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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 Haus Habsburg, 13-20세기 초, 오스트리아 거점, 중부유럽 패권, 신성 로마 제국 제위 세습, 황제 가문, 결혼 동맹, 근친혼, 스페인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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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

Haus Habsburg



창립일 1020년대
창립자 라트보트 폰 클레트가우
現 수장 카를 폰 합스부르크
국가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공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티롤 후백국
괴르츠 백국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트란실바니아 공국
트란실바니아 대공국
크로아티아 왕국
슬라보니아 왕국
보헤미아 왕국
모라바 변경백국
스페인 왕국
이베리아 연합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크라쿠프 대공국
부코비나 공국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파르마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독일 연방
멕시코 제2제국
불가리아 왕국
본가
(종가)
합스부르크( ~ 1556)
스페인 압스부르고(1556 ~ 1700)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1700 ~ 1740)
합스부르크로트링겐(1740 ~ )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중부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았던 가문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세습하면서 근세 유럽의 얼마 안되는 황제 가문으로서 최고의 권위와 영예를 누렸다. 19세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칭제 이전까지 유럽에서 황제가 있었던 국가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 오스만 왕조의 오스만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 뿐이었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패전함으로 인해 제국이 해체되고 본거지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가 지배했던 모든 나라들이 군주제와 귀족제를 폐지함으로써 모든 제위와 왕위를 상실하고 특권이 소멸했지만, 여전히 유럽인의 향수를 자극하는 선망의 명문가다.

 

합스부르크라는 명칭은 합스부르크 백작위가 대표적인 작위였던 초창기에나 쓰였고, 이후로는 조상의 뿌리를 기억하는 일이 유행한 18세기~ 19세기에나 나타났다. 특히 프리드리히 실러의 유명한 1803년작 역사 담시 합스부르크 백작에 힘입어 널리 통용되었다. 이전에도 합스부르크라는 명칭을 쓰는 가문은 있었지만, 잉글랜드 워릭셔 출신인 덴비의 백작들이 족보를 위조하면서 쓴 명칭에 불과했다. 그 이전까지는 대표 작위가 오스트리아 공국-오스트리아 대공국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라는 명칭으로 주로 불렸다. 그러나 합스부르크라는 명칭이 안 쓰였다는 것은 아니다.

 

 

과거 작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독일왕 (1273 ~ 1292, 1298 ~ 1308, 1438 ~ 1806)

오스트리아 황제 (1804 ~ 1918)

오스트리아 대공 (1453 ~ 1918), 오스트리아 공작 (1278 ~ 1453)

슈바벤 공작 (1268 ~ 1313)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1278 ~ 1918)

케른텐 공작 (1335 ~ 1918)

크라인 공작 (1364 ~ 1918)

티롤 백작 (1363 ~ 1918)

괴르츠 백작 (1500 ~ 1918)

보헤미아 국왕 (1306 ~ 1307, 1438 ~ 1439, 1453 ~ 1457, 1526 ~ 1918)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 (1437 ~ 1439, 1440 ~ 1457, 1526 ~ 1918)

스페인 국왕 (1516 ~ 1700)

포르투갈 국왕 (1581 ~ 1640)

지벤뷔어겐 공작 및 대공 (1690 ~ 1867)

토스카나 대공 (1737 ~ 1801, 1814 ~ 1860)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의 왕 (1772 ~ 1918)

부코비나 공작 (1775 ~ 1918)

모데나 레조 공작 (1814 ~ 1859)

달마티아 국왕 (1815 ~ 1918)

롬바르디아-베네치아의 왕 (1815 ~ 1866)

독일 연방 의장 (1815 ~ 1866)

일리리아 국왕 (1816 ~ 1849)

멕시코 황제 (1864 ~ 1867)

 

 

 

 

역사

 

합스부르크 가문

 

시골의 백작 가문에서 제국의 황실로

 

지금이야 영세 중립국이지만 당시 스위스는 독립된 구심점을 갖지 못하고, 몇몇 유력 가문이 세력권을 다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까지만 해도 알프스산맥 언저리에 웅거하던 시골 귀족 가문이었다. 호족 더 정확히 말하자면, 10세기에는 '합스부르크 가'라는 이름 자체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근본도 없는 가문은 아니었으며, 애초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7세기경부터 알자스 일대에 터를 잡으며, 교황을 배출한 적도 있는 대귀족인 에티호넨 가문의 방계 가문이며, 창시자인 라트보트의 자식들이 라트보트의 아내인 '로렌의 이다'를 통해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이기도 해서 어느 정도 나름의 명예는 있었다. 즉, 훗날에 있을 전성기를 생각해보면 미약하기 짝이 없지만 그렇다고 시작이 남루했던 건 아닌 셈.

 

이 중 브라이스가우 백작 군트람에게 아들 로첼린이 있었다. 1020년경 로첼린의 장남으로, 합스부르크 가의 시조인 라트보트(Radbot)가 오늘날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 하비히츠부르크(매의 성)에 기반을 잡고, 성을 쌓은 이후 백작 노릇을 하면서 비로소 합스부르크 가문이 시작되었다. 이 합스부르크 성(Schloss Habsburg)이 바로 가문명의 유래이다.

 

정확히 라트보트의 작위명은 클레트가우(Klettgau) 백작이었다. 훗날 그의 손자인 오토가 처음으로 합스부르크 백작을 칭했으며 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 아르가우 주를 벗어나 유럽의 패자로 급부상할 계기가 마련된 것은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대공위시대(1254~1273)였다. 강력한 위세를 지닌 교황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잇달아 파문을 날려 버리는 상황 속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제위를 잃었고 앙주의 샤를과의 전쟁에서 패한 콘라딘이 나폴리에서 사형당하며 대가 끊겼다. 이후 강력한 교황권 및 제후 간의 권력 다툼으로 약 20년간 황제가 선출되지 못하며 대공위시대의 혼란한 상황이 이어졌다.

 

대공위시대 속에서 독일의 정세가 혼란해지자 이제는 교황이 제발 누구든 황제가 되어달라고 애걸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나, 선거권을 가진 제후들은 내가 황제를 하기는 싫지만 남의 세력이 커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독일계가 아니라 슬라브계인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의 오타카르 2세가 대공위시대를 틈타 오스트리아 공국 등의 영토를 집어삼키고 가장 강력한 황제 후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라이벌 가문도 싫고 슬라브인인 오타카르 2세도 싫은 독일귀족들이 타협책으로 일부러 한미한 가문의 가주를 바지사장 삼아 황제로 옹립하려 했는데, 이때 포착된 것이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세력이 한미한 지방 호족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황제 가문으로 고려되지 않았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 4세에겐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라는 배경이 있었으며, 황제선거가 계속해서 난항을 겪자 마인츠 대주교 베르너 폰 에프슈타인(Werner von Eppstein 1225~1284)과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의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von Nürnberg 1220~1297)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위를 생각치도 못했던 루돌프 4세는 자신에게 기회가 생기자 작센과 브란덴부르크의 아스카니아 가문, 라인 궁정백령과 오버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 등 선거권이 있는 독일 주요 가문들만 골라 기민하게 혼인 동맹을 맺었다. 그 결과 1273년, 루돌프 4세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황제선거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고,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러 루돌프 1세로 즉위하여 대공위시대가 종식되었다.

 

바젤 주교와 치고받던 아르가우의 일개 백작에 불과했다가 생각지도 않게 독일왕으로 선출된 루돌프 1세는 주어진 기회를 이용할 줄 아는 야심가였다. 대관식을 치른 루돌프 1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가문의 영지를 적극적으로 확장했다. 협소한 스위스 산골짜기를 벗어나 평야지대로 확장을 모색했던 루돌프 1세가 포착한 곳이 오스트리아 공국이었다. 때마침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된 이래 오스트리아를 통치해왔던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어 공위시대(1243~1278)의 혼란기에 있었다.

 

루돌프 1세는 독일왕이라는 지위를 무기로 삼아 대공위시대를 이용해 여러 영토를 불법침탈한 보헤미아 왕국 국왕 오타카르 2세를 압박하였다. 오타카르 2세가 영토 반환에 불응하자 제국추방령을 날려 오타카르 2세의 행동반경을 좁히는 한편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국왕 라슬로 4세, 괴르츠-티롤 백작 마인하르트 2세 등과 동맹을 맺은 뒤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의 지원을 얻어 1278년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라이벌인 오타카르 2세를 전사시켰고, 제국법에 따라 오스트리아 공국과 그 형제국인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회수하여 맏아들인 알브레히트에게 주었다.

