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르 제국742년 ~ 840년
위구르 칸국(Uyghur Khaganate)
741년, 튀르크 계열 종족인 위구르족이 봉기하여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돌궐 제2제국을 멸망시키고, 약 100년 동안 당나라와 반목과 친목을 반복하며, 실크로드에서 얻어지는 부를 바탕으로 820년대 후반 위 지도에 나온 영토 수준으로 크게 팽창해 최대 전성기를 맞이했다.
839년 창신 가한이 내부 권력 다툼 끝에 시해당하고, 역병이 퍼지면서 혼란에 빠졌다. 840년 위구르 제국의 셍귄 퀼뤽 바가의 구원 요청을 빌미로 1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키르기스족에게 수도 카라 발가순이 파괴당하며 멸망하고 말았다.
역사
건국과 발전
明年, 裴羅又攻殺突厥白眉可汗, 遣頓啜羅達干來上功, 拜裴羅左驍衛員外大將軍, 斥地愈廣, 東極室韋, 西金山, 南控大漠, 盡得古匈奴地. 裴羅死, 子磨延啜立, 號葛勒可汗, 剽悍善用兵, 歲遣使者入朝.
이듬해에 골력배라가 다시금 돌궐의 외즈미쉬 가한을 쳐죽이고 그 땅을 부하들에게 나눠주었는데, 이는 동쪽 끝으로는 실위에서부터 서쪽 끝으로는 알타이 산맥까지 그리고 남쪽으로는 고비 사막에까지 다다랐으니 가히 옛 흉노의 땅을 다시 차지한 것이 되었다. 골력배라가 죽고, 그 아들 마연이 즉위하여 호를 '갈륵가한'이라 하였는데, 용맹하고 사나운 용병으로써 해마다 사자들을 조정에 파견하였다.
신당서 217권 열전 1제 회흘
700년대 중반, 위구르족은 바스밀, 카를룩 부족과 연합해서 몽골 초원의 패자였던 돌궐 제2제국을 멸망시키고, 바스밀과 카를룩도 물리쳤다. 그리고 훗날의 카라 발가순(Kara Balgasun)12 근교의 오르두 발릭(Ordu Balik)13에 수도를 건설하고, 당나라로부터도 인정받아 위구르 제국을 성립시켰다. 초원지대의 최대 세력으로 떠오른 위구르족이었으나, 초창기엔 제국을 칭할 만한 기반도 세력도 권위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방에서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세력들을 격파해 나가야만 했던 위구르족에게 이런 역학관계를 일거에 뒤바꿀 수 있는 대사건이 발생하게되니 그것이 바로 안녹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안사의 난이었다. 건국 이후 1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사실 안사의 난 자체가 위구르 제국이 돌궐을 무너뜨릴 때 많은 돌궐인의 잔당+소그드인들이 중국으로 내려갔고, 안녹산 휘하에 편입된 것이니 발발 계기부터가 위구르와 관련이 없진 않았다. 그리고 이 잔당들이 남아있는 한 까딱하다간 돌궐을 격파하고, 어렵게 이룩한 초원의 패권을 다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시달려, 위구르는 안사의 난 초창기부터 안녹산측에 붙은 기타 초원세력들을 싸그리 박살내기 위해 반복해서 당나라에게 구원군 파병 요청 의사를 전했다. 위구르는 756년에 카라치가 지휘하는 3,000명의 기병대를, 757년에는 카를룩 카간의 아들 야브구가 이끄는 4,000명의 기병을 보냈다. 이들은 유주와 태원을 공략하고, 당나라의 명장 곽자의와 연합해 낙양과 장안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를 통해 당나라로부터 매년 비단 20,000필을 포함한 막대한 물자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얻은 물자들을 이용해 주변 세력을 포섭하거나 격파하며 세력을 더욱 충실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위구르족은 진정한 제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안녹산의 난'이던 시절에는 위구르군이 낙양 등의 거대 도시를 공략한 후 유린하고 당 태종의 후손과 황후로 칭해지는 자들을 모두 몽골 초원으로 끌고간 만큼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낙양은 황폐화되었는데 당나라의 만류와 그들이 내어주는 물자를 받고 삼가는 모습을 보였으나, 안녹산의 난을 겪으며 당나라의 여력이 완전히 소진된 것을 확인한 '사사명의 난' 시기에 들어서는 당나라의 만류조차 무시하고, 함락한 도시들을 대대적으로 약탈해 물자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낙양을 함락한 다음에는 3일간 대대적인 약탈과 살육을 단행했는데, 《신당서》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위구르군을 두려워한 백성들이 목숨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낙양 인근의 백당사로 몰려들었으나 이곳을 위구르군이 불태워 백당사에서 죽은 자만 1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여파로 이후 당나라와 위구르가 상호협력관계에 가까워져 토번이나 기타 유목민족 세력과 맞서기 위해 수차례 손발을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는 자국 내에서의 군사활동에서만큼은 위구르의 힘을 빌리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되었다.
