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현대철학, 라캉, 데리다, 들뢰즈, 가타리, 지적 사기
프랑스 현대철학은 사기?
라캉, 데리다, 들뢰즈, 가타리. 지난 10년의 한국 문화계는 가히 프랑스 철학의 시대였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마르크스와 레닌과 마오쩌둥의 그늘을 벗어난 지식인들은 수사와 상상력으로 충만한 프랑스 현대 철학의 언어에 매료되었다. 그들의 사유는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었고, 언어는 현란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프랑스 철학을 거침없이 들이켰다. 새로운 이론에 목말랐기 때문이다.한편에서는 이런 궁금증을 끝내 뿌리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말의 성찬이다』 『이해하기 어렵다』 『지식의 과시가 지나치다』 1997년 미국 뉴욕대 물리학과 앨런 소칼 교수와 벨기에 루벵대 물리학과 장 브리크몽 교수는 「지적 사기」(원제 「Fashionable Nonsense」)라는 책을 내 지구촌 학계를 잠시 소란 떨게 만들었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이 「애용」한 과학 이론이 얼마나 엄밀하지 못한지, 더구나 일부 과학이론을 어떻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그들은 조목조목 지적했다. 소칼과 브리크몽은 프랑스 학자들이 그들의 철학과 기호학, 또는 여성학을 설명하기 위해 가져다 붙인 과학 이론들이 도대체 그런 인문학의 논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물었다. 표적은 자크 라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레이, 브루노 라투르, 장 보드리야르,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폴 비릴리오다.
지은이들이 책에서 인용하는 뤼스 이리가레이 주장의 일부는 이렇다. 「E=MC2은 성(性)에 물든 방정식일까? 그런지도 모른다. 이런 가설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이 방정식이 성에 물들어 있는 까닭은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다른 속도들에 견주어 빛의 속도를 특권화하기 때문이라고. 내가 이 방정식이 어쩌면 성에 물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비친 까닭은 이것이 그저 핵무기에 사용된다는 이유에서라기보다는 가장 빠른 것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이론이기 때문인 듯하다」.
소칼과 브리크몽은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다른 속도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에너지(E)와 질량(M) 사이의 E=MC2이라는 관계는 실험을 통해 아주 정밀하게 검증되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주제를 고르고 이론을 제시하는 과정에는 과학자의 선택이 들어갈 수 있으며 이러한 선택에 문화적, 이념적, 성적 요인들이 미치는 영향을 따지는 것은 과학사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라고 지은이들은 말했다. 하지만 이런 연구에 내실있는 기여를 하기 위해서는 분석하려는 과학분야를 심층에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며 『모르긴 몰라도 마리 퀴리와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생각이 다를 게다』고 비꼬았다.
소칼과 브리크몽이 책에서 의도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프랑스 현대 철학에서 이루어지는 과학의 남용 사례들과 포스트모던 과학에서 나타나는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라캉은 수학 특히 위상수학과 정신분석학을 연결시키려 했지만 하찮은 지식을 과시하고 의미 없는 문자를 조작하는 것에 불과했다며 라캉의 시도가 「세속적 신비주의」일 뿐이라고 혹평한다.
피상성에서 크리스테바의 초기 저작들은 라캉을 앞선다. 「시적 언어는 수학의 집합 이론을 기초로 하여 이론화할 수 있는 형식 체계」라고 단언하는 크리스테바는 이렇다 할 설명 없이 분절집합, 합집합, 확률분석, 힐버트의 유한론 등의 용어들을 그대로 인용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기호학으로 해석하는 라투르는 상대성 이론을 오해하고 있고 「보드리야르의 철학을 덮고 있는 번지르르한 말의 베니어판을 걷어냈을 때 거기에 과연 무엇이 남아있을지 의심스럽다」라고 말할 정도로 보드리야르의 저서에서는 과학용어가 본연의 의미를 철저히 무시당한 채 엉뚱한 맥락에서 남용된다고 주장한다.
모든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담론에 불과하다면 물리학은 문화 연구의 분과학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포스토모던 철학과 과학의 상대주의를 극단으로 밀고 나갔을 경우 그렇다. 하지만 지은이들은 「과학 지식은 문화적 조건에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양운덕(고려대 강사)씨는 『소칼과 브리크몽의 지적도 일리는 있지만 과학 이론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은 과학 자체의 논리와는 또다른 차원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며 책을 조심스럽게 볼 것을 권했다. 화려한 프랑스 현대 철학은 과연 사기일까?
