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대부, 주자(朱子)만 존숭, 이유, 불교 공격, 지식의 비대칭성, 주자 무오류 이념, 교조적 유일사상, 인격 숭배
조선 사대부, 주자(朱子)만 존숭, 이유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강력하게 받아들인 대표적인 나라이다. 조선 초 유학자들이 주희에 열광한 이유 중에는 주희가 불교를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점이 있었다. 주희가 설파한 귀신론의 핵심 중에는 '세상의 모든 것은 설명될 수 있으나, 다만 사람들이 어리석어 그 원리를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귀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의 조화로 여긴다.'는 것이 있다. 즉 도교나 불교의 존립기반인 내세ㆍ영혼ㆍ환생 등 증명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단호히 부정함을 골자로 한다. 이는 정도전의 불씨잡변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선 후기 주자학(朱子學)은 갈수록 더 절대화, 이념화, 극단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오직 주자 1인만을 독존의 지위에 올려 숭배하는 경향까지 나타났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7) 이후 숭명(崇明)의 광열이 거세지면서 주자의 독존적 지위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조선 유학의 극단화 경향을 비판하면 국수주의자들은 “식민사관”이나 “자학사관”이라 반발하지만, 비판과 점검 없는 문명은 쇠퇴를 면할 수 없다. 조선 주자학의 모순과 한계를 비판하는 작업은 자학이 아니라 비판적 자기 점검이다. 주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기 점검 없는 인간은 향상될 수가 없다.
이 세상 모든 사상, 모든 철학, 모든 이념은 인간의 뇌를 떠나선 존재할 수 없다. 조선의 주자학 역시 절대 진리의 현현이 아니라 조선 유생들의 뇌 속에서 전개됐던 사유의 산물일 뿐이었다. 인간의 모든 사유는 오류 가능성이 있다. 역사상 인간은 수많은 특정 사상과 이념을 “절대 진리”라고 단정하고 맹신하는 심각한 착오를 범해 왔다. 그러나 인간은 비판적 사유(critical thinking)의 능력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 비판적 사유란 모든 관념, 이념, 사상, 기억, 감정까지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분석하고 점검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마음의 눈을 뜨고 스스로 마음 상태를 관찰하고, 반성을 통해 어그러진 마음을 바로잡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지금은 전통에 대한 맹목적 옹호가 아니라 전통에 대한 체계적 비판과 점검이 필요한 시기다.
조선 주자학의 극단화 경향
조선 주자학(혹은 성리학)의 역사를 돌아볼 때, 전통 시대 한·중 양국 사이에 존재했던 문화적 비대칭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 남송(南宋) 시대 크게 일어난 주희의 성리학을 받아들였던 중화 문명의 수용자였다. 송·원·명 시기 중화 대륙의 지식인들은 주자학이라는 사상 체계를 창출했고, 한반도의 여말선초 지식인들은 서적을 통해서 그 사상 체계를 수용한 후 토착화했다. 조선 지식인들은 송·원·명 시기 중화 대륙에서 전개된 복잡다기한 지적 생산물 중에서 오직 주자학 하나만을 전면적으로, 열광적으로, 일방적으로 흡수했다. 양국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지식의 비대칭성이 결국 조선에서 주자학의 절대화, 이념화, 극단화를 초래하지 않았을까?
중국사에서 성리학이 제창되어 유포되고 발전하는 과정은 송·원·명 시대 격변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지역에서 실로 다양한 학파들이 생겨나서 서로 경쟁하고, 길항(拮抗)했으며, 때론 격한 정치 투쟁과 이념 대립을 거쳐 갔던 거대한 사상운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은 대규모 국가주의 개혁의 실패를 체험했고, 외적의 침략으로 중원 지방을 상실했고, 조대(朝代)의 몰락과 사직(社稷)의 붕괴를 망연자실 바라봐야 했고, 이민족에 통치받는 굴욕을 당했으며, 인구의 3분의 1이 격감하는 극심한 내전과 역병까지 겪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그 당시 지식인들은 그 시대의 근·현대사에 관한 숱한 저술을 남겼고, 더 좋은 사회·경제적 제도를 짜기 위한 고민을 담은 방대한 상소문을 작성했으며, 다양한 경전 주석을 계속했고, 다채로운 문예 활동을 전개했다. 어떤 내용이든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창출하는 과정은 그만큼 복잡하고 지난한 역사의 실제 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성리학의 발흥 과정이 그러했다.
