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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元聖王), 통일신라 제38대(재위:785~798) 왕

Jobs 9 2021. 5. 5.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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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8대(재위:785~798) 왕.

 

재위 785∼798. 성은 김(金), 이름은 경신(敬信, 敬愼, 敬則). 내물왕의 12세손으로 아버지 효양(孝讓)은 명덕대왕(明德大王), 할아버지 위문(魏文 또는 訓入)은 흥평대왕(興平大王), 증조할아버지 의관(義寬, 義官)은 신영대왕(神英大王), 고조할아버지 법선(法宣)은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또는 知烏夫人) 박씨이며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되었고, 비(妃)는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金氏)로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인 780년(혜공왕 16), 뒷날 선덕왕이 된 양상(良相)과 더불어 지정(志貞)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 때 혜공왕을 살해하고 양상이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그는 양상과 밀착된 인물로서 경덕왕 이래 왕실의 전제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혜공왕 말기의 혼란을 평정한 공으로 780년(선덕왕 1)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 뒤, 선덕왕이 자식이 없이 죽자 태종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김주원과의 왕위계승다툼에 대한 설화를 전하고 있다. 당시 김주원은 김경신보다 왕위계승 서열이 높았다. 김경신은 복두(幞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쓰고 12현금(絃琴)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餘三)의 해몽을 듣고 비밀리에 북천(北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마침 선덕왕이 죽자 비가 와서 알천(閼川)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했으므로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뒷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이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더라도 양자 사이에 왕위계승다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785년(원성왕 1) 원성왕은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바꾸었으며, 788년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였다. 독서삼품과는 유교경전에 능통한 사람을 3품으로 나누어 실력에 따라 관리로 등용한 것으로, 이러한 개혁은 국학(國學)을 설치한 지 이미 1세기가 지난 당시 신라사회에 있어서 무예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관리등용법의 개혁이 요청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원성왕대는 하대(下代) 권력구조의 특징을 이루는 왕실친족집단원에 의한 권력장악의 전형(典型)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원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왕자 인겸(仁謙)을 태자로 책봉하여 다음의 왕위계승권자로 확정하였다. 그러나 791년 1월 인겸태자가 죽자, 그 이듬해 8월에는 왕자 의영(義英)을 다시 태자로 책봉하였다.

다시 793년 2월 의영태자가 죽자, 왕손(인겸태자의 맏아들)인 준옹(俊邕)을 이듬해 1월 태자로 책봉하였다. 태자로 책봉된 준옹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인 언승(彦昇)도 정치의 중심부에서 활약하였는데,

이처럼 왕과 태자를 정점으로 한 극히 좁은 범위의 근친왕족들이 상대등·병부령·재상 등의 요직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하대는 이들 근친왕족들에 의하여 왕위가 이어져 원성왕계로 특징지어진다.

786년에는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쳤으며, 왕 자신도 「신공사뇌가 身空詞腦歌」를 지었다. 그것은 인생 궁원(窮遠)의 변화에 대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 한다. 이 책들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791년에 제공(悌恭)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제공은 785년에 시중(侍中)이 된 인물로 그가 일으킨 반란의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같은 해에 인겸태자가 죽으니 시호를 혜충(惠忠)이라 하였다. 그리고 제공의 반란이 진압되자 다시 혜충태자의 아들 준옹이 시중이 되었다. 원성왕은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785년에 승관(僧官)을 두어 정법전(政法典)이라 하고, 795년에는 봉은사(奉恩寺 또는 報恩寺)를 창건하였으며,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처음에는 화엄종(華嚴宗) 승려인 묘정(妙正)을 편애하여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 뒤, 묘정은 왕의 신임을 잃은 듯하다.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 자라한테서 얻은 구슬을 당나라 황제에게 빼앗기고 난 뒤부터, 묘정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잃게 되었다는 설화가 이를 알려준다.

왕의 치적으로 790년 벽골제(碧骨堤)의 증축과 발해와의 통교를 들 수 있다. 또한 그는 상당한 독자외교를 펴고 있었다. 이는 795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 둘을 데리고 와 신라의 호국룡(護國龍)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잡아가려는 것을 막았다는 설화에서 알 수 있다.

798년 12월 29일에 죽으니, 유명(遺命)으로 봉덕사(奉德寺) 남쪽 토함악(吐含岳) 서쪽동굴에 화장하였고, 능을 추복(追福)하기 위한 숭복사(崇福寺)가 세워졌다. 아들은 태자로 책봉되었던 인겸과 의영과 예영(禮英)이 있었고, 두 딸로 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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