지적 사기
앨런 소칼·장 브리크몽 지음
*[무엇이 오류인가] 소칼과 브리크몽의 지적
■라캉의 수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신분석학과 수학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자의적으로 연결되며 라캉은 그 연결을 정당화하는 개념 장치나 경험적 자료를 털끝만큼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의 학문을 「신비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이 담론이 이성을 상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미학적 차원에만 머무른다고 보기도 어려운, 심리 효과를 만들어내는 데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또 「세속」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담론이 문화적 대상(칸트, 헤겔, 마르크스, 수학, 현대문학…)이 전통 종교와는 하등의 관련성이 없고 현대 독자의 입맛에 맞는 내용이기 때문이다(60∼61쪽).
■크리스테바는 자기가 거론하는 수학이 어떤 내용인지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는 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쓰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를 항상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일 때가 분명히 있다. 그의 글이 제기하는 진짜 심각한 문제는 수학적 개념들과 언어학, 문학비평, 정치철학, 정신분석학 같은 자기가 연구하려는 분야의 상관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은 이유는 관련성이 전혀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75쪽).
■이리가레이의 흐리멍덩한 과학관은 모호한 상대주의의 색채를 띤 더 광범위한 철학적 성찰로 연결되고 이것을 지지하는 데 동원된다. 과학은 「남성주의적」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한 그는 「주체로부터 독립된 진리에 대한 믿음」을 거부한다. …여자한테 보편적 과학을 기피하라고 말하는 것, 여자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다. 합리성과 객관성을 남성과 연결짓고 감성과 주관성을 여성과 연결짓는 것은 가장 심한 성적 편견을 드러내는 것이다(164∼165쪽).
■보드리야르의 저서에서 과학 용어가 본연의 의미를 철저히 무시당한 채 너무나 엉뚱한 맥락에서 남용되고 있음을 본다. 그것을 은유로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사회학이나 역사학에 대한 진부한 관찰에 심오함을 덧씌우려는 것 외에 그런 용어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202쪽).
■들뢰즈와 가타리의 텍스트들을 자세히 뜯어보면 문맥에서 벗어난 과학용어와 논리적 외형을 갖추지 못한 과학 용어가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그들이 과학 용어들을 자기 나름의 뜻으로 쓸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글은 전문 과학 담론의 영역 바깥에서는 쓰이지 않는 고도의 전문어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새로운 정의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괴델의 정리, 초한 카디널의 이론, 리만 기하학, 양자 역학 등에 대한 그들의 발언을 전문 지식을 갖춘 독자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길 때가 너무 많고, 가끔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진부하고 흐리멍덩하다는 느낌을 받는다(203∼204쪽).
프랑스 철학은 왜 포퓰리즘이라는 오해를 받는가
이성에서 벗어나 삶의 구체적인 모습 파고들어
현대 프랑스철학의 상륙을 회상하다
프랑스에서 배가 들어오면 항구에 샤넬이나 루이뷔통 같은 명품만 내려놓는 것은 아니다. 철학 책들이 기왓장처럼 쏟아진다. 그 책들은 익숙지 않던 전혀 새로운 형태의 무엇이라서, 사람들은 책 냄새를 향수 냄새로 착각했고, 철학의 우아한 구조를 모델들의 걸음걸이로 잘못 봤다. 이 책들이 목소리를 냈을 때 그것은 똑 부러지는 철학의 목소리가 아니라 흐리멍덩한 노랫소리로 들렸고 그래서 얼치기 시인의 작품으로 낙인 찍혔다. 한 마디로 날티 나는 애들의 겨드랑이에 끼워진 책? 강아지도 개집에 한권 놓아두고 송아지도 우유 광고에 한권 들고 나오는 포퓰리즘? 이것이 1980년대와 90년대 우리나라에서 현대 프랑스철학이 얻었던 한 이미지다. 이 정도면 거의 철학의 수치 아닌가?