 

한편 루돌프 1세가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사이, 1291년 스위스 4개 주가 스위스 동맹을 결성하여 반란(독립 투쟁)을 일으켰다. 결국 1315년 스위스가 독립에 성공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는 오스트리아가 되었다. 루돌프 1세의 사촌들로부터 기원한 분가들은 여전히 스위스 부근에서 활동하였는데, 본가와는 다른 독자노선을 추구하다 15세기 초쯤에 단절되었다.

 

 

권토중래

 

루돌프 1세 사후 맏아들 알브레히트 1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었지만 알브레히트 1세는 조카 요한 파리키다에게 암살당했다. 요한 파리키다는 동생 루돌프의 아들이자 오타카르 2세의 외손자로, 상속받아야 했던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알브레히트 1세에게 넘겨주었으나 알브레히트 1세가 약속한 보상을 주지 않자 앙심을 품고 큰아버지를 암살했다. 그 대가로 요한은 가문 족보에서 지워졌으며 제국추방령을 당해 이탈리아반도를 전전하다 피사에서 객사했다. 알브레히트 1세 사후 14~15세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유력 가문인 룩셈부르크 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이 양분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위에서 한동안 배제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공국을 중심으로 그 인근에서의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져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특한 전략인 결혼 동맹을 통해 점차적으로 세력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다른 유럽 각국도 결혼 동맹을 세력 강화의 기본 전략으로 활용했지만 합스부르크는 특히나 결혼을 전략적으로 더 잘 활용했다. 특히 1335년에 케른텐 공국과 크라인 공국이 합스부르크의 직할령으로 반환되면서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다. 기존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에다가 케른텐, 현대 슬로베니아의 전신격인 크라인 공국이 더해졌고 1363년에는 티롤 후백국까지 획득하면서 현대 오스트리아 영토의 근간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비롯한 독일 남동부 일대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으로 자리잡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막강한 제후 세력으로 도약했다.

 

다만 가문의 세력이 강해진 반면 그 세력이 한데 통일되지는 못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게르만족의 전통적인 분할 상속을 통해 가문의 영지들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분할 상속을 막으려는 시도 자체는 꾸준히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세력을 나눠 받은 같은 가문의 통치자들은 협력하고 단결하기보다는 반목하고 갈등하기를 택했다. 그렇게 가문 내의 불화는 1세기 가량 지속되었고, 1490년 막시밀리안 1세가 오스트리아 전체를 통일할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략 이 상황을 유지했다. 143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이자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었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대를 잇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황제의 사위였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가 선출되어 1438년 독일왕 알브레히트 2세가 되면서 비로소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알브레히트 2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제위를 유지했다.

 

 

최전성기

 

16세기 카를 5세 대에 마침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패자로 등극했다. 그 기반을 만든 것은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였다. 막시밀리안 1세는 스스로 최초의 '선출황제'(Electus Romanorum Imperator)임을 선언하면서 황제 선출에서 교황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했다. 본토인 오스트리아에서 완전한 기틀을 닦은 막시밀리안 1세는 적극적인 결혼 정책을 펼쳤다.

 

저지대를 보유하게 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부르고뉴 공국, 이제 막 레콩키스타를 완수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한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연합 스페인 왕국, 그리고 동유럽에서 헝가리 왕국과 그 동군연합인 크로아티아 왕국, 슐레지엔을 포함한 보헤미아 왕국 등 막대한 영토를 보유한 야기에우워 가문와의 혼인을 차례로 성사시켰다. 이런 혼인 동맹 이후에 합스부르크 가문에 기적 같은 행운이 일어났는데 이 가문들의 부계가 끊기면서 그 가문들의 영토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대로 인수했다.

 

15세기 중반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다시 차지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쾰른 등의 라인강 유역과 특히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알자스 등지에서 팽창 정책을 펼치던 부르고뉴국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었다. 그러나 부르고뉴 공작이었던 용담공 샤를이 외동딸 마리 드 부르고뉴를 남긴 채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에 부르고뉴국과 같은 발루아 왕조이자 명목상의 종주국이었던 프랑스가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게 부유했던 부르고뉴를 향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는 용담공 샤를이 전사하자마자 남자 계승자가 없다는 이유로 부르고뉴를 침공했으며, 저지대의 백성들을 선동하여 마리 드 부르고뉴를 겐트 성에 가둬버린 후 자신의 7살 난 아들과의 결혼을 강요했다.

 

부친의 급사 이후 부르고뉴 여공작이 된 마리 드 부르고뉴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부르고뉴를 지켜줄 힘을 가지고 있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결혼했다. 이를 통해 프랑스가 그토록 군침을 흘리며 노리던 북해 연안 17주, 특히 플란데런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을 장악하는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명군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가 브르타뉴 공국으로 손을 뻗자 브르타뉴 공국의 상속녀인 안 드 브르타뉴과의 정략 결혼을 추진하려 하는 등 서쪽 국경의 판도를 계속 넓혀나갔다. 이 때 합스부르크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라이벌이었던 잉글랜드 왕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 등까지도 안과의 정략결혼을 추진하면서 프랑스를 견제하려 했으나, 안은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을 선택했다. 그러나 동서로 적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경계한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무력으로 브르타뉴를 침공하고 안과 강제로 결혼하면서 결국 브르타뉴 공국은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무엇보다도 결혼 동맹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아들 필리프를 트라스타마라 왕조 카스티야 왕국의 왕녀 후아나 1세와 결혼시켰고, 딸 마르가레테는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과 결혼시키면서 연합 스페인 왕국과의 결혼 동맹을 결성했다. 기존 후계자였던 후안이 사망하면서 스페인은 일차적으로 필리프와 후아나가, 이차적으로는 둘의 장남 카를 5세가 물려받았다.

 

또 막시밀리안 1세는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야기에우워 왕조와의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오랜시간 공을 들여 결혼 동맹을 성사시켰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438년 룩셈부르크 왕조가 단절되었을 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와 함께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왕위도 일시적으로 차지했으나 당시 두 나라의 현지 귀족이 실권을 쥐고 있어 제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약 2년만에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를 상실했다. 이후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는 야기에우워 왕조가 차지했는데, 결혼동맹의 대가 막시밀리안 1세는 이 야기에우워 왕조 출신의 울라슬로 2세의 딸 언너와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를, 안나의 동생 러요시 2세와 손녀딸 마리아를 결혼시켰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쉴레이만 1세의 침공으로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하여 헝가리-크로아티아-보헤미아의 야기에우워 왕조가 갑작스럽게 단절되었고, 두 나라의 왕위는 페르디난트 1세를 통해 사실상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지위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이자 스페인 가톨릭 부부왕의 손자였던 카를 5세는 부모와 조상의 후광, 특히 할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막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 시대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외형상 최전성기를 맞았다. 카를 5세가 통치하게 된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막 통일을 이루고 대서양 무역을 장악하며 신대륙까지 접수에 들어간 강대국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강대국을 둘이나 차지했다.

 

이 카를 5세 치하의 제국은 이를 저지하려던 발루아 왕조의 프랑스와 맞붙어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이탈리아 반도를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시켰다. 카를 5세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난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까지 맞물리며 30년 전쟁으로 부활을 선언할 때까지 100년 동안 유럽 구석에서 버로우하게 된다.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필요에 따라 양측에 적절히 붙고 배신하면서 자국의 안정을 도모했지만 카를 5세는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 허가조차 좌지우지할 만큼 권력이 막강했다.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던 합스부르크의 패권을 새로 위협하기 시작한 두 개의 변수는 바로 종교 개혁과 오스만 제국이었다. 특히 북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짓밟기 위해 스페인군을 독일로 데려온 것이 정치적인 패착이 되었다. 독일인이 주류인 신성 로마 제국의 일에, 동군연합이라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적인 혈연으로 연결되었을지언정 결국은 외국 군대인 스페인군을 개입시킴으로써 독일어권 세력들 간의 연대의식을 방해했음은 물론, 암묵의 룰을 깼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독일의 제후들은 종교와는 별개로 카를 5세에게 깊은 불신을 가졌다. 그 결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계와 오스트리아계로 갈라졌으며 결과적으로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 개혁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가화를 가속화시키며 분열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전성기를 맞은 쉴레이만 1세 치하의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왕국을 무너뜨리고 동쪽 국경을 엄습했다. 내전과 1529년의 제1차 빈 공방전으로 말미암아 합스부르크는 광대한 영토 전면에 걸쳐 전선을 확장시켜야 했다.

