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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 주자, 남송, 문공(文公), 성리학 집대성, 주자학, 精神一到 何事不成(정신일도 하사불성)

Jobs 9 2025. 6. 2.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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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

 

송나라의 유학자

문공(文公)

朱熹| Zhu Xi

 

본명

주희 (朱熹)

원회 (元晦)/중회(仲晦)

회암 (晦庵)

시호

문 (文)

작위

휘국공 (徽國公)

 

출생

1130년 10월 18일

사망

1200년 4월 23일 (향년 69세)

출신

남송 휘주(徽州) 무원현(婺源縣)

부친

주송(朱松)

국적

남송

분야

철학 (유학(학문))

활동

성리학 집대성자

주역본의 저술

사서장구집주 저술

 

 

중국 남송의 철학자. 세부 분야는 유학, 특히 성리학의 창시자 쯤으로 알려져있다. 사실 창시보다는 집대성자에 가깝지만,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그의 이름을 딴 주자학이라는 말마따나 창시자로 여겨지는 편이다.

 

본명은 주희(朱熹).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다. 호(號)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등 여러 가지가 있다. 본가인 신안 주씨(新安 朱氏)는 남송 휘주가 본거지이며 주희의 아버지 주송 역시 휘주 출신이다. 그러나 주희는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현재의 중국 복건성 우계(尤溪)에서 출생하였으며 생에 대부분의 시간을 복건에서 보냈다. 19세에 진사가 되었다. 사후 영종에게 문공(文公)이란 시호를 받고 다시 휘국공(徽國公)으로 추봉되었다.

 

 

학문

 

주희는 일생을 바쳐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춘추전국시기의 유교는 소박하고 실천적인 성격을 띠었는데 이것이 후대에 고도로 발달한 불교 형이상학의 영향을 받아 송대에 이르러 이론적으로 심화되었다.

 

사서(四書)에 모두 주석을 단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보통 읽는 사서(논어, 맹자, 예기의 일부인 대학, 중용)는 주희가 자신의 해석과 종전의 여러 주석을 모두 모아 정리한 버전인 <사서장구집주>이다. 논어와 맹자의 주석서는 '집주'라 하지만 대학과 중용의 주석서는 '장구'라고 한다. 대학과 중용은 본래 텍스트가 장과 절로 분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두 경전을 주해하려면 장절의 분리작업(分章)부터 해야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주희는 특히 대학에는 원문에 손을 대서 자구를 바꾸었고, 심지어 소실된 구절이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는 자신이 글을 지어 넣기도 했다. 제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죽기 며칠 전, 인생 최후의 작업이 대학장구의 한 부분을 수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살아생전 남송 시절에는 탄압을 받기도 했으나 사후 주희의 사상은 학계에서 주류적 위치를 점해, 이후 성리학은 명, 청, 조선, 심지어 에도 막부에서도 관학의 지위를 얻게 된다. 특히 양명학 등이 인기라도 얻은 명, 에도 막부와는 달리 조선은 거의 시대 내내 성리학이 주류 학설로서 사회를 지배하다시피 했다. 한편, 청나라는 공식적으로는 국학을 성리학에 근거했다. 주희의 학문이 처음으로 공인된 원나라와 관학으로 군림한 청나라가 모두 비한족 정권이라는 것은 그의 사상체계 안에 보편성이 내재해있음을 잘 시사해준다. 중화문명을 계승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본성을 잘 실현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 사람이 굳이 한족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희 이전의 유학이 상상한 중화문명의 구성요소에 다양한 문예전통(유려한 문예, 아름다운 서예, 시가, 역사교양, 기타등등)이 포함되어 있어 외래인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장벽을 느꼈던 것과 비교해볼 만하다.

 

주희는 당대 불교와 도교를 격렬하게 비판했지만 정작 그의 사상은 불교와 도가의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본질적인 원리원칙을 지시하는 글자로 리(理)를 채택한 것도 화엄학의 영향이다. 이를 근거로 보면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참 재미있는 상황에 놓였다고 볼 수도 있다. 성리학을 앞세워 불교를 비판했지만 정작 그 성리학은 유교를 베이스로 하여 불교+도교를 섞은 것이니 말이다.

