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무르 제국, 1370~1507, 몽골 계승, 무굴 제국, 티무르 르네상스, 울루그 베그
티무르 제국
· 1370년 티무르, 차가타이 칸국의 실권 장악
· 1371년 ~ 1405년 티무르의 대원정
· 1405년 티무르, 명나라 원정 도중 사망
· 1405년 ~ 1420년 1차 내전기
· 1420년 ~ 1447년 샤 루흐의 치세
· 1447년 울루그 베그 집권
· 1447년 ~ 1459년 2차 내전기
· 1459년 ~ 1469년 아부 사이드의 치세
· 1469년 ~ 1506년 후세인 바이카라의 치세
· 1507년 우즈벡 칸 무함마드 샤이바니에게 수도 헤라트가 함락됨
지리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서북부
수도
사마르칸트 (1370년~1405년)
헤라트 (1405년~1507년)
면적
4,400,000km² (1405년)
언어
페르시아어 (궁정어, 고등 문학어, 공통어, 행정어)[4]
차가타이어 (문학어)
아랍어 (제례 언어, 신학어)
그 외 인도계 방언들
민족
차가타이 튀르크인
차가타이 몽골인
페르시아인
아랍인
우즈베크인
인도인
종교
수니파 이슬람
시아파 이슬람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말까지 중앙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지배한 몽골 제국을 계승한 국가이다. 지배층은 서부 차가타이 칸국 출신의 바를라스, 잘라이르, 술두스, 아를라트, 카라우나스 등과 같은 몽골계 부족민들이었으며, 당대에는 스스로를 차가타이 칸국이라고 불렀다. 정치 · 군사적 측면에서도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층과 기마 군단을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에 집단명도 변하지 않고 '차가다이인'이라 불렸다. 그럼에도 별개의 국가로 인식되는 이유는, 권력의 중심이 보르지긴씨족 내에서도 칭기즈 칸의 직계인 키야트에서 방계인 바를라스 부족으로 정권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건국자는 몽골 제국의 귀족 계층인 보르지긴씨족 바를라스부 출신의 티무르이다. 티무르는 당시 분열된 몽골 제국 국가들 간 끝임없이 벌어지는 내전 상황에서 몽골 제국의 서반부를 재통합하며 당대 차가타이 칸국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발돋움시켰다. 티무르 제국은 멸망 이후 인도의 무굴 제국으로 계승된다.
국호
Turannıŋ sultānı Timurbäg üç yuz miŋ çärig bilä Islām üçün Toqtamışqan bulğar qanıqa yurıdı
투란의 술탄 테뮈르 벡이 이슬람을 위해 3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불가르의 칸인 톡타므쉬 칸에 맞서 북쪽으로 올라왔다.
카자흐스탄에 있는 카르삭페이 비문 (차가타이어)
티무르 시대의 문헌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공식적인 국호는 이란과 투란(ایران و توران)이다. 이는 페르시아-이슬람 국가인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스텝 유목제국인 튀르크 및 몽골을 모두 아울렀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아랍어 지명인 마와라안나흐르(ما وراء النهر) 역시 자주 사용되었다.
시아파 역사가들은 티무르 제국을 구르카니(گورکانیان)라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몽골어로 '사위'를 뜻하는 구르겐에서 유래한 것으로 티무르 자신이 황금씨족의 혈통을 물려받지 못하여 칸을 칭할 수 없자 대신 칭한 것이다.
티무르 제국의 문화
이전 8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번영하던 이슬람 황금기가 막을 내린 이래로 이슬람 세계의 문화는 (상대적으로)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나 티무르가 가져온 몽골의 전통이 아랍·페르시아의 이슬람 문화와 혼합되면서, 14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에 티무르 제국 치하의 동부 이슬람 세계는 다시금 시작된 문화적 번영기를 맞이한다. 학자들은 이를 유럽의 르네상스와 비견된다고 하여 일명 티무르 르네상스(Timurid Renaissance)라고 한다. 티무르 르네상스는 몽골의 침략과 정복이 끝나가던 15세기 즈음에 절정에 달했다.
티무르 시대부터 시작된 문화적 번영은 그 뒤를 이은 샤 루흐와 황후 가우햐르 샤드, 뛰어난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역사학자였던 울루그 베그,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였던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 치세를 거치면서 계속 발전을 거듭했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의 고전 미술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대규모 건축사업 또한 진행되어 여러 영모, 마드라사, 모스크, 키타바네12가 건설되었다. 또한 대수학, 연산학, 구전 문학, 세밀화 예술, 금속공예, 건축, 천문학에 대한 연구와 발전도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16세기 초에는 화약무기의 개량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헤라트는 이슬람 세계에서 지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가볼만한' 중심지가 되었고, 이전 몽골의 침공 때 처참하게 파괴되었으나 다시 재건된 사마르칸트는 학술 연구의 중심지이자 티무르 르네상스의 총본산으로 거듭났다. 이 두 도시들은 모두 동부 이슬람 세계를 넘어 동시대 이슬람권의 여타 다른 도시들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이슬람 문화의 선구자로서 번성하였다. 한편으로 티무르 르네상스는 이전 부와이흐 왕조의 문예 발전13과는 구분된다는 점이 독특하며, 고전 페르시아 문화의 직접적인 부흥이라기보다는, 구어체를 포함한 페르시아 문학을 발전시켜 그들만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냈다는 평을 받는다.