 

가히 호사다마라 할 수 있는 최악의 위기였지만 카를 5세는 군제개혁을 통한 전술상의 성공과 신대륙에서 쏟아져 나오는 부, 그리고 그간 다져온 많은 조력자들의 도움을 등에 업고 겨우 가문의 유산을 지켜냈다. 다만 막시밀리안 1세 이래로 추진되어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절대왕정 수립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영방 체제가 계속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출범

 

유럽 전역을 석권했던 카를 5세의 사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본가인 스페인계 합스부르크와 분가인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로 분열되었다. 카를 5세의 작위 중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스페인, 네덜란드 저지대, 이탈리아 반도 영토, 아메리카 대륙, 필리핀 등 나머지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상속되었기 때문이다. 그 외로 선거군주제였던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 역시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어갔는데, 물론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제위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했으나 당시 독일 제후들의 반발로 불가능했다. 

 

카를 5세의 뒤를 이은 페르디난트 1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부유한 저지대와 식민지를 물려줬지만, 형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물려받은 페르디난트 1세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추진했던 결혼 덕분에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라는 막대한 영토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페르디난트 1세 이후 오스트리아는 중부유럽의 최강자로 거듭났다.

 

그러나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에 귀속되었던 저지대 국가는 펠리페 2세의 가톨릭 고집으로 인해 북부 7주인 네덜란드가 1648년 완전히 독립했다. 한편,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남은 오늘날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에 귀속되어 약 1세기 동안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남았다.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를 지키기 위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얻어야 했기 때문에 종교 문제에는 비교적 관대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이유로 루터교회에 관대했던 막시밀리안 2세 이후 후계자들은 갈수록 종교 문제에 완고하게 대처했다. 결국 합스부르크 황제들의 비타협적인 종교관은 30년 전쟁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 독일은 인구가 2/3로 급감하고 국토가 황폐화되는 치명상을 입었으며, 종전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북독일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라는 지위는 사실상 명목상의 작위로 전락했다.

 

 

 

중흥기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흥은 18세기에 찾아왔다. 레오폴트 1세의 헝가리-크로아티아 귀족 탄압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가문 지배에 반감을 품었던 퇴쾨이 임레가 오늘날의 슬로바키아인 상 헝가리(Felvidék )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요청으로 오스만 제국군이 대규모로 침공해와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레오폴트 1세는 독일의 영방 제후들과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우군으로 끌어들여 빈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낸 후 퇴각하는 오스만 제국군을 곧장 추격하여 대튀르크 전쟁을 일으켰다. 사부아 공자 외젠의 맹활약으로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탈환했고 이후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동유럽을 잠식해 들어갔다. 대튀르크 전쟁으로 자신감을 얻은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후에도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해 동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제2차 빈 공방전에서 도움을 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해 냠냠하기도 했다.

 

한편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를 두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이 서로 왕위를 주장하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년~1714년)이 일어났다. 13년에 걸친 전쟁 끝에 부르봉 가문은 스페인 왕위를 따내는 것은 성공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을 영원히 합칠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과거 한때 스페인령이었던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의 이탈리아 영토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획득했다. 반면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는 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1세기간의 길고 느린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다.

 

대튀르크 전쟁의 후속전으로 치러진 제6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1716년 ~ 1718년)에서도 오스만 제국에 승리를 거두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북부 등을 획득했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렇게 18세기 전반기에 다시 중흥을 맞이하게 되었만 예기치 못한 것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상기된 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카를 6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여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카를 6세는 살리카법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문을 물려주기 위해 국사조칙을 공표했다. 그러나 본디 계승 서열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우위에 있었던 형 요제프 1세의 딸들과 사위들의 존재 때문에 카를 6세는 주변국에게 많은 이권을 떼주거나 영토를 양보해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 프랑스와 접하고 있던 로렌 공작 프랑수아 에티엔이었기 때문에 특히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반발이 심했고, 결국 카를 6세는 1736년 로렌 공국을 신성 로마 제국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프랑스로 넘겨주었다. 또 1734년 일어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체결된 빈 조약(1738년)에서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위해 주변국들에게 상당 부분을 양보했고 그 결과 토스카나 대공국과 파르마 공국을 획득하는 대신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내주었다.

 

카를 6세가 이렇게 여러 조치를 취해 두었지만, 그가 사망하자 프로이센 왕국 등 주변 여러 세력들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계승을 반대하며 달려들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 바이에른 선제후이자 요제프 1세의 사위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알브레히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카를 7세가 오래지 않아 사망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계속 이어갔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 이후 왕조는 정식으로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라 칭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합스부르크 가문이라고 불렀다. 한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알짜배기 땅이던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에게 빼앗겼다. 이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동맹의 역전이라는 초강수까지 동원하여 노력하였으나 7년 전쟁에서 패배하여 독일 내에서의 패권을 잃었다. 대신 마리아 테레지아의 치세 동안에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등 반항적이었던 동군연합을 평정하고 북쪽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프로이센, 러시아와 함께 분할, 획득하였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프랑스 혁명이 터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실로 혁명 전파를 두려워한 여러 왕정 국가들과 같이 대프랑스 전쟁을 일으켰으나, 혁명 프랑스군의 놀라운 전투력과 때마침 등장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탈탈 털리고 벨기에와 밀라노 공국마저 뺏겨버렸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자 위기에 처한 프란츠 2세는 그동안 동군연합 상태를 유지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출범시키고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과 손잡으며 공동 전선을 결성했으나 치명타를 입고 1806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자체가 해체되었다.

 

이어지는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까지 깨지면서 유일한 해안 지역인 달마티아를 뺏기고 프란츠 2세의 장녀 마리아 루도비카를 강제로 나폴레옹에게 시집을 보내는 등 굴욕을 맛보다가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으로 몰락하자 재반격에 나서 프랑스를 핀치로 몰아붙였다.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빈 회의에서 티롤, 달마티아 등 잃었던 영토의 상당수를 회복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인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자 빈 체제를 주도하였다. 이후 민족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뒤덮으며, 독일 통일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게 되었고 아울러 그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보호자로 여겼던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이 민족의식에 대해 눈 뜨기 시작했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1848년 헝가리 혁명을 제압하는 등 오스트리아 제국은 한동안 버텼으나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결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게 롬바르디아에 이어 베네토 지역을 상실하고, 분가가 통치하던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레조 공국도 멸망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탈리아보다 더 큰 문제는 1866년 독일 통일을 두고 벌어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의 패전이었다. 그동안 자타가 인정하는 독일 내 최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위신은 무너졌으며, 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하는 통일 독일에서 강제로 배제되었다. 잇달은 패배의 여파로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국 내에서 독일인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던 헝가리인들과 타협하여 새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했다.

 

 

 

몰락

 

독일 통일에서 배제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수립으로 서쪽으로의 진출이 막히자 대신 남쪽 발칸반도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특히나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환자로 전락하면서 발칸 반도의 수많은 민족들이 독립을 외치는 가운데 세르비아가 남슬라브 민족 통합을 내세우자 세르비아를 견제할 겸 발칸 반도로의 확장을 추구했다.

 

우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일시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던 독일 제국과 우호관계를 다진 뒤 보스니아를 확보하며 남방 진출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역시 남쪽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며 끼어들면서 발칸 반도의 판세는 더욱 복잡하게 돌아갔다. 결국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제위 계승자가 암살당하면서 이전에 쌓이고 쌓인 수많은 갈등이 폭발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카를 1세가 퇴위하며 길었던 합스부르크의 시대가 막을 내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등은 귀족제도를 폐지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복위 시도를 아예 차단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중장 출신인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헝가리 왕국을 복원하며 헝가리 왕위는 남아있긴 했지만, 명목상의 복원이었을 뿐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입국을 거부하는 등 섭정 지위로 1인 독재 체제를 유지하였고 이마저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헝가리에 사회주의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군림하는 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일세를 풍미한 이름 높은 가문으로 대접받으며, 근대 유럽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웅변하는 산 증인이다.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으로 전환한 지 100년이 넘어가고 있음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주는 비록 이름 뿐이지만 아직 오스트리아 황제,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국왕 등의 작위를 주장한다.

