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종교성
유교의 종교적 측면은 경천사상에서 볼 수 있다. 은주시대에 걸쳐 숭앙의 대상이었던 ‘상제’와 ‘천’은 『시경』 · 『서경』을 비롯한 오경 속에 많이 나타나 있다. 경천사상은 우주와 인간을 주재하는 초인간적 · 초자연적 절대신에 대한 숭경(崇敬)의 자취를 담고 있다. 상제는 인간을 감찰하고 화복을 내려주는 무한한 권위를 지닌 절대 타자(絶對他者)로서 인식되었다. 상고에는 ‘상제’와 ‘천’에 대한 신앙이 비슷했지만, 주대로 내려오면서 천의 의미가 변화하였다. ‘천(天)’이라는 글자 속에 이미 ‘대(大)’라는 사람의 뜻이 내포되어 있듯이 초월적 권위가 인간에게 내재함으로써 인간과의 관련성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초월적 주재자의 외적 권위를 직접적으로 일컫기보다는 인간의 책무와 도리를 중시해 덕(德)의 개념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제’나 ‘천’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 전환은 공자에 이르러서였다. 공자는 ‘천’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신성성과 구극성을 인간에게 내재화했다. ‘천‘은 외경적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인간의 성숙(仁)과 주체적 각성(德)에 의해서 ‘천’의 세계가 열릴 수 있다고 보았다. 공자는 천인관계(天人關係)에서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파악하였다. 공자는 초월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도, 특정한 예배의 형식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상제’에 대한 관념은 ‘천’ 속에 수렴되고, 그것은 다시 인격 속에 내재되어 인간의 실질적 태도와 삶 자체가 중요시되었다. ‘하늘’의 문제를 인간의 삶의 행태 속에 수렴시킴으로써 인간 행위를 떠난 상념의 세계를 건설하지 않았다.
유교에서는 제사를 중요시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행하는 제의는 기복행사(祈福行事)이지만, 유교의 제의는 윤리성과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유교의 제의는 대가나 보상을 요구하는 구복(求福)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유교의 제의는 주술적 요구를 배격하고 세속 세계를 도덕화하려고 한다. 전통적인 습속, 오사(五祀)나 절사(節祀)주6와 같은 국가행사나 민간신앙과 습합(習合)한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교의 제의는 건실한 윤리성을 기반으로 인간의 외형적 · 절차적 관계를 설정할 뿐만 아니라, ‘고무진신(鼓舞盡神)’하고 ‘신이명지(神而明之)’하는 신명성(神明性)을 다함으로써 인간의 주체적 체험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유교는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하는 데 힘쓰기를 강조하며, 내세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취한다. 공자는 초인간적 존재나 내세의 삶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표(言表)하지 않았다. 공자는 자신이 처한 곳에서 도리를 다하려고 했을 뿐, 내세의 영원한 삶을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의 문제는 삶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실존적 깊이를 가지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느냐가 보다 중요한 관심사였다. 공자는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도(道)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할 정도로 인간의 인간다움, 즉 도와의 일치를 추구하였다.
공자는 인생에서 인격적으로 최고의 가치를 성취함으로써만 인생의 의미를 다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공자는 “믿음을 돈독히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篤信好學)”, “죽음을 당하더라도 도를 참되게 하며(守死善道)”,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殺身成仁).”고 말하였다. 누구나 스스로의 본분을 자각하고 실천함으로써 평화와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도리를 의미하는 인은 자식을 사랑하고(慈) 부모에게 효도하는(孝) 친자관계(親子關係)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식은 부모의 몸에서 직접 발생한 관계이므로 부모(親)-자식(子)은 무조건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 관계에서 본질적 특성은 ‘사랑’과 ’존경‘이다.
인간 관계는 일반 사물과 다르게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인격이 없으면 인간 관계가 파괴될 수밖에 없다. 부모-자식 사이의 사랑과 존경이 사회로 확대되지 못하면 이기주의적 상업 정신으로 전락하기 쉽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은 부모가 죽어서도 제사의 형태로 유지됨으로써 사회의 정신적 방향이 정립된다. 조선(祖先)에 대한 제사는 자신이 생겨난 근원을 반성해(報本追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자각하는데 있다. 의례는 효성의 정감을 담는 그릇이요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존경으로부터 자신의 존재의의를 느낀다.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그 객관적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현세에 살아 있는 이들의 진실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 있는 이 섬기기와 같이 한다(事死如事生).”고 했고, “내가 직접 제사하지 않으면 제사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吾不與祭 如不祭).”고 하였다. 효는 존경의 마음이 조상뿐만 아니라 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교의 중요한 종교적 덕목이다.