발전상
티무르는 수많은 정복지에 파괴와 약탈 그리고 살육을 일삼았음에도, 그 지역의 도시들에 있는 장인이나 예술가, 과학자, 문학자들은 죽이지 않고 수도 사마르칸트로 이주시켰다.
14세기 후반~15세기 초에 티무르 제국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래로, 많은 페르시아의 예술과 문화들이 티무르가 가져온 몽골 전통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티무르 통치 말기에 샤리아15법이 제정되면서 사마르칸트는 이슬람 예술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티무르는 사마르칸트를 위대한 건축의 도시로 만들고자 하여 여러 건축가들에게 화려한 건축물을 지을 것을 명했는데, 그 결과물이 오늘날에도 당당하게 남아 위용을 뽐내고 있는 비비 하늠 모스크, 샤히 진다 영묘, 구르 에 아미르 등이다. 한편 티무르는 몽골 제국의 부활을 제창했던 만큼 유목민적인 전통에도 관심이 많았어서, 도시 건축과 초원 생활을 결합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한가지 명안(?)을 생각해냈는데, 그것은 바로 도시 내에 드넓은 정원을 건설하고 그곳에서 천막을 치고 생활하겠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생전에는 바기 치나르(작은 나무의 정원), 바기 딜구샤(매혹의 정원), 바기 비히슈트(천국의 정원), 바기 볼란드(장려한 장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정원들은 여러 개의 문이 달린 담장이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으며, 그 안에는 화려하고 장대한 천막과 잠시 쉴 수 있는 전각들이 세워졌다.
1404년에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학자 클라비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의 사마르칸트는 대략 15만 명이 거주하는 대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튀르크인·아랍인·무어인·그리스인·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방문한 각각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러시아·타타르 지방의 가죽과 린넨, 키타이17 지방의 비단과 사향, 인도 지방의 육두구, 정향, 시나몬 등 각종 특산물들이 넘쳐나는 국제도시였다고 한다.
건축에 대한 티무르의 각별한 관심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티무르 사후에 집권한 샤 루흐의 궁정을 방문한 중국 사신들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군주는 성(城)의 동북쪽 모퉁이에 거주하는데 벽돌을 쌓아 집을 지었다. 집은 사각형 모양이며 고대(高台)와 같이 당당하다. 서까래나 기와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가운데에는 텅 빈 방이 수십 칸이나 있다. 담장이나 창 등은 그림과 금벽(金碧)으로 장식했고, 유리문의 턱에는 꽃 모양을 조각하고 골각(骨角)을 박아 넣었으며, 바닥에는 융단을 깔았다.
피르다우시의 작품 유수프와 줄라이하(Yusuf and Zulaikha)를 묘사한 페르시아식 세밀화. 《쿠란》에 따르면 아름다운 청년 유수프는 만나는 모든 여인의 마음을 빼앗았다고 한다. 유수프를 사랑한 줄라이하는 함정을 파서 그와 맺어지려 했으나, 결국에는 실패했다.
샤 루흐의 아들 울루그 베그는 사마르칸트를 분봉받아 40년 동안 그곳을 통치했다. 호학(好學) 군주였던 그는 사마르칸트, 부하라, 기즈다반의 세 도시에 고등교육기관인 마드라사를 건립했는데, 특히 1417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남아있는 부하라 마드라사는 중앙아시아의 건축물들 가운데 단연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또한 그는 직경이 40m에 이르는 원통형 천문대를 건설했으며, 천문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1437년 천문표를 만들고 이를 계속 수정하여 1449년에 최종 완성했다. 이 표는 당시 이슬람권은 물론이고 그 후 오랫동안 유럽권 또한 능가하지 못했을 정도로 정확한 관측 결과를 담고 있었다. 그는 도서권을 세워 각 분야의 서적 15,000권을 수집했으며, 자신이 직접 「네 울루스의 역사 (四汗國史)」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15세기 중반에 티무르 제국의 수도는 더 남쪽의 헤라트가 되었고, 그곳 역시 티무르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마르칸트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배경 출신을 가지고 있던 수많은 장인과 지식인들은 곧 헤라트가 당대 이슬람 세계의 예술·문화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데 기여했다. 이 시기에 티무르 제국의 문화적 표현 중 상당 부분이 다른 문화적 표현 전통과 혼합된 뒤에 급속하게 발전하기도 했다.