 

이처럼 군주제의 폐지나 불합리한 승계과정으로 인해 왕위를 빼앗겼다고 주장하거나, 만약 그 왕조가 이어져 왔다면 지금은 누가 왕일까 설정놀이를 하기도 하는데, 그 대상자를 왕위 요구자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이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지금은 명예상의 문제에 불과하고 진지하게 군주로서의 실권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물론 오스트리아도 그렇고 생각이 있는 왕위 요구자들은 실권이 없는 입헌군주제로라도 왕정복고를 원하지만 그것조차 원만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니고, 전쟁 자체도 아무 잘못도 없는 제위 후계자가 암살당해서 일어난 거라 말이 패전국의 황실이라지만 정상참작이 충분히 됨에도 불구하고 공화주의 정권의 황실 배척이 이례적으로 강해서 제정복고의 길이 다른 유럽 국가보다도 요원하다.

 

 

구 본가: 스페인 압스부르고

 

카를 5세가 스페인 왕위를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면서 스페인 왕위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분리되었다. 합스부르크 왕조 하면 신성 로마 제국부터 떠올라서인지 부각이 되지는 않지만 단절 전까진 이쪽이 본가였다.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로부터 이어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달리 스페인 압스부르고는 카를 5세의 아들인 펠리페 2세로부터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카를 5세의 작위 대부분을 계승했고, 전성기의 그 위세 역시 동시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보다 강력했다. 

 

 

 

 

분가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1700년 스페인 제국 압스부르고 왕조가 단절되기 전까지 분가였다가 1700년부터 1740년 단절되기 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가였다.

 

리우펜부르크 백작가와 키부르크 백작가

 

리우펜부르크 분가와 키부르크 분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다른 분가들과는 달리 합스부르크 가문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에게서 기원한 분가가 아니라 루돌프 1세의 친척들에게서 기원한 분가이다.

 

루돌프 1세(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 4세)의 친할아버지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 2세는 아들로 합스부르크 백작 알브레히트 4세와 루돌프 3세를 두었다. 알브레히트 4세가 루돌프 1세의 아버지이므로 루돌프 1세에게는 삼촌이 되는 루돌프 3세는 이후 리우펜부르크 분가의 시조가 되었다. 루돌프 3세는 리우펜부르크 분가를 이을 아들 합스부르크리우펜부르크 백작 고트프리트 1세를 낳았으며, 루돌프 3세의 또 다른 아들인 키부르크 백작 에버하르트 1세는 키부르크 가문의 상속녀 안나와 결혼하여 키부르크 분가의 시조가 되었다.

 

그렇게 루돌프 1세와는 별개로 분가한 리우펜부르크 분가와 키부르크 분가는 현 스위스 부근에서 어느 정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는 했으나 루돌프 1세에게서 기원한 친척만큼의 중요성과 권력은 가지지 못했으며, 루돌프 1세의 아들 알브레히트 1세의 살해에 가담하는 등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노선을 취하기도 하였다.

 

리우펜부르크 분가는 1408년에, 키부르크 분가는 1414년 혹은 1417년에 대가 끊겼다. 영지와 작위 대부분은 루돌프 1세에게서 기원한 친척들에게 넘어갔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은 1918년 왕정이 끝나기까지 키부르크 백작을 칭했다.

 

 

 

분할 상속에 따른 구 분가들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렸던 오스트리아 공국-오스트리아 대공국 등의 영지는 오랜 기간동안 분할 상속되었다. 루돌프 1세가 합스부르크 가문 최초로 오스트리아의 통치자가 된 이후 루돌프 1세의 영지는 아들들인 알브레히트 1세와 루돌프 2세에게 분할 상속되었고, 알브레히트 1세의 영지 역시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실질적인 분가가 형성되지는 못했는데, 루돌프 1세의 아들인 루돌프 2세는 요절하여 결국 알브레히트 1세가 영지 모두를 차지했고,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들 역시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상속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통 합스부르크 가문에 실질적인 분가가 형성된 것은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들인 알브레히트 3세와 레오폴트 3세 대인 것으로 본다.

 

하오스트리아를 상속받은 알브레히트 3세는 본가인 알브레히트계 합스부르크의 시조가, 내지오스트리아와 외지오스트리아를 상속받은 레오폴트 3세는 분가인 레오폴트계 합스부르크의 시조가 되었다. 또한 레오폴트 3세의 아들들인 에른스트 공작과 프리드리히 4세 대에 다시 영지가 분할 상속되면서 내지오스트리아를 상속받은 에른스트 공작을 시조로 하는 슈타이어마르크 분가와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를 상속받은 프리드리히 4세를 시조로 하는 티롤 분가가 성립되었다.

 

그렇게 본가인 알브레히트계 합스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분가인 손위의 레오폴트계 합스부르크, 티롤 분가인 손아래의 레오폴트계 합스부르크가 영지를 분할 상속해 다스렸으나 본가는 라디슬라우스 대공이 자녀 없이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대가 끊겼고, 티롤 분가 역시 프리드리히 4세의 아들인 지기스문트 대공이 자녀가 없던데다가 막시밀리안 1세의 협박으로 물러나면서 단절되었다. 본가가 된 슈타이어마르크 분가 내에서도 상속자가 프리드리히 5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 한 명만 남으면서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 대에는 영지가 일시적으로 통일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인 페르디난트 1세 사후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들인 막시밀리안 2세, 페르디난트 2세, 카를 2세에게 다시 분할 상속되었다. 막시밀리안 2세가 니더외스터라이히와 오버외스터라이히를, 페르디난트 2세가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를, 카를 2세가 내지오스트리아를 상속받으면서 이전처럼 오스트리아 본가, 티롤 분가, 슈타이어마르크 분가가 분할 상속받았다.

 

오스트리아 본가인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들은 모두 상속자 없이 사망하였고, 티롤 분가인 페르디난트 2세에게도 상속자가 없었으므로 결국 슈타이어마르크 분가가 오스트리아 본가가 되었다. 카를 2세의 아들들인 페르디난트 3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레오폴트 5세는 마지막으로 영지를 나누었다. 페르디난트 3세는 레오폴트 5세에게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를 떼주어 오스트리아 본가와 별도로 다시 티롤 분가를 성립시켰다. 레오폴트 5세의 아들들인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과 지기스문트 프란츠 대공이 상속자 없이 사망하면서 티롤 분가의 대는 끊겼고, 그 결과 레오폴트 6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 대에 이르러 오스트리아 영지의 분할 상속은 완전히 끝났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토스카나 대공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이탈리아계 분가 1로, 아버지 프란츠 1세의 토스카나 대공국을 상속받았던 레오폴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며 차남 페르디난트에게 토스카나 대공국을 물려주며 창설되었다.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패전한 여파로 반외세 혁명이 일어나 페르디난도 4세가 폐위당하면서 명목상 가문만 남았으며, 현 수장은 마지막 대공 페르디난도 4세의 현손인 지기스문트(1966~)이다.

 

 

다스부르고에스테 공작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제2의 이탈리아계 분가로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4남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이 마사 여공작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와 결혼하면서 창설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페르디난트 대공과 마리아 베아트리체의 장남 프란체스코 4세가 자신의 외할아버지 에르콜레 3세 데스테의 뒤를 이어, 모데나 공국의 공작이 되었으나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패전한 여파로 반외세 혁명이 일어나 프란체스코 4세의 아들 프란체스코 5세가 폐위당하면서 명목상 가문만 남았다. 프란체스코 5세는 아들이 없어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모데나 공위에 대한 권리를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넘겼다가, 그의 사후 카를 1세를 거쳐 그 차남 로베르트 대공에게 상속된 후 로베르트 대공의 후손들이 보유하고 있다. 현 수장은 로베르트 대공의 장남 로렌츠 대공(1955~)으로 벨기에의 아스트리드 공주와 결혼하여 벨기에에서 지내고 있다.

 

왕정복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가장 왕위와 거리가 가까운 합스부르크 분가가 바로 이 에스테 가문이다. 로렌츠 대공의 아내 아스트리드 공주의 계승서열이 오빠인 벨기에 국왕 필리프의 자녀들 다음인 5위이기 때문에, 아주 낮은 가능성이지만 필리프의 자녀들이 미혼이거나 자식이 없거나 한다면 로렌츠와 아스트리드의 자식들이 합스부르크 벨기에 국왕으로 등극할 수도 있다.

 

 

헝가리 궁정백 가문

 

nádorispán(헝가리어) / Palatin(독일어) / comes palatinus(라틴어)

 

헝가리 왕국의 궁정백은 헝가리 국왕 다음가는 직위이다. 레오폴트 2세가 넷째아들 알렉산더 레오폴트 대공에게 헝가리 궁정백의 직위를 수여하여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으로는 최초로 궁정백이 되었으나, 자녀가 없어서 레오폴트 2세의 일곱째아들 요제프 안톤 대공이 계승하였으며, 이후 그 아들 슈테판 대공이 계승했으나 1848년 헝가리 혁명으로 헝가리 왕국에서 궁정백이 폐지되자 명목상의 호칭이 되었다.