‘유교란 무엇이며 유교는 종교인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교는 윤리적 실천도덕일 뿐 종교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유교에 대한 일반적 개념이다. 유교란 사람답게 사는 것을 밝히고 인간 본래의 의미를 찾아서 행복이 넘치는 대동세계를 건설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것이며 공자에 의하여 완성된 것이다.
공자는 인간의 본성이 어질다는 인(仁)사상을 기초로 하여 인도주의를 주장하였다. 인은 사람의 원리요. 착한 마음으로서 모든 사람이 본디 타고난 고유한 인간성이다. 인간은 윤리를 실천하여 행복한 가정, 밝은 사회,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데 본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유교의 경전은 사서오경으로 그 분야가 대단히 넓고 깊이가 지극히 깊어서 간단히 요약하여 말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 요체 중에 중요한 것 두 가지만 아래와 같이 논해 본다.
우선으로 인생론은 우주만물을 주체적으로 경영하여 가장 보람 있는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삶이다. 인간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즉 사랑 정의 예절 지혜 믿음의 아름다운 인간성을 개발하여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어른과 어린이가 질서를 지키며 벗을 믿어 의리를 지킨다.
다음은 교육론으로 인간성을 함양하여 인격을 완성하는 것을 그 이념으로 한다. 옥돌은 다듬어야 그릇이 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리를 알지 못한다. 태교를 비롯하여 대학교육에 이르기까지 지덕체(智德體)를 골고루 발달 시켜서 원만한 인격과 탁월한 능력을 배양하는 교육을 중요시해야 한다. 스승을 어버이처럼 존경하고 학생을 사랑하여 차별 없이 가르치는 걸 원칙으로 한다.
유교의 사생관은 순리적으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다는 것이다. 유교의 진리는 이승에서의 삶에 한을 남기지 않는 데 있다고 본다. 그러면 동북아시아인은 무엇을 가장 무서워하는가? 그것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왜 죽음을 무서워하는가? 그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현세만 믿으며 이 세상은 즐거운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세상은 즐거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서 고민이란 이 세상에서 떠나는 것이다. 더구나 기독교 신자와 같이 신에 불려간 것도 아니고 불교도와 같이 윤회전생(輪廻轉生)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은 우리에게 반드시 닥쳐온다. 인간은 이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설명이 납득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믿는다. 즉 종교가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종교란 죽음과 사후의 설명자를 말하고 있다.
이 죽음과 사후의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는 데 유교는 성공했다. 즉 유교는 동북 아시아인에게 종교로서 성공하였다. 이렇게 말하면 즉시 반론이 나올 것이다. 불교는 동북 아시아인에게 정착되고 있지 않는가라고 말이다. 그르나 그것은 틀린 견해다.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불교의 실태는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와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즉 우리들의 불교는 유교의 조상숭배를 받아들여 소위 유교적 색채를 띤 불교인 것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의 본래 모습과는 상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교는 일반적으로 종교보다는 도덕 철학 또는 윤리학으로 여겨집니다. 유교는 인(仁)이라는 최고 이념을 바탕으로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를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는 인간 삶의 윤리적, 정치적 실천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유교는 천(天)과의 관계, 스스로 수양하여 천인합일을 추구하는 방법, 제사와 윤리적 실천 등을 통해 종교적 성격을 띠기도 합니다.
유교의 종교적 측면:
천(天)과의 관계:
유교는 천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인간은 천명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는 인간의 삶과 우주의 질서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수양과 천인합일:
유교는 스스로 수양하여 인격과 도덕성을 함양하고, 이를 통해 인간과 천(天)이 하나 됨을 추구합니다.
제사:
유교는 조상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며, 이는 가족과 공동체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조상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윤리적 실천:
유교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등의 윤리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를 실천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시키고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합니다.
유교의 도덕 철학적 측면:
윤리학:
유교는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개인의 행복을 증진합니다.
정치학:
유교는 유학의 사상이 정치에 응용되어, 왕의 덕(德)과 백성의 행복을 강조하며, 공정한 정치 체제를 추구합니다.