티무르 왕조의 문화는 역설적으로 왕조의 운명이 기울어가던 15세기 후반에 절정에 달했다. 후세인 바이카라가 1469년부터 1506년까지 반세기 가까이 그곳을 통치하는 동안 전쟁과 파괴의 혼란을 피해 수많은 학자·문인·예술가들이 모여들였기 때문이었다. 헤라트 궁정을 중심으로 티무르 제국의 시대 전부를 통틀어도 비교할 대상이 없는 최고로 화려한 문화는 그렇게 꽃을 피웠던 것이다.18 당대의 재상이자 차가타이 문학의 완성자인 알리셰르 나보이는 「파르하드와 시린」, 「레일리와 마즈눈」 등 많은 시집을 남겼으며, 신비주의 시인으로 이름난 압드 알 라흐만 자미는 낙쉬반디 교단의 장로인 호자 아흐라르의 전기를 집필했다. 이외에도 바이카라의 궁정에서는 하피지 아브루, 압드 알 라자크 사마르칸디, 미르혼드, 크완다미르 등 수많은 역사가들이 활동했으며, 이들이 남긴 역사서들은 규모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이 밖에 당대 최고 화가였던 비흐자드, 서예가 마쉬하디 등도 이 시기를 빛낸 대표적인 예술가들이다.
예술
티무르 미술은 페르시아의 전통적인 개념인 '책의 예술'을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티무르 왕조의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이 제작한 새로운 예술 작품들에는, 양피지가 아니라 삽화가 그려진 종이 원고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풍부한 색상과 정교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21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고고학자이자 미술사학가인 수잔 얄만(Suzan Yalman)은 이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미니어처들의 뛰어난 묘사를 보고 "(원고 그림을 그린) 헤라트 학파는 종종 페르시아 미술의 시조로 간주된다"라고 평했다.
티무르 제국의 은 상감기법은 특히 뛰어난 품질과 묘사로서 자주 인용된다. 그림은 원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티무르 제국의 많은 예술가들은 복잡한 벽화 역시 제작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페르시아와 중국의 예술 전통에서 영감을 받아 풍경을 그렸다. 이 그림의 소재는 다른 문화권에서 차용한 것이지만, 결국 티무르 벽화는 그들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발전해나갔다. 한편으로 티무르 제국이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는 하나, 몽골 예술 전통이 완전히 단계적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5세기의 티무르 예술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고도로 양식화된 인간 형상의 묘사는 몽골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후세인 바이카라의 통치 기간 동안 예술 분야는 발전을 거듭했다. 그는 자신의 왕국에서 '학문의 은인이자 위대한 후원자'로 유명했고, '트란스옥시아나 후기의 전형적인 티무르 통치자'로 묘사되었다. 또한 후세인은 마드라사를 포함하여 수많은 학문과 예술 관련 건축물들을 지었다. 그의 세련된 궁정과 관대하고 막대한 예술적 후원은 특히 그의 사촌이자 무굴 제국의 창건자였던 바부르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건축
티무르 제국의 건축양식은 이전에 페르시아에서 융성했던 셀주크 건축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티무르 건축의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복잡한 선형 및 기하학적 패턴들로 장식되어 있는 청록색과 파란색 타일로 건물 외관을 장식했다는 것이다. 가끔씩은 건물 내부에 스투코나 부조, 그리고 기타 장식들을 활용하기도 했다. 티무르 건축은 그야말로 중앙아시아 이슬람 예술의 정점이었다. 티무르와 그의 후계자들은 사마르칸트 및 헤라트에 장엄하고 웅장한 건축물들을 여럿 지었다. 이것들은 일 칸국의 몽골-페르시아 문화를 저 멀리 인도까지 전파하여 궁극적으로는 무굴 건축양식이 탄생되는 데 기여했다.
티무르 건축은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아흐메드 야사위 성묘나 우즈베키스탄의 구르 에 아미르 등의 건축물로 대표된다. 인근에는 티무르 제국의 술탄 울루그 베그가 건설한 '페르시아식 마드라사'와 '페르시아식 모스크'가 세워져 있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남아 있는 티무르 왕공들의 영묘는 그 지역에서 가장 세련되고 정교하며 화려한 페르시아식 건축물로 유명하다. 선대칭은 사마르칸트의 샤히 진다 성묘, 헤라트의 무살라흐 복합 단지, 마슈하드의 가우하르 샤드 모스크 등의 건축물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화려하고 다양한 장식들로 꾸며진 이중 돔 또한 특징 중 하나이다.
금속 세공, 도자기, 조각
티무르 제국에서는 양질의 금속 세공품들이 생산되었는데, 대체로 그 재료는 강철, 철, 황동, 청동 등이었다. 특히 그들이 상감기법을 덧씌운 금속 세공품들은 세련되고 뛰어난 품질의 장식품으로 자주 언급된다. 티무르 제국의 붕괴 이후,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여러 도시들에서 그들의 금속 세공방식이 사용되었다.
중국식 도자기 또한 티무르 제국의 상인들에 의해 생산되었다. 다만 옥 조각품은 티무르 제국의 미술품에서 가끔씩만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다.