 

슈테판 대공이 아들이 없어 상속한 조카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1872~1962) 대까지는 근근히 대를 이어가는 수준이었으나, 그 후손들이 다산해서 친증손자녀만 34명으로 늘어 한 분가를 이루었다. 현 수장은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의 증손 요제프 카를(1960~)이다.

 

 

 

테셴 공작가(단절)

 

테셴 공국을 영지로 하는 분가.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4녀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테셴 공작 알베르트 카지미어 부부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자녀가 없었던 알베르트와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조카 카를 루트비히를 양자로 들였고, 카를 루트비히의 장남 알브레히트가 대를 이었으나 1남 2녀 중 장녀만 무사히 장성해서 1895년에 조카인 프리드리히기 뒤를 이었다. 프리드리히는 1남 8녀를 두었는데 막내인 아들 알브레히트 프란츠가 1955년 세상을 떠나 대가 끊겼다. 그리고 프리드리히의 형제 중에는 카를 슈테판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인 카를 알브레히트와 빌헬름 프란츠 형제는 각각 스스로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자국의 독립 영웅으로서 숭앙받았다.

 

군인으로 유명한 가문으로, 테셴 분가의 일원들은 19세기부터 제국 멸망 때까지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주요 직위를 차지했다. 카를 루트비히 대공부터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호적수로 유명했던 인물이며 그 명성은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 첫째 아들 알브레히트 대공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제국 육군 원수로서 감찰관직에 올라 군 개혁을 지휘했고, 둘째 아들 카를 페르디난트 역시 원수였다. 두 형제는 아버지를 따라 19세기 중반의 혁명 진압에 종군하기도 했다. 한편 카를 페르디난트의 세 아들 역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군의 중책을 맡았다. 장남 프리드리히는 육군 원수로 전군 총사령관직과 란트베어 사령관직을 겸임했으며 차남 카를 슈테판은 대장 계급을 달고 황립 및 왕립 전쟁해군의 감찰관직을 역임했다. 삼남 오이겐 역시 큰형과 마찬가지로 육군 원수였으나 그는 야전 사령관으로 최전선에서 복무하였다.

 

다만 명목상의 테셴 공작위가 단절된 것일 뿐 생물학적 남계후손(귀천상혼 계통)은 있다.

 

 

 

근친혼에 따른 흥망성쇠

 

근친혼을 간략하게 정리한 표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교 계수(막시밀리안 1세~ 카를 6세)

 

합스부르크 가문은 결혼을 통해 동맹을 다져서 전쟁을 피하는 방식으로, 이따금은 상속을 통해 작위와 영토를 얻는 방식으로 가문을 번영시켰다.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는 시구가 유명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카를 5세로부터 시작된 스페인 압스부르고는 다른 왕조들처럼 혁명이나 외부의 침입 등으로 단절된 게 아니라 수십~수백 년간 반복된 근친혼의 폐해 때문에 무너졌다. 스페인 압스부르고도 근친혼이 심각하기는 했지만, 스페인 압스부르고의 조상인 트라스타마라 왕조부터 이베리아 왕국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근친혼 전통이 있었다. 스페인을 계승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근친혼이 두드러지게 심하지 않았던 합스부르크는 이러한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근친혼 전통을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계승했다. 위의 그림과 같은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 탓인지 뒤로 갈수록 장애인 왕이 등장했으며 영아 사망률까지 점차 증가함에 따라, 결국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에 이르러서는 카를로스 2세의 형제들이 모두 젊거나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본인도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2세기만에 단절되었다.

 

카를로스 2세에 이르면 유전자 결함으로 정신적으로 상당히 심약한 것은 물론이고, 보통이라면 외모에 대한 미약한 악영향만 끼치는 주걱턱이 거의 질병 수준으로 악화되면서 음식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도 못했다. 게다가 말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을 정도로 중증이 되었으며, 생김새도 흉측했다. 뿐만 아니라 불임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스페인 압스부르고의 대가 끊기면서 카를로스 2세의 유언대로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를 놓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성실하고 선량한 인물이었다.

 

어째서 합스부르크 가문, 특히 스페인 압스부르고가 그토록 근친혼을 고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당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통념과 다르게 합스부르크 왕조의 근친혼은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근친혼이 극심하던 시절은 스페인 압스부르고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나뉘어 통치하던 시절로, 이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근친혼을 한 이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페인 압스부르고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같은 가문임에도 다스리는 영토가 다르니 통치에 대한 의견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는데, 혼인 동맹은 왕조 내에서 그 의견 차이를 최대한 수습하고자 한 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참금과 혼수를 가문 내에서 유통하게 하려는 의도, 살리카 법을 따르지 않는 스페인의 특성상 추후 여왕이 즉위하였을 때 스페인 왕위가 타 가문에 넘어가지 않도록 보존하려는 의도 역시 존재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는 매우 근시안적인 생각이지만, 당시는 근친혼이 누적되었을 때 초래될 수 있는 위험이 충분히 알려지지 못한 시점이었고, 실제로 불임이었던 카를로스 2세의 장애조차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또한 스페인 압스부르고가 재위하던 시기 유럽은 한창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 무렵으로, 합스부르크 가문과 동등결혼을 할 만한 가문의 다수가 개신교로 개종한 상태였다. 종교가 다른 가문 간의 통혼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까다로운 것이었고 특히 가톨릭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던 스페인 압스부르고로서는 가톨릭 가문과의 통혼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수의 가문들이 개신교로 개종한 상태에서 스페인 압스부르고의 결혼 상대는 종교 개혁 이전에 비해 매우 좁혀질 수밖에 없었고, 불운으로 펠리페 2세의 세 번째 부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나 펠리페 4세의 첫 번째 부인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등 비교적 유전적으로 관계가 먼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왕녀들마저 장성한 남성 후계자를 얻지 못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출신의 왕녀들과의 재혼으로 눈을 돌린 결과가 바로 중첩된 근친혼이었다. 스페인 압스부르고는 그 이외에도 포르투갈의 아비스 가문과도 통혼하였지만, 중간에 아비스 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이베리아 연합이 형성된데다가, 아비스 가문 역시 이미 기존의 카스티야, 아라곤 왕조인 트라스타마라 가문과 강한 혈연 관계를 지니고 있었기에 유전적으로 가까운 사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교황이 관면을 해주는 근친혼은 3촌까지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근친혼이 대대로 겹쳐서 일어났기 때문에 촌수 역시 중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펠리페 2세가 3촌이자 5촌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안나와 결혼한 것이 그 예시이다. 이렇게 근친혼이 중첩해서 일어나다 보니 4촌혼인데도 3촌혼만큼 유전적으로 가깝거나, 3촌혼인데도 남매혼만큼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카를로스 2세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로, 일반적인 3촌혼이 0.1250 정도의 근교 계수를 가지는 것에 반해 남매혼의 근교 계수를 뛰어넘는 0.2539라는 높은 근교 계수를 지녔다. 하지만 가장 높은 근교 계수를 지닌 인물은 벨라스케스의 걸작인 <Las Meninas>(시녀들)라는 그림의 모델로 유명한 스페인의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3촌이자 4촌이자 6촌인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여 낳은 딸인 마리아 안토니아로, 무려 0.3054라는 근교 계수를 지녔다.

 

이처럼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등의 개족보 관계가 계속 잇따르면서 유전적 결함이 중첩되어 문제를 지닌 후손들이 대거 태어났고, 외모적 특성인 합스부르크의 주걱턱이 지속적으로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주걱턱의 별칭이 합스부르크 턱(Habsburg jaw or lip)인 게 괜한 말이 아닐 정도로 주걱턱이 가문의 심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합스부르크 가문이 여러 세대에 걸쳐 주걱턱을 유전한 데에는 근친혼이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나, 통념과는 달리 근친혼이 주걱턱 그 자체의 기원인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근친혼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주걱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애초에 막시밀리안 1세가 주걱턱이 있었고 특정 가계에 열성 유전병 인자가 존재할 경우 근친번식을 통해 중첩가능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있다. 근친결혼을 해서 주걱턱이 된다면, 굳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니더라도 그시절에는 근친결혼이 자주 일어났기에 그사람들은 모두 주걱턱이어야 한다. 그러나 기원이 어찌되었던 근친혼이 지속되면서 주걱턱도 세대를 거듭해지면서 심해졌다.

