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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 조 프레이저

Jobs9 2024. 6. 26.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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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복싱사에 위대한 전설 삼인방이 있었다. 그들은 각자가 가진 특성으로 복싱을 중흥시킨 주역이었고, 지금도 세인들에게 두고두고 회자(膾炙)되고 있다.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 조 프레이저 그들이 전설의 삼인방이었다.
위대한 삼인방은 아마추어 시절 몇 년의 시차를 두고 나란히 올림픽에 출전, 금메달을 목에 건 공통점이 있었다. 당시 그들은 미국사회에서 천대받는 흑인이었지만 스스로의 노력과 천재성으로 사회적 편견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 복싱을 스포츠 종목 중 최고의 반석에 올려놓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들 삼인이 펼치는 비무(比武)는 세인들을 열광케 했고 1960, 70년대를 프로복싱이라는 마법의 세계로 몰아넣은 주인공들이었다. 1944년 1월 12일, 장차 세계복싱사에 위대한 전설로 남을 불굴의 전사 조 프레이저가 사우스캐롤라이나 행정의 중심도시인 뷰포트에서 가난한 농가의 12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다.

프레이저가 녹록치 않은 세상을 알아 갈 쯤 그는 가족과 함께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로 이사를 온다. 어린 그에게도 흑인이라는 핸디캡과 가난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몸뚱이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부와 명예를 위해 그는 망설임 없이 글로버를 낀다. 타고난 천재성과 성실함은 아마추어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사실 그는 어린 시절 다친 왼팔은 팔을 일정 각도 이상 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굳어진 팔은 어떤 상황에서도 위력적인 펀치를 날릴 수 있는 각도를 만들어 주었다. 오로지 그의 노력이 이 모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가난한 프레이저는 무공수련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끼니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도축장에서 일하며 샌드백 대신 저장고에 걸린 고깃덩어리를 치며 훈련해야 했고 바닥에 널린 고기 찌꺼기와 핏물을 청소하며 하루 빨리 강호에 출사해 맹주에 오를 꿈을 꾸고 있었다.

영화 ‘록키’ 시리즈 1편에 등장하는 가난한 록키 발보아(실베스터 스탤론扮)가 도살장에서 일하며 아폴로 크리드(칼 웨더스扮)에 도전 도박사들의 예상을 깨고 맹주에 자리에 오르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무명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을 최정상의 스타로 만들어준 이 영화는 아폴로는 알리를 연상케 하고 록키는 피부색만 틀렸지 영락없는 프레이저였다. 프레이저는 자신에게 펼쳐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오로지 수련에만 집중한 결과 미국 아마추어 복싱계에서 어느 듯 강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승승장구 하는 그에게 넘지 못할 벽이 있었다. 그는 거구의 버스터 마티스였다. 결국 마티스는 64년 도쿄 올림픽 선발전에서 프레이저를 좌절시킨다. 선발전에서 탈락한 프레이저는 마티스의 스파링 파트너로 올림픽대표 선수단에 합류하여 함께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마티스가 훈련 도중 부상을 당해 올림픽 출전이 불가능 해지자 프레이저가 대신 출전, 금메달을 목에 건다. 프레이저의 금메달은 당시 미국이 복싱에서 거둔 유일한 수확이었다.

프레이저는 자신이 일군 금메달이 새로운 신작로가 되길 바랬다. 스스로도 그렇게 꿈꿨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알리가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 후 식당 입장을 거부당하며 피부색의 한계를 느낀 것처럼 프레이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메달은 그저 금메달이었을 뿐 이었다. 

그나마 알리는 후원회라도 구성되어 프로 전향을 도왔지만 헤비급 선수로는 눈에 띄게 작은 그를 눈여겨보는 투자자는 없었다.

프레이저는 다시 도축장으로 돌아온다. 먹고 살아야 했다. 금메달은 시상대에 오르는 그 순간 뿐 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올림픽 시합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 때문에 도축장에서 마저 해고당한다.

