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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話頭, 말(話)보다 앞서는(頭) 것, 공안(公案), 고칙(古則),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 이 무엇고(是甚麽),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삼 서근(麻三斤), 마른 똥막대기(乾尿橛)

Jobs 9 2025. 3. 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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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말(話)보다 앞서는(頭) 것

 

참선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참구(參究:참선하여 진리를 찾음)하는 문제를 가리키는 불교용어. 공안.

 

 

공안(公案)·고칙(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의 ‘화(話)’는 말이라는 뜻이고, ‘두(頭)’는 머리, 즉 앞서 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두는 말보다 앞서 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참된 도를 밝힌 말 이전의 서두, 언어 이전의 소식이 화두이며, 언어 이전의 내 마음을 스스로 잡는 방법을 일러 화두법(話頭法)이라고 한다.

 

공안이라고 할 때의 ‘공(公)’은 ‘공중(公衆), 누구든지’라는 뜻이고, ‘안(案)’은 방안이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불교 선종(禪宗)의 조사들이 만들어 낸 화두의 종류로는 1,700여 종류가 있다.

 

이 가운데 우리 나라 참선수행자들이 널리 채택하여 참구한 화두는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 ‘이 무엇고?(是甚麽)’,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삼 서근(麻三斤)’, ‘마른 똥막대기(乾尿橛)’ 등이다.

 

‘구자무불성’은 무자화두(無字話頭)라고도 하는데, 우리 나라의 고승들이 이 화두를 참구하고 가장 많이 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한 승려가 조주(趙州)스님을 찾아가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를 물었을 때 “무(無)”라고 답하여 이 화두가 생겨났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에게 틀림없이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스님은 왜 없다고 하였는가를 의심하는 것이 무자화두법이다.

 

‘이 무엇고?’ 화두는 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참된 주인공이 무엇인가를 의심하는 것으로, 무자화두 다음으로 널리 채택되었다. 또한, ‘뜰 앞의 잣나무’는 어떤 승려가 조주스님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답한 말이다. ‘삼 서근’은 “어떤 것이 부처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답한 말이며, ‘마른 똥막대기’는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는 물음에 대하여 문언선사(文偃禪師)가 답한 말이다.

 

이와 같이 화두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고 있는 문답에 대하여 의문을 일으켜 그 해답을 구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할 때는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마치 닭이 알을 품은 것과 같이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며,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화두에 대한 의심을 풀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조선 중기의 고승 휴정(休靜)은 그의 ≪선가귀감 禪家龜鑑≫에서 “닭이 알을 안을 때에는 더운 기운이 늘 지속되고 있으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에는 마음과 눈이 움직이지 않게 되고, 주린 때 밥 생각하는 것이나 목 마를 때 물 생각하는 것이나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고 억지로 지어서 내는 마음이 아니므로 간절한 것이다. 참선하는 데 있어 이렇듯 간절한 마음이 없이 깨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또, 현대의 고승 일타선사(日陀禪師)는 “화두를 드는 법에는 특별한 요령이 없다. 일념으로 간절히 참구하는 방법 외에는 별다른 요령이 없다. ‘간절 절(切)’이야말로 화두를 드는 데 있어 가장 요긴한 것이다. 간절한 일념으로 크게 의심해 나가는 것이 화두법의 가장 요긴한 점이요, 크게 의심하는 가운데 대오(大悟)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조사의 1,700여 가지 화두 가운데 한 가지를 취하여 참선해 보면 쉽게 화두에 집중하지 못한다. 화두는 자꾸 달아나고 번뇌망상이 자꾸 스며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화두에 대하여 집중이 되지 않고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입으로 화두를 외우는 송화두법(誦話頭法)을 권하기도 한다.