과학
잠쉬드 알 카시는 티무르 제국 시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수학과 천문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중 한명이었다. 그는 과학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고, 샤 루흐와 가우하르 샤드의 궁정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분야를 깊이있게 탐구한 뒤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은 그뿐만 아니라 다른 학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이 시기에는 수많은 학문적 업적이 헤라트 궁정에서 탄생했다.
술탄 울루그 베그의 통치 기간 동안 티무르 제국의 과학적 발전은 정점을 찍었다. 알 카시는 이 시대에도 활동하면서 각 차수에 대해 사인 함수를 육십진법에 따른 4자리 수로 정확하게 계산했으며19 각 도마다의 변동과 그 차이를 세세히 기록했다. 또한 황도좌표계에서 적도좌표계로의 변환과 같이 천구의 좌표계 간 변환을 다루는 표를 제작했다. 그가 집필한 술람 앗 사마는 지구, 달, 태양, 별과 같은 천체의 거리와 크기를 결정하는 데 있어 이전의 천문학자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천문관측기구에 관한 논문이 이 시기에 작성되기도 했는데, 트라이퀘트럼이나 혼천의, 모아예두딘 우르디의 분점 및 지점 측정기구와 사인·버사인 계산기, 알 쿠잔디의 육분의 등이 있다. 한편으로는 사마르칸트 천문대의 파크리 육분의, 이중 사분면 방위각 고도계, 조준의가 포함된 혼천의 등도 있었지만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천체들이 겹치는 시간을 알아내고 선형 보간법을 사용하는 데 쓰이는 아날로그 컴퓨팅 도구인 결합판이 발명되었는데, 이 기계식 천체 컴퓨터는 태양 및 달의 참 경도, 타원 궤도, 태양, 달, 천체의 위도, 태양 황도 등 여러 천문학 문제를 관측만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관측 결과를 더욱 정확히 하기 위해서 조준의와 자가 구비되어 있기도 했다.
울루그 베그는 사마르칸트에 연구소를 설립했는데, 이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저명한 대학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중앙아시아 전역, 그리고 그 밖의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술탄의 수도에 있는 아카데미에 입학하고자 찾아왔으므로 도시는 늘 여러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결과 울루그 베그는 알리 쿠시를 비롯한 여러 수학자와 과학자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 알리 쿠시는 자연 철학과 독립적인 천체물리학을 발전시켰고, 자신의 논문에서 지구 자전에 대한 경험적 증거를 제시했다. 그는 울루그 베그의 유명한 천문학 저서 「지즈 이 술타니」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다양한 전통 이슬람 과학연구를 위한 최초의 과학센터 중 하나인 '산 이 세만 마드라사(صحن ثمان, Sahn-ı Səman mədrəsələri)'의 설립에도 참여했으며, 그밖에 천문학에 관한 여러 과학 저작과 서적의 저자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바로 '천문학'과 '철학'을 별개의 학문으로 보고 이를 체계화시켰다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천문학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대개 철학 등의 다른 학문에 의존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간섭에 반대하는 이슬람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쿠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철학과 이슬람 천문학을 완전히 분리하여 천문학이 순수하게 경험과 수학에 의존하는 과학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서 그는 '움직이지 않는 지구 (정적 지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 대신 '움직이는 지구 (동적 지구)'라는 개념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 영국의 과학사학자인 에밀리 새비지-스미스는 어떠한 이슬람 천문학자들도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우주 모델을 제안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하지만 그들이 혜성 관찰을 통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했으며, 추측 철학이 아니라 오로지 경험적 증거에 기반하여 '동적 지구' 이론이 '정적 지구'보다 더욱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내렸다는 것이 명확하게 남아있다.
티무르 제국, 역사
건국 이전
14세기 초를 전후하여,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에서는 전통적인 유목생활을 중시하고 알말리크를 중심으로 하는 초원 지대에 머무르고자 하는 세력과, 정주지대에 궁성을 짓고 거주하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토착귀족들과 협력할 것을 강조하는 세력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었다.1 칸국의 동부 지역23에서는 유목민 세력이 더 강했고, 칸국의 서부 지역(트란스옥시아나)에서는 정주 세력들이 더 강했다. 전자는 스스로를 '모굴인'이라고 칭했고, 후자는 스스로를 '차가타이인'이라고 칭했다.
1347년에 카잔 칸이 카라우나스부4의 아미르 카자간에게 패사하였고, 카자간은 다니슈멘지를 명목상의 칸으로 내세운 뒤 실권을 장악했다. 1년 뒤인 1348년, 동부 지역의 유력부족이었던 두글라트부5를 중심으로 한 '모굴인'들이 이에 반발하여 투글루크 티무르를 칸으로 추대한 뒤에 떨어져 나갔다. 이로써 차가타이 칸국은 동차가타이 칸국(=모굴리스탄 칸국)과 서차가타이 칸국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서차가타이 칸국에서 카라우나스부의 지배는 카자간과 그의 아들 압둘라 2대 12년에 걸쳐 이어졌지만, 1358년 압둘라가 현지의 튀르크계 귀족들의 음모로 암살되면서 막을 내렸다. 압둘라의 죽음 이후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무정부 상태로 돌아갔다. 이때 동차가타이 칸국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이슬람을 수용하고 투글루크 티무르의 강력한 지도 아래에서 안정을 되찾았다. 투글루크 티무르는 혼란에 빠진 트란스옥시아나를 1360년과 1361년에 걸쳐 두 차례 침공하여, 여러 부족들의 유력자(아미르)들을 격파하고 일시적으로 차가타이 칸국을 재통일 했다. 티무르가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시기부터이다.