사상:
유교는 인간의 본성, 우주론, 삶의 의미 등을 다루는 사상 체계이며, 이는 동아시아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론:
유교는 종교와 도덕 철학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으며, 현대에는 주로 윤리학 또는 도덕 철학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유교는 종교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유교가 인간 삶의 모든 면에 걸쳐 의미를 부여하는 체계임을 보여줍니다.
유교(儒敎)는 학문일까, 종교일까?
죽은 후 복락보다 현실 속 수양에 더 큰 비중
기독교나 천주교, 불교 등이 종교라는 데는 절대다수의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유교가 종교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식적으로’ 유교는 종교다. 유교는 불교·개신교·원불교·천도교·천주교·한국민족종교협의회와 함께 대한민국 7대 종단 중 하나이며 유교는 현재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에도 가입돼 있다.
1945년 전국 유림 대표가 모여 창립한 유림 단체이자 종교단체인 ‘성균관유도회’는 지난 1995년 11월 28일 서울 명륜동 성균관유도회관에서 임시 유림총회를 가지고, 국내에 유교가 전래된 지 1600여년 만에 유교를 종교로 정식 승인했다. 공자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윤리가 바로서고 도덕의 실현되는 사회를 이룩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시한 ‘종교’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이 자리에서 성균관유도회는 종단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총전(總典)직’을 신설하고 원로원과 평의원을 구성하는 등 유교를 ‘종교’로 공식 선언하는 ‘종헌(종교헌법) 제정안’을 의결했다.
성균관 유림회관 관계자는 “살아서 현재의 복을 빌고 죽어서는 안식처가 있다는 내세를 믿는 내세관이 없다는 점에서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우리가 알 수 없는 절대자에게 복을 비는 것보다 우리의 성현인 맹자나 공자님 같은 스승을 본 받아 자기수양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종교의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유교도 넓은 범위로 보면 종교”라고 말했다.
유교제도개혁특별위원회가 마련한 종헌을 살펴보면, 종단의 정식 명칭은 ‘성균관유교회’이며 기존의 유도회는 ‘신도회’ 역할을, 성균관은 종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는다고 명시돼 있다. 성균관유교회의 ‘총전’은 가톨릭의 추기경이나 불교의 종전 비슷한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종단의 최고 지도자로서 종무 집행 조정권을 갖는다.
또 종헌에서는 공자(孔子)를 ‘종사(宗師)’로 명시하고 사서오경을 경전으로 삼는다고 밝혔다. 이후 유림 안팎에서 이 종헌을 둘러싸고 벌어진 격렬한 찬반 논란과 반대에 부딪혀 유교의 종교화 운동은 꾸준히 추진되지 못했지만 유교가 종교라는 대전제만은 현재까지 주효하다.
유교는 약 2500년 전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난 ‘공자’에 의해 창시됐다. 때문에 유교를 ‘공자의 학문’이라는 뜻에서 공학, 공자교, 공교라고도 한다. 또 다르게는 유가, 유도, 유술, 유학 등으로도 일컫는다.
‘유교’라는 명칭은 창시될 당시 ‘공자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며, 이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제자들이 늘어나면서 제자들에 의해 형성된 학파가 ‘유가(儒家)’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내에는 234개의 지방 향교와 성균관 사당 문묘까지 총 235개가 있다. 성균관 유림회관 관계자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360개의 향교가 있었지만 나머지는 이북에 있다”고 말했다.
이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 유림이 형성돼 있으며 유림에서 선출하거나 추대한 전교(典校)를 중심으로 장의, 교수 등이 향교의 운영을 맡는다.
향교의 재산은 전국 16개 도에 설치된 향교재단이 관리 및 담당한다. 성균관도 이와 같은 형태로, 성균관장은 유림 조직을 이끌고 지도하며 재산 관리는 재단법인 성균관이 담당하고 있다.
유교의 근본 사상을 인(仁)이라고 한다.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仁)은 곧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유교 사상에 따르면 인(仁)은 인(人)과 이(二), 곧 이인(二人) 두 사람으로 이뤄져 있다. ‘너와 나’ 사이의 사귐에 흐르는 것은 사랑이라는 의미다.
불교나 기독교 등 대다수 종교의 근본 사상 역시 ‘사랑’이다. 이들과 유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차이점은 ‘단계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모든 인류에게까지 확산시킨다’는 점이다.
