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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수학 업적, 좌표계, 해석기하학, 기하의 대수화, 와동이론

Jobs 9 2022. 6. 1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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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수학 업적, 좌표계, 해석기하학, 기하의 대수화, 와동이론

르네 데카르트, 1596년 3월 31일 - 1650년 2월 11일)는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합리론의 대표주자이며 본인의 대표 저서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계몽사상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의 근본 원리를 처음으로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1606년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레쉬 콜레주(Collège la Flèche)에 입학하여 1614년까지 8년간에 걸쳐 철저한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게 된다. 1626년부터 2년 동안 수학과 굴절광학을 연구하며 미완성 논문 <정신지도의 규칙>을 썼다. 1628년 말,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다시 저술 활동에 몰두해 《세계론》(Traite du monde)을 프랑스어로 출판한다. 1637년에는 《방법서설》에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가지 부분을 덧붙여 익명을 출판했다가 후에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완성한다. 

1644년 신플라톤주의와 스토아주의를 계승,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라틴어로 《철학 원리》를 출판한다. 그 후 그는 여러 사람과 편지로 자기 생각을 전하곤 했는데, 보헤미아의 왕 프리드리히의 딸 팔츠의 엘리자베스에게 최고선에 관한 자기 생각들을 편지로 보낸 것들이 모여 1649년 출판된 그의 마지막 책, 《정념론》(Les passions de l'ame)이 된다. 1650년 2월 11일, 그는 폐렴에 걸려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업적은 해석기하학을 창안한 것으로 주로 알려져 있다. 철학자로서의 데카르트는 근대 합리주의의 문을 연 사람이다. 철학자 콜라콥스키는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처럼 유럽철학이 만일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면, 근대 유럽철학은 데카르트에 대한 각주이다.”라고 했다. 오늘날 철학의 하나의 경향인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 데카르트 이후 지배해 왔던 이성의 절대성에 대한 근원적 반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고의 목적은 데카르트의 수학적 업적은 수학사에서 획기적 전환점을 이룩했을 뿐 아니라 그의 철학적 업적도 수학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소개하고, 또한 이것이 함의 하는 바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수학에 있어서 데카르트의 주된 업적은 해석기하학과 와동이론에 관한 것이다. 이 중 전자는 기하학과 대수학을 종합한 것으로 수와 크기를 구별했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에서 보면 혁명적인 변화였다. 갈릴레오, 데자르그 등과 동 시대를 살았던 그는 갈릴레오 재판에 영향을 받아 집필하던『천체론』을 중단하는 대신 1637년에『방법서설』을 출간하게 된다. 이 책은 세 권의 부록-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을 포함하고 있는데 ‘기하학’은 그 자체로 세 권으로 나눠져 있었다. ‘기하학’의 제 1권에서 해석기하학의 방법을 도입하여 주어진 축과 이 축에 고정된 각도의 모서리 사이에 만족하는 관계를 만족하는 점을 표시하려고 하였다. 제 2권에서는 곡선의 접선을 작도하는 방법이 포함되어 있고, 마지막 권에서는 방정식의 해법을 다루고 있다. 또한 알파벳의 앞 글자들로 상수를 나타내고 뒤 글자들로 미지수를 표시하는 오늘날 관례를 확립한 것도 ‘기하학’에서이다. 해석기하학이 가지는 의미는 기하의 대수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호니의 언급대로 그 당시에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 성취이다. 수학의 대수화 경향은 17세기 중반에 이미 수학자나 철학자들에게는 문젯거리를 제공했지만, 기호주의의 발흥과 수학적 대상보다는 관계를 중시하고 ‘존재론적 개입’으로 부터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인 것이다. 