 

입으로 계속해서 송화두를 하다 보면 굳이 입으로 하지 않아도 화두가 목구멍 속에서 저절로 나오는 염화두(念話頭)로 바뀌게 되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계속하게 되면 일을 하거나 말을 하면서도 화두가 또렷하게 들리는 간화두(看話頭)가 이루어진다. 간화두가 되었을 때 거듭 대용맹심을 불러일으키면 참의심[眞疑]이 생겨나서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닌 대무심(大無心)의 경지에 들게 되는데, 이때의 화두를 참화두(參話頭)라고 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도를 깨치게 된다고 한다. 즉, 화두가 또렷하게 잡혀서 놓아지지 않는 경지, 밤이나 낮이나 잠을 자나 꿈을 꾸나 항상 참화두가 되는 경지에 이르면 7일을 넘기지 않고 확철대오(廓徹大悟:확연히 꿰뚫어 크게 깨우침)하게 된다.

 

 

 

 

 

 

이야기의 말머리. 또는 참선(參禪)하는 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답을 구하려 애를 쓰는 문제.

 

본래는 불교용어이지만 현대에서는 이른바 '화제', '이슈'같은 의미로 ‘~가 화두가 되다’라는 관용적 표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불교 선종(禪宗)의 수행법

 

선종 중에서도 임제종 등 간화선 쪽에서 중시하는 수행법으로, 깊은 의심을 통해 정신을 극도로 집중시켜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다. 공안이라고도 부르며, 영어권에서는 이를 일본식으로 읽은 고안(Kōan)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화두는 동아시아(특히 일본, 중국, 한국 등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불교 수행법 가운데 하나로, 대한민국 조계종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스님들이 화두로 수행한다. 일본에서도 화두가 꽤 보편화된 수행법이라고 한다.

 

 

선종에서 '화두'의 의미

 

여기서 쓰는 화두란 단어의 한자는 1번 항목과 같지만 뜻은 약간 다르다. 수행법으로써의 화두는 ‘말(話)보다 앞서는(頭) 것’을 뜻하는데, 말 그대로 생각이나 말을 떠올려내기 전에 존재하는 자신의 마음을 찾아내는 방법이 불교의 화두수행이다. 이러한 화두수행법은 ‘간화선(看話禪)’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말 그대로 화두를 보면서(참구하면서) 공부한다는 뜻.

 

좀더 좁은 의미에서의 화두는 ‘태어나기 전의 내 모습이 무엇인가’ 나 ‘이빨에 털이 났다’ 등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어귀 등을 뜻한다. 화두수행자는 이러한 화두들 중 한 가지를 택해 수행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화두는 옛날 조사들이 남긴 어록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화두의 기본적인 형태는 제6조 혜능 이후의 조사선 당시 선사들의 어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당시 선사들은 제자들에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짧은 글귀 등을 던지곤 했다. 이 질문들은 대부분 상식으로는 절대 대답이 나올 수 없는 것들이 많은데,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로 어떻게든 형상과 개념을 초월한 공(空)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제자들 중에서는 그냥 저 질문 하나만 듣고도 곧바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년간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스승이 가르쳐주고자 한 경지를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몇몇 선사들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몸짓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깨달음을 묻는 사람에게 엄지손가락만 들어보인다든지, 주장자로 바닥을 내려친다든지,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는 등의 방법을 이용해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자리를 일깨우는 것이다. 좀더 과격하게는 제자들을 때린다든지, 코를 비튼다든지, 방망이로 후려친다든지, 더 심하게는 손가락을 베어버린다든지 하는 충격요법도 사용했다. 충격요법을 즐겨 활용한 선사들로는 대표적으로 마조, 임제의현, 황벽 등이 있다.

 

지금 우리가 아는 화두수행(간화선)은 남송 시대의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에 의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정립됐다. 당시 남송의 선종은 구두선을 비롯한 각종 사이비 수행승들이 넘쳐나면서 말기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종고선사는 이때까지 역대 조사들의 어록을 화두로 이용해 제자들을 지도했다. 간화선은 스승에게 제대로 자신의 경지를 검증받을 수 있다는 점과, 화두를 일단 줘 놓으면 나머지는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하므로 편지 등을 이용해 원격으로 가르치기에 좋다는 점에서 수도에 머무르는 일이 많았던 귀족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또한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점, 굳이 경전이 필요없기 때문에 글을 몰라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간화선 중심의 수행이 정립된 뒤 오늘날까지 참선과 함께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전해지고 있다. 종파에 따라 다르지만, 조계종과 태고종에서는 대부분의 스님들이 간화선을 거의 유일한 수행법으로 삼고 있다. 원불교에서는 '의두성리(疑頭性理)'라는 이름으로 화두를 참구하며, 박중빈 소태산 대종사가 의두성리에 가까운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긴다. 대신 모두가 의두성리만 하는 것은 아니고, 단전호흡과 묵조선식 지관타좌를 조화시킨 '단전주(丹田住)'라는 명상도 한다.