절망에 빠져 있는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클로버레이’라는 사업가 모임에서 십시일반 모금을 하여 복싱선수들을 후원했는데 프레이저도 운 좋게 그 틈에 끼이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프레이저는 1965년 8월 16일, 우디 고스를 1회 날려버리고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강호에 첫 발을 내 딛는다. 

강호에 입문한 프레이저는 거칠 것이 없었다. 또 하나의 위대한 전설 무하마드 알리가 베트남 파병 징병거부로 박탈된 WBC 헤비급 챔피언 결정전에 나서기 전까지 파죽(破竹)의 19연승(17KO)을 달린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다고 했던가. 챔피언 결정전 상대는 아마추어 시절 자신을 앞날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던 천적 버스터 마티스였다. 1968년 3월 4일, 복싱의 성지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WBC 세계헤비급 타이틀 매치가 열린다. 당시 버스터 마티스도 23연승(17KO)으로 무패가도 달리고 있었다. 

비무가 시작되자 헤비급에선 180센티미터의 단신인 프레이저는 자신보다 11센티미터나 더 큰 마티스를 향해 끊임없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낮게 안으로 파고들면서 쉴 새 없이 주먹을 날린다. 그가 휘두른 주먹에는 아마추어 시절 수 없이 자신의 앞길을 막았던 마티스에 대한 한(恨)이 담겨 있었다. 

거구들의 혈투는 11회 프레이저의 TKO승으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마침내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제왕의 자리에 오른다. 이때부터 프레이저는 세인들에게 스모킹 조로 불리게 된다. 마티스를 상대로 그가 펼친 무공이 마치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처럼 주먹이 상대편의 안으로 파고든다 해서 붙여진 닉네임이다.

왕좌에 오른 3개월 후 프레이저는 마누엘 라모스를 상대로 2회 TKO승으로 몸 풀 듯이 가볍게 날려버리고 1차 방어에 성공한 후 오스카 보나베나를 상대로 15회까지 가는 난투 끝에 3:0 판정으로 제압한다. 

신이 뻗친 프레이저는 거칠 것 없이 진군한다. 3차 방어 상대로 데비 지글위츠를 맞아 1회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인 레프트 훅 한방으로 캔버스에 패대기친다. 이어 백전노장 제리 쿼리가 반란을 기치를 높게 들고 나서지만 단 18분 만에 백기투항을 하고 사라진다. 그렇게 4차 방어의 벽마저 가볍게 넘고 있었다. 

위대한 전사 무하마드 알리가 남기고 간 두 개의 왕관 중 하나인 WBA는 지미 엘리스가 차지하고 있었다. 두려울 것 없는 프레이저는 하늘아래 두 명은 지존은 없다고 지미 엘리스를 유혹한다. 프레이저의 집요한 꼬드김에 넘어 간 엘리스는 결국 통합 타이틀전을 수락한다. 

1970년 2월 16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 WBA/WBC 세계헤비급 통합타이틀매치. 당시 지미 엘리스는 32전 27승(12KO) 5패를 기록하고 있었고 프레이저는 24연승(21KO)을 달리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다운을 허용하지 않는 태산처럼 굳건한 맷집을 자랑하던 지미 엘리스도 마치 한 여름에 쏟아지는 폭우와도 같은 프레이저의 펀치에 4회 시작하는 공이 울렸지만 그는 링 중앙으로 나서지 못한다. 역시 매에 장사 없었다. 그렇게 프레이저는 두 개의 왕관을 거머쥐면서 명실상부(名實相符) 최고의 지존반열에 오른다. 

통합타이틀 왕관을 차지 한 후 프레이저에게 전란 없는 태평성대가 찾아온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되는 법, 평화는 1년을 가지 못했다. 전 통합 챔피언 밥 포스터가 잃어버린 왕관을 되찾겠다며 반란의 기치를 높게 든다. 

