도 정작 본인은 2월 10일 이명박 전 대통령과 회동한 것 외에는 별다른 대권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제21대 대통령 선거
4월 8일 제21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국무회의에서 사의를 표했고 같은 날 오후 3시에 정부세종청사에서 이임식을 갖고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4월 22일 안철수, 한동훈, 홍준표와 함께 TOP4로 1차 경선을 통과하였다.
4월 29일 한동훈과 함께 TOP2로 2차 경선을 통과하며 경선 최종 후보에 올랐다.
5월 3일 득표율 56.53%로 한동훈 후보를 누르고 국민의힘 제21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다.
후보 당선이 확정된 직후 국민의힘 당헌58에 의거해 당무우선권을 행사하여 당 주요 직책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는데, 캠프 총괄선대본부장이던 장동혁 의원을 당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후보 비서실장에는 김재원 전 최고위원을 임명했다.
하지만 당내 경선 승리 이후 당 지도부가 노골적으로 한덕수와의 단일화를 종용하자 이에 5월 6일 후보 일정을 전면 중단할 것을 선언, 김문수-국민의힘 지도부 갈등이 본격 발발하였다. 운동권 시절 짬밥 어디 안 갔는지 상경 이후 완벽하게 잠적하면서 김문수를 직접 만나려는 국힘 의원들만 허탕을 쳤다.
이에 언론에서는 국민의힘 측의 전당대회 개최60나 최악의 경우 김무성의 옥새런 등이 나타날 것으로 예측되었다. 김문수계 측에서는 가처분 신청을 예고하는 등 분란이 하루 종일 지속되었다.
서노련 사건
1986년 5월6일 자정 무렵. 서울 잠실1단지 주공아파트 125동 5층에서 부서져라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울렸다.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자, 머리를 짧게 깎은 사복 차림의 건장한 청년들이 드릴을 가져 와 문을 뚫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른 사복들이 옥상에서 줄을 타고 베란다 쪽으로 접근했다. “너희들 뭐냐! 영장을 제시해!” “이 새끼들! 죽을래?” 베란다 안쪽에서 누군가 저항하는지, 고함소리와 격렬하게 치고받는 소리가 심야의 아파트단지에 울려 퍼졌다. 놀란 주민들이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었다. 경찰들이 이미 일대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상황은 오래지 않아 종료됐다. 등 뒤로 수갑을 찬 사람들이 맨발로 하나둘씩 건장한 사복들에게 끌려나왔다. 20~30대의 남자 넷, 여자 둘이었다. 검은색 승용차가 서 있는 곳으로 끌려가던 그들 가운데 몇이 웅성거리며 모여 서 있던 주민들을 향해 외쳤다. “군부독재 타도하자!!”
체포된 사람들은 당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지도위원 김문수(현 한나라당 의원)를 비롯해 이 단체의 중심활동가들이었다. 이들에 앞서 이미 5월3일부터 사흘 동안 6명의 다른 활동가들이 체포됐다. 5월3일 새벽, 활동가 박정애가 을지로의 정화인쇄소로 ‘노동자신문’을 찾으러 갔다가 잠복하고 있던 수사관에게 검거되면서 윤현숙·김진태 등 ‘노동자신문’을 담당하던 활동가 6명이 모임 장소나 자취방 등지에서 줄줄이 연행됐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한 명에게서 잠실아파트의 전화번호가 나오면서 또다시 6명이 한꺼번에 체포된 것이다.
이들은 체포된 뒤 모두 눈을 가리운 채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끌려갔다. 눈을 가렸던 수건이 풀리는 짧은 순간, 주변의 우거진 나무가 눈에 들어왔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건장한 청년들이 머리고 등이고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몽둥이를 내리쳤던 것이다. 몇몇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실신해버렸다. 잠시 뒤 방음장치가 된 하얀색 취조실에서 깨어난 그들 앞에는 더 모진 구타와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잡힌 신문팀의 경우 김문수와 심상정(현 민주노동당 의원)의 행방을, 나중에 잡힌 활동가들은 심상정과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의 행방을 추궁당하면서 이틀동안 집중적으로 가혹행위를 당했다. 구타와 잠 안 재우기는 말할 것도 없고 손발을 묶어 매다는 통닭구이, 수건을 얼굴에 씌워놓고 코로 물 먹이기, 심지어 전기고문까지 자행했다.
