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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민청학련,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 통일국민당, 정주영, 반공, 반북 성향, 함석헌, 마광수, 안철수, “이게 뭡니까” 보수원로 김동길 교수 별세

Jobs 9 2022. 10. 5.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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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자 정치인. 종교는 개신교. 아호는 산남(山南). 본관은 풍천(豊川).

1928년 10월 2일, 평안남도 맹산군 원남면 향평리에서 원남면장 김병두(金炳斗)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광산업에 손을 댔다가 가산을 모두 말아먹는 바람에 아주 어린 시절에 어머니 및 형제들과 함께 맹산을 떠나 평양으로 옮겨 살았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고 한다. 이때 이후로 아버지와의 연락이 끊어져서 한동안 어머니 혼자서 김동길 자신을 포함한 4남매를 먹여 살리고 공부를 시키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장성한 후에도 아버지를 미워하며 끝내 김동길 그 자신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1945년 해방 직전에 교원 자격시험에 통과해서 평안남도 평원군의 괴산국민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46년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부모와 함께 야음을 틈타 월남했다. 

이렇게 서울에 도착한 김동길은 연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다니던 중 평소에 존경하던 백낙준과 함석헌 등을 좇아 역사학과로 전과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 미국에서 1년 동안 유학을 하고 돌아와 연세대 전임강사가 되어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미국에서 다시 공부를 하라는 백낙준의 권유에 따라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이후 인디애나 주에 있는 에반스빌 대학교 사학과에서 수학한 뒤 보스턴 대학교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한 후에는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랄한 사회풍자글을 계속 발표하였다. 유신 이후에는 함석헌이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에 노골적인 체제비판글을 게재하면서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였다. 학생운동권의 배후조종자로 몰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기소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뒤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같이 체포되어 구속된 사람 중에 하나가 당시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였던 김찬국 전 상지대학교 총장이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해직되었고,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 일시 복직했다가 신군부의 탄압으로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면서 또다시 해직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정치에 냉소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수필이나 신문칼럼만 간간히 쓰면서 칩거하였다. 1984년 6월 정권의 유화조치로 다른 해직교수들과 함께 대학에 복직하였다. 김영삼계와 김대중계가 손잡고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단숨에 제1야당으로 올라선 직후인 1985년 4월, 난데없이 삼김씨는 정치관두고 고향가서 낚시나 하라. 이제 민주주의를 위해 40대가 기수노릇을 해야 한다는 신문칼럼(일명 낚시론 및 40대 기수론)을 발표하였다(한국일보 1985년 4월 4일 “나의 때는 이미 지났다”). 양김씨와 민주화세력이 관제야당을 제치고 국민의 지지를 얻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군사정권이 아니라 야당지도자들을 비판하면서 정계 은퇴를 요구하는 칼럼은 재야와 지식인들의 큰 반발을 사면서 역풍을 맞았다. 

