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증, 오규원 [현대시]
물증
오규원
아프리카 탕가니카 호(湖)에 산다는
폐어(肺魚)*는 학명이 프로톱테루스 에티오피쿠스
그들은 폐를 몸에 지니고도
3억만 년 동안 양서류*로 진화하지 않고
살고 있다 네 발 대신
가느다란 지느러미를 질질 끌며
물이 있으면 아가미로 숨 쉬고
물이 마르면 폐로 숨을 쉬며
고생대(古生代) 말기부터 오늘까지 살아
어느 날 우리나라의 수족관에
그 모습을 불쑥 드러냈다
뻘* 속에서 4년쯤 너끈히 살아 견딘다는
프로톱테루스 에티오피쿠스여 뻘 속에서
수십 년 견디는 우리는
그렇다면 30억만 년쯤 진화하지 않겠구나
깨끗하게 썩지도 못하겠구나
시어 풀이
*폐어(肺魚) : 허파로 공기 호흡을 하는 물고기. 몸길이가 1~2m 정도. 물속에서는 아가미로 숨을 쉬지만,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는 펄 속에서 잘 발달한 부레로 숨을 쉬며 산다.
*양서류 : 어류와 파충류의 중간에 위치하며 난생·냉혈임(개구리·도롱뇽 따위).
*뻘 : ‘펄’ ‘개흙’의 방언. 여기서는 ‘살기 힘든 곳.’ 인간 사회의 부정적 의미 내포
이해와 감상
이 시 <물증>은 수족관에서 '폐어(肺魚)'를 보고 떠오른 생각을 적은 것이다. 시적 대상인 ‘폐어’는 이 시에서 ‘물증’에 해당한다. 화자는 ‘폐허’에 대한 성찰을 통해 현대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형상화하고 있다.
시에서 화자는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유추적 발상으로 ‘폐어’를 통해 현대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반어적 표현과 영탄적 어조를 통해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과 자조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어느 날 우리나라 수족관에서 이 시의 핵심 시어인 ‘폐어’를 발견한다. 몸길이가 무려 1~2m 가까이 되는 '폐어'는 아가미로 숨을 쉬는 어류의 성격과 폐를 통해 숨을 쉬는 양서류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 '폐어'는 물속에서는 아가미로 숨을 쉬지만,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는 뻘 속에서 잘 발달한 부레로 숨을 쉬며 산다. 그런데도, 더 진화된 단계인 양서류로 넘어가지 못한 정체된 상태의 생물이다. 또한, 살기 힘든 부정적인 환경인 '뻘 속'에서 4년쯤 너끈히 살아 견딜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시인이 신기해하는 것은 뻘 속에서 4년쯤 너끈히 살 수 있다는 것과 양서류로 진화하지 않고 계속 경골어류(硬骨魚類) 어족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화자는 폐로 호흡하는 ‘폐어’를 통해서 '펄 속'과 같은 환경에서 살아내는 것에만 급급한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비판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그 근거로 ‘폐어’의 특징과 대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제시한다. 화자는 ‘뻘 속에서/ 수십 년을 견디는 우리는/ 그렇다면 30억만 년쯤 진화하지 않겠구나/ 깨끗이 썩지도 못하겠구나’라고 자조적으로 진술한다. ‘뻘 속에서 수십 년을 견디는 우리는’이라는 표현에는 현대문명에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비판이 담겨 있다. 즉 화자는 현대인들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발전시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진화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폐어'보다도 '우리(현대인)'들이 더욱 끈질기게 살아남을 것 같다는 반어적 진술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깨끗하게 썩지도 못하는’ 존재로 희망도 없이 암담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표현하여 부정적 상황을 극복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강하게 비판하게 된다.
작자 오규원(吳圭原, 1941~2007)
시인. 경남 밀양 출생. 1968년 《현대문학》에 <우계의 시>, <몇 개의 현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주로 시의 언어와 구조를 탐구하거나 물질문명과 정치화되어 가는 현대 언어를 비판하는 시를 썼다.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1971), 《순례》(1973), 《이 땅에 씌여지는 서정시》(1981), 《마음의 감옥》(1991),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 《사랑의 감옥》(2001),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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