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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안달루스, 이슬람 통치 이베리아 반도, 에스파냐 역사

Jobs 9 2024. 2. 11.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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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안달루스
아랍어: لأندلس
스페인어: Al-Ándalus

중세 시대 이슬람 통치하의 이베리아 반도를 지칭한다. 아랍어 정관사 '알(آل)'과 '안달루스(Andalus)'를 합친 단어로, 관사를 빼고 '안달루스'라고 불리기도한다.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세력이 서고트 왕국을 정복한 711년부터 레콩키스타가 완료된 1492년 사이의 여러 기간 동안 이베리아 반도와 셉티마니아[1] 일부 지역을 두루 가리키지만 영토의 경계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일정한 변화를 겪었다. 알안달루스의 이슬람 왕조들의 지배를 받았던 현지 기독교인들은 모사라베라고 불렸다. 

 

어원
알안달루스가 당시 아랍인들의 단어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것에서부터 유래한 단어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반달족에서 유래했다는 설. 1980년대까지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가설이다. 반달족은 5세기경 게르마니아에서 라인강을 넘어 갈리아를 지나 스페인을 점령하였는데, 얼마 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로 대이주, 그곳을 점령했다. 알안달루스 지방은 반달족이 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로 넘어간 바로 그곳이다.(단 정확히 어느 항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서고트(Visigoths)에서 유래했다는 설. 
아틀란티스에서 유래했다는 설.

아랍인들이 물러간 이후로 스페인 남부 지방을 지칭하는 안달루시아의 어원



에스파냐의 역사
- 에스파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 역사시대 이전의 이베리아 반도

① 약 3만 5천 년 전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현재의 이베리아 반도로 크로마뇽인과 유사한 현대적 인류가 진출하여 거주하기 시작했다. 북부 산탄데르 지방의 알타미라 동굴에는 이러한 선사 시대의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약 기원전 1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벽화가 남아 있다.

② 이베리아 반도 지역에 살았던 고대의 두 민족은 이베로족과 켈트족이다.

켈트족은 지중해 쪽과 북동쪽에서 남서쪽에 모여 살았으며, 이후에는 대서양 방면에도 거주하기 시작했다. 코임브라 및 브라카와 세고비아에는 켈트족의 고대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편 이베로 족은 그들의 언어를 이베리아 반도의 가장 긴 강 이름인 에브로 강(이베르 강)에 남겼다. 이베로 족의 후예 중 한 갈래인 바스크족은 피레네 지방의 서부를 점령했다.
 
③ 기원전 500년에서 300년 사이에는 페니키아인이 들어와 살았으며, 그리스인도 지중해 연안에 그들의 교역 중심지인 식민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 중 현대에도 남아 있는 도시가 엠푸리아 및 말라가, 아리칸테가 있다. 페니키아인은 그 뒤 로마 제국에게 정복당한다.

페니키아의 유적지로는 로마와 대적하여 유명한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가 세운 카르타헤나(새로운 카르타고라는 의미)가 현재까지 도시로 남아 있다. 하밀카르 바르카는 당시 도시 중 하나인 바르치노를 세웠는데, 이 이름에서 바르셀로나가 유래했다고 한다.

 
2. 로마와 게르만 족의 침략

① 로마제국 지배하의 스페인

2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 제국이 영토를 넓혀가면서 지중해를 따라 국력을 계속 확장하였다.

대략 이 시기는 기원전 218년에서 201년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때부터 이베리아 반도는 500년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인들은 이때부터 에스파냐를 “히스파니아”(Hispania)로 부르면서 자연스레 법률을 비롯하여 언어, 로마의 도로 등의 제도를 정착시켜 나갔다.

로마의 영향을 받으면서 인구 분포도 달라지게 됐으며, 그 지배 계급은 로마 전체에서도 귀족 계급과 비슷한 대우를 받게 된다.

로마인은 타라고나나 사라고사, 발렌시아, 레온 등 훌륭한 도시를 많이 건설했다.

곡창 지대이자 지중해를 바로 보고 있어 당시 스페인은 올리브기름이나

양모, 금, 포도주를 수입하는 무역 지대로 각광받았다. 관개 시설도 발달되면서 농업 생산물은 로마 전역에 공급되었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 아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테오도시우스 1세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세네카 등이 이베리아 반도 출신이었다.

기독교는 1세기에 도입됐으며, 2세기가 되면서 대부분의 도시에서 널리 수용됐다.

