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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주술화, Disenchantment
Disenchantment
기존에 가졌던 긍정적인 믿음이나 환상이 사라지는 과정이나 상태
즉, 어떤 대상이나 사람에 대한 실망이나 회의를 느끼게 되는 상황
어원
Dis 부정적 의미
enchantment 마법, 환상
동의어:
Disillusionment (환멸)
Disappointment (실망)
반의어:
Enchantment (매료됨, 매혹)
Delight (기쁨, 즐거움)
탈주술화, Disenchantment
막스 베버
탈주술화=합리화=근대
사회과학에서, 쓰이는 용어로, 현대 사회에서 확연하게 일어나는 문화적 이성화와 종교의 가치상실을 뜻한다. 이 용어는 막스 베버에 의해 프리드리히 실러에서부터 처음으로 인용되었으며, 현대화된, 귀족들의 세속화된 서구 사회의 특징을 말한다. 베버에 의하면, 서구 사회에서는 과학적 이해가 믿음보다 더 가치가 있으며, 이런 과정들이 전통적 사회 즉,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주술적인 정원으로 여겼던 것과 반대인 이성적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
계몽주의의 양면성
베버의 탈주술화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가진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탈주술화를 맞이 하는 현대성에 대하여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었는 데, 그것은 베버가 세속화된 사회를 죽은 종교적 신앙의 유령에 사로잡히 것에서부터 창조된 것으로 인식한 것에 대하여 칭찬한다.
어떤 학자는 세상의 탈주술화를 실존주의에 대한 탐닉과 개인적인 책임감으로의 초청으로 인식을 한다.
탈주술화로서의 근대를 현실로
서양에서는 역사의 시간적 흐름을 흔히 고대-중세-근세-현대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는 '고전고대'로 일컬어지고,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서로마제국의 멸망(476년)에서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의 멸망(1453)까지는 중세사로 여겨진다. 근세는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서 1789년 프랑스혁명까지의 초기 근세(early modern)와 프랑스혁명에서 2차 세계대전(학자에 따라서는 1차 세계대전)까지의 후기 근세(late modern)로 더 나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문자(大文字)로서의 근대(the Modern)'란 시기적으로 바로 이 후기 근세 혹은 최근세(recent modern)와 겹친다. 따라서 서양사에서의 시기 구분에서 현대는 바로 지금만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펼쳐진 당대의 역사(contemporary history)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구분은 많은 시대구분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절대적인 게 아니다.)
우리가 거(居)하는 현재 혹은 현대와 가장 가까운 역사 세계가 근대이다. 알다시피 근대를 빚어낸 주된 힘은 서양에서 나왔다. 근대에 펼쳐진 지리적, 경제적 세계화도 서양이 주도한 것이었다. 우리는 서양이 주도한 전 세계의 근대화에 강제로 편입된 쪽이었다. 자주적으로 근대에 진입할 역량이 모자라서 강제적으로 근대세계에 편입된 탓에, 우리에게는 시간을 두고 성공과 실패를 두루 경험하면서 근대의 전모(全貌)를 찬찬히 체득할 여유를 누릴 수가 없었다.
현실 세계에서의 부족, 혹은 결여를 메우려 할 때 필요한 게 꿈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 충족된 것을 욕망하는 인간은 없다. 누구나 충족된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없는 것)을 꿈꾼다. 목이 마를 때 물을 찾지 갈증이 해소되면 물을 찾지 않는다. 역사 세계에서도 인간은 현실에 없거나 부족한 것을 꿈꾼다. '지금 여기'는 꼭 이래야만 하는가? 과연 눈앞에 펼쳐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일까?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게 뭔가 부족해 보일 때, 그래서 객관적 '현실'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주관적 '인식' 사이에 괴리가 있을 때, 그 격차를 해소하는 방법도 시대에 따라 달랐다. 서양의 역사를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지만, 고대 세계에서는 주로 회상이나 이주의 방식으로 현실과 인식 사이의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우선 시간의 차원에서는 회상(recall)의 방식을 취했다. 현실이 빈약하고 초라할수록, 고대의 인간은 풍요롭고 안락했던 과거를 상기함으로써 현실을 부정하려 했다. 개인의 차원에서 '내가 왕년에는~', '이래 봐도 한때는~'이라며 현실을 부정하듯이. 요순(堯舜)시절이나 '실낙원(實樂園) 이전'의 옛날에 대한 회상에 기대어 현실을 부정하는 형식을 취했다.
