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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콩키스타(Reconquista), 재정복, 이베리아 반도, 가톨릭, 이슬람, 서고트 왕국, 무어인, 아라곤, 카스티야, 에스파냐, 781년 간 이슬람 통치 종식, 알람브라 궁전

Jobs 9 2024. 1. 9.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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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콩키스타(Reconquista), 재정복, 이베리아 반도, 가톨릭, 이슬람, 서고트 왕국, 무어인, 아라곤, 카스티야, 에스파냐, 781년 간 이슬람 통치 종식, 알람브라 궁전

 

레콩키스타(Reconquista)는 '재정복(reconquest)'을 뜻하는 스페인어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톨릭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벌인 활동을 의미한다. 포르투갈어로는 스페인어의 전동음 r이 구개수음이라 헤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한다. 

학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레콩키스타의 전 과정을 단일 전쟁으로 본다면 역사에 기록된 전쟁 중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이 된다. 그 기간이 무려 781년에 달하기 때문이다.

서고트 왕국 멸망 후에 세워진 가톨릭 왕국들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력에 밀려서 이베리아 반도 북쪽 작은 영토만 남기고 축소되었다. 이슬람 세력의 전성기에도 근근히 버티다가 내전과 정권 싸움으로 약해진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는 수백 년 동안의 과정을 총칭하는 단어.

그래서 국토회복운동이라고도 한다. 711년에 시작하여 포르투갈에선 1249년 알가르브 함락, 스페인에선 1492년 나스르 왕조의 멸망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백년전쟁처럼 실제 그 기간 동안 큰 전투들 위주로 계속된 것은 아니다. 게릴라 형태의 소규모 전투들도 잔잔히 계속 이어졌으며 십자군 전쟁 시기와 맞물려 성전으로 취급되었다.

 

레콩키스타 배경: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
이베리아 전역을 지배하던 서고트 왕국은 내분을 틈탄 무어인의 침공을 받아 무너진다. 당시 서고트 왕국은 서고트 왕국 문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복잡한 정치 체계 때분에 내분이 잦았고, 많은 외적과 싸우느라 힘이 소모된 상태였다. 게다가 내전으로 인해 무어의 편을 든 배신자 귀족들이 있었고, 기병이 너무 적었고, 해군이 전무해서 북아프리카의 무슬림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끝내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내몰릴 지경까지 간다. 

무어의 본거지였던 북아프리카는 로마 이전 시절부터 이름 높은 말의 산지였다. 반면 이베리아는 국토 대부분이 고원 지대라 기병을 키우기에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해군의 육성은 안정적으로 국경을 방어할 규모의 육군이 갖춰진 다음에야 이루어진다. 당시 여러 외적과의 전쟁과 내전으로 육군의 소모가 심했던 서고트는 해군까지 육성할 여력이 없었다. 반면 무어는 해군, 정확히는 해적이 강했는데, 로마 제국 시절 곡창지대였던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베르베르인들과 아랍인들은 11세기 전까지는 관개 수로를 잘 사용하지 못해 농업 기반이 열악했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바다로 나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첨언하자면 가까이 있던 스페인 동남부 해안에 대한 해적질도 그중 하나로, 이러한 해적 행위 자체가 이후 국가 기간 산업 중 하나로 발전하기까지 한다. 한편 이베리아를 이슬람 제국이 점령한 이후 이 동남부 해안에 대한 해적질은 금지되는데, 이는 동남부의 영주들인 아랍인들과 해적질을 하던 베르베르인들 간의 갈등의 또다른 원인이 된다. 

 


십자군과 기사단


애초에 레콩키스타는 단순한 일련의 정복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로 접어들자 기독교 세계에서 레콩키스타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는 종교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으로 여겨졌다. 교황과 부르고뉴의 클뤼니 수도회 등의 종교 조직이 이슬람의 축출을 선동했으며 각지의 기사들이 "이교도"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무장을 갖추고 모여들었다. 

1064년 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가톨릭교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호소와 함께 바르바스트로를 함락할 것을 요구하는 교서를 반포하여 바르바스트로 전쟁을 시작하였다. 교황은 이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에 대하여 면죄부를 발급하였다. 이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제1차 십자군을 소집한 것보다 30년 전에 있었던 일로 사실상 십자군의 시작이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제1차 십자군을 소집하여 예루살렘을 침공하였다. 한편, 우르바누스 2세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과 치르는 전쟁에 참전하는 것 역시 예루살렘과 성지에서 벌어지는 십자군과 동등한 축복을 약속하면서 타라고나의 점령을 촉구하였다. 이로 인해 십자군 전쟁 기간에도 많은 기사단과 무장조직들이 이베리아반도의 타이파들과 전쟁을 벌였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서 전쟁을 치른 기사단에는 산티아고 기사단, 몬테사 기사단, 칼라트라바 기사단과 같이 이베리아반도를 근거지로 하는 기사단들과 함께 성당 기사단과 같이 제1차 십자군에 합류하였던 기사단들도 있었다. 이들은 1195년의 알라르코스 전투, 1212년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와 같은 전투를 치렀다. 그 결과 전쟁에 참전한 기사단들은 오늘날 에스파냐의 안달루시아 지방, 에스트레마두라 지방과 포르투갈의 알렌테주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여 자신들의 라티푼디움으로 삼을 수 있었다.

1215년 알모하드 왕조가 붕괴되고 사하라 서부에 마리니드 왕조가 세워지면서 이베리아반도의 타이파들의 영토는 더이상 어떤 왕조에도 속하지 않는 사실상 독립적인 국가가 되었다. 한편, 이베리아반도의 가톨릭교회 왕국은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의 세 나라가 주변을 통합하고 주요 세력이 되었다. 이들 가톨릭교회 왕국은 십자군의 일환인 기사단들과 함께 이슬람 지역에 대한 정복을 계속하였다. 1236년 이슬람 통치의 중심지였던 코르도바가 함락되었으며 1236년 지금의 세비야까지 함락되었다.

1348년 흑사병의 창궐과 모로코를 중심으로한 마리니드 왕조의 반격으로 레콩키스타가 주춤하기도 하였으나 이미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의 영토는 바르셀로나와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한 남쪽 지역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에스파냐의 성립과 레콩키스타의 종결


1469년 아라곤 왕국의 왕위 후계자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 후계자 이사벨이 결혼하여 두 나라는 공동 국왕이 지배하는 아라곤 카스티야 공동왕국이 되었다. 이후 에스파냐로 이름을 바꾼 공동왕국은 1478년에는 카나리아 제도를 정복하고 1492년 1월 2일, 무슬림의 마지막 보루이던 그라나다 토후국을 정복하여 레콩키스타를 종결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베리아반도에서 있었던 781년 간의 이슬람 통치가 종식되었다. 한편 1492년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해이기도 하다. 

그라나다를 정복한 에스파냐는 알람브라 칙령을 반포하여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하지 않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추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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