대부분의 에스파냐어와 종교, 법률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비롯하였다.

 

② 서고트 왕국(게르만 족) 지배하의 스페인 

최초의 게르만 족인 수에비 족, 반달 족, 서고트족 등은 로마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듦에 따라 415년경부터 피레네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왔다.
그후 서고트 족이 세운 왕국(수도 : 톨레도)은 점차 세력을 뻗쳐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의 영토를 점령한다. 그리고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이주한 갈리시아에 거주하던 수에비족과 남서부에 자리잡은 비잔틴 인들을 복속시켰다. 이때부터 봉건사회로의 변환이 시작된다.


3. 이슬람 시대

① 711년 타리크는 아프리카 베르베르 족과 일부 아랍 귀족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서고트 왕국의 로드리고 왕의 군대와 싸워 승리함으로써 에스파냐 남서부를 정복했다.
이때부터 거의 800년 동안 에스파냐 지역을 이슬람 왕국이 다스리게 된다.


② 8세기경 북아프리카로부터 건너온 무어인(스페인계 이슬람 교도 또는, 아랍, 에스파냐 베르베르의 혼혈인)은 이베리아 반도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다(711년~718년).
이 정복은 무슬림의 우마이야 제국의 확장 활동으로 아스투리아스와 나바라, 아라곤의 세 개의 작은 북쪽 산간 지방만이 이슬람으로부터 겨우 독립을 유지하였다.

무슬림 지배 아래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자신들의 종교를 지킬 자유가 주어졌다.

모사라베 : 아랍 치하에 남아있던 가톨릭 교도들로 아랍화된 사람

물라디 : 이슬람교로 개종한 가톨릭 교도

차츰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커졌으며 귀족 계급부터 신분의 제한과 모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③ 10세기와 11세기에 많은 이들이 개종을 하게 되면서 알 안달루스(안달루시아) 주민의 다수가 이슬람을 믿게 되었다.

남부 지방에 있는 안달루시아의 코르도바는 아브드 알라흐만(옴미아드 왕조의 후손)이 세운 에스파냐의 이슬람 수도로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로 발전하면서 지중해 무역과 이슬람 문화 사이의 교류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계속하여 아랍과 북아프리카의 풍부한 지적 이슬람 유산이 스페인 지역으로 전해져 왔다.
 
무슬림과 유대인 학자들은 서유럽의 고전 그리스 문화를 되살리고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였으며, 이런 활동을 통해 스페인의 로마화된 문화가 아랍 문화와 유대 문화와 섞여 에스파냐의 독창적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한편 다른 유럽 지방은 중세의 암흑기로 종교적으로나 문화적, 과학적으로 많이 뒤처져 있었다.


④ 타이파(이슬람 소왕국 시대)

알 만수르(이슬람의 재상, 통치자)의 사망 이후 11세기까지 안달루시아는 작은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진다. 이들 이슬람 소왕국들은 정치적으로 약해지면서 외교와 전쟁을 번갈아 가며 생존해 나갔다.


  세비야, 사라고사, 톨레도 - 물라디가 지배

  그라나다 - 베르베르인에 의해 지배

  무르시아, 데니아(레반테 지역) - 슬라브 출신들에 의해 지배


⑤ 그라나다 왕국

1231년 무하마드 1세는 그라나다에서 이슬람의 마지막 왕국인 나사리 왕조를 세움. 그리고 방어하기에 좋은 지형 조건과 활발한 경제 활동으로 약 250년간 번영을 누리다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에 의해 정복 당함  

 
 
 
에스파냐 속의 이슬람 세계

① 코르도바(옴미아드 왕조) - 알 안달루스의 新婦 711년∼1010년

인구 50만의 당시 유럽의 가장 번화한 도시

② 세비야(아바스 왕조) - 귀족과 노예의 사랑 1010년∼1248년

16세기 해양제국의 수도(해가 지는 일이 없는 도시)

③ 그라나다(나사리 왕조) - 집시의 피를 받은 땅 1248년∼1492년

지상의 모든 기쁨이 머물고 있는 알함브라 궁전



 
 
4. 에스파냐의 통일(무슬림 통치의 종말)

① 12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관용 정책이 약화되어 기독교에 대한 종교적 탄압이 있었으며 이로 이해 북쪽의 기독교 세력들은 13세기 초부터 남진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를레콘키스타(국토 회복 운동)라고 한다. 그 시작은 722년의 코바동가 전투이다.