인구, 영토,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한반도보다 압도적으로 큰 규모의 중국 문명은 그만큼 더 풍부한 지적 창조물을 생산했고, 그중 중요한 부분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선 성리학이라는 범선을 띄운 중국 고전학의 바다를 항해해야 하는데, 그러한 항해는 긴 세월, 많은 노동, 큰 자금이 요구되는 지난한 과정이다. 바로 이 점에 양자 사이에는 문화적 비대칭성이 존재했다. 그 때문에 여말선초의 지식인들은 방대하고 풍부한 중국 사상사의 성과물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자학이라는 사상 체계만을 집중적으로 수용하고 탐구하는 지적 편향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이국의 지식인이 외국에서 장시간에 걸쳐서 고되고 험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거대한 사상운동의 최종 결과물만을 그러한 사상이 형성된 역사적 맥락은 무시하고, 구체적 경험은 사상한 채로 오로지 관념에 의존하여 이해하려 할 때는 지독한 지적 편향성이 나타나기 쉽다. 비단 조선 주자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식인들이 지식 생산의 과정과 맥락은 보지 않고서 외래 사상을 맹목적으로 수용할 때 발생하는 문화 전파의 보편적 문제이다. 그렇게 수용자로서 자족하는 지식인의 고질병은 바로 특정 인물, 특정 사상, 특정 이념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종교적 맹신으로 나타난다. 조선 주자학이 바로 그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교조적 유일사상과 인격 숭배
명·청 교체기 중국의 지식인들은 유가 경전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를 거쳐 주자학의 영향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났다. 성리학의 시대가 가고 청대 고증학(考證學)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반면 조선에선 오히려 주자에 대한 존숭과 추종이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주자 이후에는 드러나지 않은 리(理)가 하나도 없다”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말은 이미 조선에서 주자학이 절대 진리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명(明, 1368~1644) 중엽 이후 지식인들은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적 편향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경전 해석과 실증적 탐구로 나아가는데, 같은 시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오직 주자학에 집착하는 이념적 편향성과 지적 편집증을 보였다.
주자에 관한 존경과 흠모에선 서인-노론계와 소론-남인계의 차이도 없었다. 사문난적으로 몰렸던 윤휴(尹鑴, 1617~1680)나 실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장유(張維, 1587~1638), 이익(李瀷, 1681~1763), 홍대용(1731~1783)처럼 소극적으로나마 주자 일변도의 학풍을 비판한 사례는 있지만, 그러한 비판이 창조적인 사상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조선 지식인의 마음속에는 실존적 인물(人物, character) 주희(朱熹, 1130~1200)가 아니라 절대화된 인격(人格, persona)으로서의 주자만이 군림했다. 주자를 존경하는 만큼 육구연(陸九淵, 1139~1192), 왕수인(王守仁, 1472~1529) 등 주희와 른 주장을 펼친 인물들에 대해선 도가 넘는 혐오와 경계심을 드러냈다.
주자 무오류 이념
“명나라 말기에 유학이 흐려지니 이단이 생겨났다. 양명학이 일어나 주자(朱子)를 깔보고 배척하니, 의리가 어두워지고 풍속이 엉망이 되었다. 그러자 문장과 학술이 가벼워지고 괴상하게 되었다. 자기 이론을 떠드는 자들은 주자와 다른 설을 내놓아 성현(聖賢)을 능멸하고 제멋대로 백성들을 현혹시켰다. 세상의 도리가 망해 가니 화란(禍亂)이 그 틈을 타서 일어났다.”
한원진(1682~1751)이 명나라의 멸망을 분석한 글이다. 세상을 근심하는 선비의 책임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세상을 읽는 방식이다. 이단이 생겨나자 학문과 문장이 뒤를 이어 타락했고, 그 영향으로 사회의 기풍이 흐려져 망국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사회나 국가의 쇠퇴를 경제, 정치 등 사회구조의 변화부터 주목하는 현대인과는 반대이다.