건국과 전성기
티무르 시대
티무르는 1336년 사마르칸트 인근의 케쉬에서 출생한 인물로, 몽골 제국의 귀족가문이자 보르지긴 씨족의 방계인 바를라스부6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의 티무르는 하인들을 데리고 가축을 약탈하는 등 도적질을 일삼았지만, 뛰어난 군사 지휘자로서 그 재능을 발휘하여 서서히 인망을 모아 1360년대 무렵에는 차가타이 칸국 서부의 유력자로까지 성장하였다.
티무르 제국은 1369년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서차가타이 칸국 여러 유목집단들을 통합한 것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부터 티무르는 몽골 제국 및 이슬람 제국의 동시 재건을 기치로 내걸며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였다. 1370년부터 1405년까지 계속된 티무르의 원정에 의해 제국의 영토는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는데, 초기 10년 가량은 동부의 모굴리스탄 칸국, 서부의 호라즘, 북부의 킵차크 칸국(주치인 울루스)에 대해 이루어졌다. 당시 모굴리스탄 칸국의 카마르 앗 딘은 칭기스칸의 혈족인 황금씨족이 아니었음에도 칸을 참칭하였고 이를 빌미로 티무르는 1370년 모굴리스탄 칸국 원정을 감행하여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이어 1372년부터 1373년까지는 호라즘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 때 킵차크 칸국 좌익의 군주 우루스 칸에 반발하던 토크타미쉬 칸이라는 인물이 도망쳐 와 도움을 청하자, 티무르는 이를 빌미로 1375년부터 1377년까지 킵차크 초원 원정을 단행, 우루스 칸을 패퇴시켰다. 1379년 호라즘의 쿵그라트 왕조와 다시 전쟁을 벌인 티무르는 수도 우르겐치를 함락하여 수중에 넣었다.
1380년 이후 티무르의 관심은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들 미란 샤를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하고, 1381년에는 아프가니스탄 지방의 헤라트9를, 1383~1384년에는 칸다하르10를 점령했다. 이어 이란으로 진출하여 마잔다란, 레이, 술타니야 등을 함락한 뒤 1386년 귀환했다. 그 사이에 자신의 후원으로 킵차크 칸국의 군주가 된 토크타미쉬가 타브리즈를 점령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자, 티무르는 그를 응징하기 위해 이란과 킵차크 지역 등에 원정을 계속했고, 1395년 사라이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인도로 관심을 돌린 티무르는 1398년 말 북인도 지역으로 쳐들어가 이 곳을 지배하고 있던 델리 술탄국12를 격파한 후 수도 델리를 약탈한 뒤 귀환했다.
1392년부터는 서아시아를 목표로 소위 '7년 원정'을 단행했다. 티무르는 아나톨리아 동부에 근거지를 둔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 세력을 격파한 뒤, 시리아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맘루크 왕조를 몰아내고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1402년에는 오스만 술탄국14을 침공, 앙카라 전투에서 술탄 바예지트 1세를 생포했고, 1404년에 사마르칸트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티무르의 지배지는 과거 몽골 제국 서부의 3대 칸국(주치 울루스, 훌레구 울루스, 차가타이 울루스)의 영역을 모두 포함하였다.
이후 동쪽의 명나라17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티무르 제국의 역사서인 《승전기》에 따르면 영락제가 7년 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은 것을 문제삼아 압력을 가하자 티무르는 "밀린 7년치를 내 직접 가져다 주겠다."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그러나 원정길에 오른 이후인 1405년 2월 시르다리야 하반의 도시 오트라르에서 병사하는 바람에 명나라 원정은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티무르 시대의 제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부족 연맹체들이 지배하는 영토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의 직할령이었다. 페르시아 서부,18 킵차크 초원,19, 모굴리스탄20 등이 전자에 해당하고 호라산, 페르가나, 호라즘 등 이후에도 티무르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지배한 영토는 후자에 해당한다. 티무르는 전자에 대해서는 항구적인 정복보다는 상위 군주로 인정받고 조공을 받는 선에 그쳤는데, 왜냐하면 그가 이전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부족 연맹체들을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하여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시간이 많이 드는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21 한편 후자에 속하는 영토에서, 티무르는 항구적인 정복을 위한 조치들을 여럿 취했다. 대표적으로 전쟁 도중에 파괴된 도시들을 군대를 이용하여 복구하고, 관개 시설을 새롭게 정비하고, 요새를 건설하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정예군을 각 정복지로 이주시키는 등의 정책들이 바로 그것이다.