이슬람 군대들은 피레네 북쪽으로 옮겨가면서 세력을 확장했지만, 지금의 프랑스 투르 근처에서 전투로 패하면서 두에로 강과 에브로 강과 함께 피레네 산지를 낀 남쪽 지방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 전투를 투르 전투 혹은 투르 푸아티에 전투라고 부른다. 

이슬람 군대는 당시 유럽을 통틀어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던 갈리시아를 수호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739명의 군대가 강제로 쫓겨났다. 
 


② 종래 800년간 에스파냐 전 지역을 다스린 무어인의 알 안달루스(이슬람 교도들이 정복지인 반도 남부지역)는 주변의 토후국들과 경쟁하느라 결국에 가톨릭 세력의 팽창을 막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이 과정에서 프랑크족 세력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들 세력이 나뉘어 성장하게 되는데 카스티야 왕국, 레온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 등 네 개의 왕국과 포루투갈 왕국이 이들에 해당한다.

1085년 가톨릭세력들은 톨레도를 점령하면서 북쪽 지역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그러나 무어인이 에스파냐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이때까지는 극심한 탄압이 이뤄지지 않았고 몇 안 되는 모스크나 이슬람 사원만이 교회로 바뀌었다. (지금까지도 무어인의 예술과 건축, 음식 등 고유의 문화는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시기에 에스파냐에는 발렌시아 대학(1212년)과 살라망카 대학(1254년) 등이 설립된다.

이들 학교는 유럽 전체에서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과 함께 가장 이른 시기에 설립된 대학이다.
 


③ 꼬르도바를 중심으로 막대한 위력을 떨치던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 세력에게 1085년 톨레도 지역을 시작으로 1248년 세비야까지 내주고 마지막으로 그라나다 왕국만이 남게 된다.

이슬람 세력을 지원하던 마리니드 왕조는 13~14세기에 다발적으로 무슬림의 규약을 부활시키기 위해 재침공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④ 1469년 아라곤의 왕위 후계자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왕위 후계자 이사벨여왕의 결혼으로 공동 국왕이 지배하는 왕국이 성립됐다. 두 사람의 공동 왕국 출범 이후 1478년에는 카나리아 제도를 복속하고 1492년 기독교 세력이 무슬림의 마지막 보루이던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에스파냐의 781년간의 무슬림 지배는 종식되고 통일되기에 이른다.
 


⑤ 에스파냐의 통일

1492년은 에스파냐에 여러 의미를 지남 해다. 통일을 이룬 해일 뿐 아니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에스파냐 내 유대인 박해가 시작된다. 철저한 로마가톨릭 국가가 되기 위해 종교 재판을 통해 이단을 색출한다는 명분하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다른 종교 신자들을 화형에 처하고 개종을 거부하는 이슬람교도와 유대교 신자를 추방하였다. (종교재판소 설치)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르네상스 시대의 신흥 군주로서 지위를 확립하면서 지역 귀족과 합세하여 왕족의 권위를 세운다.

이런 과정에서 España(에스파냐)라는 단어가 출현하게 된다.

에스파냐는 통합과 더불어 안정기가 찾아오면서 종교, 정치, 군사 등 전반에 발전을 거두게 되며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훗날 수많은 식민지를 복속한 국력 신장의 계기는 이때 다져진다

 

 

 

5. 합스부르크 왕조(16~17세기)

  왕조 에스파냐  왕비 재위년도
    펠리페 1
․ 카스티야의 왕
․ 부르고뉴의 공작
왕비 후아나
․ 부모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
 
1 합스
부르크
카를로스 1
․ 최초의 에스파냐 국왕
․ 신성로마제국 황제
․ 그의 영토가 너무나도 광대한 나머지 그의 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곳이라고 불렸다 서유럽 전체를 지배
조부 막시밀리언 1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조)