유학(儒學) 또는 유교(儒敎)라고 말할 때의 ‘유(儒)’ 안에는 무슨 부드러울 유(柔), 젖을 유(濡), 젖을 윤(潤)이라는 세 가지 뜻이 함께 담겨 있다. 세 글자가 다 ‘젖는다’라는 의미와 관련되는데, 유교 사상에 따르면 이는 도(道)를 배워 자기 몸에 젖게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도를 자기 몸에 젖게 하는 일을 자기 수양 곧 ‘수기(修己)’라고 하고, 남을 가르쳐 편안하게 만드는 일을 유교에서 ‘안인(安人)’이라고 하는데 이 ‘수기’와 ‘안인’이 유학 사상의 양 수레바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의 목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스스로의 수양에 힘써 종래에는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유교는 죽은 후의 복락을 추구하는 타 종교와 그 궤를 달리한다. ‘현실에서 어떻게 자신을 수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사서 중 하나인 대학에 따르면 유교 신도가 지켜야 할 교리로 ▲밝은 덕을 밝히고(在明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고(在親民) ▲지극한 선에 머무른다(在止於至善) 등의 삼강령(三綱領)이 있다.
또 자신에서부터 시작해 외적으로까지 유교 사상을 완수하게 하는 8단계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등의 팔조목(八條目)이 있다.
종교? 철학?
"유교를 종교로 보아야 하는가? 철학으로 보아야 하는가?"하는 논란이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종교와 철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정확히 짚을 필요가 있다. 흔히 사람들은 종교와 철학을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이러한 구분은 서구 및 중동 지역 특유의 역사적 분리, 즉 헤브라이즘(유일신 신앙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전통)과 헬레니즘(고대 그리스의 이성 중심 철학 전통)에서 비롯된 구획에 가깝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분은 서구 중심적 시각에서 형성된 것이며, 동아시아나 인도와 같은 다른 문명권에서는 철학과 종교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더 나아가 서양조차도 그 기원을 살펴보면, 철학과 종교는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핵심 인물인 플라톤은 그리스 신화와 종교적 전통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유체계를 전개했으며, 그의 이데아론이나 영혼불멸론 등은 신화적 상징과 형이상학이 결합된 종교철학적 체계에 가깝다. '향연'에서는 에로스에 대한 탐구가 신화적 언어로 전개되며, '파이돈'에서는 영혼의 불멸과 내세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펼쳐진다. 특히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적 탐구가 다이몬(신령 혹은 신적 존재)의 인도에 따른 것이라 고백하며, 단순한 합리주의자가 아니라 신적인 소명을 받은 인물로 자신을 인식한다. 결국,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플로티노스에 이르기까지, 서양 고전 철학은 신적 질서, 우주의 궁극 원인, 영혼의 구조 등에 대한 탐구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현대적 의미의 '세속적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따라서 유교가 종교인가 철학인가를 논하기에 앞서, 철학과 종교를 나누는 기준 자체가 역사적으로 제한된 배경에서 나온 구분이며, 이를 무비판적으로 다른 문화권에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점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유교는 이성과 제사의례, 도덕윤리, 정치철학을 모두 포괄하는 전통이며, 그것을 단지 '철학'으로 축소하거나, 반대로 '맹목적 종교'로 오해하는 이분법은 문화사적 무지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결론부터 말하면, 유교는 종교다. 그리고 어떤 사상이 종교라는 사실이 '비합리적인 믿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교가 종교인지 아닌지를 둘러싼 논쟁은 종종 대중적 차원에서 반복되며, 그 근저에는 '종교'라는 개념에 대한 서구 중심적이고 근대적인 오해가 깔려 있다. 유교에는 조상 제사, 천명(天命), 도(道), 성인 숭배 등 분명히 종교적 제의와 규범 체계, 초월적 질서에 대한 믿음이 존재한다. 그런데도 일반인들은 "유교는 초월신을 믿지 않으니 종교가 아니다",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무신론이다"같은 단편적 관점으로 유교를 철학으로만 단정지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종교를 비합리적이거나 맹목적인 믿음 체계로 간주하는 오해, 그리고 종교와 철학을 인위적으로 이분화한 서구 근대적 개념을 동양의 유불도 철학에 무리하게 적용하려다 발생하는 문화적 왜곡이다.