1차 내전기
대부분의 왕조가 그렇듯이 티무르 사후 후계 구도를 두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티무르는 생전에 손자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피르 무함마드는 티무르가 사망할 때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에서 멀리 떨어진 발흐에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티무르의 또 다른 손자인 할릴 술탄이 권력을 잡았으나 기존 고위층들의 반감을 사 인기를 잃었고,22 뒤이어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가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의 영역은 서투르키스탄에 국한되었고, 중부 이란의 이스파한과 쉬라즈 등지는 티무르의 둘째아들 우마르 셰이흐의 자식들이 지배했다. . 그런가 하면 제국의 가장 서북부에 해당되는 서부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코만 계통의 유목부족들, 즉 잘라이르 왕조와 백양 왕조(아크 코윤루),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 등이 독립해 있었다.
이 시기에 특히 티무르 제국에게 위협이 된 것은 흑양 왕조였다. 흑양 왕조의 수장 카라 유수프는 1408년 사르드루드 전투에서 티무르의 아들 미란 샤를 전사시켰으며, 타브리즈를 중심으로 하여 티무르 제국의 서부 영토(아제르바이잔과 이라크)를 집어삼켰다. 한편 티무르에 의해 복속되었던 백양 왕조와 오스만 술탄국, 조지아 왕국, 맘루크 왕조 또한 이 무렵에 독립하거나 다른 세력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샤 루흐 시대
이 내분으로 나라 자체가 막장이 될 뻔 했으나, 이후 샤 루흐가 티무르 제국을 다시 통합했다. 샤 루흐는 자신의 근거지 헤라트를 중심으로 제국의 재건을 꾀했고, 중부 이란의 티무르 일족들도 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내전 끝에 복구된 제국은 티무르 시대보다는 비교적 약화되었고, 따라서 자신에게 반항하는 외부 세력들을 이전처러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동부에서는 모굴리스탄 칸국이 이전의 피해를 회복하고 카슈가르 일대를 위협했으며, 북부에서는 아불 하이르 칸의 지도 아래 우즈베크인들이 트란스옥시아나에 지속적으로 쳐들어왔다. 또한 서쪽에서는 여전히 흑양 왕조를 비롯한 투르코만 세력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1410년대, 흑양 왕조의 카라 유수프가 타브리즈와 바그다드를 점령하자 샤 루흐는 1421~34년에 걸친 세 차례의 원정을 통해 그를 패배시켰으며23 모굴리스탄 칸국에도 군사적 압력을 가했고 1425년에는 아들 울루그 베그를 보내 원정을 감행했다. 다만 이전 티무르와 마찬가지로 완전 정복은 불가능했으므로, 몇몇 대도시들과 주요 거점들을 점령하고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받는 선에서 타협했다.
샤 루흐는 중국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달리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모색하여 몇 차례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고 맞이하고 했다. 1413년 샤 루흐의 사절단은 북경을 방문하였고 이들이 귀환할 때 영락제는 진성과 이달을 헤라트로 파견했고, 이들은 1415년 귀환하여 『서역행정기(西域行程記)』와 『서역번국지(西域蕃國志)』라는 글을 남겼다. 1419~1421년에도 샤 루흐와 그의 아들 바이숭쿠르가 보낸 사신단이 명에 다녀갔는데, 이때 사신이었던 기야스 앗 딘 나카시는 당시 영락제와 화재를 입은 자금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했다.24 더불어 이들 사절단은 명나라의 광활함과 부유함, 역참제도를 비롯한 명나라의 행정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놀라운 점은 이들 사신단이 둘러본 지역은 어디까지나 강남지방에 비하여 낙후되었던 화북지역이라는 것이다.25 역사가들도 샤 루흐의 시기를 진정한 전성기로 여기고 있으며, 유럽과 동방의 문물들을 받아들이고 이들 사이의 교역을 중계하면서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샤 루흐의 시대는 이전 티무르 시대보다 문화적으로 훨씬 융성하였다. 샤 루흐는 예술과 학문에 엄청난 후원을 쏟아부었고, 수많은 학자들과 예술가, 과학자들의 활동을 장려하여 많은 업적들을 남기도록 했다. 이 무렵에 페르시아 문화와 튀르크-몽골 문화가 혼합된 건축 양식이 발달하여 수도 헤라트와 마슈하드에 여러 모스크 및 마드라사(신학교)들이 세워졌다. 또한 샤나메를 비롯하여 다양한 고전 작품들이 차가타이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판본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정교하고 화려한 페르시아 사본이나 세밀화들이 여럿 제작되기도 했다.
다만 샤 루흐 시대에도 제국의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당장 문서상 티무르 제국의 영토인데도 흑양 왕조, 백양 왕조가 흥기하여 서부 이란에서 쫓겨나는 등 샤 루흐의 통치가 먹혀들지 않는 지방도 적게나마 있었으며, 시도 때도 없이 반란이 일어나는 통에 그야말로 군대를 이끌고 순회공연을 다녀야 했던 것. 하지만 다행히도 샤 루흐는 군사적인 재능도 뛰어나 제국의 분열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1447년에 손자 무함마드가 페르시아 서부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 사망했다.