한편 철학적 전통에서 보면 데카르트는 베이컨과 함께 종래의 권위를 거부하였지만 베이컨과는 달리, 확실한 지식을 얻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 스콜라 철학이 제시하지 못했던 이러한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는 철학에 수학적 방법의 도입을 시도했다. 곧 절대적이고 확실한 제일 원리로 부터 연역을 통해 확실하고 알려지지 않는 진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학문은 정신활동이고 정신활동은 대상은 다르더라도 이성을 통해 동일한 방법이 적용될 수 있다고 본 방법론적 일원론자였다. 데카르트가 제시한 방법은 먼저 명증적으로 참으로 인식할 때 까지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의심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제일 원리를 확보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했다. 인간의 관념과 감각까지도 의심했지만 생각하는 자아(코기토)는 ‘흔들릴 수없는 부동점’이었다. 또한 복잡한 것들은 가급적 작은 단순한 것으로 나누어 보고, 단순하게 나누어진 것들을 필연적인 순서대로 결합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체를 주의해서 보고 빠짐없이 모든 것을 열거하라는 것 등이 데카르트가 제시한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제일원리를 확보하는 것과 수학적 필연성을 가지는 연역이다. 

데카르트의 업적은 궁극적으로 수학과 관련되어있었다. 그의 수학적 작업은 물론이고 철학적 작업의 근본 동기도 철학의 문제들을 수학처럼 명증적으로 해소하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방법론을 간과해 버리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학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큰 기여를 했고 새로운 수학 전통을 형성함과 함께 철학에 있어서도 패러다임의 전이를 이뤄냈다. 특히 학문 융합이 거론되는 이 시대에 데카르트의 작업은 다른 학문과의 관계에서 수학이라는 학문의 지위와 역할과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학자로서의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방법서설](1637)은 100여개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지금도 철학을 전공하는 모든 철학도의 필독서이다. 그의 [성찰](혹은 [제일 철학에 관한 성찰], 1641), [철학 원리](1644), [정념론](1649)도 잘 알려진 철학 저술들이다. 
17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데카르트의 초상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밟고 있다.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과 함께 1637년에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된 [방법서설].
그렇지만 우리에게 덜 알려진 것도 많다. 그는 [방법서설]을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과 함께 한 권의 책으로 출판했으며, [방법서설]을 이 세 책의 서문 격으로 생각했다. 지금도 우리는 함수의 그래프를 그리는 x, y 좌표 체계를 ‘카티전 좌표’(Cartesian coordinate)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카티전은 ‘데카르트의’라는 의미이다. 그는 또 방법서설을 쓰기 전에 세상이 물질과 운동으로 다 설명가능하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려고 시도한 [세계, 혹은 빛에 대한 논고]라는 책을 집필했다. 그렇지만 바로 이 때 데카르트는 갈릴레오의 [두 세계에 대한 대화](1632)가 가톨릭교회의 탄압을 받고,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는 얘기를 접한 뒤에, [세계]의 출판을 무기한 연기했다. 그는 이 무렵에 인간의 몸의 작동을 기계의 작동과 대비해서 설명한 [인간론]을 썼고, 이 책을 쓰기 위해서 동물을 해부하고 인간의 해부를 관찰했으며, 뇌에 대한 최신 이론을 이용해서 뇌 속에 있는 송과선이라는 작은 조직이 육체와 영혼의 접점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와 비교해 볼 때, 이러한 ‘과학자로서의 데카르트’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철학과 과학은 ‘확실한 진리’를 추구

데카르트는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세상에서 직접 살아있는 지식을 얻고자 대학을 그만 두었다. 그는 군인이 되어 전쟁에 참여하던 중에, 우연히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고 자신의 수학적인 재능을 발견했다. 이후 네덜란드의 수학자 베크만과 가까워져서 그에게서 수학을 배우기도 했다. 이러던 중, 독일의 군대에 자원하기 위해서 여행을 하던 그는 1619년 11월에 독일의 울름이라는 지방에서 잠을 자다가 기묘한 세 가지 꿈을 꾸게 되었다. 강한 바람이 불고, 번개와 폭풍이 치고, 책 위에 사전과 시집이 놓여있던 꿈이었는데, 데카르트는 이 꿈이 자신에게 학자의 길을 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수학을 사용해서 모든 학문을 통합하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보편 수학’(mathesis universalis)이라는 학문을 정립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이 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 깨달음 이후 그는 대부분의 생을 네덜란드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보냈고, 철학과 과학의 체계를 정립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의 철학과 과학은 ‘확실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특징으로 했다. 그는 불변하고, 보편적이며, 확실한 진리를 찾고자 했고, 이를 발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당시 유럽 사회는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한 30년 전쟁 같은 살육을 경험하고 있었으며, 철학적으로는 세상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회의론 같은 극단적 철학 사조가 유행하고 있었다. 1610년에는 다원주의와 관용론을 포용했던 프랑스의 왕 앙리 4세가 암살을 당했고, 이는 진리의 다중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관용론의 종말로 해석되었다. 철학자들은 서로의 차이를 감내하고 소통하기 보다는, 모든 사람을 설복시킬 수 있는 확실한 진리를 찾고 그 위에 사상과 학문의 체계를 세우려 했다. 데카르트는 과거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물리학 같은 과학에 근거한 철학이 이런 역할을 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이렇게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 의심의 방법을 극한까지 몰아 붙여서 얻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명징한 진리의 전형이었다. 그는 이 명징한 진리를 토대로 자신의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건축물을 하나씩 쌓아 올렸던 것이다.