1991년 4월 강의 도중에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에 대해 그를 열사라고 부르지 말아라. 어린 나이에 뭘 알아서 데모를 나갔겠느냐는 식으로 폄하했고, 이것을 학생들이 교내 대자보로 비판하자 결국 5월 8일 사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는 "학생들이 교실에서의 강의 내용을 갖고 스승을 비방하는 대자보를 붙이는 현실에 배반감을 느껴 결국 사표를 낸다"고 발언했다. 당시 <서양문화사 강의를 듣는 한 연세대 학우>라는 제목으로 게시된 대자보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김 교수가 지난날 29일 1교시 서양문화사 시간에 '입학한 지 2개월 된 신입생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얼마나 느끼고 행동했길래 그를 열사라고 부르는가?', '그는 배후조종한 선배들에 이끌려 시위 도중 도망가다가 맞아 죽은 것일 뿐', '강씨를 배후조종해 죽게 만든 선배들은 내빼고 난 뒤 그를 다시 열사로 만들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말해 김 교수 특유의 비약논리로 강씨의 죽음을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하찮은 죽음으로 만들어버렸다. - 출처 : 한겨레신문 1991년 5월 2일자.  
이후 삼김정치 청산과 새정치를 주장하면서 '태평양시대위원회'를 창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한당 창당을 준비하다가, 1992년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최고위원직을 보장받고 합류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정주영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패배하면서 탈당과 함께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통일국민당 대표가 되었으나 소속 국회의원이 절반 이상이 탈당하는 등 당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남은 사람들을 데리고 1994년 5월 박찬종이 이끌던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으나, 당권을 놓고 김동길과 박찬종 양쪽 다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전당대회에서 각목을 휘두르는 난투극을 벌였다. 박찬종계가 다시 이탈하고 김동길은 신민당을 장악했으나, 이미지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 신민당을 이끌고 1995년 1월 김종필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하였으나,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전국구 공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반공, 반북 성향의 인사가 되었다. 국민행동본부 등이 주최하는 집회에서 자주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우익 언론과 각종 인터넷매체에 수시로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살펴보면 대략 20년 주기로 정치적 스탠스가 우측으로 이동하고 있다. 1960~1970년대에는 권위주의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민주화운동가 및 지식인이었다면, 1980년대 이후로는 권위주의 정권과 집권여당 뿐 아니라, 민주화를 주장하는 야당과 (진보적)재야까지 구태정치라면서 싸잡아서 비판하는 현실 정치에 대해 냉소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런 관점에서 소위 제3세력을 자처하는 재벌회장(정주영), 기성정치인(박찬종)과 함께 정치에 나섰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97년 정권교체 이후에는 반공, 반북을 외치는 인사가 되었다.  

특히 노무현이 대통령 퇴임 후 뇌물수수혐의로 검찰조사가 시작되자 
노무현 씨는 정말 딜렘마에 빠졌습니다. (중략)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서 복역하는 수 밖에는 없겠습니다.
라며 자살을 종용하는듯한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적어 논란을 빚었으며, 나중에 정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노 전 대통령 국민장 이후엔
자살로 생을 마감한 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민장은 가히 세기의 장례식이라고 할 만큼 역사에 남을 거창한 장례식이었다. 
라고 올렸다. 다만, 19대 대선 직후 친구인 문재인이 당선되자, 눈치가 보였는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을 공격했어도, 노무현은 자신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비난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저 정신 나간 늙은이가 미쳤나" 같은 소리라도 들을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참 미안하다고... 하지만, 기사에서도 보이듯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 후 자살하지 말라고 해 또 비난받았다.

2010년 전두환의 팔순 생일잔치에도 참여했다. 이때 같이 참여한 사람은 노신영 전 국무총리, 정호용 전 국방장관, 박재완 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비서관, 주호영 국회의원, 심대평 전 충남지사, 윤상현 의원,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소설가 이문열, 강창희 전 국회의장,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 가수 이미자 등이다. 

2012년 11월에는 사퇴한 안철수 후보를 가리켜서 “만에 하나 18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고 하여도 임기 중에 암살을 당했거나 아니면 견디다 못해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란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또다시 어그로를 끌었다. 

2014년 설립된 우파 성향 정치 원로들이 모인 한민족명예원로회의의 공동 의장을 맡았다.

현재는 사단법인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종합편성채널의 패널로도 종종 나오고 있다.

2017년 11월부터 2018년 12월 22일까지 조선일보에서 김동길의 인물 에세이를 연재하였다.

김활란과 이광수를 옹호하는 기사를 실어낸 적이 있다. 
이광수, 김성수, 김활란, 모윤숙 등의 공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과오만을 들추어내는 것은 우리 민족성의 하나의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죄인으로 낙인 찍는 일은 삼가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라는 글을 올렸다.  