 

한편 카를 5세의 동생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로부터 시작되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는 근친혼이 스페인보다는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은 눈에 띄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시밀리안 2세 정도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높은 근교 계수를 유지하였는데, 스페인 압스부르고의 단절 이후 예전만큼 극단적인 근친혼을 할 필요가 줄어들면서 이후로는 완화된 축에 속한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 다시 근친혼 비중이 높아지면서 부모인 프란츠 2세와 마리아 테레사가 외사촌 겸 고종사촌이었던 탓에 뇌전증, 수두증, 언어장애, 정신지체 등에 시달린 오스트리아 제국의 페르디난트 1세 같은 사례도 존재했다. 프란츠 2세의 남동생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도 뇌전증에 시달렸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주걱턱이 남아있었다.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의 경우 대체적으로 바이에른 선제후국-바이에른 왕국의 비텔스바흐 가문과 많이 통혼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어머니와 첫 번째 부인이 모두 바이에른 공국의 비텔스바흐 가문이었다. 레오폴트 1세는 팔츠 계열의 비텔스바흐 가문인 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와 결혼해서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를 얻었고, 프란츠 요제프 1세도 어머니 조피 대공비가 바이에른의 공주였기에 황후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과 이종사촌이었다. 이외에도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보르본 왕조, 작센 선제후국-작센 왕국의 베틴 왕조, 사보이아 공국-사르데냐 왕국의 사보이아 왕조, 포르투갈 왕국의 브라간사 왕조 등 가톨릭 가문과 주로 통혼했다. 이외에도 페르디난트 1세의 부인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는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의 야기에우워 왕조이었고, 카를 6세의 황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출신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배우자 프란츠 1세는 로렌 공국 출신이었다.

 

중고등학교나 교양서에서 배우는 세계사에서 오스트리아의 비중이 낮은 것도 혼인과 종교로 번성한 가문의 역사와 연관 지을 수 있다. 세계사에서 가르치는 교양이나 교육 목적은 민주 시민의 양성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서쪽으로는 중세 봉건주의적 제도를 통해서, 동쪽으로는 이슬람-기독교 갈등의 최전선에서 기독교 세력의 수장으로 세력을 확장했던 오스트리아보다는 봉건적, 중세적 질서를 극복하고 근대적 세계를 수립한 영국, 미국, 그리고 프랑스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독재국가들의 세계사 과목에서 상대적으로 오스트리아에 큰 비중을 두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현대 세계는 영국, 미국, 그리고 낮은 비중으로 프랑스가 세운 체계 아래에서 움직이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흔적은 동유럽 및 중부유럽 일부밖에 남아있지 않으며 이들은 국력이 떨어져 영향력이 적기 때문에, 일부 왕조 호사가들 이외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가풍

 

중세 이래 현대까지 수백년 동안 지속된 가문이기 때문에 가풍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면과 진보적, 실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면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는 다소 보수적이었지만, 정치와 문화에서는 실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특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스페인 압스부르고가 갈라진 후 상대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는 실리적인 면모가 부각되었다. 이는 가문의 분할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시조가 된 페르디난트 1세와 스페인 압스부르고로 적통이 이어진 카를 5세 형제의 성향 차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종교적 측면에서 보수적인 면모를 보일 때도 있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체적으로 동시대의 다른 가문에 비해 현실적,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면모를 보일 때가 많았다. 이러한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면모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스페인 압스부르고는 오스트리아계에 비해서는 보수적인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웃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 비해서는 매우 관용적인 정치를 펼쳤다. 사실 스페인은 국가 자체가 레콩키스타로 탄생했기 때문에, 가톨릭의 영향력이 오스트리아보다 훨씬 강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오스만 제국에게 수도 빈이 포위된 게 2번이고, 스페인은 통째로 이슬람에게 탈환한 다음에도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맞부딪쳤으니 종교색을 안 띄는게 불가능한 지형이기도 했다.

 

16세기 이래 합스부르크 가문은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정책이 대성공을 거두어 유럽 각지에 걸친 다민족의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합스부르크는 이웃 프랑스 왕국과는 달리 합병된 소수민족 영토를 일방적으로 찍어누르는 대신 해당 지역의 문화, 언어를 상당히 존중해 주는 관용적인 통치를 펼쳤다. 이는 비슷한 문화권을 통합한 프랑스와 달리 완전히 문화권이 다른 여러 나라들을 통치하게 된 점과 더불어 무력을 통한 합병이 아닌 결혼을 통한 상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는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전까지 선출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현지 귀족들의 권한과 관습을 존중하면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민족적 관용 정책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몰락하는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지속되었다. 비록 사라예보 사건 때문에 빛을 못 보았으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도 합스부르크식 유연함을 잘 보여준다.

 

이런 합스부르크의 민족적 관용 정신은 시대를 앞서 나간 것이었는데, 덕분에 다민족 국가인 합스부르크 제국이 꽤 오랜 동안 별 잡음 없이 굴러갈 수 있었다. 오늘날 잘못 알려진 것과는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 하에서 비독일계 민족들의 불만은 크지 않았고 오히려 대체로 그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긍정하고 그들의 지배를 환영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형식상 지배자라는 타이틀만 가져갔을 뿐 보헤미아 왕국을 제외하면 그들의 고유 문화와 제도에 거의 터치하지 않았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했다.

 

크로아티아인처럼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이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원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오스만 제국의 위협 때문이었다. 동유럽인들은 언제 있을지 모를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항상 두려워했고, 합스부르크를 그들을 지켜줄 구원자로 여기기까지 했다. 게다가 독일계가 아니라고 해도 본토 오스트리아인에 비해 딱히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는 독일계와 헝가리인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다양하게 활동했다.

 

이런 민족적, 문화적 관용은 오스트리아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스페인 압스부르고에서조차도 나타나는데, 일례로 카탈루냐에 대해서 압스부르고 왕조는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하였지만 압스부르고 왕조가 단절되고 들어선 프랑스계 보르본 왕조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했다. 현재 카탈루냐가 스페인에 합병되었다고 말하는 1714년이 바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고 보르본 왕조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다. 이말은 역으로 그전 합스부르크 시절에는 카탈루냐가 거의 독립국 수준의 자치를 누렸음을 뜻한다. 물론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관용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만큼 전면적인 것은 아니어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온건한 성향은 봉건주의가 마지막까지 건재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프랑스 등 다른 봉건국가들이 차례차례 내부의 개혁-혁명 압력에 붕괴되거나 굴복할 때, 합스부르크 왕조는 건재했다는 것 자체가 피지배 계층의 지지-동의를 받았다는 걸 뜻한다. 결국 합스부르크는 자본주의, 민족주의, 공화주의, 산업혁명 등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이를 무너뜨리려면 세계대전의 패배가 필요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경우도 그렇고, 스페인도 사실 종교 개혁, 교파화(confessionalization) 시대 유럽 열강 정치판의 중심에 있어서 종교적인 면에서 워낙 독선적이었던 것이지, 종교를 뺀 세속 정치문화면에선 상당히 관용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스페인 본토의 경우만 하더라도 전임 가톨릭 부부왕의 문화, 교육 진흥 정책을 이어받아 인문주의에 기반한 대학 설립을 통한 관리, 공무원, 법률 전문계층 양성을 통해 드넒은 스페인 제국을 성공적으로 통치했고, 당장 안방인 카스티야의 1520년 코무네로스 봉기부터 강제 개종당한 그라나다 왕국의 무어인 봉기, 17세기 중반 포르투갈과 카탈루냐의 쌍방울 반란 등을 겪으면서도 역시 종교문제가 걸려 대학살과 무어인 추방으로 끝난 무어인 문제만 빼곤 대부분 패배한 반란 세력을 주동자 몇몇만 처형하고, 압류된 재산이나 작위도 한세대 뒤에 복권시켜주는 등 관대한 처분을 통해 국내 안정을 이루었다.