[세계, 혹은 빛에 대한 논고](1630-33)와 기계적 철학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인 뒤에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세상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는 외부 세상에서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연장(extension)이라고 생각했다. 연장은 공간을 점유한다는 (혹은 점유하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신이 세상에 쓸모없는 공간인 진공을 만들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연장은 곧 물질이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수많은 변화가 존재하는데, 허상이 아닌 진짜 변화가 가능하려면 세상에 운동이 존재해야 했다. 결국 세상은 물질과 그것의 운동만으로 이루어졌고, 자연의 모든 현상은 물질과 운동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어야 했다. 물질에는 지구나 달처럼 눈에 보이는 물질도 있고 공간을 꽉 채운 미세한 물질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도 있었지만, 이 모든 물질은 신이 부여한 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운동했다. 이것이 그가 주창했던 기계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의 요체인데, [세계, 혹은 빛에 대한 논고]는 물질과 운동만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음을 보인 책이었다.
데카르트가 생각한 우주. S, E, ε, A가 항성(붙박이 별)이며, 이중 S가 태양이고 FFFFGG(주황색 강조)가 우리의 우주(태양계)이다. GGHH(연두색 강조)는 또 다른 우주(항성계)이다. 태양계 내의 화성, 목성, 토성은 당시 사용했던 행성의 기호로 확연하게 알아볼 수 있다. 지구, 즉 Terra는 T로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파란색 동그라미). 그림 상단에 강처럼 흐르는 것(CDQR, 붉은색 강조)이 혜성이다. 그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확고하게 믿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위의 그림은 [세계, 혹은 빛에 대한 논고]에서 데카르트가 우주를 설명한 부분이다. 물질은 인접한 물질과 끊임없이 충돌하는데, 이런 충돌의 연쇄작용이 진공을 만들지 않으려면 결국 충돌은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식이 되어야 한다. 즉 소용돌이와 같은 순환형, 혹은 원형의 운동이 우주의 기본적인 운동이 된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소용돌이 운동으로 지구나 화성과 같은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돌고, 달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을 설명한다. 소용돌이는 우리 우주의 중심에 있는 태양(S)에 가까워질수록 더 빨리 돌고, 멀어질수록 더 천천히 돌지만, 어느 경계(K) 이후에는 다시 빨라져서, 태양계의 끝 부분(F)에 이르면 이 소용돌이는 매우 빨라진다. 행성이 운동하는 궤도 내에서는 태양에서 멀어질수록 천천히 돌기 때문에, 이것은 케플러의 제3법칙을 대략 설명할 수 있었다. 
케플러의 제3법칙이는 조화의 법칙, 주기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타원 궤도의 긴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목성이나 토성 같은 행성은 속도가 느린 태양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함께 천천히 회전한다. 그렇지만 태양계의 외곽에서는 소용돌이의 속도가 다시 빨라지면서 이에 맞춰서 매우 빨리 운동하는 천체가 있는데, 이것이 혜성(comet)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데카르트가 태양계를 유일한 우주(현대적 표현으로는 항성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양과 같은 별은 수없이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우주도 그 수만큼 많다. 혜성은 이런 우주들을 가로질러서 운동하는 물체인데, 혜성이 한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넘어갈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강의 비유를 든다. 그림에서 보듯이, 서로 살짝 붙어 있는 강에서 A, B, F로 진행하는 배 H가 유속이 빠를 경우에는 E에서 F로 가는 대신에 G로 넘어가는데, 이것이 혜성이 한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넘어가는 원리라는 것이다. 혜성에는 다른 우주의 물질이 붙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혜성을 연구할 수 있으면 태양계 외의 다른 우주가 어떤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혜성을 설명하기 위해 데카르트가 든 강의 비유. 서로 살짝 붙어 있는 강에서 A, B, F로 진행하는 배 H가 유속이 빠를 경우에는 E에서 F로 가는 대신에 G로 넘어가는데, 이것이 혜성이 한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넘어가는 원리라고 데카르트는 설명 했다.