현실 이전에 존재했다고 회자(膾炙)되는 '황금시대'에 대한 관념의 감상화(感傷化)가 시간의 차원에서 진행된 현실 부정이라면, 공간의 차원에서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의 이주(emigration)라는 형식으로 현실의 부족을 메꾸려 했다. 내 머리에 존재하는 '관념의 세계'를 지금 이곳에서 현실로 만드는 게 불가능하므로, 이곳을 벗어나서 관념의 현실화가 이루어진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본 무릉도원(武陵桃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율도국, 기회의 나라로의 이산이 바로 그런 예다.
중세 사회에서 현실과 인식의 차이는 <'악(惡)'으로, '터부 taboo'로 처리되는 방법>과 <종교로 처리되는 방법>이 가능했다. 우선 중세 사회에서 현실적이지 않은 이미지에 탐닉하는 자는 마귀에 들린 자, 병든 사람(미친 사람)으로 내몰렸고, 그들이 자기 생각을 행동에 옮겼을 때는 처벌되었다. 닫힌 사회에서 (현실) 부정의 정신은 터부시되어 박해를 받았다. 공동체의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그로부터의 박해를 면한 게 종교적 방법이다.
종교는 현실의 차원에서의 부정을 단념하고 현실을 스스로 초월하는 '초역사적 부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초월(transcendence)은 "지금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을 아예 벗어나려고 한다. 초월은 참되고 복된 삶은 허망하고 찰나적인 세속세계가 아니라 천상(天上)세계에서만 가능하다는 믿음의 산물이다. 역사 세계 자체를 뛰어넘음으로써 현실의 초라함을 극복하려는 초역사적인 꿈이 초월이다. 그리스도교는 현실과 인식의 차이를 현실의 차원에서 줄일 수 없다는 세계관의 표현이자 현존하는 현실을 '숙명(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현실변혁을 시도하지 않겠다는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이처럼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도 현실(세계) 부정의 계기는 존재하였으나 그것은 소외-억압되었거나 비합리적으로 처리되었다.
서양의 근대란, 현실에 대한 이런 식의 종교적 대응방식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과 인식의 차이를 (현실) 초월이 아니라 진보(progress)를 통해 줄이려는 게 근대의 특징이다. 합리적 사고와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근대인은 좋았던 옛날은 이미 사라졌고,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으며, 아무나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생산력 증대와 (개혁이나 혁명과 같은) 사회변혁 시도를 통해서 현실과 인식의 격차를 '현실의 극복'=발전을 통해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고대와 중세에는 변수(變數)조차 못되었던 부정적 현실의 타파라는 계기를 아예 상수(常數)로 놓고 계산하려는 행동 양식이 생겨났다.
서양의 근대를, 회상이나 이주, 그리고 초월의 역사적-현실적 한계를 깨닫고 어제와 저곳의 바람직한 것들은 물론이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이상적인 것들까지도 '관념의 형식'인 정보나 지식으로 배우고 익혀서 실현하려는 시대라고 규정한다면, '성숙한 근대로서의 현대'를 살려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합리적 사유를 긍정적으로 전유하려는 노력이다. 막스 베버가 근대의 핵심적 특징을 탈주술화=합리화라는 말로 요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보름 남짓 남겨둔 현재, 공동선에 대한 헌신은 고사하고 그에 대해 아무런 개념조차 없는 무속신앙에 사로잡힌 자들이 정권을 쥐어보겠다고 버젓이 나대고 다닌다. 역겹기 짝이 없다. 아무쪼록 이번 대선이 사이비 중세가 아니라 '성숙한 근대'=현대로의 이정표로 기록되길 희망한다.