나이든 실존주의의 영토를 접수하고 상륙한 이 철학은 푸코와 데리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해서 들뢰즈의 책이 인문 예술의 전 영역에 반주(伴奏)를 넣던 2000년대 초중반부터 절정을 구가했다. 명칭의 관점에서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해체주의 등등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름들이 이 철학의 표면에 자석처럼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대중들을 헛갈리게 했다. 저 명칭들이 무슨 의미이며 프랑스철학 전반을 대표하기에 적합한지 따져나가다 보면 다음 주 신문에까지 이 글을 써야 한다. 다만 저것들은 ‘인간의 죽음’을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만 말해두자. 옆집 사는 김씨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뜻의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에 놓여있는 유토피아적인 인류 사회의 골인지점을 향해 능동적으로 세상을 변모시켜가는 인간의 이성이 신뢰를 잃게 되었다는 뜻을 이 말은 담고 있다. 그래서 가뜩이나 안 좋은 프랑스철학의 인상에 미운털이 또 박힌다. 인간의 이성과 그것이 떠밀고 가는 인류의 발전을 의심해? 야 이 야만인들아!
그래서 이제 프랑스철학의 확실한 적들이 포진하게 된다. 도사님, 말 좀 쉽게 하셔!(주로 논리적 분석을 중시하는 쪽에서 들려온 욕), 이성을 부정하면 뭘 갖고 사유하느냐? 역사는 이성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이야.(독일 근현대철학 쪽) 도대체 너희들은 윤리가 뭔지나 알아? 으웩 퇴폐적이야!(여러 학문들의 배후에 면면히 흐르는 도덕적 이미지의 관점) 이런 식의 물음과 그로 인한 크고 작은 논쟁을 프랑스철학은 1990년대를 전후로 파리 떼처럼 끌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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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인문학계는 20여 년 전보다 프랑스철학에 대해서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수많은 인문 예술 분야에 프랑스철학은 예전보다 더 많은 이론적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다. 학생 시절, 철학자라면 푸코와 들뢰즈밖에 없는 줄 알았다던 어느 네티즌의 말에서 읽듯 프랑스철학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만큼 책임 있게 그 허와 실에 대해서도 대답해야 하리라.
텍스트의 난해함, 이성의 부정, 도덕의 부재?
“프랑스 철학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만큼 책임 있게 그 허와 실에 대해서도 대답해야 하리라.” 서동욱 교수는 이렇게 자문한다. | 사진작가 박재찬
“프랑스 철학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만큼 책임 있게 그 허와 실에 대해서도 대답해야 하리라.” 서동욱 교수는 이렇게 자문한다. | 사진작가 박재찬
종종 프랑스철학 텍스트의 독해 자체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우들을 본다. 한때 이 문제의 어이없는 주범은 질이 안 좋은 번역들이었는데, 이 문제는 좋은 번역을 새롭게 내놓고 있는 많은 젊은 학자들에 의해서 점점 개선되는 추세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개념이나 사고방식의 구조 자체가 도무지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다. 이럴 때 이해에 실패한 지성의 자리로 상상력이 기어 나와 한 편의 소설을 쓰면서 철학 책 독해를 완전히 망쳐놓는다. 심각한 이해불능이 생겼던 많은 경우는 텍스트 배후에 놓였던 사상가들이 충분하게 알려져 있지 않았던데 기인했다. 가령 들뢰즈의 배후에는 스피노자와 베르그송, 그 밖에 비교적 덜 알려진 라베송 같은 고전철학자들이 있다. 이런 고전 철학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해석 위에 다시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을 세우는 것이 프랑스철학의 두드러진 스타일 가운데 하나다. 독창적인 현대 사상 배후에 고전 철학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이 또 한 겹 놓여있으니 중층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이 스피노자,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의 고전 철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배경으로 프랑스철학에 접근하면서, 많은 해괴한 듯 보였던 사유는 해괴하지 않은 것으로, 개념들은 이해할 만한 것으로 자리를 찾게 되었다.