전두환 편에서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징역을 선고받은 것에 대해,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제부터 한국 정치는 원칙도 의리도 없다고 판단하고 크게 실망했다."
라고 적었다. 그의 과거 행적과 비교하면 180도 매우 다른 행보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전세계를 강타한 2021년 2월 12일에는 9년전 암살 당했을 거라고 폄하했던 안철수와 함께 유튜브 방송을 진행했다. 여기서 안철수는 현재의 거리두기가 아무 효용이 없다며 과학적 기준을 세우면 자영업자들의 영업도 문제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이후 아예 안철수 지지를 선언하며 선거대책위원회 후원회장에 영입되었다.   

2022년 10월 4일 항년 9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인은 숙환. 생일이 지난지 불과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 본인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은 열리지 않으며 시신은 연대 의대에 기증하였다. 


평생동안 100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다. 모두 수필과 신문칼럼을 모은 산문집들. 문장력이 뛰어나고 사람들에게 쉽게 술술 읽히는 수필로 한때는 상당히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 저자였다. 특히 미국 보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할 당시의 연구 주제가 에이브러햄 링컨이었기에 그의 일생을 간략히 요약한 《링컨의 일생》을 펴내기도 했는데 지금도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금융실명제가 담긴 김영삼 대통령의 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를 정식으로 승인하는 국회 표결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표결 직후 기자들에게 "금융실명제는 지지하지만, 긴급명령이라는 형식이 문제다"라면서 반대표결의 이유를 밝혔다.
1980년대에는 "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를 전파하기도 했는데, 당시 신인 개그맨이던 최병서가 김동길 코스프레를 하며 저 유행어로 인기를 끈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실제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김동길이 강남에서 당선될 때 "최병서라는 친구 덕분에 지나가는 어린이들도 나를 알아보더라. 그래서 선거운동에 매우 유리했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으며, 1997년에는 SBS에서 동길 대 동길이라는 콩트 프로그램을 진행해서 화제가 되기도. 최병서가 분한 최동길 교수와 진짜 김동길 교수가 서로 대담을 하는 형식이었다.   

 

평생도록 나비넥타이만 맨 것으로 유명하다. 한창 방송에 많이 나올 때는 이게 김동길의 상징이었다. 방송에서 밝힌 바로는 미국 유학 시절 학칙이 엄해서 학생식당에서도 항상 타이를 매라고 해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나비넥타이를 하기 시작했다고...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진짜 마법사. 사별하거나 이혼해서가 아니라, 생전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자식도 없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고생시키는 것이 보기 싫어 어릴 때부터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다그것을 잃은 대신에 또다른 그것을 얻었다.. 다만 인터뷰에서 김동길 본인과 누나는 결혼하지 않았고, 형은 6.25 전쟁 때 실종되어 결혼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여동생들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결혼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7세 위의 누나인 김옥길(1921 ~ 1990)은 1961년부터 1979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의 제8대 총장을 역임하였으며, 1979년부터 1980년까지 문교부 장관으로 재임했다. 그리고 이 사람도 살아 생전 평생 독신이었다. 

 

정주영의 통일국민당 실질적 2인자 역할을 했다. 정주영과 그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였다
평안도 출신이다. 그런데 서울말 같은 언어를 쓴다. 단지 서울말에 기반한 언어생활을 오래했기에 그랬을 뿐이다. 스스로 억양에 남아있는 정도라고 평가한다. 평안도 사투리가 서울말과 비슷하다는 주장은 북한이 서울말에 기반한 공용어인 문화어를 '평양말'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어 나온 주장이다. 이 근방 사람들은 "당추가루 좀 가져 오라!"(고추가루 좀 가져와!)라고 심한 사투리를 썼다. 북한 사투리에 관한 일화에 대한 반응 그의 '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는 평안도 사투리를 섞어 '이게 뭡네까'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91세라는 나이로 '김동길TV'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고, 이는 국내 최고령 유튜버였다. 관련기사 당연하겠지만 그의 보수적인 정치성향이 강하게 드러났다. 해당 채널은 2021년까지 운영했다. 

