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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 확률적 해석, 막스 보른, 파동함수의 통계적 해석

Jobs9 2023. 1. 19.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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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CEO는 향후 전자산업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현존하는 슈퍼컴퓨터로 1만 년 걸리는 수학 문제를 자사의 54큐비트 양자컴퓨터가 3분 20초 만에 푸는 데 성공했다고 밝힌 것.

기존 컴퓨터는 0 아니면 1의 값을 갖는 비트 단위로 정보를 계산한다. 그러나 양자컴퓨터는 0과 1이 동시에 존재하는 큐비트 단위를 이용해 계산 속도가 훨씬 빠르다.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은 기존 컴퓨터 및 통신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을 양자 기술 시장이 2050년에 약 2600억 달러로 급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양자컴퓨터의 배경 이론인 ‘양자역학’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가 바로 오늘 소개할 ‘막스 보른’이다. 1882년 11월 11일 독일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막스 보른은 브레슬라우대학에 입학한 이후 수학, 특히 기하학에 흥미를 느꼈다. 

파동함수의 통계적 해석으로 195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막스 보른

따라서 그는 문제를 해결할 때 기본적으로 수학적 형식을 중시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1913년 닐스 보어가 러더퍼드의 모형에 플랑크의 양자가설을 적용한 원자모형 이론을 발표했을 때 막스 보른이 거부감을 드러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양자역학의 시초로 볼 수 있는 닐스 보어의 원자모형에 대해 “너무 대담하고 공상적”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보른은 곧 보어의 모형을 받아들였고, 그 분야의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보른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었다. 스승인 민코프스키가 상대성이론을 함께 연구하기 위해 괴팅겐으로 다시 부르자 그는 두말없이 따랐다.

막스 플랑크의 초청으로 1914년 베를린대학의 부교수로 임용된 보른은 역시 교수로 초빙되어 온 아인슈타인과 함께 근무했다. 이런 인연으로 두 사람은 평생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친한 친구로 지냈다.

 

양자역학의 통계적 특성 주장

다음 해에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에 이은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하자 막스 보른은 한 편의 예술작품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해 “철학적 통찰과 물리적 직관, 그리고 수학적 기교의 놀라운 결합”이라고 표현했다.

프랑크푸르트대학을 거쳐서 1921년 괴팅겐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로 임용된 보른은 이론물리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볼프강 파울리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인재를 개인적으로 고용해 조수로 활용했다.

그가 이처럼 자유롭게 직원을 고용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창업자 아들이자 사장이었던 헨리 골드만의 지원 덕분이었다. 하이젠베르크가 그의 조수로 일할 때 발표한 초기 논문은 양자역학을 일반 이론으로 체계화하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은 물론 보른의 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무렵 에르빈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의 새로운 수학적 기술 방법인 ‘파동 역학’ 방정식을 발표했다. 전자에 파동의 지위를 부여해 전자가 근본적으로 파동처럼 움직이고 특정 조건에서만 입자로 나타난다고 주장한 것. 하지만 이 방정식은 명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보다 명확한 해답을 제시한 이가 바로 막스 보른이다. 그는 난해한 슈뢰딩거의 미분방정식을 전자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확률밀도함수’로 바꿔서 해석했다. 이 함수를 계산하면 전자를 발견할 확률이 나오는데, 그는 파동식이 어떤 측정치가 나타날 확률을 결정한다고 밝혔다. 즉, 양자역학은 통계적인 특성의 법칙이어서 단지 일어날 수 있는 것 중 어떤 하나가 일어날 확률을 결정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절친 아인슈타인도 불확정성 거부해

보른의 파동함수에 대한 통계적 해석은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불확정성 원리’로 체계화되었다. 하지만 친구였던 아인슈타인은 막스 보른이 창안한 파동함수의 통계적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보른의 연구 발표 직후 아인슈타인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양자역학은 높이 평가받을 만한 결과를 내놓고 있지만, 아직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네. 나는 신이 어떠한 경우에도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니까 말이야.”

결정론적인 고전역학에 반해 확률로 얘기하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을 거부하는 발언이었다. 막스 보른의 이론은 아인슈타인 이외에도 많은 이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그로 인해 막스 보른은 20세기 현대물리학의 가장 큰 화두인 양자역학에 근본적인 요소로서 확률의 개념을 도입하고도 28년이 지난 후인 1954년에서야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나치에 의해 독일에서 추방당한 후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대학의 교수 등으로 활동한 보른은 말년에 다시 독일로 돌아와 괴팅겐 근처에 자리 잡았다. 그가 이론물리학연구소장에 부임한 이후 파울리와 하이젠베르크 등 유명 물리학자들이 거쳐가며 양자역학의 탄생지가 된 괴팅겐은 사실 조머펠트의 뮌헨,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과 함께 현대 물리학을 이끈 거점의 역할을 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원자에너지와 전시 및 평화시의 원자에너지 이용’이란 저서를 출간하고, 핵무기에 관해서는 정부에 일절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괴팅겐 18’ 집단을 지도하는 등 반핵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막스 보른은 1970년 1월 5일 세상과 영원히 이별한 채 괴팅겐에 묻혔다.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에 따르면, 우주는 양자의 파동함수에 따라 끊임없이 갈라진다. 하나하나의 우주가 다중우주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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