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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실존, 물리적 현상, 영혼의 물리학

Jobs 9 2023. 10. 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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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실존, 물리적 현상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육체와 별개로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영혼은 모든 종교의 토대이기도 하다. 현대에 들어서는 과학자들 역시 영혼의 존재 여부를 탐구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증명하지 못했다

지구상의 인구 70억명 중에서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무려 93%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고귀한 정신작용은 물리학 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생물학적인 원리로는 설명되기 어렵다고 믿는다. 400년 전 ‘마음은 몸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다들 지지하고 있는 셈이다.  
과연 영혼은 존재하는가? 인간의 정신은 ‘뇌’라는 물리적인 토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가? 물론 많은 신경과학자들은 지난 100년 동안 온갖 실험을 통해 ‘영혼의 가설’을 부정해왔다. 이들은 지금까지 ‘영혼’이라는 비물질적인 가설로 설명해온 정신작용들이 뇌의 생물학적 기저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로토닌 같은 뇌 속 신경전달물질의 양을 바꾸고, 전전두엽처럼 특정 뇌영역에 전기 자극을 줌으로써 정신의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 학자들도 상당히 많다. 영혼을 추적해온 학자들의 노력 또한 그 역사가 깊다. 
벌새 한 마리, 초콜릿바 한 개, 미화 5센트짜리 동전 5개. 미국의 과학저널리스트 메리 로치에 따르면, 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언뜻 보기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 사이의 공통점은 ‘인간 영혼의 무게 21그램’과 같다는 사실이다. 

 

‘영혼 무게 21그램’은 왜?
인간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스푸크>(파라북스, 2005)라는 책을 통해 영혼의 존재를 추적했던 학자들의 노력을 유쾌하게 그려낸 메리 로치에 따르면, 의학계에는 ‘죽음의 순간, 인간은 21그램을 잃는다’는 속설이 있다. 이 속설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다룬 <21그램>(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 2003)이라는 영화까지 탄생했으니 말이다.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던 유명한 실험이 있다. 1901년 4월10일 오후 5시30분, 미국 메사추세츠주에서 이름 높던 외과의사 덩컨 맥두걸은 4년간 준비해온 ‘엄청난 실험’을 시행하게 된다. 인간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이 죽는 순간 무게의 변화를 측정하려 했던 것이다.


실험 대상은 결핵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이었다. 오랜 투병생활 끝에 에너지를 소진하고 죽어가는 결핵환자들은 죽는 순간에도 움직임이 거의 없어, 저울에 영향을 줄 만큼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몸무게가 매우 가볍고 무엇보다도 몇 시간 전에 사망 시각을 예측할 수 있었다. 죽는 순간 무게의 변화를 측정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환자라고 맥두걸은 판단한 것이다. 
맥두걸은 이날 동료 의사들과 함께 3시간40분 동안 첫번째 환자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맥두걸은 ‘표준의 미국인 기질을 지닌’ 환자가 운명하는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갑자기 환자의 죽음과 동시에 저울대 끝부분이 떨어지면서 아래쪽 멈춤쇠에 부딪히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난 후 눈금은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줄어든 무게는 4분의 3온스였다.” 
임종의 순간, 영혼의 무게 ‘21그램’이 사라진 것이다. 정말로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냐고? 당연히 아니다. 이 실험은 다른 과학자들이 재현하려고 노력했으나 재현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물리적인 속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설명하고자 영혼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인데, 그런 영혼이 물리적인 속성인 무게를 가질 리 없지 않는가? 영혼이 왜 무게를 가져야 하는가! 
동물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실제로 실험을 해본 과학자들이 있다. 개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측정해보니, 무게의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역시나 재현 불가능. 물론 영혼의 존재를 믿는 학자들은 ‘이로써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음을 증명했노라!’고 자랑스러워했지만. 
메리 로치는 “할리우드는 이 수치를 미터법으로 환산해 제목으로 달았는데, 그 까닭은 오로지 ‘21그램’이 듣기에 더 좋다는 것뿐이었다”며 “‘0.75온스’라는 제목의 영화를 누가 보겠는가”라고 비꼬았다. 영혼이 있기를 바라면서도 영혼에 대한 증거 없이는 무턱대고 믿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들에게나 이런 실험이 유익할 것이다. 영혼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면 ‘영혼을 위한 닭고기수프’를 즐겁게 먹을 수 없으니까. 

