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진화의 산물, 생존과 번식, 행복의 기원,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행복은 단지,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적 도구일 뿐이다.
정서의 본질적 관심사는 행복이 아닌 ‘생존’이다.
사람들은 보통 행복한 삶이 가장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행복이 최고의 선이라고, 추구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고, 왜 행복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없었다. 그냥 좋으니까 행복은 좋은 거니까 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행복에 대해 WHY 라는 관점으로 접근한다. 인간은 왜 행복을 느끼고, 왜 행복하고 싶을까? 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인간에게 행복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고 그토록 행복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왜 행복한 감정은 오래가지 못할까? 행복감과 관련 있는 감정들을 떠올려 보자. 기분 좋음, 감동, 짜릿함, 통쾌함,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은 성취감 등은 찰나의 순간에 우리 마음 속에 전율을 일으키고선 이내 모습을 감춘다. 새 노트북을 사도, 최신형 스마트폰을 갖고, 원하는 옷을 손에 넣어도 그 만족감은 길어봤자 3일도 못간다. 그리곤 다시 우리는 행복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쾌락이 짧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적응과 관련이 깊다. 리셋(reset)과정이 없다면 우린 매일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장시간 마라톤을 하면서 목이 타고, 뜨거운 햇살에 살이 그을려진 온 몸이 물을 갈구할 때 누군가 옆에서 우연히 물을 내어준다면 어떨까? 행복은 괴로운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행복의 달콤함을 간절히 원할 때 가끔씩 찾아오곤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과 최대한 가깝게, 그리고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길 원한다.
책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바로 ‘생존’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행복감을 느끼며, 행복이 짧게 지속되는 것 또한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다. 행복감이 있으면 다음 날을 살아가는 데 커다란 동기부여가 되며, 행복은 빠르게 사라져야 또 일어나 행복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존과 가장 밀접한, 죽을 것만 같을 때에 생존에 도움이 되는 일이 발생할 때 행복의 쾌락이 극대화 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피곤에 찌든 하루를 마치고 뜨뜬한 온도로 데워져 있는 욕실에 몸을 담글 때, 너무나도 배고팠는데 내가 좋아하는 맛집에 가서 상상하던 음식을 입안 가득 담았을 때 등의 순간이 쾌락이 제일 크다는 것이다.
진화인류학을 공부하는 저자는, 북한산에 관광을 가거나 문화생활을 하는 등의 활동 또한 그 근본이 ‘생존’이라고 한다. 또한 생존과 직결되는 ‘번식’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는데, 그 중 피카소의 얘기가 나온다. 피카소의 예술 작품 중 가장 높은 평을 받는 작품들은 거의 피카소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날 때 였다고 한다.
세계적인 거장들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 유머감각이 뛰어난 사람의 재치 있는 조크(joke) 등의 모든 것들이 자신의 ‘번식’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이기 위한 행위라는 것이다.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겠지만,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생각보다 엄청난 동기부여가 된다는 건 사실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그들의 예술적 혼에 열정의 불을 지폈을 수도 있을 수도 있으니.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책의 후반부에 가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나름의 지침이 등장한다. 앞에서 행복의 원인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했다면, 이제는 적용할 차례인 것이다. 행복은 크든 작든 금방 사라지는 건 변함이 없다. 따라서 저자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건(event)을 최대한 가까이 두고 자주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라고 조언한다.
뇌의 원래 용도는 연애를 하고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사람’이다. 뇌는 이것을 찾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다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 저자는 행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강조한다. 인간의 뇌가 음식을 먹을 때, 사람들과 대화하고 이성과 손잡고 연애할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게끔 설계되어 있으니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뜻이다.
당신이 알고 있던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생존과 번식, 행복은 진화의 산물일 뿐
열렬히 사랑한 두 사람이 있었다. 둘은 결국 헤어졌고, 남은 것은 실연의 아픔이었다. 울며 지새는 밤이 얼마나 흘러야 가슴속 상처가 아물 수 있을까. 이별에는 ‘시간이 약’이라지만 그보다 빠른 약이 있다. ‘타이레놀’이다. 돌팔이 처방 같겠지만, 과학적 근거가 있는 얘기다. 진통제로 마음의 아픔을 줄일 수 있다는 논문이 최근 발표됐다. 심리학자 네이든 드왈은 심적 고통을 겪는 62명을 대상으로 21일간 실험을 했다. 한 그룹에게는 매일 타이레놀을 2알씩 복용하도록 했고, 또 한 그룹에게는 아무 약효가 없는 약을 처방했다(물론 양쪽의 약 성분은 미리 공개하지 않았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타이레놀 그룹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아픔을 느끼는 정도가 눈에 띄게 감소한 것이다.