동생 페르난도 1
(오스트리아 왕)
왕비 :
포루투갈의 이사벨라
1516~
1556.1.16
2 펠리페 2세 서류왕(신중왕)
․ 에스파냐 최전성기의 통치자
․ 포르투갈 국왕도 겸함.
․ 1561왕국의 수도를 바야돌리드에서 마드리드로 옮겼다.
․ 로마 가톨릭을 통한 국가 통합을 이상으로 추구하였다
왕비 메리 1(영국여왕)
잉글랜드의 공동 통치 국왕이기도 하였다
1556.1.16
~1598.9.13
3 펠리페 3
․ 에스파냐의 국왕포르투갈의 국왕
․ 레르마 공작(데니아 후작)의 寵臣정치
왕비 :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드 2세 황제의 누이
1598.9.13
~1621.3.31
4 펠리페 4세 무기력한 왕
․ 개혁 총신 올리바레스 백작
․ 카탈루냐의 반란
․ 포르투갈이 브라간사 왕가가 시작되고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했다(1668)
․ 네덜란드가 80년 전쟁을 끝내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독립했다
․․ 예술가들을 육성 벨라스케스,
왕비 :
프랑스의 엘리사베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1621.3.31
~1665.9.17
5 카를로스 2세 -백치왕
․ 에스파냐를 다스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이다
․ 두 번의 결혼은 이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에스파냐의 왕위계승권을 놓고 다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왕비 :
오를레앙의 마리아 루이사
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안나
1665.9.17
~1700.11.1
    카를로스 2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에스파냐의 왕위 계승을 놓고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였으며이후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손자인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에게 에스파냐 왕위가 넘어감.
이후 에스파냐가 유럽에 가지고 있던 영토는 분할되어진다.

 

 

1) 에스파냐의 전성기

① 카스티야 레온 왕국을 비롯한 아라곤 왕국그라나다 왕국나바라 왕국의 통합은 에스파냐 제국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16세기와 17세기 대부분에 걸쳐 에스파냐는 합스부르크 왕조 때에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누렸으며 식민지 무역으로 쌓은 부를 누렸다.

<레판토 해전>
1571년 10월 7일 베네치아 공화국교황 비오 5세 치하의 교황령나폴리와 시칠리아사르데냐를 포함한 에스파냐 왕국과 제노바 공화국사보이 공국몰타 기사단 등이 연합한 신성 동맹의 갤리선 함대가 오스만 제국과 벌인 해상 전투로 오스만의 전투용 갤리선 함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10월 7일 일요일 아침레판토 해군 기지에서 서쪽으로 출항한 오스만 함대와 메시나에서 출항한 신성 동맹의 함대가 그리스 서부의 바깥쪽에 있는 파트라스 만의 끄트머리에서 만나면서 5시간에 걸친 전투가 시작되었다전투 이후 신성 동맹은 일시적으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로마를 오스만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유럽을 향한 오스만의 팽창을 저지하였다오직 노를 젓는 전함들만으로 치러진 이 마지막 중요한 해상 전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결정적인 전투 가운데 하나로 레판토 전투 이후 세계를 움직이는 추는 다른 쪽으로 흔들리기 시작해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해가서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세계의 패턴을 갖추게 되었다.
 
이 전투는 15세기부터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았던 오스만 군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또한 기독교 세계의 절반에게 레판토 해전은 "기독교의 영원한 적"으로 여겨진 투르크 족의 몰락이라는 염원을 고취시켰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은 그 함선의 거의 대부분과 30,000명의 병사 거의 대부분을 잃었다서구 역사가들은 이를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이래로 가장 결정적인 해전으로 여기고 있다.
 
에스파냐 제국은 이때부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며 에스파냐가 움직이면 전 세계가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스페인 항해자들은 유럽인에게 신세계를 소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금은이나 향신료진귀한 농산물을 약탈하였다바닷길이 열리면서 유럽의 제국주의가 첫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②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합스부르크 왕조 때에 에스파냐는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멕시코미국의 남서부 지방에서부터 필리핀마리아나 제도까지 차지하게 된다.

1580년부터는 지금의 포르투갈 영토와 이탈리아 남부시칠리아는 물론 독일벨기에네덜란드룩셈 부르크의 전체 혹은 일부 영토를 정복하고 영향력이 북부 아프리카까지 미치게 된다

 