한국, 탈마법에 성공했을까
정치·경제·문화, 마법에 사로잡힌 모습들
마법과 탈(脫)마법
영어 단어 “disenchantment”는 긍정적 의미로도, 부정적 의미로도 사용된다. 부정적으로는 '환멸(disillusionment)을 느낀다'는 뜻이고 긍정적으로는 '각성(awakening)한다'는 뜻이다. 반대에 가까운 이미지지만, 둘 다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을 돌이켜보는 상황을 기술한다. 미몽(迷夢)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Entzauberung(탈마법화)이라 하였다. 어원적으로 마법(Zauber)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바로 disenchantment다. disenchantment도 마법(enchantment)에서 벗어남이다. 일상생활에서 마법이라는 말은 “매력적이고 환상적인”이라는 긍정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베버가 의미한 마법, dis-enchant되는 마법은 우리를 옭죄고 있던 전통적-종교적 가치관이다.
마법에서 벗어남은, 계몽주의 이후 이성이 강조되면서, 비이성적인 종교와 관습적 제도의 힘이 줄어들었음을 의미한다. 마법의 빈자리는 과학, 관료체계, 법과 정책 등 합리적이라 상정되는 “도구”들이 대신한다. 어두침침한 중세의 비합리성에서 벗어나 합리성이 빛을 비추는(en-lighten-ment) 계몽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성이 이끄는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을 갖고 있다.
마법에서 벗어났을까?
그러나 다음 세대 철학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대사회가 “종교적 믿음의 유령에게 쫓기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이는 탈마법화가 물질적 발전과 동일시되면서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감” 등 공동체를 유지시켜오던 가치 있는 전통이 무너지고, 이 세계에는 도구만 남아서 '규범적 진공(아노미)'이 되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탈마법화와 동시에 재마법화(re-enchantment)가 진행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전통 종교 쇠퇴 후에 아노미가 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가 도입되었는데, 정신분석이나 맑시즘 등이 그것이라는 논의다. 더 근본적으로 현대사회는 전혀 탈마법화된 바 없고, 아직도 다양한 마법과 신화들이 성행하고 있다는 비판마저 있다. 정리하면, 현대 사회가 비합리의 마법에서 벗어났는지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는데 아래와 같다.
(1)계몽주의의 합리성을 통해 미망에서 벗어났다.
(2)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마법에게 쫓기고 있다.
(3)마법에서 벗어난 것이 전혀 아니다.
(4)마법에서 벗어나기는 했는데,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가치관을 찾지 못했다.
(5)오래된 마법은 벗어났지만 새로운 마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 중 어디 있을까? 마법에서 벗어나 온전한 합리성으로 충만한 이상적인 사회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을 것이니 (1)은 우선 제쳐놓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은 합리성이 기조를 이루지만, 곳곳에서 비합리가 합리성을 위협하는 (2)의 상태 정도일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 수준에 도달했을까?
2021년 12월 당시 국민의힘 대권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TV토론회 당시 손바닥 한가운데에 '왕(王)'자를 그려놓은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사진=연합뉴스
2021년 12월 당시 국민의힘 대권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TV토론회 당시 손바닥 한가운데에 '왕(王)'자를 그려놓은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사진=연합뉴스
정치판의 탈마법화
우리 정치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각 정파들이 자기네 수장을 신격화해서 추종하는 모습으로 보아 (5)에 가까운 것 같다. 절대자인 왕권이나 신만큼 강력한 것이 수장의 힘이다. 그가 절대로 비판받아서는 안되는 것이 '종교적인 신성함' 수준이다. 마법적 권위를 보호하기 위해서 정치적 순교가 일어나기도 한다. 절대자가 한마디 계시를 내리면 정부 관료들은 자신의 전문성과 양심을 묻어둔 채 주술에 가까운 정책을 만들어서 과학(마법이 아닌 과학, 요사이는 마법도 과학에 근거한다고 해야 사람들이 믿어줌)이라며 내놓는다. 그러다가 잘못이 밝혀지게 되면 “그분”의 계시가 아니라 미천한 “제가” 한 것이라고 헛된 신앙고백을 하면서, 죄인이 되는 것을 자처한다. 마법은 수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 맞서는 정파 역시 절대자에 대한 믿음으로 움직여진다. 강력한 신도 그룹이 있어서, 그들도 신앙고백을 하고 순교라도 할 것 같은 태세다. 온건한 믿음을 갖는 사람은 '배교자'라 조리돌림 당한다. 수장은 간헐적으로 신도들 앞에 강림하여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데 하늘 아래 절대자가 둘이 있다는 것은 싸움을 의미한다. 국회에서 길거리에서 인터넷 댓글에서 전쟁이 벌어진다. 종교적 절대를 위한 싸움이므로 전략적 고려나 타협은 없다. 상대방은 '절대 악'이므로 절멸시키고, '절대 선'인 우리 세력을 온누리에 펼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십자군 전쟁을 연상케 한다. 이런 수준에서 험악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우리 정치는 탈마법화와 거리가 멀다. 새로운 종교가 중세의 종교와 같은 수준이므로 (3)에, 즉 '마법에서 벗어난 것이 절대 아니다'에 가까워 보인다.