인간은 왜 행복을 느끼는가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우리 뇌는 심리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똑같이 받아들인다. 몸과 마음의 고통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생존, 그리고 번식. 모든 생명체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인간 역시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생존하기 위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다. 이별의 고통을 알지만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아픔을 감수하고서라도 얻고 싶은 무언가를 위해 인생은 계속된다. 꿈을 위해, 사랑을 위해, 결국 행복을 위해 우리는 살아간다. 행복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삶의 최종 목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인간은 정말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이 확고한 신념이 만약 허상에 불과하다면?
꿀벌은 꿀을 모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도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벌도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이 자연 법칙의 유일한 주제는 생존이다. 꿀과 행복, 그 자체가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 둘 다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것이 인간이다.
(서문 발췌)
행복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기존의 통념을 전복시키는, 행복의 진실에 대한 역설이자 반기다. 저자가 그 근거로 삼은 것은 다윈의 진화론이다.
행복 분야의 권위자 에드 디너 교수(미국 일리노이 대학)의 지도 아래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인용되는 행복 심리학자 중 한 명이다. 저자 역시 ‘인간은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철학적 관점에서 20년을 연구해왔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바로 다윈의 진화론이다.
깊은 고민과 연구 끝에 얻은 결론은, 인간은 지능이 높을 뿐 타조나 숭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100% 동물이라는 것. 이 새로운 시각은 행복에 대한 근본적 생각을 뒤흔들어놓는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힌다. ‘인간도 동물인데, 이 동물은 왜 행복을 느끼는 것일까?’ 『행복의 기원』은 이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결론이다.
행복은 생존을 위한 수단
왜 인간은 행복을 느끼는가? 저자는 난데없이 개 한 마리를 등장시킨다. 인간과 가장 친숙한 동물인 개. 인간은 야생의 개를 집안으로 들이면서 교육과 훈련을 시키기 시작한다.
개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무척 이기적이다. 눈썰매를 끌라 하고, 마약 탐지를 시키고, 집 지키는 것도 모자라 온갖 쓸데없는 개인기까지 보여달라고 조른다. 캘리포니아 해변에 사는 주인을 만나면 서핑을 강요당할지도 모른다. 이건 뭐, 끝이 없다.
하지만 이 철없는 개 주인의 입장은 이렇다. 공놀이도 하루 이틀이고, 뭔가 기막힌 재주를 가르치고 싶다. 미개척 분야인 서핑을 택한다. 문제는, 어떻게?
서핑은커녕 바다에 들어가는 것조차 꺼리는 개를 어떻게 서퍼로 만들 수 있을까? 다행히 주인은 자기 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다. 특이하게도 그것은 새우깡이다. 갑자기 희망이 생긴다.
(본문 65~67쪽)
자, 이제부터는 조련이 시작된다. 개가 물가로 오면 새우깡을 하나 준다. 그리고 물에 발을 담그면, 서핑보드에 한 발짝 올라오면, 또 새우깡을 준다. 한 단계씩 미션을 완수할 때마다 상을 주는 것이다. 결국 개는 서핑을 하게 된다. 서핑을 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지만, 자기도 모르게 서핑을 하고 있다. 개는 단지 새우깡이 먹고 싶었을 뿐이다.
저자는 개가 서핑에 성공한 이유가 ‘새우깡을 먹을 때 뇌에서 유발되는 쾌감’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쾌감을 계속 느끼기 위해 새우깡을 자꾸 먹으려 했던 것이며, 그 결과가 서핑의 성공이라고 말이다.