다음으로, 프랑스철학을 인류의 행진을 위한 동선(動線)으로 선택하는 것을 꺼리게 하는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이성의 힘을 저버리는 데서 온다. 이성을 저버리고서 어떻게 생각을 한단 말인가? 사람들이 가진 이런 의혹은 ‘이성’과 ‘생각’이 당연히 서로 동일하다고 오해하는 데서 비롯한다. 칸트 이후 서구 근대 철학에서 이성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한 마디로 그것은 궁극 목적에 비추어 인간사 전체를 사유하는 능력이다. 인간사는 균열로 가득 차 있다. 가령 몸이 ‘하고 싶은 것’과 생각이 ‘해야 한다고 의무로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균열. 이성은 이런 모순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통일해서 아무런 갈등이 없는 최종 지점(궁극 목적)에까지 전진해 나간다. 이런 이성의 삶을 그려나가는 것이 근대 철학의 과제였다.
프랑스철학은 바로 이런 이성을 부정하며, 이성으로부터 해방된 사유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 한다. 이성이 사라진 곳에서 사유는 기계론적 인과성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이성의 법칙 대신 ‘우연성’이 어떻게 삶 안에 침투하는지 밝혀지기도 한다. 그렇게 하여 이성의 추상적인 행보 대신 삶의 구체적인 국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궁극 목적을 향한 꿈을 상실한 이 삶은 저주 받은 삶 아니냐고? 인간의 역사가 완성되는 목적지에 이성이 단계적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 것이라는 약속 대신에, 프랑스철학은 메시아적 사건의 급작성(레비나스, 데리다)에 몰두하면서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준다. 지리멸렬한 역사를 갑자기 단절시키고 우리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그런 메시아적 사건, 계산할 수도 측정할 수도 없는 삶의 선물 말이다.
또한 사람들은 프랑스철학은 윤리의 문제에 대해 등 돌린 철학인가 의혹의 눈길을 던졌다. 여기도 칸트의 정언명법 같은 이성이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는 도덕 법칙이 있는가? 이성을 불신하게 되었다면 이성의 법칙에 의존하지 않고서 윤리를 수립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푸코는 ‘실존 미학’이라는 이름 아래 이 문제에 답했다. 보편적인 법칙에 삶을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획일화될 수 없는 독자적인 삶을 창안해 내는 방식이 실존 미학이다. 또 레비나스는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란 화두 아래 윤리에 대해 생각했다. 나와 윤리적 관계를 맺는 타인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단독자다. 바로 이 단독성이 타인을 윤리적으로 존중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타자의 단독성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보편화하고 추상화하는 이성이 아니라, 오감의 바탕에 있는 ‘감성(sensibility)’을 통해 주어진다. 이성은 개별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으로 추상화하는데 능하지만, 감성은 사물의 개별성을 그대로 보존한다. 이런 감성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독성을 지닌 타인이 ‘마음 아픔’과도 같은 상처를 냈을 때 비로소 윤리적 행위는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국경 너머 확장되는 현재의 프랑스철학
결국 프랑스철학은 인간의 다른 모든 진지한 노력과 마찬가지로, 어영부영 대중의 관심에 영합하는 학문이었던 적이 없다. 그것은 ‘이성적’ 인간 ‘이후’의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사유 형태를 발견하려는 실험이고, 윤리적 물음에 진지하게 응답하려는 시도다. 이런 시도가 대중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한다면 무슨 까닭일까?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사람들은 꾸준히 프랑스철학자들의 책을 펴든다. 삶의 여러 영역을 파고드는 프랑스철학의 이런 파급력은, 가장 구체적인 삶의 양상에 밀착하려는 이 철학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가령 ‘애무’가 무엇인지, ‘얼굴’이 무엇인지 묻는 구체성. 이 구체성은 프랑스철학자들이 즐겨 자신의 실험실처럼 이용하는 문학 작품들이 제공하기도 한다. 이들은 문학이 열어 보이는 삶의 생경한 장면들을 광산의 보물처럼 채집하는 습성을 독특한 개성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바디우는 인류 사상사에 흔치 않았던 특별히 주목할 만한 세 순간을 이렇게 꼽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대표하는 고대 그리스(기원 전 5~3세기),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18~19세기), 마지막으로 20세기 프랑스철학. 지상의 영원한 암벽에 황금문자로 새겨진 것 같은 저 위대한 두 순간과 동등한 위치에 프랑스철학을 자리잡게 한 힘은 무엇인가? 학교에서 가르쳐 준 것 같은 정해진 사유의 틀을 벗어나 늘 사유 자체를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는 노력이리라. 이 노력을 발생시킨 토양은 흔히 68혁명이라 부르는 것으로, 모든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는 이 정치적 토양을 프랑스철학은 잊은 적이 없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정치적 위기가 도래할 때마다 프랑스철학을 소환해 말상대를 삼은 것 아닐까?