 

어웨어 연구 “카드 본 영혼은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 로치의 <스푸크>에는 영혼 존재의 증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근거로 전세계 사후문화와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통해 영혼의 존재를 파헤쳐가는 학자들의 땀과 눈물이 담겨 있다. 그들이 결국 영혼의 존재를 증명했냐고? 물론 아니다. ‘죽음 이후 우리 영혼이 맞이하게 될 운명에 대한 탐구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그 결과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가 임사 체험이다. 호흡이나 맥박, 뇌파 등이 모두 정지된 상태였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 중에서 10~20% 정도는 사후세계 혹은 유체이탈을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임사 체험’이라는 말은 레이먼드 무디 박사의 저서인 <잠깐 보고 온 사후의 세계>(Life after Life)를 통해 세상에 처음 소개됐다. 무디 박사는 11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이기도 한데, 이 책들은 전세계에 1300만부가 팔려 나갔다. 
코네티컷대 켄 링 교수(심리학) 역시 그의 저서 <마인드사이트>(Mindsight)에서 임사 체험자들의 경험을 기술한 바 있다. 임사 체험 연구저널에 게재한 그의 논문에 따르면, 임사 체험자들은 대부분 공통된 경험을 한다고 한다.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 눈부신 빛을 향해 간다거나, 죽은 지인을 만난다거나, 평화롭고 아늑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너무도 황홀해서 그곳에 남아 있고자 갈망한다거나 말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뇌에 산소 공급이 끊어지면서 일종의 환각작용을 일으킨 것이라고 설명한다. 임사 체험자들이 하는 얘기는 공통점은 있으나 충분히 환각으로 설명이 가능하며 재현이 어렵다는 점에서 아직 신뢰할 만하지 않다.
아직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영국 사우샘프턴의대 샘 파니아 교수는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이 문제에 해답을 찾으려 한다. 그가 진행하는 ‘어웨어 연구’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응급실에서 실제 임상적으로 죽었다가 깨어난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데, 영국과 호주, 미국의 15개 대학병원이 참여하고 있다. 그는 심장마비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사 체험을 인터뷰해왔다. 특히 병실의 천장에서 20㎝ 정도 떨어진 곳에 특수한 문양의 카드를 놓아두었다. 즉 천장 가까이 올라가야만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유체이탈을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카드들이다.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수백명의 임사 체험자가 있었고 유체이탈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나 이 카드를 보았다고 보고한 환자는 없었다. 
영혼의 존재를 빌미 삼아 장사하는 사람들도 많다. 지금도 지구촌에선 영매산업이 성업 중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소통을 중재하는 영매. 이른바 신들린 그들이 정신이 허약한 사람들의 일상을 좀먹고 돈을 갈취하며 거대 산업을 유지하고 있다. 죽은 자를 편히 보내고, 억울함을 풀어 액을 없앤다는 식으로 말이다. 
육체가 죽은 뒤에도 정신이 무언가를 경험한다면, 그것은 영혼의 존재를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육체의 부활과 함께 정신의 경험을 보고하고 있다. 아직은 영혼의 존재를 증명한 어떠한 증거도 없다는 얘기다.
행복감이나 신뢰감처럼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개념이 뇌 내 신경전달물질로 조절된다는 것은 설령 영혼이 존재하더라도 뇌와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아직 뇌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속단하긴 이르지만, 이런 노력이 지속되면 우리는 굳이 ‘영혼’이라는 가설을 도입하지 않고도 인간의 고귀한 정신작용을 뇌의 생물학적 기작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렇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7%의 사람들 중 하나다. 
특히 뇌를 연구하는 물리학자에게 정신은 가장 놀라운 물리적 현상이다. 100억개가 넘는 신경세포들은 그저 전기신호를 주고받을 뿐인데, 하나의 신경세포의 속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현상인 ‘정신’이 그들의 상호작용으로 탄생한 것이다. 무엇이 생명 이전과 이후를 가르고 있으며, 무엇이 의식 이전과 이후를 만들어낸 것일까? 이 창발성이야말로 물질세계의 가장 놀라운 속성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증명되지 않으면 늘 회의해야
우리는 왜 영혼이 존재하길 바라는 것일까? 인간의 고귀한 정신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1.4㎏의 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육체가 소멸되면 정신도 함께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 필요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그 상실감을 감당할 능력도 없다. 죽어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마저 없다면 어찌 이 험한 세상을 버텨내란 말인가?
하지만 그것이 냉정한 지구의 법칙, 우주의 속성이라면 영혼이라는 눈속임 없이 세상을 직시해야 한다. 육체가 우주의 먼지로 돌아갈 때 내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존재마저도 소멸할 수 있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을 때 후회 없이 사랑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우리는 정신이라는 위대한 속성을 탄생시킬 만큼 물질이 그 자체로 경이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물질은 정신이 위대한 만큼 더불어 위대하며, 이 우주는 물질을 통해 ‘정신이라는 물질’을 이해하는 토대를 비로소 만들어낸 것이다. 덧붙여, 우리 사회가 영혼이라는 개념이 떠받치지 않고도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죽음 이후에 대한 불안감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고통스런 숙명 아닌가? 종교라는 아편이 없다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증명되기 전까지는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회의주의적인 태도, 그러나 존재할 수도 있다고 믿으면서 열심히 탐구하는 열린 태도, 이 두 가지 태도를 함께 가지고 있으면서 세상의 모든 존재하지 않은 것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이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라고 본다. 존재하지 않은 것들에게 휘둘리기에 우리의 짧은 삶은 너무나도 소중하니까.