자연은 기막힌 설계를 했다. 내 생각에,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 같은 유인책이 인간의 경우 행복감(쾌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얻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인간이 음식을 먹을 때, 데이트를 할 때, 얼어붙은 손을 녹일 때 ‘아 좋아, 행복해’라는 느낌을 경험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또다시 사냥을 나가고,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
(본문 68~69쪽)
먹고 자고 사랑할 때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이유. 결국은 생존을 위해서다. 행복, 즉 쾌감을 느껴야만, 혹은 쾌감을 느끼기 위해 인간은 먹고 자고 사랑하는 데 집중한다. 이 관점으로 보자면 행복은 삶의 최종 이유도 목적도 아니다. 생존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행복은 ‘강도’보다 ‘빈도’가 중요하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게 우리의 현실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어쨌든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대학 간판을 위해, 연봉을 위해, 집 평수를 위해 분투한다. 아마 많은 이들의 소원이 ‘로또 1등’일 것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 실제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은 1년 뒤 느끼는 행복감이 보통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인간의 감정은 어떤 자극이나 변화에도 ‘적응’을 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한 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쾌락은 곧 소멸되기 때문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절대적이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저자의 유학 시절, 지도 교수가 쓴 논문의 한 구절이다. 저자는 이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은 문장이라고 강조한다.
살아가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행복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고민이 ‘어떻게?’에 그치는 삶과 ‘왜?’를 고민하는 삶은 분명 다를 것이다. 이 책에 대해 사회심리학자 허태균 교수가 쓴 추천의 말이 그 의미를 요약한다. “이 책으로 우리는 결코 행복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왜 행복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 시대 최고의 행복심리학자가 다윈을 만났다. 결국 그의 위험한 생각에 세례를 받았고, 급기야 행복 연구의 방향을 180도 틀었다. 이 변곡점에서 저자는 외친다. ‘행복이 목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틀렸고, ‘모든 것은 생존과 번식의 수단’이라는 다윈이 옳았다고.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고 생존하기 위해 행복한 거라고. 이 책은 온갖 행복 테크닉에 중독된 우리 사회를 향한 광야의 외침이다. 하지만 행복에 대한 위험한 진실을 말하는 저자의 방식은 세례 요한의 비장함보다는 우디 앨런의 지적 익살에 가깝다. 학자의 지적 성실함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심지어 너무 재밌다. 이제 행복에 대해서도 ‘왜?’를 물을 때!
장대익(진화학자, 서울대 교수, 『다윈의 식탁』저자)
세상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행복의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 방법들을 외워도, 이해해도, 따라 해도 전혀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 답이 바로 이 책에 있다. 뻔한 교훈들로 채워진 행복에 대한 오해와 착각들을 한 방에 날려버릴, 행복에 대한 가슴 아픈 진실이다. 이 책으로 우리는 결코 행복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왜 행복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행복이라는 전설의 용을 멋지게 그린 동화를 원하는 어린이가 아니라, 행복이라는 동물을 조각조각 해부한 과학적 보고서가 필요한 지성인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책이다.
허태균(사회심리학자, 고려대 교수, 『가끔은 제정신』저자)
이성적 사고를 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탁월한 능력 중 하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모습도 아니고, 그 역할이 생각만큼 절대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의식만이 우리의 눈에 보이기 때문에 생각이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항상 좌우한다고 착각한다.
이성적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행복을 이해하는 데 왜 문제가 되는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된다. 보다 중요한 원인을 못 보게 만들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주술사의 현란한 기우제 춤 때문에 비가 온다고 믿었다. 춤은 눈에 띄지만, 비의 원인은 아니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단비를 행복이라고 하자. 이 비가 언제, 왜 내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습도나 풍향 같은 자연 요인들을 이해해야 한다. 주술사의 춤이나 기우제 음식 같은 가시적인 것에 현혹돼서는 행복의 본질을 볼 수 없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 대 동물적 본능. 무엇이 진짜 모습일까? 인간은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이성의 역할을 상당히 과대평가하고 있다. 역으로 본능의 ‘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를 얼마나 움직이는지는 과소평가하며 산다.
- ‘행복은 생각인가’ 중에서(27~28쪽)
우리 조상의 남녀 비율은 1 대 1이 아니라 1 대 2로 여자 비율이 높다. 인간의 경우, 그나마 일부일처제라는 제도 덕분에 남녀 간 불균형이 최근 줄어든 것이다. 다른 포유류들의 경우, 이 비율이 3(수컷) 대 7(암컷) 정도까지도 기운다. 거의 모든 암컷은 자식을 갖지만, 소수의 수컷만이 유전자를 남겼다는 말이다.