고대 동양 사회에서 종교와 철학은 본래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가르침(敎)'은 단지 '신앙'만이 아닌 삶과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고, 인간의 도리를 규정하며, 의례와 정치 질서를 포함하는 총체적 세계관이었다. 유교에서 말하는 종교(宗敎)는 '가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가르침'이란 뜻에 가깝고, 이는 불교와 도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동양 문명에서는 종교와 철학, 윤리, 정치가 하나의 구조로 통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교가 철학적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고 해서 종교가 아니라는 식의 이분법은 동아시아 전통 사유 구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판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유교는 단순한 윤리체계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기반을 갖춘 종교 체계다. 특히 그 중심에는 하늘(天)에 대한 개념이 존재한다. 초기에는 신과 조상령들의 의지가 담긴 운명적 힘에 가까웠던 '천'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도덕적 인격성과 초월성을 갖춘 절대적 질서의 원천으로 발전했다. 맹자는 이를 '하늘은 인간에게 도덕적 감각을 부여한다'는 식으로 정립했고, 중용에서는 '성(性)은 천의 명령이며, 도는 성을 따르는 것'이라 하여 철저히 종교적 구조 속에서 윤리와 철학을 전개하였다. 이는 불교의 법신불 개념, 도교의 도(道)와 무위자연 사상과도 연결되며, 동아시아 전체 사상의 신학적 구조화 과정 속에서 유교 역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종교로 정립되었다.
중국 사상에서 ‘하늘(天)’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자연 현상 이상의 신적인 위상과 의지를 지닌 절대 질서로 발전했으며, 그 기원은 상나라 시대의 조상령 숭배와 자연 숭배의 결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나라 사회는 철저한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삼황오제로 대표되는 선조 및 영웅 조상들에 대한 경외와 천둥, 비, 태양, 강물 등 자연현상에 깃든 신령에 대한 제사가 함께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조상령과 자연령이 구분되지 않고 초월적 권능과 위엄을 가진 의지적 존재들로 인식되었고,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궁극적 실체로서 점차 '하늘'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하늘'은 상제(上帝)라고도 불리며, 단지 기후나 하늘 그 자체가 아닌, 세상의 운명을 관장하고 인간의 삶을 심판하는 두려운 존재로 여겨졌다. 상나라 왕들은 천명을 위임받은 자로 자처했으며, 왕실 제사는 천상의 조상령과의 직접적인 소통이자 정치 권위의 원천이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상나라는 강의 범람과 가뭄이 빈번한 한랭건조한 기후 속에서 자연재해를 매우 많이 겪었기에, 이 하늘(또는 조상령들의 총체로서의 상제)의 뜻을 달래기 위해 실제로 인신공양이 매우 빈번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하늘' 개념이 단순한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극도의 공포와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실체적 존재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인신공양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결국 상나라에서 하늘은 자연의 질서, 조상 숭배, 정치 권위, 죽음과 희생이 통합된 세계관의 정점이었으며, 이로부터 중국 고대 사상의 초월자 개념이 점차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주나라로 넘어가면서 인신공양은 줄어들고 마침내 성인 공자에 의해서 인신공양이 폐지되고 도덕적 질서로서의 천(天) 개념이 정립되지만, 그 기저에는 여전히 상대적이고 가혹하며 공포스러운 '하늘의 의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유교의 천명사상, 도교의 자연 순응 사상, 중국 대승불교의 업과 인과론과도 차례로 연결되며, 동아시아 전체에서 하늘은 도덕적 권위이자 운명적 질서로서의 종교적 상징으로 기능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유교는 그 본질상 윤리학과 형이상학, 사회철학과 제의체계를 모두 포괄하는 종교적 전통이다. 단지 신의 형상을 명시하지 않고, 구체적인 계시를 통한 종말론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종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구조는 초월자에 대한 이성적 접근, 공공윤리와 국가 운영의 기반, 인간 존재의 도덕적 의미를 탐구하는 체계로서 종교의 본령에 더 충실한 전통일 수도 있다. 현대 종교학계에서 유교가 여전히 '종교'로 분류되는 것은 이 같은 맥락을 반영한 결과이다. 유교가 철학적 요소를 가진다고 해서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불교가 공(空)을 말하니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이라는 주장만큼이나 피상적인 해석이다.