태양계에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소용돌이가 있지만, 행성이나 위성 같은 각 천체의 주변에는 또 다른 작은 소용돌이가 존재한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이 움직인다는 사실에서 태양이 자전을 한다고 주장했다. 태양의 자전은 태양의 중심에서 원주에 직각인 방향으로 360도로 압력을 만들어 내는데, 이 압력이 빛이다. 빛이라는 압력은 태양에서 태양계 모든 곳으로 직진하는 형태로 전달이 된다. 지구 주위로는 달이 돌고, 달의 주변에는 작은 소용돌이가 존재하는데, 이 달의 소용돌이가 지구에 가하는 압력에 의해서 조수간만의 차이가 만들어 진다. 지구 주위에도 소용돌이가 존재하며, 이 소용돌이는 지구의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도망가려는 경향성을 만들어 낸다. 가벼운 물질이 도망가려는 경향을 더 크게 보이는데, 가벼운 물질이 달아나서 진공이 생기는 것을 상쇄하는 것이 무거운 물체가 지구 중심 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중력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데카르트가 설명한 밀물과 썰물. EFGH가 지구이고, 1234가 지구를 덮고 있는 물, 5678이 공기이다. B에 있는 달(o) 때문에 지구와 달 사이에 있는 공간에서 o6의 밀도는 D8의 밀도보다 더 높아지고, 따라서 지구를 8쪽으로 조금 밀어내면서, 공기와 물을 7, 5 쪽으로 조금 더 부풀게 만든다. 이것이 밀물, 썰물의 원리인데, 지구가 자전을 하기 때문에 6시간마다 밀물, 썰물이 바뀐다. 그런데 달이 공전을 해서 조금씩 그 자리를 바꾸기 때문에, 실제로는 6+1/5 시간마다 밀물과 썰물이 바뀌게 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설명이다.
[세계, 혹은 빛에 대한 논고]는 빛과 우주에 대한 논의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생각을 담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눈에 보이는 우리의 지각이 세상의 본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세상이 물질과 운동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붉은 사과를 보고 마치 붉은 색이 사과에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 존재하는 과정은 빛이 사과에 반사되면서 변형되고, 이렇게 변형된 빛이 우리의 눈에 들어와서 뇌 속에서 백색광을 받을 때와는 다른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냄새, 맛, 촉각 등이 모두 비슷한 것이었다. 즉, 세상의 진정한 본질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감각으로 경험하는 것과는 엄청나게 달랐기 때문에, 감각경험에 의존해서는 이를 이해하는 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여기에 이성을 사용한 새로운 사유의 필요성이 존재했다.
그는 [세계, 혹은 빛에 대한 논고]에서 세 가지 운동 법칙을 주장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법칙은 관성의 법칙과 관련된 것이고, 두 번째는 현대적 의미의 운동량 보존 법칙이었다. 이 법칙은 신이 우주를 만들 때 부여한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자연에도 법칙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최초로 설득력 있게 주장한 과학자 중 한명이었다. 뉴턴은 데카르트를 비판했지만, 데카르트의 운동법칙이라는 개념은 받아들여서 자신만의 세 가지 운동법칙(관성의 법칙, F=ma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주장했다. 반면에 데카르트의 후계자들은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에 근거해서 소용돌이 운동을 정교한 수학을 사용해서 재정립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소용돌이에 근거한 데카르트의 설명은 잘못되었지만, 당시에는 물질과 운동만으로 세상의 많은 현상을 간단하게 설명했던 체계로 많은 사람들을 설득했던 것이었다.