 

 

영혼의 물리학

육체가 소멸하는 순간, 과연 영혼도 사라지는 걸까?
이론핵물리학자 고스와미 박사가 양자기억의 관점으로 살펴보는 사후의 생존과 불멸, 그리고 윤회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불멸의 삶을 추구한다. 현대 물질주의 과학은 이런 개인적 불멸의 추구를 ‘불멸을 위한 과학법칙’의 추구로 대치했다. 하지만 과학적 성취가 인간의 불멸에 대한 추구를 변화시키진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불멸을 추구한다. 불로초 같은 죽지 않는 약의 개발을 시도하거나, 노화 메커니즘을 막아 늙지 않는 신체적 불멸을 추구하거나, 또는 사후의 명성을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인들은 신의 은총에 의한 물리적 신체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영적 철학자들은 해방을 위한 영적 추구를 통해 시간 밖에서의 불멸을 이야기한다.  

이론핵물리학자인 저자 아미트 고스와미가 주장하는 것은 마지막 견해, 곧 시간 밖에서의 불멸이다. 그가 말하는 사후의 생존과 윤회의 중심 이론은 ‘양자기억’이라는 개념에 의존한다. 즉 기억은 학습에 의한 것이어서 국소적으로 뇌에 있지 않고, 시공간 밖에 비국소적으로 존재한다고 그는 본다. 신호나 에너지의 전이 없이 시공간을 가로질러 이전될 수 있는 게 양자기억이라는 것이다.  

물질 기반의 고전물리학에 도전장을 던지며 양자물리학적 관점을 견지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생존과 윤회에 관한 양자 모델에 관한 각종 실험과 경험적 증거들을 보여준다. 이 작업을 통해 그가 던지는 질문은 ‘영혼적 실체라는 이원적 세계가 있다면, 그런 세계가 물질적 실체와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과 답을 반복적으로 주고받으며 영적 실체에 관한 이론을 모색하는 그의 노력은 모든 것을 물질의 잣대로만 평가하는 현대인들에게 마음과 영혼이라는 문제를 집요하게 던져놓는다. “죽음은 물건과 소유물, 사람과 관계가 당신을 홀로 남겨두는 조용한 구석”이라고 말하는 그의 ‘죽음을 치유하는 의학’은 물신 숭배에 젖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저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게 해준다. 
 



 물리적 신체가 죽은 다음에 존재하는 것은 ‘영혼’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신체에 환생해 연속체를 형성한다. 이런 영혼 이야기는 의식을 기반으로 한 과학에서는 말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오직 ‘양자’의 개념에서 영혼을 생각할 때뿐이다.
 

 양자란 단어의 의미는 ‘분리된 양’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광자라고 불리는 빛의 양자는 에너지의 개별화된 양이고, 국소적(局所的)인 에너지 다발이다. 빛이 친숙한 파동의 성격에 더해 국소적 입자의 성격을 가지고, 또 물질이 더 친숙한 국소적 입자의 성격에 더해 파동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인지하면, 위에서 이상하고 역설적이라고 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물질은 파동과 같아서 동시에 한 군데 이상에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이 역설적으로 들린다면, 물질의 파동은 가능성의 파동(기술적으로는 파동함수라고 부르는 수학의 함수로 표현됨)이라는 것을 알면 해결된다. 이들은 오직 가능성 안에서만, 그리고 둘 이상의 가능성의 중첩으로서만 동시에 두 군데 이상에서 있을 수 있다.

 

 양자객체는 우리의 관찰이 잠재력으로부터 실재를 가져올 때까지, 즉 많은 잠재적 사건들로부터 한 실재의 국소적 사건으로 가져올 때까지, 가능성의 중첩으로서 존재한다.

 

 양자객체는 비연속적 도약을 할 수 있다. 지금 여기 존재하다가, 금방 저기에 가 있다. 이런 도약을 양자도약이라고 한다.