한원진과 같은 유학자들은 어려서부터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 익숙하였다. 이 말은 유학의 경전인 <대학>(大學)에 나오는데, 원래 앞에 네 단계가 더 있다. 그것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이다. ‘격물’에서 ‘평천하’까지를 이른바 <대학>의 팔조목(八條目)이라고 한다. 팔조목은 간단히 말해 지혜를 다하고[격물치지], 마음을 다한 후에[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하라는 의미이다. 이를 보면 유학자들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 잘 보인다. 바른 마음이 바른 실천의 전제인 것이다.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 역시 이 같은 논리가 반영되었다. 상소는 대개 국왕에게 마음을 바로잡으라고 촉구하면서 시작하였다. 이어 학문을 강조하고 구체적인 정책을 논하는 순서를 밟았다. 정쟁과 관련한 상소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의 정책이나 논리를 비판할 때는 그의 마음이 잘못되었고, 학문이 잘못되었다는 점이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정쟁이 치열할수록 상대의 마음에 대한 비판 강도가 심해졌다.
그러니 부작용이 없을 수 없었다. 새 학설이나 정견을 주장하는 이들을 뭉뚱그려 마음, 학술이 잘못된 이들로 연결해버리는 이단의 계보가 쉽게 만들어졌다. 한원진이 살았던 시기를 예로 들어본다면, 선조 때의 정여립이 변해 광해군 대의 정인홍이 되었고, 정인홍이 다시 변해 숙종 대의 윤휴가 되었고, 윤휴가 다시 변해 ‘지금의 누구’가 되었다는 식이었다.
마음과 실천을 연결하는 인식은 유학의 맥락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조선에서 이단의 계보화와 같은 논리 비약으로 나타나게 된 데는 조선의 상황이 또한 작용하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유학은 조선의 재건을 위한 명분을 제공해야 했다. 명나라가 망하자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사대부들은 조선이 홀로 남은 유교 국가라고 여겼다. 따라서 조선은 철저한 유교 국가가 되어야 했다. 유교 문명은 조선을 발판으로 미래에 다시 밝아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학의 역사 안에 존재 의의를 설정한 이 같은 논리는 유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비상한 힘을 발휘하였다. 조선은 동아시아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주자학의 나라로 재건된 것이다.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정파에서 그 작업을 대표한 사람이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이이에서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맥의 계승자였다. 병자호란과 명의 멸망을 겪은 그는 자신이 스승들과는 다른 위치에 서 있음을 절감했다. 조선을 제외한 온 천하가 오랑캐들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자 송시열은 성리학의 집대성자였던 주희(朱熹), 즉 주자의 다른 면모를 강조했다. 주자는 ‘오랑캐 금나라’와 ‘유학국가 남송(南宋)’이 대립하였던 12세기의 중국에서 유학의 가치를 지켜낸 이념가로 강조되었다. 그리고 주자의 역할을 자신의 임무로 설정했다. 주자의 시공간은 세기를 뛰어넘어 17세기 조선의 시공간에 대입되었고, 주자학이 조선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근거가 마련되었다.
한원진의 시세 인식과 논리 구조는 송시열을 그대로 따랐다. 그는 영조 초반에 잠시 기대를 걸었지만 이내 단념하였고, 자신이 처했던 시대 또한 여전히 도리가 어두워져 있다고 파악하였다. 주자학은 여전히 존신되어야 했고, 조금의 오차라도 있다면 도리를 해칠 것이라 생각하였다.
