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좀비, 데이비드 차머스, Philosophical zombie, p-zombie, 의식(감각질)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
철학적 좀비
철학적 좀비(Philosophical zombie, p-zombie)란, 심리철학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물리적·화학적·전기적 반응은 일반적인 인간과 완전히 동일하게 작용되지만, 의식(감각질)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이라고 정의된다.
데이비드 차머스가 1990년대에 감각질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한 사고실험이며, 심리철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공포영화에 나오는 좀비와 구별하도록 현상적 좀비(Phenomenal Zombie)라고도 불린다. 주로 성질 이원론(또는 중립 일원론)의 입장에서 물리주의(또는 유물론)의 입장을 공격할 때에 쓰인다. 좀비의 개념을 이용하여 물리주의를 비판하는 이 논증을 좀비 논변(Zombie Argument) 또는 상상가능성 논변(Conceivability Argument)이라고 부른다.
심리철학 및 형이상학의 고전적인 논제. 의식, 보다 구체적으로는 현상적 의식인 감각질에 얽힌 사고실험이다. 역사상 르네 데카르트를 비롯하여 비슷한 발상은 여러 차례 제기된 적 있으나, 구체적으로 "좀비"라는 이름을 쓰는 형태의 현대적인 논증은 데이비드 차머스가 제안했다.
마음에 대한 물리주의를 논박하기 위하여 고안된 연역논증이다. 다만 연역논증의 특성상 설령 본 논증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해석의 여지는 여전히 열려 있다. 그 결론을 부정함으로써 전제들 중 하나 이상을 부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좀비'?
창 밖을 보며 바깥 나무의 싱그러운 푸른 느낌을 경험하고, 초콜릿 바를 씹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오른쪽 어깨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진다고 상상해보자. 내 좀비 쌍둥이는 어떨까? 걔는 나와 물리적으로 동일하고 […] 기능적으로 동일하며 […] 심리적으로 동일한데다가 […] 기능적 의미에선 “의식적”이기까지 하다. 잠에서 깰 수 있고, 내적 상태의 내용을 보고하며, 여러 장소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는 그런 기능 발휘가 진정한 의식적 경험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현상적 느낌이라는게 없다. 좀비가 되는 느낌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차머스, 『의식적 마음(The Conscious Mind)』
차머스 본인이 명시적으로 밝히듯 철학적 좀비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연출되는 "좀비"와는 다르다. 왜냐면 철학적 좀비는 몸이 썩어들어가지도 않고, 말을 못하지도 않으며, (보통 사람이 그렇다는 가정 하에서) 식인을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의상 철학적 좀비는 보통 사람과 원자 단위, 분자 단위로 동일하기에 물리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현대 분자생물학 및 신경과학을 신뢰하는 한, 이처럼 좀비와 사람이 물리적으로 구별불가능하다면 좀비와 사람은 인지, 행동 등에서도 구별될 수 없을 것이다. 즉 좀비는 사람처럼 똑같이 먹고 마시며, 글을 읽고 말을 하고, 울고 웃으며, 찌르면 피가 나는 생물이다.
다만 정의상 좀비는 사람과 달리 감각질을 결여한다. 즉 "날 것인 느낌"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좀비가 나뭇잎을 본다고 해보자.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뭇잎을 볼 때 가시광선은 좀비의 망막에 있는 시세포를 거쳐 전기 신호로 전환되고, 이는 시신경을 통해 대뇌 후두엽 시각피질을 거쳐 뭇 두뇌 영역에서 처리된다. 이를 바탕으로 좀비는 "나뭇잎이 보이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봄이 왔구나'라고 추론을 할 수도 있으며, 나뭇잎을 집으려 손가락을 뻗을 수도 있다.
다만 사람과 달리 좀비는 "초록색"이라는 바로 그 느낌은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물리적, 생리적, 행태적으로 사람과 모두 같지만 바로 그 주관적인 경험만큼만은 불가능한 것이다.
좀비 논증의 옹호자들은 결코 좀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면 현실세계에서 그런게 있다고 볼 이유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다만 관건은 그런 좀비가 존재하는게 가능하냐는 점에 있다.
표준적으로 철학적 좀비 논증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제시된다.
전제 (ㄱ): 철학적 좀비는 사유가능하다.
'둥근 사각형'은 말이 안 되며, 아예 사유불가능한 것 같다. 반면 '황금으로 이루어진 산'은 존재할리 만무하지만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것 같다. 위에서 정의된 '철학적 좀비'는 '둥근 사각형'이 아닌 '황금으로 이루어진 산'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곧 그와 마찬가지로 사유가능한 것 같다.
전제 (ㄴ): 사유가능하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린 늘상 다양한 방식으로 "만약에..."라고 생각하고는 한다. "만약에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총에 맞지 않았더라면..."같은 역사적 가능성, 그리고 "만약에 물리 상수의 값이 달랐더라면..."같은 현실세계의 물리학에선 벗어나는 가능성 등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만약에 황금 산이 있었더라면..."도 있을법한 가능성이다.