 

신대륙 정복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참극의 역사속에서, 사실 톨레도, 세비야, 마드리드에 소재한 본토 왕실과 정부는 1512년 부르고스 칙령, 1542년 원주민 신법안, 1550년 바야돌리드 논쟁 등을 통해 엄연한 스페인 왕실의 신하로서 원주민들에게 일정한 권리와 자치권을 부여하고, 콩키스타도르와 엔코미엔다 지주들로부터 보호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시기 벌어진 신대륙 원주민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은 대부분 현지 콩키스타도르, 엔코미엔데로(Encomiendero, 말그대로 엔코미엔다를 소유한 지주)들의 사적 탐욕 등에 의해 벌어졌고, 원주민들이 어마어마한 숫자로 죽어나긴 했으나 이건 구대륙과의 접촉으로 인한 전염병 문제가 훨씬 더 컸고, 원주민들을 절멸이 아니라 개종, 노동력 징발의 대상으로 보았던 스페인 당국은 오히려 선교사들을 통한 구호 활동을 통해 토착민 숫자를 보전하려고 했다.

 

스페인의 식민지 행정 체계 수립 노력도 16세기 후반쯤 되면 제대로 된 성과를 발휘, 현지 부왕령에서 직접 다스리는 식민 거점 도시들을 제외한 농촌과 밀림의 원주민들은 공물과 노동 징발 대신 현지 자치를 인정 받는 원주민 영방 (República de indios) 체제가 자리잡았다.

 

현실 정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대 통치자들은 매우 현실적, 실리적 면모를 보일 때가 많았는데, 합스부르크의 황제들은 새로운 제도와 문물을 앞서 수용하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실리적인 면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 더욱 부각된다. 초장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푸거 가문으로부터 자금을 융통하여 신성 로마 제국 제위의 세습을 굳히는 등 가문을 확장하는데 적극 이용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 경제사학계에서도 금융의 선진화를 앞당긴 사례로 평가받기도 한다.

 

다른 가문이 영토를 넓히기 위해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막시밀리안 1세 등 합스부르크의 군주들은 결혼 정책을 통해 손쉽게 가문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는데, 이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리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물론 합스부르크의 이런 결혼 정책도 공짜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자존심을 굽히고 수십년 동안 타가문과 유대관계를 지속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합스부르크에서 고지식했던 통치자에 속했던 카를 5세도 화승총 부대를 도입하여 유럽 전쟁사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다.

 

근대에는 계몽군주인 요제프 2세가 나타나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하며 신기술과 제도를 도입하는데 앞장섰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를 취했으나, 사회문화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시대를 앞서나가는 굉장히 리버럴한 분위기의 나라였다. 빈 체제로 인해 보수주의자로 평가되는 프란츠 2세는 비록 정치체제와 종교에서는 보수적이었지만, 과학과 예술을 적극 후원했고 신기술도 적극 도입해 도나우 강에 증기선을 띄우고 철도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합스부르크의 문화 덕분에 19세기 빈은 유럽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예술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파리에 비해 화려함은 조금 떨어졌지만 시대를 앞서나가는 진보적인 예술 풍토를 특징으로 했다.

 

반면 보수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보수적인 측면이 나타난다. 이는 종교 개혁기의 카를 5세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카를 5세 등 합스부르크 군주들은 속권의 문제에서 교황과 멱살은 잡았을지언정 교권에서는 교황과의 관계가 좋았으며, 사코 디 로마로 유명한 카를 5세 역시도 교권에서는 교황에게 추호의 적의도 품지 않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의 아들 펠리페 2세 역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아버지와 성향이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당대 유럽 왕실들과 비교할 때 합스부르크 군주들은 (상대적으로) 성생활도 깔끔하고 사생활 스캔들도 적은 편이였다.

 

다만 이러한 신념형 보수주의 정책은 그만큼이나 호불호도 많이 갈려서,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교회의 보호자'로 칭송되었으나, 개신교 측에게는 악의 축 취급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다만 이런 신념형 보수주의는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 전체에서 볼 때 그렇게 두드러진 특징은 아니며 고지식했던 카를 5세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이었다.

 

빈 체제를 들면서 정치 체제에 대한 보수성을 얘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 유럽의 세습 지배 가문 중에 정치체제적으로 보수적이지 않았던 가문은 없었다. 오히려 합스부르크는 동시대의 타 가문에 비해서 정치적으로도 상대적으로 관용적이고 리버럴한 편이었다. 동시대의 영국이나 프랑스의 근대사가 중세 질서에서 벗어나 민주적 국가를 수립하는 길을 걸었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은 봉건 영주 간의 혈연 관계와 작위에서 인위적으로 탄생한 나라였기 때문에 국가 자체가 태생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띌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통성은 오스트리아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역사적, 민족적 경험이라기보다는 합스부르크 군주가 갖고 있는 작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구상했었던 동등한 민족들의 연방 국가라는 비전이 현실화됐다면 민족국가보다도 더욱 진보적인 나라가 탄생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라 자체가 망해버렸기 때문에 어떻게 됐을지는 알 수 없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이되 제도와 기술에서는 실리적인 통치로 요약할 수 있다.

 

이렇게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가풍은 이후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과 히틀러와의 대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출신 신분부터가 하늘과 땅 차이로 격차가 컸지만, 무엇보다 지독하게 편협한 히틀러의 인종, 문화관과 합스부르크의 이 가풍은 절대로 원만하게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

 

참고로 역사학자 Peter Marshall은 그의 저서 「종교개혁」에서 17세기 후반 유럽이 종교개혁의 '교파화' 시대가 끝났다는 예시로, 합스부르크를 거론했다.

17세기 후반에 국내외 정치에서 헌신적인 신앙의 역할이 줄어들고 종교 전쟁의 시대, 종교 개혁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 견해는 어느 정도 참이다. 일례로 당대의 정치적 거물인 프랑스의 루이 14세(제위 1656~1715)가 팽창주의 야망을 드러내자 지난날 신념 정치의 기수였던 가톨릭권 오스트리아는 그에 맞서 연합한 신교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 中

 

 

 

 

 

근황

 

상술했다시피 프랑스의 발루아 가문 및 부르봉 가문과는 몇 세기에 걸친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21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차지하고 있는 왕위가 없는 데에 비해 부르봉 가문은 스페인 왕위를 가지고 있다. 정작 본가인 프랑스에서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축출당했기에 20세기까지 제위를 유지한 합스부르크 가문보다 사정이 딱히 낫다고 보긴 힘들지만 말이다.

 

2010년, 합스부르크 가문 관련의 뉴스가 나왔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전현직 통치자 가족이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손은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기 때문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조카 울리히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 이는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으로 전환된 이후 1919년 4월 3일 제정된 합스부르크 법(Habsburgergesetz) 때문인데 이 법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입국 금지와 재산 몰수, 오스트리아 대통령 출마 금지에 관한 내용이 있다. 2011년 6월 이후 문제의 조항은 철폐되어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도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법 자체는 지금도 남아있으나 합스부르크 가문 재산 몰수와 관련된 조항이 아니면 사실상 사문화된 법이다.

 

1989년 3월 14일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부르봉파르마의 치타가 96세의 일기로, 2011년 7월 4일에는 마지막 황태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이 9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스스로 '공화국 시민'으로 자처하며 세간의 존경을 받았던 오토 대공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누리던 시절을 경험한 마지막 인물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은 오토 대공과 작센마이닝겐의 공녀 레기나의 아들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며, 프란체스카 폰 티센보르네미서와의 사이에서 총 1남 2녀(총 3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 중 둘째이자 유일한 아들이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이다. 참고로 이 사람은 2018년까지 포뮬러 3 드라이버로 활동했고 GT를 거쳐 2022년 현재는 월드 인듀어런스 챔피언십의 LMP2 클래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페르디난트 대공의 누나이면서 모델이자 보석 디자이너인 엘레오노르 여대공은 과거 2011년 포뮬러 1에 참가한 적 있는 제롬 담브로시오와 2020년에 결혼한 상태인데 유럽의 탑엔드 레이싱이 얼마나 귀족 스포츠에 가까운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2018년부터 페르디난트는 유튜브를 시작했다. 2021년에는 WEC에서 LMP2 부문 우승을 차지하였고, 현재는 내구레이스를 전문으로 활동, 유로피언 르망 시리즈에서는 프레마 레이싱으로, WEC에서는 알핀 엘프 팀 소속으로 참가한다.

 

2020년 12월에 주 프랑스 헝가리 대사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차남 게오르크가 임명되었다.

 

2021년 프라하 프라슈니 다리에 30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프라하 탈환을 기념해 만들어졌던 기념 동상의 복제품이 세워졌다. 원본은 30년 전쟁 당시 만들어졌지만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며 철거되었다. 프라하시는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을 프라하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에 세웠는데, 맞은편에 얀 후스의 기념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했던 나라들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대한 평가는 천차만별이다.

