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Humanities/철학, 사상 Philosophy

우발과 우연, 양자역학 확률적 우연, 카오스 복잡계 우연, 쿠르노 우연

Jobs 9 2022. 6. 16.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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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과학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는 라플라스의 악마이다.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가 고안해낸 이 상상의 존재는 ‘만일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현재와 미래를 모두 설명해줄 수 있는’ 그러한 존재이다. 라플라스는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을 이용해 과거,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 주고, 미래까지 예언할 수 있다."고 서술하였다. 후세에 사람들은 이러한 능력을 지닌 존재에 악마(demon)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런데 이는 19세기 통계 및 열역학의 발전으로 흔들리게 된다. 기체 분자 등의 운동의 경우 원리적으로는 결정론적 기술이 되겠지만, 사실상 통계적으로만 기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양자역학은 근대의 세계관이 그 뿌리에서부터 틀린 것임을 보이며, 결정론을 전복시켰다.  

세계가 미시적 차원에서는 근본적으로 불확정적이라는 양자역학의 주장은 많은 파장을 일으켰고,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거부 의사를 밝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출현한 후 수십 년 동안 전개된 실험들은 결정론이 그릇된 관점임을 보였다.

우연에 대한 사고의 전향은 20세기 후반 일리야 프리고진 등이 주창한 카오스 이론에 의해서 더욱 만개한다. 소립자들이 노니는 미시적 세계만이 아니라, 거시 세계에서도 단순한 선형 방정식으론 기술하기 어려운 우연과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흔히 카오스 이론을 설명하는 예로 나비의 날갯짓에서 일어나는 태풍이 있다. 또 다른 예를 들 수도 있는데, 만일 우리가 공룡 시대로 거슬러가 아주 작은 흔적만을 남겼더라도, 그 여파가 일파만파로 불어나 대통령의 이름이 달라지거나, 인류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연 개념은 생물학에도 적용될 수 있다. 어떤 개체가 생존에 유리한 특질을 타고 났다고 해서 곧바로 그 개체가 적자로 살아남으라는 법은 없다. 단지 그 개체에게 우호적인 생존의 조건이 주어졌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거기에는 언제나 일정한 정도의 우연이 개입한다고 봐야 한다. 

우발과 우연은 구분해야

그런데 우발과 우연은 구분을 해야 한다. 우발은 어떤 사건이 근본적으로 이유나 원인이 없이 일어났다는 의미이다. 한편 쿠르노는 우연을 그 자체로는 필연적인 인과적 계열들이 우연히 만날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한다. 이를테면 까마귀가 나는 사건과 사과가 떨어지는 사건은 각각을 놓고 보면 필연이지만, 그 둘이 동시에 일어나는 양상은 필연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한편 양자역학이 기술하는 불확정성은 근원적 우발이나 독립적 계열들의 우연한 만남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세계가 우연적 사건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하되, 일정한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 카오스 이론에서 말하는 우연은 어떤 사건의 결과가 그 사건의 원인에 영향을 미치면서 복잡하게 뒤얽히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확히 말해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양자역학의 확률적 우연과 카오스 이론의 복잡계에서 돌발하는 우연과 쿠르노 식의 독립된 계열들의 마주침이라는 우연이 착종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봐야 한다. 거기에 우연을 계기로 삼는 진화론적 세계까지 고려에 둔다면, 우리는 지극히 우연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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