밥 포스터는 당시 45전 41승(36KO) 4패의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펀치력 하나만은 당대 최고였다.

프레이저는 갑옷을 갖추고 미국 중북부 미시간 주로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제압하려 달려간다. 허세에 가득 찬 반란을 진압 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3분 49초였다. 그렇게 통합타이틀 1차 방어가 끝났다. 1970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불굴의 전사 프레이저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상대는 3년 여년의 세월을 뛰어 넘고 미국정부에 빼앗긴 왕좌를 되찾기 위해 돌아 온 또 하나의 위대한 전설 ‘떠벌이’ 무하마드 알리였다. 

천신만고 끝에 링 위로 돌아 온 알리는 1970년 10월에 제리 쿼리를 3회에 날려 버리고 6주 후 프레이저가 15회까지 가는 혈전 끝에 물리 친 오스카 보나베나를 15회 TKO승으로 제압하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1971년 3월 8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 WBA/WBC 세계헤비급 통합타이틀매치. 당시 양웅은 무패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챔피언 프레이저가 26연승(23KO)을 기록하고 있었고 이에 맞선 알리는 31연승(25KO)을 달리고 있었다.

인파이팅의 교과서 프레이저와 아웃복싱의 교과서 알리와의 비무는 역사에 길이 남을 용호상박(龍虎相搏)의 대결이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쉴 새 없이 안으로 파고드는 프레이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레프트를 내밀며 빠른 발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거리를 유지하는 알리, 손에 땀을 쥐는 비무였다. 

위대한 전사들의 초절정 무공에 구름처럼 운집한 세인들은 열광했다. 결과는 15회에 까지 가는 혈전 끝에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승리의 여신은 프레이저를 선택한다. 알리와의 세기의 대결을 마친 후 프레이저에게 270여 일의 긴 평화가 찾아온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미시시피 강 인근에 위치한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에서 테리 다니엘스가 민란을 일으킨다. 긴 평화에서 깨어 난 프레이저의 분노에 찬 주먹질에 다니엘스는 4회을 버티지 못한다. 이어 론 스텐더를 오하마로 날아가 5회에 내동댕이치고 통합타이틀 4차 방어의 관문을 통과한다. 

무풍지대를 달리던 프레이저에게 어둠이 짙어 오고 있었다. 그 어둠의 실체는 또 하나의 전설 당대 최고의 주먹 조지 포먼이었다.

1973년 1월 22일, 또 하나의 위대한 전설들의 맞짱은 자메이카 킹스톤 네스널 스타지움에서 열렸다. 당시 포먼은 20연속 KO승을 포함 37전승(34KO)을 기록하고 있었다. 프레이저 역시 29연승(25KO)을 달리고 있었다.

당시 도박사들은 프레이저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세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것은 비무(比武)라기 보다 어른과 어린 아이의 싸움이었다. 프레이저는 5분 26초 동안 여섯 번을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포먼은 프레이저의 접근조차 허용치 않았다. 192센티미터의 긴키와 2미터에 가까운 팔 길이(리치)를 활용하여 접근하면 밀어내고 자신의 사거리에 맞추고 헤머같은 펀치를 내리꽂았다. 2회 2분 26초 모든 것이 끝이었다.

프레이저는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악몽의 날로부터 6개월이 지난 7월 2일 조 버그너와의 재기전(再起戰)에서 12회 판정으로 제압하고 다시 강호에 얼굴을 내민다.

1974년 10월 1일 프레이저는 또 다시 빅 매치를 치른다. 무하마드 알리와의 북미 타이틀전이었다. 12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생애 두 번째 패배를 맞본다. 프레이저는 절망하지 않는다. 다시 심기일전하여 야망을 불태운다. 제리 쿼리, 지미 엘리스를 5회, 9회 차례로 날려버리고 천하에 아직 스모킹 조가 살아있음을 알린다. 