프랑스철학은 오늘날 계속해서 자신의 국경을 지워나간다. 프랑스철학이 국경 바깥에서 다시 큰 나무로 자라기 때문이다. 가령 슬로베니아의 지젝은 라캉의 씨앗들이 마르크스주의의 화단에서 잘 피어나도록 매일 아침 물을 준 결과 중요한 정치철학적 논제를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푸코의 ‘생명정치’ 속에서 영감의 한 줄기를 끌어내어 유명한 ‘호모사케르’의 주제를 발전시켰다.
프랑스철학의 국경은 죽은 외국 사상가들을 깨워내는 방식으로도 계속 이동하며 넓어진다. 납골당의 상자들이 모두 열려 철학자의 유령들이 공중 곡예를 하는 가운데, 벤야민이 다시 읽히고 스피노자가 재탄생한다.(이 두 철학자의 르네상스는 데리다, 들뢰즈, 발리바르 등 수많은 프랑스철학자들의 이름을 거친다.) 고전이 프랑스철학자들의 손에서 새로운 독창성을 얻게 되며, ‘프랑스철학이라는 분류법’은 국경을 넘어 터져나가는 사상들을 묶어놓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실 모든 철학자는 동지들을 찾아 움직이지 정부가 그려놓은 행정 구역을 따라 움직이지 않으니,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선 프랑스가 세속의 국경을 저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제 인류의 철학이 되고 있는 것일까? 민화나 설화처럼 그것을 필요로 하는 대중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가며.
프랑스 현대철학의 흐름 4가지
철학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아닌가?
이런 근본적인 물음보다는 철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에 너무 치중하지는 않았나?라는 생각을 해 본다. 프랑스철학, 독일철학, 영미철학 이런 식으로 나누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미는 결국 무게감을 갖는 것을 말한다. 어디에 무게를 두는가에 따라서 의미의 구조가 달라진다. 나는 누구인가? 존재하는 것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세상은 어떻게 인식되는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을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런 이야기를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로 옮겨오는 시간이 필요하다. 철학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철학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1. 바디우 철학이 나오기까지
바디우는 '철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에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보편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보편성은 사실 특수한 지점에서 나온다. 어떤 특수성을 가진 곳에서 보편성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은 항상 보편적인 것을 말하지만 '특수한 장소와 시간'을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철학은 '고대그리스의 장소와 역사'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제도와 문화, 생활 양식 가운데서 보편성이 나온다. 바디우는 이러한 보편성이 나오는 특수성의 시대를 3가지로 본다.
1. 고대 그리스철학
2. 독일 관념론철학
3. 현대 프랑스철학
바디우는 현대 철학사에서 가장 창조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관념론 철학은 독일적인 특수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독일의 역사적 흐름과 현대 속에서 경험한 전쟁과 나치즘과 같은 경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철학의 소재들. 프랑스는 68혁명을 지나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보편적인 인간주체의 사상들이 나온다.
2. 프랑스 현대철학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다양한 논쟁이 존재할 수 있으나 20세기 초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베르그송이 '생철학'이라는 개념은 옥스포드에서 강연하면서 나오게 된 1911년 '사유와 운동'이라는 논문에 수록이 된다. 1912년에는 베르그송과 다른 방향으로 레옹 브륀슈비크Reon Brunschvicg가 등장한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방향설정이 다르다. 베르그송은 존재와 생성의 일치를 강조하는 일원론의 철학을 제시하면서 삶의 도약과 삶 자제체 집중하게 된다. 일명 '생기론적 내제성'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들뢰즈에 와서 절정을 이룬다.
철학을 어디에 근거 지을 것인가?에 대해서 '수학'과 '철학적 형식주의'에
근거를 두는 것이 개념의 철학이다.