문제는 국제 정세와 국내의 분위기가 차츰 바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변화를 한원진은 명나라 말기에 나타난 위험한 멸망의 조짐처럼 보았다. 그런데 불교나 도교와 같은 유학의 오랜 적들이나, 주자학을 반대한 양명학과 같은 유학의 이단은 드러난 환부에 불과했다. 더 심각한 것은 조선의 주자학자들 사이에서 자라나는 이단의 싹들이었다. 특히 노론 내부에서 불교나 양명학과 흡사한 주장들이 보이는 것은 더욱 심각했다. 낙론에 대한 그의 경계는 그렇게 깊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가장 위험한 내부의 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멸망 뒤 ‘오랑캐’ 세상속 유일한 유학국가 자임조선후기 성리학의 최고 성과 <주자언론동이고> 집필사회구조 변동보다 ‘마음의 타락’에서 망국 원인 찾아멸망 막을 바른 마음, 실천의 교본으로 주자학 정론화그러나 그 신화의 이면엔 권위의 마지막 황혼만 짙어져
주자학의 정론 만들기
조선을 유학의 본산으로 만들자고 합의해도 구체적 방향마저 일치할 수는 없었다. 주자의 저술을 두고서도 치열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송시열은 이러한 논쟁이 주자학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주자의 저술에 나타난 언술, 개념 등의 불일치를 가지런하게 정리하여 누구에게나 통용 가능한 이론으로 제시하면 그만이었다. 논쟁의 여지를 봉쇄하는 교본을 만들자는 것인데,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주자의 저술은 사후 <주자어류>(朱子語類)와 <주자대전>(朱子大全)으로 집대성되었다. 각각 140권, 121권의 방대한 저술이었다. 이 가운데 논리와 개념 등이 모순되거나 불일치하는 경우는 일찍부터 발견되었고 논쟁을 야기했다.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주자 본인의 견해가 달라진 경우도 있었고, <주자어류>나 <주자대전>이 후인의 집필, 편집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건 주자의 텍스트가 비판적으로 음미된다는 것은 우리의 시각에서는 건강한 학문의 기풍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비상한 시기를 살았던 송시열은 그처럼 ‘학자 주자’를 들어 ‘학자 주자’를 공격할 수 있는 논쟁은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주자학은 오류를 용납하지 않는 전일(全一)한 이념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순과 불일치가 확실해 보이는 주자의 언술이나 개념을 정합하여 ‘주자학’을 ‘주자주의’로 완결하고자 했다.
송시열은 이 기획을 착수만 해 놓고 거의 진행하지 못했다. 그 의무는 고스란히 한원진에게 이어졌고 한원진은 평생의 공력을 들여 완성하였다. 한원진이 60살에 탈고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가 그것이었다.
<주자언론동이고>
<주자언론동이고>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최고 성과로 꼽힐 정도의 명저이다. 한원진은 방대한 주자 저술의 불일치한 부분을 모두 음미하고 정합적으로 해설하였다. 내용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본뜻 살피기, 문맥 고려해 보기, 참고·비교하기, 끊어 보기, 대조하기, 폭넓게 보기 등등.
이로써 맥락, 시공간, 저자의 의도, 의리와의 상관관계, 논리성에서 출발한 주자학에 대한 질문들은 제 답을 찾은 듯했다. ‘주자학의 왕국’에 어울리는, 지금 한국 철학계의 자랑거리로도 손색없는 수준 높은 저서였다.
그러나 이 평가는 당대의 맥락을 끊어버린 지금의 시각이다. 애초 이 책의 기획에는 목적과 효과가 분명했다. 한원진은 서문에서 “주자는 공자의 의리를 계승한 공자 이후 최고의 인물이다. (…) 주자의 저술을 제대로 변별하고 본 의도를 이해한다면, 그것이 고금천지에 영원히 통하는 저술임을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주자의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는 송시열의 주자 존숭은, 한원진의 작업을 통해 ‘고금천지에 두루 통하는’ 무오류의 저술로 마감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류 없음’ 즉 무류(無謬)를 지향하는 이념이 끝내 바벨탑으로 흐른 사례를 많이 접했다. 중세의 ‘교황 무류’가 그랬고 현대의 ‘수령 무류’가 또한 그렇다. 그 신화의 이면에는 권위의 마지막 황혼만이 느껴진다. 그 권위를 위협하는 위험한 생각은 아마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 그리고 그로 인해 넓어지는 공존의 지평일 것이다. 정학의 수호자 한원진은 그 지점에 서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내부의 적으로 위험시했던 낙론의 학자들은 얼마나 그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었을까.
주희
송나라의 유학자
문공(文公)
朱熹| Zhu Xi
본명
주희 (朱熹)
자
원회 (元晦)/중회(仲晦)
호
회암 (晦庵)
시호
문 (文)
작위
휘국공 (徽國公)
출생
1130년 10월 18일
사망
1200년 4월 23일 (향년 69세)
출신
남송 휘주(徽州) 무원현(婺源縣)
부친
주송(朱松)
국적
남송
분야
철학 (유학(학문))
활동
성리학 집대성자
주역본의 저술
사서장구집주 저술
중국 남송의 철학자. 세부 분야는 유학, 특히 성리학의 창시자 쯤으로 알려져있다. 사실 창시보다는 집대성자에 가깝지만,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그의 이름을 딴 주자학이라는 말마따나 창시자로 여겨지는 편이다.