 

인도에서도 몇몇 힌두교 수행자들이 화두와 비슷하게 '나는 누구인가?' 등의 질문을 참구하면서 수행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직접적인 관련은 거의 없다고 보는 편.

 

 

 

구체적인 방법

 

화두의 가짓수는?

 

대부분의 화두(공안)는 옛날 조사들이 남긴 어록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송나라의 도원(道源)이라는 사람이 쓴 '경덕전등록'에는 조사 1701명의 어록 및 행적 등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1700 공안이라는 개념이 나왔다.

 

간화선에서는 공안 하나를 힘들게 깨치고 나서도 이 1700개의 화두를 다 깨쳐 막힘이 없어야만 정말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인정해 준다. 한 가지 화두를 제대로 깨친다면 나머지 화두도 동시에 깨치게 된다고 하는데, 깨달은 스님이나 수행자들의 사례를 보면 여기에도 약간 개인차가 있는 것 같다. 숭산스님 같은 경우는 견성 후 1700화두를 전부 깨쳤는데도 스승인 고봉선사가 인정을 해 주지 않아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는 더 깊은 깨달음을 얻으면서 고봉선사의 법맥을 이어받게 됐다고 한다.

 

 

하는 법

 

한국에서는 깨달은 스님을 찾아가 화두를 하나 청해 받는 식으로 수행이 시작된다. 화두수행은 특정 질문에 대한 선사들의 답을 바탕으로 '이 분이 어째서 이렇게 말했을까?'에 대한 의문(의정)을 키워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만약 화두가 밑에서도 설명할 '이뭣고'처럼 질문 형식으로만 돼 있다면, 이 질문을 붙잡고 계속해서 의문을 키워가면 된다. 수행자들 사이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화두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선사들의 대답

마삼근(麻三斤)

똥 묻은 막대기(幹屎槨)

앞니에 털이 났다(板齒生毛)

 

"개에게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조주선사의 대답

없다(無).

 

"부처나 조사를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여라(殺佛殺祖).

 

"달마조사가 동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가 무엇인가(是甚麽)?

태어나기 전의 본래 모습이?

이 몸을 끌고 다니는 것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가 돌아가는 곳은?

선(善)도 악(惡) 도 생각지 않았을 때 나의 본래 마음은?

두 손바닥으로 박수를 치면 소리가 나는데, 한 손바닥에서 나는 박수소리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은 무엇인가? 줄여서 이 뭣고? 더 줄여서 이?

 

화두수행에는 의문(의정)이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유지하거나 키워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간화선에서의 의문은 항상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잡념을 끊는 장치로 쓰인다. 화두가 애초에 보통의 상식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답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순수하게 의문만을 키워 삼매(samadhi)에 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화두는 윤리학에서 등장할 법한 사고실험과 매우 유사한 형식을 띠기도 한다.

 

아무래도 의문을 기반으로 한 수행이니만큼, 퍼즐이나 큐브를 푸는 것보다 더욱 머리에 부담이 가게 된다. 이러한 삼매가 꾸준히 계속되면 자나 깨나 화두가 마음 속에 맴돌면서 내가 화두를 하는 건지, 화두가 나를 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 경험까지 하게 된다.

 

 

병통

 

간혹 수행법을 오해하거나 해서 화두수행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를 병통이라고 부르는데, 무(無)자 화두의 경우 보조국사가 10개의 병통을 정리해 놓은 것이 있다.