울루그 베그 시대
그리고 샤 루흐의 장자인 울루그 베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훌륭한 문화인이자 뛰어난 수학자·천문학자·역사학자였던 그는, 1409년 트란스옥시아나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로부터 과학자·예술가들을 우대하고, 학문·예술을 장려하면서 그들에게 막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힘입어 티무르 제국의 두 대도시였던 사마르칸트과 헤라트는 동부 이슬람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서 대단히 번영했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 고전 문학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건축 양식 또한 한 층 더 발전하여 제국 곳곳에 화려한 모스크와 영묘가 건설되었다. 울루그 벡 스스로도 구면 기하학이나 삼각함수 등 천문역산학에 대한 저술을 남겼기 때문에 유명하다. 따라서 그의 치세는 티무르 제국의 문화적인 전성기로 평가받는다. 이때의 티무르 제국은 당대 이슬람 세계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발전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제국 치하의 호라산과 트란스옥시아나를 여행하고 이를 자세히 기록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문화적인 경향은 그대로 물려받고 나라도 잘 다스리긴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군사적인 재능은 전혀 물려받지 못했고, 즉위 2년만인 1449년에 부친의 정치가 이슬람교를 따르지 않고 지나치게 세속적이라는 것을 명분으로 궁정 쿠데타가 일어나 아들에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의 사후 내전기가 다시금 도래했고, 이때부터 티무르 제국은 본격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쇠락
2차 내전기
아버지를 참수시킨 아들 압달 라티프는 제위한지 고작 6달 만에 똑같이 반란을 당해 겨우 나이 서른에 아버지처럼 참수되었으며 이리하여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곧장 무정부 상태로 돌입한다. 한편 페르시아 중부와 호라산 일대는 각각 술탄 무함마드, 아불 카심 바부르가 장악하고 있었다. 혼란기를 틈탄 여러 지방세력들이 티무르 제국의 패권을 놓고 아웅다웅하기 시작하면서, 제국은 사분오열되었다. 제국의 서부는 기회를 노린 흑양 왕조와 흑양 왕조를 멸망시킨 백양 왕조에게 차례차례 뜯겨나갔다.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이 혼란해지자, 이 기회를 이용해 티무르의 3남 미란 샤의 손자였던 아부 사이드가 우즈베크인들의 도움으로 1451년 사마르칸트를 장악했다. 이후 아부 사이드는 여세를 몰아 1454년에 발흐를 합병하고 트란스옥시아나를 통일했다. 따라서 제국은 호라산의 아불 카심 바부르와 트란스옥시아나의 아부 사이드로 양분되었다. 1458년 아부 사이드가 헤라트를 점령함으로써 마침내 2차 내전이 종식되었다.
1차 내전기 때와 마찬가지로, 티무르 제국이 혼란에 빠진 사이에 주변 국가들이 크게 성장하였다. 특히 자한 샤가 이끄는 카라 코윤루는 1477년 이후 호라산을 제외한 페르시아 영토 전역을 제국으로부터 빼앗아갔으며, 1458년에는 제국의 수도 헤라트를 잠시 점령하기까지 했다. 또한 킵차크 칸국이 붕괴하면서, 북방의 우즈베크인들이 시르다리야 강을 넘어 본격적으로 남하하려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부 사이드 시대: 일시적인 통일?
1451년에 즉위한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상술했듯이 1458년 호라산을 평정하고 헤라트에 입성하여 중앙아시아와 동부 이란을 석권했다. 그는 헤라트와 사마르칸트라는 제국의 주요 도시들을 동시에 지배하고, 이라크와 아제르바이잔까지 진군한 마지막 티무르 군주였다. 또한 그는 황금씨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문율을 깨고 스스로 '칸'을 칭했다.
아부 사이드는 우즈베크인들의 힘을 빌어 사마르칸트를 점령했고, 이후 타슈켄트에 있던 수피즘 낙쉬반디 교단의 셰이흐 아흐라르를 초청하여 그 종교적 권위를 배경으로 트란스옥시아나를 장악했다. 이어 헤라트를 중심으로 하는 호라산~이란 동부 지역을 지배 아래 둠으로써 제국의 재통일을 완수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외부에 투사되는 티무르 제국의 힘은 확연히 약해졌는데, 이는 우즈베크인과 모굴리스탄 칸국, 아크 코윤루의 성장 때문이었다. 아부 사이드는 모굴리스탄 칸국에 대해서는 제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유누스를 칸으로 임명하고 파견함으로써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부 사이드는 우즈베크인들이 시르다리야 강을 넘어 트란스옥시아나를 약탈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백양 왕조를 치러 갔다가 1469년에 오히려 포로가 되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황혼기
남북조 시대
아부 사이드 사후, 비교적 짧은 기간(1469~1470년) 동안 내전이 일어났다. 그 결과 헤라트를 중심으로 한 아무다리야 이남의 영토, 즉 호라산 일대는 후세인 바이카라가 차지하고, 그 이북은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이후 티무르 제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 가운데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구도가 유지되었다. 또한 서쪽의 백양 왕조와도 어느 정도 화평을 이루었으며, 북쪽의 우즈베크인들 역시 아불 하이르가 사망하면서 일시적으로 와해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는 내부 분열과 전쟁으로 점철된 티무르 제국사 전체를 둘러보아도 드물게 매우 평화로웠다.
