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대공의 난(大恭의亂),신라 혜공왕,대렴(大廉),각간(角干)

Jobs 9 2021. 4. 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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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혜공왕(惠恭王) 초기 대공(大恭)이 아우 대렴(大廉)과 함께 일으킨 반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대공의 난이 발발한 시점을 768년 7월이라고 했으나,『삼국유사(三國遺事)』및『신당서(新唐書)』의 기록에 따르면 767년으로 되어 있다. 혜공왕은 강력한 왕권을 구사하던 경덕왕(景德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게다가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어머니인 태후(太后)의 섭정을 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즉위 사정은 기존의 진골귀족(眞骨貴族)들에게 불만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혜공왕 즉위 직후 일어난 대공의 난을 시작으로 혜공왕 대는 96각간(角干)의 난으로 상징되는 진골귀족들의 수많은 반란을 겪어야만 했다. 결국 혜공왕은 난중에 피살되었고,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중대(中代)가 하대(下代)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에 있던 대공과 그의 아우 아찬(阿飡) 대렴이 무리를 모아 왕궁을 33일 동안이나 포위했으나, 왕군(王軍)이 이를 토평하고 대공의 구족(九族)을 죽였다고 되어 있다.『삼국유사』에는 대력(大曆) 2년, 즉 767년 7월 3일 각간(角干) 대공이 반란을 일으켜서 왕도(王都)와 5도(道)·주(州)·군(郡)의 96각간이 서로 다투다가 대공의 집은 멸망하고 그 재산은 왕궁으로 실어들였다.

또한,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탔으므로 역당(逆黨)의 보물과 곡식으로 사량리(沙梁里)와 모량리(牟梁里)에 있는 것도 또한 왕궁으로 실어들였다. 결국 난은 3삭(三朔)을 지나 진정되었고, 상을 받은 자가 자못 많았거니와 죽음을 당한 자도 무수히 많았다고 하였다.

한편, 『신당서』에는 재상(宰相)이 권세를 다투어 서로 공격해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는데, 3년이 지나 진정되었다고 되어 있다. 왕경과 5도·주·현(縣)에서 96각간이 대란(大亂)을 일으켜 3년 간을 끌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난의 규모가 매우 큰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대공의 난처럼 큰 반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직접적으로는 어린 혜공왕과 모후인 경수태후(景垂太后)의 수렴청정(垂簾聽政)에서 오는 실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요인은 신라의 전제정치(專制政治)가 그 모순을 드러내어 진골귀족과의 마찰이 심해졌던 데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중대에서 하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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