2) 무적함대 아르마다의 패배


<무적함대의 패배>
 
카를로스 1세에서 펠리프 2세에 이르는 16세기 말 에스파냐는 대서양을 지배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그러나 이 시기는 동시에 에스파냐가 내외의 도전에 봉착한 때이기도 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면허를 받은 사략선(私掠船즉 해적들이 에스파냐의 상선과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를 거듭 공격했다거듭된 공격과 약탈로 식민지로부터의 부의 유입이 위협받자 에스파냐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는 무슬림과 유대인이라는 선진집단을 추방한 이후 국내산업의 발전은 답보 상태에 있었다에스파냐 경제는 식민지에서 유입된 부에 주로 의존하는 일종의 약탈 경제와 다름없었다때문에 영국 사략선의 공격이 식민지 부의 유입을 위협하자 가뜩이나 산업기반이 취약한 에스파냐에 경제 위기가 오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과의 일전이 불가피했다.
메리 1세 여왕의 남편이었던 펠리페 2세는 영국 본토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1588년 메디나 시도니아 백작의 지휘하에 영국을 상대로 대함대를 편성했다이것이 그 유명한 무적함대다.
"위대하고 가장 행운이 있는 함대"("Grande y Felicísima Armada")라고 부른다.
파병 목적은 에스파냐령인 네덜란드 공화국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억제하고신대륙에 있는 에스파냐령 영토와 대서양 보물 선단에 대한 영국의 공격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출항 초에는 에스파냐 왕립 해군 소속 22척의 전함과 108척의 개조된 상선이 있었다.
계획은 영국 해협을 지나 플랑드르의 연안에 정박하는 것이었다.
플랑드르에서는 에스파냐 테르쇼(tercios)의 파르마(Parma) 공작군이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에서 북해를 지나 영국 남동지방에 상륙하기 위해 무적함대의 호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방어함대를 편성했다그런데 이 영국함대의 주력은 해적선이었다해적왕으로 후대에도 이름을 날린 드레이크 선장이 영국함대의 주력으로 배치돼 있었다.
무적함대는 영국의 해적 출신 함대의 기동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국 에스파냐 함대는 1588년 8월 7일 칼레 연해에서 197척의 영국함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영국군의 화공에 의한 야습으로 결정타를 입은데 이어 그레벨링건 해전에서 완전히 무너졌다이 결과로 에스파냐는 파르마군과의 집결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무적함대는 스코틀랜드 주위로 항해하여 대서양으로 나간 후 아일랜드를 지나 에스파냐로 퇴각을 시도했다.
그러나 도중에 큰 폭풍을 만나 함대의 일부가 손상되었으며, 24척 이상의 배는 아일랜드 북부 및 서부 해안에서 난파되어난파된 배의 생존자들은 스코틀랜드로 피난해야만 했다.

무적함대의 초기 보완선(complement of vessels) 중 약 50척은 에스파냐로 돌아오지 못하였고펠리페의 22척 왕립 함대는 7척을 잃었으나단지 3척만이 적의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
이 전투 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적힌 대형 메달이 만들어졌다.
신이 입김을 불자 그들은 흩어졌다.(God blew and they were scattered)
무적함대의 패배는 에스파냐가 해상무역권을 영국에 넘겨주고 에스파냐령이었던 네덜란드가 독립하는 계기가 됐다그리고 이후 에스파냐는 다시는 유럽의 주역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3) 에스파냐의 쇠퇴 : 17세기 합스부르크 왕조 후반

 

1580년 펠리페 2(부인 영국의 메리 여왕)는 당시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다그러다가 무적함대 아르마다가 영국에 패배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합스부르크 왕조 후반 에스파냐는 황금기를 누리면서도 가톨릭 국가로서 땅에 떨어진 합스부르크가의 위신을 세우려 수많은 전쟁에 참여한다.

에스파냐는 식민지 사람들에게 로마 가톨릭을 지나치게 강요하였고오스만 제국의 급성장과 더불어 해적이 남발하면서 지중해 연안 지방에는 이슬람 세력의 약탈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또한 로마 가톨릭 내 교회 개혁 문제로 에스파냐 전체가 분열에 휩싸여 에스파냐는 한동안 종교 문제에 지속적으로 군사 대응을 하기에 이른다.

수십 년간의 전쟁과 기근 속에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가는 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문제에 개입하며 사태를 악화시켜 국력 약화를 자초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와도 함께 연합하여 개신교 세력이 일으킨 변혁을 뒤엎으려 시도하지만그러는 와중에 포르투갈이 독립을 쟁취하는 한편 네덜란드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1648년 완전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유럽 전역에 30년 전쟁이 불어 닥치자 신교를 비밀리에 지원하던 프랑스에 패배하였다.

