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합(習合)
익힐 습(習), 합할 합(合)
신크리티즘(syncretism)
상이하거나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믿음들이나 사상들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것
익힐 습(習), 합할 합(合). 습합이란 말은 한자로 들여다 봐도 아리송한 말이다. 대체로 습합은 서로 다른 종교가 각기 장점을 받아들여 공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신크리티즘(syncretism)이라고 하는데, 좀 더 풀자면 상이하거나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믿음들이나 사상들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것이다. 절 뒤에 있는 칠성각과 산신각은 북두칠성과 산신(호랑이)이라는 신을 믿는 옛 기복(祈福)신앙을 불교가 습합한 것이다. 부처는 중생들이 자신을 신으로 모시는 것도 바라지 않았고 그의 가르침이 중생들의 현세 복락을 빌거나 도모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지만, 사찰은 포교를 이유로, 중생들의 오래된 신앙을 탄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습합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신불(神佛)의 습합 문제가 꽤 시끄러운 이슈였고, 메이지 유신 때는 저런 포용이 전격적으로 금지되기도 했다.
불교에는 훈습(熏習)이란 말이 있다. 아마도 습합은 여기에서 파생된 말일지도 모른다. 훈습은 어떤 것에 계속하여 동일한 자극을 은근히 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그 영향을 받게 되는 작용을 의미한다. 옷에는 향기가 없다. 그러나 옷과 향료를 함께 두면 그 옷에 향기가 밴다. 옷에 남아있는 향기를 습기(習氣) 혹은 종자(種子)라고 부른다. 부파불교에서는 색심호훈설(色心互熏說)을 내놓았다. 외물과 마음은 서로 옷과 향기처럼 함께 있으면 영향을 받아 비슷해진다는 것이다. 좋은 외물을 만나는 것, 좋은 마음을 먹는 것의 중요함을 여기에서 찾았다.
홍신선시인의 연작 '마음경'은 마음이라고 하는 인간 실체 속의 어떤 현상을, 불교적인 수행의 시놉시스인 경전과 '습합'하려는 의욕을 보인다. 마음은 무엇인가. 그 해석은 여러 갈래이겠지만, 홍신선시인은 우주와의 교감 혹은 일체성에서 찾는 듯 하다. 마음을 찾으려 스스로의 내면 속으로 파고 들어가 내시경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 속에, 일상 속에 흩어져 있는 사물들과 생명들, 그리고 기운들이 지닌 보편의 생생한 양상이, 바로 마음을 증언하는 수많은 참고인들이다. 그런데 60편 시의 여로를 지나며 이 시인은 더욱 어려운 질문 앞에 서고 만다. '죽음 뒤에도 여전히 펼쳐질 저 자연은, 마음 밖인가.' 그렇다면 내가 죽어서 육신과 함께 꺼뜨릴 지금 이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그러나 그는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오히려, 마음과 유비(類比)되는 수많은 대상들(특히 자연들)을 탐미적이라 할 만큼 정밀한 표현으로 붙잡아 올린다. 마음을 수배하는 가운데 포착된 그들의 은밀하고 또렷한 낌새들이야 말로, 시적 공간에서 부활해 날아갈 듯한 생생함으로 얻는다. 시인이 '마음경'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면벽한 선사(禪師)를 꿈꾸었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로 치환된 그 몸들 속에 시인 자신을 들여놓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마음에 얽힌 몸에서, 시줄 속에 남은 몸으로 이동하는 것. 이른 바 시몸(詩身)이다.
습합 논란은 주로 유교 사상과 다른 종교나 사상과의 융합 여부에 대한 논쟁을 의미
이는 유교가 타 종교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공존하는 현상
흔히 "잡교"라는 표현으로 비판적으로 언급
유교와 타 종교의 융합:
유교는 고대나 중세에는 불교, 근세에는 천주교와 같은 종교와 융합되는 과정을 거쳐왔다.
신불습합:
신과 불교의 융합을 의미하는 신불습합 역시 습합 논란과 관련됩니다
습합 논란
습합(習合)
익힐 습(習), 합할 합(合)
신크리티즘(syncretism)
상이하거나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믿음들이나 사상들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것
이것 역시 유교에서 논란이 된다. 흔히 고대나 중세는 불교, 근세에는 천주교와 구한말에는 개신교와 결탁해 사후세계를 좋아하지 않고 제사를 중시하는 유교 근본주의자들에게 지탄을 받았다.
특히나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개신교인데, 애당초 개신교는 늦게 와서 전도 좀 안 하고 말 잘따랐다고 밀어주고 개종자가 줄을 잇자 여러 종교나 유교계에서도 논란이었다. 양 쪽 진영의 보수주의자는 다원주의라고 비판하는데, 유교와 개신교의 관계는 개신교가 늦게 들어와 이제 수립하려는 찰나에 일제강점기를 맞이했다.
안정복 선생같은 사람들은 이를 야합으로 규정해 비판했다. 고려시대 유학자들이 죽을 때 화장을 했고 불교에 심취했다고 비판하였으며 이색같은 유학자가 갑자가 부처가 대성인이라고 한 것을 비판했다. 성호 좌파 성호 우파 논쟁에서도 천주교의 인정 유무가 핵심이었다. 유림 여럿이 의병장으로 활동할 때 성경의 구절을 인용해 개신교를 믿으며, 독립운동을 벌이며 노비 문서를 태운 것도 유림 사이에 논란이었지만 그 이전의 종교들에 비해 논란은 적다. 개신교의 경우 주류는 다원주의를 반대했으나 오히려 동도서기론에 근거한 유교와 개신교의 습합은 거론하지 않는다. 이유는 정적이 될법한 천주교나 불교는 유교가 대신 쳐냈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