이 성비 불균형 때문에 남녀의 기질 차이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여자는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엄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안정지향적 전략을 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수컷의 경우는 다르다. 어차피 최고가 못되면 짝짓기에서 낙오된다. 매사에 ‘모 아니면 도’ 같은 극단적인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자들은 작은 것에도 승부욕이 불탄다. 주먹 반만 한 골프공을 김 부장보다 5m 더 날리려고, 연습장에 출근하며 쇠막대를 5천 번 흔드는 게 남자다. 승부욕 있는 수컷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 ‘인간은 100% 동물이다’ 중에서(34~35쪽)
재미있는 남자. 전 세계 여자들이 꼽는 남자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가 위트다. 그러나 유머러스한 남편이 생존에 무슨 직접적인 도움이 되겠는가? 정신없이 웃느라 굶주린 사자가 나타나도 모를 텐데. 위트 자체가 생존 필수품은 아니다. 그러나 위트는 그 사람이 가진 마음의 ‘수준’을 나타낸다.
피카소를 예로 들어보자. 약 5만여 점의 다양한 미술 작품을 남긴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단지 예술가의 작품만을 아는 걸로는 부족하다. 그가 언제, 왜, 어떤 이유로 그 작품을 남겼는지 이해해야 한다.” 좋소, 피카소 선생. 당신은 왜 그토록 많은 그림을 남겼소? 그의 개인사를 보면 답이 나온다. 그는 한결같은 꾸준함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붓을 한참 내려놓고 있다가 갑자기 예술적 창의력이 폭발하곤 했다. 이 광적인 시기는 그의 삶에 새로운 여인이 등장하는 시점들과 일치한다. 창의성과 로맨스의 궁합. 피카소만의 얘기가 아니다.
한 연구에서는 남학생들에게 만화 한 장면을 보여주고, 그 밑에 최대한 재미있는 캡션을 붙이도록 했다. 동기유발을 위해 한 쪽에는 재미있을수록 더 큰 상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한다(돈 조건). 다른 쪽에는 그냥 멋진 여인과 해변을 걷는 상상만을 하게 했다(연애 조건). 각 조건에서 참가자들이 쓴 캡션을 다른 사람들에게 읽힌 뒤, 그것이 얼마나 재치 있는지 채점하도록 했다. 돈을 통해 동기유발을 시킨 쪽보다 연애 조건에서 나온 생각들이 더 재미있었다. 심리학자들이 이 현상에 붙인 이름은 매우 적절하다. ‘피카소 효과Picasso Effect.’ 여성들이여, 남자가 왜 그렇게 애써 썰렁한 농담을 하는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길.
- ‘다윈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행복’ 중에서(57~59쪽)
인간이 음식을 먹을 때, 데이트를 할 때, 얼어붙은 손을 녹일 때 ‘아 좋아, 행복해’라는 느낌을 경험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또다시 사냥을 나가고,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 먼 옛날 어떤 남자가 고기나 여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나무의 나이테를 셀 때만 묘한 즐거움을 느꼈다고 치자. 눈만 뜨면 밥도 안 먹고 나가서 나무를 자른다. 그는 성인기까지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살아남는다 해도 ‘나이테 동호회’에서 어느 정신 빠진 여자를 만나기 전에는 유전자를 남길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런 기이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자들의 후손이 아니다. 호모사피엔스 중 일부만이 우리의 조상이 되었는데, 그들은 목숨 걸고 사냥을 하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짝짓기에 힘쓴 자들이다. 무엇을 위해? 삶의 의미를 찾아서? 자아성취? 아니다. 고기를 씹을 때, 이성과 살이 닿을 때, 한마디로 느낌이 완전 ‘굿’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상이 된 자들은 이 강렬한 기분을 느끼고 또 느끼기 위해 일평생 사냥과 이성 찾기에 전념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게 된다.
- ‘동전탐지기로 찾는 행복’ 중에서(68~69쪽)
미국 다트머트 대학의 마이클 가자니가 교수는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뇌과학자로 꼽힌다. 최근 그는 자신의 책에서 큰 질문 하나를 던졌다. 인간의 뇌는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 설계되었을까? 일평생의 연구를 토대로 그가 내린 결론은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다. 그는 인간이 ‘뼛속까지 사회적이다’라는 표현을 썼다. 남을 설득하고, 속이고, 속마음을 이해하고…. 뇌의 최우선적 과제는 사람 간의 이런 복잡 미묘한 일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옥스포드 대학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 교수의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오랜 진화 과정 중 어떤 큰 변화가 호모사피엔스의 뇌 발달에 기여했을까? 진화 과정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들과 유골의 크기 변화를 비교해보면 결론이 나온다. 인간의 뇌가 급격히 커진 시기는 함께 생활하던 집단의 크기가 팽창할 때와 맞물려 있다.