[기하학](1637)

그의 수학적 재능이 최고조로 발휘된 책 [기하학]에서 데카르트는 대수학과 기하학을 하나로 통합했다.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 시기부터 기하학이 발전했는데, 선분이나 면적을 다루는 기하학은 연속적인 양을 다루는 학문임에 반해서, 1, 2, 3, 4... 같이 수를 다루는 산술은 불연속적인 수를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ax2+bx+c=0와 같이 미지수를 찾아내는 대수학은 인도와 아랍의 영향으로 중세 이후의 유럽에서 서서히 발전했는데, 이것 역시 기하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기하학을 산술/대수와 엄격하게 구분하던 고대 그리스의 전통은 16세기에 와서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다. 이 둘의 통합이 결국 근대 서양의 수학의 단초를 놓은 혁명이었는데, 이러한 근대 수학의 혁명의 정점에 데카르트가 있었다. 
여기에서 그의 간단한 논증 몇 가지를 들어보자. 임의의 선분 BC와 BD를 곱한 결과를 선분으로 나타내면 어떻게 될까? 아래 그림에서 BC와 BD를 잡는데, 단위선분(=1)을 잡아서 이를 AB라고 하자. AC와 평행하게 DE를 그어서 B와 E를 연결하면, BE가 BC x BD, 즉 두 선분의 곱이다. 간단한 기하학만 알면 이 증명을 할 수 있다. BD x BC = AB x BE 인데, AB는 단위선분이기 때문에 BD x BC = BE이다.
바로 이어지는 또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임의의 선분 GH의 제곱근에 해당하는 선분은 무엇인가? GH에 연속으로 이어서 단위선분(=1) PG를 긋고, 전체 PH를 반으로 나눈 K를 취한다. 그리고 K를 중심으로 P, H를 지나는 반원을 긋고 G에서 수직으로 선분을 그어서 이를 원과 만나게 한 뒤에 그 점을 I라고 하면, GI가 우리가 구하려 하는 GH의 제곱근이다. (PG : IG = IG : GH 인데, PG = 1 이기 때문에, IG2=GH, 혹은 √GH=IG이다).
이런 방식으로 데카르트는 수와 선분이 비슷한 방식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것을 보였고, 더 나아가서 매우 복잡한 방정식이 기하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논증했다. 그가 풀었던 유명한 문제는 z2=az+b2에서 z에 해당하는 값을 기하학적으로 구하는 것인데 이를 푸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b2의 제곱근에 해당하는 b값에 대응하는 선분을 LM으로 잡고, L에서 a/2에 해당하는 선분 LN을 그어서 직각삼각형 LNM을 그린다. 그리고 LN을 원주로 하는 원을 그려서, MPN을 O까지 연장하면, OM이 우리가 원하는 z의 값이 된다. (NM=√(a2/4 + b2)이고 ON=NL=a/2이기 때문에, OM= a/2 + √(a2/4 + b2).)
데카르트는 이렇게 기하학적 도형과 산술/대수를 결합했다. 그가 [기하학]에서 사용한 사례 중에는 지금 봐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것도 있는데, 그가 이런 사례를 통해서 보이려고 했던 핵심은 기하학과 대수학이 별개의 학문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학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타원과 같은 곡선을 방정식을 이용해서 나타내고, 5차, 6차 방정식에 해당하는 곡선(그래프)을 작도하는 법을 논증함으로써 대수학의 주제가 좌표 상에서 곡선으로 표시될 수 있으며, 기하학적 곡선이 대수에서의 방정식이나 함수와 대응할 수 있음을 보였다. 서양 수학의 진정한 혁명은 이렇게 대수학과 기하학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시작했다.