 

오스트리아: 노년층 일부에서나마 강대한 제국의 향수를 그리워하지만, 청년층을 중심으로 예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상관없는 일에까지 휘말렸었는데 이제는 그럴 일이 없어져서 현재의 공화정이 더 낫다는 의견이 다수다.

 

체코: 20세기까지는 민족주의 사학계를 중심으로 체코 민족문화의 발전을 억제하고 동등한 주권에 대한 목소리를 무시한 압제자로 평가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기를 흑역사 취급하는 경향이 강했다. 동유럽 혁명과 유럽연합 가입 이후 탈민족주의와 범유럽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관점이 강해지면서 학계에서는 예전만큼 부정적으로 취급하지는 않지만, 체코 민족주의의 발흥과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무시와 천대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슬로바키아: 독일계 오스트리아인 귀족들의 착취와 헝가리인의 압제를 방조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헝가리: 대타협 이전의 합스부르크 지배기는 암흑기 취급하며 보치커이 이슈트반, 퇴쾨이 임레, 라코치 페렌츠 2세, 코슈트 러요시 등 민족운동가들을 더 띄워주는 경향이 강하지만 대타협으로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라는 준주권국가가 된 이후로는 나쁘지 않게 보는 편이다.

 

폴란드: 기본적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멸망에 일조했다며 좋게 보지 않지만 폴란드 민족문화를 파괴하려 했던 독일이나 러시아보다는 낫다고 평가한다. 같은 가톨릭 신자로서, 그리고 1867년 대타협 이후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 광범위한 자치가 이루어졌기에 독일, 러시아보다 우호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 공산주의 통치 시대에 크라쿠프 시민들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사진을 몰래 걸어두기도 했다.

 

크로아티아: 오스만 제국의 외침과 헝가리의 압제로부터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배를 받은 기간은 짧지만 보슈냐크인들은 보스니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에 학살을 당한 여파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탈리아: 통일을 방해하고 사사건건 간섭한 압제자 취급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이 직할 지배했던 롬바르디아나 베네토,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간접 지배한 토스카나와 모데나 등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역사 일부로 간주하며 독일어권인 쥐트티롤에서는 긍정적인 시각이 강하다.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문제에서 헝가리인의 압제로부터 루마니아인을 보호하고 교육의 보급과 인권 상향을 위해 노력한 점을 들어 나쁘지 않게 평가하지만, 몰다비아 공국으로부터 부코비나를 빼앗고 이 지역에 우크라이나인이 이주한 것을 방조하여 궁극적으로 소련에게 북부 부코비나를 빼앗겼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슬로베니아: 가장 오랜 지배를 받은 것 치고는 그냥 자신들의 역사 일부로 간주할 뿐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데 보통은 슬로베니아어의 아버지로 알려진 프리모시 트루바르가 활동했던 종교 개혁 시기의 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나 빈-류블랴나-트리에스테로 이어지는 산업 도로를 발전시킨 카를 6세, 마리아 테레지아, 제국의 황혼기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우크라이나: 갈리치아 지역을 중심으로 민족주의가 각성했다 보니 정치, 사회적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 경제적으로 원체 낙후된 지역이었다보니 경제, 문화적으로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세르비아: 세르비아인 주도의 범슬라브주의를 억압하고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세르비아 민족문화를 파괴하려 한 악의 축으로 평가한다.

 

독일: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영구분리된 현재는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 가문 중 하나 정도로 인식한다. 다만 외지오스트리아 지역이었던 프라이부르크 등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일부에서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하는 편이다.

 

사실 1919년에 완전히 군주제가 폐지되어 공화국이 되어 100년이 넘었는데도 본국에서 노년층에서나마 제국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걸 생각하면 군주제가 폐지된 공화국 치고는 명망과 신뢰가 분명 많이 있었다는 건 부정할수 없다. 심지어 식민지 수준이었던 폴란드는 오히려 긍정적인 편에 속한 것까지 감안하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 자체가 오늘날 기준으로도 대단히 비합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상술한 체코와 세르비아처럼 적대적인 경우도 있지만 체코는 중세부터 오랜 악연이 쌓인 역사가 따로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며 세르비아는 원래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가 근현대에 들어서 독립한 후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받은데다 원래 보스니아를 포함한 다른 발칸반도 영토를 세르비아가 차지하는걸 방해했다는 이유로 적대적이게 되었다. 오히려 세르비아를 제외한 다른 발칸반도 국가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최소 중립이거나 세르비아보다는 훨씬 우호적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불가리아 왕국을 제외하고 모두 세르비아를 포함한 협상국 편에 서서 오스트리아와 싸운 것도 동맹국에 하필 옛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있던데다 그런 뒤에도 전쟁의 승리 내지 대세는 이미 미국 참전 이전부터 협상국에게 꽤 기울어있던 상황이란 걸 감안해야 한다.

 

 

 

 

독일 역사에서 라이벌인 이미지와 다르게 호엔촐레른 가문과는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의 첫번째 부인 호엔베르크의 게르트루트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슈바벤계 방계 출신이었고,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가 루돌프 1세의 독일왕 선출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부터 따지면 싸운 기간보다는 오히려 협력한 기간이 더 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호엔촐레른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영향력이 거의 닿지 못하던 북독일에서 황제를 대표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충견(...)을 자처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 오스트리아 대공국-보헤미아 왕국과 함께 마지막까지 남은 나라가 프로이센 왕국이었다. 또한 민족주의가 발흥하여 1848년 혁명이 일어났을 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로이센 국왕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 황제의 선봉장 역할이면 충분하다.'는 입장이었으며, 동생인 빌헬름 1세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형과 똑같은 입장을 견지했다.

 

국내에서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와 함께 '한때 유럽에서 잘 나갔던 옛날 왕조' 정도로 기억되는데, 주로 빈을 비롯한 오스트리아의 지배자로만 아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인 프라하, 부다페스트, 브라티슬라바, 류블랴나, 자그레브, 클루지나포카, 크라쿠프, 르비우 및 체르니우치, 비교적 최근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밀라노,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 드 부르고뉴의 결혼으로 합스부르크령이 되었다가 스페인 합스부르크를 거쳐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지배당했던 벨기에의 브뤼셀, 오스트리아의 오랜 월경지였다가 바덴 대공국에게 넘겨준 독일 프라이부르크를 비롯하여 현재의 오스트리아 국경을 훨씬 넘어선 지역을 여행하다가 이들의 역사, 문화적 영향, 흔적들을 보면서 놀라기도 한다.

 

2022년 11월부터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합스부르크 왕조 특별 전시회가 열렸다. 빈 미술사 박물관이 소장중인 합스부르크 가문 소유 왕실 유물, 수집 예술품 등이 다수 포함되어 주목을 받았다. 본래 2023년 2월 말까지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인기가 많아 3월 15일까지 2주 연장되었다. 결국 32만명이 넘는 누적 관람객수를 기록하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뮤지컬 팬들에게는 19세기를 풍미한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통칭 '씨시') 황후를 주인공으로 한 '엘리자벳'이 유명하다.

 

만화 봉신연의의 극중극인 '국립 앙뉘 학원'의 주인공도 합스부르크 출신으로 설정되어 있다.

 

미국 드라마 30 Rock에도 한 에피소드에 이 가문의 후손이 등장한다. 잭 도너기의 소개로 리즈 레몬과 제나 마로니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손이라는 공작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게 되었는데, 제나 마로니는 동화속 왕자님을 상상하며 그를 유혹하여 팔자를 고칠 생각이 부풀었지만 막상 만나보니 휠체어에 앉아 있고 그 외에도 몸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고 정신지체까지 있는 심각한 수준의 장애인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전병을 풍자한 것으로 추정되나 정작 합스부르크를 상징하는 주걱턱은 재현하지 않았다. 제나 마로니는 그래도 굴하지 않고 공작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하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생일 축하 노래와 함께 상태가 별로 안 좋았던 공작은 사망해버리고,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집사가 공작이 사망하여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끝났다고 선언하며 제나의 꿈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실제로는 물론 극중 설정과 정반대로, 실존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구 왕실들 중에서도 상당히 큰 가문에 속한다.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친손자만 해도 13명이나 되고, 분가인 토스카나 대공가의 일원이나 다른 먼 친척들도 여럿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백작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의 신성 그리핀 제국의 전신인 신성 팰컨 제국이 건국된 후부터 황가와 6개의 대공가가 중첩적인 혼인관계를 맺어 사촌 이상의 근친혼 관계가 되었다는 설정이 있는데 모티브가 된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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