본명은 주희(朱熹).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다. 호(號)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등 여러 가지가 있다. 본가인 신안 주씨(新安 朱氏)는 남송 휘주가 본거지이며 주희의 아버지 주송 역시 휘주 출신이다. 그러나 주희는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현재의 중국 복건성 우계(尤溪)에서 출생하였으며 생에 대부분의 시간을 복건에서 보냈다. 19세에 진사가 되었다. 사후 영종에게 문공(文公)이란 시호를 받고 다시 휘국공(徽國公)으로 추봉되었다.
학문
주희는 일생을 바쳐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춘추전국시기의 유교는 소박하고 실천적인 성격을 띠었는데 이것이 후대에 고도로 발달한 불교 형이상학의 영향을 받아 송대에 이르러 이론적으로 심화되었다.
사서(四書)에 모두 주석을 단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보통 읽는 사서(논어, 맹자, 예기의 일부인 대학, 중용)는 주희가 자신의 해석과 종전의 여러 주석을 모두 모아 정리한 버전인 <사서장구집주>이다. 논어와 맹자의 주석서는 '집주'라 하지만 대학과 중용의 주석서는 '장구'라고 한다. 대학과 중용은 본래 텍스트가 장과 절로 분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두 경전을 주해하려면 장절의 분리작업(分章)부터 해야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주희는 특히 대학에는 원문에 손을 대서 자구를 바꾸었고, 심지어 소실된 구절이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는 자신이 글을 지어 넣기도 했다. 제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죽기 며칠 전, 인생 최후의 작업이 대학장구의 한 부분을 수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살아생전 남송 시절에는 탄압을 받기도 했으나 사후 주희의 사상은 학계에서 주류적 위치를 점해, 이후 성리학은 명, 청, 조선, 심지어 에도 막부에서도 관학의 지위를 얻게 된다. 특히 양명학 등이 인기라도 얻은 명, 에도 막부와는 달리 조선은 거의 시대 내내 성리학이 주류 학설로서 사회를 지배하다시피 했다. 한편, 청나라는 공식적으로는 국학을 성리학에 근거했다. 주희의 학문이 처음으로 공인된 원나라와 관학으로 군림한 청나라가 모두 비한족 정권이라는 것은 그의 사상체계 안에 보편성이 내재해있음을 잘 시사해준다. 중화문명을 계승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본성을 잘 실현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 사람이 굳이 한족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희 이전의 유학이 상상한 중화문명의 구성요소에 다양한 문예전통(유려한 문예, 아름다운 서예, 시가, 역사교양, 기타등등)이 포함되어 있어 외래인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장벽을 느꼈던 것과 비교해볼 만하다.
주희는 당대 불교와 도교를 격렬하게 비판했지만 정작 그의 사상은 불교와 도가의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본질적인 원리원칙을 지시하는 글자로 리(理)를 채택한 것도 화엄학의 영향이다. 이를 근거로 보면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참 재미있는 상황에 놓였다고 볼 수도 있다. 성리학을 앞세워 불교를 비판했지만 정작 그 성리학은 유교를 베이스로 하여 불교+도교를 섞은 것이니 말이다.
주희는 성리학의 상징과도 같은 서원 문화를 재정립하여 신사 계층의 형성에 기초를 놓았다. 서원 자체는 당말~북송 대에도 있었지만 11세기 후반에 초심을 잃고 과거 시험을 위한 입시 기관으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북송 말의 당쟁과 정강의 변의 혼란 속에 여러 서원이 버려지고 말았다. 서원의 관학화와 세속화에 거부감을 느낀 주자는 명망이 자자했으나 폐철되었던 백록동 서원을 재건하였고 백록동 게시를 적었다. 이는 후대의 서원들과 16세기 조선의 서원 건립에 큰 영향을 주며 우리가 흔히 아는 서원의 모습과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근대 이후에는 주로 비판을 받는 대상으로 전락하여 비주류 신세를 면치 못한 적도 있었지만, 21세기 들어 다시 이전보단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황 같이 성리학의 계보를 충실히 이어받은 학자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것도 이런 성리학의 재발견 때문이다.