프레이저는 1975년 10월 1일 무하마드 알리에게 세계헤비급 통합 타이틀에 도전장을 내민다. 알리는 절대 불리라는 예상을 깨고 조지 포먼을 8회에 제압하고 타이틀을 거머쥔다. 세인들은 그 시합을 ‘킨샤샤의 기적’이라 불렸다.

알리와의 통산전적 1승1패, 프레이저는 이 시합에 자신을 전부를 건다. 먼 훗날 세인들은 둘 간의 생애 마지막 혈전을 ‘마닐라의 전율’이라고 명명한다. 양웅의 살벌한 전투는 섭씨 38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속에서 14회까지 진행됐다. 초반 기세를 잡은 쪽은 알리였다.

하지만 중반부터 체력을 앞세운 프레이저의 반격이 매서웠다. 프레이저의 맹공을 알리는 특유의 빠른 발과 적절한 로프 기대기를 활용하여 잘도 피했다. 후반 들어 다시 알리가 반격한다. 14회가 끝나고 15회를 시작하는 공이 울렸지만 프레이저는 의자에 앉은 채 일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역사에 남을 또 하나의 혈전이 끝이 난다. 훗날 뒤늦게 알려졌지만 프레이저는 백내장을 앓고 있어 왼쪽 눈은 거의 실명에 가까웠다. 그런 눈으로 여러 차례 경기를 강행했다 하니 그의 투지가 놀라울 따름이다.

시합 후 프레이저는 이 승부에서 기권을 결정한 트레이너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알리 역시 그 혈전이 끝난 뒤 “그는 짐승이다. 무수한 펀치를 허용하고도 쓰러지지 않았다 내 생애 상상할 수 있는 죽음에 가장 근접한 시합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둘은 명승부를 펼쳤다. 

알리에게 패한 후 프레이저는 두 번의 경기를 치른다. 하나는 포지 포먼과의 북미 타이틀을 걸고 겨루지만 5회에 무너지고 만다. 프레이저에게는 포먼은 넘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거대한 산맥이었다. 마지막으로 1981년 12월 3일, 프로이드 커밍스와 10회 무승부를 기록하고 16년간 모든 강호생활을 마무리하고 야인으로 돌아간다.

불굴의 전사 ‘스모킹 조’ 프레이저는 생애 네 번을 패했지만 그를 이긴 전사는 두 사람이었다. 그들이 바로 무하마드 알리 그리고 조지 포먼이었다. 프레이저는 지금도 인파이팅의 바이블로 불리고 있다.


그는 매사에 성실하였고 신앙심도 깊었다. 슬하에 11남매를 두었으며 가족에게 헌신하였고 사생활 역시 모범적이었다. 프레이저는 알리와의 1차전 승리 40년 기념 파티에서 그 동안 자신을 비하하고 인격적으로 상처를 주었던 알리를 용서한다.

프레이저는 2011년 11월 8일, 그가 67세가 되던 해에 지병인 간암으로 별세한다. 프레이저의 장례식은 3일 후 필라델피아 에논 침례교회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다. 이날 일가친지 외 복싱 전설들과 흑인 시민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가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잭슨 목사는 장례식에서 “그는 위대한 챔피언이자 박애주의자다. 우리의 이웃으로 남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고 고인을 기렸으며 또 지금은 현직 대통령이지만 당시 부동산 재벌이었던 도널드 트럼프와 영화배우 미키 루크는 그에게 조문의 뜻이 담긴 비디오테잎을 전달했다.

