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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원
張濟元 | Chang Je-won
출생
1967년 4월 13일
부산직할시 동래구
(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망
2025년 3월 31일 (향년 57세)
서울특별시 강동구
본관
인동 장씨 상장군계
대한민국의 교육자, 정치인. 18·20·21대 국회의원.
정치 입문 이래 친이에 속하였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른바 윤석열계로 통하였으며, 윤석열 정부 초반기 친윤 세력의 핵심이었다. 3선 국회의원, 제21대 국회 후반기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 제21대 국회 후반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2023년 12월 12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치에서 내려왔다. 2024년, 국립한국해양대학교 해양행정학과 석좌교수로 부임했다.
2025년, 과거 부산디지털대학교 부총장 시절인 2015년에 여비서를 준강간한 의혹을 받아 여비서로부터 고소를 당했고, JTBC에서 여비서가 촬영한 영상의 단독 보도가 나온 당일인 3월 31일 서울 강동구의 오피스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관련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1967년 4월 13일, 부산직할시에서 사학재벌 정치인 아버지 민석(民石) 장성만(張聖萬)과 어머니 박동순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동래초등학교, 여의도중학교와 여의도고등학교(11회), 중앙대학교 정경대학 신문방송학과(현 중앙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를 졸업하고 2001년 6월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에서 신문 전공으로 언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중앙대학교 졸업 후 1993년 8월 2일 공군 방위병으로 입대하여 국군기무부대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하였고, 1995년 1월 11일 상병으로 소집해제되어 병역을 마쳤다. 이후 가문 소유의 동서학원 소속 대학인 경남정보대학 수석부학장, 부산디지털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였다.
정치 활동
부친 민석(民石) 장성만(張聖萬)도 재선 대한민국 국회의원이고 국회부의장까지 지냈지만, 정계 입문이나 지금 같은 정치적 입지 확보만큼은 적어도 아버지의 후광이 아닌 장제원 본인만의 힘으로 스스로 일군 것이었다. 아버지가 국회의원에 공천받은 것은 순수하게 전두환의 힘 덕분이었으며, 전두환이 물러나자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줄줄이 낙선하여 정계를 은퇴하였다. 그나마 11대 총선마저도 무투표 당선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실질적으로 표를 받고 당선된 건 12대 총선 단 한 번뿐이다.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고 가족이 보유한 사학재단의 본거지도 부산광역시인데다 현재 본인이 맡고 있는 지역구도 부산광역시 사상구인데, 본인이 사용하는 말투를 보면 정작 평소 대화 중에는 부산 사투리를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그래도 부산 사람이라고 말투에서 사투리 억양이 약하게 묻어나며, 동시대 서울토박이들과는 억양이 미묘하게 다르다. 부산시민 앞에서 연설하다보니 감춰놓은 부산 억양 폭발하는 영상 태어나서 초등학교 때까지만 부산에서 자랐고, 부친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중학교 때부터는 줄곧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올라와 생활했다.
장제원도끼눈
성격이 다혈질이라 쉽게 흥분하며 언성이 높아질 때 특유의 독기어린 표정을 지을 때가 많다. 미소짓거나 웃을 때도 입꼬리가 잘 올라가지 않는다. 이는 아들도 해당되는 일이다. 특유의 턱은 父 장성만과 아들 노엘을 보아 유전인 듯.
출마하지 못했던 19대 총선을 제외하고는 부산 사상구에서 3선에 성공했다. 장제원 개인에 대한 논란과 가정사와는 별개로 지역구 관리는 굉장히 잘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대한민국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의 크롱을 닮았다는 얘기가 있다.
언변이 좋다. 그래서 19대 총선 때 공천에서 탈락한 뒤 종편에서 잠시 정치 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했고, 썰전에 출연했을 당시에도 거침없는 입담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2017년 2월 2일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와 통화하다가 통화가 2번이나 끊기는 방송사고가 났다.
안경 착용 전후 인상이 정말 많이 다르다. 18대에는 안경을 쓰다 벗다 했는데, 안경 쓴 것이 더 나아 보이는지 이제는 항상 안경을 착용한다.
공석에서의 강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의외로 아들에게는 그리 무섭지는 않은 듯하다. 아들이 고등래퍼에 출연했을 당시 사생활 논란이 터졌을 때도 혼내지 않고 대화로 풀었다고 하며, 음주운전으로 자숙하는 중에도 아내 생일파티에 초대하고 이때 아들이 찍어준 본인과 본인 아내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게시하며 ‘고맙게도 용준이가 와줬다’라는 글을 올렸다. 노엘 또한 인스타에서 장제원에게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등 서로의 관계는 원만한 듯하다. 노엘이 인터뷰에서 말하길 아빠와 10년동안 남으로 살아왔다고. 그러다가 사생활 논란이 터지고 아빠와 대화를 하고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한다.
노래 실력이 상당하다.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와 ‘남자의 인생’이라는 노래를 불러 준수한 노래 실력을 보여줬다.