이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티무르 르네상스'로 불리는 티무르 제국의 문화 발전이 절정에 달했다는 점이다. 헤라트에서 집권한 후세인 바이카라는 재상 알리 시르 나바이와 함께 문예를 보호하여, 헤라트 궁정을 중심으로 티무르 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맞먹을만한 대상이 없을 정도의, 최고로 화려한 마지막 문화적 번영을 이루어냈다. 반면 사마르칸트의 궁정은 낙쉬반디 교단의 영향으로 헤라트만큼 예술을 부흥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안디잔과 페르가나를 차지한 우마르 셰이흐 2세가 1494년 사망하자 12살밖에 안 된 그의 아들 바부르가 뒤를 이었다.
멸망
우즈베크족의 침입
1490년대 중반,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이 대부분 사망하자 트란스옥시아나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를 틈타 샤이반 왕조가 이끄는 우즈베크인들이 트란스옥시아나를 대거 침공하는데, 이는 결국 1500년 우즈베크 칸 무함마드 샤이바니가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점령하는 사태로 이어진다. 1503년 여름, 바부르는 모굴리스탄 칸국의 마흐무드와 아흐마드 2명의 칸과 연합하여 샤이반 왕조와 전쟁을 벌였지만 마흐무드 칸과 아흐마드 칸이 포로로 잡히는 등 엄청난 패배를 당했다.
1490년대에 트란스옥시아나가 혼란해진 것은, 어쩌면 후세인 바이카라에게는 티무르 제국을 재통일할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후세인 바이카라는 당시 아들들이 일으킨 반란 때문에 이러한 호기를 이용하지 못했다. 후세인은 반란을 진압하고 카불의 바부르와 협력하여 우즈베크인들을 중앙아시아에서 몰아내려 했다. 그러나 1506년, 후세인이 죽고 그의 두 아들들(바디 알자만, 무자파르)이 후계자 자리를 두고 내분을 일으켰다. 바부르는 이를 보고 가망이 없다고 여겨 철수했고, 1년 뒤인 1507년에 티무르 제국의 마지막 보루였던 헤라트와 발흐마저 무함마드 샤이바니에게 점령되었다. 바부르는 아프가니스탄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우즈베크인들은 원래 주치의 후손들이 튀르크인들과 뒤섞이고 여기에 사마르칸트 내 이란계 백인종(타지크인)까지 뒤섞여 페르시아화된 사람들로, 당시 문화적으로 꽃피어있던 티무르 제국의 학술적, 문화적 자원을 그대로 흡수해서 티무르의 후손들을 쫓아냈으면서 현재는 티무르를 국부 취급하고 있는 판이다. 그리고 원래 주치로부터 유래했으나 현재 우즈베크어는 주치의 후손들이 쓰는 킵차크계 튀르크어가 아닌 위구르와 같은 차가타이계 튀르크어이다.
북인도에서의 새로운 시작
우즈베크인들의 침입기에 속된 말로 개털린 티무르 제국의 황족들 중 하나가 앞서 언급된 바부르인데, 바부르는 제국의 본거지인 중앙아시아를 떠나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지역으로 도망쳐 그 곳에 무굴 제국을 건국함으로써 티무르의 후손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 무굴 제국을 티무르 제국의 후신으로 간주하는 역사적 시선도 있다.
이후 바부르와 그 후손들은 티무르 제국의 본거지인 중앙아시아를 탈환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고, 가끔은 과거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도 점령하는 등 옛 영토를 되찾는 듯 했으나...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우즈베크 칸이 이란의 신흥 세력인 사파비 제국 군주 샤(Shah) 이스마일 1세와 벌인 메르브 전투에서 패사하자, 바부르는 이스마일 1세의 도움으로 사마르칸트를 되찾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사마르칸트 등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이슬람 수니파를 믿었는데, 바부르가 시아파 군인들을 데려와 큰 반발을 초래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고향을 떠난 바부르는 1525년 라호르를 점령하고 이듬해 파니파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서북 인도를 정복하고 무굴 제국의 토대를 놓았다. 이렇게 티무르 제국이 무너지면서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 무굴 제국, 우즈베크 칸국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 공교롭게 이들 모두가 튀르크계가 주인이거나 튀르크계와 상당히 관련있는 국가들로 사파비 제국은 페르시아 백인들이 건국했으나 키질바시(kizilbash)라는 투르크멘 유목민 부대가 주력부대였고, 오스만 제국은 오구즈 부족이었으며, 무굴 제국을 세운 바부르의 조상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 계통의 몽골혈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