특히 심상정과 함께 서노련의 핵심 지도부로 알려진 김문수가 가장 심하게 당했다. 그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철제의자에 묶인 채 전기고문과 고춧가루 물 먹이기 고문을 번갈아 당했다. 견디다 못해 엉터리로 약도를 그려주자 앰뷸런스에 실어 그곳으로 데려갔다가 속았다는 걸 알고는 앰뷸런스 안에서 전기방망이로 온 몸을 지져대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결국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 물도 마시지 못하고 피오줌을 싸는 상황에 이르자 수사관들은 그를 한 병원으로 싣고 갔다.
그곳이 어딘지 알아낸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이었다. 당시는 5·3 인천사태 직후로 대규모 연행과 구속, 수배가 이어지고 있었다. 가족들은 비슷한 시기에 연행됐다 풀려난 노동자와 학생들을 수소문해 ‘비행기 소리가 자주 들렸다’는 등의 몇 가지 단서를 확인하고는 끈질긴 추리와 조사로 서울 거여동의 야산 속에서 수상한 건물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곳은 보안사령부 분실(흔히 ‘송파 보안사’라고 불림)이었다. 군 수사기관이 민간인을 영장도 없이 연행해 구금하고 가혹행위를 한 것이다. 83년의 유화국면 이후 다소 느슨해졌던 5공 정권의 폭압성은 인천사태를 분기점으로 다시 초강경으로 치달았는데, 이 과정에서 보안사가 직접 민간인들을 연행해 수사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서노련 사건은 학생운동조직이나 재야단체가 아니라 노동자 정치조직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가족들의 대담하고 조직적인 투쟁으로도 유명했다. 활동가들의 남편이나 부인, 형제들 중에 함께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이 많은 까닭이었다.
연행기관이 보안사임을 확인한 가족들은 5월14일 오후 민가협, 민통련 의장단 등과 협조해 외신기자 2명을 데리고 송파 보안사 정문 앞에서 기습적인 시위·농성을 벌였다. “여기는 군사작전지역”이라는 으름장과 정·사복 군인들의 제지에도 굴하지 않고 가족들은 악착같이 철문을 붙들고 늘어져 마침내 보안사로 하여금 연행·구금사실을 시인하게 만들었다. 연행된 이들이 13일 새벽에 이미 서울시경으로 이첩됐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곧바로 서울시경으로 달려가 면회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가족들은 16일 오후 흔히 대공분실로 불리는 장안동 서울시경 5계를 기습해 지하실에서 지상 3층까지를 샅샅이 뒤지는 대담한 투쟁을 벌였다.
서노련은 구로 동맹파업에 참가했다가 해고되거나 구속된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청계피복 노조, ‘노동운동 탄압저지 투쟁위원회’ ‘구로지역 노조민주화 추진위원회’가 결합해 85년 8월에 결성한 조직이었다. 노동운동 탄압저지 투쟁위원회는 동일제강·성원제강 등 84년과 85년 서울·인천지역에서 노조 결성 또는 근로조건 개선투쟁 과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구로지역 노조민주화 추진위원회는 한국음향·협진양행·한국마벨 등 구로공단지역에서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려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모인 조직이었다.
서노련은 구로 동맹파업이 거둔 성과, 그리고 심상정 등 동맹파업을 주도한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들이 제기한 새로운 문제의식에서 출범한 조직이었다. “노동3권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 탄압하는 폭압적인 정치상황에서는 노동운동도 경제투쟁을 넘어서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 앞장서야 한다.” “노동운동은 하나의 부문운동이 아니라 전체 사회변혁운동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으로만 노동자들을 조직하려 할 게 아니라 노동자들의 정치적 각성과 투쟁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노동자 대중조직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서노련은 정치적 노동운동을 시도한 조직이었다.
출범 당시 청계피복노조 위원장이었던 민종덕이 위원장, 전 원풍모방노조 간부인 이옥순이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서노련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각성을 위한 ‘노동자신문’을 발간해 구로공단 주변 노동자 주거지역에 배포하고 임금인상 투쟁과 노동조합 결성 지원활동, 그리고 노동운동 탄압에 항의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86년 3월의 가리봉동 모세미용실 점거 시위, 86년 4월의 전태일기념관 농성, 86년 5월 구로공단 일대 노동절 시위 등)를 전개했다. 학생운동 및 재야단체들과 연대활동도 벌였다. 86년 2월에는 인천에서도 서노련과 노선을 같이하는 ‘인천지역 노동자연맹’이 결성됐다.