브뤼수빅의 주체철학은 '개념의 철학'이다. 철학을 어디에 근거 지을 것인가?에 대해서 '수학'과 '철학적 형식주의'에 근거를 두는 것이 개념의 철학이다. 레비스트로스-알튀세르-라깡-바디우로 이어지는 흐름이 바로 개념의 철학이다. 삶의 철학과 개념의 철학은 명백하게 대립적이고 분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20세기의 시작이다. 현대 프랑스철학은 이 두 개념들의 논쟁으로 귀결된다. 삶이냐, 개념이냐는 공통적으로 '주체'의 문제와 연결된다. 주체란 무엇인가? 살아있는 몸이면서 삶인 반면에 개념의 창조자이면서 '사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주체는 양쪽 모두에서 공통의 주제가 된다. '육체와 관념'의 문제는 프랑스철학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주제가 되었지만, 이 문제는 사실 '데카르트'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철학은 헤겔의 철학을 비판하는 것이 가장 크지만, 더 큰 범주의 도전은 바로 데카르트이다. 모든 프랑스철학은 데카르트의 범주 안에 있다고 할 만하다. 데카르트의 유산인 심신이원론을 가지고 논쟁을 하는 프랑스현대철학을 볼 수 있다. 샤르트는 자유의 개념을 가지고 데카르트를 연구했고, 들뢰즈는 철저하게 데카르트를 반대했고, 라깡은 데카르트로의 귀환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철학자들의 숫자만큼 데카르트가 존재한다고 할 만하다. 결국 '주체'문제였고, 이러한 주체논쟁은 20세기 전반을 끌고 간다.
3. 현대 프랑스 철학의 공통점
현대 프랑스철학의 동선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을까? 현대 프랑스철학자들의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연구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독일철학을 재조명하고, 과학적인 전통에서 철학을 들여다 보고, 정치와 삶, 예술의 범주에서 철학을 다루어 보는 작업들이다. 이제 왜 들뢰즈가 그토록 시네마에 집중했으며 다른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이 소설이나 시를 많이 썼는지 알게 될 것이다.
1) 독일철학 재조명
모든 프랑스 현대 철학은 독일철학을 가지고 논쟁하고 연결한다. 코제브의 헤겔강의는 '정신현상학'을 가지고 강의를 하는데, 현대 프랑스철학에 영향을 가장 많이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이나 레비스로스도 꾸준히 이 주제를 가지고 고민했다. 훗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그 다음으로 조명하면서 프랑스철학은 발전한다. 샤르트르에서 출발해서 메를로 퐁티, 레비나스, 장뤽낭시, 롤랑바르트와 같은 사람들은 하이데거의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스트라스부르와 하이델베르크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철학을 직접 들을 기회도 많았다. 데리다의 경우는 훗설에서 출발해서 해결까지 가는 경향을 보여준다.
해체론, 실존주의, 해석학과 같은 프랑스철학의 연구는 '개념과 실존'사이를 연결하거나 대체하는 작업들을 했다. 독일철학을 프랑스철학의 장 위에서 새롭게 다루고 있다. 프랑스철학을 통해서 본 독일철학은 기존의 독일철학과다는 다른 방식으로 반복된다. 독일 철학의 문제의식이 프랑스적인 문제의식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2) 과학적 전통의 계승
과학에 대한 철학은 과학철학, 이신론적인 철학들을 지속해 왔다. 과학적인 발명들이 인식과 연구방법까지 영향을 미쳤다. 원래는 과학의 존재론은 반성의 형식이었지만, 현대철학에서는 과학을 통해서 새로운 '생성, 전환'을 가능케 된다고 믿게 되었다. 과학은 현상을 발견해서 재해석하는게 아니라 '과학 자체가 창조적인 실천'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과학이라는 것은 예술과 비슷한 것이 된다. 예술적 활동이 창조의 원천이었는데 현대프랑스철학에 오면서 과학이 바로 예술과 같이 창조성의 영역으로 갈 수 있게 해주었다. 들뢰즈에 가서 정점을 이루게 된다.
철학은 예술, 정치, 과학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 사회의 본질, 자연의 본질을 찾아내려고 한다. 자연에 본질을 인식의 일반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노력이 바로 과학적 접근을 통한 철학의 목표이다. 여기에 프랑스철학은 독일철학의 과학적 접근을 극복하고 회유하고 다시 연결하려고 하는 경향들이 나타난다.