 

유(有)와 무(無)에 대한 견해를 내고는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것

무(無)라고 해서 '정말 아무것도 없는 어떤 상태'라고 견해를 내는 것

상식이나 논리 등으로 따져서 불성을 알아맞히려 하는 것

지식으로 알아맞히려 하는 것

단순히 눈을 꿈적이게 만드는 내 마음 속의 무언가가 불성이라고 생각해서 더 이상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

화두를 생각할 줄 알고 막대기를 들게 만드는 내 마음 속의 무언가가 불성이라고 생각해서 더 이상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

언어를 통해서 깨달음을 알아맞히려고 하거나, 깨달은 척 말장난을 하는 것

아무것도 안 하면서 앉아만 있는 것

깨달음에 관한 글 등을 인용하면서 깨달은 척 하는 것

열심히 수행도 안 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깨치기를 막연히 기다리는 것

 

 

사실 위의 10가지 병통은 모두 생각으로 인해 일어나기 때문에, 의심을 철저히 가져서 생각의 길을 끊어버려야 제대로 된 화두 수행이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견성(見性)

 

이런 식으로 계속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생각이나 현상이 없어진 본래의 순수한 마음인 공(空)의 마음을 알게 되는데, 이를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견성을 하는 순간에는 공통적으로 날카로운 칼날이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내리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이는 마음 속의 번뇌가 사라지면서 해탈을 향한 맑은 각성상태가 나타날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한다. 한번 나타난 각성상태는 그 상태로 사라지지 않은 채 앉으나 서나 누우나 계속해서 유지된다고.

견성= 숙명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부처님은 6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일반인은 제대로 해도 적어도 10년이 걸린다. 개인의 업장에 따라서 기간이 달라진다.

화두가 잘되고 있으면 염불이나 다라니 독송을 할 때와 같이 귀에 이명이 살짝 들린다. 그리고 머리와 눈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화두를 계속 하다보면 마지막 단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화두가 머릿속에서 노란색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데 이걸 박살내야 한다.

이 순간이 왔을 때부터 견성하기 전까지 낮잠, 음식을 금해야 한다. 보통 1주일안에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가 나오므로 굶어죽을 염려는 안해도 된다. 물론 이 단계에 들어서기 전까지 낮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평상시 졸음을 쫓기위해 커피는 마셔도 상관없다.) 오직 물만 마시며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한다.

스님들이 철야정진 하는 이유도 이 마지막 단계를 넘어서기 위한 준비운동이라고 보면 된다. 잠이 끝없이 쏟아진다.

견성을 하고 나면 앞에서 말한 화두에 대해서도 답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다만 지식으로 따져서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만큼이나 더욱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답변이기 때문에 스님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선문답을 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일반인으로서는 대략 정신이 멍해지게 된다. 언어를 벗어난 경지를 서로에게 드러내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할 수도 있고, 그냥 모순어법으로 아무렇게나 말하면 되는 게 아닌지 생각할 수도 있는데, 들어보면 모순어법으로 말을 마구 던지는 것 같으면서도 그 표현 하나하나가 깨달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고도의 '맥락'을 전제로 해서 대화가 오고가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스님들은 상대방이 정말로 깨달았는지 깨달은 척 하는 건지 상대의 선문답만 듣고도 바로 알 수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견성을 하고 나면 대부분의 스님들이 법거량을 하곤 한다. 법거량은 원래 선사들이 제자들을 지도하거나 깨달음의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나눈 선문답을 뜻한다. 화두수행은 스스로 수행하기에는 편하지만, 자신이 깨달았는지 아닌지 자기점검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선지식을 찾아 화두에 대한 답이 술술 나오는지, 그리고 그 대답이 깨달음에 부합하는지 등을 점검하기 위해 법거량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원래 뜻 이외에도 왠지 스님들의 경지 배틀처럼 쓰이는 경우도 왕왕 있다.

 

 

보림

 

그럼 '견성을 하면 곧바로 깨달음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법도 한데, 대부분의 선사들은 견성 이후에도 추가로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는 편이다. 견성 뒤에도 계속하는 수행을 가리켜 보림이라고 한다. 이는 견성으로 얻은 마음자리를 지켜나감과 동시에 아직 마음 속에 남아있는 미세한 번뇌를 지우는 수행을 말한다. 견성이 이뤄진 다음에는 보림이 저절로 이뤄진다고 한다. 단, 옛 습관이 짙게 남아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퇴전(退轉)이라 하여, 통찰을 얻었음에도 이전의 번뇌와 탐진치로 가득한 생활 방식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었기에, 예로부터 보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선사들이 많았다.