서노련은 출범과 동시에 공안당국의 집중적인 감시대상이 됐다. 조직이 결성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민종덕이 구속되고, 이어 이옥순이 공개 수배됐다.
한편 86년 5월은 헌법개정 문제를 둘러싸고 5공 정권과 민주화운동 진영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급격히 높아지던 때였다. 86년 2월 야당인 신민당과 민추협이 ‘직선제 개헌을 위한 1천만명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로 했고, 민주화운동 진영은 제도권 야당이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개최한 ‘직선제 개헌 추진 현판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시민들의 민주화 열기를 이끌어냈다.
연초부터 점증하고 있던 이런 열기는 5월3일 인천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신민당의 개헌 현판식에 학생·노동자·재야인사 등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이 총집결해 격렬한 시위를 벌인 것이다. 수만 명이 참가한 이날 가두시위의 여파로 200여명이 구속되고 100여명이 수배됐다. 5공 정권은 이를 기화로 탄압을 강화하면서 민주화운동 진영에 국가보안법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했는데, 서노련 사건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탄압 사례였다. 서노련 사건 구속자들에게는 국가보안법, 집시법, 그리고 형법상의 소요죄가 적용됐다.
핵심 활동가들이 대거 구속되면서 서노련은 86년 말 해산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 사회변혁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이라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실천적으로 제기한 게 서노련의 공이라면 교조주의적 운동이론, 관념적 급진성은 과로 평가된다. 공개된 지도부가 구속되거나 수배되면서 서노련은 애초에 지향했던 노동자 대중조직이 아니라 비합법 투쟁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현장에 있는 노동자보다 해고된 ‘선진 노동자’들이 조직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특히 학생운동 출신의 노동운동가들이 지도부의 다수를 점하게 됐다. 그 결과 일반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친근하고 대중적인 활동보다 ‘선진 노동자 중심의 선도(先導)투쟁’에 치중하고, 관념적인 급진성이 도드라지게 됐던 것이다.
김문수를 위한 변명
유시민
장관급 공직자인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위원장이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이제부터 김문수의 직책이나 존칭을 생략하겠다. 그를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효율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니 양해 바란다.
무엇보다 예전 발언이 문제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일성주의자이고 총살감이다.’ ‘민주당 국회의원 윤건영은 말과 행동으로 수령님께 충성한다.’ ‘쌍용차 노조는 자살특공대, 민주노총은 김정은의 기쁨조다.’ 김문수는 국회 답변과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취소하거나 사과할 뜻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취임하자마자 전문위원을 포함해 문재인 정부 때 채용한 임기제 직원 열넷을 해고했다. 사실상 경사노위 실무자 전원을 쫓아낸 셈이다.
경사노위는 기업과 노동조합에서 지방정부와 중앙정부까지 노·사·정의 공식 비공식 접촉과 정보 교류를 촉진해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에 대한 공감과 합의를 도모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민주노총과 야당은 김문수가 경사노위 위원장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자신이 노동계 인사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친일파가 된 독립운동가’라고 비난했다. 모두 일리가 있는 지적이고 비판이다. 그렇지만 김문수는 억울하다. 자기 책임이 아닌 일로 비난받고 있다. 그런데도 변명해 주는 이가 없다. 이건 공정하지 않다. 나라도 나서야겠다.
전향과 변절
김문수는 일흔두 살 먹은 남자다. 어려서는 총명했고 젊어서는 용감했다. 경북 영천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대구 경북중고를 거쳐 서울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체포‧투옥‧수배당하는 고난을 겪었고 대학을 마친 다음에는 노동자로 ‘존재이전’을 했다. 여러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했고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이 되었으며 구로공단 전자제품 회사 노조위원장인 ‘진짜노동자’와 혼인했다. 전두환 정권 때는 노동운동의 전설, 혁명적 청년 지식인의 모범이었다.
김문수는 노동운동에 머무르지 않았다. 노동자와 청년 지식인들이 손잡고 만든 ‘서노련’의 지도위원으로서 한국형 볼셰비키혁명을 추구했다. 1986년 5월 국군 보안사 요원들이 서노련 핵심 활동가 열셋을 불법 납치 구금해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을 때, 나는 그의 아내와 함께 불법 감금 장소를 찾아내 고문 실태를 세상에 알렸다. 갑자기 전향해 보수정당에 들어간 1994년까지 김문수는 내게 혈육만큼이나 가까운 동지이고 선배였다.