자신들이 (3)의 세계에 살고 있음은 정치권 사람들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 같다. 정치권에서는 흔히 자기네 세력에 대한 비판을 “마녀사냥”이라고 한다. 여당 세력과 야당 세력은 서로 상대방을 마녀로 몰아붙이거나 자기네들이 억울하게 마녀로 취급받는다고 이야기하는데 마치 거울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마녀사냥은 중세말에서 근대 초에 일어났던, (3)시대의 극단화된 비합리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가톨릭 세력은 물론 이를 비판하며 새로 등장한 프로테스탄트 세력 역시 마녀사냥을 저질렀으므로, 이 측면에서 종교 개혁은 탈마법화가 아니라 구 마법을 신 마법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했다. 이전 정권의 실패했던 적폐 청산, 현 정권의 실패중인 카르텔 혁파는 구악(舊惡)을 개혁하려는 시도였지만, 자신들부터 합리성이 부족했으므로 결국 탈마법화가 될 수 없었고, 마법의 세계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우리 정치가 미몽과 마법에 사로잡힌 (3)의 상태에 있음은 믿거나 말거나 한 소문, 또는 사실로 밝혀진 것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손바닥의 왕(王)자는 불길한 전조였다. 이후 대통령실을 이전한 것이 풍수가의 조언을 따른 것이라는 소문에서 시작해서, 대통령실에 풍수가가 출입했다는 사실이 보도된 바도 있었고(특정 역술인이 아닌 다른 풍수가여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음), 무엇보다 유튜브에 떠도는 그 역술인의 주장이 정부 정책에 선행하였던 예들이 여러 번 드러난 것을 보면, 마법 시대의 직종들이 2020년대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대활약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정치는 근대화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셈이다.
경제의 탈마법화
경제의 측면에서 우리는 어디 살고 있을까? 종교전쟁 수준의 갈등은 당장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이유는 종교보다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독점적으로 강림해 있기 때문이다. 탈마법이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마법이 등장한 것은 분명한데 그것은 '신자유주의'다.
범죄만 아니라면, 우리 모두 자유롭게 창업하여 맘껏 돈을 버는 것이 절대 선이다. 훌륭한 정부의 경제 정책은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돈 벌 능력이 있는 사람이 충분히 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업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노조 활동은 감시받고 억제되어야 하는 나쁜 일이다.
S전자의 법인세를 줄여주어서 외국 기업과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은 돌봄 예산을 줄이더라도 정부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고용을 유연화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일개 노동자의 죽음으로 고용주가 처벌받는다면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담론이 퍼져 나가기도 한다. “다치지 않고 기본적 삶을 보장받고 해고당할 위험 없이 일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신자유주의와 싸우기에 너무 힘이 없다.