동국통감을 비롯해 삼국사기는 철저히 유학자의 시각에서 쓰여진 역사서다. 그런데 정작 삼국사기에서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수한 배경을 서술하면서 "또한 당나라 군사의 신령한 힘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지역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들었으니, 가히 성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신령한 힘'이라는 표현은 당나라의 군사력이 실제로 초자연적이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단순한 수사적 표현인지는 해석이 갈릴 수 있다. 만약 '신령한 힘'이라는 표현이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받아들여졌다면, 이는 역사 철학을 넘어 종교적 서술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견훤이 신라를 평하면서 남긴 말로 알려진 "천도(天道)는 되돌려주기를 좋아합니다."라는 구절도 있다. 여기서 '천도'는 단순한 자연의 법칙인지, 아니면 초월적 의지를 지닌 절대자의 뜻인지가 모호하다. 문맥상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의 논리처럼 보이지만, '천도' 자체가 현실 너머의 질서를 암시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언어로도 읽을 수 있다. 참고로 동국통감에서는 이 '신령한 힘'이라는 표현을 보다 정치적인 어조로 완화하여 ‘당나라의 위엄을 빌려’로 수정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표현들은 단지 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교 내부에서도 종교적 감수성과 철학적 담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예를 들어 '천도'라는 개념은 노자의 도덕경에도 등장하며,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이 나올 때마다 일부 학자들은 "도교적 발언"이라고 비판했고, 이는 결국 이기이원론을 둘러싼 조선 시대 당쟁으로까지 확산되기도 했다. 사실 유교 지식인들 중에는 불교, 도교와도 교류가 활발했던 인물들이 많았다.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 역시 고승들과 교류하며 불교 관련 시를 남겼던 인물이었고, 조선 시대 유학자들 중에서도 유교적 윤리를 따르면서도 은근히 도교 사상에 매료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는 유가, 불가, 도가가 사상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독립 체계가 아니라 상당 부분 겹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도교를 좋아하거나 선종(불교)을 추구하는 이들은 도가와 도교를 구별하려 하지 않는 일체론적 관점을 취하는 경향이 강했다. 반면, 정통 유학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철저히 분리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도가-도교 분리론은 초기 불교나 교종 계열 불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주장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단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중국 사상사에서도 반복되었던 보편적 현상이다. 고구려 역시 초기에는 도교적 영향을 받아 불교를 탄압했으며, 도교와 불교, 유교 사이의 경쟁과 융합은 동아시아 전통 종교문화의 핵심적 특징이었다. 다시 말해, 유교 사상이라 하여 철학적으로만 해석하려는 시도는 실제 유학자들의 사유 및 표현과는 괴리가 큰 시도이며, 유교 역시 그 뿌리부터 초월적 질서와 종교적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유교는 종교인가.
한국유교학회(회장 최영진 성균관대 교수)가 4일 영남대에서 마련한 학술회의에서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었다. 학회는 이날 ‘한주(寒洲)학파와 조선성리학’을 큰 주제로 논의했지만 종교성에 대한 관심은 각별했다.
퇴계 학통을 이어받은 한주 이진상(李震相·1816∼86)은 성주에서 성리학과 경전을 탐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평생을 보낸 유학자다. 그의 제자로는 아들인 이승희와 이병헌·김창숙 등이 있다. 이들 중 이승희와 이병헌은 일제 강점기에 유교를 종교로 만드는 이른바 공교(孔敎)운동을 벌였다. 이승희는 특히 망명지 극동 러시아에서 이 운동에 몰두했다.
발표자로 나선 영남대 정병석 교수는 “유교가 종교냐는 논쟁은 멀리로는 이탈리아 선교사로 중국에 처음 들어간 마테오리치(1552∼1610)를 포함한 선교사들 사이에서 시작됐다”며 “이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중국의 강유위·양계초 등이 논의를 이어갔다”고 소개했다. 정 교수는 “하지만 이승희의 유교 종교화는 강유위의 관점과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방식이 아닌 유학 본연의 종교성을 발견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날 학술회의장은 성산 이씨 문중과 지역 유림 등으로 가득 찼다. 이어 황영례 박사는 일제 강점기 유교 종교화에 나선 이승희와 송기식을 비교 조명했다.
안동에서 기미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송기식은 1932년 조선유교회의 녹동서원에서 유교를 새로운 종교로 자리매김하며 전국의 수재를 양성했다. 그는 전통 유교 형식에서 벗어나 기독교처럼 교회를 만들고 공자를 교주로 삼아 유교를 살리고 민족정신을 결집하는 일에 매달렸다. 황 박사는 “두 사람이 펼친 유교 종교화는 방법은 달랐지만 유교를 부흥시키는 계기를 만들고 민족정신을 규합하자는 목적은 같았다”고 말했다.
지역 유학자들은 유교를 종교화하며 새로운 형태의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물론 유교 종교화는 미완으로 끝났지만 광복은 이들의 피땀을 딛고 마침내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