 

 양자객체는 적절히 연관되어 있을 때, 공간을 통하는 신호 없이 일정한 시간도 걸리지 않고, 서로에게 비국소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 실험적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연관된 양자객체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역에서 연결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비국소성은 초월을 의미한다. 모든 가능성의 양자파동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역에 속한다.

 

 양자역학에서는 객체들을 상호 연관시켜, 아주 먼 거리로 분리되어 있어도 서로 연결되어 있게(얽힌 위상) 한다,

 

 시간이 걸리는 공간을 신호를 통하지 않고 통과했다면, 어떻게 두 광자가 연결되어 있을까? 이들은 시공간을 초월한 의식의 비국소적 영역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양자의 비국소성은 공간을 넘을 뿐만 아니라 시간도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관찰할 때까지 가능성의 파동은 붕괴하지 않는다.

 

 당신에게는 얼마나 반직관적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우리, 즉 지각 있는 존재가 그들을 보고 선택할 때까지 양자 가능성은 실재화되지 않는다는 것이 자연선택 실험의 메시지이다.

 

 윤회하는 영혼으로서의 모나드

 

 죽은 신체를 떠나서 다른 신체로 들어가는 하나의 실체(영혼)로 모나드를 묘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주목하라. 대신에 두 삶이 모나드인 본질, 주제 그룹이 어떻게 전개되는지의 연속성을 반영하기 때문에, 두 삶이 윤회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와 살고, 우리의 다양한 윤회에서 우리를 연결시키는 것이 모나드이다. 그러나 모나드는 실체가 아니고, 에너지나 정보로 만들어진 사물도 아니며, 다른 형식의 물질적 존재도 아니다. 이것은 그 주위에서 삶의 에너지와 정보가 의식에 의해 처리되는 맥락(context)이다. 우리 삶의 과정에서는 항상 이 맥락들의 주위에서만 내용이 생성된다.

 

 기억뿐만 아니라 특성도 전달된다.

 윤회의 기억 현상은 개인의 열린 비국소적 창문을 통해서 일어나지만,

 

 불교나 힌두교에서는 윤회가 항상 학습된 습관이나 성향을 한 생에서 다른 생애로 전달한다고 상정했다. 힌두교에서는 이를 카르마(karma, 업보)라고 한다.

 

 세계에 대한 관찰자로서의 우리의 경험은 뇌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초정신체, 정신체, 활력체에도 관여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시간과 공간에서 움직임에 관여하는 활력적, 정신적 기능의 지도를 그리고 구현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신체가 필요하다고 이미 언급했다.

 

 이제 당신은 우리가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물리적 신체는 모든 고전적 기억과 함께 죽는다. 그러나 미묘한 신체들, 모나드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죽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양자기억과 함께, 그의 활력적‧정신적 가능성이 합쳐진 채로 가용한 상태로 남는다. 양자기억을 가진 모나드를 양자 모나드라고 부르자. 이는 ‘티베트 사자의 서’와 다른 영적 전통이 살아남는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의 실용적인 모델이다.

 

 특정한 생애의 개인은 양자 비국소성을 통해서 상호 연관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비국소적 정보의 전이를 통해 각각 서로의 삶에서 벌어진 사건에 접근하는 특전을 가진다. 이 개개인들은 지속되는 방식으로 같은 양자 모나드를 공유하는 것 같다. 그들은 서로의 환생이라고 불릴 수 있다. 한 사람이 이런 식으로 내려 받는 전생의 활력적‧정신적 성향을 힌두 전통에서는 카르마(karma, 업보)라고 한다. 

 그래서 물리적 신체의 사후에 생존하는 모나드는 미묘한 활력적‧정신적 신체를 통해 개개인의 정체성의 일부를 운반하므로, 신체적 윤회와 함께 연속체를 형성한다.

  

 태어날 때 모나드는 현생에 업보를 가져온다. 죽을 때 모나드는 이생에서 축적된 업보를 더해 지속된다.

 

 물리적 신체 없이는 새로운 경험이 불가능하다.

 형체 없는 모나드로 보면, 영혼은 주체-객체의 인식을 할 수 없고, 어떤 의미로도 영적인 성숙을 할 수 없고, 천국에서의 어떤 영적 수행에 의해서도 해방될 수 없다. 그들은 전생에서의 훈련(조건 형성)과 학습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더 이상의 창의적 노력에 의해 거기에 첨가할 수도, 뺄 수도 없다. 이는 오직 지구에서의 형태로 있을 수밖에 없다.