마법의 시대에서 근근이 살아남았던 인간적인 정, “생산성이 낮은 사람도 같이 살 수 있음”이 생산성 최우선의 사회에서 가치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우리 사회는 (4), 즉 아노미 세상이다. 그것을 대체해서 더 강력한 신자유주의가 지배한다는 측면에서는 (5), 즉 새로운 마법의 세상이다. 신자유주의는 도덕적 기초가 의심받지 않고 절대화되므로 합리성이 아닌 또다른 마법일 뿐이다. 물론 신자유주의를 가치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돈 버는 현대적 기술이 강조되고 있으므로 (3)까지 퇴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사 2000명 증원에 대해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라 장관이 직접 결정했다고 주장하는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고발당했다.
의사 2000명 증원에 대해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라 장관이 직접 결정했다고 주장하는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고발당했다.
문화의 탈마법화
문화적으로 우리는 어디 살고 있을까? 대중문화에 국한해서, 두가지 측면을 살펴보려 한다. 먼저 문화적 “상품”의 생산구조라는 측면이다. 과거, 창작물은 “고급” 예술이 아닌 대중문화에서도 창작자의 고민이 담긴 개인 특유적 작품이었다. 반면 요사이의 드라마와 아이돌 그룹 노래는 창작 시스템을 통해서 제작된 공산품의 특성이 강하다. 첨단 기술로 제작된 첨단 상품이다.
예술적 영감이라는 과거의 개념이 타파되어야 할 마법의 일종인지는 모르겠지만, 문화적 산물이 공산품화 되면서 문화는 경제에 종속되었다. 작품의 가치는 애매하고 주관적인 예술성이 아닌 이 작품으로 얼마나 돈을 벌었는가로 평가된다. 예술가는 없고, 제작사의 가치는 회사의 주가 총액으로 평가된다. 문화가 경제 시스템에 완전히 종속되었으므로 경제와 같이 (5)의 세상이 된 것 같다.
두번째 측면은 슈퍼 아이돌의 등장이다. 이들은 대중을 매혹한다. 여기서는 탈마법화가 아니라 '마법화'(enchantment)가 추구된다. 아이돌에 대한 대중, 특히 팬클럽의 반응은 종교적 열정에 버금간다. 아이돌은 탈마법화 되는 순간 가치가 사라지고, 이들을 이용하는 산업도 붕괴한다. 그래서 마법성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이 동원된다. 음주운전 사고를 은폐하려는 유명 가수와, 정책이 엉터리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동원하는 정부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마법성이 붕괴, 즉 탈마법하면 끝장난다는 절박함이다. 아직 마법에 빠진 상태인 팬클럽은 범죄를 저지른 아이돌을 옹호하는 비상식적인 집단 활동을 하는데, 마법의 세계에 합리성이 없음을 잘 보여준다. 계몽주의 이전 시대다. 이렇게 되면 우리 연예계는 정치판처럼 (3)의 수준이 된다. 개인이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마법이 통하지 않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봉건주의 마법은 21세기 우리 정치판을 지배하고 있다. 경제판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마법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 현대 기술의 마법까지 더해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무엇이 가치인지에 대한 생각할 여유 없이 무언가를 소비하면서 하루를 살아간다. 자신이 마법에 조작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나의 자율성과 합리성을 지키는 것이 만만치 않은 원시적인 세상이다.
얼치기 무사와 앉은뱅이 인형술사
19세기 말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탈주술화 과정과 근대: 학문, 종교, 정치’라는 책에서 ‘근대’와 ‘전근대’를 나누는 기준을 ‘주술’로 봤다. 즉, 주술에서 탈피하는 것이 ‘근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11년 전 ‘전근대’를 경험했다. 박근혜 정부의 비선 실세 최서원(최순실에서 개명)씨는 2013년 2월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때 서울 광화문광장을 오방색 천으로 뒤덮는 이른바 ‘오방낭’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실천했다.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색깔의 조각보로 만든 ‘오방낭’이 세종대왕 동상 앞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취임식을 ‘거대한 굿판’으로 만들려 했다”는 관계자 증언까지 나와 충격을 줬다.