 

주희는 성리학의 상징과도 같은 서원 문화를 재정립하여 신사 계층의 형성에 기초를 놓았다. 서원 자체는 당말~북송 대에도 있었지만 11세기 후반에 초심을 잃고 과거 시험을 위한 입시 기관으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북송 말의 당쟁과 정강의 변의 혼란 속에 여러 서원이 버려지고 말았다. 서원의 관학화와 세속화에 거부감을 느낀 주자는 명망이 자자했으나 폐철되었던 백록동 서원을 재건하였고 백록동 게시를 적었다. 이는 후대의 서원들과 16세기 조선의 서원 건립에 큰 영향을 주며 우리가 흔히 아는 서원의 모습과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근대 이후에는 주로 비판을 받는 대상으로 전락하여 비주류 신세를 면치 못한 적도 있었지만, 21세기 들어 다시 이전보단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황 같이 성리학의 계보를 충실히 이어받은 학자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것도 이런 성리학의 재발견 때문이다.

 

 

 

경세론

 

주자는 무조건적인 복고주의나 통제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토지론만 봐도 그러한데 주자의 토지론이란 간단하게, '부의 불평등을 막고 자발적인 경제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낮은 세율과 공평하게 나뉜 토지가 필수이다, 그렇지만 토지는 적고 사람은 많은 현실에서는 이걸 진짜 하려면 국가 개입이 지나쳐지고, 그럼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일단의 토지 국유화 대신 토지 간 경계를 확실하게 규정하고 토지의 거래와 양도를 일정 정도 허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라는 것이다.

 

주희는 삼대의 이상 통치를 찬양했지만, 남송의 현실에서 정전제의 복원을 주장하는 과격한 복고주의에 매몰되진 않았다. 그는 남송대의 현실에서 정전제의 복원은 이미 불가능해졌으며, 토지의 재분배를 위해 국가가 무리하게 경제에 개입할 경우 예기치 못한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또한 정전제의 복원을 위해선 농지의 압류와 재분배가 불가피하므로 황무지는 광활하고 인구가 희소했던 서한 초기나 동한의 중흥기가 마지막 기회였다는 주장이다. 또한 그는 맹자의 왕도를 논하면서 철저한 토지 조사에 근거한 공정한 징세와 투명한 재정 지출만이 정전제의 이상에 수렴해가는 유일한 현실적 대안임을 역설하고 있다. 요컨대 그는 남송의 현실에선 부민과의 타협 속에서 점진적 개선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정전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했던 것이다.

 

한편 상앙의 천맥제와 양염의 양세법에 대한 주희의 비판적 입장과 결부시켜 보면, 그는 과세의 투명성과 형평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국가 주도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듯하다. 주희는 기본적으로 경작지의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공공 부문과 사적 영역이 동시에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토지 겸병과 불법 점유는 판적의 혼돈과 전세의 불균등을 야기했고, 그 결과 불평등의 심화 및 조세 정의의 실패가 발생했다고 보았다. "땅이 없는 빈민이 세금을 내고, 땅을 가진 부빈은 조세를 회피하는" 부조리가 생겨난 것이다. 주희는 이를 모두 경계가 부정한 결과라 판단했다. 주희는 백성의 직업적 안정성, 직능의 분화, 토지 매매의 금지 및 황무지 개간의 장려를 통한 자영 농민 계층의 육성이 농촌 경제의 기초라 생각했다. 그는 고대의 정전제를 모방해 "호구의 숫자에 따른 토지 점유의 원칙" 아래 "일부가 100무의 전지를 점하는" 이른바 '수전지제'의 재도입을 경계법 시행의 기본 전제로 주장한다.

 

주희는 그러나 당초의 균전제와 같은 토지의 국유화 및 국가 권력에 의한 토지의 균등 재분배 등 파격적 주장의 실효성을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부 관료와 공신들에게 할양되었던 공전의 경우, 법적 재정비를 통해 침탈, 매매 및 대여 등의 불법 행위를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그는 일반 지주 및 자영농 계층의 사적 소유권을 상당 부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토지의 소유권을 취득하는 방법으로 상사, 세습, 혼인, 매매 등의 형식 모두 인정하고 있으며, 토지의 사용과 처분에 있어 대여, 매매, 교환 등을 일정 정도 허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주희가 이 정도의 토지 사유권을 인정하고 있음은 도학의 경세 담론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표면적으로 정전제는 토지의 국유화를 전제하고 있지만, 결국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자영 농민층 육성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정전제의 이상에 따라 토지는 원칙적으로 국가에 귀속되어야 하지만, 사용 및 처분을 포함하는 실질적인 소유권은 결국 백성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면 과격한 복고주의자의 수사를 차용하지만, 종합적으로 판단컨대 주희는 적어도 토지의 소유와 분배의 문제에 관해선 오늘날로 치면 온건한 중도 좌파 정도의 입장을 견지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외에 번잡하고 과도한 예법을 실정에 맞게 간소화하고, 기존의 미신에 가까운 천인감응 사상을 타파한 것도 큰 공로라 할 수 있다.