그가 떠난 후 5년 뒤 2016년 6월 3일 앙숙이자 호적수였던 무하마드 알리도 운명을 달리했다. 프레이저는 타고 난 천재성을 노력으로 갈고 닦았으며 항상 겸손하고 상대를 비난하지 않았다. 단신을 극복하고자 쉴 새 없이 움직이며 타고 난 파괴력으로 상대를 압도한 그를 지금도 팬들은 그리워한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고(故) 조 프레이저와 '살아있는 전설' 무하마드 알리(69)의 세 차례 격돌을 '비극 3부작'이라고 표현했다.
알리와의 '세기의 대결'이 프레이저와 알리의 선수 생명을 단축했고 결과적으로 프레이저를 일찍 죽음으로 인도했다는 뜻에서다.
1944년 미국 필라델피아 빈민가에서 태어난 프레이저는 백내장으로 말미암아 왼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앓았던 소아마비로 오른팔이 왼팔보다 짧았다.
거구들이 즐비한 헤비급에서 182㎝에 불과한 프레이저는 복싱 선수로서 많은 결점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불굴의 투지와 특유의 성실함으로 단점을 극복했고 1964년 동경 올림픽에서 미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복싱 금메달을 따냈다. 놀라운 것은 프레이저가 왼손 손가락 골절 상태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사실이다.

1965년 프로로 전향한 프레이저는 첫 11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따내며 유명세를 탔다.
저돌적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그의 복싱 스타일을 사랑한 팬들은 프레이저에게 '스모킹(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라는 의미) 조'라는 애칭을 지어줬다.
프로 데뷔 3년 만에 세계 톱 클라스 위치까지 오른 프레이저는 1970년 지미 엘리스를 5라운드 만에 캔버스에 눕히고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그리고 프레이저는 1971년 미국 뉴욕의 메디슨스퀘어 가든에서 당시 최강이었던 알리와 운명적인 첫 경기를 치렀다.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경기 중 하나로 꼽히는 이날 경기 15라운드에서는 프레이저가 레프트 훅으로 알리를 쓰러뜨리는 명장면이 나왔다.
알리는 곧 일어났지만 심판진 전원이 프레이저의 손을 들어줬다.
프레이저는 알리와의 이 대결 이후 3주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 정도로 치열한 승부였다.

총 3번 열린 프레이저와 알리 간의 '세기의 대결'에서 프레이저가 승리한 것은 이 경기가 유일했다.
첫 경기 이후 3년이 지난 1974년 1월28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두 번째 경기에서는 알리가 판정승을 거뒀다.
1975년 10월1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세기의 대결' 마지막 경기는 첫 번째 맞대결보다 더 처절했다.
15라운드에서 프레이저의 한쪽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부어 오르자 트레이너가 수건을 던져 경기를 포기할 정도였다.
알리 역시 당시 경기가 끝난 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죽음에 가장 근접한 경기였다고 술회했다.
자존심과 야망으로 점철된 '세기의 대결'에서 두 선수는 15라운드까지 난타전을 벌이며 죽음 직전까지 이를 정도로 처절한 승부를 펼쳤다.
결국 알리는 프레이저와의 마지막 맞대결 이후 남은 인생 대부분을 파킨슨병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프레이저 역시 분노 속에서 남은 인생을 살았고 열패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프레이저는 1976년 조지 포먼에게 두 번째로 패배하고 나서 일찍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프레이저는 역사상 최고의 헤비급 복서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전매특허인 레프트 훅은 복싱 역사상 가장 파괴력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프레이저는 통산 37전32승4패(27KO)를 거뒀다.
알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전적은 더 화려했을 것이고 헤비급 챔피언 왕자 자리에 더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알리가 없었다면 흑인의 영웅은 알리가 아니라 프레이저였을 지도 모른다.
아울러 무의미한 추정일지는 몰라도 프레이저가 알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수명을 더 연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프레이저도 없었을 것이다.
프레이저와 알리의 맞대결은 사생결단의 승부를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다. 프레이저는 알리를 통해 전설이 되었다.

 

 




알리와 프레이저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복서, 조지 포먼(72·이상 미국)이다. 3명을 등장시켜야만 그들의 인생극장을 제대로 펼쳐 보일 수 있다.