그 후로도 안사의 난을 겪으며 여력이 소진된 당나라를 위협하여 북방을 자주 침범, 당나라로부터 막대한 공물을 뜯어냈고, 국경에 정기시장을 열어 품질이 떨어지는 말들을 자신들이 정한 고가의 가격에 가져갈 것을 강요하며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특히 위구르가 당나라에 요청하자 당나라는 황녀까지 위구르 제국의 가한에게 시집보내는 굴욕적인 일이 일어났는데 사실상 공녀를 보낸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나라의 대종은 아들 옹왕(훗날의 덕종)을 당군의 지휘관으로 삼아 영접단을 구성해 뵈귀 카간의 입성을 환영하도록 했다. 그런데 위구르 측은 당 영접단 측이 위구르 전통 춤을 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자에게 직접 춤추라고 명령했는데 이에 당의 관리가 황태자가 아직 나이가 어려 전통춤을 잘 모른다고 대답하자, 이에 격분한 위구르 측 신하가 직접 매질을 해 영접단을 죽여버릴 정도로 당나라를 업신여기고 무시했다.
이때의 위구르 제국을 가리켜 당나라 사서에서는
初, 回紇風俗樸厚, 君臣之等不甚異, 故眾志專一, 勁健無敵.
"그들은 검소하고 상하가 사치를 모르며 서로 굳게 단결하여 의심이 없으니, 그 힘이 가히 무적이다."
라고 탄식할 정도였다.
장안(長安, 현재의 시안시)을 점령했을 당시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던 이란 계열의 마니교와 접촉하여 마니교 사제와 신도들을 몽골 초원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마니교를 상당히 우대하여, 781년 아예 국교로 반포하고, 위구르 귀족들은 육식을 금하는 마니교의 법에 따라, 초원에 밭을 만들고 채소를 길러 먹기도 했으며 후기에는 아예 카라 발가순이라는 도시를 신축하고 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친 억압과 수탈은 곧 당나라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한 당나라가 국경 수비를 강화하며 시장 폐지, 국경 봉쇄 등의 강경책으로 대응하자 곧 심각한 물자 부족과 내부 반란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것이 위구르 제국에게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은, 안사의 난 이전까지 조금 강력한 유목민족 수준에 불과했던 그들이 안사의 난을 통해 당나라로부터 얻은 막대한 물자(주로 비단)를 마니교도나 소그드 상인을 통해 서역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실크로드 교역 이익을 바탕으로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위구르 제국 입장에서 당나라에서 유입되는 물자는 그들이 초원의 패권을 잡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재원이었으며, 단순히 당나라를 공격해 봐야 필요한 물자를 얻을 수 없으면 말짱 꽝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당나라로부터 물자 유입이 끊긴 위구르 제국은 초원에서의 패권을 유지할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주변 세력들을 족치기 시작했는데, 자잘한 세력들을 족쳐봐야 당나라만큼 막대한 물자를 제공할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고, 위구르 제국의 막대한 요구에 견디다 못한 온갖 세력의 반발만 경험해야만 했다. 특히 강력하게 반발했던 세력이 훗날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키는 키르기스족이었다. 이와 같은 사태를 통해 백날 위협만 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독으로 돌아옴을 깨달은 위구르 제국은 그간의 강압적 자세를 버리고, 당시 군사력이 필요했던 당나라에게 병력을 제공하며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당나라의 비단을 얻는 상부상조 전략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이후 당과 위구르는 종종 반목하면서도 기본적으로 협력 관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과거 위구르 제국을 마구 비난하던 당나라가 위구르에 대해
"위구르는 나라의 어려움을 구해준 공이 있고, 일찍이 조금의 땅도 침탈하지 않았는데, 어찌 후하지 않겠는가?"