 

 

저작

 

주자어류

모두 140권 1만 4200여 조목으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엄밀히 말하면 주희가 쓴 것은 아니고 주희의 강의를 제자들이 받아적은 필기노트를 종합해서 주제별로 분류한 것이다.

 

약 50% 정도가 한국어 혹은 일본어로 번역된 듯하다 

 

회암집

주희의 문집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 문공집(文公集) 등 여러 이명이 있으나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서양으로 따지면 전집같은 것으로, 그 사람의 글을 모두 모은 책이라는 뜻이다.

 

전통적인 문집의 체제에 따라 여러 장르의 운문과 산문을 모았지만 단독저서(경서에 대한 주석서 등등)는 빠져있다. 또한 주희 제자의 노트필기이지 주희 본인의 글이라고 할 수 없는 주자어류 또한 빠졌다.

 

근사록

주자와 여동래가 집필한 책으로, 주돈이 등 전시대의 여러 성리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한 후 이에 대해 논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주자 공인 성리학 입문서이다.

 

사서집주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사서에 주석을 단 것으로, 성리학과 그것을 따르는 조선에서는 표준적인 주석서였고 학문적 의의도 크다.

 

사서혹문+논맹정의

사서집주와는 별개로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사서를 해설한 저서이다. 논맹정의는 논맹혹문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논어와 맹자에 대한 모든 주석들을 총망라한 저서이다.

 

주역본의, 역학계몽

주역에 대한 주석서로, 우리나라에는 정자의 주역전의가 주로 쓰여서 다소 콩라인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많이 쓰였다. 역학계몽은 역학 전반에 대한 입문서로, 주역본의 이전에 역학에 입문하는 초학자를 위해 쓴 저서이다.

 

시집전

시경에 대한 주석서. 다른 주석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표본 시경 주석서로 쓰였다. 담헌 홍대용이 청나라에 갔다가 청나라 유학자들이 시집전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말을 듣고 크나큰 깨달음을 얻게 해준 저서이기도 하다.

 

주자가례, 의례경전통해

본래 주자가례는 의례경전통해의 한 편으로, 의례경전통해는 유교 경전 의례를 주석한 책이다. 주자 생전에 완성되지 못하고 제자들이 완성했다.

 

태극도설해, 태극본의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해설한 책으로, 조선시대 태극론 이해에 핵심적인 책이었다.

 

통서주

주돈이의 저서 통서를 해설한 책.

 

연평답문

주자와 스승 연평 이동과 학문에 대해 토론한 편지를 모은 것.

 

주자대전(성리대전)

생전에 쓴 책은 아니고 명나라 시대에 간행된 책으로, 주자를 비롯해 모든 성리학의 학설과 내용, 주장을 모조리 담은 성리학 저서의 결정체이다. 조선에도 수용되어 큰 영향을 미쳤다.

 

소학, 동몽수지

둘다 어린이용 교재이자 수신서.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소학이 압도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주자전서(朱子全書)

 

상해고적출판사와 안휘교육출판사가 2002년에 함께 내놓은 컴필레이션으로, 주희와 관련된 텍스트의 완성판 총집편 같은 서적이다. 현재 업계에서 주희의 글을 인용할 적에 표준으로 사용한다. 현대 하드커버 장정으로 모두 27권이고 수록 저작은 다음과 같다.

 

1、 주역본의, 역학계몽, 시집전

2—5、의례경전통해

6、사서장구집주, 사서혹문

7、논맹정의

8—11、자치통감강목

12、팔조명신언행록, 이락연원록

13、소희주현석전의도, 태극도설해, 통서주, 서명해, 근사록, 연평답문, 동몽수지, 소학, 음부경주주역참동계고이

14—18、주자어류

19、초사집주, 창려선생집고이

20—25、회암선생주문공문집(이게 회암집이다)

26、주자일문집록

27、부록

 

 

 

명언

 

공부에 대한 명언도 많이 했다.

 

精神一到 何事不成(정신일도 하사불성) - 정신을 하나로 모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소년이로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 -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한순간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고려 고종대 주희의 증손자인 주잠(朱潛)이 몽골 제국의 침략 위기로 어지러운 남송을 떠나 고려로 귀화해 주희를 시조로 삼고 신안 주씨의 중시조가 되면서 주희의 후손은 대한민국에도 남아있다. 주(성씨) 문서 참고.

 

참고로 고려 열전에 나오는 주열은 주잠의 아들인 주여경의 아들이 아니라 주경여의 아들이다.