1971년 3월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프레이저와 알리의 프로복싱 헤비급 대결에서 챔피언이었던 프레이저가 알리를 15회 다운시키며 판정승했다. 알리는 베트남전 징집 거부로 챔피언 벨트를 박탈당한 뒤 3년여 만에 돌아온 상태였다. 흑인 인권과 반전 운동에 앞장섰던 알리는 프레이저를 백인에게 순종하는 흑인을 뜻하는 ‘엉클 톰’으로 부르며 도발했다. 프레이저가 흑인 인권에 대해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이로 인해 프레이저와 가족들은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알리가 박탈당한 챔피언 벨트가 걸린 타이틀 매치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알리를 위한 구명 운동까지 했던 프레이저의 분노는 컸다.

프레이저의 앞길은 찬란해 보였다. 그러나 1973년 1월 포먼과의 대결에서 2회 동안 6번 다운당하며 TKO패 했다. 포먼은 다시 1974년 10월 알리에게 8회 KO패 하며 챔피언 벨트를 뺏겼다. 아프리카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의 킨샤사에서 열린 이 경기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정글의 대소동(Rumble in the Jungle)이다. 32세의 노장 알리는 로프에 기대어 포먼의 강펀치를 흘려보내며 지치게 한 뒤 승리했다.



이런 알리에게 프레이저는 다시 도전했다. 1975년 10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이 경기는 ‘마닐라의 전율(Thrilla in Manila)’로 불렸다. 눈이 모두 부어오른 프레이저 측이 15회 경기를 포기하며 알리가 승리를 거뒀지만 그 역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프레이저는 1976년 포먼과의 두 번째 대결에서 다시 패하면서 은퇴했다.

지금까지도 이들의 경기는 복싱 사상 가장 위대한 경기로 꼽힌다. 3명 모두 가난한 흑인 소년이었고 모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스타일과 인생 경로는 판이했다. 프레이저는 전형적인 돌진 선수였다. 어릴 때 다친 왼팔이 평생 제대로 펴지지 않았지만 이 왼팔 훅을 주무기로 삼았다. 예비 선수로 참가했다가 주전 선수가 다치는 바람에 대신 출전한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왼손 엄지손가락이 부러진 상태에서도 통증을 참고 금메달을 따냈다. 알리, 포먼(이상 키 191cm)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 보였던 프레이저(182cm)였지만 저돌적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포먼은 둔중하지만 강력한 파워를 앞세웠다. 통산 76승(68KO) 5패를 기록한 그는 프레이저(32승·27KO 1무 4패), 알리(56승·37KO 5패)보다 월등히 높은 KO율을 자랑했다. 알리는 거구이면서도 경쾌한 풋워크를 자랑했고 상대에 따라 아웃복싱과 몰아치기를 적절히 구사하는 지략형이었다.

프레이저가 은퇴 후 복싱을 가르치며 살아간 반면 포먼은 경기 후 심장마비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느낀 바 있어 목사가 되었다. 그는 28세에 은퇴했다 38세에 복귀해 45세에 다시 세계챔피언이 되었고 방송인으로도 활동했다. 알리는 말년에는 파킨슨병으로 거동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복싱 외에도 인권과 반전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들의 스타일은 3인 3색이었다. 하지만 각자의 개성을 바탕으로 함께 엮은 드라마로 기억되고 있다. 아무리 뜨거웠던 순간들이라도 세월 속에 지나간다. 그러나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의 스토리가 재생된다면 이는 일종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으로 남는다.

알리는 프레이저를 그토록 도발한 데 대해 “경기의 흥행을 위해서였다”며 후일 신문 지면을 통해 사과했다. 하지만 프레이저가 알리와 진심으로 화해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프레이저의 자녀들은 동상 제막식에서 “아버지는 알리를 사랑했다. 많은 이들이 두 사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먼 후일 자녀들이 두 사람을 함께 추모하는 모습 속에서 세월이 지닌 치유의 힘을 느낀다. 그들은 결국 한 무대의 같은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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