 

한국 불교에서 깨달음이 단계적으로 찾아온다는 관점은 지눌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 처음 깨닫고 난 뒤에도 더 큰 깨달음이 찾아온다든지 하는 선사들의 사례도 많다.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하면서 '더 닦을 게 남았다면 깨달은 게 아니다'라는 요지의 주장을 한 적이 있지만, 이는 '견성하면 그걸로 끝'이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견성했다고 주장하기 전에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성철 스님은 진정한 보림은 완전히 견성하고 난 다음에 이뤄진다고 말했다.

 

 

문제제기

 

21세기에 들어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원문으로 쓰인 불경들이 한국어로 번역되고, 외국에서 유입되거나 소개된 다양한 명상 방법들이 소개되면서, 한국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간화선 수행법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증가하고 있다.

 

 

정통성 문제

 

우선은 정통성 문제를 들 수 있다.

 

간화선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일단 간화선이 석가모니의 수행법과 거리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 중 대다수는 선종 자체가 초기불교 이후 몇백년 뒤에 수차례 의견분열이 일어나 생긴 대승 불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과, 간화선 자체가 석가모니의 수행법이 아닌, 남북조 시대 조사선의 전통에서 출발해 11세기쯤에나 체계적으로 정립된 수행 방법이라는 점을 근거로 든다.

 

석가모니는 호흡관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제자들에게도 이와 비슷하게 감각을 통찰하는 수행법을 지도했다. 남방의 상좌부 불교에서는 4념처(몸, 감각, 감정, 법)를 전부 관찰하지만, 대승불교의 경우에는 마음만을 관찰한다. 이렇듯 초기불교나 남방불교, 대승불교의 '관찰'을 바탕으로 하는 수행법에 비해, 강한 의문을 바탕으로 하는 간화선은 방법 면에서 꽤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스님들의 경우 대부분 대승불교(자세히는 선불교) 측을 지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화두 수행에 대해서도 깊은 믿음 내지는 자부심을 지닌 분들이 많으며, 이 중 많은 사람들이 상좌부 불교나 티벳 불교 등을 폄하하는 경우가 있다. 80년대 후반 위빠싸나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됐을 때 조계종 대다수 스님들이 위빠싸나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두선으로 수행하는 한국 스님들 중 많은 수는 화두선이 근기가 높은 사람을 위한 수행법이며, 관법이나 염불 등은 근기가 낮은 사람을 위한 수행법이라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최근 세계화 추세 속에 위빠싸나 말고도 티벳 불교 계열 명상 등 다양한 수행법들이 한국에 유입되면서, 역으로 화두수행에 대해 폐쇄적이고 현대인들에게 맞지 않고 붓다 본연의 가르침도 아니라는 등의 비판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불교 역시 긴 시간을 거치며 많은 변화가 있었고, 남방 불교 역시 석가모니의 뜻에 가장 가깝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현재 남방불교에서 가르치는 위빠싸나도 석가모니가 실제로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은 호흡 관찰법 이외에, 후대에 개발 및 발명된 각종 방법들이 많이 결합된 것이다. 다만 간화선 역시 발명의 산물이니만큼, 어느 한 쪽만이 가장 정통성이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현명한 자세는 아닐 것이다.