 

현대중국의 교육과정에서는 소학교에서 주희의 작품 2개를 배운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 영역인 윤리와 사상에서 으레 킬러 파트로 출제된다. 동아시아사에서도 어쩌다 한 번 선지나 지문으로 어렵게 나온다카더라.

 

유교 도통론을 정립한 사람이다. 도통은 유교의 도가 전승된 계보인데 요-순-우-탕-문왕-무왕-주공으로 이어진다. 주공 이후로 끊어진 성인의 계보를 이은 게 공자, 공자의 후계자 맹자, 맹자 이후 다시 오래도록 끊어진 계보를 이은 것이 북송의 주돈이, 주돈이의 제자 정호와 정이, 그리고 정호와 정이의 4전제자가 주희가 된다.

 

보통 삼국지연의 매니아들은 유비의 촉한(蜀)을 정통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주희 역시 촉한 정통론(蜀漢正統論)을 지지했다. 이전까지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가 조위(魏)를 정통으로 보았고,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는 모두 정통으로 보지 않는 무통설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주희가 자치통감을 보완한 자치통감강목을 펴내면서 촉한 정통론을 주장한 이후 이쪽에 무게가 실렸고, 지금의 삼국지연의에서 볼 수 있는 국가상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정립되었다. 다만 촉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이미 송나라 이전부터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딱히 주희 혼자서 주장해 이렇게 대세가 된 것은 아니다. 이미 북송 연간부터 관우만 해도 공적, 사적인 차원에서 신으로 숭배받았다. 촉한 정통론 역시 상기했듯 동진 시대부터 정치적인 이유기는 했지만 이미 등장해 있었다.

 

주희가 촉한 정통론을 내세운건 본인이 제갈량의 광팬이었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제갈량에 대해 "왕을 보좌할 만한 뛰어난 재주가 있고 유학자의 기상이 있으니, 이윤과 강태공에 비길 만하고 관중과 악의보다 낫도다."라는 평을 할 정도로 제갈량을 높이 평가했다. 아예 와룡암이라는 암자까지 지어서 기거했을 정도고, 심지어는 "맹자 이후 인물로는 오로지 장량과 제갈량, 이 두 사람만 있었을 뿐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신릉군 빨던 유방이 생각난다

 

대학자라는 인상과 별개로, 비구니 둘을 유혹해 첩으로 삼았다는 의혹이 있다. 그러나 해당 의혹은 주희가 반도학파에게 위당으로 몰리고 있던 시기에 나온 것으로, 반도학파는 주희를 탄핵하기 위해서 이 의혹을 제기했다. 그래서 이 의혹이 사실인지 아니면 반도학파의 루머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주희를 위학으로 몰기 위해 이 의혹을 제기한 심계조는 정작 이 의혹을 핵심적인 죄로 언급하지도 않았다. 수징난은 주희가 지방관 시절 비구니를 환속시킨 일이 있는데, 이 일이 와전되어 반도학파에게 이용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마지막으로 주희가 이 사건을 자신이 한 일로 인정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깐깐한 성격 때문인지 정적이 많았고 특히 자신과 학풍이 다른 당중우와 대립하여 1182년에 6차례에 걸쳐 당중우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탄핵 내용 중에 당중우가 기녀 엄예와 놀아나 음행을 일삼았다는 내용도 있는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엄예를 체포해 1개월 넘게 옥사에 가둔 후 태장과 협곤 등 가혹한 고문을 가하기도 했으나 결국 증거를 얻는데는 실패해 이 사건 자체가 주희 인생의 흑역사가 되어버렸다.

 

필생의 논적인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1139 ~ 1193)이 사망하자, 그를 조문하고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한 일도 있다.

"애석하다. 나의 고자(告子)가 죽었다."

 

여기서 고자는 맹자의 논적으로, 성무선악설을 주장한 그 사람 맞다. 저 발언은 《주자어류(朱子語類)》의 한 대목인데, 이 충격적인 한 마디 이후로 어떤 부연설명도 없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는 해석하기 나름. 《맹자》에서 맹자는 고자와 논쟁을 벌이면서 "천하 사람들을 선동하여 인의(仁義)를 깨부수는 것은 바로 선생의 말씀일 것이오!"하고 고자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고자는 일찍이 나보다 먼저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이르렀다."하며 그를 인정하기도 했다. 즉, 주자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일생일대의 라이벌의 죽음을 허탈한 마음으로 한탄한 것일 수도 있고, 육구연이 끝내 자기 학설에 동의 안 하고 이단으로서 죽었음을 비아냥댄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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