그런데 최서원씨도 윤석열 대통령 부부 앞에선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김건희 여사는 스스로 “나는 영적인 사람이다”, “웬만한 무당보다 내가 더 잘 본다”고 했다. 그의 박사 논문도 사주와 관상 등 점술을 소재로 한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다.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시절 손바닥에 왕(王) 자를 새긴 것도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주변에 ‘도인’도 많다. 처음엔 건진법사와 관련된 무성한 소문을 낳더니 머지않아 천공이 나타났다. “청와대는 터가 좋지 않다”며 막대한 예산을 낭비한 대통령실 용산 이전에 무속인 천공 개입설이 나왔다. 해괴한 소문은 꼬리를 물었다. 의대 증원 2천명은 천공의 본명 ‘이천공’에서 비롯됐고, “우리도 산유국이 된다”는 천공의 말에 ‘대왕고래 프로젝트’가 나왔다는 설이 나돌았다.
건진과 천공이 잠잠해지자 이번엔 명태균이 등장했다. “도사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김 여사 말처럼 명씨의 별명은 ‘지리산 도사’다. 압권은 명씨가 말했다는 ‘장님 무사(윤석열)와 앉은뱅이 주술사(김건희)’다. 김 여사가 배후에서 국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의혹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오빠 카톡’에 나오듯이 명씨는 ‘영적인’ 김 여사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영적인’ 말로 “명 선생님” 소리를 들었다. 윤 대통령도 그를 “명 박사”라고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명씨의 ‘꿈 이야기’는 더욱 헛웃음이 나오게 한다. “꿈자리가 사납다. 비행기가 떨어지는 꿈을 꿨다”는 명씨 말에 김 여사가 아시아 정상 배우자가 참여하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프로그램에 불참했다는 주장이 있다. 남편을 솥에 삶아 먹는 ‘윤핵관’으로부터 그를 구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믿었던’ 명씨가 녹음 파일을 공개하면서 윤 대통령의 공천 개입 의혹과 김 여사의 국정 개입 정황이 드러났다. 명씨는 영어의 몸이 됐다. 대표적인 친윤 검사로 불리는 정유미 검사장의 창원지검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만 명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이 받아들였다. 정 검사장은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장관을 맹비난하는 글을 검찰 내부 게시판에 올린 인물이다. 명씨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던 윤 대통령 부부로선 일단 한숨 돌릴 법하다.
명씨는 휴대폰 판매업에 종사하다가 ‘전국114 전화번호부’라는 텔레마케팅 회사를 운영했다. 그가 여론조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배경이다. 나이 마흔에 창원대에 진학한 그는 2017년 ‘시사경남’을 창간하고 이듬해 여론조사업체 미래한국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두 법인의 등기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가 2018년 무렵 김영선 전 의원과 친분을 맺은 것도 여론조사가 매개가 됐다.
명씨는 임금 체불에 따른 근로기준법 위반과 사기, 공직선거법 위반 등으로 여러차례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다. 그런 그가 2021년 김 전 의원의 소개로 김 여사를 만났고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적 대화’를 나눴다.
“저, 감옥 가나요?”라는 김건희 여사의 말을 전한 명리학자의 증언처럼 윤 대통령 부부의 주술적 행위는 철저히 자신들의 영달과 보신을 위한 것이다. 그들에게 ‘나라의 안위’는 관심 밖인 듯하다. 윤 대통령 지지율이 10%대까지 떨어지자 여권 내에서조차 “정치는 역시 정치인이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원로 정치인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은 최근 “윤 대통령이 김 여사의 어떤 영적인 세계에 포획돼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전근대’에 갇혀 있는 얼치기 무사와 앉은뱅이 인형술사의 인형극을 언제까지 봐야 할까.
'주술사' 김건희의 아주 사적인 욕망과 허영에 관한 고찰
'손바닥 王자'에 어디 국가관이, 애국심이 엿보이는가?
김건희의 국민대학교 박사 논문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 애니타 개발과 시장적용을 중심으로"를 읽어봤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제 처가 쓴 논문은 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디지털 아바타 이야기"라고 말했다. 맞다. 디지털 아바타의 궁합에 관한 이야기다. '애니타' 홍보자료를 그대로 베꼈다는 논란은 논외로 한다 쳐도, 이 논문이 사실상 사업 제안서 수준이라는 평가는 틀리지 않다. 이용자가 본인 사주와 관상을 아바타에 반영해 사람들을 '매칭' 해주는 서비스다. (디지털 아바타 이야기라면서, 주역과 음양오행에 대한 설명을 논문에 장황하게 나열한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다.)
