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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Jobs 9 2021. 5. 6.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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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제1대(재위: 1392~1398) 왕.

 

재위 1392∼1398.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성계(李成桂)이다. 처음 자는 중결(仲潔)이다.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이다. 등극 후에 이름을 이단(李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화령부(和寧府)에서 태어났다.

이자춘(李子春)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했다. 특히 활솜씨가 뛰어났다.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주 01)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손자 이춘(李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했다.

이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로 있었다.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해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이자춘은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 지방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크게 활약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361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잡아 죽였다.

같은 해 홍건적이 침입해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 해 정월 친병(親兵)주 02)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탈환작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그는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평야에서 적을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1364년 최유(崔濡)가 원나라 황제에 의해 고려왕에 봉해진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원병(元兵) 1만 명을 이끌고 평안도지방에 쳐들어왔다. 이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隋州) 달천(獺川)에서 이들을 섬멸했다.

이 무렵 여진족이 삼선(三善)·삼개(三介)의 지휘 아래 동북면에 침범하여, 함주까지 함락하는 등 한때 기세를 올렸다. 이성계는 이들을 크게 무찔러 동북면의 평온을 되찾았다.

이 해에 밀직부사의 벼슬과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뒤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東北面元帥知門下省事)·화령부윤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1377년(우왕 3) 크게 창궐하던 왜구를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했다. 1380년에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其拔都: 阿只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섬멸했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1382년 여진인 호바투[胡拔都]가 동북면 일대를 노략질하여 그 피해가 극심했다. 이에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듬 해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대를 궤멸했다. 이어서 안변책(安邊策)을 건의했다.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東北面都元帥門下贊成事)가 되었다. 이듬 해 함주에 쳐들어 온 왜구를 대파했다.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이 때 최영과 함께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을 주살했다.

이 해 명나라의 철령위(鐵嶺衛) 설치문제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에 요동정벌이 결정되어, 이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결국 회군을 단행했다.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했다. 그리고 수시중(守侍中)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되어 정치·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전국의 병권을 장악했으며, 곧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신흥 정치세력의 대표로서 새 왕조 건국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13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었다.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해,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마저 박탈했다. 마침내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태조는 즉위 초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高麗)’라 칭하고 의장(儀章)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故事)를 따를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차츰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려 했다.

우선, 명나라에 대해 사대정책을 쓰면서, 명나라의 양해 아래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확정했다. 1393년(태조 2) 3월 15일부터 새 국호를 쓰기로 했다.

다음에는 새 수도의 건설이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사(王師) 무학(無學)주 03)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을 새 서울로 삼기로 결정했다.

1393년 9월에 착공해 1396년 9월까지 태묘·사직·궁전 등과 숙정문(肅靖門)주 04)·흥인지문(興仁之門)주 05)·숭례문(崇禮門)주 06)·돈의문(敦義門)주 07)의 4대문, 광희문(光熙門)·소덕문(昭德門)·창의문(彰義門)·홍화문(弘化門)의 4소문(小門) 등을 지어 왕성의 규모를 갖추었다.

법제 정비에도 힘써, 1394년 정도전(鄭道傳)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과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숭유척불정책(崇儒斥佛政策)을 시행해 서울에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폈다. 이처럼 그는 새 왕조의 기반과 기본정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후에 세자책립문제로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계비 강씨의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결정했다. 이에 이방원(李芳遠)주 08)의 불만은 대단했다.

1398년 태조의 와병 중에 이방원은 세자인 이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남은(南誾) 등이 자신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유로 사병을 동원해, 그들을 살해했다. 곧이어 이방석·이방번(李芳蕃)마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새 세자는 이방원의 요청에 의해 이방과(李芳果)로 결정했다.

태조는 이방석·이방번 형제가 무참히 죽자 몹시 상심했다. 그는 곧 왕위를 이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이 세제로 책립되었다. 곧이어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은 대단히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逍遙山)과 함주(咸州)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특히, 함주에 있을 때 태종이 문안사(問安使)를 보내면, 그 때마다 그 차사(差使)를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을 경우에 일컫는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이다.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태종 2)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태조는 만년에 불도(佛道)에 의탁했다. 덕안전(德安殿)을 새로 지어 정사(精舍)로 삼고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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