라는 말을 할 정도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개선되었으며, 위구르 역시 제국이 부를 획득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서역 경영의 라이벌인 토번이 당나라를 공격할 기미를 보이자 당나라에게 군사지원을 약속하고 실제로 움직였을 정도였다.
왕조 교체와 전성기
이런 당나라와의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토번과 충돌하던 당이 최종적으로 서역 경영을 포기하던 8세기 말 ~ 9세기 초엽 무렵인 790년 제8대 카간인 텡그리데 울룩 볼미쉬 알프 퀼뤽 빌게 카간이 즉위함에 따라 지배 씨족이 야글라카르(藥羅葛, Yağlakar)에서 에디즈(硤跌, Ediz)로 바뀌게 되었다. 과거 유목제국은 카간 1인의 역량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었는데, 따라서 칸위 분쟁이나 지배 씨족이 바뀌는 경우 국가가 아예 와해되거나 재기불능의 치명타를 맞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위구르가 멸망하지 않고 오히려 이후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 것은 회신 가한이 야글라카르 씨족의 자제들을 전부 당나라로 보내 버리는 등 뒤처리를 적절하게 잘했고, 당나라의 이이제이적인 견제 및 여타 부락의 이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신 가한은 계속 야글라카르 씨족을 모칭했고, 이후의 비문 기록에 와서야 그의 즉위로 인한 씨족 교체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위구르 제국은 이전까지 당나라가 운용하고 있었던 서역 영토를 인수하며 더욱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토번을 견제한 당나라가 토번이 장악한 영토를 피해 협력관계에 있는 위구르가 장악한 영토만을 이용해 서역 교역에 나서려는 시도를 하자 최대의 번영기를 누리게 된다. 당나라와의 친선관계를 통해 얻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주변 세력들을 포섭한 위구르 제국은 결국 짧으나마 지긋지긋할 정도로 충돌하던 키르기스족마저 완전히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토번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하기도 했으나, 당나라와의 협력관계를 통해 확보한 교역 루트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을 바탕으로 더한 번영을 누렸다. 결국 당과의 협력정책은 라이벌 토번을 고립시키고,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된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
단, 이렇게 보면 위구르와 당나라가 굉장히 화기애애한 분위로 보일 수도 있어 조금 첨부하자면, 이 중간중간 두 나라 사이의 마찰은 결코 적지 않았다. 당에서 유입되는 물자의 중요도가 워낙 높았기에 대놓고 위협을 가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카간의 성향에 따라 위구르 제국은 토번과 싸우는 짬짬이 진격로를 당나라에게 위협이 되는 방향으로 잡는다든가, 토번과 당나라가 뭐빠지게 격돌하는 동안 비어있는 당나라령 서역 영토 일부를 집어삼킨다든가 하는 일을 벌였다. 그럼 당나라는 곧장 엿이나 먹으라는 식으로 위구르 제국으로 들어가는 물자 공급을 끊어버리거나 도움 요청을 무시하는 일들이 상당히 자주 일어났다. 따라서 상대의 무력과 경제력을 반드시 필요로 하던 양 국가 모두 나라가 기우뚱거리는 아찔한 경험을 하게 된다.
쇠퇴와 멸망
이렇듯 820년대 말 ~ 830년대 초엽 소례 가한 시대, 위구르 제국의 세력은 절정에 달하게 되었으나, 그 뒤를 이은 창신 가한이 839년 내부 권력 투쟁 끝에 사망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상층부의 내분으로 크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역병이 번져 가축들이 몰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위구르 제국의 역량은 크게 저하되었고, 이런 국면속에서 840년 내부 권력 다툼에서 밀린 셍귄 퀼뤽 바가가 남시베리아 예니세이 강에 자리를 잡고 있는 키르기스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셍귄 퀼뤽 바가의 구원 요청을 받은 키르기스족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짓누르기 위해 노력하던 위구르 제국을 결정적으로 붕괴시킬 기회가 왔음을 깨닫고 무려 10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해 위구르 제국의 수도 카라 발가순을 침공하고 철저히 파괴했다. 어떻게든 후퇴한 하서 위구르, 천산 위구르, 카라한 칸국 등의 군소세력들이 이후에도 계속 존재하긴 했으나 제국으로서의 위구르는 이 일을 기점으로 멸망했다. 군소세력들 또한 이런저런 세력에 치이며 흡수당하거나 신장으로 향했던 세력처럼 아예 현지화해버려 별다른 두각을 보이진 못했다.