장님 무사와 앉은뱅이 주술사는, 이 논문에 따르면 최고의 매칭에 해당된다. 김건희가 말했다. "우리 남편도 영적인 끼가 있어서 나랑 연결이 된 거야." 영적으로 연결된 장님 무사와 앉은뱅이 주술사, 듣고싶어 하는 이 말을 명태균이 딱 집어 해 줬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사기란 건 '호구들' 몇명의 마음만 뺏으면 된다. 모두를 속일 필요가 없다.
'주술', '점술', '예지력'부터, '무속', '풍수', '미륵'까지 동서고금의 '이교'와 '마법'을 아우르는 김건희의 이 신념들을 어떻게 수식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주술과 무속은 다르고, 풍수와 점술은 다르다고 한다. 온갖 전문가들이 나와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김건희는 사실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밝힌 바 있다. "웬만한 무당이 저 못 봐요. 제가 더 잘 봐요." 스스로를 '메타 무속'의 자리에 위치시킨 이 비범한 인물의 사고 방식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그가 필부필부가 아니고 대통령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막스베버에 의하면 주술(혹은 마법)은 전근대의 상징이다. 베버는 전근대와 근대 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탈주술화(disenchantment)를 제시한다. 제사장이 '신탁'을 받아 통치하는 시대를 벗어나 이성을 통해 선출된(혹은 선별된) 시스템에 의한 합리적 통치의 시대로 넘어온 것이다. 현직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진 김건희의 '마법'이 합리적 통치 시스템에 개입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은, 그래서 우리를 전근대의 시간으로 옮겨 놓는다. 현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대통령 부부를 보면서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
인간은 마법과 주술에 의한 통치 방식을 버렸다. 하지만 마법과 주술은 사라진 게 아니다. 막스 베버도 겪지 못한 2차세계대전은 '합리'와 '이성'이 어떻게 실패하는지에 관해 지독한 자기 반성을 요구했다. 칼 융 같은 학자는 그 틈에서 합리로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세계'가 사회 안에서 어떻게 의미를 갖는지 규명하려 했다. 사회의 영역에서 '탈주술화'된 마법은 개인화하기 시작했다. 사주와 관상, 궁합과 풍수, 현대인이 점집을 찾고 귀인을 찾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 '합리'로만 이뤄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주술이 살아남은 이유는 철저히 그것이 '개인화' 됐기 때문이다. '공적인 자리'에 개입하는 주술은 억압하되 사적인 주술은 널리 장려됐다.
그리하여 현대 사회의 '재주술화'(reenchantment)는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갖는다. 이성의 한계를 보완하는 의미로서 '주술'은 필요하다. 신정 시대를 지나온 종교가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은 이유는 어찌됐든 '종교'의 긍정적인 의미가 사회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주술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세속화된 종교가 폭력과 사랑을 동전의 양면처럼 모두 품고 있는 것처럼.
'이성의 토대 위에 쌓은 근대 국가들은 전쟁과 같은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던 가설이 무너진 건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다. 그래서 인류가 베트남전쟁을 맞닥뜨리자 '재주술화'(reenchantment)의 물결이 시작됐다. 문명을 거부하고 인간 본성을 인정하자는 68혁명과 반전 히피 운동은 그 사례라 볼 수 있겠다. 히피 커뮤니티 세례를 받고 자란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물이 기술과 감성을 접목해 인간 세계를 (좋든 싫든) 새로운 연결의 시대로 끌고 들어온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지금 SNS 시대를 보라. 어디에 합리와 이성이 공존하는 이상향이 존재하는가. SNS는 기술과 이성이 빚어낸 욕망과 허영, 그것을 먹고 자라는 대중 권력의 주술과 마법의 시대, '재주술화'를 상징한다. 전근대와 현대가 뒤섞인 곳이 바로 현재의 세계다.