 

 

접근성 문제

 

화두수행이 현대인들(특히 현대 한국인들)에게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화두수행의 특징은 분명 빠른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그만큼 빨리 깨닫기까지 바쳐야 하는 노력이 엄청나다는 데 있다. 어중간한 노력으로는 몇 년 혹은 몇십년을 화두를 잡고 있어도 수행이 답보상태에 머무르다 보니, 웬만한 정신력이 아니고서는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 정신이 산만하거나, 결단력이 없거나, 신심이 부족한 사람들의 경우엔 화두수행이 더욱 어렵다고 하며, 화를 잘 내거나 욕망이 많은 타입 역시 화두수행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역대 선사들은 앉아서만 하는 좌선은 이득이 없다고 했지만 한국에서는 집중 문제 등으로 인해 대부분 조용한 선방 같은 곳에서 좌선하는 식으로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현대인들이 불교 수행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대부분 산만함을 줄이고 싶어서, 화를 줄이고 싶어서, 욕망을 버리고 싶어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어서 같은 이유들인데, 이미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엄두도 못낼 수행이라는건 본말전도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일에 신경쓸 일이 많고, 스트레스도 많고, 여러 가지 면에서 감각적 자극도 많이 받는 시대에 살다 보니 전통적인 화두수행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문제에 대해선 신자들의 수준에 맞게 간화선 수행을 지도하려는 스님들의 노력이 절실하지만, 이 역시 미흡한 부분이 적지 않다. 우선 국내 스님들 대부분은 누군가를 가르치기보다는 자신의 수행에 더욱 전념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서점에 간화선 관련 책들이 있긴 하지만, 책들 대부분은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꽤 불친절한 편이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한자어로 도배가 되어있는 책이 많다는 점도 한자에 무관심한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잘 어필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화두수행 방법 역시 거의 대부분의 스님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수행자를 배려한 맞춤형 지도가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사실 여기에는 1700 공안 중 가장 궁리해서 답을 내기가 어렵고 또 조사들이 가장 즐겨 사용했던 화두들 몇 가지만 계속해서 돌려쓰고 있는 탓도 있다. 대부분의 화두들은 지식으로 답을 추리하기 쉽기 때문에, 아예 정상적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만 사용하고 있는 것. 위 문서 '하는 법' 부분에 기재된 화두들은 선가에서 현재까지 가장 많이 쓰는 화두들이다.

 

스승으로부터 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스승이 살벌하거나 냉랭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언어의 간섭을 최소한으로 하기+어느 순간이든 바짝 깨어있기 등을 연습시키기 위해선 살벌한 방법이 일정 부분 효과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선방에 앉아 참선하는 수행자들 사이를 스승이 죽비를 들고 지나다니다가, 수행자의 정신을 다시 환기시키기 위해 큰 소리로 죽비를 쳐서 법매를 때리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된다. 한국에서는 그냥 스승이 직접 손으로 죽비를 쳐서 소리만 내거나, 소리만 크지 살짝 치고 마는 정도로 끝나지만, 일본의 경우는 상당히 살벌하게 후려친다.

 

 

화두선이 불교 교리와 연관되어 체계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수행하면서 마주치는 경지에 대해 어떻게든 설명하며 가르쳐야 되는데, 경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선종의 특성상 경전과 연동해서 설명하려는 노력이 별로 없었던 것. 화두선을 가르쳐 온 역대 스님들은 경전에 나오는 말보다는 선가에서 통용돼 온 고유의 개념으로 이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의심, 의정(疑情), 의단(疑團), 은산철벽(銀山鐵壁), 오매일여 등등. 결국 경험에 크게 의존하는 형태로 전수가 되다 보니, '과연 불교의 가르침이 맞느냐'라는 비판도 간간이 나오곤 한다. 그래도 최근에는 화두수행을 하면서 나타나는 의식상태를 말라식, 아뢰야식 등 유식학적 용어를 사용해 설명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간화선의 세계화에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스님의 수가 적다는 사실이다. 정말 제대로 결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스님들 대부분은 한문(혹은 좀더 드물게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 이외의 외국어를 잘 배우지 않는다. 통역의 수를 늘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깨달음에 더 가까이 있는 당사자가 직접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일 테니까... 스님들이 좀더 외국어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외국인을 상대로 한 포교에 있어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어쩌면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 목적인데 말이 안 통하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방법 자체의 문제

 

화두선 자체가 좋지 않은 수행법이라는 주장으로, 다소 과격한 주장에 속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화두선 성립 당시부터 계속 존재했다. 같은 선종이지만 조동종 등에서는 간화선을 쓰지 않고, 대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방법인 묵조선으로 수행한다. 종고선사는 이러한 묵조선을 ‘죽은 선’이라 부르며 비판했는데, 묵조선 역시 간화선을 님들은 깨달음도 계단식으로 하나요라며 맞받아쳤다.