약 10여 명의 소규모 집단에서 생활하던 인간이 정글을 나와 초원 생활을 하며 집단의 크기는 약 150명 정도로 커졌다. 낯선 이들과의 교류가 증가했고, 이들이 마음속에 숨긴 생각과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더 높은 지능이 필요하게 됐다. 이처럼 인간의 뇌를 성장시킨 기폭제는 타인의 존재였다는 것이 최근 널리 각광받는 던바 교수의 ‘사회적 뇌 가설’의 핵심이다. 인간을 가장 인간스럽게 만드는 뇌. 한마디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기 위해 뇌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 ‘결국은 사람이다’ 중에서(85~86쪽)
나는 대학에서 행복에 대한 강의를 15년째 하고 있다. 매학기 학생들에게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해줄 사건을 적어보라 한다. 독보적인 1위는 복권 당첨이다. 대학생뿐 아니라 많은 일반인도 복권 당첨과 행복을 동일시하지만, 실제로 복권에 당첨된 경우를 보면 이것이 답이 아니다. 왜 그럴까?
우선 감정이라는 것은 어떤 자극에도 지속적인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계속 반응을 해서도 안 된다. 그 이유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어쨌든 이 ‘적응’이라는 강력한 현상 때문에 아무리 감격스러운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일부가 되어 희미해진다. 인간은 새로운 것에 놀랍도록 빨리 적응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좌절과 시련을 겪고도 다시 일어서지만, 기쁨도 시간에 의해 퇴색된다. 이런 빠른 적응 과정 때문에 비교적 최근의 일들만이 현재의 행복에 영향을 준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최근?
이를 알아보기 위해 수년 전 나는 대학생들의 행복감을 2년 동안 추적해보았다. 대학생들이 일상에서 겪는 좋은 일들 (새로 생긴 남자친구, 대학원 입학 등)과 나쁜 일들(결별, F학점 등)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약 3개월이었다. 다시 말해, 작년에 벌어진 이런저런 사건들은 그들이 4월 1일에 느끼는 행복감에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시간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생각보다 빨리 지운다.
- ‘행복은 아이스크림이다’ 중에서(108~110쪽)
2001년 가을의 한 장면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9월 11일 오전 8시 46분, 보스턴에서 이륙한 아메리칸 항공사 여객기가 맨해튼의 무역센터 북타워로 돌진했다. 17분 뒤 또 다른 여객기가 남타워를 덮쳤다. 첫 테러기가 북타워에 충돌하며 생긴 여진이 남타워를 강타하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비상계단으로 달려갔다. 이 아비규환의 혼란 중 안내 방송이 나왔다. 사고 지점은 그들이 있던 남타워가 아닌 북타워이니, 안심하고 사무실로 되돌아가라는 메시지였다. 당신이 만약 그 비상계단에 서 있었다면, 어떤 결정을 했을까?
그날 비상계단에 서 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런 갈등에 빠졌다. 그냥 올라갈 것인가, 끝까지 내려갈 것인가.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부는 정말 사무실로 되돌아갔고, 일부는 건물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뛰쳐나오기가 무섭게 두 번째 테러 여객기가 남타워를 덮쳤다. 62분 만에 건물은 거짓말처럼 내려앉았다.
순간의 결정이 생사를 갈랐다. 누가 살고 누가 죽었나? 명함에 무엇이 적혀 있고, 나이가 몇 살이고, 얼마나 고상한 취미를 가졌는지, 그날 그들의 생사를 좌우한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수천 명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그들의 평소 ‘성격’이었다. 매사에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김 과장은 “별일 아니야!” 소리치며 사무실로 올라갔을 것이다. 밥값 낼 때 항상 손을 바르르 떨던 최 과장은 일등으로 건물을 탈출했을 것이다. 이 17분짜리 드라마에서 평소 낙관적인 사람들은 목숨을 잃은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소심하고 찌질하다는 소리를 듣던 이들은 생존했을 확률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 ‘사람쟁이 성격’ 중에서(129~1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