경세론
주자는 무조건적인 복고주의나 통제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토지론만 봐도 그러한데 주자의 토지론이란 간단하게, '부의 불평등을 막고 자발적인 경제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낮은 세율과 공평하게 나뉜 토지가 필수이다, 그렇지만 토지는 적고 사람은 많은 현실에서는 이걸 진짜 하려면 국가 개입이 지나쳐지고, 그럼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일단의 토지 국유화 대신 토지 간 경계를 확실하게 규정하고 토지의 거래와 양도를 일정 정도 허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라는 것이다.
주희는 삼대의 이상 통치를 찬양했지만, 남송의 현실에서 정전제의 복원을 주장하는 과격한 복고주의에 매몰되진 않았다. 그는 남송대의 현실에서 정전제의 복원은 이미 불가능해졌으며, 토지의 재분배를 위해 국가가 무리하게 경제에 개입할 경우 예기치 못한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또한 정전제의 복원을 위해선 농지의 압류와 재분배가 불가피하므로 황무지는 광활하고 인구가 희소했던 서한 초기나 동한의 중흥기가 마지막 기회였다는 주장이다. 또한 그는 맹자의 왕도를 논하면서 철저한 토지 조사에 근거한 공정한 징세와 투명한 재정 지출만이 정전제의 이상에 수렴해가는 유일한 현실적 대안임을 역설하고 있다. 요컨대 그는 남송의 현실에선 부민과의 타협 속에서 점진적 개선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정전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했던 것이다.
한편 상앙의 천맥제와 양염의 양세법에 대한 주희의 비판적 입장과 결부시켜 보면, 그는 과세의 투명성과 형평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국가 주도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듯하다. 주희는 기본적으로 경작지의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공공 부문과 사적 영역이 동시에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토지 겸병과 불법 점유는 판적의 혼돈과 전세의 불균등을 야기했고, 그 결과 불평등의 심화 및 조세 정의의 실패가 발생했다고 보았다. "땅이 없는 빈민이 세금을 내고, 땅을 가진 부빈은 조세를 회피하는" 부조리가 생겨난 것이다. 주희는 이를 모두 경계가 부정한 결과라 판단했다. 주희는 백성의 직업적 안정성, 직능의 분화, 토지 매매의 금지 및 황무지 개간의 장려를 통한 자영 농민 계층의 육성이 농촌 경제의 기초라 생각했다. 그는 고대의 정전제를 모방해 "호구의 숫자에 따른 토지 점유의 원칙" 아래 "일부가 100무의 전지를 점하는" 이른바 '수전지제'의 재도입을 경계법 시행의 기본 전제로 주장한다.
주희는 그러나 당초의 균전제와 같은 토지의 국유화 및 국가 권력에 의한 토지의 균등 재분배 등 파격적 주장의 실효성을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부 관료와 공신들에게 할양되었던 공전의 경우, 법적 재정비를 통해 침탈, 매매 및 대여 등의 불법 행위를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그는 일반 지주 및 자영농 계층의 사적 소유권을 상당 부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토지의 소유권을 취득하는 방법으로 상사, 세습, 혼인, 매매 등의 형식 모두 인정하고 있으며, 토지의 사용과 처분에 있어 대여, 매매, 교환 등을 일정 정도 허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주희가 이 정도의 토지 사유권을 인정하고 있음은 도학의 경세 담론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표면적으로 정전제는 토지의 국유화를 전제하고 있지만, 결국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자영 농민층 육성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정전제의 이상에 따라 토지는 원칙적으로 국가에 귀속되어야 하지만, 사용 및 처분을 포함하는 실질적인 소유권은 결국 백성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면 과격한 복고주의자의 수사를 차용하지만, 종합적으로 판단컨대 주희는 적어도 토지의 소유와 분배의 문제에 관해선 오늘날로 치면 온건한 중도 좌파 정도의 입장을 견지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외에 번잡하고 과도한 예법을 실정에 맞게 간소화하고, 기존의 미신에 가까운 천인감응 사상을 타파한 것도 큰 공로라 할 수 있다.
저작
주자어류
모두 140권 1만 4200여 조목으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엄밀히 말하면 주희가 쓴 것은 아니고 주희의 강의를 제자들이 받아적은 필기노트를 종합해서 주제별로 분류한 것이다.