3) 정치 안에서 철학하기
정치에 있어서도 철학은 정치 안으로 들어가서 '주체'와 '행위'의 문제를 다룬다. 때문에 프랑스 현대 철학의 거장인 샤르트르와 푸코는 현대 프랑스 정치사에서 '주체'의 물음을 계속해서 던진 것이다. 가장 본질적으로 정치의 목적은 무엇인가?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나 푸코의 '감시와 처벌' 같은 저서들이 그 예이다. 조금 세련되게 정치철학이나 정치이론으로 다루지 않고 정치 안에서 실제적인 주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정치를 하는 주체는 어떠해야 하는가? 정치적 주체는 어떻게 탄생하는가?(알튀세르) 와 같은 질문들을 하는 것이다. 행위에 있어서는 집단적인 실천으로서의 행위주체를 다룬다. 정치적 활동을 통한 행위와 주체, 개념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치참여를 하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이 많다.
4) 삶과 예술의 새로운 형식에 대한 탐구
현대 프랑스철학의 특징은 철학이 철학 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다른 방식, 형식으로 탐구하고 구현해 냈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에 대한 탐구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술과 삶의 방식, 문화의 변화를 분석하고 그 안에 철학적인 모티브를 찾아냄으로써 일상과 더불어서 철학을 전개해 나갔다. 들뢰즈의 시네마라던지 다양한 회화작품에 대한 분석이라던지, 사진에 대한 감각과 분석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특히 '아방가르드'와 같은 경우는 아예 새로운 철학의 형식이 어떤 이론이 아니라 예술로 표현되는 것을 보여준다. 뒤쌍의 작품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이 새로워지면 그것을 탐색하는 철학도 새로워져야 하는데, 그 형식 자체로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새롭게 출현한 실제들은 새로운 개념을 담고 있으며 이전의 철학적 언어와 표현으로는 그 언어를, 실제를 다룰 수 없다. 철학과 문학, 철학과 예술의 융합이 일어나면서 이전과 다른 형식의 글쓰기와, 다른 형식의 미술적 표현이 철학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4. 현대프랑스철학에서 '주체' 문제
주체는 생산행위 혹은 삶 속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하면 주체는 '과정 속에서' 발견된다. 기존의 철학들은 '주체'는 이미 존재하고 그에 따라서 주체가 드러난다고 본다. 하지만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주체'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주체의 죽음이라는 표현을 말과 사물의 마지막에서 사용하는 푸코는 바닷가의 모래위에 쓰여진 문장들이 바닷물에 지워듯이 주체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들어지고 있는 주체, 과정 속에 있던 주체를 다른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오히려 현대 프랑스철학에서는 '주체' 자체를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 내용에는 주체형성의 과정이 음각화처럼 잘 나타나있다.
라캉의 경우 프로이트의 주체범주를 다시 가져와서 '주이상스'에 부딪혀서 무너지는 자아가 제대로 자신의 욕망을 중심으로 새로운 자아를 형성할 수 있다고 하는 '정신분석의 임상'을 주장하는 것이 그 예이다. 프로이트는 이미 정해진 자아의 분할들을 가지고 비율을 산정하는데 몰두했다면, 라캉은 아예 그것들을 무너뜨린 다음에서야 주체가 스스로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프랑스 현대 철학은 독일철학을 비판하고 수용하면서 과학, 정치, 예술의 형식으로 철학을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독 프랑스철학자들이 소설이나 희곡을 쓰는 이유를 이제 알 수 있게 되었다. 왜 그렇게 들뢰즈가 시네마에 매달렸는지 말이다. 문학과 철학은 구분 불가능하고, 영화와 철학은 원래부터 서로 의존적이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철학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소설 속에서 철학을 발견하고, 그 철학을 어떤 형식으로 전개해 갔느냐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들뢰즈는 죽을 때까지 '과학적인 방법'으로 최신 '초끈이론'까지 검토했다고 하니 말 다했다. 최근에 중요한 개념인 양자역학을 분석하는 '양자역학적 주체'를 '양가론적 입장'에서 분석하는 들을 보았다. 아마도 이런 흐름일 것이다.
철학은 어쩌면 관점의 변형이다.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철학적 결론은 달라진다. 오늘은 워밍업으로 프랑스현대철학의 큰 흐름을 알아보았다. 이제 알랭바디우가 이러한 지적 전통 아래에서 어떻게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켰는지 알아볼 것이다. 오늘 대부분의 강의는 아트앤스터디에서 '서용순 교수님'의 강의를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