아들이 일으킨 논란에 비해서는 신기할 정도로 정치인 경력에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일단 지역구에서 평가가 상당히 좋은 것으로 보이며, 본인이 주도하는 산악회 모임에서 전세 버스를 92대나 빌릴 정도로 세력이 크다. 무엇보다 윤핵관의 대표격으로 실세가 된 영향이 컸다고 볼수 있다. 언제부턴가 본인도 정말 큰 일이 아니고서야 아들이 일으킨 논란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웹툰 쇼미더 럭키짱에서 자신과 아들이 사고만 치는 주인공의 아버지로 같이 풍자+패러디됐다.
자동차 및 경찰과 악연이 깊다. 2022년 6월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 460화 이상평론편에서 피해자가 장제원으로 추정되는 1990년의 '대우 르망 자동차 도난 사건'이 소개되었다. 경찰이 도난차량을 추격하다 서울 도심에서 총격전까지 벌어졌던 사건인데, 이 차를 도난당한 사람이 당시 중앙대 4학년이던 24세의 장제원이었다는 것. 방송에서는 1990년 당시 대학생이 차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며,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자신의 첫 애마가 크게 파손된 이 사건 때부터 그가 경찰에 원한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이후 경찰을 향해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등의 비난을 쏟아내는데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 아니냐고 자녀의 음주운전, 경찰폭행 사건을 빗대며 조롱하기도 했다. 당시 사건 기사 외 여러 거친 발언으로 일부 비판을 받았으나 댓글을 안 보므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보좌진들이 밝혔다.
정치인 가문 출신으로, 다이아수저다. 장제원 의원 집안의 재산은 1500억원~2000억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과도 친분이 깊다. 아이러니 한 것은 본인의 수행기사가 밝히길 현대차가 아닌 BMW, 렉서스를 탄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되었듯 아들 논란에도 불구하고 부자 사이는 좋았다. 아들 노엘이 초등학생일 때까지만 해도 장제원이 노엘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자주 올렸다. 지금도 사진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어서 장제원의 페이스북에 가면 노엘의 어린시절 사진을 꽤 많이 볼 수 있다. 어린시절 사진을 보면 평범하게 화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장제원의 아들에 대한 애정은 장제원 성범죄의 증거가 되었다. 2025년 장제원 성폭행 혐의 피소 당시 피해자 측이 증거로 공개한 영상을 보면 성폭행을 당하고 의식을 차린 직후 호텔방을 촬영한 영상에서 장제원의 스마트폰도 찍었는데, 당시 장제원 폰의 배경화면이 아들 노엘이었다
학교법인 동서학원
부산광역시 사상구에서 동서대학교, 경남정보대학교, 부산디지털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학교법인으로 사상구 내에서는 이 재단을 설립한 장성만 일가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한다.
장성만
張聖萬 | Chang Sŏng-man
출생
1932년 11월 2일
경상남도 부산부
(現 부산광역시 서구)
사망
2015년 12월 6일 (향년 83세)
본관
인동 장씨 상장군계
호
민석(民石)
재임기간
제12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1987년 5월 13일 ~ 1988년 5월 29일
대한민국의 정치인. 제12대 국회부의장.
1932년 11월 2일 경상남도 부산부(현 부산광역시 서구)에서 태어났다. 부산공업고등학교, 일본 오사카 성서신학교, 미국 신시내티 대학교 신학대학원 등을 졸업하고 목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동서학원 이사장으로 부산실업전문학교(현 경남정보대학교), 동서공과대학(현 동서대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정치 활동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그런데 한 선거구당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하에서 북구 선거구 출마자가 그를 제외하면 민주한국당 신상우 후보뿐이라 무투표 당선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민주당 문정수 후보와 당선되었다. 당시 부산직할시의 6개 선거구에 출마한 민주정의당 후보 중 그만 유일하게 1등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민주정의당 정책위의장에 임명되었다.
1987년 제12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 직위에 재임하였다. 엘리자베스 2세 방한의 차담회에 참석하는 등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이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간 견해 차이 등으로 국회부의장 후보를 내지 않기로 하면서 혼자서 국회 부의장직을 수행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지난 선거에서 동반 당선된 통일민주당 문정수 후보에게 패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자유당 문정수 의원에게 패하였다.
사망
2015년 12월 6일 오전 10시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항년 83세.
장제원 前의원 오피스텔서 숨진 채 발견... 유서 나와
경찰 "타살 혐의점 없다"
서울 강동경찰서는 지난 31일 밤 서울 강동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장 전 의원이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이날 오후 11시 40분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현장에서 장 전 의원의 유서도 함께 발견했다.
경찰 관계자는 “타살 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며 “구체적인 사망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고 했다.
장 전 의원은 10년 전 성폭력 혐의로 고소돼 경찰 조사를 받고 있었다.
장 전 의원을 고소한 전 비서 A씨 측은 이날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열어 고소 경위와 관련 자료 등을 밝힐 예정이었다.
18·20·21대 국회의원을 지낸 장 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시절 비서실장을 지내는 등 친윤계 핵심으로 꼽혔던 정치인이다. 그는 지난 22대 총선엔 불출마했다.