약 50% 정도가 한국어 혹은 일본어로 번역된 듯하다
회암집
주희의 문집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 문공집(文公集) 등 여러 이명이 있으나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서양으로 따지면 전집같은 것으로, 그 사람의 글을 모두 모은 책이라는 뜻이다.
전통적인 문집의 체제에 따라 여러 장르의 운문과 산문을 모았지만 단독저서(경서에 대한 주석서 등등)는 빠져있다. 또한 주희 제자의 노트필기이지 주희 본인의 글이라고 할 수 없는 주자어류 또한 빠졌다.
근사록
주자와 여동래가 집필한 책으로, 주돈이 등 전시대의 여러 성리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한 후 이에 대해 논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주자 공인 성리학 입문서이다.
사서집주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사서에 주석을 단 것으로, 성리학과 그것을 따르는 조선에서는 표준적인 주석서였고 학문적 의의도 크다.
사서혹문+논맹정의
사서집주와는 별개로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사서를 해설한 저서이다. 논맹정의는 논맹혹문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논어와 맹자에 대한 모든 주석들을 총망라한 저서이다.
주역본의, 역학계몽
주역에 대한 주석서로, 우리나라에는 정자의 주역전의가 주로 쓰여서 다소 콩라인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많이 쓰였다. 역학계몽은 역학 전반에 대한 입문서로, 주역본의 이전에 역학에 입문하는 초학자를 위해 쓴 저서이다.
시집전
시경에 대한 주석서. 다른 주석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표본 시경 주석서로 쓰였다. 담헌 홍대용이 청나라에 갔다가 청나라 유학자들이 시집전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말을 듣고 크나큰 깨달음을 얻게 해준 저서이기도 하다.
주자가례, 의례경전통해
본래 주자가례는 의례경전통해의 한 편으로, 의례경전통해는 유교 경전 의례를 주석한 책이다. 주자 생전에 완성되지 못하고 제자들이 완성했다.
태극도설해, 태극본의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해설한 책으로, 조선시대 태극론 이해에 핵심적인 책이었다.
통서주
주돈이의 저서 통서를 해설한 책.
연평답문
주자와 스승 연평 이동과 학문에 대해 토론한 편지를 모은 것.
주자대전(성리대전)
생전에 쓴 책은 아니고 명나라 시대에 간행된 책으로, 주자를 비롯해 모든 성리학의 학설과 내용, 주장을 모조리 담은 성리학 저서의 결정체이다. 조선에도 수용되어 큰 영향을 미쳤다.
소학, 동몽수지
둘다 어린이용 교재이자 수신서.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소학이 압도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주자전서(朱子全書)
상해고적출판사와 안휘교육출판사가 2002년에 함께 내놓은 컴필레이션으로, 주희와 관련된 텍스트의 완성판 총집편 같은 서적이다. 현재 업계에서 주희의 글을 인용할 적에 표준으로 사용한다. 현대 하드커버 장정으로 모두 27권이고 수록 저작은 다음과 같다.
1、 주역본의, 역학계몽, 시집전
2—5、의례경전통해
6、사서장구집주, 사서혹문
7、논맹정의
8—11、자치통감강목
12、팔조명신언행록, 이락연원록
13、소희주현석전의도, 태극도설해, 통서주, 서명해, 근사록, 연평답문, 동몽수지, 소학, 음부경주주역참동계고이
14—18、주자어류
19、초사집주, 창려선생집고이
20—25、회암선생주문공문집(이게 회암집이다)
26、주자일문집록
27、부록
명언
공부에 대한 명언도 많이 했다.
精神一到 何事不成(정신일도 하사불성) - 정신을 하나로 모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소년이로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 -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한순간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고려 고종대 주희의 증손자인 주잠(朱潛)이 몽골 제국의 침략 위기로 어지러운 남송을 떠나 고려로 귀화해 주희를 시조로 삼고 신안 주씨의 중시조가 되면서 주희의 후손은 대한민국에도 남아있다. 주(성씨) 문서 참고.
참고로 고려 열전에 나오는 주열은 주잠의 아들인 주여경의 아들이 아니라 주경여의 아들이다.
현대중국의 교육과정에서는 소학교에서 주희의 작품 2개를 배운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 영역인 윤리와 사상에서 으레 킬러 파트로 출제된다. 동아시아사에서도 어쩌다 한 번 선지나 지문으로 어렵게 나온다카더라.