이런 시대에 김건희와 같은 캐릭터가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전근대와 근대, 주술과 비주술을 오가며 사업을 성공시키고 박사 학위를 딴 그는 '영적인 끼'가 있는 사업가로, 세속의 '사법 권력'을 가진 남편을 만났고, 이 사회에서 추구할 수 있는 궁극의 '개인적 욕망'과 '개인적 허영'을 주술에 녹여냈다.
그 욕망은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 즉 '권력'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검사'로 세속적 스타성을 쟁취한 후 대중들의 지지를 받아 최고 권력을 획득하는 것, 그만큼 가슴 뛰게 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김건희의 문제는 '주술'이 '개인의 욕망' 실현의 도구에서 그쳐버렸다는 점이다. 과거 '주술의 시대'에 제사장(혹은 제사장이자 왕)은 백성의 안위나, 풍년의 기원, 나라의 윤리적 기반 확보 등 '대의'를 위해 주술을 부렸다. 그리고 국가 대사를 결정했다. 세속화하기 전 신정국가들의 제정신 박힌 리더도 '신민'을 앞세우고 신의 뜻을 이 땅에 뿌리내리는 '대의'에 천착했다. 하지만 김건희는 달랐다.
남편이 검사 생활에 적응 못해 로펌행을 택했을 때 김건희가 남편을 다시 검사직으로 돌려보낸 이유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때문이었다. '큰 일'을 하기 위해선 억대 연봉의 로펌보다 박봉의 검사가 더 유리하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명태균은 김건희의 꿈해몽을 하며 그가 간절하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강혜경의 주장에 의하면 "해외 방문할 때 (명태균이) '꿈자리가 좀 안 좋다. 비행기 사고가 날 거다'라고 해서 (김건희가) 일정을 변경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남편이 젊은 여성을 만나 떠나는 꿈은 '대통령이 될 꿈'으로 해석되고, 남편을 솥에 삶아먹는 '윤핵관'으로부터 남편을 구해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국가대사가 아니라 자신과 남편의 안위, 자신의 안위다. 주술의 가장 나쁜 면을 수렴해 권력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그 마음가짐 자체에서 사람들은 질리고 있다. 공적인 마인드의 부재다.
그러니 대통령이 된 후에 뭘 할지, 이른바 '프레지던시'에 대한 아무런 철학이 없었던 것이다. 후보 토론회에서 윤석열이 '손바닥 왕'자를 새겼을 때의 그 마음은, 대통령직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일 뿐이다.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주술'에 다름아니다. 손바닥 왕자에서 애국심과 국가관을 읽어낼 수 있는가? 공적 목적이 결여된 주술은 심지어 전근대의 그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페르소나를 흉내내고 있었으니, 급조된 정책들이 설익은 채로 시장에 나왔다가 철회하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던가. '동해 석유'를 캐자면서 갑자기 '국정 브리핑'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으나 단 한 차례에 그쳤고, 도어스테핑은 '바이든 날리면' 보도에 불만을 품고 없애버렸다. 뜬금없이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해 세계를 누비더니, 119대 19의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흐지부지 마무리한다. "청와대에 가면 뒈진다"는 소름끼치는 소리에 반응하는 것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른바 '급살'에 대한 두려움의 발로이지, 거기 어디에 '국가관'이나, '애국심'이 엿보이는가.
김건희가 차라리 '4대 개혁의 방향'에 대한 점을 치거나, '예지력 있는 귀인'으로부터 '국가 발전 방향'에 대한 얘기를 경청했다면 조금 쯤은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없지 않았을 거다.
이 부부는 자신들의 운명과 욕망을 위해서만 주술에 기댔다. 그들의 '주술'은 이기적 주술이다. '이타적 주술'이 좋다는 건 아니지만, 남을 위해 주술을 부리는 이타적 주술조차도 안 보인다.
대통령 부부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내기 위해 온갖 수를 썼지만, 신은 그를 정해진 운명으로 돌려 놓았다. 오히려 운명에서 벗어나려 시도했던 그 방법이, 그를 정해진 운명의 길로 가도록 한 아이러니를 교훈으로 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