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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공찬전

Jobs 9 2021. 4. 2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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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공찬전

줄거리 
 주인공 설공찬과 주변 인물은 순창 설씨의 관향인 순창 지역에 실재했던 실명 인물들로 순창 설 씨 족보와 실록에서 확인된다. 이복규 교수가 분석 연구해 현대어로 정리한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순창에 살던 설층란에겐 공찬이란 아들이 있었으나 장가들기 전에 병으로 죽는다. 죽은 공찬의 혼령이 삼촌인 설충수의 아들 공침의 몸에 들어가 수시로 왕래한다. 

 오른손잡이인 공침에게 공찬의 혼령이 들어올 경우 왼손으로 밥을 먹는다. 저승에서는 모두 왼 손으로 밥을 먹기 때문. 이 소설은 공침의 몸을 빌려 저승 경험을 전하는 형식으로 허구와 사실을 결합하는 소설적 장치를 통해 사실성을 높이고 있다 공찬의 혼령 때문에 거의 죽게 된 공침에게 다시 공찬의 혼령이 들어와 삼촌들을 불러모으고 “내 너희와 이별한지 다섯 해로 머리조차 희니 매우 슬픈 뜻이 있다”는 말로 저승의 소식을 전한다. 

 저승의 위치, 저승의 나라 이름, 왕의 이름, 저승의 심판 모습과 함께 그곳에서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저승의 위치는 순창 바닷가에서 40리. 저승의 나라 이름은 단월국, 임금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라 소개한 후 명이 다한 영혼을 불러오는 저승의 심판 모습을 일러준다. 자신도 심판을 받았지만 거기에 와 있던 증조부의 덕으로 놓여나게 됐다고 한다. 그 증조부는 세종 때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설위(薛緯)라는 인물. 그에 대해 ‘이승과 마찬가지로 저승에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있다’고 알려 준다.  

 그러나 이야기는 곧 반전되어 반역자들을 등장시킨다. 민후․애박이 등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당시로서는 누구를 은유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는 인물들.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당나라 신하였다가 반란을 일으켜 양나라 시조가 된 주전충(朱全忠․852~912).

 그를 소개하면서 내린 결론은 ‘임금께 충성하여 간하다 비명에 죽더라도 저승에서는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왕이라 하더라도 반역자는 지옥에 간다’는 것.

 이야기 중 눈에 띄는 대목은 여성에 대한 기술. “이승에서 비록 여편네 몸이었어도 약간이라도 글을 잘하면 저승에서 소임을 맡아 잘 지낸다”며 저승에서는 남존여비가 없음을 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당시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을 적절히 배합, 중종 반정에 가담했던 신흥사림파를 비판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국사편찬委, 괴산 門中 문고서 찾아 
 지금까지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진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보다 무려, 1백여년 앞서는 새로운 한글 소설이 발견돼 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원순) 는 세종 탄신 6백주년을 맞아 전국의 한글 고서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기록으로만 알려졌던 채수(蔡壽․1449~1515)의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찾아냈다고 26일 밝혔다. 

 이 소설은 ‘조선왕조실록’ ‘패관 잡기’등에 중종 때 내용이 문제가 돼 왕명으로 불태워진 것으로 기록 돼 있어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만 알려졌는데 거의 5백년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 이 소설은 당시 승정원 승지를 지낸 이문건(李文健․1494~1567)이 1535~67년 쓴 생활 일기 ‘묵재일기(黙齊日記)'의 낱장 속면마다 기록돼 있었으며 ‘설공찬이’란 제목의 필사 상태로 총l3쪽 4천여자 분량이다.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충북 괴산 성주 이씨 문중의 문고에서 나왔다. 현재 학계에서는 1618년작으로 추정되는 ‘홍길동전’이 실제 허균 작품인지, 원래 한글본이었는지 등으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나 ‘설공찬전’은 중종실록(l5l1년)에 ‘한문으로 필사하거나 국문으로 번역해 유포되고 있다’고 기록돼 있어 ‘홍길동전'보다 1백 여년 앞선 한글 소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성종 때 성균관 대사성과 호조참판을 지낸 채수는 폐비 윤씨를 옹호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연산군 시기에 외직으로 돌다 중종 이후 병을 핑계로 경상도 상주에 은거해 있던 중 이 소설을 썼다. 소설 내용은 당시 건국 공신과 신흥 사대부의 갈등이 본격화하는 정치 상황에서 ‘저승’을 다녀온 설공찬이라는 주인공이 당시 정치적 인물들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가를 전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국펀(國編)의 의뢰로 이 소설을 정밀 분석한 서경대 이복규(국문학)교수는 “저자와 저작 연대 등의 기록이 이처럼 명확한 고대 소설은 없다”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한글 소설임이 입증된다”고 평가했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설공찬傳 문헌적 가치
 ‘설공찬전’은 중종 때 전국적으로 수거해 불태워졌을 뿐 아니라 숨기고 있다가 발각될 경우 처벌하는 등 조선조 필화 사건을 촉발한 유일한 소설로 기록되고 있다. 작가인 채수 자신은 중종의 배려로 참수형만은 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소설이 남의 일기의 접은 뒷면에 은밀히 실려 있는 것도 바로 이같은 당시 상황 때문인 것으로 관련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최초의 한글 소설 ‘설공찬전’의 발견을 두고 학계에서는 ‘해방 이후 최대의 문학사적 사건’으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홍길동전’이 1618년에 지어진 것도 추정일 뿐이며, 현재 전해 오는 한글본은 I8세기 후반 구전 소설을 상업적으로 판각한 것. 이와 달리 ‘설공찬전’은 저자와 저작 연대․ 저작배경․저작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어 더욱 가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 