유교 도통론을 정립한 사람이다. 도통은 유교의 도가 전승된 계보인데 요-순-우-탕-문왕-무왕-주공으로 이어진다. 주공 이후로 끊어진 성인의 계보를 이은 게 공자, 공자의 후계자 맹자, 맹자 이후 다시 오래도록 끊어진 계보를 이은 것이 북송의 주돈이, 주돈이의 제자 정호와 정이, 그리고 정호와 정이의 4전제자가 주희가 된다.
보통 삼국지연의 매니아들은 유비의 촉한(蜀)을 정통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주희 역시 촉한 정통론(蜀漢正統論)을 지지했다. 이전까지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가 조위(魏)를 정통으로 보았고,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는 모두 정통으로 보지 않는 무통설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주희가 자치통감을 보완한 자치통감강목을 펴내면서 촉한 정통론을 주장한 이후 이쪽에 무게가 실렸고, 지금의 삼국지연의에서 볼 수 있는 국가상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정립되었다. 다만 촉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이미 송나라 이전부터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딱히 주희 혼자서 주장해 이렇게 대세가 된 것은 아니다. 이미 북송 연간부터 관우만 해도 공적, 사적인 차원에서 신으로 숭배받았다. 촉한 정통론 역시 상기했듯 동진 시대부터 정치적인 이유기는 했지만 이미 등장해 있었다.
주희가 촉한 정통론을 내세운건 본인이 제갈량의 광팬이었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제갈량에 대해 "왕을 보좌할 만한 뛰어난 재주가 있고 유학자의 기상이 있으니, 이윤과 강태공에 비길 만하고 관중과 악의보다 낫도다."라는 평을 할 정도로 제갈량을 높이 평가했다. 아예 와룡암이라는 암자까지 지어서 기거했을 정도고, 심지어는 "맹자 이후 인물로는 오로지 장량과 제갈량, 이 두 사람만 있었을 뿐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신릉군 빨던 유방이 생각난다
대학자라는 인상과 별개로, 비구니 둘을 유혹해 첩으로 삼았다는 의혹이 있다. 그러나 해당 의혹은 주희가 반도학파에게 위당으로 몰리고 있던 시기에 나온 것으로, 반도학파는 주희를 탄핵하기 위해서 이 의혹을 제기했다. 그래서 이 의혹이 사실인지 아니면 반도학파의 루머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주희를 위학으로 몰기 위해 이 의혹을 제기한 심계조는 정작 이 의혹을 핵심적인 죄로 언급하지도 않았다. 수징난은 주희가 지방관 시절 비구니를 환속시킨 일이 있는데, 이 일이 와전되어 반도학파에게 이용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마지막으로 주희가 이 사건을 자신이 한 일로 인정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깐깐한 성격 때문인지 정적이 많았고 특히 자신과 학풍이 다른 당중우와 대립하여 1182년에 6차례에 걸쳐 당중우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탄핵 내용 중에 당중우가 기녀 엄예와 놀아나 음행을 일삼았다는 내용도 있는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엄예를 체포해 1개월 넘게 옥사에 가둔 후 태장과 협곤 등 가혹한 고문을 가하기도 했으나 결국 증거를 얻는데는 실패해 이 사건 자체가 주희 인생의 흑역사가 되어버렸다.
필생의 논적인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1139 ~ 1193)이 사망하자, 그를 조문하고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한 일도 있다.
"애석하다. 나의 고자(告子)가 죽었다."
여기서 고자는 맹자의 논적으로, 성무선악설을 주장한 그 사람 맞다. 저 발언은 《주자어류(朱子語類)》의 한 대목인데, 이 충격적인 한 마디 이후로 어떤 부연설명도 없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는 해석하기 나름. 《맹자》에서 맹자는 고자와 논쟁을 벌이면서 "천하 사람들을 선동하여 인의(仁義)를 깨부수는 것은 바로 선생의 말씀일 것이오!"하고 고자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고자는 일찍이 나보다 먼저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이르렀다."하며 그를 인정하기도 했다. 즉, 주자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일생일대의 라이벌의 죽음을 허탈한 마음으로 한탄한 것일 수도 있고, 육구연이 끝내 자기 학설에 동의 안 하고 이단으로서 죽었음을 비아냥댄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