 

 

 

6. 부르봉 왕조 (18~19세기 초)

  왕조 에스파냐 왕 왕비 재위년도
1 부르봉 펠리페 5
․ 프랑스 앙주(Anjou)가문 출신으로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초대 국왕이다루이 14세의 손자
․ 프랑스 혈통의 펠리페 5세를 유럽 각국은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음.
․ 영국·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국들은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을 일으킴
․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펠리페 5세는 에스파냐의 왕임을 인정받았으나 지브롤터나폴리사르데냐플란데런밀라노 등을 할양함
왕비 :
사보이의 마리아 루이사
루이스 왕세자
페르난도 왕세자
이사벨 디 파르네시오
카를로스 왕자
마리아 테레사 왕녀
 
1700.11.16
~1724.1.14
2 루이스 1
․ 부왕의 퇴위로 루이스 1세가 되었으나, 7개월 만에 천연두로 사망
왕비 오를레앙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모 마리아 루이사
1724.1.14
~1724.8.31
3 펠리페 5
․ 루이스 1세가 천연두로 사망하여 다시 펠리페 5세가 왕으로 즉위
․ 폴란드 왕위계승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잃어버린 해외 영토를 얻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음.
왕비 :
사보이의 마리아 루이사
이사벨 디 파르네시오
1724.9.6
~1746.7.9
4 페르난도 6
․ 펠리페 5세의 4
왕비 포르투갈의 바바라모 마리아 루이사 1746.7.9
~1759.8.10
5 카를로스 3세 계몽군주
․․ 파르마 공작나폴리시칠리아의 왕
․ 왕비 아말리아의 사망 이후 영국과 관계 악화로 7년 전쟁에 얽매임
․ 영국과 포클랜드 전쟁
왕비 마리아 아말리아
이사벨 디 파르네시오
1759.8.10
~1788.12.14
6 카를로스 4
․ 정권을 재상 고도이에게 맡김
․ 강력한 왕권을 원했지만에스파냐는
프랑스 속국 정도의 대우를 받았고,
왕위는 탄탄하지 못했다.
․ 민중 폭동으로 퇴위
왕비 마리아 루이사 1788.12.14
~1808.3.19
7 페르난도 7
․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전 유럽을 거대한 격랑에 휩싸임
․ 나폴레옹에 의해 퇴위
왕비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포르투갈의 마리아 이사벨
모 마리아 루이사
1808.3.19
~1808.5.6
    페르난도 7세 퇴위 후 에스파냐를 정복한 나폴레옹에 의해 새로운 보나파르트 왕가가
5년간 에스파냐 왕으로 군림 함

 

 

1) 에스파냐 왕위 계승전쟁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에스파냐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그렇지만 광대한 해외 영토를 유지하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넓혀 식민지 통치를 19세기까지 계속하게 된다.

18세기 초부터 일어난 왕위 계승 전쟁(17011714)은 귀족 세력뿐 아니라 시민전쟁으로 번지면서 유럽 내 에스파냐의 영향력은 물론 대륙 내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도 사실상 잃게 됐다.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많은 영토를 내주면서 해상 강국의 지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1700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하고 그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Philip, duc d'Anjou)에게 물려주면서필리프는 에스파냐인의 펠리페 5세가 되었다. 전쟁은 에스파냐 왕위에 대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레오폴트 1세가 에스파냐 왕위의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서서히 시작되었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그의 영토 확장을 위한 공세를 강화했을 때 다른 유럽 국가(영국을 주도로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공화국역시 프랑스의 영토 확장을 제어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측에 참여하였다.

다른 국가들도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거나지금 소유하고 있는 영토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와 에스파냐에 대항하는 연합군에 참여하였다.

전쟁은 유럽만이 아니라 영국 식민지 주민들이 프랑스 식민지 주민(corsairs)과 에스파냐령인 남미 북안(Spanish Main)에 거점을 둔 사략선해적선과 싸운 앤 여왕전쟁으로 알려진 전투들이 북아메리카에서도 벌어졌다.

 

전쟁은 위트레흐트 조약(1713)과 라슈타트 조약(Rastatt 1714)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들로 펠리페 5세는 에스파냐의 왕이 되었으나프랑스의 왕위는 계승할 수 없게 되었고따라서 두 왕국이 합쳐질 위험은 사라졌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에서 에스파냐가 소유한 영토의 대부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중부 유럽에 대한 프랑스의 헤게모니(hegemony)는 종결되었으며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에 대한 생각은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언급된 이후부터 국제적인 질서의 일부가 되었다.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은 북아메리카의 앤 여왕전쟁(Queen Anne's War)을 포함한 유럽의 주요한 전쟁이다이 전쟁에서 빌라르 공작스튜어트 왕가의 지지자 베릭 공작말버러 공작사보이 외젠 공작등 뛰어난 장군들의 군사적 지도력이 두드러졌다.