[굴절 광학](1637)

데카르트는 이 책에서 세 가지 주제를 다루었다. 하나는 빛의 반사와 굴절이며, 두 번째는 인간이 무엇을 본다는 시각에 대한 것이고, 세 번째는 시각을 개량하고 향상하는 망원경이나 안경에 대한 것이다.
빛의 반사의 문제는 예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빛이 반사할 때 같은 각도로 꺾인다는 것도 알려져 있었다. 문제는 빛이 공기에서 물 같은 다른 매질로 들어갈 때 나타나는 현상인 굴절이었는데, 굴절 현상에 어떤 종류의 수학적 규칙성이 있다는 것은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그 규칙성이 무엇인가는 발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데카르트는 [굴절광학]에서 이 굴절의 법칙(우리에게 통상 스넬의 법칙Snell's law으로 알려진 법칙)2)을 최초로 제시했다.
케플러의 제3법칙이는 조화의 법칙, 주기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타원 궤도의 긴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굴절의 법칙(우리에게 통상 스넬의 법칙Snell's law으로 알려진 법칙)굴절의 법칙(우리에게 통상 스넬의 법칙Snell's law으로 알려진 법칙)을 스넬-데카르트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스넬은 데카르트보다 먼저 이 법칙을 발견했지만 자신의 발견을 출판하지 않았다. 데카르트가 스넬을 만났고 그의 법칙에 대해서 들었거나 혹은 심지어 그의 법칙을 훔쳤다는 주장도 있는데, 역사학자들은 데카르트가 스넬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굴절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굴절의 법칙을 설명하는 그림
그는 테니스공이 딱딱한 땅이 아니라 천이나 종이 같은 물체와 부딪친 뒤에 이를 뚫고 진행하면서 속도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경우를 상정한다. 그림에서처럼 A에서 B로 날아오던 공이 천 CBE와 부딪쳐서 천을 뚫고 절반의 속도로 진행하는 경우에, 수직 방향으로의 속도는 반으로 줄지만 수평 방향의 속도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같은 시간에 수평 방향으로 2배의 거리를 운동하게 된다. 즉 CB의 두 배가 되는 거리 BE만큼을 운동하며, 따라서 공은 E에서 수직으로 그은 선분이 원주와 만나는 I로 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굴절 법칙을 설명한 그림
데카르트는 이러한 생각을 빛의 굴절에 적용했다. 테니스공과 반대로 물에 부딪친 빛은 더 쉽게 진행하게 되며, 따라서 KB의 방향으로 진행되던 빛은 물의 표면 CB에 부딪친 뒤에는 BL의 방향으로 굴절해서 진행한다. 이 때 매질에 의해서 빛의 진행이 더 용이해진 정도가 KM과 LN의 비이다. 이 비는 항상 일정해서 AB의 방향으로 진행하던 빛은 BI로 꺾이고, 이때에 AH와 GI의 비와 같다. 즉 KM:LN=AH:GI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아는 굴절의 법칙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내용은 동일하다(빛의 속력은 실제로는 물 속에서 공기에서 보다 더 느려진다. 이 사실은 19세기에 들어서야 밝혀졌다. 데카르트의 생각은 실제와 반대인 셈인데, 결과가 맞다는 점은 재미있다. 그러나 과학사를 살펴보면 이런 일은 꽤 자주 있다).
구면수차가 없는 렌즈(위)와 있는 렌즈(아래)
굴절의 법칙을 제시하고 시각의 메커니즘을 분석한 뒤에 데카르트는 시각을 개선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한다. 그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구면수차(spherical aberration)가 없는 렌즈를 어떻게 만드는가를 처음으로 알아낸 것이다. 당시에 렌즈는 구형의 유리의 일부를 깎아서 만들었는데, 그림에서 보듯이 구형 렌즈의 경우에는 그 중앙과 가장자리에서 빛이 굴절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렌즈를 통과한 빛이 한 점에 모이지 않는다. 이런 렌즈를 가지고 안경을 만들면 안경을 통과한 빛이 망막에 정확하게 모이지 않으며, 따라서 상이 뚜렷하지가 않다. 망원경을 만들어도 비슷한 문제가 생긴다.
데카르트는 기하학을 사용해서 타원이나 쌍곡선 모양의 렌즈를 만들면 구면수차를 없애고, 들어오는 빛을 한 점에 모을 수 있음을 보였다. 아래 그림은 그가 타원 모양의 렌즈를 만들었을 때 이 렌즈를 향해 들어오는 임의의 빛 AB가 B에서 굴절된 뒤에 타원의 초점인 I로 진행된다는 것을 보인 증명에서 사용된 그림이다.3) 오른쪽은 구형수차가 생기지 않는 타원렌즈(왼쪽)와 쌍곡선 렌즈(오른쪽)로, 이 둘 모두 데카르트가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다.
케플러의 제3법칙이는 조화의 법칙, 주기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타원 궤도의 긴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굴절의 법칙(우리에게 통상 스넬의 법칙Snell's law으로 알려진 법칙)굴절의 법칙(우리에게 통상 스넬의 법칙Snell's law으로 알려진 법칙)을 스넬-데카르트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스넬은 데카르트보다 먼저 이 법칙을 발견했지만 자신의 발견을 출판하지 않았다. 데카르트가 스넬을 만났고 그의 법칙에 대해서 들었거나 혹은 심지어 그의 법칙을 훔쳤다는 주장도 있는데, 역사학자들은 데카르트가 스넬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굴절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증명은 너무 복잡해서 여기에서 생략한다.
데카르트가 구면수차가 생기지 않는 렌즈를 설명한 그림
데카르트가 설계한 쌍곡선렌즈를 깎는 기계. 실제로 제작되지는 않았다.
데카르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쌍곡선 렌즈를 깎을 수 있는 기계를 설계했다. 그는 한 장인에게 이 기계를 만들라고 요청했지만, 기계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시 여러 사람들이 데카르트의 설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데카르트 자신은 기계를 만들던 장인의 태만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수학에 근거한 이 기계가 잘 작동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같지만, 어찌된 이유인지 스스로 렌즈를 깎거나 기계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상학](1637)