 사실은, 가능성 파동의 붕괴는 얽힌 계층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자기참조적 동력학을 필요로 한다. 이는 오직 물질적 뇌(또는 살아 있는 세포 또는 그들의 집합)만이 제공한다.

 

 지각 있는 관찰자의 뇌 없이는 붕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가?

 

 영혼을 개별적인 단위인 양자 모나드라고 부른다.

 

 의식은 복합 유기체의 여러 수준에서 동일시한다. 우선 의식은 세포 수준의 작용에서 동일시한다. 즉 세포적 자기 정체성을 가진다. 다음에는 면역계, 소화기계, 순환계 같은 기관 수준에서 동일시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동일시는 뇌와의 동일시로, 다른 모든 동일시를 대치할 수 있다.

그러면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은 이런 동일시(정체성)의 철회이다.

 

 의식이 먼저 뇌에서 철수하고(이 순서는 때로 바뀔 수 있다.), 그 다음 기관들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별 세포에서 떠난다. 실제로는 의식이 뇌와의 동일시를 중지했을 때, 죽었다고 한다.

 

 죽을 때 무엇이 신체를 떠나는가? 물리적 신체와의, 그리고 해당되는 각 신체 부분과의 의식적인 동일시이다. 정확하게 어떤 필수적인 기능이 비가역적으로 중지되는가? 의식이 붕괴를 위한 뇌의 거시적 가능성 파동의 노력이 중지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전혀 태아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가장 이상했던 경험은 내가 태아가 생기는 것을 돕고 있었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었다. 이 말은 그 태아와 그의 무형의 양자 모나드를 연결하는 무의식적 과정의 기간에 업보에 의한 태아의 생성과 비국소성을 시사한다.

 

 각 생애가 지날수록 업보가 축적된다.

   

 자아는 개인적 이야기의 집합인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자아는 또한 우리의 다양한 구상에 맞는 다양한 인격을 만들어 내고 실행한다(인격이란 개념은 그리스에서 극장 공연 시 마스크를 쓰는 아이디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아와 인격은 허구이고, 자연히 일시적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처음부터 일시적인 것임을 알았다면, 우리는 죽음을 부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자신을 생각하는 보다 정교한 방법은 인과적으로 말해서, 경향과 기질의 집합인 성격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성격은 이 생애에서 습득한 성향, 습관, 발견된 맥락뿐만 아니라, 전생에서의 습관과 발견된 맥락으로 정의된다.

 

 우리의 양자 자신은 자아를 구성하는 내용의 맥락을 발견한다. 이 과정의 한 가지가 우리가 도달한 기질이며, 우리가 학습한 저장 목록 다발인 성격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동일시한다.

 

 윤회라는 골조 없이는 성격을 전적으로 현재의 자아 정체성의 부분만으로 보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윤회의 골조에서는, 성격은 지속되나 특정한 생애의 특수한 구상(자아 내용)은 다른 생애에서는 존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의 맥락으로서 작용하는 기질은 존속한다. 이 정체성, 양자 모나드가 한 생애에서 다른 생애로 존속하며, 자아와 양자 자신 사이의 중간에서 개개인의 수준을 정의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업보의 상호 연관을 통하여 하나의 생애 이상에서 당신과 연관될 수도 있다. 특정한 개인(또는 개인들)이 사랑의 본성 발견이라는 당신의 요구에 의해서 당신과 연관될 수도 있다. 이는 항상 의식의 구현과 융이 남성에서의 원형적 여성(아니마, anima), 그리고 여성에서의 원형적 남성(아니무스, animus)이라고 부른 것의 통합과 관련이 있다.

 

 당신들이 여러 번의 생애에서 얽힌 쌍의 한 개인이라면, 상대방을 서로 영혼의 동반자로 감지하게 된다.

 

 당신은 업보의 법칙이 무정한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이 생애에서 맥락을 발견하고 학습하지 않으면, 업보는 당신이 학습할 때까지 당신을 무한정한 죽음-재탄생의 순환에 들게 할 것이다.

 

 동인도인들은 업보를 세 가지 범주로 나눈다.

 첫 번째는 축적된(sanchita) 업보인데, 개별의 양자 모나드의 모든 과거의 생을 통해 축적된 업보 전부이다. 두 번째는 프라라브다(prarabdha) 업보인데, 현생으로 가져온 업보이다. 세 번째는 아가미(agami) 업보인데, 이번 생애에서 축적하는 업보이다.

 

 실재의 본질은, 당신이 의식 위주의 과학을 충분히 이해하면, 죽음이란 없고 오직 의식의 창의적 역할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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