김문수는 국회의원을 세 번, 경기도지사를 두 번 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뒤에는 극우 태극기 집회의 연사로 활약했다. 그가 혼자 전향한 건 아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옛 동지를 향해 빨갱이, 주사파, 김정은의 기쁨조, 김일성주의자, 총살감이라는 극언을 던지지는 않았다. 김문수는 정치노선만 바꾼 게 아니다. 가치관과 도덕규범까지 다 바꾸었다. 그것은 단순한 ‘전향’이 아니라 ‘변절’이었다. 배신감과 혐오감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전화번호를 삭제하고 나 혼자 씩씩댔다. 원래부터 권력과 돈을 탐하면서 남을 짓밟았던 사람보다 더 미웠다. 그가 ‘자유의지’로 변절을 선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는 김문수를 다른 극우 인사와 똑같이 대한다.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변절을 나쁘지 않은 행동으로 보게 되어서가 아니다.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나와 그를 포함해, 인간 자체를 예전과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한테 ‘자유의지’라는 게 있는지, 설혹 있다고 해도 그걸 이유로 누군가를 미워해도 될 만큼 확실한지 의심한다.
자유의지라는 허상
인간을 포함해 모든 동물의 뇌를 자연이 만든 기계로 보는 진화생물학의 관점을 나는 받아들인다. 돌을 피하는 반사 행동에서 지지할 정당을 선택하는 정치적 의사결정까지, 우리의 뇌는 외부에서 오는 정보를 받아들여 최대한 신속하게 최적의 대응책을 찾는다. 그 목적은 생존이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너무 높이 발전한 탓에 다른 일을 하나 더 한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는가?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하고 답을 찾으려 한다.
내 뇌는 우주에 하나뿐인 ‘인지 제어 시스템’이다. 모든 면에서 나와 똑같은 뇌는 없었고, 없으며, 없을 것이다. 김문수의 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서로 다른 것은 뇌가, 더 정확하게는 뇌에 깃든 ‘인지 제어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자아(또는 인격)라 한다. 자아는 삶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이 있다고 가정한다. 이른바 ‘자유의지’다. 그런데 모든 전향과 변절을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것 같지 않다.
우리의 자아는 물질이 아니다. 물질인 뇌에 깃들어 있으면서 물질인 몸을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쉼 없이 흔들리고 쉽게 비틀린다. 전향이나 변절은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일 수도 있지만 뇌의 물리적 생화학적 변화 때문에 생긴 ‘현상’일 수도 있다. 우리가 있다고 가정하는 자아의 책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자아가 깃든 뇌는 860억 개의 뇌신경세포(뉴런) 덩어리다. 이것을 뇌의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다. 하드웨어의 특정 부위가 손상을 입으면 인지‧기억‧추론‧판단 기능에 문제가 생긴다. 손상 원인은 다양하다. 교통사고‧산업재해‧질병‧노화 등이 일반적이지만 고문과 같이 특수한 원인도 있다. 하드웨어에 변화가 생기면 성격‧언어습관‧행동방식 등 모든 것이 달라진다. 정치적 신념이라고 해서 특별히 단단할 리는 없다.
뉴런들은 전자와 화학물질을 주고받으면서 1백조 개 넘는 연결망과 무한대의 연결패턴을 만든다. 과학자들은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을 비롯해 뇌에 작용하는 신경전달 물질은 백 개 넘게 찾아냈다. 뇌의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는 뉴런 연결망의 패턴과 작동 방식은 전자 교환과 화학물질 분비에 작은 변화만 생겨도 크게 달라진다.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 물질 하나의 부족이나 과잉이 사람의 성격과 행동방식을 극과 극으로 다르게 할 정도다. 뉴런에 깃든 우리의 자아는 전혀 튼튼하지 않다. 쉼 없이 지진이 일어나는 땅 위에서 예측할 수 없는 폭풍우를 맞으며 서 있는 집과 같아서 너무나 쉽게 부서지고 비틀린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인간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나 더, 뇌는 학습하는 기계다. 매순간 빛과 같은 속도로 감각기관이 전해주는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한다. 인공지능이든 천연지능이든, 데이터는 학습하는 기계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 하드웨어 손상이나 소프트웨어 혼돈이 전혀 없어도, 데이터를 더 확보하면 같은 상황에서 다른 결정을 한다. 이런 경우 우리는 전향이나 변절을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김문수는 변절자가 아니다
김문수의 뇌에 아무런 물리적 생리학적 문제가 없었다고 가정할 경우 변절자 또는 위선자라고 할 수 있다. 오로지 옳다는 신념만으로 혁명운동을 했다가 보수정당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전향했다면, 추구하는 목표를 혁명에서 출세로 바꾼 셈이니 변절이라고 해도 된다. 하지만 원래 추구한 목표가 권력이었다면 다르다. 권력을 차지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라 판단해서 혁명운동을 했다면 김문수는 변절자가 아니라 위선자라고 하는 게 맞다. 처음부터 권력을 차지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마치 혁명이 목표인양 꾸민 것이니까.