 관련 학자들은 이 소설이 한문본의 번역이라 하더라도 한글 소설로 분류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설명한다. ‘홍길동전’뿐 아니라 초기의 한글 소설이 대부분 번역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 이 소설은 많은 민간에 읽히기 위해 한문본과 동시에 한글본이 나왔다는 점에서 그 어떤 한글 소설보다 돋보이는 지위에 있다는 평.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의 소설 구성과 작품성이다. 이 소설은 초기의 한글 소설로 ‘홍길동전’ 이나 ‘사씨남정기’보다 갈등의 구조나 짜임새 등 소설적 완성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실존 인물과 가공인물을 적절히 배치해 소설의 사실성을 높이는 등 작품성은 결코 못하지 않다는 것. ‘설공찬전’ 에 대한 연구 저서와 수편의 논문을 낸 서울대 朴희병 교수(국문학)는 이 작품을 조선 초기 소설 형식인 전기(傳奇) 소설 중 하나라고 분석한다. 귀신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전기소설은 이후‘홍길동전’같은 영웅소설 형태로 계승되었다는 것. ‘설공찬전’의 등장으로 16세기초에 이미 한글 소설이 존재했다는 학계 일각의 막연했던 주장이 사실로 입증됐다.  

 ‘저승’을 설정해 현실 정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소설의 사회적 기증과 위상’을 파악하는 출발점이 되는 자료로 평가한 홍익대 朴일용 교수(국문학)는 중종 전후의 정치적 상황은 물론 사회 상황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의의 또한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4천여자에 불과한 짧은 소설이다. 그러나 화자들은 그 시기의 소설은 짧았으며, ‘홍길동전’처럼 구전되면서 점차 살을 붙여 분량이 늘어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와 관련, 李복규 교수는 오는 5뭘10일 오후2시 대전 한남대에서 ‘설공찬전’ 연구 내용을 발표하고 ‘사학연구’ 53호는 원문을 소개하며 국펀(國編)은 ‘묵재일기’  내년 말까지 사료총서로 펴낼 예정이다. 


  작자
 ‘저승’을 빌려 현실을 비판한 채수(蔡壽)는 훈구파 중 한 사람. 세조 14년(1468년) 장원급제해 주로 실록편찬에 관계했던 그는 성종 시기 폐비 윤씨에 대한 애석함을 표현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벼슬에서 물러났다. 1485년 충청도 관찰사로 관직에 다시 들어선 그는 성균관 대사성․호조참판 등에 이르게 되나 연산군 등극 후 외직에 머물러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하게 된다. ‘훈구파’인 그가 중종반정(l506)에 '불가피하게’ 가담한 공로로 인천군(仁川君)으로 봉군되는 과정은 소설처럼 흥미롭다. 그의 행적을 기록한 ‘행장(行帳)’에 따르면 거사 주도 인물들이 채수를 동참시키기 위해 군인을 보내 그를 모셔 오도록 지시했으며, 이에 따르지 않을 때 목을 베어 오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응할 리 없었던 채수를 그의 사위가 술을 먹여 만취한 상태로 부축해 궐기 장소인 대궐문 앞으로 인도했고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그는 “어찌 이게 감히 할 짓이냐”라는 말을 두번 반복했다고 한다. 

 이후 부끄럽게 생각한 그는 은거하면서 ‘설공찬전’을 썼다. 당시 지방에서 쓴 이 소설은 서울까지 전파되었으며 사헌부에서 수거해 소각하고 처벌을 요구하는 등 4개월이나 논란을 벌였던 사실로 미뤄 볼 때 정치적 상황을 민감하게 반영하면서 대단한 인기를 누린 소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설로 인해 신흥사림파의 본거지인 사헌부의 탄핵으로 참수형에 처하는 위기를 맞게 되나 파직만 당하게 된다  


  전승. 보존
 이 작품이 광범위하게 유포된 것은 당시 민중들 사이에 중종 반정을 주도한 신흥사림파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이 조성돼 있음을 의미한다. 

 한글본이 유행한 것은 이같은 민중들의 정서에 적합한 글의 형식을 취한 의도로 보인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이 중종 때 승정원 승지를 지낸 이문건(李文建)일기의 낱장마다 접혀진 속면에 필사되어 있다는 것. 전통적인 한지 편책에 따라 접혀진 안쪽에 기록된 이 소설은 뜯지 않고는 제대로 읽을 수 없도록 돼 있다. 이는 당시 필화 사건 등으로 조성된 살벌한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몰래 기록해 읽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설공찬전’이 아니라 ‘설공찬이’라는 제목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며 주인공 이름에 우리식 인칭접미사 ‘이’를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소설은 전국 각지에 여러 개의 필사본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번에 발견된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라는 것이 이복규 교수의 추정이다. 또한 이 소설이 실려 있던 ‘묵재일기(黙齋日記)’ 또한 희귀한 생활 일기라는 점에서 문학 사상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 소설을 찾아낸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실 (실장 최근영)은 전국 향토사 연구자 3백 여명을 사료조사위원으로 위촉, 전국적으로 산재한 고문헌을 수집․정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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