 

펠리페 5세는 에스파냐의 해외 영토를 획득했지만에스파냐령 네덜란드나폴리밀라노사르데냐를 오스트리아에게 양도하고시칠리아와 밀라노의 일부를 사보이아에게그리고 지브롤터와 미노르카를 영국에게 주어야만 했다.

게다가그는 30년간 소위 아시엔토(asiento)라 불린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의 독점적인 노예 무역권을 영국에게 양도해야만 했다.

위트레흐트의 평화 아래, 17세기에 주도적이었던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억제하려는 전쟁은 당분간 사라지게 되었다부르봉 왕가의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계속적으로 동맹자로 남았지만이탈리아와 저지대의 영토를 상실하여 많은 힘을 잃은 에스파냐는 대륙의 정계에서 이류국가가 되어 버렸다.

그는 왕국을 통합하기 위해 누에바 플란타 법령(Nueva Planta decrees)를 만들어 전쟁 중에 카를 대공을 지지하고왕조의 통합을 느슨하게 하며 독자적인 정부기관을 유지한 아라곤 지방의 자율적인 자치를 인정하지 않고 통합 흡수하였다.

반면에 나바라 왕국이나 바스크 지방처럼 국왕을 도와 합스부르크의 카를 대공에 대항하여 싸운 지방은 그들의 자치권을 잃지도 않았고그들의 전통적인 지역법과 관청들을 유지할 수 있었다.

 

 

7. 나폴레옹의 에스파냐 침공과 독립전쟁 (반도전쟁)

  왕조 에스파냐 왕 왕비 재위년도
  보나
파르트
호세 1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
․ 나폴리와 시칠리아 국왕
․ 에스파냐의 근대화에 공헌
․ 에스파냐 독립전쟁때 폐위
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
모 레티치아 라몰리노
왕비 줄리 클라리
1808.6.6
~1813.12.11
8 부르봉 페르난도 7
․ 나폴레옹 퇴위 후 복귀
․ 영국과 프랑스사이의 7년 전쟁
왕비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1813.12.11
~1833.9.29
9 이사벨 2세 -자유주의 연합정부 시대
․ 페르난도 7세의 서거로 세 살때 여왕으로 즉위했고어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섭정
․ 카를로스 5세와의 내란 전쟁 종식
배우자 :
카디즈 공작
프란시스코
1833.9.29
~1868.9.30
  사보이 아마데오 1
․ 에스파냐의 정권을 잡은 후안 프림에 의해 왕으로 옹립됨(스페인의 명예혁명)
․ 정치적으로 혼란기에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자진 퇴위함
왕비
마리아 비토리아
마리아 보나파르트
1871.1.2
~1873.2.11
    에스파냐 제 1공화국 (1873~1874) - 4명의 대통령
10 부르봉 알폰소 12
․ 이사벨 2세의 아들로 시민전쟁으로 왕명을 받들던 군이 이기면서 부르봉 왕조 복위
․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에스파냐를 안정화 하면서 경제로 인한 부가 축적됨
․ 미국 에스파냐 전쟁을 겪음
왕비
오를레앙의 메르세데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1874.12.29
~1885.11.25
11 알폰소 13
․ 알폰소 12세의 유복자로 모후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섭정
․ 에스파냐 제2공화국의 출범으로 망명
왕비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1886.5.17
~1931.4.14
    에스파냐 제 2공화국 (1931~1939)
    프란시스코 프랑코 (1936~1969)
․ 에스파냐의 군인이자 사상가정치가로 에스파냐의 총통(국가원수 겸 수상)을 지냈다.
․ 1936년 자신의 군대로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해 바로 에스파냐 내전에서 승리함
․ 1차 세계 대전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에스파냐의 파시즘 지도자로왕정을
타도하였으나 그 자신은 독재전제 정치를 수행했다.
12 부르봉 후안 카를로스 1
․ 프랑코 사후 민주화 정책실시
․ 1977년 41년 만에 총선거를 실시
․ 1978년에는 신()헌법을 승인시켜 입헌군주제를 확립
․ 독재정권당시 구속되었던 민주인사 석방
조부 알폰소 13
부 바르셀로나 후안
마리아 메르세데스
197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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