김문수는 여러 차례 이런 말을 했다.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아서 나 자신을 바꾸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모든 일이 잘 풀렸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성공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한테 진보냐 보수냐는 큰 의미가 없다. 어느 쪽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지가 중요하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면 김문수는 변절자가 아니라 위선자일 뿐이다. 하지만 전향한 후의 김문수가 한 말을 가지고 전향하기 전의 김문수를 평가할 수는 없다.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인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김문수는 변절자도 위선자도 아니다. 그는 언제나 진심으로 살았고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밝혔다. 전향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자유의지로 한 선택은 아니었다. 뇌의 하드웨어 손상으로 발생한 현상일 뿐이다. 전향 이전의 김문수와 이후의 김문수는 너무 다르다. 정치노선만 바꾼 게 아니라 사람 자체가 달라졌다.
총명한 사람이 전향했다고 해서 갑자기 멍청해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김문수는 전향 이후 매우 빠르게 총명함과 멀어졌다. 형식논리가 성립하지 않는 주장을 거침없이 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하지 않았던 행동이다. ‘신영복은 간첩이다. 문재인은 신영복을 존경한다고 하니 김일성주의자가 분명하다. 따라서 총살감이다.’ 총명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앞뒤 없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으로 20년을 복역했지만 북한 간첩은 아니었다. 나도 신영복을 존경한다. 그러나 인간과 삶에 대해 그가 이야기한 생각과 감정이 아름다워 그런 것이지 북한 간첩이라서가 아니다. 김일성주의 하고는 아무 관계없다. 백보를 양보해 어떤 사람이 김일성주의자라고 하자. 그러면 총살해도 된다는 말인가.
나는 김문수가 보안사에서 고문당했을 때 뇌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한다. 하드웨어의 물리적 손상이 소프트웨어의 혼돈을 야기해 자아가 달라졌다고 본다. 그의 뇌는 예전과 달리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에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오로지 생존이라는 목표만 추구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권력을 차지하고 단맛을 누리는 것을 정의로 여긴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현상이었다. 오늘의 김문수는 생각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생각한다. 나는 김문수의 전향을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보지 않는다.
대통령이 문제다
나는 전향 이전의 김문수를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음에 간직한다. 고귀한 뜻을 품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모든 것을 바친 청년 지식인이었다. 지금의 그가 어떻든 그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내겐 여전히 소중하다. 김문수에 대해서만 그런 게 아니다. 스무 살에 김지하 시인의 작품을 읽으며 느꼈던 벅찬 감정도 귀하게 품고 산다. 그 감정은 독자인 내 몫이니까 1991년 이후 시인의 언행에는 개의치 않는다.
어제의 김문수와 비교해 오늘의 김문수를 욕하지 말자. 오늘의 김문수를 들어 어제의 김문수를 비하하지도 말자. 나는 어제의 김문수를 그 모습 그대로 좋아하고, 오늘의 김문수를 그 모습 그대로 싫어한다. 어제 아름다웠다고 해서 오늘 더 흉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판해야 할 대상은 김문수가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이다.
김문수는 휴일 서울 도심의 태극기 집회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극우 노인’일 뿐이었다. 국회의원과 도지사 경력을 내세우면서 극언과 망언을 내뱉었지만 세상에 해를 끼칠 실제적인 위험은 없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어찌 저리 되었나 혀를 찼을지언정 면전에 대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하필이면 사회적 대화와 타협을 도모해야 할 경사노위 위원장 자리에 앉혔다. 혈서 연기로 명성을 얻은 전직 국회의원한테 준 자리 비슷한 걸 주었다면 김문수가 이렇게까지 심한 욕을 먹지는 않았을 테고, 내가 김문수를 위한 변명을 쓰는 일도 없었을 것을! 하여튼 대통령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