 

지금은 보수인사로 유명하지만, 오래전부터 함석헌을 몹시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함석헌이 발행하던 잡지 "씨알의 소리"에 수차례 기고문을 올리기도 하였고, 2017년 경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공저로 펴낸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에서는 함석헌에 대하여 "나의 스승"이라고까지 말하며 존경을 표했다. 김동길이 본래 영문학과에 들어갔다가 사학과로 전과한 것도 함석헌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광수 교수와도 친분이 있다. 마 교수가 학계에서 왕따를 당하던 와중에 몸까지 아파서 고생하던 시절에 김동길이 보약을 지어 병문안을 간 적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김동길과 마광수 두 사람은 모두 연세대에서 교수를 지낸 이력이 있었고 또한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교수 사회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는 등의 동병상련이 있었기에 서로 친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천상병 시인과도 안면이 있었다. 김동길은 유투브 영상과 회고록 에세이에서 한결같이 천상병을 남을 미워하지도 않고 원망할 줄도 모르는 순수했던 영혼의 소유자로 회고했다. 명동 거리를 지나다가 천상병과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건네고 그에게 술값을 꿔준 것이 첫 인연이었다고 하는데, 주당으로 이름난 천상병에게 값비싼 양주인 조니 워커 한 병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천상병의 아내인 목순옥 여사가 양주는 값이 비싸니 차라리 그걸 팔아서 막걸리를 더 사먹는 것이 이득이 아니겠느냐고 말하자 천상병은 이를 그대로 따라버렸다. 이후 김동길을 만난 천상병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선물받은 양주는 전부 팔아서 막걸리를 마시는 바람에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성신제와도 인연이 있어서, 타계 8개월 전에 성신제 부부가 세배를 온 모습이 방송된 바 있다. 

 

“이게 뭡니까” 보수원로 김동길 교수 별세…향년 94세


보수진영 원로 인사인 김동길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4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5일 유족에 따르면 숙환으로 입원 중이던 김 교수는 전날 오후 10시30분쯤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김 교수는 지난 2월 코로나19에 확진됐다가 회복했지만 3월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해 입원 뒤에도 상태가 호전되지 못했다. 유족들은 고인이 “시신을 의과대학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했다.


김동길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 국민일보DB

1928년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난 김 교수는 1946년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자 월남해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미국 에반스빌대와 보스턴대에서 각각 사학과 철학을 공부해 문사철(文史哲)을 섭렵했고 100권 안팎의 저서를 남겼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사회운동과 현실정치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군부독재 시절 사회·정치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쓰다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 기소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도 연루되며 대학에서 두 차례 해직됐다. 이후 민주화운동과 거리를 둔 고인은 1991년 강의 도중 강경대 치사사건을 비하하는 언급을 했다가 학생들의 반발에 강단을 떠났다.


보수진영 원로 인사인 김동길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4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사진은 1992년 통일국민당 시절 김동길 명예교수의 모습. 연합뉴스

정치인의 길을 걷기도 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합류하면서 정치권에 발을 담갔다. 그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1994년 신민당을 창당하고 이듬해 고 김종필 전 총리의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했다. 그러나 15대 총선을 앞두고 탈당하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고인의 트레이드 마크는 나비넥타이와 콧수염이다. 그는 1980년대 정치평론을 하면서 ‘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말년에는 보수진영 원로이자 보수 논객으로 활동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생전에 “자살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보수진영 원로 인사인 김동길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4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사진은 올해 1월 당시 국민의당 대선 후보였던 안철수 의원의 새해 인사를 받는 김동길 명예교수의 모습. 연합뉴스

고인은 지난해까지 유튜브 채널 ‘김동길TV’를 운영하며 약 30만명의 구독자를 모았다. 올해 초에는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대선 후보의 후원회장을 맡아 야권 단일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고인은 생전 서약에 따라 시신을 연세대 의과대학에 기증했다. 서대문구 자택은 누나인 고(故) 김옥길 여사가 총장을 지낸 이화여대에 기부한다.

장례는 자택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으로는 누이인 옥영·수옥씨가 있다. 발인은 오는 7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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