반면에 "만약에 둥근 사각형이 있었더라면..."은 아예 불가능한 것 같다. 왜냐면 애초에 위 사례들과 달리 사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역으로 위 사례들처럼 사유가능한 것은 '둥근 사각형'처럼 아예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것과는 구별되며, 곧 어떤 의미에서는 가능한 것임을 시사한다.[3]
소결: 따라서 철학적 좀비는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삼단논법으로 전제(ㄱ) 및 (ㄴ)으로부터 도출된다.
전제 (ㄷ): 물리주의가 옳다면 철학적 좀비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리철학에서 유력한 형태의 물리주의에 따르면 모든 자연 현상은 물리학의 지배를 받는다. 물론 이때 물리학은 현대의 물리학일 필요가 없으며, 아득히 먼 미래의 이상적인 물리학이어도 괜찮다. 많은 철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는 물리주의가 다음과 같은 함축을 갖는다는 점이다.
수반(supervenience) 논제: 만약 두 상황이 물리적으로 완전히 일치한다면, 두 상황은 반드시 심리적으로도 완전히 일치한다.
그 대우는 "두 상황이 심리적으로 다르다면, 물리적으로도 다를 수 밖에 없다"이며,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물리적 차이 없이 심리적 차이가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좀비가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좀비는 물리적으로 사람과 똑같지만, 현상적 의식 혹은 감각질이라는 심리적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즉 물리적 차이가 없이도 심리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수반 논제를 위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물리주의가 옳다면 좀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
결론: 따라서 물리주의는 그르다.
소결과 전제 (ㄷ)으로부터 후건 부정에 의해 도출된다.
반론
데이비드 차머스는 위 논증을 근거로 물리주의를 기각하며, 그 대신 심신 이원론을 받아들인다. 이는 차머스가 한발짝 더 나아가 범심론(panpsychism)을 수용하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연역논증의 특성상 "한 사람의 전건 긍정(modus ponens)은 다른 사람의 후건 부정(modus tollens)"이기도 하므로, 많은 철학자들은 좀비 논변에서 차머스와는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내고는 한다. 철학에서 흔히 벌어지듯, 다음과 같이 추론하는 것.
좀비 논변은 전제 (ㄱ),(ㄴ),(ㄷ)으로부터 이원론 같은 비주류인 형이상학적 입장이 따라나온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원론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설득력이 없는 입장이다. 따라서 좀비 논변은 귀류법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요컨대 좀비 논변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은 전제 (ㄱ),(ㄴ),(ㄷ) 중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원론 같은 문제적인 입장이 튀어나왔다는 점. 따라서 남은 과업은 전제 (ㄱ),(ㄴ),(ㄷ) 가운데 어느게 문제였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전제 (ㄱ) "철학적 좀비는 사유가능하다"를 거부
애초에 물리주의가 옳다면,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존재는 주관적 경험 역시 똑같이 가능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원자의 배치가 같다면 모든 물리적, 화학적 변화도 똑같이 일어날 텐데, 철학적 좀비만 주관적 경험을 못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주관적 경험이라는 것도 뇌에 있는 뉴런 사이의 반응인데, 철학적 좀비 역시 같은 뉴런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사람과 동일하면서 감각질이 결여된 좀비'라는 존재는 위에서 언급된 '둥근 사각형'처럼 말이 안되고 사유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이 의식이 뇌라는 물질 구조에서 발생한다는 입장의 경우, 철학적 좀비는 인간과 물질 구조가 동일하고, 따라서 의식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철학적 좀비라는 개념은 비정합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전제 (ㄴ) "사유가능하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를 거부
전제 (ㄷ) "물리주의가 옳다면 철학적 좀비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를 거부
데이비드 차머스
분석철학
인지과학
알고리즘
확증 편향
‘철학적 좀비’는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가 1990년대에 제기했던 사고실험입니다. 여기서 좀비는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말하고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 등 물리적·화학적 구성과 기능은 인간과 똑같지만 이른바 ‘내적 세계’만을 결여한 존재를 가리킵니다. 애초 이 사고실험은 인간의 생명 활동을 두뇌의 신경과학적 과정으로 해명하려는 ‘물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됐는데, 이후 여러 방면에서 활용되며 다양한 논쟁들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우리가 동물의 꿈을 볼 수 있다면’에는 이 사고실험을 존재의 도덕적 근거를 따져묻는 데 활용한 철학자 찰스 시워트의 사례가 소개됩니다. 만약 철학적 좀비가 될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요? 철학적 좀비가 된다면, 운명처럼 우리를 옥죄고 있는 고통이나 슬픔 등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워트는 바로 그 이유로, 우리 대부분은 철학적 좀비가 되길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대부분 고통과 슬픔일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닻을 내리고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감정과 감각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증거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와 마찬가지인 존재들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공감할 만한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를 세계에 붙잡아주는 주관적이고, 구체적이며, 정서적인, 즉 한마디로 현상적인 고정임을 뼛속 깊이 느낀다.” ‘내적 세계’는 타인이 어쩔 수 없는 각자의 우주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함께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