데카르트의 [기상학]은 기상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변화에 대한 책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계적 철학에 입각해서, 즉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과 그것의 운동만을 사용해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비, 바람, 강, 구름 등 온갖 자연현상을 설명했는데, 그의 설명 중에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면서 데카르트의 수학적 방법론의 유용성을 잘 드러낸 것이 무지개에 대한 그의 설명이었다.
데카르트의 무지개에 관한 설명
무지개가 대기 중에 있는 미세한 물방울에 태양 빛이 반사되어 만들어진다는 사실과, 태양과 관찰자 사이의 각도를 기준으로 최대 42도 내에서만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는데, 왜 이 각도에서만 무지개가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설명은 충분치 않았다. 데카르트는 굴절의 법칙과 기하학적 논증을 사용해서 이 각도가 왜 42도인가를 설명했다.
위의 그림은 무지개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많은 미세한 물방울 중에 하나를 거대하게 확대한 것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무지개는 AB의 방향으로 진행하던 빛이 물방울을 만나서 B에서 굴절되고, C에서 반사된 뒤에, D에서 다시 굴절되어 우리 눈 E로 들어오는 것인데, 이 때 들어오는 빛의 방향을 변화시킬 때 AB와 DE가 이루는 각도(즉 태양 빛을 기준으로 우리가 무지개를 보는 각도)의 최대치가 42도로 계산된다. 그렇지만 무지개가 만들어지는 각도는 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FG의 방향으로 진행되던 빛이 G에서 굴절되고, H와 I에서 반사된 뒤에 K에서 다시 굴절되어 우리의 눈 E로 들어오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최대각이 50도 정도가 나오는데, 이 현상이 진한 1차 무지개의 위에 흐릿하게 생기는 2차 무지개이다. 이 두 무지개가 다 뜰 때 우리는 쌍무지개를 보게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에서 뉴턴으로

데카르트는 수학적 방법과 기계적 철학에 근거해서 우주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1644)는 철학과 과학에 대한 그의 노력을 집대성한 책이었다. 이런 그의 과학적 업적들은 후대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만, 이들 중에는 데카르트의 설명이 충분히 수학적이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설들을 많이 사용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이었다. 뉴턴은 데카르트의 [기하학]을 깊이 탐독했지만 곧 이를 뛰어넘는 미적분을 발전시켰고, 광학의 영역에서 데카르트와는 전혀 다른 이론을 제창했으며,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도 중력과 같은 힘을 도입해서 새로운 설명을 시도했다. 뉴턴이 힘을 도입해서 지구 위의 운동과 천체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설명한 책의 제목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1687)였다. 데카르트의 책 제목과 비교해보면 ‘철학’ 대신에 ‘자연철학’, ‘원리’ 대신에 ‘수학적 원리’가 사용되었는데, 이 제목의 차이는 뉴턴과 데카르트의 차이를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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