위구르 제국을 무너뜨린 키르기스족도 유목 제국의 계보를 잇는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고, 이후 공백시기에 많은 위구르 유민들이 중국, 중앙아시아 등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본래 중앙아시아 일대는 이란계 소그드인 등 여러 민족이 살던 땅이었으나 오늘날에는 타지키스탄을 제외하면 거의 튀르크계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때 위구르 유민들의 대대적인 중앙아시아 이주와 정착이 장기적 관점에서 중앙아시아 전체의 튀르크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3. 문화
이전에 몽골 고원 일대에서 비슷한 강역을 차지했던 유목제국 흉노나 돌궐과 달리 위구르 제국은 거대한 성곽도시를 건설했다. 이는 중국 및 중앙아시아와 오랫동안 접촉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의 몽골 볼간 아이막에는 제2대 카를륵 카간 시대에 건설한 성곽도시의 유적이 남아있다. 한 변 240m의 정사각형에 높이 7m 규모이다. 제3대 뵈귀 카간은 수도 카라 발가순을 건설했는데 높이 8.5m에 둘레 1,6km의 장대한 성벽이 남아있다.26
위구르 제국은 돌궐 제국과 같은 돌궐 문자를 사용했으며, 이는 현재 몽골 초원에 남아 있는 비문들과 명문들에서 확인된다. 대표적인 비문으로는 <시네 우수 비문>, <타리아트 비문>, <카라발가순 비문> 등이 있는데, 대부분 마모가 심해 해독이 어려운 편이고, 그 수도 적어 위구르 제국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제국의 멸망 이후
키르기스인들에게 제국이 멸망한 후, 대규모 이주가 이뤄져 위구르 제국을 이루던 많은 숫자의 위구르인들이 여러 지역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일부는 몽골 고원을 떠나 현재의 타림 분지로 이동하여 터전으로 삼고, 고창회골, 하서회골, 호탄왕국 등의 국가들을 세웠다. 이 시기부터 동투르키스탄으로서의 정체성 형성이 시작되었다.
위구르 제국이 멸망했을 때, 키르기스족이 유목제국을 세워 이들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데 실패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로 돌아가버리면서 막북의 초원 지대는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이 공백 상태를 틈타 몽골 초원의 패권을 차지한 세력이 바로 흥안령 산맥 넘어 동쪽에서 발흥한 거란의 요나라였다.
요나라는 위구르 제국으로부터 칙령과 인장, 기초적인 통치 제도를 흡수하고 관직 제도도 받아들여 초원을 통제하는 북면관제를 정비했으며, 위구르의 수도였던 카라발가순 인근에 진주(鎭州)를 설치하고 인근 3주를 묶어 건안군 절도사사를 세워 통제했다. 다수의 위구르인이 흩어졌지만, 본토에 남은 일부 위구르인들은 요 성종대에 설립된 설특부(薛特部)나 회골부(回鶻部)로 편성되어 요 왕조에 위탁해 동화되었다.
한편 남부로 이동한 위구르인들은 천산 위구르, 하서 위구르 등으로 이어져 실크로드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아 명맥을 이어갔다.
이후 13세기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이 흥기하자 유능한 상인세력으로 변해 있었던 위구르족은 자진 투항하여 몽골 제국을 이끄는 브레인 역할을 했다.
원래 위구르족은 불교와 마니교를 믿었으나, 13세기 이후 서서히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지금 신강성에 사는 위구르족들은 거의 모두가 무슬림이다.
유목민족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고 이후에도 세력을 크게 넓히지 못해서 국내에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하다못해 위구르족에 관한 개설서도 채 4권도 안될 정도이다. 그나마 국내에서는 세계적인 고대 튀르크사 권위자인 경상국립대학교 사학과 정재훈 교수가 《위구르 유목제국사(744 ~ 840)》라는 이름으로 단행본을 내기는 했다.
여말선초 시기 문신으로, 외교관으로 활동한 설장수가 위구르족 출신 귀화인의 후손이라고 한다.
시베리아 투바 공화국의 테레홀(Tere-Khol) 호수에서 이 위구르 제국의 궁궐 터로 추정되는 당나라 양식의 포르바진이라는 유적이 있는데,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호수 가운데의 섬에 있다. 수도와는 떨어져 있으며, 777년에 여름 궁궐로 지어졌다가 지진으로 파괴된 이후 마니교 사원으로 전용된 것으로 추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