 

그러나 최근에는 각종 불경들을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 원문으로 접할 일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현재 전해지는 화두선 수행법 자체에 대해서도 각종 문제제기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화두선 수행자들이 불교 계율을 깡그리 무시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신라시대에만 해도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고승이라도 가차없이 비판을 받는 분위기였지만 화두선 특유의 탈규범적·탈권위적 분위기가 대세가 되면서 깨닫기만 하면 무애행(無碍行)이라는 이름으로 계율을 지키지 않는 것이 오히려 높은 경지로 존경받는 분위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한국 대다수 스님들 사이에서 '최고의 수행법'으로 평가받는 화두선의 권위에 비해, 화두선 수행으로 깨달은 사람이 의외로 얼마 안 된다는 점도 문제로 제기되는 경우가 있다. 일례로 한 스님의 조사에 따르면, 통합종단 출범 이후 50년간 조계종 출가자 50만 명 가운데 20여 명 정도만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정받았다고 한다.기사 링크 심지어 간화선을 주력으로 하는 선원에서조차 수좌들의 40%가 다른 수행을 한다고 하니# 간화선 위기론은 더욱 커지는 상황이다. 그래도 할 사람은 한다.

 

한국 불교계 내부에서도 한국 선불교가 '좌선병'에 걸렸다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심지어 남방불교 기준이 아니라, 중국식 선불교 기준으로도 정도를 넘었고, 법거량이나 수행자 지도 같은 시스템이 마비된 지 오래라는 비판이다.







화두를 들어야 할까요, 호흡을 관찰해야 할까요?

“화두를 들어야 하는지, 호흡을 관찰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먼 과거에 강렬한 화두 참구 경험이 있었는데 제가 그 상에 붙들린 것이라고 생각해서 화두는 잊고 호흡 명상만 하고 있었습니다. 화두와 관련한 스님의 법문을 듣고도 계속 가슴에 답답함이 있어서 화두 참구를 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수행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둘째, 선정을 닦아야 합니다. 셋째, 지혜를 증득해야 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윤리를 지키는 것에 해당합니다. 더 나아가 선정을 닦는 정도까지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수행법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가는 주로 선정을 닦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지혜를 증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만 증득하면 계율은 안 지켜도 되고, 선정은 안 닦아도 될까요? 계율을 지키지 않고, 선정을 닦지 않으면, 지혜가 증득 될 수 없습니다.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것은 지혜를 증득하는 바탕이 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남이 보기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선정을 닦는 것은 자기 스스로 편안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지혜를 증득하는 것은 스스로 번뇌가 없고 모든 사물의 근본 이치를 통달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하면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것을 기초로 해야 됩니다.

 

대승불교, 소승불교, 선불교, 밀교 등 각 불교마다 계율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큰 차이가 없습니다. 계율은 소승불교의 계율이 기본입니다. 소승은 계율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너무 중요시하다 보니까 계율을 좀 덜 중요시하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선승 중에 청정한 계율을 지켜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드물고 막행막식 하거나 욕하고 화내고 술을 먹어도 ‘저분은 깨친 사람이다’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면 계율을 청정히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 안 깨달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계율을 청정히 지켜서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고 이익을 주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이라는 수행의 목표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계율을 지키는 것은 한 부분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선정은 마음을 고요히 하는 가운데 정신이 한곳에 집중되어 깨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는 가운데 자기 상태에 뚜렷하게 깨어있어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몸에 깨어있고, 느낌에 깨어있고, 마음에 깨어있고, 법에 깨어있고, 이렇게 네 가지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해서 ‘사념처관’이라고 합니다. 호흡에 깨어있기는 그전에 해야 할 수행입니다. 초심자들에게는 소승의 기본 계율을 지키는 것과 소승의 기본 수행법을 행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흡관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을 염불로 닦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그 소리에 집중하지요. 밀교에서는 ‘옴마니 반메홈’을 반복해서 염하는 주력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선불교는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참구 합니다. 각 종파는 자신들이 닦는 선정 수행법이 제일이라고 주장하지만,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한다면 화두를 들어서 깨어있든, 호흡에 깨어있든, 동작에 깨어있든, 염불에 깨어있든, 주력에 깨어있든, 선정을 닦는 수행에는 큰 차이가 없어요. 

 

저는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선사입니다. 선불교는 통합 불교이기 때문에 저는 어릴 때부터 선정을 닦는 방법으로 참선도 배우고, 주력도 배우고, 염불도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불교이기 때문에 화두에 깨어있는 화두 참구를 기본 수행법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법문을 할 때 화두를 참구 하는 수행법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질문자가 정토경전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선불교의 발생 원인과 선불교의 장점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화두 참구란 참선 방법의 한 종류인데 어떤 생각이나 관념을 모두 내려놓고, 불교라는 생각이나 부처님이란 생각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화두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부처님이라는 생각이나 불법이라는 생각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호흡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앉아서 머릿속으로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생각하면, 그것은 화두 참구가 아니라 번뇌와 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불교는 원효대사 이후로 통불교 사상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자기 종파만 옳다고 주장하는 종파불교가 아니라 다른 종파도 인정하자는 지향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수행을 해도 좋습니다. 이를 근간으로 용성조사님께서는 5대 수행을 정립하셨어요. 첫째, 참선하는 사람은 화두에 깨어있어야 하고, 둘째, 염불 하는 사람은 염불에 깨어있어야 하고, 셋째, 주력하는 사람은 주력에 깨어있어야 하고, 넷째, 간경 하는 사람은 간경에 깨어있어야 하고, 다섯째, 불사 수행을 하는 사람은 일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불사 수행이란 일을 하면서도 일하는 데에 깨어있는 수행법을 말합니다.

 

이런 많은 수행법이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조계종은 화두에 깨어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수행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두 참구를 하든, 다른 네 가지 중 하나를 하든, 어떤 것을 해도 좋습니다. 저는 출가했을 때 먼저 스승으로부터 화두 참구부터 배웠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선정을 닦는 방법을 가르칠 때는 우선 호흡에 깨어있기를 가르칩니다. 화두 참구든 호흡에 깨어있기든 편안한 가운데 한곳에 집중해서 깨어있는다는 측면에서 그 원리는 똑같습니다. 먼저 호흡에 깨어있기가 되면 나중에 화두 참구를 할 때도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건강이 안 좋아서 운동을 좀 하려고 할 때 무슨 운동이 좋을지 정한다고 합시다. 그때는 인연을 따라서 농구를 하든지 축구를 하든지 등산을 하든지 어떤 운동을 해도 괜찮습니다. 어느 한 가지 운동을 콕 집어서 이 운동이 제일 낫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거나, 누가 가까이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거나, 자신이 사는 환경이 그 운동을 하기에 적당하거나, 이렇게 인연을 따라 하면 되는 것처럼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가지 수행법이 최고라고 고집하는 것은 종파적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질문자가 어릴 때 화두 참구하는 습관이 생겨서 화두 참구가 수월하다면 화두 참구를 해도 좋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거 좀 했다가 저거 좀 했다가 이렇게 섞어서 하는 것은 좋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마음을 집중시킬 때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했다가 그다음에 저절로 ‘이 뭣고!’ 하는 화두가 참구 되면 거기에 집중해도 좋습니다. 간화선은 깨어서 화두를 참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두 참구를 하다 보면 화두에 깨어있기를 하는 게 아니라 생각에 빠질 위험이 많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는 화두를 참구하고 있다고 착각할 소지가 있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호흡 알아차리기는 생각이 일어나면 ‘제가 망상을 피웠습니다’ 하고 비교적 구분을 명확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두 참구는 ‘이 뭣고!’ 하고 참구를 하지 않고 ‘이게 뭐지?’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그걸 화두 참구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화두 참구를 잘못하는 승려들을 향해서 ‘선방에 앉아서 망상만 피운다’ 이런 비판을 하기도 하는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 선정을 닦아도 좋습니다. 그 원리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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